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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민주화투쟁과 연대하다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로부터 듣는 미얀마 민주화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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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민주화투쟁과 연대하다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로부터 듣는 미얀마 민주화투쟁

admin | 목, 2021/06/03- 00:05

[인터뷰]

미얀마 민주화투쟁과 연대하다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로부터 듣는 미얀마 민주화투쟁

인터뷰 : 노기환 MC
정리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이번 호의 인터뷰는 최근 팟빵과 유튜브에 업로드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의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를 발췌 정리하였다. 내역사 시즌6의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투쟁’ 2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로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가 공동 제작하였다. 인터뷰는 4월 23일 연구소 5층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출연자는 내역사 전문 MC 노기환과 연구소 연구위원이자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민철,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흘라민툰(HlaMIn Tun), 헤이만(Hay Man)이다. 2월 1일 시작된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맞서 미얀마 시민들의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이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두 분으로부터 미얀마의 상황,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에 맞서는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에 적극적인 연대와 지지를 보낸다.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 동영상은 팟빵과 유튜브에서 ‘내역사 미얀마청년연대’로 검색하면 시청할 수 있다.

 

MC노 │김민철 교수께서 오늘의 방송 주제를 제안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민철 │두 가지 이유인데요. 하나는 1980년 광주에서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군부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을 때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소식들만 들었거든요. 언론이 통제된 시기였으니까요.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광주 참사의 실체를 알고, 특히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거꾸로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학살했다는 것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제 20대는 광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기억이 되살아났고요. 직접적으로는 19세 젊은이 마째신이, 티셔츠에 ‘everything will be OK’라는 문구를 쓴 청년이 아침에 아빠한테 시위에 참가하겠다고 인사하고 나가서 저녁에 시신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제 사고가 멈췄습니다. 며칠 동안 마째신의 얼굴이 제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MC노 │이 자리에는 김교수와 함께 두 분을 모셨는데,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대표 흘라민툰씨와 헤이만씨입니다. 민툰씨는 대한민국에 언제 오셨습니까?

민툰 │ 저는 2006년도에 대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
고 취업했습니다.

왼쪽부터 노기환 MC, 김민철 교수, 흘라민툰 대표, 헤이만 대표

MC노 │ 전공은요?

민툰 │ 경영학 박사인데요. 미얀마에 투자하는 한국기업의 성공요인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나중에 미얀
마 가서 관련된 일이나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쿠데타가 터져서 앞날이 너무나 막막합니다.

MC노 │ 헤이만씨는 학생이신가요?

헤이만 │ 저는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아동학 석사과정에 있는 수료생입니다.

MC노 │ 헤이만씨는 언제 오셨습니까?

헤이만 │ 저는 2018년 하반기에 왔습니다. 3년 되어갑니다.

MC노 │ 김민철 교수님, 두 분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김민철 │ 특별한 인연은 없습니다. 경희대에서 교직자들부터 성명을 내야겠다 생각하다, 학교에 미얀마 유학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알아보니 헤이만 학생이 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수업시간에 학생에게 특강을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MC노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어떤 조직입니까?

헤이만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2월 3일 결성되었고 2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시민단체인
KOCO(해외주민운동연대)와 연대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로서 기자회견, 기도회, 시위, 학교특강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MC노 │ 최근엔 어떤 활동을 하고 있죠?

헤이만 │ 기자회견, 한국의 종교단체들과 협력해서 기도회 참여, 지난 3월에는 오체투지도 함께 했고,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하는 조계종 스님들의 미얀마 특별입국 신청, 3월 27일 미얀마 국군의 날에도 미얀마민주주의 네트워크에서 주최하는 ‘미얀마 봄의 행진’을 함께 했습니다.

MC노 │ 지금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는 몇 분이 함께 하고 있습니까?

헤이만 │ 아직 규모가 작아요. 인원이 20명 정도입니다.

MC노 │ 미얀마 현지 상황은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민툰 │ 지난 주까지만 해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뉴스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많은 지역이 와이파이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이 될 때 와이파이가 잡히는 장소에서 사진이나 동영상 뉴스를 올리면 저희가 한국 쪽에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 전하고 싶거나 미얀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싱겔, 텔레그램 같은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해서 뉴스나 정보를 듣고 있습니다.

MC노 │ 두 분은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이 괴로우시죠?

헤이만 │ 저도 집에 연락할 때는 주로 국제통화를 사용하고 있어요. 제 고향은 큰 도시가 아니어서 인터넷이 거의 안 되는 지역이어요. 그제는 동생이 이모가 계시는 지역으로 잠깐 왔었다고 해요. 동생이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고 있어요. 여기는 CDM이라 많이 부르고 있어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피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는 좀 안전한 편이어요.

MC노 │ 오늘이 4월 23일인데, 지금 미얀마는 어떤 상황입니까?

