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영상] 박상진의사 순국100주년 기념특강 : 2강 – 1910년대 국내최대 비밀단체 ‘광복회와 총사령 박상진’

지역

[영상] 박상진의사 순국100주년 기념특강 : 2강 – 1910년대 국내최대 비밀단체 ‘광복회와 총사령 박상진’

admin | 화, 2021/08/17- 04:41

#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특강 
2강 – 1910년대 국내최대 비밀단체 ‘광복회와 총사령 박상진’
강사 : 충남대 #이성우 교수

주최 : #근현대사기념관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 #강북구

#박상진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특강
1강 –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 의열투쟁의 선구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삶과 사상
강사 : #박중훈 (박상진 의사 증손)

주최 : #근현대사기념관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 #강북구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안익태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원웅 광복회장이 15일 광복절 축사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작곡가 안익태를 꼬집어 “민족 반역자”라고 지칭하면서 이들에 관한 친일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이날 축사에서 최근 광복회가 독일 정부로부터 안익태의 친일ㆍ친(親)나치 관련 자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회를 지휘하는 영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민족 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라며 작심 비판했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에 이어 친나치 행적은 최근 들어 새롭게 제기된 논란이다. 지난해 책 ‘안익태 케이스’를 낸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서 찾은 자료를 바탕으로 안익태의 친나치 행적을 고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안익태는 1942년 9월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지휘했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 직후부터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를 상징하는 식민지 유형의 하나다. 이때 연주된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가 바로 애국가다.

이 교수는 이어 일본 정보기관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가 안익태의 실질적 후견인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 1943년 안익태가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독일로부터 발부받은 제국 음악원 회원증에 ‘정치적으로 아무 하자 없음’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음에 주목했다. 나치가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인증한 셈으로, 안익태의 유럽 활동이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와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고 홍보하는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안익태는 일왕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드는 등 친일 이력이 드라나면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됐다. 이에 대한 반발도 있다. 김형석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안익태 선생의 친일은 근거 없는 억지”라며 “만주환상곡 작곡과 지휘는 사실이었지만 당시 일제하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제국 음악원 회원증도 독일에서 지휘자 겸 작곡가로 일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15일 광복절 기념축사 발언을 두고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뉴시스

김원웅 회장은 축사에서 “이승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폭력적으로 해체시키고 친일파와 결탁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독부 이승만 평전’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17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은 너무 많이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반민특위를 습격해서 없애버린 것”이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해방된 국가치고 반민족 행위자를 처리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김 회장의 발언을 일부 지지했다.

김 전 관장은 그러면서 “진보 보수, 좌파 우파 논리를 떠나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3ㆍ1운동과 4ㆍ19 민주정신을 잇는다고 명시돼 있는데, 이를 국론 분열이라고 몰고 가는 일부 정치권의 인식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라며 김 회장의 발언을 비판한 일부 야당 인사들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러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친일파와 ‘결탁했다’는 김 회장의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이 일부 친일파를 기용한 것은 사실이나 친일파와 결탁해 반민특위를 무력화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친일 청산을 잘 했다는 주장도 있다. 보수 역사학자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두루 기용해야 했기 때문에 행정 분야에 친일파가 포함되는 것은 불가피했다”며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상황에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려 했고, 불가피하게 죄악이 심한 사람들만 처벌하는 온건한 정책을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회장의 발언을 두고 정치권과 학계에서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진중권 전 교수는 16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백선엽처럼 친일을 했으나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 김원봉처럼 독립운동을 했으나 북한정권 출범에 도움을 준 이들처럼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명과 암의 이중 규정을 받는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역사와 보훈의 문제를 소모적인 이념논쟁으로 만드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논의는 역사학계에 맡겨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 출신에 광주학살의 원흉들에게 부역한 전력이 있는 분이 어떻게 ‘광복회장’을 할 수가 있나”라며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친일파들은 물론이고 군부독재, 학살정권의 부역자들도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고 김 회장을 공격하기도 했다.

한소범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18> 한국일보 

☞기사원문: 김원웅 광복회장 발언에 재조명되는 “친일 이승만, 친나치 안익태”

※관련기사 

☞경향신문: [여적]애국가 논란

☞서울의소리: 김원웅 광복회장 광복절 기념사 동영상

화, 2020/08/18- 20:08
0
0

[오디오북] 달과 소년병

지난 7월 23일은 분단 현실을 녹여낸 명작 『광장』의 작가 최인훈 선생(1936~2018년)의 2주기였다. 기일을 며칠 앞둔 7월 8일 선생의 아들 음악 칼럼니스트 최윤구 씨 부부와 연극배우 박정자 씨가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했다. 2주기를 맞아 최인훈의 문학세계를 널리 알리고자 단편 「달과 소년병」을 오디오북으로 만들기로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독립전쟁 100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독립군을 소재로 한 이번 오디오북 제작은 더욱 의미가 깊다. 박정자 씨는 최인훈의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 주연을 맡은 이래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으며 재능기부로 흔쾌히 낭독을 맡아 주었다. 녹음은 민족문제연구소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한편 문학과지성사는 7월 23일 「달과 소년병」(1983)을 표제작으로, 등단작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1959)와 「구운몽」(1962) 등 9편의 중단편을 엮어 ‘문지작가선’ 1권으로 펴냈다.


※관련기사

☞뉴시스: 문지작가선 시리즈 첫 소설, 최인훈 ‘달과 소년병’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문학과지성사가 새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을 펴냈다. 한국 문학의 중추로서 의미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저자 : 최인훈 ㅣ분야 : 문학 ㅣ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l 출간일 : 2019-07-23 l 판형 / 정가 : 130*207mm (597p) / 17,000원

가장 먼저 소설가 최인훈(1936~2018)이 독자를 만난다. 1주기(7월23일)를 맞아 중단편선 ‘달과 소년병’이 나왔다.

등단작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1959)와 ‘최인훈 전집’에 미수록됐던 표제작 ‘달과 소년병'(1983),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온 중편 ‘구운몽'(1962), 작가 개인 이야기가 담긴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연작 제1장'(1970) 등 9편이 실렸다.

“오후 망보기를 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진지를 다 끝내고 쉬고 있다. 야산에 자란 잡목 그늘에 누워도 있고, 천막 안에도 있고, 서너 명이 학교 쪽으로 걸어간다. 소년은 긴장한다. 왜병들이 울타리도 없는 운동장에 들어가서 선다. 구경을 한다. 그러더니 줄다리기에 두 편으로 갈라서 끼어들어 어울린다. 흰 이가 드러나는 왜병들과 아이들 영차영차 소리, 사람들이 와르르 흔들린다. 망원경을 잡은 손이 제 손 같지 않게 흔들리는 것이다.”(‘달과 소년병’ 중)

“여자들한테 그런 멋대로의 풀이를 붙인다는 건 남자들한테도 안 좋아요. 이쪽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변히 굴겠어요. 제가 말씀해드리지요. 여자는 남자와 꼭 같이 사람입니다.”(‘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중) 597쪽, 1만7000원

화, 2020/08/18- 19:05
1
0

[광복절 75주년 기획 – 공유지 위에 선 친일파 ③] 주요한, 조택원, 김기수, 함화진

김성수, 서정주, 조택원, 김기수, 함화진, 주요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및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동상 및 시비, 기념관 등이 공유지에 수십 년째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광복 75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현장에서 이를 직접 확인했다. [편집자말]

▲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 위치한 주요한 시비와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 친일과 항일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기념물이 같은 공간에 세워져 있다. ⓒ 김종훈

“한글을 지킨 분들을 위해 세워진 기념탑이야.”

5일 오후 초등학교 자녀들과 함께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옆 세종로공원을 찾은 김은혜(43)씨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희생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는 기념탑 앞쪽에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투쟁기’라고 명명된 안내문을 자세히 살핀 뒤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한글을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면서 “제대로 알고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라고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민족말살 정책에 따라 한글연구를 한 학자들이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는 이유로 탄압받고 투옥된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조선어학회 한글수호 기념탑’에서 불과 20m 떨어진 장소에는 전혀 다른 기념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국가공인 친일파 주요한의 시 <빗소리>가 새겨진 시비다.

주요한은 일제강점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문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전향했고, 이후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일제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 전선에 보낼 징병과 학병을 뽑기 위한 연설과 강연도 매진했다. 무엇보다 조선문인협회 간사이자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활동하며 최전선에서 일본어 보급운동에 앞장섰다.

주요한의 시비 뒤쪽에는 그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한 그는 언론사 사장과 국회의원,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70년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됐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안중근기념사업회 등에서도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1979년 11월 27일 사망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시비 어디에도 친일행적에 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시가 직접 관리하는 세종로공원 주요한의 시비는 1993년 세워졌다.

주요한 뿐 아니다… 국립극장 입구 조택원 춤비

▲ 서울 중구 국립극장 앞에는 국가공인 친일파 조택원의 춤비가 세워져 있다. ⓒ 김종훈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주요한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해 발표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주요한 시비에는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주요한의 시비 뿐 아니다. 서울시에는 국가에서 공인한 친일파들의 기념물이 ‘과거 이력’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자유롭게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기념물이 서울 중구 국립극장 입구에 세워진 국가공인 친일파 조택원의 춤비다. 일제강점기 지원병과 학병 출진 축하 모임에서 공연을 한 조택원은 내선일체 주제의 무용 <부여회상곡>을 연출한 인물이다. 이런 이력 때문에 2009년 정부는 조택원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해 발표했다.

그러나 조택원의 춤비 하단 석판에는 “우리 근대무용의 선각자이며 불멸의 춤작품을 남기신 무용가”라는 내용의 음각만 새겨졌을 뿐 그 어디에도 그의 친일과 관련된 행적이 기록돼 있지 않다.

광복 후 조택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금족령이 내려지자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을 돌며 공연을 이어갔다. 이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물러난 이후 한국에 돌아와 한국무용협회 이사장과 고문, 한국민속무용단과 한국민속예술단 단장을 지냈다. 1974년 10월 무용가 최초로 금관훈장을 받았다. 국립극장 앞 춤비는 1996년 3월에 세워졌다.

