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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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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admin | 월, 2021/08/09- 01:02

김남주 민변 베트남전TF 팀장 인터뷰① “문재인 정부, 사안 해결의지가 없어 보인다”

“저는 8살 한국군에 의해 (가족이) 학살당했고, 그 학살로 많은 가족을 잃고 혼자 오랜시간 고통속에 살아왔다. 오늘 이자리에 있기까지는 광장히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오게 됐다. 한국에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위해 한국 방문을 세차례나 했지만, 한국 정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한국 국회가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 듣고 너무 반가웠다.”

▲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다시 한번 호소하는 응우옌 티 탄씨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씨는 간담회에 참가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고 비판하며 “특별법이 속히 제정되어 한국정부가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간절히 부탁드린다”라고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Nguyễn Thị Thanh, 61세)씨는 한국 국회의 특별법 제정 노력에 대해 반가운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그는 지난 두달간에 걸쳐(6.30~7.22) 세차례 열렸던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연속간담회’에서 베트남 현지에서 화상으로 참가해 아픈 과거와 현재 심정을 토로했다.

이어 응우옌 티 탄씨는 한국정부가 민간인학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하기를 바라냐는 질문에는 “(1968년) 퐁니퐁넛 학살, 우리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저와 같은 어린 아이였거나 여성들이었다. 수많은 목숨들이 굉장히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 이 퐁니퐁넛 학살이다. 저 뿐만이 아니라 이 학살의 생존자들, 가족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학살을 기억하고 있고, 이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한번도 우리를 찾아온 적 없고, 이 사건에 대해 단 한번도 관심을 갖거나 이 사건의 실제에 대해 저희에게 물어보거나 조사한 적이 여지껏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면서 “저를 포함해 103명의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정부에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저희는 이제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되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기뻐했다. 저는 이 청원서가 오히려 저희를 더 슬프게 할 것이라거나, 이 청원서를 받아든 한국정부의 지금 태도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특별법이 속히 제정돼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바란다. 역사적 진실이 밝혀져야 이런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므로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다해서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한-베 수교 30주년 앞뒀지만… 해결 못한 숙제

내년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1955년부터 20년간 이어졌던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은 약 35만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1964년에서 1973년까지 8년 6개월간 한국군 피해는 사망 5099명, 부상 1만 962명으로 추정된다. 반면 구수정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약 9000명으로 추정된다(관련 기사: “살아남은 내가 진실 말해야”… 그분이 돌아가셨다).

▲ 베트남전 관련 빈안학살(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최대 민간인학살로 알려짐) 생존자 응우옌떤런씨는 지난해 11월 숨졌다. 그는 생전 빈안학살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20년간 증언해왔다. 지난 2015년에는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에서 한국 정부에 진실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진 이재갑 작가) ⓒ 한베평화재단, 이재갑

1999년 구수정 당시 베트남 특파원이 한겨레21을 통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보도한 이래 학살피해 마을의 의료지원을 비롯해, 작가단체및 다양한 민간부문의 교류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일환으로 이어졌다. 한겨레사는 46주간 캠페인을 통해 앞지면을 할애하며 이 사건들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고, 긴 펀딩캠페인을 통해 10만달러를 모금해 2003년 베트남 푸옌성에 한베평화공원을 설립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참전군인들의 한겨레신문사 난입으로 한때 윤전기가 멈추는 등 이 문제로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활동과 지원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을 계승하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고자 2016년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을 주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는 몇 종의 교과서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고, 제주 강정마을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베트남 피에타’ 조각 (김서경 김운성 작가 제작)도 세워졌다.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1기에 해당하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고, 2018년에는 시민평화법정이 열려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손해배상, 공식인정,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 모두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역사적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다.

▲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평연)의 베트남 현지 진료 모습 치과 한의과 의료인및 일반 후원회원 320여명으로 구성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평연)은 1999년 이래 지속적으로 현지에서 구강보건교육사업및 수술등 의료지원 활동을 해왔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이에 민변을 비롯한 한국 시민사회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한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이하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중이다. 이외에도 2019년 4월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은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조사및 사실인정, 공식 사과 및 공식 선언,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요구했고, 응우엔 티 탄씨는 현재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청구도 진행중이다.

필자는 연속간담회에서 사회를 맡았고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인 김남주 변호사와 특별법 제정및 그간의 진상규명 노력에 대한 여러 쟁점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이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게된 취지와 배경은 무엇인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엔 티 탄씨를 대리해 개별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책임을 인정하라고 가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되는 제도다. 사실 가해자가 반성한다면 먼저 스스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다가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베트남전쟁 당시에 민간인에 대해 여러가지 법적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한 공적확인이 필요하다. 그것을 법률을 만들어서 제도로서 추진하고 한 개의 사건이 아닌 여러가지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자는 게 이번 법 제정의 취지다. 8월 25일 입법법안공청회를 하고 8월말 또는 9월초에 법안 발의를 할 예정이다.”

– 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공식인정, 손해배상,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을 인정한 시민평화법정의 판결 내용과 유사한가?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춰놨다. 진상규명을 신청하고,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대한민국에 있는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 정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관련자를 출석시켜서 진술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조사절차 규정및 조사결과에 따라 진상규명 결정과 불능 결정등 공적인 결정들을 위원회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백서형태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 보고서에는 시민평화법정에서 주문으로 담았던 피해보상, 사과,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등 이런 내용들을 담아서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의 목적은 사실규명에 있고, 그 이후에 피해보상등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않고 권고만 할 수 있어 이후의 과제로 남겨두며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반대가 심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부터 단계적으로 가려고 한다.”

▲ 베트남전 민간인학살TF 팀장 김남주 변호사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을 맡고 있는 김남주 변호사(가운데)는 연속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며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고령의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 베트남은 진상규명과 사과를 원하지 않는데 왜 한국인들이 나서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오해가 많은 것 같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잘못된 인식이다. 베트남의 피해자들은 이전에도 진상규명을 명확히 원하고 있는데 초기에 우리가 그분들과 소통하는 네트워크가 없었기 때문에 명확히 전달이 안되었을 뿐이다. 응우옌 티 탄씨 등 생존자들은 2015년부터 한국에 와서 국회에서 명확히 요구했다. 심지어 작년 103명의 피해자들이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규명하고 사과하라는 명시적 요구를 했다. 베트남 정부가 명시적으로 요구를 하지 않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베트남 방문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었는데, 사과를 하지 않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라는 유감표명으로 발언했다. 언론에는 대통령이 사과를 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지만, 베트남정부에서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시적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보도는 있었다. 위안부 문제처럼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할 순 없다. 국가보다는 피해자를 더 중심적으로 봐야하고, 피해자는 명시적으로 원하고 있다. 더 이상 논란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일제시대 일본은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들에 대해서 강제낙태 등 인권침해 행위를 했었다. 그때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는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일본시민사회에서 먼저 소록도를 찾아가 이분들을 면담하고 이분들 피해를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했었다. 피해자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해국가의 시민단체가 나서는 게 유례가 없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간차원에서 일본도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듯 이것을 배워서 우리도 베트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주제를 다루는 싱크탱크 ‘프리덤 하우스’에 의하면, 베트남은 수십년간의 베트남공산당 (CPV) 일당체제로 표현과 종교의 자유및 인권활동이 완전히 보장된 성숙한 민주주의사회가 아닌 것으로 알고있다. 피해마을 유족이 문제해결에 목소리 내는 것에 대해 베트남 국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이 명시적으로 외부에 드러난 적이 없기에 입장표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정부는 사실상 이 문제를 막지 않고 있다. 베트남은 모두 관영언론인데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던가 응우옌 티 탄씨가 한국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했다던가 이런 보도를 막지 않고 있다. 이 분이 소송하는 것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 또는 해결되는 것을 굳이 나서서 막진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 한국 정부가 2019년 103명의 피해자 청원을 받고서도 ‘국방부 공식기록에 확인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무성의한 답변을 했다고 들었다.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한국 베트남 퇴역군인 증언, 피해자 증언 등 증거가 많은데도 베트남 청원인들에게 한번도 연락해보지 않고 자료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 피해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정권교체 후 피해자들은 많은 개선과 변화를 예상했을텐데 현 정부는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저는 현 정부가 해결의지가 없다고 본다. 어느 나라가 학살기록을 하겠나. 당연히 국방부의 공식 교전기록인 ‘파월한국군전사’ ‘전투상보’엔 기록이 없다. 사실 해결하려고 하면 우선 자료만 볼 게 아니고 참전한 분들의 말씀도 들어봐야한다. 한겨레 21에서 해당 중대 소대장들이 ‘우리 중대가 퐁니퐁넛마을에 들어갔고, 우리 소대는 아니지만, 우리 뒤에 따라오던 소대에서 총소리가 났고, 학살했다고 하더라’라며 다 증언하셨다. 아직 생존한 분들이 계시는데 이분들에 대한 조사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당시에 중앙정보부에서 그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되니까 조사를 했다. 국가정보원에 있는 기록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베트남측 협조를 구하기 어렵다고 베트남 탓만 하는데 한국이나 미국 자료도 있고, 아직 생존자도 있다. 의지만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충실한 조사를 하지 않고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의지가 너무 없는 거다.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고 저희는 전해들었는데 그게 관철이 안되는 건지, 즉 대통령의 뜻을 아래 기관들이 거스르는 건지, 대통령의 뜻이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소극적인 태도인건지 잘 모르겠다. 많이 아쉬운 점이다. 이미 50년이 넘은 일이다. 사실관계는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 바탕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진실은 가둘 수 없는 것 아닌가.”