민툰 │ 가면 갈수록 사상자도 많이 생기고, 전에는 인터넷이 잘 돼서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바로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정보를 알 수 있으면 피해가거나 미리 대비할 수 있는데 지금은 정보가 잘 파악되지 않으니 활동이 많이 끊긴 상태입니다. 그래도 시민불복종운동도 열심히 하고, 각지역마다 시위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처럼 많이 하지 못하지만요. 양곤에서는 밤에 냄비를 두드리는데 8시에 두드리기로 약속되어 있으면 7시 30분에 군인이 와서 지켜보고 있어 냄비를 두드리지 못하다가 군인이 가면 두드립니다. 군인이 없는 지역에서만 시위를 계속 하니까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지금은 시위대를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총을 바로 쏘기 때문에 나중에 인터넷에 사진이나 동영상이 나올 때만 확인할 수 있어 더 불안한 상태입니다. 전처럼 바로바로 정보를 알 수 없어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MC노 │ 미얀마 현대사에서 최초의 쿠데타가 일어난 게 언제였습니까?

민툰 │ 최초의 쿠데타는 1962년 3월 1일 네윈 장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MC노 │ 쿠데타 이전의 정부는 어떤 정부였습니까?

민툰 │ 미얀마는 1948년 1월 4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영국은 미얀마에 소수민족이 많으니까 부족 간의 이간질을 통해 지배했습니다. 2차 대전 때인 1942년에 미얀마는 일본을 끌어들여 영국하고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처음에 도와준다고 들어왔다가 오히려 3년간 미얀마를 지배했습니다. 1945년 8월 전쟁에서 지자 일본이 미얀마 땅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국이 다시 미얀마에 들어와서 식민지를 다시 만든 거죠. 그러나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영국이 버마인 따로 소수민족 따로 독립시켜주겠다 하자 아웅산 장군은 같이 독립해야 한다고 맞섰고 이에 1947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함께 독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 6개월 전인 1947년 7월 아웅산 장군이 암살당했습니다. 미얀마 독립 당시의 정치상황이 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미얀마에선 ‘우누시대’라 부르는 시기입니다. 우누는 아웅산 장군과 절친한 사이로 함께 독립운동을 했었습니다. 우누가 10년 정도 총리를 하면서 정치를 잘 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간의 분열이 생겨서 네윈 장군이 1962년 3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네윈의 주장은 미얀마의 군인은 독립군이다. 혼란스런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군인이 나라의 정권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1962년 3월에 첫 번째 쿠데타 이후 1988년에도 한 번, 올해 한 번 더 똑같은 방식의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MC노 │ 두 분은 한국에 있을 때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헤이만 │ 제 카톡으로 많은 메시지가 왔어요. 확인해보니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며 한국의 지인이 미얀마 현지직원과 저의 안부를 묻는 걸 통해 알았어요. 오전 쿠데타 발생 때 모든 통신이 마비되었는데, 해외 거주인들은 가족과 연락이 안됐다가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국영방송에서 쿠데타 발생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고 한국의 지인은 난민신청을 해야 하지 않냐고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 쿠데타를 겪어보고 외국에 있는 상태에서 난민신청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고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민툰 │ 사실 1월 말부터 쿠데타 이야기가 나오긴 했었는데, 이 시대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2월에 쿠데타가 일어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저는 군사정권시대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시대에 많은 아픈 기억이 있어요. 미얀마에 민주주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딱 10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2010년 이전에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신세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지만, 저희는 정치 이야기만 해도 잡혀가는 시대였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화도 많이 나고 분노가 일었습니다.

MC노 │ 미얀마 투쟁 보도에서 보이는 Z세대는 어떤 세대를 의미합니까?

헤이만 │ 1995년 이후 출생자들입니다. 이십대 젊은이들입니다. 그 이후는 알파세대, 그 이전은 Y세대, 1988년 이후는 X세대 이렇게 부릅니다.

MC노 │ 투쟁과정에서 Z세대가 많은 역할을 하는데, 그 세대는 미얀마 사회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헤이만 │ 2010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민주주의를 맛본 세대라 할 수 있죠. IT기술이 개발된 시대에서 자라왔고, X, Y세대보다 더 기술적으로 인터넷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툰 │ 2010년 전까지는 군사정권 시대여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의 Z세대는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보기엔 Z세대가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목표도 없고 늘 게임만 하는 친구들로 보였어요. 우리처럼 군사정권시대를 안 겪어본 신세대가 너무 가볍게 보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Z세대는 민주주의를 다 누릴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국제사회에 있는 젊은이들하고 같이 어울릴 수 있어요. 교육도 많이 받고, 인터넷에도 익
숙하기 때문에 정보에 접근하는 데에도 두려움이 없는 세대죠. 이번에도 쿠데타가 일어나니까 우리 X, Y세대는 겁이 나서 밖에 나와 데모도 못하는데 Z세대는 데모했어요. 부모님이 반대하면 나가서 몰래 데모하다 잡히거나 죽은 사람들이 많이 발생한 거죠. Z세대는 자유롭게 표현하고 용감하게 싸울수 있는 미얀마의 새로운 젊은 세대입니다.