국립국악원의 김기진·함화진 동상의 경우… 그나마 친일 안내문

▲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는 친일파 김기수와 함화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는 이들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안내문도 마련돼 있다. ⓒ 김종훈
▲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는 친일파 김기수와 함화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는 이들의 친일행적을 기록한 안내문도 마련돼 있다. ⓒ 김종훈

주요한, 조택원과 달리 서울시에 존재하는 친일파 기념물 중에는 친일 행적을 함께 표기한 사례도 있다.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 설치된 김기수, 함화진 동상이다. 1994년과 1998년에 각각 세워진 두 동상은 건립될 당시엔 친일행적이 기재되지 않았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두 사람이 모두 이름을 올린 후에야 긴 논의 끝에 친일행적을 포함하는 안내문이 설치됐다.

과정이 매끄럽진 않았다. 2015년 5월 국립국악원이 국악원과 우면산과의 경계지점에 원로 국악인을 기리는 ‘동상공원’을 새롭게 조성할 때 친일행적으로 논란이 된 김기수, 함화진의 동상을 포함시켰다. 두 사람의 동상이 포함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논란이 일었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까지 나서서 관련 문제를 논의했다.

결국 국립국악원은 자체적으로 동상심의위원회를 열어 이 사안을 논의했다. 2015년 6월 국립국악원은 김기수 함화진 동상 옆에 두 사람의 구체적인 친일행적을 적시한 안내문을 설치했다.

서울시 “친일파 기념물 처리기준 필요”… 김원웅 광복회장 “법안 마련할 것”

서울시는 6일 <오마이뉴스>에 “(친일파 기념물 철거 등 문제는) 지자체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면서 “기준을 마련할 확실한 법안이 필요하다, 법안에 맞춰 제도적으로 이 사안을 풀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친일파 동상을 포함하는 기념물에 관한 법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김원웅 광복회장은 6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결국 관련법이 부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이어지는 것 아니겠냐”면서 “2020년 광복절 75주년을 맞아 광복회가 관련 사안을 정리해 공식적으로 서울시에 문제제기를 하겠다, 21대 국회에서 친일찬양금지법을 포함해 관련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 중 서울시가 직접 관리하는 동상 및 시비는 총 4개다. 김성수, 주요한 이외에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에 마련된 김동인 문학비, 경기도 과천시 서울대공원에 마련된 노천명의 ‘사슴’ 시비 등이 있다. 전국으로 확대하면 친일파의 동상과 시비, 기념관 등 숫자는 더욱 크게 늘어난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2015년에 발간한 ‘국정감사 정책자료’에 따르면 공유지를 포함해 학교 및 군부대, 공원 등 공공시설에 설치된 국가공인 친일파 관련 기념물은 전국 22개 자치구에 34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2020-08-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과거는 나몰라’ 친일파 시비, 독립운동 기념탑 옆에 버젓이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동아일보 창업주 동상 앞 ‘친일안내문’이 만든 변화 [광복절 75주년 기획 – 공유지 위에 선 친일파 ①] 김성수 

☞오마이뉴스: 세금 20억 들어간 친일파의 집… 친일 안내조차 없고 [광복절 75주년 기획 – 공유지 위에 선 친일파 ②] 서정주 집과 시비, 관악구 예산으로 관리

수, 2020/08/19- 05:06
0
0

[앵커]

광복 75주년을 맞아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조례 제정 움직임이 경남에서도 본격화 되었습니다.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 할 일이라는 가장 단순한 상식을 미래 세대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김소영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민족문제연구소가 1급 친일파로 분류한 박시춘.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고…. 나랏님의 병정 되기를….”]

일본군 병정 지원을 독려하는 ‘혈서 지원’ 등 군국 노래 13곡을 작곡했습니다.

밀양시는 지난해 사업비 100억 원을 들여, 박시춘의 업적을 기리는 가요박물관 건립하려다 지역사회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이현우/밀양시의원 : “그런 사람의 공을 기린다고 하면, 또다시 잘못된 일이 벌어질 것이고….”]

경남의 한 초등학교 안에 심겨진 교목, 왜향나무입니다.

1909년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식민통치 홍보를 위해 심은 걸 계기로 한반도 전역에 퍼졌습니다.

한 학부모 단체 조사 결과 일본이 원산지인 교목과 교화를 쓰는 학교는 경남에서만 140여 곳 친일 인사가 만든 교가를 쓰는 학교도 20곳에 달했습니다.

[전진숙/교육희망경남학부모회 회장 : “사례에서 보면 뽑아낸 사례가 나오는데, 말씀을 드렸는데도 (제거가)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광복 75주년이 넘도록 만연한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조례 제정이 추진됩니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추모하거나 기념하는 사업에 경상남도 예산을 지원할 수 없도록 한 것이 핵심입니다.

공공기관에서 일본 제국주의 상징물을 쓸 수 없도록 했는데, 상징물에는 군사기 외에 강제징용과 위안부 등 피해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디자인이나, 일제 통치를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창작물도 포함되었습니다.

[김영진/경남도의원 : “지금까지 못했던 부분을 다음 후세대를 위해서라도 정리를 해놓아야 되지 않을까 하고 다짐합니다.”]

일제 잔재 청산 조례는 행위자 지칭 용어와 기준 등에 대한 입법 검토를 거쳐 오는 10월쯤 경남도의회에 상정될 예정입니다.

KBS 뉴스 김소영입니다.

촬영기자:권경환

<2020-08-18> KBS NEWS 

☞기사원문: 광복 75년, “일제 잔재 지운다”…조례 제정 본격화

수, 2020/08/19- 19:48
0
0

<앵커>

그제(15일)가 광복 75주년이었습니다. 해마다 이 무렵이 되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고 또 잊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요.

후손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잘하고 있는지 민경호 기자가 유서 깊은 현장들을 찾아봤습니다.

<기자>

언덕 밑, 흰옷을 입은 사람 셋이 묶여 있고 맞은편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앉아 쏴 자세로 늘어서 있습니다.

1904년 9월 일제의 철도 건설을 방해했다가 처형된 의병 김성삼, 안순서, 이춘근 열사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역사학계에서는) 굉장히 초기에 일본에 저항해서 맞서 싸우다가 총살형을 당한 의병이라고 이렇게 규정하고 있거든요. 지금 훈장이 서훈돼 있는 상태입니다.]

이 장소가 공덕리였다는 당시 기록과 사진 속 지형을 바탕으로 처형 장소로 추정한 곳은 현재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일대.

이곳이 세 의병들이 철도부설 방해 공작을 벌였던 옛 경의선 철길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선로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요, 길 건너편 주택가가 높은 언덕으로 돼 있어 유력한 처형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현장을 알리는 표석은 없습니다.
1988년 서울시가 표석 설치를 추진했지만 흐지부지됐고 30년 넘는 세월이 흘러 경의선 어디에서도 세 열사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해방 직후 친일 청산 기관이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 표석은 제자리를 잃었습니다.

표석이 있던 건물이 재작년 철거됐는데 철거업자가 표석을 발견해 설치 주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알려 가까스로 되찾았습니다.

[김홍재/철거업체 직원 : 그 표석이 저희가 공사할 때도 지장물 (장애물)이 됐던 거죠. 표석을 놔두게 되면 훼손될 것 같아서 민족(문제)연구소에다가 제가 전화를 해서…]

새 건물이 올라서고 있는데 표석을 어떻게 보관할지, 건물이 다 지어지면 어떻게 다시 세울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군경과 시가전을 벌이다 자결한 김상옥 열사 순국지도 여전히 알아볼 수 없습니다.

5년 전 각계에서 표석 건립이 제안됐지만 진행된 것은 없습니다.

[방학진/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2015년 8월) : 1천 명의 일제 군경과 싸웠던 이 장소인데, 이 장소에는 정작 아무런 표석이 없는 거죠.]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몇 년 전에도 저희가 이 자리를 방문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관계기관에서 조금만 더 성의를 가졌으면 (작은 흔적이라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75번째 광복절, 일상 속에서 선열들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민경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17> SBS NEWS 

☞기사원문: 총 든 군인 앞 열사들의 마지막…표석조차도 없다

수, 2020/08/19- 23:31
1
0

일본어투 바로쓰기 등 생활 속 친일 잔재 청산에도 나서

[수원=뉴시스]경기도의회 전경. (사진=경기도의회 제공)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경기도의회가 광복 75주년을 맞아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친일 인물이 작사·작곡한 교가 등 생활 속 친일 잔재 청산에 나선다.

15일 경기도의회에 따르면 김경호(더불어민주당·가평)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을 지원하는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 조례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 인한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을 지원해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3·1 운동의 헌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추진된다.

주요 내용은 ‘친일 잔재’를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 인해 경기도에 남아 있는 반민족적인 일제의 흔적”으로 정의하고, ‘경기도 친일 잔재 청산의 지원 위원회’를 설치해 친일 잔재청산 관련 사업 추진을 지속해서 하는 것이다.

또 도지사에게 친일 잔재 청산의 지원을 위한 시책을 수립·시행할 책무를 부여한다.

김 위원장이 소속된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는 오는 11월 4일 활동기간이 끝날 예정이지만, 6개월 연장해 생활 속 친일 잔재 청산 활동을 이어갈 방침이다.

지난 4월에는 생활 속 ‘일본어투 용어’ 바로쓰기를 독려하고, 도의회 3층 ‘간담회의실’ 명칭을 ‘정담회의실’로 바꿨다.

특위는 최근 도가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에서 확인한 도내 친일 잔재를 바탕으로 청산 작업을 할 예정이다.

조사된 친일잔재는 ▲친일인물 257명(이흥렬, 현제명, 이광수 등 문화계 15명) ▲친일기념물(기념비·송덕비)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욱일기·일장기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이다.

이 가운데 학생들의 역사관 정립·교육 차원에서 친일 잔재 교가·교표를 바꿔나가는 작업을 먼저 진행한다.