▲ 한국시민사회의 국방부앞 기자회견 모습 2019년 4월 4일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은 진상조사,사실인정, 공식 사과등을 요구하며 청와대에 직접 청원하였으나 2019년 9월 국방부는 보유하고 있는 한국군 전투 사료에 민간인 학살 기록이 없고 베트남당국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 한베평화재단

(2편 “베트남전 생존자들에게 희망고문 그만했으면”로 이어집니다)
김남주 민변 베트남전TF 팀장 인터뷰② “피해자도 참전군인도 고령,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해야”

▲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 <기억의 전쟁>중 2018년 베트남 시민평화법정 모습 민변에서 이 시민법정의 틀을 만들었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따져보고 법률적 다툼을 진행했다. 피해 생존자가 원고로 참여했고 참전군인의 증언도 있었다. 재판부로 위촉된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현 헌법재판관), 양현아 서울대법학전문대 교수 3인은 대한민국의 책임 내용 (공식인정, 진상조사, 손해배상)등을 인정했다. ⓒ 배급사 시네마달

– 퐁니퐁넛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엔 티 탄씨가 현재 국가배상소송을 하고 있다. 소장이 제기된 지 1년 2개월 경과되었고 쌍방에서 쟁점 정리중이라고 들었다. 내년쯤 재판이 끝나고 1심선고가 예상되는데 승소할 가능성은 어떤가.

“내년에 선고될 것이라는 것은 추정이고, 재판 진행경과에 따라 다르다. 국내 군사재판에서는 민간인 살해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례들이 꽤 있다. 전시 강간죄로 판결받은 판결문도 남아있다. ‘민간인을 살해한 적이 없다’는 건 맞지 않고, 이미 법원에서 공적확인을 받은 사례가 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일이 묻혀있다. 소송관련해서 증거는 꽤 많다. 당시 미군과 마을출신이 포함된 남베트남민병대가 약 400미터 거리에서 같이 망루에서 지켜봤다. 이 사건 직후에 이들이 마을에 들어가 생존자를 구조, 시신을 수습하고 사진도 찍었다. 미군 제3해군상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시작해서 미군, 남베트남민병대, 생존자들의 생생한 진술을 받았다.

그게 미국 문서보관서에 있었고 저희가 확보해서 법원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그 마을에서 작전했던 해병2여단 1중대 병사와 소대장들 증언을 모두 봤을때 한국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 이밖에 다양한 법적 쟁점도 있다. 국가배상청구를 할때 외국인이 청구할 경우에는 한국인도 베트남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는 ‘상호보증’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존재하냐 여부,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느냐는 쟁점도 있다. 사안의 입증 뿐만이 아니라 이런 법리적 쟁점을 넘어서야 하는 사건이라서 결과는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법원이 시효를 내세워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에는 인도주의에 반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국정원에게 퐁니퐁넛 사건의 조사기록을 요청하자 정보공개 소송절차통해 답을 받아가라해서 4년 소송으로 15글자만 받았다. 국정원의 사실관계 조사협조를 위해 관할인 국회정보위에 노력해달라고 간담회에서 발언하셨다. 국정원 개혁도 베트남전쟁 진상규명에 필수요건일까.

“저희가 퐁니퐁넛 사건에서 ‘국정원의 사실조회를 통해 자료를 제공하라고 명령해주십시오’라고 법원에 신청하자 법원이 저희 신청을 받아들여서 국정원에게 사실조회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사실조회에 응하지 않고 정보공개절차를 통해 받아가라고 답을 했다. 15자를 소송을 통해 받아낸 것처럼, 이는 기나긴 소송을 통해 뺏어가라고 하는 비겁한 결정이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 꼴밖에 안 된다. 인권 국가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이 할 행동은 아닌 것이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과거사진상규명법처럼 국정원에 자료를 요청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그를 통해서 국정원으로부터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한겨레가 46주간에 걸쳐 펀딩 캠페인도 하고, 앞지면을 할애해 대중적으로 사안을 널리 알려 마치 NGO 역할을 했다. 반면 참전군인들의 한겨레 신문사 습격사건은 한국사회내에서 베트남전을 ‘반공과 발전’의 가치로 신봉하는 냉전의 시각과 인권및 생명권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쌍방간 기억방식에 간극이 큰데 이런 시각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이제는 서로 대화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전에는 한겨레 신문사에서의 충돌처럼 서로 힘겨루기, ‘듣든 말든 나는 내 의견을 큰소리로 외치겠다’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도 들어보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전군인들도 어떤 점에서 불편한지 자세하게 알아보는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학대한 사실이 없는데 왜 참전군인 전체를 매도하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고, 베트남전이 게릴라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가 민간인을 살해하긴 했지만 민간인과 게릴라가 구분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어서 내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또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잘못됐지만 상관 명령에 따라서 한 행위라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시는 분 등 여러 층위가 있을 것 같다. 또 ‘차제에 진상을 규명해서 문제되는 부대와 시기만 확인을 해달라’며 반대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대화를 통해 특정행위가 국제인도법규범을 위반한 것인지, 자료부족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인건지 등 고민을 해봐야 되는 문제같다. 이에 더해 참전군인들이 연세가 무척 많으신데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사회가 같이 고민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 2001년 5월 하미 위령비 비문 사건에 대해서는 이번에 간담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68년 청룡부대에 의해 주민 135명이 희생된 꽝남성의 하미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기위해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2만5천 달러를 지원해 2001년 위령비를 준공했다. 이는 양국간의 과거청산을 위한 민간단체 최초의 지원사업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한국 대사관 이용준 참사관 (<잊혀진 상흔을 찾아서>의 저자)및 참전군인단체의 개입으로 준공식전 비문을 덮은것은 독일에서 일본정부의 외압으로 있었던 베를린 소녀상 철거압박및 레겐스부르크 소녀상 비문 철거문제와 너무 닮았다. 이 비문을 다시 새기는 것도 진상규명과 아울러 필수 과제라고 본다.

▲ 한국정부의 외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팀장)은 하미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한베평화재단에게 한국정부의 압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내용의 액자를 지속적으로 전달받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저는 위령비 건립에 대해 전우회에서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에 의견을 낼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나 이분들이 느꼈던 공포나 분노를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 의견을 내거나 수정요청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더더욱 한국 대사관측에서 알고서 이 문제를 전우회측에 알리고 그 비문을 덮게끔 현장에서 관여했던 점은 매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시 비문을 열어야하는데 한국정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미마을 유족회나 지역인민위원회는 한국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해서 비문을 덮고 있는 상태이기때문에 한국정부가 막고 있는 것인지, 다시 열어도 문제가 없는 것인지 한국정부의 의사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전우회가 없어져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기때문에 대사관측과 소통해보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다.”

– 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 생존자가 ‘더 이상 오지말라, 아니면 약이라도 달라’고 아주 간절한 말씀 하시는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셨다. 지원측면에서 어떤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할까.

“대통령이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겠다고 알려졌는데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서, 베트남정부가 원하지 않아서 안 했다고 한다면 그 절절한 마음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인도적 지원이다. 고령에다가 총 칼 등 많은 상처가 있으니까 치료가 제일 급하다. 고통 완화등 치료를 꾸준히 해야하는데 노무현정부 당시 종합병원이 지어진 이후에 지원이 없었다. 이동식병원 시스템으로 학살마을을 방문해 치료지원을 하면 좋겠다. 고령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제일 시급한 문제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한의사들의 베트남 현지 학교 방문 모습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소속 한의사들이 직접 베트남 현지의 학교를 방문해 성장교육을 진행했고 500여명의 베트남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 19차례 의료지원사업을 해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를 비롯해 작가및 예술단체들이 민간에서 그간 꾸준히 교류가 있었다는 그 자체로 상당히 고무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 무려 20년을 이어온 운동이 이렇듯 꺼지지 않는 불씨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이 운동을 해온 세대가 민주화운동과 그 이후의 세대들이라서 인권의 가치에 감수성이 높은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80년 광주학살의 기억도 있어서 그분들에게 손을 내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우리도 겪었기에 동류의식이 있어서 동화가 잘 되는 것 같다.

아울러 멀리까지가서 많은 비용을 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탄탄한 조직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특히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조직이 주도하신 것 같은데 사회참여를 하고 싶어하는 치과의사들의 열망과 의료전문성을 잘 접목하고 조직화해 풀어낸 것 같다.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정말 대단하다.”

– 관련 특별법제정을 위해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특별법이 특별한 법은 아니고, 과거 사실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간 수많은 의혹과 사회적 고발이 있었고 너무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것을 다 덮고 가기에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지향, 또는 품격과 맞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아시아에서 인권을 선도하는 국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됐다. 해결의 방법으로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다. 그 진실속에서 평가가 나올 것이고 한걸음씩 내딛으면 된다. ‘당장 사과하고 당장 배상하자’라기보다는 차근차근 사실확인하고 그 단계에서의 재발방지, 여러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류는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면서 한걸음씩 전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되고, 전쟁에도 인권의 가치와 인권규범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험악해지는 미중패권 갈등 속에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은 가까운 미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베트남학살 진상규명은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에 닿아 있다. 한국 시민들도 진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같이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

▲ 한국시민사회로부터 자전거를 전달받는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 베트남나비평화기행 푸옌성 자전거 전달식 (2020년 11월 10일) 한베평화재단, 정의기억연대, 세브란스노사공익기금은 공동으로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를 통해 3개 학교 150명의 학생들에게 150대의 자전거를 전달했다. ⓒ 정의연 공식 블로그

관련 연속간담회 링크는 다음과 같다.

