[비건(지향)일기 시즌4]

개고기! 아아 개고기!

시윤이름

 

 채식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잡식인 인간이 육류를 섭취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다른 가축에 비해 더 교감한다, 덜 교감한다를 두고 한국의 개고기를 먹는 문화를 야만적으로 보기까지 하는 세계적인 시선도 나는 우습게 느껴졌다.

 

 오히려 공장식 도축에 극도로 반대하는 나였기에 육류를 소비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고기를 위해' 키우고 팔아대는, 상품 가치가 없는 동물들을 처분하고 특정 부위가 커지는 호르몬제를 맞추며 몇십 년의 삶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몇 달 안에 처분하는 모든 시스템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고기로서만 존재하여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사육환경과 그들의 삶은, 온갖 고기와 내장을 '맛있게' 소비하는 나에게도 정말 처참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갈비탕을 먹어야 힘이 나지', '몸보신해야겠네!', '이런 건 먹어 줘야 해!'하는, 어렸을 때 몸에 좋다고 한 번쯤 개고기를 속아 먹어본 적 있는 전형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으로서 단순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도축시스템을 아는 것은 당시 나의 육식 소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다. '와 그런데 고기는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라는 웃기고 슬픈 생각이 종종 머릿속에 드는 정도였달까?

 

 그래서 항상 꿈꿨다. 나는 언젠가 내 농장에서 자급자족용 야채/채소를 기르고 오리 몇 마리와 닭 몇 마리, 토끼를 기르며 가끔 자연스럽게 낳는 알을 먹고 경사가 있는 날은 토끼를 먹으며 살 것이라는 꿈이 있었다. 잡식성 동물로 태어난 인간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삶을 사는 동물을 가끔은 잡아먹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소들을 생각할 때 강아지를 식용하는 게 어떻게 더 비인간적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 나만의 기준은, 개를 패 죽이는 게 아니라면 쇠고기나 개고기나 소비하는 사람에게 같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개를 식용하기 위해 도축할 때 지나치게 비인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쇠고기나 돼지고기 많은 사람이 소비하는 '그 육식'과 같은 카테고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성인이 된 나는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개고기 식당을 찾았다.

 

 '그렇게 맛있나?' 와 '정말로 때려죽일까?'의 질문을 가지고 식당에 들어섰다. 먼저 뜨거운 탕으로 나온 고기는 오리고기와 닭고기가 다른 것처럼 먹어왔던 고기와 조금 다른 식감을 가지고 있었다. 딱히 '맛있다!'라는 느낌보다는 색달랐던 식감이 기억에 남는다. 후식으로 잣이 들어간 어떤 차를 내려 주셨다. '사장님 혹시 개고기를 위해 강아지를 때려죽이나요?' 질문에, 사장님은 '아가씨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순간 섬광처럼 느꼈던 놀람과 울컥했던 기분을 기억한다. 그 이후 개고기는 소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경험은 아마 내가 채식주의자가 되기까지의 긴 여정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육식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오 신념이 굉장하군'이라는 마음과 '저 사람들의 신념에 정말로 오류가 없는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있었다.

 

 어른이 되면서, 성장 과정에서 좋다고 교육받은 많은 것들이 '진짜일까?'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좋다고 옳다고 하는 많은 것들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신념이나 문화적 배경에 저항하기도 하며 학습하고 수용하기도 한다. 이런 끊임없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으며 '자신'의 삶을 만들고 가꾸는 방법을 터득한다. 인생을 꿈으로 채우고 꿈을 현실로 만들라는 말처럼 내가 꿈꾸며 구축한 나의 세상과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세상의 갭/괴리는 변화를 통해 현실이 되기도 하고 꿈으로 남기도 한다.

 

 내가 채식을 접하며, 채식주의자들을 보며 느꼈던 것들, 궁금했던 것들은 사실 내 안에서 궁금했던 많은 것들, 해결되지 않았던 많은 것들과 닮았었다. '먹으라고 있는 건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부터 '내가 이렇게 하는 게 효과가 있겠어?', '내가 한다고 뭐가 바뀌나'라는 크고 작은 질문들, 일단 내 자신이 바뀐다는 것을 보지 못했던 시절의 나는, '내 세상'에서 자신의 변화에 가치를 두지 못했던 그때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가 싶다. 그리고 그런 나의 태도는 당시 채식주의자를 거의 이상적이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로 바라보게 했던 것 같다.

 

 지금 나는 '내가 잡식성으로 태어나 먹어 온 건데'보다 '내가 정말 필요에 의해 고기를 먹는 건가?' 질문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 내가 자라온 방식을 의심 없이 신봉하기보단 탐구하고 소통하고 질문하며 나의 삶을 천천히 내가 원하는 크고 작은 실천들로 채울 수 있었다.

 같은 육식이 다르게 판단되는 게 부당하다던 생각은, '육식을 어떻게 하면 정당화할 수 있을까?'로 발전했고 '필요에 의해 육식 하고 있었나?'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현재 채식을 하는 나에겐 역사로 남았다.

 

 1년의 페스코 생활을 마치고 채식을 한 지 5개월이 넘어간다. 1년 페스코 생활을 하며 어렵게 느껴졌던 식단은 완전한 채식을 하면서 오히려 수월해졌다.

내가 조심해야 했던 주위의 많은 것들은, 점점 주위에서의 나를 향한 배려와 관심으로 바뀌었다.

 

 내가 오늘 행동하면 그것은 이미 변화다. 내가 의심하는 모든 것들과 더 알고자 하는 그 마음 그 모든 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야유가 있든 존경이 따르든 주목 받든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의 지침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낯선' 선택을 유지한다. 그리고 나를 변화시키고 나의 주변을 변화시킨다. 내가 그 변화의 시작이며 그 변화 자체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