특위는 학생들이 친일 잔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직접 교가·교표를 바꿔나갈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김 위원장은 “학생들과 도의회가 합심해 친일 교가·교표의 문제점을 공유하고, 학생들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직접 바꿔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법을 고쳐서 지원하거나 바꿔야 되는 일들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고쳐나가야 하는 생활 속 친일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바꾸는 노력을 해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020-08-15> 뉴시스 

☞기사원문: 광복 75주년’ 경기도의회, ‘친일 잔재 청산 조례’ 추진

목, 2020/08/20- 21:29
0
0

[서울=뉴시스]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사진 = 소명출판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임종명 기자 = 제12회 임화문학예술상 수상자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선정됐다.

임화문학예술상 운영위원회와 상을 공동주관하고 후원하는 소명출판은 20일 이같이 수상자를 발표했다.

임화문학예술상은 한국 근대문학사상 독보적 존재로 꼽히는 임화의 문학적,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고자 2008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해 제정된 상이다. 임화의 문학예술사적 업적에 갈음하는 창작, 비평, 학문 및 실천적 활동에 업적을 남긴 인사에 수여된다.

임화문학예술상 심사위원들은 연구·평론에서 임 소장의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가 상의 뜻에 걸맞는 의의와 깊이를 고루 담았다고 평했다.

시상식은 임화의 탄생일을 기념해 오는 10월10일 오후 5시30분 민족문제연구소 강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수상자에는 상금 1000만원과 상장 및 상패가 수여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020-08-20> 뉴시스 

☞기사원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제12회 임화문학예술상 수상

금, 2020/08/21- 02:40
0
0

광복회 “1대부터 21대까지 모두 일제 빌붙어 독립군 토벌하던 자” 발언 팩트체크

▲ 김원웅 광복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승만이 집권하여 국군을 창설하던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무려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 15일 광복절 75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열린 기념식에 광복회원들이 사용하도록 보낸 기념사 중 일부다. 기념사에선 “이들 민족 반역자들은 국무총리, 국회의장, 장관, 국회의원, 국영 기업체 사장, 해외 공관 대사 등 국가 요직을 맡아 한평생 떵떵거리고 살았다”면서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나라,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명시됐다. 김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정부 주관 행사에서는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같은날 제주시 조천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광복회 회원이 대독한 광복회장 기념사를 들은 원희룡 제주지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면서 “김일성 공산군대가 대한민국을 공산화 시키려고 왔을 때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던 군인과 국민들이 있다. 그분들 중에는 일본 군대에 복무했던 분들도 있다. 공과 과를 겸허하게 봐야한다”라고 반박했다.

재향군인회도 18일 성명을 내고 “광복회장이 지나치게 편향된 역사관을 가졌다”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애국자에게 친일 프레임을 씌워 토착 왜구로 몰아 국론을 쪼개는 데 앞장서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김원웅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 중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라는 발언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확실히 맞고, 반은 친일파 범주에 따라 논의가 좀더 필요하다. (기사 하단 도표 참고)

1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부터 10대 육군참모총장 백선엽까지는 명징하게 친일행보를 보인 인물들이다. 국가에서도 공인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들이 다수다. 그러나 11대 송요찬부터 21대 이세호까지는 ‘친일파’로 규정한 공인기록이 없다. 다만 다수가 일본군 및 만주군 하급 간부로 활약하거나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준비했던 인물들이다.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이 국군에 뿌린 ‘친일의 씨앗’

▲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의 묘에서 내려다 본 임시정부 요인 묘역 (국립서울현충원) ⓒ 김종훈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은 국가공인 친일파 이응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무려 30여 년을 복무한 인사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조선 출신임에도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올랐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 우리 군의 중추가 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인사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요직을 차지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미군정과 긴밀히 접촉한 이응준은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국방사령관 고문으로 위촉됐다. 이후 김백일, 백선엽, 채병덕 등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미군정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했다.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이들은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국군의 핵심이 된다. 이응준은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 때문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머리맡에 위치한 장군2묘역에 묻힌 이응준의 묘에는 ‘군의 아버지’라는 글이 새겨졌다.

하지만 이응준은 일제강점기 내내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41년 일본군 육군 대좌로 승진한 이응준은 후방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며 여러 차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응준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해 공식보고서에 올렸다. 같은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응준의 이름은 등재됐다.

[2~10대] 침략전쟁에 공헌한 국가공인 친일파 참모총장 신태영, 이종찬, 백선엽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이응준 묘지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과 3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이 잠든 묘역. 바로 아래쪽에 애국지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이 조성됐다. ⓒ 김종훈

3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과 6대 이종찬, 7대 및 10대 백선엽 역시 모두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인한 친일파이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인물들이다.

신태영은 아들 신응균과 함께 부자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이다.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일본 육사를 나와 시베리아 간섭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일제 부역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조선청년의 꿈은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야스쿠니신사에 묻혀 신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주인공이 바로 신태영이다. 그는 3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4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묘 역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머리맡에 있다.

6대 참모총장 이종찬은 할아버지 이하영, 아버지 이규원과 함께 3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이다.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 상하이 방면에서 크게 활약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중 최초로 최고등급인 금치훈장을 이종찬에게 수여했다. 당시 중일전쟁의 여파로 중국 상하이, 항저우, 난징 등 지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총검을 피해 중국 내륙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해방 후 이종찬 역시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서울현충원 장군3묘역 최상단에 그의 묘가 있다.

지난 7월 10일 사망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 역시 정부에서 공인한 친일파다.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공식보고서에는 백선엽이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했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됐다.

이외에도 2대 참모총장 채병덕과 5대 정일권, 9대 이형근은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만주 전선과 후방에서 일군과 만군에 소속돼 직간접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역할을 한 일본군 장교들이었다.

[11~21대]일본군 하급간부 출신 다수… 독립군 토벌 기록은 없어

▲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인 현충탑 바로 뒤쪽에는 친일파 김홍준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 김종훈

대한민국 11대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지원병 출신으로 일본군 오장(부사관)으로 복무한 인물이다. 일본군으로 복무 당시 그는 전선에 나가는 대신 훈련소에서 조교 등으로 복무하며 조선 출신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데 일조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했다. 송요찬은 제주4.3 진압군 지휘관으로 군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12대 최영희, 14대 장도영, 15대 김종오, 16대 민기식, 17대 김용배, 18대 김계원, 19대 서종철 등은 모두 학병 출신으로 1944년~1945년 태평양전쟁 후반부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전선에 나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13대 최경록은 11대 송요찬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지원병으로 자원입대한 인물이다. 하사관후보생을 거쳐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육사 입학을 위해 대기하던 중 부상을 당해 일본군 장교가 되지 못했다. 21대 이세호 역시 1944년 일본 육군항공대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해 일본에서 교육을 받던 중 종전을 맞았다. 이 때문에 전선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20대 육군참모총장 출신 노재현은 일제강점기 후반부 행적이 다소 묘연한 상태다. 일부 언론에서 ‘일본군 경력이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지만, 일본 육사를 거쳐 일본군 소위를 역임했다는 기록 역시 발견되고 있다. 다만 전선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는 상태다.

광복회 관계자는 19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1대부터 21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들은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돼 활약한 인물들”이라면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과 만주군의 존재 목적은 일왕에 충성 맹세를 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맞서서 명백하게 침략전쟁을 수행했던 군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친일파라는 범주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본군과 만주군에 부역한 친일행적에 대해서 만큼은 1대부터 21대까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2020-08-2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육참총장 친일파” 파문] 초대~10대는 명백… 11~21대는 논란

금, 2020/08/21- 04:15
0
0

□ 일시: 2020.8.11.(화)~10.25.(일)
□ 장소: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대표적인 족벌언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 100년을 맞았습니다.
이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독재정권 하의 부역에 대한 단 한마디의 반성도 없이 민족·민주언론으로 자신들을 포장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해방 후 마땅히 청산되어야 했을 부역언론이 미군정기와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주류 언론으로 자리잡고 무소불위의 성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때 역사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후과가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의 죄과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찬양한 조선·동아의 행태는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가 ‘민족지’임을 자부하는 두 신문의 죄적을 실증적으로 고발함으로써 그 진면목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주최: 민족문제연구소
□ 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 후원: 뉴스타파 · 민주언론시민연합
□ 자료협조: 국사편찬위원회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연계특강: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 총 6강
(민족문제연구소 유툽에서 만나세요~!)

토, 2020/08/22- 19:58
0
0

1942년 9월 18일 저녁 7시 무렵 나치가 통치하고 있던 독일 베를린. 일본이 세운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성대한 음악회가 열립니다. 여기서 ‘에키타이 안(Ekitai Ahn)’은 본인이 작곡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작사한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혼성 합창단을 위한 교향 환상곡 <만주국(Mandschoukuo)>을 직접 지휘합니다.

‘에키타이 안’은 애국가 작곡가로 알려진 안익태. 일본식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주국>의 합창 부분을 작사한 에하라 고이치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영사관의 참사관이었습니다. 주독 일본 첩보기관의 총책으로 활동한 정황이 담긴 기록도 남아있는데, 안익태는 바로 이 에하라 고이치와 함께 거주하며 <만주국>을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날 음악의 합창 부분은 일본어로 불렸습니다. 가사 일부를 보면 만주국과 일본,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까지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과 굳건히 연결되었네. 이 신성한 목표 속에 하나의 심장과도 같이,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네, 독일이여, 또한 이탈리아여. 힘을 냅시다.”