-1차 연속 간담회: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초청 간담회>
-2차 연속 간담회: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
-3차 연속 간담회: <베트남전쟁 한국군 피해마을 지원 현황과 과제>

한편 간담회는 국회의원 우원식, 우상호, 기동민, 이재정, 이규민, 이소영, 강민정, 최강욱, 윤미향을 비롯해, 한베평화재단과 더불어 경계를넘어, 다산인권센터, 대안문화연대, 마감마녀, 마을과아이들,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사람과공감, 성미산학교, 소박한자유인, 수요평화모임, 식민지역사박물관,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연세대학교동아시아수용소연구모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인권과평화를위한국제민주연대, 인권교육센터들, 전쟁없는세상, 제주43범국민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피스모모, 피스모모평화페미니즘연구소, 화성외국인보소호면회활동마중, 향린교회가 공동주최로 참여하고 있으며, 재단법인 동천이 후원했다.

<2021-08-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생존자의 절규 “한국, 베트남전 피해자 고통은 외면”

☞기사원문: “한국정부, 베트남전 생존자들 희망고문 그만했으면”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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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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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0523-1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수, 2019/01/2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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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우철훈 선임기자

2019년은 3·1운동 100년, 상해 임시정부 100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단 한 명의 독립운동가도 누락되지 않게 찾아라”고 ‘엄명’을 내렸다. 보훈처는 최근 전국 시·군·읍·면사무소에 있던 일제강점기 수형인 명부 전수조사를 통해 독립운동 수형자 5313명을 찾아냈다. 이 중 2487명은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 정부와 민간단체도 별도의 위원회를 만들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문·방송을 비롯한 많은 언론도 역시 일제강점기와 항일투쟁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기획물을 쏟아내고 있다.

충남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은 1987년 8월 15일 문을 연 대한민국 최대 독립운동사 전시·연구·교육·홍보기관이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부터 준비해 국민 성금과 모금, 정부 예산 등 말 그대로 온 국민이 합심해 만들었다. 아마 올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기관일 것이다. 이준식 관장(63)은 한국독립군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손자다.

한국독립군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자

-3·1운동 100년, 임정 수립 100년이다. 올해 의미는 역시 1919년 4월 11일 나온 임정헌장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라는 선언에 있다 할 수 있나.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을 잡으라면 바로 1919년이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혁명적 변화가 이뤄진 때다. 당시는 국민주권주의의 선언적 의미가 강했다면 이후 100년의 역사는 이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어떤 외국학자가 한국은 세계 혁명운동사에서 100년간 끊임없이 혁명하는 특이한 사례라고 하더라.”

-독립기념관 차원에서, 또 산하 독립운동사연구소 차원에서 하고 있는 사업은 무엇인가.

“올 2월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려 하고 있다. 우선 2024년 완성할 예정인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의 경우 올 100주년에 맞춰 특별판을 낼 예정이다. 또 1000명 정도를 웹으로 전시하고, 독립기념관 제3전시관을 3·1운동 주제로 리모델링한다. 이번에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당시 만세시위 때 사용된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 원본도 특별 전시한다. 이들 자료는 워낙 소중해 평소에는 복제본만 전시했다. 기미독립선언서 원본은 국내에 3개밖에 없다.”

-이번에 보훈처에서 수형인 명부를 통해 새로운 독립유공자를 발굴했다. 독립기념관도 독립유공자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가.

“우리도 지난해 TF를 꾸려 360명 정도를 찾아냈다. 올해는 주로 3·1운동 유공자를 찾으려 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서훈받지 못한 김찬·강달영 등 이른바 좌파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을 시급히 재개해야 한다. 참여정부 때 이들을 대대적으로 서훈했지만 이명박 정부 중반 이후, 7~8년간 좌파 독립운동가 서훈이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해방 후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다. 사실 이 분들은 새로 찾아내기보다 정리해 포상을 신청하면 된다. 개인적으로 꼭 포상해야 할 사람은 허형식이다. 의병장 허위의 조카이자 독립운동 명문가 출신으로 본인도 항일무장투쟁 중 순국했다. 동북항일연군이지만 김일성 부대와 다른 부대였다.”

-4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하고, 큰형과 조카가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박진목은 ‘통일되지 않은 조국은 진정한 광복이 아니다’라며 서훈 신청을 하지 않다 돌아가셨다.

“그렇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조문기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부민관에서 친일 어용대회가 열리는 것에 분노,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분이다. 조문기 선생도 ‘자주적 통일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서훈을 받느냐’면서 신청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서훈을 신청했다. 그런 사람도 찾아내 포상해야 한다.”

이 관장은 임시정부는 좌우 통합의 결과였고, 또 좌우 합작기간에 가장 큰 성과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정신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완전한 자주독립은 민족통합과 떼려야 뗄 수 없다”면서 “그것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광장에 무명용사 상징물을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번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남북이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남과 북이 함께 추진할 다양할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 관장도 “정부 입장에서 올해 가장 시급한 것이 한반도 평화 분위기”라며 “일단 북에 있는 3·1운동 자료를 입수하고, 3·1운동 사적지에 대한 현지조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북에 있는 3·1운동 사적지 문헌조사는 이미 마친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사업은 우리 통일부가 승인하고, 무엇보다 북측에서도 입국을 허가해야 할 사안이다. 이 관장은 남북 독립운동사 문제에 대해 “좁게는 독립운동가 발굴을 위한 자료협조 부문이 있고, 더 넓게는 현존하는 현대사 역사인식의 간극을 좁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장의 외조부는 한국독립군총사령관과 한국광복군총사령을 지낸 지청천 장군(1888~1957)이다. 지 장군은 대한제국 시기 장학생으로 일본 육사에 유학, 중위시절 3·1운동 소식을 듣고 선배 김경천과 만주로 망명했다. 지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시작으로 해방까지 26년간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해방 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해 제헌·2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그는 “할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사시다 말년에 잠깐 정치를 한 분으로 군인으로서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면서 “만주에서 무장투쟁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하셨다”고 소개했다.

-독립운동사에서 무장투쟁은 외교투쟁에 비해 소홀히 연구된 분야다.

“할아버지에 대한 평전도 있고 논문도 몇 편 있다. 그러나 만주 무장투쟁은 독립군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별로 없다. 지난해 만든 신흥무관학교 뮤지컬 가사를 보니 ‘우리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다. 실제 무장투쟁이 그렇다. 나중에 귀국한 인사들의 회고록이나 일제 밀정의 정보문서가 발굴되지만 무장투쟁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연구가 금기시된 측면도 있지 않나.

“그렇다. 1910년에서 1930년대까지는 민족주의 계열이 무장투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무장투쟁 세력이 중국 관내로 이동한 1934년 이후 만주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이 활동했다. 한국학계에서는 민족주의 계열만 강조하거나, 사회주의 계열만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둘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과제다. 평화통일을 얘기할 때 남북 역사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부문으로 김일성 주석의 무장투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무장투쟁은 이제 학계에서 사실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19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짜 김일성, 복수 김일성을 얘기했는데, 지금 학계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김일성 주석의 실체 활동은 인정하는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선 남북의 견해 차이가 있다.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이 평화공존, 평화통일을 위해 필요한 과제다.”

이 관장은 요즘 많은 언론이 독립운동 다큐멘터리와 기획기사를 쓰는 것에 대해 “분단 이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조선의용대’를 다큐로 다룬 것을 보면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김원봉이 만든 독립무장투쟁 부대로 김원봉은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6·25 때 참전하기도 했다.

이 관장은 숨겨진 독립운동가를 찾고, 임정기념관을 세우는 것도 의미 있지만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고 아쉬워했다. 항일투쟁과 광복과정에서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찾지 못한 무명용사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조선에서, 만주에서, 저 연해주는 물론 시베리아 벌판에서 이름도 얼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문헌에 나오는 독립운동가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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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올해 사업계획 등을 밝히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운동 주도

사실 외국 정상이 방문했을 때 첫 번째 방문지가 바로 대부분 해당국의 무명용사비다. 우리는 1907년 영국 언론인 존 매켄지가 찍은 구한말 의병사진에 큰 감명을 받지만 정작 그들의 신원을 확인할 생각을 않는다. 이 관장과 기자는 사진 속의 의병 실체를 찾는 작업도 의미 있겠다는 것에 공감했다. 그는 “적어도 대한민국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무명용사를 추념하는 상징물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 상징물에 ‘이름은 모르지만 당신의 희생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라고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스크바 크렘린궁 바로 앞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고, 베이징 천안문 앞에 중국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무명의 인민을 기념하는 커다란 비석이 있고, 파리 개선문에도 무명용사 기념 상징물이 있다는 점을 들어 광화문광장에 무명용사 상징물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지청천 장군과 같이 환국했다. 어머니는 서울대 도서관 사서를 하다 아버지와 결혼했다. 부친이 사업을 하다 망해 부산 화교학교에 취업하는 바람에 식구들이 모두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는 초·중·고교를 부산에서 다녔고, 1976년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역사를 좋아했지만 ‘사학과 나오면 배고프다’는 담임선생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학보다 역사공부를 했다.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의 전공은 ‘일제강점기 운동사’다.