MC노 │ 2월 1일 쿠데타 이후에 시민들의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헤이만 │ 가두시위가 처음 발생한 것은 2월 4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72시간 동안의 침묵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신고 없이 불법적으로 길거리 시위에 나가면 군부에 진압명분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냄비를 두들기는 행위는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밤 8시가 되면요. 첫 번째 가두시위는 2월 4일에 만달레이라는 제2의 도시에서 만달레이 의대생들과 외국어대학생들이 나와서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의 거리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떼자산이라고 만달레이 의대 출신 의사입니다. 그분의 주도로 계속해서 길거리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시위에서는 Z세대의 활약이 매우 큽니다. Z세대는 IT 기술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알기에 쿠데타에 대해서 전 세계에 소식을 알리는 데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미얀마의 인터넷은 페이스북으로 대표됩니다. Z세대가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를 해외에 알리려 했을 때 인터넷을 잘 활용했던 거죠.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활용해서 영어라든지 여러 가지 외국어를 잘 구사할 줄 아니까 다국어로 다 알리는 거죠. 트위터에서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하고 또 바이컷앱을 개발하여 친군부 기업에 불매운동, 사회적 처벌을 할 수 있게 리스트를 만들어주고, 여러 가지 정보를 한군데에서 볼 수 있게 데이터를 만들어 주었어요.

MC노 │ 말씀 중에 사회적 처벌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민툰 │ 사회적 처벌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사독재 정권을 만들어 국민을 통치하잖아요. 군부에 불복종하고 반대하는 방법의 하나로 군부와 관련되는 장군이나 그 가족을 페이스북에 알리고, 군부가 운영하는 사업체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군부가 관련된 기업에서 파는 식품이나 제품을 사지 말자는 것이 사회적 처벌입니다. 리스트를 보면 먹고 마시는 것의 거의 절반이 군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제품을 사지 말자 하면 국민들이 다 안 삽니다. 얼마 전에 A라는 음료수를 사지 말자 해서 사회적 처벌 바이컷 대상이 되는 음료수가 안 팔리니까 B라는 제품으로 포장해서 50% 할인해서 팔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B제품을 사서 포장을 풀어보니 A제품을 B제품으로 속여서 판 것이 탄로 난 것입니다.
미얀마에는 사회적 처벌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저희들은 되도록이면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는 중국제품을 불매운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얀마쿠데타를 중국이 많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중국제품을 안 사고, 미얀마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쓰자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같이 시위도 하고, 불매운동도 하면서 다방면으로 군부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MC노 │ 유엔 등 국제사회가 제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중국을 비롯한 나라들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민툰 │ 예,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에서 미얀마 군부 제재를 통과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의 내부 문제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말자는 거죠. 중국은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미얀마의 자원을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를 도와주고 있다고 봅니다.

김민철 │ 국제관계적으로는 미중 대립으로 볼 수 있죠. 중국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동지나해 쪽으로는 타이완과 베트남인데 사이가 좋지 않죠.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전략으로 진주목걸이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데, 중국이 인도양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미얀마를 통해서죠. 미얀마 군부하고 관계도 좋고, 경제적으로는 송유관이 바로 연결되어 중국의 대외전략으로는 미얀마를 자기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MC노 │ 시위대에 처음으로 발포한 것이 언제죠?

헤이만 │ 2월 9일입니다. 네피도에서 뮇떼떼 칸시라는 19세 여성이 머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강경진압이 심해졌어요. 처음에는 인터넷을 사용해서 국제사회에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퍼포먼스 위주로 시위했는데, 유혈사태가 발생한 후부터는 가두시위가 더 강화되고 군부의 강경진압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서 시위 유형도 바뀌었습니다. 무인시위로 사람이 나서지 않고 피켓을 세운다든지 갤러리 식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만달레이에서는 연좌농성이 있었고, 4월 4일은 부활절이어서 이스터 스트라이크라고 계란에 그림을 그려 활용한 시위, 플라워 스트라이크라고 ‘봄의 혁명에서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신발 안에 꽃을 꽂아 길가에 놔두는 시위 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자 국민들이 반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총, 화살, 화염병, 공기총, 뚜미(옛 화승총) 등 사카이주와 친주에서 이런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자 군부는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탄압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싸움이 더욱 심각해지고 사망자와 피난민이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유학생과 근로자 등으로 구성된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MC노 │ 미얀마 내의 무장단체들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민툰 │ 무장단체들은 1962년 쿠데타 이후 생겼어요. 미얀마 안에는 8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각 소수
민족마다 각각 1~10개 정도의 무장단체가 있습니다. 지금은 20~100개 정도가 있습니다. 20개 정도의 무장단체들은 전부터 군부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군사정부 시대인 2000년 이후에는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다시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지역주민이 사망하게 되자 까친주와 까 인주의 무장단체들이 투쟁에 참여해서 정부군과의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헤이만 │ 군부는 전투기까지 투입하고 수류탄까지 사용해가면서 시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MC노 │ 오늘까지 희생자가 어느 정도 되죠?