만주국 10주년 축하공연 영상 앞부분에 작곡가 ‘에키타이 안(Ekitai Ahn)’으로 소개된 안익태

■ <한국환상곡>과 <만주국>, 안익태와 에키타이 안

유럽에서 활동한 안익태가 처음부터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고 본인 이름을 표기하지는 않았습니다. 1930년대 후반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익태 안(Eak Tai Ahn)’이라는 표기로 남아있습니다. 발음으로 볼 때 일본식 발음표기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익태의 음악 역시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는 다릅니다. 안익태는 우리가 아는 애국가의 곡조를 1935년에 작곡했고, 애국가 선율이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라는 곡을 만들어 1938년 초연합니다. 이 당시 안익태가 인터뷰했거나 직접 기고한 글을 보면 독립, 동포, 민족운동, 애국정신 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에 들어서 안익태는 주로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등 추축국(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싸웠던 나라들이 형성한 국제 동맹을 가리키는 말)과 추축국의 점령국들을 순회하며 공연하는데 이 시기에는 <코리아 판타지>를 변형한 <만주국>을 주로 연주했습니다.

<안익태 케이스>라는 책을 쓴 이해영 한신대학교 교수 등 연구자들에 따르면, 안익태는 애국가와 일부 곡조를 공유하는 <코리아 판타지>, 즉 <한국환상곡>을 여러 차례 변형해 공연했는데 최소 7개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중에는 <만주국>으로 변형된 판본도 있습니다.

즉, 안익태의 작곡 과정에서 애국가와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환상곡>이 특정 시기에는 일본을 찬양하는 <만주국>으로 바뀌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다시 <한국환상곡>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가사는 한반도, 우리나라에 대한 가사로 바뀌었습니다.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중 안익태가 〈만주국〉을 지휘한 영상. 광복회가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에서 받은 것으로, 전체 7분 40초 영상 가운데 언론에 3분 47초 분량이 제공됐습니다. (영상제공: 광복회)

■ 애국가 논란 재점화

광복회와 국가(國歌)만들기시민모임은 어제(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가운데 안익태가 <만주국>을 지휘한 부분 7분 20초가량의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독일 정부 협조를 받아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원본을 확보한 겁니다.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지휘한 사실이 이번에 처음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2006년에는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송병욱이 영상을 발굴해 안익태 친일 연구에 불을 붙였습니다. 영상은 당시 KBS 뉴스에서도 다뤄졌습니다. (<안익태 ‘친일 논란’ 음악회 지휘봉> 2006년 8월 15일 KBS 뉴스광장)

2006년 이후에도 몇몇 연구자에 의해 해당 영상 일부가 공개됐지만, 선명한 화질의 무삭제 원본 전체를 확보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광복회와 국가만들기시민모임 측은 설명했습니다.

안익태는 이미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인물로, 특정 시기 친일 활동을 했다는 데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어제(20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광복회-국가만들기시민모임 공동 기자회견. 안익태의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을 공개하고 국가 교체를 주장했습니다.

광복회와 국가만들기시민모임은 “친일·친나치 인물인 ‘에키타이 안’이 작곡한 애국가가 국가의 지위를 누리는 일은 당장 멈춰야 한다”며,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모두 반영한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어떤 분들은 국가를 바꿀 수 있느냐, 안타깝지 않느냐고 하지만 세계 대부분 나라가 시대에 맞게 국가를 교체한다”며, “미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포함해 제가 확인한 바로는 108개 이상 나라가 국가를 바꿨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애국가 옹호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애국가를 처음 작곡할 당시 안익태는 친일로 변절하기 전이고 민족과 애국을 강조했다며, 초기 안익태와 이후의 안익태를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안익태의 친일 문제를 떠나 우리가 이미 오랜 세월 애국가를 국가로 불러온 만큼 애국가에 새로운 역사성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교체는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국가(國歌), 바꿔야 할까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명확히 정한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관습상 국가로 인정해 태극기나 무궁화 등과 함께 나라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설명입니다.

행정안전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한 ‘대한민국 국가상징’ 홍보 책자. 태극기는 근거 법령이 명시돼있는 반면 애국가는 ‘관습상 국가로 인정’이라는 문구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국민의례 절차를 정해놓은 대통령 훈령이나 국회법 시행령 등에 ‘애국가’라는 표현이 포함돼 사실상의 국가로 간접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대통령 훈령 368호 ‘국민의례 규정’ 제4조 국민의례의 절차 및 시행방법을 보면, 국민의례의 정식절차 중 하나로 ‘애국가 제창’이 포함돼 있고 “1절부터 4절까지 모두 제창하거나 1절만 제창하라”고 돼 있습니다. 같은 훈령 6조에서는 애국가를 제창하는 법을 정하고 있는데 “애국가는 선 자세로 힘차게 제창하되, 곡조를 변경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해, 우리가 아는 안익태의 그 곡조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나라를 상징하는 노래, 국가를 법으로 규정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간 여러 차례 애국가에 국가의 지위를 부여하는 법을 만들거나 반대로 애국가가 아닌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국가로 만들자는 시도가 국회 안팎에서 있었지만 모두 무산됐습니다.

지금도 애국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인정해 아예 확고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자, 즉 태극기를 국기로 정한 ‘대한민국 국기법’처럼 ‘대한민국 국가법’을 통해 국가로 정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애국가를 바꾸자는 의견, 즉 애국가를 안익태가 작곡했다는 이유로 국가를 바꾸자는 주장 외에도 곡조를 보다 한국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사를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애국가 논쟁’이 국회로 본격 수렴되지는 않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미래통합당은 김원웅 광복회장 개인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의원들 역시 김 회장의 발언은 옹호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광복회가 독일 정부로부터 안익태 관련 자료 수십 권 분량을 더 받기로 했다고 밝히면서 다가오는 가을 ‘애국가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일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2020-08-22> KBS NEWS 

☞기사원문: 안익태의 ‘애국가’와 ‘만주국’ 그리고 1942년 9월 베를린의 저녁 

※관련기사 

☞노컷뉴스: 김원웅 “친일·표절 안익태 애국가, 나는 거부한다”

일, 2020/08/23- 00:04
0
0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태식, 홍난유 비석 방치 논란
친일 인물 알고도 쉬쉬한 문화원…친일잔재 청산에 소극적인 당진시
“제대로 된 전수조사로 독립운동가들이 예우받는 사회 만들어야”

사진 왼쪽부터 1. 당진 남산공원 석궁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 자연보호헌장비 옆에 인태식 씨의 공적비가 세워져있다. 2.당진문화원에서 당진문화예술학교로 올라가는 도로 오른쪽에 홍난유의 선정비를 비롯한 당진에 덕을 쌓은 인물의 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당진신문=지나영 기자] 당진 남산공원에는 당진 출신의 관료·정치인 출신 인태식 씨의 공적비가, 그리고 당진문화원에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당진군수로 재직한 홍난유 씨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수록된 친일 인물이다.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에 세워진 두 인물의 비석에는 그들의 공만 적혀 있을 뿐, 친일 행적에 대한 설명은 없다. 특히 인태식 씨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되면서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홍난유 씨는 당진시에서 파악조차 못했다. 친일 인물에 대한 전수조사를 지자체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작년 당진문화원에서 동학농민 관련 특강이 있어 방문했다가, 문화원을 둘러보던 중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홍난유 씨의 비석을 발견했다”며 “특강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홍난유 씨가 친일 인물이라고 말했더니, 이미 문화원 관계자는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당진시는 홍난유 씨가 친일 인물이라는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며 “친일 잔재 청산에 지자체와 관계자들이 적극적이지 않다”고 꼬집었다.

친일 인물 알고도 쉬쉬한 당진문화원

당진문화원 홈페이지에는 홍난유 씨의 이력 및 활동사항의 마지막에 “전남광주군수를 역임하면서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하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수록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당진문화원 관계자는 “2년 전에 기존 남산 스포츠센터 인근에 있던 홍난유 씨의 송정비가 당진문화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안내 표지판을 만들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다”며 “수집한 자료에서 홍난유 씨의 친일인명수록을 확인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진문화원은 홍난유 씨가 친일 인물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송정비에 대한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당진시민단체는 물론 당진시, 심지어 당진문화원장조차도 본지가 취재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

당진문화원 유장식 원장은 “오래전부터 당진에서 덕을 쌓았다는 분들에 대한 비석을 해 놓은 것으로 홍난유 씨의 비석을 두고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사회를 통해 처리 방안을 논의 했을 것”이라며 “문화원은 당진시로부터 예산을 받아 운영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비석을 문화원이 자체적으로 치우거나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추후 문화원 이사회가 열리고, 회의에서 비석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모아지면 시에 처리방안을 두고 논의를 요청하겠다”고 전했다.

당진시 문화관광과 정영환 과장은 “한 사람의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는 배경이 있었을 것이고,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한 사람이 결정 내서 비석을 세우기는 어렵다”며 “그런 점에서 홍난유 씨의 비석에 대한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정보 수집을 통해 당진문화원과 논의를 거치는 과정을 거쳐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친일 잔재 청산은 공론화가 우선”

의병 진압과 강제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홍난유 선정비는 광주공원에도 있다. 이에 광주광역시는 전수조사를 통해 지난해 선정비를 뽑아 옮기고 그 앞에 단죄문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광주광역시에서 설치해 놓은 홍난유 단죄문

하지만 당진시는 그동안 친일 인물의 공적비에 대한 처리 및 단죄비 설립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지난 2007년 공론화 됐던 인태식 씨의 공적비 문제와 홍난유 씨에 대해서 정확한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한 시의 추진사업 계획도, 친일 잔재물 청산에 관련한 부서도 따로 없다.

당진시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은 “친일잔재를 대한민국에서 청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친일의 자손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지자체에서 가장 먼저 앞장서서 친일 잔재 청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진에서 친일 인물의 잔재물 청산이 되지 않은 것으로 남산에 있는 인태식 씨의 송정비를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인태식 씨의 송정비는 지난 2007년 당진참여연대가 문제를 제기하고, 단죄비를 설치해야 한다며 공론화가 됐었다.