학위를 받고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제작에 상임위원으로 참여했고, 그 인연으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았다. 주변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이 친일파 청산작업을 하니 당신이 적격”이라는 추천 때문이다. 2009년 다시 민족문제연구소로 돌아온 그는 근현대사기념관을 만들고 관장으로 활동했다.

2011년 11월 이명박 정부 때 ‘건국절’ 논란으로 시작된 친일·독재 미화 역사왜곡에 항의, 그는 ‘역사정의실천연대’에 참여해 ‘역사전쟁’을 시작했다. 2013년 박근혜 정권부터 역사왜곡을 노골화하자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으로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이 관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제1타깃이 통합진보당, 제2타깃이 전교조와 민주노총, 그리고 제3타깃이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면서 “1·2타깃을 치고 세 번째 타깃을 치려다 역사왜곡이라는 강한 역풍을 맞고 박근혜 콘크리트 지지율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 8학군 학부모 사이에서 ‘박근혜가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든다’는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 이 싸움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촛불정부가 들어선 2017년 12월 그는 제11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했다. 그는 “처음에는 독립기념관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제주 항일투쟁기념관과 경북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됐고 서울에도 임시정부기념관이 생길 예정”이라면서 “(독립기념관이) 국내 최대 독립운동사 연구·전시시설이지만 천안이라는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email protected]·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9-01-26> 경향신문 

☞기사원문:[원희복의 인물탐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김찬·강달영·허형식도 서훈해야”

월, 2019/01/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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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리쿠연락회’ 사무국장 광주 방문…日 투쟁 소개
30일 서울고법서 전범기업 ‘후지코시’ 상대 2차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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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뉴시스】변재훈 기자 = 전범기업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 호쿠리쿠연락회의 나카가와 미유키(中川美由紀) 사무국장(사진 왼쪽)이 28일 오전 광주 서구 화정동 시립청소년문화의집에서 피해자 지원활동과 전범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2019.01.28. [email protected]

【광주=뉴시스】변재훈 기자 =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일본 시민단체가 28일 광주를 찾아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에 책임있는 보상과 사과를 요구했다.

호쿠리쿠연락회 나카가와 미유키(中川美由紀) 사무국장은 이날 오전 광주 서구 시립청소년문화의집에서 간담회를 갖고 “3·1절 100주년을 기념해 일본은 식민지배의 어두운 과거사를 청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전범기업은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제대로 된 보상과 함께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호쿠리쿠연락회는 후지코시를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낸 2차 손해배상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일본의 양심세력이 만든 시민단체다.

그는 “도야마 현에 위치한 후지코시는 가장 많은 근로정신대를 동원한 기업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남녀 강제동원피해자 1630명보다 훨씬 많은 수가 동원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나카가와 사무국장은 취업·진학지원을 미끼로 속아 후지코시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피해자 증언도 소개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제식훈련을 받는 등 병영식 기숙사 생활을 했다’. ‘사원수첩에 급료저축액을 허위로 기재하는 방법으로 정당한 임금도 지불하지 않았다’, ‘2차례 도망가다 잡힌 여성은 위안부로 징용되기도 했다’ 등을 증언했다고 전했다.

또 부족한 식사량, 편지 검열, 일본인 사원의 폭행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피해자들이 어릴 적 기억 임에도 당시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서 “근로정신대 생존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가족이 달린 문제인만큼 피해 배상이 조속히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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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변재훈 기자 = 전범기업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 호쿠리쿠연락회의 나카가와 미유키(中川美由紀) 사무국장(사진 왼쪽)이 28일 오전 광주 서구 화정동 시립청소년문화의집에서 피해자 지원활동과 전범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2019.01.28. [email protected]

이날 간담회에서는 호쿠리쿠연락회가 그동안 일본에서 펼쳐온 근로정신대 피해자를 위한 활동도 소개됐다.

나카가와 사무국장 등 일본 내 양심세력들은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의 1차 손해배상 소송 때 후지코시 사옥 앞에서 피해자 위령제, 연좌농성 등을 펼쳤다.

그 결과로 지난 2000년 7월11일 일본 최고재판소의 ‘후지코시’와 피해자 간 화해 판결을 이끌어 냈다. 이를 계기로 호쿠리쿠 지역 3개 현을 중심으로 호쿠리쿠연락회가 2002년 3월 결성됐다.

단체는 지난 2011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2차 소송 패소 판결을 받자 2013년 2월부터 한국에서 소송을 이어 진행하고 있다.

호쿠리쿠연락회가 한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후지코시 1·2차 손해배상 소송의 원고에는 광주·전남 지역 출신 김계순·김정주·이금순·오경애 할머니 등이 포함돼 있다.

호쿠리쿠연락회는 거동이 어려운 고령의 피해자를 직접 만나고, 오는 30일 서울고법에서 열리는 후지코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 판결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한편 간담회를 마친 단체는 이날 오후 2차 소송 원고인 오경애 할머니를 방문한다.

[email protected]

<2019-01-28> 뉴시스 

☞기사원문: 日시민단체 “3·1절 100주년, 일본은 전쟁범죄 사과” 촉구

월, 2019/01/28-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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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일본 군수기업에 강제 동원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김옥순 할머니가 30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주식회사 후지코시 상대 손해배상 청구 항소심 선고를 마친 뒤 법원청사를 나서고 있다. 2019.1.30/뉴스1 © News1 황덕현 기자

일제강점기 일본 군수기업 후지코시 공장에 강제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이 회사 측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이 이번에도 피해자들 손을 들어줬다. 2016년 1심 판결 뒤 약 3년만에 항소심 판단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7부(부장판사 이원범)는 30일 피해자 5명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5억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 측 항소를 기각하고 “후지코시가 피해자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쟁점은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는지 여부였다. 또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는지, 1심이 인정한 위자료 액수가 부당하게 과다했는지 등이다.

재판부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취지를 토대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후지코시 측 주장에 대해선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사유가 있었다”며 “그런 주장으로 손해배상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대법원이 2012년 판결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법리를 설시(說示)했다”며 “청구권 행사 장애사유가 소멸했다고 해도 그로부터 3년 안에 소송이 제기돼 적법하다”고 밝혔다.

1심이 인정한 위자료 1억원이 부당하게 많다는 주장은 “어린 나이에 가족과 헤어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하고 혹독한 노동에 강제로 종사해야 했고, 불법행위 뒤 상당한 기간 피해복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사정 등을 고려하면 위자료가 과다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배척했다.

이번 소송에 원고로 참여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는 김옥순(90)·박순덕(87)·오경애(89)·이석우(89)·최태영(90) 할머니 5명이다.

이들 할머니는 강제노동 등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정신적·육체적·경제적 피해를 입었다며 2015년 4월 후지코시를 상대로 1인당 1억원씩 총 5억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후지코시는 일제강점기 12~15세의 어린 소녀들에게 ‘일본에 가면 공부도 가르쳐 주고 상급학교도 보내준다’고 속여 힘들게 일을 시킨 대표적 전범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 11월 1심은 “증거를 종합하면 김 할머니 등은 당시 만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는데도 가혹한 환경에서 위험한 업무에 종사했다”며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이 경험칙상 분명하고 우리 민법에 따라 불법행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최근 일본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승소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수년 전 1심에서 이미 원고 승소 판결이 났으나 항소심에 와서 계류되며 피해자들의 기다림도 길어졌다.

이런 상황은 지난해 10월 일본기업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된 강제징용 피해자들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이 피해자들 손을 들어주면서 전환됐다. 이후 멈췄던 후지코시 항소심 재판이 재개됐고 대법원 판례 취지를 반영해 잇따라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smith@

<2019-01-30> 뉴스1 

☞기사원문: 日후지코시 강제동원 할머니 5명 또 승소…”1억씩 배상”(종합) 

※관련기사 

☞민중의소리: 전범기업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항소심서도 승소…법원 “1억씩 배상” 

☞연합뉴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 日후지코시 상대 2심도 승소…”1억씩 배상” 

☞KBS: 서울고등법원 “日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 1억 배상” 

☞서울신문: 일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2심 승소…“1억씩 배상”

수, 2019/01/3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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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1.29)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2편 “노덕술” 고문으로 유명한 악덕 친일경찰, 대한민국 훈장을 받다

☞ (1.22) ‘내역사’ 시즌 3: 친일파 1편 “이종형” 의열단 행세하며 독립군 때려잡은 악명 높은 밀정

☞ (1.15) ‘내역사’ 시즌 3: “일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후 우리의 과제는?_1편

☞ (1.08) ‘내역사’ 시즌 3: 프롤로그 – 70년만에 부활하는 반민특위 친일파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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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3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수, 2019/01/3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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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14일 무악재역 인근에서 윤경로 고문을 만났습니다.ⓒ 경실련

올해 경실련은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30주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작년부터 월간 경실련에서는 특집 인터뷰로 고문들을 찾아뵙고 있습니다. 올해도 경실련이 꼭 만나야 할 분들을 찾아다니며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지난 14일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분과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시고 상임집행위원장, 통일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던 윤경로 고문을 찾아 뵀습니다. 3·1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남북관계 전망 등 역사학자로서 바라보는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귀한 말씀들을 나눠주셨습니다. -기자말

–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입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활동도 하고 계시는데,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100주년 기념사업 활동 소개 부탁드립니다.