헤이만 │ 4월 22일 기준으로 사망자 수가 779명, 그 중 총상 사망 건이 741건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겁니다. 실제로는 800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MC노 │ 남녀차별과 관련한 미얀마의 독특한 풍습을 이번 싸움에 활용한다고 들었어요.

헤이만 │ 미얀마는 남녀차별이 좀 심한 편입니다. 파고다(절)에 가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여자가 갈 수 있는 곳과 남자가 갈 수 있는 곳이 구분됩니다. 여자가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어요. 예를들어 절에 가서 불상에 금박을 입히거나 할 때는 여자가 못합니다. 그러면 남자한테 부탁해서 금박을 입혀야 해요. 이런 것을 이번 시위에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남녀의 하의를 같이 빨래하지 않아요. 그러면 남자의 품위, 자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여자 속옷을 빨래하면 널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보이는 곳에 공개적으로 널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번 시위에서는 군경들이 시위대를 잡으러 오니까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치마 거는 빨랫줄을 만들었어요. 높은 빨랫줄 위에 여성 치마를 널면 군인들이 그 아래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자의 하의를 스치거나 만지고 지나가면 부정 탄다고 생각해서 그 아래로 지나가지 못하고 빨랫줄을 치운 다음에야 지나갔어요. 빨랫줄이 바리케이트 역할을 해준 겁니다.
그런데 Z세대와 시위참여 시민들은 이제부터는 성차별을 없애야 한다며,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인
데 미얀마의 남자들이 머리에 여성 치마를 두르거나 몸에 걸치고, 또 입은 사진들을 SNS에 많이 올렸습니다.

MC노 │ Z세대가 시위뿐만 아니라 미얀마에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군요. 군부가 저지르는 만행이 국제사회에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말씀해 주세요.

헤이만 │ 군부가 1988년에 했던 짓을 똑같이 벌이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려 하고, 미얀마는 다민족국가인데 인종적으로도 차별하며 버마족과 소수민족을 이간시키고 있어요. 시위대를 잡아다 고문하며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는 삐퇀시베다운이라는 지역에서 경찰서를 불질렀는데 범인을 잡아내기 위해 두 살짜리 아이가 보고 있는 가운데 부부에게 고문을 가했어요. 아이를 인질로 해서 자백하도록 강요한 거죠. 결국 실토하고 잡혀갔는데, 그 아이는 엄마, 아빠 이름을 계속 부르며 울고 있답니다. 시위 사상자 중 10~20대가 40%에 이를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지지난주 양곤에서 시각, 청각장애인이 사는 곳을 군부가 점령해서 반격을 못하게 인질로 삼고 인간 방패로 썼어요. 꺼떤에서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했고, 잡혀가서는 고문을 당하고, 여성들은 고문 트라우마가 심각해서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해요.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는데, 총을 겨누며 동네 사람들에게 그걸 치우게 합니다. 발로 차고, 때리고, 여성을 폭행하고, 너무 심각한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국영방송에 나오는걸 보면 체포당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엉망이고, 밤에 잡혀갔는데 아침에 시신 가지러 와라 이런 통보를 받아요. 어떤 사람들은 잡혀갔는데 생사가 불분명해요. 민간의 재물을 가져가고, 식당에서 먹고는 음식값을 내지 않고 다 파손시키고, 아무 이유도 없이 길가에 주차된 차량이나 자전거를 부수고 하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옵니다. 군인들이 긴 시간 동안 군대에서 고통을 받아와서, 세상에 나와 보니 민간인들이 자기들보다 더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무 이유없이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보고 있죠.

MC노 │ 지금 미얀마 국민들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요?

헤이만 │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구금된 지도자들이 석방되며,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민주주의에 기반해 국민통합정부가 성립하는 것이 국민들의 목표입니다. 저희가 1988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 성공할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시민불복종 운동도 더 강화되고 있고, 시민방위군이 생기면 시민들도 합류해서 저항하겠다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민툰 │ 민족연합이 우선입니다. 풀리지 않는 민족 간의 화합이 필요한데, 이번 쿠데타에 대한 저항에 소수민족이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민족통합국가를 만들자는 생각입니다. 소수민족의 입장을 서로가 이해하고 평화협정을 맺어 1947년에 아웅산 장군이 추구한 그런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이만 │ 미얀마는 불교국가여서, 이번 쿠데타에 대한 종교 지도자의 명확한 입장을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유혈진압이 심해지고 사망자가 발생하고 나서야 애매모호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것에 대해 젊은이들의 신뢰가 깨지고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한국 불교계는 많이 지지하고 연대해주셨는데요.

MC노 │ 아웅산 장군은 어떤 분이십니까?