당시 당진군은 인태식 씨의 송정비에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논란이 됐고, 결국 당진참여연대는 단죄비 사업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까지 인태식 씨의 친일 행적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단죄비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당시 당진참여연대 부회장을 맡았던 당진시의회 조상연 의원은 “당시 인태식 씨의 공적비 앞에 영세불망비를 세우는 것을 추진했고,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었지만 끝내 할 수 없었다”며 “공적비에는 인태식 씨의 좋은 내용만 적혀 있고 친일 행위에 대한 내용은 전혀 적혀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조상연 의원은 “친일 잔재물을 청산하고 단죄비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역 내 시민단체에서 먼저 앞장서야 할 것”이라며 “친일 잔재 청산은 시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부담이 가고, 여러 사업을 추진하는 만큼 당장 먼저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당진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친일 인물 공적비 처리 방안 및 친일 잔재물 청산을 위해서는 여론이 우선 모아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일반 시민들은 모르는 일제 잔재물이 분명 있는데,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이든 언론에서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본지의 취재 과정을 통해 홍난유 씨의 선정비 문제를 알게 됐다는 김학로 소장은 “홍난유 씨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에 대해 나도 알지 못했던 만큼 시민들은 친일 인물 및 잔재물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더 없을 것”이라며 “그동안 친일파가 주류를 이끌어오면서 친일 잔재 청산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지자체에서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당진시는 당장 친일 잔재물 청산에 대한 추진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지역 내 시민단체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며 “제대로 된 전수조사를 거쳐 잔재물을 청산해 독립운동가들이 예우받는 사회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친일인명사전

인태식
1930년 조선총독부 재무국 세무과속으로 근무 이후 1938년 경성세무감독국 홍천세무서 속(서장)으로 근무했다. 경성세무감독국 강경세무서 서무과장과 홍천세무서 서장 등으로 재직할 때 중일전쟁과 관련한 특별세 및 임시이득세 등의 징수, 임시조세 조치 사무, 중일전쟁에 종군한 군인·군속에 대한 조세면제와 징수유예 사무, 중일전쟁과 관련한 각종 세금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강화 등 전시 사무를 수행한 공로로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렸다. 해방 후 1953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당진에서 출마, 당선됐다.

홍난유
1904년 2월 충청남도관찰부 당진군수에 임명됐던 홍난유 씨는 1905년 11월부터 전라남도관찰부 광주군수를 지냈다. 홍난유 씨의 선정비는 청렴한 덕으로 정치를 잘 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05년 세워졌다. 하지만 광주군수로 재직중이던 1908년 의병 진압을 목적으로 관내 각 면을 순회하면서 연설했고, 1909년 9월 일본군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대토벌작전’을 실시하자 관내 각면을 순회하면서 관민들을 설득했다. 합병 후 1910년 10월 전라남도 광주군수(고등관 6등)에 유임되면서, 재직중이던 1913년 1월 사망했다.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지나영 기자

<2020-08-22> 당진신문 

☞기사원문: 당진 남산공원과 문화원에 버젓이 세워진 친일파 공적비

월, 2020/08/24- 00:30
3
0

에하라 고이치등 일본인이 실제 애국가 작사자 8대 혐의
기시와 에하라, 상상 그 이상 긴밀한 관계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20일 김원웅 광복회장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를 통해 확보한 안익태 작곡가의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지휘 동영상’을 공개했다.

김 회장은 “(애국가는) 저와 부모님도 불렀던 노래지만 저희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면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를 시대에 맞게 교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은 이미 두 번 교체했고 독일은 세 번 교체했다. 오스트리아는 다섯 번, 프랑스는 일곱 번 국가(國歌)를 교체했다”며 “108개 이상 나라가 국가를 지금 시대에 맞게 교체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국가를 교체하지 않은 극소수 나라 중엔 일본이 있다”면서 “(국가를 시대에 맞게) 고치지 않은 것도 일본을 따라가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은 안익태 작곡가의 친일·친나치 행각과 애국가 표절의혹에 대해 “이미 음악계에는 역사적 상식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친일 반민족 권력이 장악해온 시대를 조문하는 게 우리가 해야할 역사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및 친나치 행적은 기존에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노동은, 송병욱, 이경분, 이해영 선행 연구자가 지속적으로 제기해왔으며 많은 연구 성과도 있었다. 필자는 선행 연구 업적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안익태의 보스이자 일제 고위 간첩인 에하라 고이치(江原耕一, 1897~1969년, 이하 ‘에하라’로 약칭)를 중심으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7~1987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이하 ‘기시’로 약칭), 박정희(1917~1979년, 창씨개명: 다카기 마사오, 오카모도 미노루, 만주인맥, 멘토:기시), 윤치호(1866~1945년, 창씨개명: 이토지코, 무궁화 도입자, 애국가 작사자, 후원자: 이토히로부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년, 윤치호의 후견인),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 ,1924~1991년, 아베 총리의 부친), 장징후이(张景惠, 1871~1971년, 만주 괴뢰국 총리, 만주국 국가 명의상 작사자) 등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톺아보았다.

[자료=강효백 교수]


에하라 고이치등 일본인이 실제 애국가 작사자(?) 8대 혐의

첫째, 에하라 고이치가 작시한 것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한국환상곡>이 현재 애국가의 모태가 된 <만주환상곡>이다. 안익태가 중국의 멜로디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코치를 받아 편곡하고, 에하라가 지은 가사를 <만주환상곡>의 피날레에 코러스를 삽입했다. 에하라가 지은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둘째, 안익태는 1941년 루마니아 음악연주회에서 에하라를 만나고 일·독 협회가 안익태를 후원하도록 주선했다. 에하라는 안익태의 매니지먼트 역할을 하였고 안익태는 1941~1944년 4월까지 에하라의 베를린 공사참사관 관저(Gustav-Freytag-Straße 15 in Berlin-Grunewald)에서 기거하며 숙식을 같이했다. 시문에 조예가 깊은 에하라가 작사 또는 개사하면 안익태는 <에텐라쿠(月天樂)>와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고 지휘했다. 안익태는 만주국환상곡을 매국의 도구로 활용하다가 시대가 바뀌니까, 그것을 다시 애국의 이름으로 재활용해 한국환상곡(Sinfonie Fantastique Korea)으로 바꾸었는데 여기에 애국가 선율이 들어있다. 1948년도 이승만 정부가 탄생하면서 이를 애국가로 지정했다.

셋째, 애국가 가사가 아무리 종일매국노라도 일본 본토인이 아니라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네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의 철갑 두른 소나무(鎧卦松요로이가께마쓰)는 한국의 정이품송같은 일본의 특정 소나무다. 일본의 핵심인사만이 알 수 있다.
② 바다와 물이 산보다 먼저 나온다. 이건 거의 해양국가 일본인의 무의식 본능 차원이다.
③ 작사자가 아무리 종일매국노라해도 자기 나라를 ‘해’ 아닌 ‘달’로 비유할 수 없다고 본다.
④ 공활? 구한말 이전과 이후에도 쓰지 않았던 한국인 최고 지식인도 잘 알 수 없는 일본식 난해어이다.

넷째, 만주국 국가 가사 작사자는 명의상 중국인 총리가, 실제 작사자는 일본인이다. 또한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만주국 가사 ‘인민 삼천만 인민 삼천만’은 가사가 한 사람이 쓴 듯 매우 흡사하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다섯째, 에하라는 일본 기독교협회 발간 <찬미가> 1931년 1954년 가사 방역자(번역을 도와준 자)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도 1907년 <찬미가> 가사 방역자로서 제14장 애국가 가사를 방역했다 에하라가 윤치호의 찬미가 속의 가사를 한국의 애국가로 날조 작업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섯째, 1942년 3월 윤치호는 만주 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창춘)을 방문해 제2차 만주국가 명의상 작사자 장징후이 총리와 면담했다. 만주와 조선이 하나가 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서적을 교환했다. 장징후이가 1937년 서울 방문시 윤치호를 만난 적 있다.

일곱째, 1942년 9월 5일 장징후이 명의, 일본인 작사, 야마타 고사쿠(안익태의 지기이자 경쟁자) 작곡인 대만주국 국가를 발표했다. 13일 후 1942년 9월 18일 안익태 작곡 에헤라 고이치 작사 한국환상곡 (만주환상곡 피날레)이 베를린에서 연주됐다.

끝으로 여덟째, 에하라 고이치는 일제강점기 만주인맥의 핵심인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원한 멘토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의 외조부) 총리의 초·중·고등학교 대학 동문이자 최측근 인사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 일본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의 고등학교와 대학 대선배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애국가를 계속 유지하고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으로 놔둔 속사정은 이런 끈끈한 관계가 아닐까 추정된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기시와 에하라, 상상 그 이상 긴밀한 관계

필자가 추적해본 바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와 안익태의 후견인 겸 보스인 에하라 고이치의 관계는 상상 그 이상의 긴밀한 관계다. 다음 열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기시와 에하라는 같은 해 같은 달 이틀 사이로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다. 노부스케는 1896년 11월 13일 야마구치(山口)현에서 태어났고 바로 이틀 후인 15일 에하라는 오카야마(岡山)현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나 오카야마나 둘 다 혼슈 서부 쥬코쿠(中國) 지방이다.둘째, 기시와 에하라는 오카야마 초·중학교 동창이다. 기시는 당시 쥬코쿠 지역 최고의 교육도시 오카야마시 우치야마시타(内山下) 소학교와 오카야마 중학교를 진학했다. 기시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던 숙부 오카야마 전문학교 교수가 폐렴으로 죽자 3학년 1학기때 야마구치 중학교로 전학했다. 후일 도쿄의 구제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왼쪽) 안익태와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에하라도 기시와 같은 오카야마시 우치야마시타 소학교와 오카야마 중학교를 나와 당시 일본최고 명문고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오카야마 6고는 국수주의 경향의 교풍 아래 정·재계와 법조계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와 미야자와 유타카(宮澤裕, 중의원 의원 전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의 아들) 역시 오카야마 6고 출신이다. 기시의 숙부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둘은 고등학교까지도 동문이었을 수 있다.