“100년 전 3·1운동 당시는 나라의 국권이 빼앗긴 식민지 시대였어요. 일제에 우리가 강제합병된 지 10년 만에 나라가 없어지고 국권을 상실했을 때 민이, 백성이 스스로 궐기해서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독립을 찾겠다고 운동을 일으킨 것이지요.

그 때 독립을 외쳤지만 바로 독립은 안 됐죠. 45년까지 기다려야했죠. 어쨌든 국권을 상실했을 때 민이 중심이 돼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그 여파로 한 달 뒤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어요. 그래서 비록 임시정부, 망명정부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국호가 갖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 그 전에는 대한제국 시대였어요. 황제에게 모든 주권과 국권이 주어졌던 봉건 사회였지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대한민국이 됐다는 건 주권과 국권이 민에게 주어진 주권제민의 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직속으로 16개 각 부처에서 모여서 위원회가 구성됐어요. 저도 기억‧기념분과위원장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는데, 3·1운동 100주년이니까 기념행사도 하지만 3•1운동이 갖는 역사성을 어떻게 현재화 하느냐 그런 것을 분과별로 의논하고 있어요. 그래서 행사도 정부나 기관에서는 후원하고, 주로 민이, 백성이, 시민이 중심이 된 다양한 컨셉을 잡으려고 합니다.”

– 3·1운동을 3·1혁명으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시는데 조금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이 시작됐는데, 이 조약이 굉장히 불평등하게 맺어졌어요. 그래서 이런 불평등을 뒤늦게 알고 그걸 어떻게든지 바꿔보려고 무척 애를 썼지요. 애국계몽운동, 항일의병운동, 독립협회니 만국공동회 등 이런 운동들을 쭉 했는데, 1919년까지도 운동은 많이 전개됐지만 성취하진 못했단 말이에요. 많은 운동들이 모이고 모여서 쌓여서 3·1 혁명이 일어났다고 봐요.

앞에서 세류(細流), 물줄기와 같은 여러 모양의 운동들이 모이고 모여서 3·1 혁명을 일으켰고 그 결과 대한민국이 생겼다, 제국의 시대에서 민국의 시대로 갔다는 것은 완전히 혁명이거든요. 그 중요한 계기가 3·1운동에서 시작됐다고 보기 때문에 이전의 많은 운동과 똑같은 운동으로 보는 것은 3•1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낮춰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1911년 중국에서 쑨원을 중심으로 신해혁명이 일어났잖아요. 왜 신해혁명이라고 하나요? 하, 은, 주, 진, 한 수천 년 내려오던 봉건적인 완조를 마감하고 중화민국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3·1 혁명이라는 말을 정부에서 바로 받아서 쓰는 것은 반대합니다. 그렇게 하면 반발할 사람들이 많아요. 마치 건국절 논쟁처럼 되는 건 별로 생산적이지 않아요.

학계에서 충분히 논의되도록 맡겨주는 게 좋아요. 내가 고등학교 때만 해도 다 동학난이라고 가르치고 동학난이라고 배웠어요. 지금은 동학난이라는 말 아무도 안 쓰잖아요. 동학혁명이라고 하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혁명이 될 거예요. 그걸 가지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할 필요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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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하실 때마다 한자가 나오면 직접 써주시며 뜻을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경실련

–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도 하셨는데, 우리나라의 친일청산은 얼마나 이뤄졌다고 보시는지요?

“우리가 일제 하에 35년, 36년 식민지배를 받다보니까 대부분은 현실에 적응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1~2년도 아니고 한 세대가 넘도록 지배를 받다보니까 자연히 거기에 순응하는 거죠.

3·1운동 당시에도 민족대표 33인을 뽑을 때 지명도가 높은 분들을 민족대표로 모시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다 거부했어요. 바위에 계란 던지기지 만세 몇 번 부른다고 해서 일본이 식민지를 내놓을 사람들이 아니라고 본거죠. 괜히 피해만 온다고 거절했지요. 그래도 종교인들은 양심적인 세력 아니에요? 지금은 많이 세속화 됐지만. 그렇게 그분들이 나서게 된 거지요.

일제 30년, 오래 지배를 받다보니까 자연히 친일부역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45년 해방 되고 새 나라를 건설했으니, 과거 잘못됐던 것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 된다고 반민특위를 만들어서 친일한 사람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려고 했죠. 그런데 이승만 정권 자체가 국내에서 친일했던 세력들과 가깝다 보니 반민특위가 1년도 못 하고 강제해산 당했지요. 그 뒤로 60년~70년이 흐른 거죠.

역사학자로 ‘역사는 무엇이냐?’고 했을 때, 역사는 ‘고백하는 것’이라고 봐요. 말하자면 우리의 자랑스러운 것도 역사화해야 되지만 우리가 부끄러웠던 과거의 역사도 한번쯤은 고백해야 한다, 정리하고 역사화 시켜야 된다, 한번쯤 털어내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친일 명단을) 2005년 1차 발표하고, 2009년 11월 효창공원 백범 김구묘소 앞에서 최종 발표했어요. 그것이 준 사회적 파장은 상당히 컸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옛날에 일제 때 내가 뭐하고 뭐했다 자랑스러워 했어요. 집안의 가문의 영광으로 말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친일했다는 걸 자랑스러워하진 않잖아요.”

– 논란도 참 많았던 것 같아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박정희를 넣느냐 마느냐가 제일 논란이었죠. 그런데 우리가 그 근거를 찾았어요. 1931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박스기사로 22살의 조선의 젊은이가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혈서를 썼다고 실린 거예요. 일본에서 볼 때는 장한 조선 청년이었던 거죠. 처음에 집안에서 명예훼손 걸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대로 아들(박지만) 이름으로 발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이겼죠.

또 여러분도 다 알만한 인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있어요. 그 양반이 민족의 애국자로 여겨지는데, 1905년 외교권 박탈당하고 합방된 이후 친일적인 글을 많이 썼어요. (이 글들이) 다 높게 평가받았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친일 인사였느냐며 충격을 많이 받았지요.

친일인명사전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고 빨갱이 소리도 듣고 그랬지만 역사학자로서 굉장히 중요한 일을 했다는 자긍심이 있어요.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저는 아직 위원장직을 맡고 있고, 이제 10년 돼서 보완을 좀 하려고 해요. 들어간 사람들 중에 잘못된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때 빠진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해외에서 밀정 노릇을 한 사람 등이 있는데 당시로서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다 못 넣었거든요. 추가 보완할 계획이에요.”

– 통일이 되기 전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끝난 게 아니라고 하는데, 현재 남북관계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만절필동(萬折必東) 이란 말이 있어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현재, 우리가 100년 전의 사건을 다시 체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주평화’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당시는 잃었던 국권과 주권을 되찾는 ‘자주독립’을 구호로 내걸었다면, 오늘날은 ‘자주평화’가 중요합니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중국의 고사입니다. ‘중국의 황하에서부터 시작해 수업이 여러 번 꺾이며 굽이쳐 흐르고 수만 리를 내려와 만 번 굴절하지만, 반드시 동쪽 황해바다로 물이 흘러내려간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맞다고 봐요.

지난 70년 동안 남북 간에 별 일이 다 있었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있겠지만, 사람이 인위적으로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순 없어요. 독재자든 어느 누구든, 어느 인물, 한 시대에 그 흐름이 막히진 않아요.

남북문제가 70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반드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하는 그 날이 올 거예요. 그런 조짐이 보여요. 우리가 똑똑해야 돼요. 국민들이 지도자를 잘 뽑고, 잘못 할 때 감시하면 남북문제도 서서히 풀릴 것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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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고문은 현재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억·기념분과위원장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경실련

– 마지막으로 좌우명 같은 게 있으신가요?

“내가 2000년즈음 상집위원장할 때였는데, 미국에서 경실련이 취재를 나와서 상집위원장인 나를 인터뷰 했어요. 한국의 시민운동에 대해서 인터뷰하고 마지막으로 당신 좌우명을 묻는데 이렇게 얘기했어요.

‘나는 역사학도다.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그 문제에 대해서 행동하거나 발언할 때 당장 내 입장에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훗날 이 문제가 어떻게 평가될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발언하고 행동하려고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당장 욕 먹더라도 훗날에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당장 박수를 받을지라도 훗날에는 잘못될 수도 있으니 먼 훗날에 어떻게 평가받을지 생각하며 행동하고 발언하려고 해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경실련 1-2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이 글을 쓴 윤은주씨는 경실련 회원홍보팀 간사입니다. 

<2019-01-30>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인명사전 편찬, 완전히 끝나지 않아… 더 보완할 것”

수, 2019/01/3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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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 서울고등법원 제7형사부(재판장 김대웅)는 정보통신망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유죄를 받은 방자경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 판결로 지난 2018년 10월 12일에 형사소송 1심 재판부가 내린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징역 4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처한다’는 원심이 유지되었다. 김대웅 판사는 피고 방자경이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를 제기했으나 명예훼손의 악의성, 반복성, 지속성 그리고 관련법률과 판례, 원심의 판단을 두루 살펴본 결과, 양형이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며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방자경은 2014년 8월경부터 박정희 합성사진을 연구소가 조작했다며 수년간 연구소를 음해해왔다.