민툰 │ 아웅산 장군은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배운 사람인데도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일하신 분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영웅 중에도 길이 이름을 남긴 분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MC노 │ 미얀마는 다민족 국가여서 민족별로 평가가 조금 다르지 않나요?

민툰 │ 아웅산 장군은 민족통합을 이뤘기에 모두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그
분의 딸인 수치 여사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 미신 문제를 잠깐 말씀드릴게요. 1983년 아웅산 묘역 테러가 일어났을 때에 미신을 믿는 네윈이 제 시간에 국립묘지에 가지 않았어요. 미신을 많이 믿고 있어서 늘 일찍 가거나 늦게 가거나 하지, 제 시간에 가지 않았어요. 네윈 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폭탄이 터져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지금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장군들도 미신을 많이 믿고 있습니다. 특히 목요일에 ‘ㅁ’으로 시작하는 도시에서 늘 유혈진압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의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지금 장군 이름이 미엉라잉으로 ‘ㅁ’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점쟁이가 시위대의 머리에 총을 쏘면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하니, 저격수를 배치해서 머리만 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망자가 많이 나왔어요.

헤이만 │ 더욱 충격적인 것은 스님이 점을 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거죠. 종교인의 이런 행동에 더욱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MC노 │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의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요?

헤이만 │ 저희는 유학생과 근로자로 구성되어 있어요. 한국에도 여러 단체가 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단체도 많이 있습니다. 저희는 시민단체로서 작은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기자회견, 추모회, 기도회 등 종교단체들과의 연대활동을 해왔습니다.

민툰 │ 미얀마에 대한 소식을 한국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플랫폼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클
럽하우스에서 미국, 영국, 한국 사람들과 미얀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얀마에 대한 소식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부가 빨리 유혈사태와 진압을 멈추고 협상할 수 있는 날까지 계속하겠습니다. 또한 쿠데타가 수습되고 나면 미얀마의 복원에도 힘쓸 생각입니다.

MC노 │ 한국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연대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헤이만 │ 후원금 모금인데, 해외주민연대 KOCO를 통해서 참여해주시면 됩니다. 다음에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릴레이 영상을 만들어서 KOCO에 보내주면 됩니다. 그러면 저희가 영상에 미얀마어 자막을 넣어서 현지 커뮤니티와 공유합니다. 그 외에도 일요일마다 인사동에서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1시 반까지 침묵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한국의 지지자들이 함께 와서 연대해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엽서와 마스크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데,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민툰 │ 한국인들이 많은 후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 가서 미얀마 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면 많은 학생들이 지지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줘요. 이걸 미얀마에 전하면 큰 힘이 됩니다. 시위에 앞장서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한국 사람들의 지지가 많은 힘이 됩니다. 후원금을 보내는 것도 좋고, 세손가락 경례 사진을 찍어 올려주고, 응원 메시지를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김민철 │ 미얀마는 공무원에게 주택이 보장되어 있는데, 정년 후에도 계속 살 수 있어요. 군부에 반대하면 집에서 쫓겨나게 되니, 주택지원도 필요해서 후원금이 여기에도 쓰인다고 합니다. 저항이 길어지면 난민이 많이 발생할 수 있는데, 태국 근처에 난민 수용소가 세워지게 되면 그 비용도 필요하고요. 후원금이 여러 가지로 활용되리라 보입니다.

헤이만 │ 처음에는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해왔지만, 지금은 피난민 지원금, 시위대 보호장비 구입, 의료비 등에 지원할 것입니다. 현재 미얀마의 의료수준이 한국에 비해서는 덜 발달해 있어서 쿠데타가 수습된 이후에는 쿠데타 때 입은 트라우마 치료에 한국의료계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MC노 │ 미얀마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철 │ 제가 헤이만씨를 초청해서 특강을 개최했는데, 특강 제목을 ‘미얀마에 귀 기울이다’로 잡았습니다. 그 이유는 1980년 광주로 돌아가서 봉쇄된 도시에 고립된 사람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누군가 밖에서 그런 소식들을 계속 알려주고 연대의 마음을 전했더라면 조금은 힘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죠. 지금 미얀마는 길어질 싸움을 하고 있고 너무나 힘들고 지치기에 낙관적 전망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민들이 미얀마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억하며 이들의 민주화투쟁을 적극 지지해주었으면 합니다.