(앞줄 왼쪽 첫째부터) 731부대장 시로 이시이, 그의 직속상관 만주 국무원 총무차장 기시 노부스케, 에하라 고이치 하얼빈 특별시 부시장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셋째, 둘 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전공 3년 선후배 사이다. 기시는 1917학번이고 에하라는 1920학번이다. 둘 다 대입시험을 독일의 필기시험만으로 손쉽게 통과했으며 도쿄대 법대에서 독일 법학을 전공했다. 둘 다 독일어에 능통하고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에 매료됐다. 둘 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천황주권론을 주장하는 우에스기 신기치(上杉愼吉)의 학설을 추종했다

넷째, 둘 다 도쿄법대 졸업 후 정부 관료의 길을 걸었다. 기시는 묘하게도 당시 엘리트들이 간다는 외무성이나 대장성을 가지 않고 2류 부서로 취급받던 농상무성에 들어갔다. 에하라 역시 주코쿠 지역 세관에서 일했다고 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으나, 구체적 근무지역과 기간은 알 수 없다. 1937년 창설된 내각정보국(CIRO)의 전신인 비밀 정보기관에서 중견 공작관 에이전트 핸들러(Agent Handler)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둘다 악명높은 하얼빈 교외에 근거한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1892~1950년)의 직속상관이다.

둘 다 악명 높은 만주국 하얼빈 교외에 근거한 생체실험 731부대의 양대 수뇌다. 아사히신문 1937년 6월 12일자 보도에 따르면 기구개혁을 수반한 만주국 내각 개조를 단행해 만주국 양대 요직인 산업부 차장에 기시 노부스케를, 하얼빈 특별시 부시장에 에하라 고이치를 임명했다.

여섯째, 둘 다 만주가 출세 근거지였다. 기시는 1936년 7월부터 만주괴뢰국에서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39년 3월 총무청 차장으로 영전해 만주국 「산업 개발5개년 계획」을 입안, 만주경영의 핵심 실권자가 됐다. 1941년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면서 귀국해 도조 내각에 상공대신으로 취임하고 1942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당선돼 국회로도 진출했다.

에하라는 주 독일 만주 참사관으로 발령받아 1938년 10월 2일 고베를 출항해 독일 함부르크로 떠난다. 그리고 나찌 독일이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를 점령하자 만주국 공사참사관을 지냈다.

만주국의 특별시 하얼빈의 최고 실세 부시장은 차관급으로 그가 명의상 맡은 주 독일 만주 공사참사관은 외관상 강등이다. 사실 그는 유럽과 만주를 종횡망라하는 거물 에이전트 핸들러로서 안익태 등 수많은 에이전트를 육성, 문화 예술 사상 부분의 침투를 총괄 관장했다.

에하라는 “베를린에서 가장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약 300명의 요원”을 관리했다. 독일인과 한국인, 심지어 일부 학자와 예술가들까지 다양한 국적의 에이전트였다. 유럽 여러 나라 수도를 종횡무진 했다. 에하라 고이치는 성장급(차관급) 최고위 관료 출신 에이전트 핸들러였다.

일곱째, 둘 다 패전 이후 구속됐다가 석방됐다. 기시는 패전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쟁 범죄 용의자(평화에 관한 죄)로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도조히테기 등 A급 전범 7명 교수형 집행 다음날 1948년 12월 24일 석방됐다. 에하라는 1945년 4월 5일, 히틀러 자살에 이은 독일의 항복 선언으로 소련군에 의해 신병이 인수되어 만주로 귀임했으나 소련군 전범 수용소에서 1년여 수형 생활후 1946년 12월 25일에 귀국 조치된다.

여덟째, 석방후 승승장구했다. 기시는 석방 후 총리가 됐으며, 자기 동생도 총리, 외손자 아베도 총리, 박정희 등 한국의 종일매국자를 직·간접적으로 조정했다. 에하라는 일본 우익변호사협회 청우회 간부로 거액의 수임료를 챙기며 노후를 즐겼다.

아홉째, 둘 다 한국의 애국가와 나라 꽃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7년 만주국 공업부 차관, 1939년 3월 총무부 장관으로 영전과 승진을 거듭하는 중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총설계했다. 만주은행에서 만주은행권을 발행했지만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만주국의 유통화폐 대부분은 무궁화 문양이 크고 뚜렷하게 인쇄된 조선은행권 발행 지폐들이 차지했다. 이 무궁화 문양 조선은행권이 무궁화 군락지 야마구치 출신 기시의 핵심 동력원이었다. 재임 중 기시는 도쿄 근교에 일본 최대의 식물원 진다이(神代) 식물공원과 그 공원내 별도로 대규모 무궁화 화원을 조성해 1961년 10월 개장했다

에하라는 기독교 신자로서 애국가가 수록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1908년)에 영향을 끼친 일본기독교연합 『찬미가』(1903)년 판 증보 개정판 『찬미가』(1953년판)를 방역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급 전범, 731부대장, 난징대학살 시체 처리반장)를 총애하여 상공부 요직 과장에 발탁하였다.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 총리다.

열째, 기시와 에하라는 한국의 국익으로 볼 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들이다. 이 둘과 애국가, 무궁화에 관련한 사건은 지나간 역사 문제가 전혀 아니고 현재진행형 국가위신과 국가기강, 헌정질서와 직결된 문제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참고문헌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삼인, 2019.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2)」, 민족문제연구소, 2009.
Hoffmann, Frank, 『Berlin Koreans and Pictured Koreans』(2015) (PDF). Koreans and Central Europeans: Informal Contacts up to 1950, vol. 1. Vienna: Praesens.

<2020-08-22> 아주경제 

☞기사원문: [강효백의 신경세유표29]안익태·에하라·기시·박정희 등 애국가에 얽힌 기묘한 8각관계

일, 2020/08/23- 23:55
0
0

‘친일 청산’ 김원웅 광복회장 기념사…
조중동 등 비판 사설·칼럼 잇달아 실어
조선, 동아…일제 때 뚜렷한 ‘친일’ 행적
김이택 “부끄런 과거 이제라도 사죄해야”

왜 아베 편을 들었나 ‘조선일보’ 친일 해부. 한겨레TV

해방 후 75년이 흘러도 친일 청산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친일에 앞장선 과거를 사죄하기는커녕 감추고 미화해온 이들이 많은데요. 대표적으로 올해 창사 100주년을 맞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있습니다. 이들이 광복절 75주년 행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요구한 김원웅 광복회장을 집중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김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 이후 미래통합당과 <조선일보> 등은 “국민 편가르기”라고 비난하고, ‘친일 장사’로 깎아내리는 칼럼을 싣기도 했습니다.

광복절 75주년 행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밝힌 김원웅 광복회장을 두고 ‘편가르기’ 프레임을 쓰며 비판에 나선 조선일보. 한겨레TV

이에 대해 김이택 <한겨레> 대기자는 ‘김이택의 저널어택’ 네 번째 시간에 “친일 행적이 지면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도 국민과 독자 앞에 한번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광복회장을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며 “적반하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국민 편가르기라는 주장은 친일파들이 오랫동안 써먹어온 프레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10가지 궤변들. 한겨레TV

<조선일보>는 일본 강점기인 1937년부터, <동아일보>는 이듬해부터 폐간(1940년) 때까지 매해 1월1일 일왕 부부의 대형 사진을 1면에 실었고 <조선일보>는 제호 위에 칼라로 일장기를 새겨넣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이 돼 젊은이들에게 일제의 총알받이가 돼라며 징병과 학병을 독려하고 다녔고, 대법원은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라고 판결문에 분명하게 못박았습니다.

<조선일보>가 일제 강점기 시절 제호 위에 일장기를 인쇄한 사실을 밝혀낸 <한겨레>의 2001년03월29일치 기사. 한겨레TV

지난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에 나서자 <조선일보> 등은 무역보복을 먼저 시작한 아베 정부보다 우리 정부를 더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힘이 부족하면 굴욕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라도 있어야 한다’며 일본에 무릎 꿇으라는 식의 기사와 사설·칼럼도 잇달아 내보냈습니다.

김 대기자는 문제적 보도들을 일일이 제시하며 “뿌리 깊은 친일 디엔에이(DNA)가 있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니냐”고 질타했습니다.

일본 아베 총리를 배우라는 <조선일보>의 칼럼. 한겨레TV

독립군을 토벌하는 간도 특설대에 복무한 백선엽 전 대장이 지난 7월11일 세상을 뜨자, <조선일보> 등은 그의 친일 행적은 덮고 6·25 전공만 집중 부각하는 영웅담을 집중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백씨의 독립군 토벌 사실을 부인하며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을 약력에서 아예 빼놓기도 했습니다. 김 대기자는 “자신이 독립군을 토벌한 사실은 백씨가 일본에서 발간한 책 <대 게릴라전>에만 슬쩍 적어놓았다”고 밝히고 “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가 <간도특설대>란 책을 내면서 이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백선엽 전 대장이 일본어로 쓰인 책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에서 간도토벌대에 복무하며 조선인 게릴라를 쫓아다녔다고 증언한 내용. 한겨레TV

친일 청산 요구가 나오기만 하면 ‘국민 편가르기’ 운운하며 여러 프레임을 들이대 초점을 흐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친일을 진정으로 사죄하지 않는 이들은 그동안 어떤 보도를 내보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보며 확인해 보시죠.

친일 행각에 대한 사죄는 찾을 수 없는 ‘창사 100주년 조선일보 사설’. 한겨레TV

이정규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22> 한겨레 

☞기사원문: [김이택의 저널어택]100년을 이어온 친일DNA…‘적반하장 조선일보’

월, 2020/08/24- 00:13
0
0

양상훈 칼럼, 이승만 일본보다 더많이 친일파처벌?
방학진 민문연 실장 “반민특위법 폐지 처벌 무효…조선 동아 존재, 친일청산 못한 증거” 정운현 “역사의 무지”

조선일보 주필이 생전에 친일파를 한 명도 보지 못했으며 이승만 정부가 일본보다 더 친일파를 많이 처벌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규명해온 이들은 “역사의 무지에서 오는 궤변” “조선일보의 존재가 친일청산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반발했다.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은 지난 10일자 ‘양상훈칼럼’ ‘친일파 장사 아직도 재미 좀 보십니까’에서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친일파’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며 “일본 정권의 대한(對韓)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친북파·친중파는 심심찮게 보았지만 친일파만은 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침략 전쟁에도 일리가 있다는 아베 같은 사람에게 찬성하는 한국민이 누가 있나”라며 “한국처럼 ‘친일 청산’이 확실하게 이뤄진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썼다.