▲ 박정희 합성사진 민족문제연구소 조작설을 유포하고 있는 방자경의 트윗

방자경은 민사소송으로 민족문제연구소에 500만원의 손해배상금과 소송비용 전액을 지급했고 형사소송으로 징역 10개월에 법정구속되었다. 이번 2심을 통해 다시 유죄가 인정됨으로써, 무차별적인 음해에 단호히 대응하여 징벌한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무관용 원칙은 재확인되었다.

한편 방청석에 앉아있던 10여명의 방자경 지지자들은 판결과 동시에 재판장에게 야유를 보내고 방자경의 이름을 연호하다 법원 경위들에게 제지를 받기도 했다. 이들은 법정을 빠져나오면서 “문재인이하고 박원순, 임종석을 죽여야”한다고 욕설을 내뱉는 등 소란을 피우다 해산했다.

목, 2019/01/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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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허위사실 인지·반복 게시 등에 비춰 볼 때 죄질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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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기타

문재인 대통령과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방하는 허위 내용이 담긴 글과 영상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보수 성향 인사가 항소심에도 1심과 같이 실형을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대웅)는 공직선거법 및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방 모(50)씨의 항소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고 9일 밝혔다.

1심은 방 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징역 4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방 씨는 게시글 내용이 허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피해자들을 비방할 목적으로 각 게시글을 게시했다고 충분히 볼 수 있다고 본 원심 판단은 정당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공표하고, 전파성이 높은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작성한 글의 개수·반복성에 비춰 그 죄질이 나쁘다”고 설명했다.

보수 성향 단체 대표로 알려진 방 씨는 지난 2016년 11월부터 19대 대선을 앞둔 2017년 4월까지 문 대통령에 대한 허위 내용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게시물의 ‘문 대통령 아버지는 북한 공산당 간부 출신’, ‘문 대통령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파산관재인’,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비자금 1조원의 환전을 시도했다’는 등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파악했다.

지난 2014년 10월에는 트위터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 욱일기를 배경으로 한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을 조작했다’는 허위 사실을 세 차례 게시한 혐의도 받았다.

1심은 “방씨의 이런 범행은 선거 공정성을 훼손하고, 불특정 다수인에게 그릇된 인식을 하게 할 위험이 있어 사회적 해악이 매우 크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2019-02-09>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문 대통령 아버지는 공산당’ SNS 허위 글 올린 50대 2심도 실형 

※관련기사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명예훼손 방자경 2심도 유죄, 징역 10개월 

☞YTN: ‘문재인 부친은 공산당’ SNS 허위글..50대 2심도 실형 

☞뉴시스: ‘문재인 부친은 공산당’ SNS 허위글..50대 2심도 실형 

☞세계일보: ‘문재인 부친은 공산당’ SNS 허위글 50대 2심도 실형

☞일요신문: ‘文 대통령 아버지 공산당 간부’ 허위 사실 게시한 보수 인사 ‘실형’

월, 2019/02/1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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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부터 기생까지 만세운동 선봉…3ㆍ1운동 직전 첫 ‘여성 독립선언서’ 발표
임시정부 헌장에도 남녀평등 명문화…”독립운동계, 여성 역할에 깊은 이해”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3·1 만세운동때 선봉에 섰던 여성은 유관순 열사만이 아니었다.

어린 학생부터 평범함 주부, 간호사, 기생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은 물론이고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3·1운동은 여성들이 오랜 세월 성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항일운동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3·1운동 이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여성 독립운동단체들도 우후죽순으로 결성돼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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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여성가족부 제공]

3·1운동 직전 만주지역에선 1천335자 한글로 작성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표됐다. 이 선언서의 말미에는 기원 4252년(1919년) 2월이라고 표기돼 있고,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 등 여성 독립운동가 8인이 서명했다.

국가기록원이 발간한 ‘여성독립운동사(3·1운동 편)’는 이 선언서를 “3·1운동 이전에 발표된 여성들의 첫 독립선언서”라고 평가했다.

선언서는 여성도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국민 구성원임을 강조했다. 자주독립 정신과 함께 남녀평등 의식을 표명한 것이다.

여성들은 3·1운동 당시 서울, 개성, 평양, 부산, 광주, 전주 등 주요 도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도시에는 여학교와 교회 부인회 조직 등이 있어 여성들을 조직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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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자혜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서울에선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배화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여학생과 졸업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부속 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들도 서울의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중심인물은 동료 간호사들과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한 박자혜 선생이다. 간우회 회원들은 각종 유인물을 작성해 배포하는 등 만세시위의 전면에 섰다.

개성에선 당시 여자성경학원 기숙사 사감을 지내던 어윤희 선생이 남성들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독립선언서 배부를 자청하는 등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선생이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리는 광경을 본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배부에 동참했고 이는 개성 만세시위를 촉발하는 기폭제가 됐다. 일제에 체포된 선생은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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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윤희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는 3·1운동으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몰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왔던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 열사가 주도했다. 태극기를 직접 제작해 배포하는 등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열사는 일본 헌병에 체포된 이후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부산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는 경남지역 3·1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교사인 주경애 선생은 12명의 여학생과 시위 준비를 한 뒤 저녁에 기습적으로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했고 이때 거리의 군중들도 시위에 동참해 시위대는 순식간에 수백명으로 늘었다.

평양 만세시위에선 숭의여학교와 교회 여신도들의 활약이 컸다. 숭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직접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고종황제 봉도식(奉悼式)에선 여신도 20여명이 나서 만세시위를 촉발했고, 미국 선교사 거주지인 신양리에선 기독교 부인 20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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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 열사 [국가보훈처 제공]

수원과 해주 등지에선 기생들이 만세시위에 불을 붙였다.

당시 수원 기생조합의 총무였던 김향화 선생은 자혜병원 앞에서 동료 기생들과 만세행진을 벌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김향화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해주에선 김해중월 선생 등의 주도로 기생들이 자신의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만세행진을 벌였고, 여기에 시민들이 동참해 만세시위 군중이 수천 명에 달했다.

3·1운동을 통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선 여성들은 서울과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항일 여성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여성단체 중 서울 중심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 중심의 대한애국부인회는 조직 규모가 방대해 지방 곳곳에 지회를 두고 활동했다. 평안남도 순천의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 평안남도 강서의 대한독립여자청년회, 평안남도 대동의 대한독립부인청년회, 평안남도 개천의 여자복음회 등 항일여성단체들도 비밀리에 활동했다. 중국에선 김순애·이화숙 선생 등이 주축이 된 애국부인회, 일본에선 여성 유학생 중심으로 여자학흥회가 조직됐다.

미국에선 로스앤젤레스의 대한여자애국단과 유학생 중심의 근화회, 하와이의 대한부인구제회 등이 결성됐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고 했다”며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계를 비롯해 민중들 사이에서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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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문화재 등록 예고
(서울=연합뉴스) 문화재청이 독립운동가 조소앙(본명 조용은·1887∼1958)이 삼균주의(三均主義)에 따라 독립운동과 건국 방침을 국한문 혼용으로 적은 친필 문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6일 전했다. 2018.11.6 [문화재청 제공] [email protected]

<2019-02-12> 연합뉴스 

☞기사원문: [3ㆍ1운동.임정 百주년](25) 성차별 굴레 벗고 항일 주체로 우뚝

화, 2019/02/1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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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명 결정판 군산…도시 곳곳 수탈의 역사 담긴 지명 수두룩  

전국 지명의 30퍼센트 일제식 추정 
미쓰비시 창업주 호 딴 전주 동산동 본래 쪽구름, 조각구름이란 우리말 이름 가진 곳 
군산 서수면, 푸른 이삭이 넘실 거리는 땅이라는 일제식 지명 
지자체 의지만 있다면 곧바로 지명 개정 가능…의지의 문제


■ 방송 : 전북CBS 라디오 <사람과 사람> FM 103.7 (17:05~18:00)

■ 진행 : 박민 참여미디어연구소장
■ 대담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인데요.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일제가 남긴 잔재가 사회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지명인데요. 자세한 내용,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과 짚어보죠. 소장님 어서 오세요.

◆ 김재호> 네, 반갑습니다.

◇ 박민> 3.1절 1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하고요. 역사운동을 하는 분으로서 소감이 더욱 남다를 것 같아요?

◆ 김재호> 네, 남다르기는 한데요. 현재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가 100년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다 보니 일제 잔재나 3.1정신을 그동안 역사 속에서 제대로 조명해냈는가 하는 부분은 의문입니다. 요즘 많이 부각되는 것이 3.1운동이 운동이냐 혁명이냐인데요. 논란이 되겠지만 우리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고요. 3.1운동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요. 1908년, 1909년으로 넘어가면서 호남 지방 의병들이 초토화 됩니다. 그리고 경술국치가 이뤄지고요. 이후 거의 10여 년에 걸쳐 무단통치가 행해집니다. 무단통치라는 것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부분들에 저항해서 민족적인 거사로써 일어난 것이 3.1운동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고요. 3.1운동은 이후 우리 독립운동의 방향, 항일무장투쟁이나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 등에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박민> 우리 민족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인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나란히 100주년을 맞는 시점인데요. 중요한 것은 아직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남아있죠. 대표적인 사례가 지명인 것 같아요?