MC노 │ 세손가락 경례를 개인 SNS에 올려주어도 큰 힘이 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많은 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를 바랍니다.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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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2018 상반기 시민강좌 ‘한 시대, 다른 삶’ 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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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은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과 연계하여 시민강좌를 개설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 이래 70년간의 일제 침략, 그 중에서도 식민지배 35년은 우리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나라와 민족이 위기를 맞은 그때, 어떤 이들은 목숨과 전 재산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으나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부와 출세를 위해 제 민족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번 강좌는 전시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과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일제강점기 서로 다른 길을 걸은 다양한 인물들을 대비하여 조명한다.
강좌는 총 7강으로 6월 12일(화)부터 28일(목)까지 매주 화, 목요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되며, 30일(토) 오전 10시 특별강좌와 전시 관람으로 마무리한다. 근현대사를 심도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일반 성인 40명을 모집하며 수강신청은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www.mhmh.or.kr)와 전화(02-903-7580)로 가능하고 무료로 진행한다. 이번 강좌는 수강을 원하는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고 지리적 접근성을 높이고자 2018년 6월에 새로 개관한 삼각산 시민청에서 이루어진다. 작년 9월에 개통한 우이신설경전철을 타고 솔밭공원역에서 내리면 바로 강의실까지 올 수 있다. 1강부터 6강까지 삼각산 시민청 강의실에서 진행되며, 7강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 후 전시를 관람한다.

제1강은 신효승 연구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이 3대에 걸친 석주 이상룡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도와 그래픽을 통해 설명하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의의를 살펴보았다. 2강에서 권시용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언론인과 문인으로 명성을 떨친 심천풍(우섭)과 심훈(대섭) 형제의 일생을 시기별로 상세히 다루고 심훈의 일기 등 사료를 통해 형제의 엇갈린 선택을 설명하였다. 3강은 홍명희 3대의 친일과 항일을 주제로 김덕영 연구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서민교 연구원(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조선인(4강)을 구체적인 사료와 함께 다루며, 이명숙 연구원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왕, 광산왕, 기부왕(5강)이라는 소재로 조선인 거부(巨富)들의 이면을 파헤친다.
제6강은 임헌영 소장이 강사로 나서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로 꼽힌 이광수와 최남선의 변절과 해방 후 반민특위특별재판에 회부된 상황까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제7강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의 전시 주제를 아우르는 박수현 연구실장의 강의 후 전시 관람으로 전체 강좌를 마친다.

• 최인담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사

월, 2018/07/0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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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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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이 지난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 86-1번지 설화산 일대에서 진행한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가 마무리되었다.
공동조사단은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4월 12일부터 23일까지 발굴된 희생자의 유해와 유품에 대해 아산시 공설봉안당에서 감식을 진행하였으며, 5월 14일 같은 장소에서 안치식을 치른 후 세종시에 위치한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추모관’에 봉안되었다. 조사단은 이 지역에서 최소 208명의 유해와 551점 이상이 유품이 발굴하였는데,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 당시에 희생된 부녀자와 어린이들로 밝혀졌다. 유해감식 결과 최소 208명 가운데 어른이 150명, 미성년의 어린이가 58명으로 확인되었다. 유품으로는 M1과 카빈 소총의 탄두와 탄피, 비녀, 귀이개, 단추류, 버클, 고무신,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 등과 함께 여성용 비녀가 최소 89점 발견되어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녀자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아산시의 예산 지원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보다 연구소 아산지회 회원들의 물심양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한편 5월 29일에는 아산시청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조사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은 유해발굴 및 감식결과 보고를 통해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국회 입법 필요성을 강조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월, 2018/07/0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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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연구소는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박혜영)와 함께 5월 31일 오후 1시 30분부터 덕성여대 대강의동 104호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는 한편, 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관장 한상권)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올해 심포지엄은 왜 ‘3·1운동’이 혁명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 노동자 등 새로이 조직화한 ‘3·1운동’ 참여 계층의 성격과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의 이념적 지평〉이란 기조발제에서 3·1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 민주혁명, 국제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곧 3·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으며 3·1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근대적 주체-청년, 여성, 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3·1혁명은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1910년 7월 6일자 ????신한민보????논설에서1919년4월제정된「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각종선언서의분석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사상적 흐름을 짚었다. 끝으로 3·1혁명이 좁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국제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 발표에서 여성사에 있어서 3·1운동이 갖는 의의로서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남녀평등을 천명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1920년 이후 전개된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 ‘독립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으로 장을 나누어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사 100년의 관점에서는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운동이자 페미니스트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라며 당시 여성운동이 갖은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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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청년〉 발표에서 조덕진, 박헌영, 장병준, 강석봉 등 개별 사례 분석을 통해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과 기억이 이후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로 만들고 조선사회를 실질적인 정치·문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바탕이 3·1운동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사회변동〉 발표에서 3·1운동이 “주체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선택한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 이후 조선인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과 지배자의 변화 모습을 고찰하였다.
종합토론은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주재하였고, 약정토론자로는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이태훈 연세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이자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서거 63주기 추도미사가 함세웅 신부의 주재하에 차미리사 선생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 편집부

월, 2018/07/0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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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운음

홍익미술대학 출신의 SNS 1인 미디어 만화가로서 고 노무현대통령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와 일러스트 등을 그리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다룬 웹툰 『노공이산』과 캐릭터 일러스트 모음집 『바보 노공화』가 있으며,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몸 바 이태준, 김필순, 박서양, 황에스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만화 <조국의 심장을 지켜라>를 펴냈다.