최근에 독립운동가 후손인 광복회장 등이 제기하고 있는 친일 청산 필요성을 두고 양 주필은 “이들이 지목하는 친일파는 대부분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라며 “송장에게 칼질을 하는 형벌이 있었던 조선 시대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송장과의 싸움이 더 자주 벌어진다”고 조롱했다. 양 주필은 특히 ‘친일파 씨가 마른 나라’에서 친일파 공격을 하니 엉터리 주장에 대부분 거짓이라며 그 사례로 “반일(反日) 세계 챔피언과 같은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승만 정부가 친일청산법을 제정하고 559명을 체포했으며, 221명을 기소해 38명을 재판으로 처벌했다고 주장했다. 양 주필은 돌연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의 경우와 이승만 정부를 비교했다. 그는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였는데 그 전범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된 사람은 22명이었고, 일본 전범을 처벌한 도쿄 재판에서도 기소된 사람은 25명이라며 이승만 정부 친일 청산의 10분의 1이라고 했다. 이승만 정부의 친일파처벌이 일본보다 많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역사의 왜곡이다. 이승만은 반민특위처벌법 제정을 반대했고, 법 공포후 끊임없이 특위 활동을 방해하고 법을 바꾸려 했다. 국회프락치사건을 만들어 반민특위 위원과 특경을 체포해 와해시키도록 지시한게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정부는 1949년 9월5일 반민특위를 폐지하고 업무를 대검과 대법원으로 이송했다. 그 뿐 아니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1년 2월 법이 완전히 폐지됐다. 폐지법률(176호) 부칙은 “폐지된 법률에 의해 공소 계속중의 사건은 본법 시행일에 공소취소된 것으로 보고, 이 법에 의한 판결은 법 시행일로부터 그 언도(판결)의 효력을 상실한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반민특위처벌법에 의해 처벌된 자는 법적으로 한 명도 없다. 양 주필은 이런 사실을 누락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20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라-꼴라보레시옹(나치협력자)을 처벌한 규모가 프랑스의 경우 인구 10만명 당 징역형이 94명, 덴마크 374명, 네덜란드 419명, 벨기에 596명, 노르웨이 633명이었다”고 제시했다. 프랑스가 나치협력자를 징역에 처한 건수는 3만9900건, 벨기에 5만5000건, 네덜란드 5만건 이상이었다(조성오, ‘우리역사이야기’ 1993, 돌베개). 방 실장은 “더구나 일본과 독일과 같은 전범국가와 비교한 것은 우리나라 식민지였는데, 유럽의 방대한 독일부역자 처벌 사례를 누락한 채 전범국가의 처벌을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비교”라고 반박했다.

▲102살의 애국지사 임우철 광복회 원로회의 의장(왼쪽 네번째), 김원웅 광복회장, 반민특위 유족들이 지난 6월4일 오전 국회에서 친일경찰이 1949년 6월6일 반민특위를 습격했다며 경찰청장의 공개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신이 친일파를 본 적이 없다는 양 주필의 주장을 두고 방 실장은 “여야합의로 만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에 따라 위원회가 지정한 국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가 1006명이며, 양 주필이 봤거나 알만한 생존자는 백선엽(최근 별세) 정도”라며 “우리가 말하는 친일파는 현재 일본과 친한 사람이 아니라 전범국인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를 말하는 것인데, 본인이 그런 사람을 못봤다고 친일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말이 안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처럼 친일파청산이 이뤄진 나라가 없다는 양 주필의 주장에 방 실장은 “나치에 협력한 유럽 신문들은 많이 폐간됐다”며 “현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존재 자체가 친일파 청산이 안됐다는 좋은 본보기”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동아일보 100년 부역언론의 민낯이라는 전시회 자료에서 “드골의 프랑스 임시정부가 민족반역자 처벌을 위해 부역자재판소를 설치해 재판에 회부된 538개 언론사 중 115개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폐쇄됐다”며 “그 가운데 64개사는 전 재산을 51개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다”고 썼다. 연구소는 “반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친일 원죄에 대한 한마디 반성도 없이 분단과 냉전에 편승해 주류언론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고 지적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도 20일 미디어오늘과 SNS메신저를 통해 양 주필 칼럼을 두고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궤변”이라며 “‘신판 친일파’의 발호를 지켜보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은 아직 이에 관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미디어오늘은 양상훈 주필에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21일 오후 5시 현재까지 연결이 되지 않았고, 문자메시지와 SNS메신저, 이메일을 통해 방학진 실장과 정운현 전 처장의 견해에 관해 질의했으나 답변이 오지 않았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도 질의했으나 아직 답변을 얻지 못했다.

▲ 조선일보 8월20일자 ‘양상훈 칼럼’

조현호 기자 [email protected]

<2020-08-21>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친일파 한명도 못봤다는 조선일보 주필에 연구자들 “궤변”

월, 2020/08/24- 19:34
1
0

8월26일, 순국 102주기 맞는 만송 유병헌(1842~1918)을 기리며

▲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 현충사에 전시된 만송의 초상. ⓒ 서대문독립공원 전시사진

8월 26일은 경북 칠곡의 선비 유병헌(劉秉憲, 1842~1918)의 순국 102주기다. 1918년 이날, 그는 보안법과 주세령 위반으로 복역하던 대구 감옥에서 8일간의 단식 끝에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다. 향년 77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면서 시작된 그의 항일 투쟁은 일제 치하의 납세뿐 아니라, 토지조사 사업까지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세 차례의 투옥 끝에 마침내 옥중 순국한 것이다.

유병헌은 1842년 경상도 인동도호부(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강진마을)에서 유익원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호는 만송(晩松). 그는 진주 민란(1862)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과 강화도 조약(1876) 등을 겪으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칩거해 학문에 전념할 수밖에 없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국권을 침탈하였을 때 그는 예순셋 노인이었지만, 이 강골의 선비는 서책을 덮고 조약의 무효화와 왜적 격퇴를 주장하는 상소로 여론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아 결국, 경술국치(1910)에 이르자, 죽기를 각오하고 대궐을 바라보며 통곡한 뒤 곡기를 끊기도 했지만, 그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유병헌은 ‘오적 성토문(聲討文)’을 큰길 가에 게시하여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五賊)과 송병준·조중응 등 정미칠적(七賊), 이용구 등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매섭게 꾸짖었다. 또,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의 시골 선비들에게 서찰을 보내 일제에 항거하기를 촉구했다.

“한 나라에 해가 둘일 수 없다. 조선의 해는 고종황제뿐이다. 일왕(日王)은 인정할 수 없으니, 첫째, 망국의 한일합병을 혁파하라. 둘째, 경술국치를 투쟁으로 회복하라. 셋째, 국치 오적을 주살하라. 넷째, 일왕의 모든 법령과 그 행위는 부정하라. 다섯째, 일왕이 내린 어떤 조세나 부역도 응하지 말라.”

“어떤 조세나 부역도 응하지 말라”, 납세거부 주도한 유병헌

그는 총독과 일본 내각은 물론, 청나라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각국 공관에 서신을 보내 병탄의 불의함을 항의하면서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1911년 친일 주구(走狗)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송덕비를 충청도 청산(충북 옥천)에 세우려 하자, 바로 청산향교에 이를 엄중히 항의하는 통문을 보내기도 했다.

▲ 금오산 선봉사로 가는 길가 바위에 새긴 만송의 글씨. “덧없이 변하는 세태에 울면서 / 이 산에 들어오게 되었노라.” 이 바위는 세 차례나 부근을 찾은 끝에 간신히 발견했다. ⓒ 장호철

일제는 유병헌을 회유하고자 작위 수여와 은사금(恩賜金)을 제안했다. 강제합병에 협조한 대가로 일왕이 친일파 귀족들에게 준 은사금과 작위는 ‘은혜로운 돈’이 아니라, 매국의 상급(賞給)이었다. 그가 이를 단호히 거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1911년 5월 논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 은혜와 원수를 분별하여 부숨)’을 써서 은사금 받기를 거부하면서 일제를 규탄하고 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대저 은혜와 원수는 마치 백과 흑 같아서 변별할 필요 없이 일목요연한 것이다. 아! 섬나라 오랑캐가 세력을 얻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임금을 쫓아내고 우리 생민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저들은 도리어 재물로 우리 늙은이들을 유혹하여 은사금이라고 하니, 이 어찌 흑을 가리켜 백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간교한 꾀로 함정을 삼고 재물과 이익으로 미끼를 삼는 데 불과하니, 조선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말 것이다.

(……) 차라리 원수의 칼에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을 받지 않고 스스로 죽을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무릇 우리 조선인은 이를 보고 경계하고 삼갈지어다.”

1911년에 인동군이 관내 면서기의 급료를 충당하려 면마다 부담금을 할당하자, 북삼면장도 각호당 21전 8리의 부담금을 매겨 이를 징수하려고 했다. 유병헌은 이를 비판하면서 네 차례에 걸쳐 이 명령에 불응하라는 내용의, ‘광고’·’민폐 혁파의 건’·’각 마을 모든 이에게 게시한다’·’널리 천하에 고(告)하는 문(文)’ 등의 격문을 썼다. 그는 세 차례는 이를 약목면 헌병파견소 게시판에 게재하였고, 마지막 1부는 지니고 있다가 일본 헌병에게 압수당했다.

바위에 새긴 회한과 우국충정

이 일로 유병헌은 1911년 12월, ‘불온 언론 유포’라는,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개월 형을 선고받아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2월 초하루, 그는 숭오리의 금오산 아래 선봉사(僊鳳寺) 대각국사비로 가는 길가 바위에 “덧없이 변하는 세태에 울면서[읍창상(泣滄桑)] / 이 산에 들어오게 되었노라.[입차산(入此山)]”라는 글씨를 새겼다.