◆ 김재호> 한글학자 배우리 씨에 의하면 우리나라 지명의 약 30퍼센트가 아직도 일제 지명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 박민> 우리 지역에도 있죠. 대표적으로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김재호> 우리 지역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전주 동산동이 대표적이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투하한 두 번째 핵무기가 나가사키에 떨어집니다.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돼 가있었단 말이죠. 거기가 초토화되면서 조선인들이 대량 학살됩니다.

◇ 박민> 혹시 미쓰비시 중공업 말씀하시는 건가요?

◆ 김재호>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의 군국주의 기업 중에서 가장 최상위층에 있는 그룹이죠. 그런데 미쓰비시 그룹이 한국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서 동산농사주식회사를 차립니다. 수원에 조선지점을 두고 전국에 여러 지점을 둡니다. 전주에 동산농사주식회사의 전주지점이 있었고요. 동산농사의 동산을 따서 동산동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동산은 미쓰비시 창업주인 이와사키 야타로의 호입니다. 그러니까 창업주의 호를 따서 지은 지명이 동산동이라는 거죠. 원래 이 지역은 편운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조각구름이나 쪽구름이라는 뜻입니다. 예쁘죠. 그런데 동산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안 바뀌고 3.1운동 10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거예요. 큰 문제죠. 그렇다면 동산농사주식회사가 한국에 와서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가도 봐야 해요. 여의도의 24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땅이죠. 상상이 가지는 않죠. 전국적으로 2100만여 평 정도 되니까요. 그런데 그들의 호를 딴 동산이라는 지명을 아직도 안 바꾸고 있다는 겁니다.

◇ 박민> 그렇다면 동산농사주식회사의 땅이 전국적으로 흩어져있을 텐데 전주만 지명이 남아있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지역에도 이 지명이 남아 있습니까?

◆ 김재호> 이 부분은 전수조사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동산동이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서 보여요. 그런데 아직은 그 부분이 저희 같은 시민사회단체가 전수조사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거든요. 추정은 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실관계가 필요합니다.

◇ 박민> 그런데 전주 동산동은 분명하다는 말씀이죠?

◆ 김재호> 네 맞습니다.

◇ 박민> 이거는 어떻게 확인하신 거예요?

◆ 김재호> 이 부분은 실제 많은 기록들에서 나오고요.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안이 분명해 보입니다. 지명이 바뀐 시기도 일제강점기 때 바뀌었고요.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쭉 유지돼 왔습니다. 문제는 그겁니다. 자치단체나 시의회가 여기에 대해서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면 힘듭니다. 동산동의 유례가 어떻게 전해져 오는 것인지 주민들에게 명확하게 설명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설명 절차가 부실합니다. 주민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 필요성을 못 느끼고요. 이 문제가 피부로 와닿지 않는데 바꾸려고 하겠어요? 그리고 지명을 개명하는 문제에서 행정적인 절차가 쌓이잖아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무원들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잠깐 개정 논의를 하다가 결국 무산됐고 계속 동산동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는 겁니다.

◇ 박민> 그런데 최근에 또다시 논의가 되고 있다고요?

◆ 김재호> 아무래도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저희 단체, 시민단체들이 지명을 바꿔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김승수 전주시장도 절박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개정과 관련한 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박민> 전주시의 상황을 짚어봤습니다만 일제 잔재하면 군산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여기도 일본식 지명이 많이 남아있죠?

◆ 김재호> 그렇습니다. 군산은 거의 일본식 지명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전죽마을, 중야마을, 팔목마을 이런 데는 대부분 일본인 지주나 아니면 측량기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어요. 일본이 식민 통치 편의를 위해서 숫자로 이름을 붙인 마을이 아직도 남아있거든요. 해2마을, 해7마을, 해8마을 이런 식으로도 남아있고요. 군산이 동이 59개인데 쌀 ‘미’자가 들어간 동이 아직도 다섯 개가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군산 식민통치 중심부라고 할 수 있었던 지역인 금광동, 영동, 중동, 영화동 이런 곳들도 모두 일본식 지명입니다. 그런데 군산시는 이런 문제에는 소홀하고요. 오히려 식민 거리를 재현하는 일에는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 박민> 개정 움직임은 없나요?

◆ 김재호> 제가 보기에는 서수면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수면도 지금 행정 차원에서 논의가 되는 것은 아니고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서수면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 박민> 서수가 어떤 의미이기에 그렇습니까?

◆ 김재호> 서수는 한두 군데 있는 지명이 아니에요. 서수는 대만에도 있고 사할린에도 있고요. 일본에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수는 신칸센에도 있고 일본 여자 이름에도 서수가 쓰입니다. 푸른 이삭이 넘실거리는 땅이라는 게 서수의 뜻입니다. 자신들이 식민통치하는 국가의 이상향을 지명에 심어놓은 거예요. 침략과 약탈을 본질로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는 그게 이상향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지배를 당한 입장에서는 지옥인 거죠. 여기 같은 경우에는 가와사키라는 농장주가 서수라는 지명을 지었다고 해요.

◇ 박민> 지명을 바꿀 때 절차가 까다롭거나 복잡한 부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까?

◆ 김재호> 도로명 주소를 변경하거나 동과 면을 변경할 때 차이가 있어요. 행정동이나 동명 개정은 지방자치법 4조에 분명히 명시돼 있어요.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바꿀 수 있어요. 물론 주민공청회나 설명회는 필요합니다만, 지방자치단체와 시의회가 마음만 먹으면 사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거죠. 도로명 주소는 주민들의 동의 절차가 필요해요. 복잡하긴 하지만요.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의지가 문제라는 겁니다.

◇ 박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우리 생활 곳곳에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지명을 중심으로 살펴봤는데요.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김재호 소장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재호> 네, 고맙습니다.

<2019-02-12> 노컷뉴스 

☞기사원문: 일제 지명 사용하는 전주 ‘동산동’, 전범기업 창업주 호 딴 지명도…

화, 2019/02/1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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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찬 전시 내용 가득…찾는 일본인은 아직 많지 않아
日관람객 “3·1운동에 한국인 프라이드 대단하다 느껴”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많은 일본인은 3·1 독립운동은커녕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과거의 사실을 아는 것에서부터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얘기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일제의 식민지배에 평화적으로 저항한 한국인들의 독립만세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일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도쿄(東京).

도쿄에서도 중심가인 신주쿠구(區) 오쿠보의 한국광장 빌딩 7층에는 일본인 시민운동가들이 운영하는 ‘고려(高麗ㆍ일본발음 고라이)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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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신주쿠에 있는 한국광장 빌딩 7층의 고려박물관에서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3ㆍ1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전시장 모습.

이곳에서 3·1 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는 전시회가 지난 6일 시작됐다.

오는 6월 23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는 아직은 일본인들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발걸음은 간간이 이어지고 있다.

고려박물관은 일본 시민들만의 힘으로 2001년 12월 만들어진 한국 역사 박물관이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정확히 배워 알리고자 하는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회비를 모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전국에서 700여 명이 연회비로 5천엔(약 5만원)씩을 내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상설 전시 외에 수시로 기획전을 열고 있는데,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기획전시회를 시작했다.

기획전은 자원봉사 활동가 80여 명이 7~8명씩 한 조를 이루어 매번 한국 역사에 연관된 주제로 마련하는데, 이번 3·1절 기획전은 구상 단계부터 따지면 8명이 매달려 1년 6개월 정도 준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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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박물관에서 이사 겸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하라다 교코 씨가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다.

작년 6월에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박물관 회원 6명을 포함한 14명이 3박 4일 일정으로 직접 한국을 찾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시작으로 천안 유관순기념관, 아우내 장터, 독립기념관, 제암리순국박물관, 서대문형무소 등 3.1운동 관련 자료를 모을 수 있는 곳곳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이렇게 모은 자료를 연구하고 분석해 총 24장의 패널로 3·1운동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정리한 전시물을 내놓았다.

작년까지 고려박물관 이사장을 지낸 뒤 지금은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하라다 교코(77) 이사는 7일 “모든 멤버들이 함께 공부하고 배우면서 전시 패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봉사자들이 꾸민 전시회라고 했지만 내용은 전문가들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알찼다.

3·1운동 이전의 한일 관계 역사를 먼저 소개한 뒤 3·1 운동 전개 과정, 종교의 역할, 여성의 참가, 제암리 학살사건, 3·1운동 당시의 신문보도와 일본인의 관점, 3·1운동 이후 100년에 걸친 격동의 한국사를 핵심을 빠뜨리지 않고 자료사진까지 곁들여 명료하게 설명했다.

3·1 운동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24장의 패널을 훑어가면 한국인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 왜 평화적인 만세 운동에 나섰는지, 일제의 당시 대응은 어땠는지,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엇갈린 시각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전시장 한 가운데에는 3·1운동 관련 기술이 거의 돼 있지 않는 일본 역사교과서 여러 종을 펴놓았다. 일본인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있지 못하며 앞으로 배워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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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박물관 전시장에 펼쳐 놓은 일본 역사교과서. 한국인들의 비폭력 독립운동인 3·1 운동이 제대로 기록돼 있지 않다는 것이 하라다 이사의 설명이다.