월, 2018/07/0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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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제11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제11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5월 18일 금요일 오후 6시 숙명여대 100주년기념관 7층 한상은라운지에서 각계인사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학자들의 도전적 탐구정신을 격려하고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2007년 제정되었다. 수여식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수령자 발표, 지원금 수여, 최덕수 고려대 교수,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축사, 수령자의 소감연설 순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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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심사대상은 2016년 8월과 2017년 2월에 수여된 17편의 한국근현대사 관련 박사학위논문으로 2월 20일 예비심사를 거쳐 4월 9일 심사위원회에서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미래인재양성사업단 연구교수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가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비롯하여 지수걸 공주대 교수, 최기영 서강대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조재곤 동국대 교수, 장영숙 상명대 교수, 한모니까 카톨릭대 교수, 김태우 외국어대 교수가 예비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수령자인 유바다 박사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는 그간의 국제법적 연구와 만국공법의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의 연구로서 한국사와 국제법 연구자들에게 주목받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국내외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그동안 등한시해 온 당대 유럽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까지 확보하여 분석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앞으로 개항 이후 조선의 국제법적인 지위에 관한 활발한 연구와 논쟁이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 김혜영 연구원

월, 2018/07/0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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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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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시가도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철도관사를 옮겨 지은 것을 1929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용산역 위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하천을 정비하여 직선화한 모습도 보이는데 2년 만에 이와 같이 변화된 지형도는 을축년 대홍수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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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 이촌동, 『매일신보』 1925. 7. 13.

 

용산역 근처에는 구획이 정리된 신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거대한 일제의 군사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조선의 중심부에 일제의 군대를 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는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상시적으로 주둔시켜 안정된 통치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도와 함께 대륙침략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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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가 걸려 있는 조선군사령부 정문, 사단대항연습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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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대항연습사진첩일본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관병식 장면 항공사진, 사단대항기념사진첩

 

이처럼 1929년판 “용산시가도”는 용산 주둔 일본군의 관계시설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민족사랑> 2014년 9월호에 실린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과 함께 보면 용산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 강동민 지료팀장

수, 2018/08/0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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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 • 이홍관 정리

현재 국제운송회사 로드 원(ROAD 1) 로지스틱스를 운영하고 있는 홍남화 아산지회장은 2000년 9월부터 연구소 회원에 가입했다. 2016년 5월에는 아산 둔포면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 공덕비를 제보하였고,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2017년 1월~5월)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우리에게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각인시킨 <나는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선생과사촌지간이다. 찾아간 날, 마침 홍남화 회원은 업무상 무언가 바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성의 있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는 아산의 신정호수 인근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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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의 회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답 : 저희가 80명 정도 되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천안아산지회였는데 분리하고 보니까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지회의 발전을 전망하면서 힘들더라도 각자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문 : 천안아산지회로 활동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답 :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임종국 선생님 추모사업을 했었죠.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니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에 임종국선생의 조형물을 세웠고 앞으로 지역의 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입니다.

 

문 : 아산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지요?

답 : 제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1997년 또는 1998년 무렵 수원 북문 부근에서 북한동포돕기 캠페인을 보고 그 단체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갔더니 연구소 경기남부지부와 관련되어 있더라구요. 그것이 연구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한동포돕기 성금으로 5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무렵 수원지역에서 열린 강연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수원역전의 경기서적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연에도 참가해 제가 “DJ와 YS는 둘 다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왜 차이가 납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 사람은 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은 철학이 없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노동은 교수님의 친일음악 강연도 참석했습니다. 노동은 교수님 강연은 화성시가 홍난파기념관 건립을 계획하자 반대운동 차원에서 연구소 경기남부지부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는데 현재 방학진 기획실장은 기억을 못하시네요. 그 후 오산으로 이사해서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 수원에서 오산으로 다시 천안에서 고향인 아산으로 계속 내려오셨네요?

답 : 제 회사 이름이 로드 원(ROAD 1)입니다. 1번 국도를 타고 대륙까지 오가자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사를 살펴보니 큰 집은 북한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에 쫓겨 인천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집안을 보면 수백 년간 한 곳에서 살다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는 천안, 아버지는 홍성, 저는 아산에서 태어납니다.
지난 100여 년의 격동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집안이 이리저리 내몰렸던 거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다보니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를 80% 정도는 복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가족사를 복원했던 것 같습니다.

 

문 : 아직 복원하지 못한 가족사의 20%는 무엇입니까?

답 :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의한 망각이 그 20%입니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 당시 희생될 뻔 하셨습니다. 아산 현충사 부근의 황골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남양 홍씨(홍남화 지회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집안이다) 집성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와중에 황골에서 우익에 의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50년 추석 무렵입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던 중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사촌이며 큰어머니가 모두 끌려간 후였습니다. 우익 청년들이 동네 사람들을 공회당에 가두어놓고, 좌익 혐의자에 대해 인민재판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운좋게도 친척 되시는 할머니가 두둔해주어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큰어머니를 비롯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빠리의택시운전사????에그 내용이 실려 있구요. 그 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해자들과 한평생 사셨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과 살림살이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부터 6·25 이야기를 알음알음 알아 오면서 자랐고, 숙명처럼 민간인 학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을까, 시골마을에 두레패가 왜 둘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었지요. 난리가 끝나고 마을 한켠을 지키던 왜가리떼도 사라지고 맙니다.