▲ 생가 근처에 있는 ‘통곡 바위’에 만송이 새긴 두 줄의 글귀.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 우리 임금을 잊지 못하노라.” ⓒ 장호철

첫 옥고를 치른 뒤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현실에 대한 회한을 가누지 못했던가. 그는 같은 해 7월 25일에도 생가 근처에 있는 강릉 유씨 중시조 유창(劉敞)의 영정각 있던 자리 뒤의 ‘통곡 바위’에 두 줄의 글귀를 새겼다. 그가 바위에 글을 새긴 것은 그 자신의 진정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북망통곡(北望痛哭)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 오왕불망(吾王不忘) 우리 임금을 잊지 못하노라.”

유병헌은 1912년,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세원 확보와 토지 수탈 목적과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하고자 시행한 토지조사 사업(1910~1918)에 따른 측량을 원천 거부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논밭마다 꽂아둔 측량 푯말을 죄다 뽑아버린 것이다.

그는 창덕궁에 세금을 내겠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는 일제에 납세를 거부함으로써 일제의 통치를 전면 부정한 것이었다. 유병헌은 약목과 김천의 헌병대, 김천경찰서 등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대구 감옥에 갇혔다. 그해 12월 유병헌은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토지조사법 위반, 토지측량 총규칙 위반 혐의로 금고 5개월 형을 선고받고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1914년에 총독의 명령으로 문안드리려 한다며 총독부 수석 서기 야마카게(山陰)가 찾아왔다. 야마카게는 그를 회유하고자 “봄바람 봄비(춘풍춘우 春風春雨)가 꽃을 잘 피우게 하지만, 잘 떨어지게도 한다, 어제 친구가 오늘 원수가 되니 인간 만사가 다 꽃과 같다”라는 내용의 시를 쓰자, 유병헌도 시로 응답했다. 

“하죽하송수세태(夏竹夏松隨世態) 여름 대나무 여름 소나무 세태를 따르는 듯하나 / 동송동죽유수여(冬松冬竹有誰如) 겨울 대나무 겨울 소나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 청천지유조선일(靑天只有朝鮮日) 푸른 하늘에 오직 조선 태양만이 있을 뿐이니 / 창해추성필부지(滄海椎聲必不遲) 창해 역사의 철퇴 소리 머지않아 있으리.”

1915년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기려수필(騎驢隨筆)>의 저자 송상도, 만해 한용운 등 숱한 지사들이 그를 찾아와 시국을 논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단체와 무관하게 홀로 저항을 이어온 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18년 2월, 칠곡군청에서는 유병헌이 양조 면허 없이 밀주를 빚은 사실을 알아내고 가택을 수색하여 막걸리 4되를 압수하였다. 이에 분개한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칠곡군수와 약목면 헌병대 등에 자신의 의지와 일본 패망을 예언하는 글을 보냈다. 

 “우리 조선에서 태어나서 우리 황제를 배반하고 일본을 따른 군수와 같은 자는 개와 말만도 못한 자이다. 세금은 우리 황제에게 내야 한다. 죽어도 적국에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보다 일본의 법률을 따를 것이 아니다. ” – 칠곡 군수에게 부치는 첫 번째 글(1918.2.7.)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한 놈은 왜놈이고 이 보복의 생각은 한시라도 잊은 적 없다. 그리고 나 스스로 술을 만들고 나 스스로 마시는데 감히 일본이 간섭할 필요가 없다.” – 칠곡 군수에게 부치는 두 번째 글(1918.2.7.) 

1918년 3월, 유병헌은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주세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과 벌금 20원을 선고받았고 공소(항소)했다. 당시 법정에서 그는 “지세(地稅)도 안 내는데 주세(酒稅)를 내겠느냐. 너희 일왕(천황)의 머리를 베어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지 못한 게 한이다”라고 일갈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지세도 안 내는데 주세를 내겠느냐”  

4월에 대구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에 대해 원심판결이 취소되어 금고 6개월로 감형되었으나, 그의 결기는 여전했다. 감옥에서도 항거를 멈추지 않아,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다 감옥에 갇혔으니 ‘조선독립 만세’라도 크게 부르자고 제의하여 조선독립 만세 소리가 매일 철창을 뚫고 복도에 울려 퍼지게 했다. 유병헌의 옥중 충절은 경상도는 물론 충청도까지 퍼져나가 인동, 영덕, 경주, 울산, 청산 등지에 그의 행적을 기리는 목비(木碑)가 세워졌다고 한다.

숭오리 산 34번지의 만송 묘소. 길라잡이 없이 한 시간 넘게 산등성이를 헤맨 끝에 찾았다. 기일이 가까워지는데, 봉분엔 아까시가 자라고 군데군데 꺼졌다. ⓒ 장호철

어느 날, 그는 아들 홍열(洪烈)을 불러 “7월 20일(음력) 아침에 옥문 앞에 와서 시신을 거두어 가라”라고 일렀다. 을사늑약 이후, 한결같은 결기로 일제에 저항해 온 십몇 년의 투쟁을 돌아본 뒤, 절명시에서 밝혔듯 “나라 운수 끝내 회복되기 어려우니 / 감옥에서 죽는 것 달갑기만 하다”라며 그는 마침내 자진할 것을 결심한 것이었다.

세 번째 투옥되어 복역한 지 일곱 달,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곡기를 끊은 지 여드레 만에 만송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마감했다. 가족들이 시신을 받아 여관에서 염습할 때, 옷에서 나온 ‘절명시’에서도 “차라리 끓는 물 속 괭이처럼 죽을지언정 / 개 염소 같은 왜놈 신하 될 수는 없다”라는 결기의 서슬이 푸르렀다.

대구 감옥에서 북삼까지 백여 리를 운구하는데, 삼남의 유림과 선비들이 길게 줄을 지어 애도하였고, 마을 들판에 조문객이 구름처럼 하얗게 모여들어 일경이 민란을 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송 유병헌은, 비록 포의의 선비였으나 망국을 부끄러워하며 경술년에 자진한 매천 황현(1855~1910)을 뒤따랐으니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다.

을사늑약 전후부터 경술국치, 삼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자정(自靖) 순국한 지사는 모두 61분에 이른다. 그중 경상도 출신은 18분인데, 칠곡 인근에서는 유병헌 외에 성주의 장기석(1990 애국장), 군위의 박능일(1990 애족장) 두 분이 있다.

▲ 순국선열 일람표. 칠곡 근처엔 유병헌 선생 말고도 성주의 장기석, 군위의 박능일 선생이 자정 순국했다. ⓒ 유교넷 홈페이지

장기석(1860~1911)은 일왕의 천장절(일왕 생일) 경축식 참석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구인하려 하자 일경을 목침으로 때려 중상을 입히고 대구 감옥에 갇혔다가 옥중 단식으로 순국했다. 박능일(1859~1917)은 경술국치 이후 민적법에 따른 신분등록을 거부하고 예안과 풍기 등지를 전전하다가 “원수를 섬기고 사는 것은 바다에 빠져 죽는 이만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영일 앞바다에 투신 순국했다.

유병헌의 생가에서 7Km 거리인 북삼면 오태동(현재는 구미시 오태동)에 악덕 친일 부호로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제3대 국무총리 장택상의 부친 장승원(1852~1917)이 살았다. 1904년 왕산 허위(1962 대한민국장)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관찰사로 나아간 장승원은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1907)에 군자금을 대기로 허위에게 약속하였으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 악덕 친일 부호로 광복회원에게 처단된 장승원의 생가. 아들인 국무총리 장택상의 의 호를 따 ‘창랑고택’이라 불리나, 주인이 바뀌면서 원형을 거의 잃었다. ⓒ 장호철

1912년 왕산의 형 허겸(1991 애국장)이 거듭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장승원이 오히려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허겸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908년 처형된 스승 허위의 시신을 수습한바 있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1963 독립장)이 다시 군자금을 요구하자, 장승원은 이조차 거부하고 일제에 밀고하려고 했다. 이에 결국 장승원은 1917년 11월 광복회원 채기중(1963 독립장)과 강필순에게 처단되었다.

그가 간 ‘순국’의 길, 장승원의 ‘매국’의 길

장기석, 박능일 선생은 모두 17, 8년 연하인데도 오히려 만송에 앞서 순국의 길을 갔다. 비록 교유에 이르진 못하였을지라도 선생은 이들 행적을 전해 듣고 있었으리라. 벼슬이 경상북도 관찰사에 이어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던 영남의 만석꾼 장승원도 만송보다 10년 아래다. 넘치는 부와 영화를 누렸지만, 그보다 한 해 앞서 비명에 갔고, 반민족행위자로 부끄러운 이름을 <친일인명사전>에 올렸다. 자진에 앞서 선생은 이들의 엇갈린 운명을 돌아보진 않았을까.

1990년에 정부는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를 기리고자 후손들이 1963년 숭오리 옛 집터에 재실 ‘숭의재(崇義齋)’를 세웠다. 같은 해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 아래 세운 ‘만송 유 선생 순국기념비’는 2015년 칠곡군 왜관읍 애국 동산으로 옮겨졌다.

▲ 1963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 아래 세웠다가 2015년 칠곡군 왜관읍 애국 동산으로 옮겨진 ‘만송 유 선생 순국기념비’. ⓒ 장호철
▲ 만송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1963년 숭오리 옛 집터에 세운 재실 ‘숭의재(崇義齋)’.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퇴락하여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 장호철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광복 전에 피살, 옥사, 처형 등으로 목숨을 바친 분들을 ‘순국선열’이라 이른다. 지금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 현충사에는 만송을 비롯하여 모두 이천팔백서른다섯(2835위)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들 위국 충정의 결과가 오늘날 조국이라는 수사는 진부할지언정 옷깃을 여미며 곱씹어야 할 역사적 진실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경술년으로부터 110년째 맞는 8월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2020-08-2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왕 머리를 베었어야” 법정서 일갈한 선비의 사연

 

화, 2020/08/25- 05:59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