중학교 교사 출신인 하라다 이사는 “3·1 독립운동 정신에는 동양평화 사상이 깃들어 있다”면서 “우리 일본인들이 많이 와서 배우고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시회 시작 이틀째인 7일까지 이곳을 찾은 일본인은 10명이 채 안 된다고 했다.

하라다 이사는 “일본 언론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줘야 하는데 몇몇 매체가 문의만 하고 아직 오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날 전시회를 찾은 다마키 시노(56·고교 영어교사) 씨는 “한국에 여러 차례 갔는데, 서대문형무소역사관도 둘러본 적이 있다”며 “3·1독립운동에 대한 한국인들의 프라이드(자긍심)가 대단하다고 느꼈다”며 방한 때의 인상을 전했다.

다마키 씨와 3·1운동 기획전을 함께 관람한 니와 쇼코(57·고교 일본어 교사) 씨는 “두 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국가 간에도 사이 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려박물관은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고, 월·화요일은 휴관한다.

[email protected]

<2019-02-07> 연합뉴스 

☞기사원문: 일본인들이 도쿄 한복판에 연 ‘3·1운동 전시회’

화, 2019/02/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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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2.8 독립선언문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 수립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았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이 선언문의 취지와 의미가 충분히 연구되거나 확산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는데요.

뒤늦게나마 2.8 독립선언문이 모두 5개 국어로 번역돼 배포되는 등 그 의미를 알리는 운동도 활발해질 전망입니다.

정새배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활자를 구하지 못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쓴 6장의 선언문.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리겠다며 조국 독립의 열망을 담았습니다.

[조한성/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 “오족(우리 민족)이 정당한 방법으로 자유를 요구할 텐데,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서 끝까지 자유행동을 취해서…”]

선언문에 40여 회나 등장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3.1 운동을 거치며 더욱 굳어져 임시정부의 기틀로 이어졌습니다.

[조영진/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 : “(조선의 젊은이들은) 빼앗긴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불굴의 기개와 용기로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건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을 비판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고 언급한 대목입니다.

엄혹한 압제의 상황에서도 청년들이 꿈꿨던 독립국가는 어느 누구도 특권이 없고 모두에게 자유와 민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였던 겁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이냐. 황제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는 것이고요.”]

서울시는 선구적인 2.8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5개 언어로 번역해 전세계에 배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뒤늦게나마 2.8선언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려는 노력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독립기념관은 다음달 3.1 운동 기념관이 완공되는 대로 2.8 선언문 원본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KBS 뉴스 정새배입니다.

<2019-02-09> KBS NEWS 

☞기사원문: “자유 향한 열망”…2·8 독립선언문 5개 국어로 번역

화, 2019/02/1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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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시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설치돼 있는 미당 서정주의 시(詩)비. 부천시가 친일문학을 청산하기 위해 서정주의 시비 ‘국화 옆에서’와 ‘동천’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부천/장철순기자 [email protected]

3·1운동 100주년 맞아 논란됐던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 시비
‘국화 옆에서’·’동천’ 철거키로 결정
나태주 ‘풀꽃’·정지용 ‘향수’로 교체

부천시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친일파 시인 서정주의 흔적을 지우기로 했다.

12일 부천시에 따르면 지역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돼 왔던 상동 상도중학교 뒤 보행자도로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세워져 있는 미당 서정주의 시(詩)비 ‘국화 옆에서’와 ‘동천’을 없애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 시비는 지난 2008년 상동 주민자치위원회가 부천문화사업과 연계해 ‘시와 꽃이 있는 거리’를 조성할 때 세워진 것이다.

이 곳에는 미당 서정주를 비롯해 노천명, 주요한 등 친일시인은 물론이고 수주 변영로, 정지용, 도종환, 김영랑 등의 시비가 설치돼 있다.

상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한 결과 다른 시인의 작품으로 교체하기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문학 창의도시 부천에서 친일잔재인 친일문학을 청산하기 위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나태주의 ‘풀꽃’으로, ‘동천’은 정지용의 ‘향수’로 각각 교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시는 친일시인으로 알려진 노천명의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와 주요한의 ‘샘물이 혼자서’는 이미 철거를 한 상태다.

미당 서정주는 1942년 ‘다츠시로 시즈오’로 창씨 개명한 이후 일본군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식민지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글을 통해 일제에 협력한 전력이 있다.

부천시가 최종 시비 교체를 결정하자 정치권, 시민사회 등에서는 환영하고 있으나 문화계에서는 예술성과 인간성에 대한 논란이 여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재현 시의회 행정복지위원장은 자신의 SNS(페이스북)을 통해 “그동안 논란이 일었던 친일문학 시비를 부천시가 철거한다고 하니 크게 환영한다”며 “친일 잔재를 없애는 것은 민중에게 서러운 삶을 안긴 엉터리 지도자를 바로잡는 것,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밝혔다.

박종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은 “지난해 9월부터 철거 또는 이전을 요구해 왔다”며 “뒤늦게나마 시가 결단을 내려 다행”이라고 말했다.

부천/장철순기자 [email protected]

<2019-02-12> 경인일보 

☞기사원문: 부천시 ‘친일파 시인 서정주 흔적’ 지우기 

※관련기사 

☞뉴스1: 3·1운동 100주년 앞두고 친일시인 서정주 시비 철거한다 

☞Queen: 친일시인 ‘서정주 ·노천명 ·주요한’시비철거 …나태주 ·정지용설치

※뉴스 영상

수, 2019/02/1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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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후지코시도 방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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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단체, 일본의 강제동원 배상 촉구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강제동원 공동행동 회원들이 14일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판결에 대한 일본정부와 기업의 이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2.14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아베는 강제동원 인정하고 즉각 사죄하라! 일본기업은 판결에 따라 즉각 배상하라!”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신일철주금, 미쓰비시,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강제동원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승소했지만 일본 정부의 압력과 기업의 판결이행 거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며 “대법원 판결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고 피해자의 뜻을 전하기 위해 15일 피해자 대리인과 지원단이 직접 일본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앞서 이들은 신일철주금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으며 미쓰비시와 후지코시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소송의 법률대리인을 맡은 김세은 변호사는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에도 일본 정부와 기업은 계속해서 판결이행을 거부하고 일본은 판결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이라며 “신일철주금에 판결이행을 요청하기 위해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책임 있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돌아섰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압류로 나아갔고 압류 결정이 난지도 1개월이 지났지만 그런데도 신일철주금은 협의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다”며 “신일철주금이 협의에 응하지 않으면 매각 명령 신청에 나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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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단체, 일본의 강제동원 배상 촉구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강제동원 공동행동 회원들이 14일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판결에 대한 일본정부와 기업의 이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2.14 [email protected]

김 변호사는 “일본 정부는 매각 명령 신청이 일본기업의 피해를 발생시키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는 정당한 판결에 대한 이행이고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후지코시와 관련, “1심과 항소심에서 동일한 판결이 났음에도 상고하고 있다”며 “후지코시가 협의에 응하지 않을 경우 기존 판결에 근거해서 가집행 절차로 나아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피해자들과 관련한 역사적 진실은 오직 하나”라며 “일본기업이 이들을 강제동원해서 강제노동시켰다는 명백한 진실이 있는 한 일본기업은 진실에 근거해서 배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영숙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는 “지난 1월 25일 미쓰비시 소송의 원고 김중곤 할아버지가 끝내 배상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피해자들의 평균 연령이 90세가 돼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는 피해자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이행을 촉구했다.

그는 이어 “이달 말까지 미쓰비시 측에 답변을 요구했는데 답변이 없을 경우 강제집행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공동행동은 15일 오후 2시 15분 일본의 신일철주금, 오후 3시 미쓰비시, 오후 4시 30분 후지코시를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또 15일부터 이달 말까지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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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연합뉴스 

☞기사원문: “강제동원 배상 이행” 한국 변호인단 내일 신일철주금 3차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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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2/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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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행위자 만든 교가 상당수”…역사교육위원회 구성도 요구

(예산=연합뉴스) 정찬욱 기자= 전교조 충남지부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는 14일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충남 도내 학교도 상당수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도교육청은 친일 잔재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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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조 충남지부 보도자료 캡처=연합뉴스]

두 단체는 이날 공동성명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변경하는 작업이나 교실 속에 남아있는 일본말을 우리말로 바로잡는 일은 일제 잔존 역사를 청산하는 첫걸음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지름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들 단체는 “최근 광주시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바탕으로 광주 지역 중·고교와 대학의 교가를 전수 조사했고, 광주제일고를 비롯한 상당수 학교가 현제명·이흥렬·김동진·김성태 등 친일 음악인 4명이 만든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 국민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라며 “충남교육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시민, 교육 단체가 참여하는 가칭 역사교육위원회를 구성해 올바른 역사 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계 대표적 친일 잔재였던 ‘국민학교’란 명칭은 1996년 3월 1일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하지만 ‘유치원’이라는 일본식 이름은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사업회와 문화관광부가 시민공모전을 통해 ‘유아 학교’로 명칭 변경안을 선정했고, 정치권에서도 유아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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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충남전교조·민족문제연구소 “학교 친일 잔재 청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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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충청: 전교조 충남지부 “학교 친일 잔재 청산” 

☞뉴스파고: 전교조·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충남교육청은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하라!”

목, 2019/02/1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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