 

문 : 그래서 이번에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열심히 참여하셨군요?

답 : 네. 6·25전쟁기에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주체나 피해 유형이 다양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요시찰대상처럼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자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구실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산지역에서 보도연맹건으로 희생된 사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군 지배가 끝나가는 2~3일 전후 치안 공백기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차별 학살을 벌였고 이후 치안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찰이 좌익 혐의자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설화산 민간인 희생자 유골은 1951년 1월 평택까지 중공군이 내려오자 후퇴 직전의 경찰이 학살한 좌익 혐의자들의 유골인 거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기록에는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8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일부에서는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던 점을 들어서 1,3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천안의 경우 당시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이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산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 : 내년에 제2기 진화위가 출범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현재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조사관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 이번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에 진화위 당시 아산지역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경찰관이 휴가를 내고 조용히 찾아주었는데 본인도 당시 조사가 미흡했다고 말하더군요. 여하튼 2기 진화위에서는 1기와 달리 위원회뿐 아니라 아산시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예상되는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명확한 조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아산시장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 민간인 학살 실태 파악과 공청회 개최, 인권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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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는 이밖에도 친일파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운동도 열심히 벌이고 계시지요?

답 : 우선 새로 출범한 아산시의회와 충남도의회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고 표준영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표준영정 퇴출 서명운동에 함께 했던 아산지회 회원들 중에 각각 아산시의원(홍성표 회원)과 충남도의원(안장헌 회원)에 당선되어 아주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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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바다에 마을사람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산 구성리에서도 마을사람들을 좌우로 길게 세워서 바닷가로 나가게 하고, 물이 차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자 총을 쏴 살해해서 그대로 수장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희생되신 분의 딸이 노인이 되어 증언합니다. 엄마한테 동네 청년들이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묻자, 마당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됩니다.
현재 이 같은 증언을 할 분들은 찾기 어렵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6·25전쟁 때 학살된 유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고,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하면 가해자와 연결되지 않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며 어설프게 덮기보다는 민족사의 상혼을 드러내 근원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응어리진 아픔을 보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수, 2018/08/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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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헌법에 반대하다 간첩 누명을 썼던 임헌영 소장이 6월 2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수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로부터 불법적인 수사를 받으면서 작성된 진술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는 모두 그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무죄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은 1974년 문인들이 개헌 지지 성명 등을 발표하자 보안사가 임 소장을 비롯해 이호철·장병희·정을병·김우종 씨 등 문인 5명을 상대로 고문과 가혹행위 끝에 거짓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한양(漢陽)』에 글을 기고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했고, 법원은 임 소장을 비롯한 이호철·장병희·김우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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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이 사건을 재조사한 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던 보안사가 불법 수사했으므로 잘못된 판결”이라며 재심을 권고했다. 이후 이호철·장병희·김우종 씨 등은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검찰은 2017년 독재정권 시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 중 하나로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던 임 소장을 대신해 재심을 청구, 무죄를 구형한 바 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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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465개 독립·민주화운동 단체, 교육·학술단체 등이 활동하고 있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이하 국정화저지넷, 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는 6월 6일 오전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앞서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대구 교육감 후보로 출마한 강은희의 심판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반 헌법적이고 불법적인 국정농단 사건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인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비수를 꽂은 인물, 국정농단 세력을 비호한 인물, 강은희 후보에게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려달라”며 “2·28민주화운동 정신과 촛불정신으로 강은희 후보를 단죄해달라”고 대구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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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1일 대구시교육청 앞에서도 국정화저지넷과 대구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 대구네트워크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무너져 가는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대구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교육청의 수장이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강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역사의 산증인인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위안부합의 주동자인 인물이 내가 사는 대구에서 교육감 후보로 나온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각계의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6월 13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은희 후보는 40.7%의 득표율로 대구교육감에 당선됐다. 그러자 대구의 학생·청소년들이 강은희 대구교육감 당선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며 학생들 손으로 교육감을 뽑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강 교육감은 2015년 새누리당 의원 시절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간사로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지지 여론조성에 앞장섰다. 또 여성가족부 장관 재직 당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옹호하며,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일본 정부의 ‘위로금’을 받도록 회유하고 종용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2014년 국회 교문위 회의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 입학 등을 비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송민희 홍보팀장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

수, 2018/08/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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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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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85점 보내와
6월 1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7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보성문화>, <새전남>, <월간호남> 등 전라도 지역에서 발행한 잡지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기금전달식 후 자료 기증 잇달아
▪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7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지난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기금전달식에서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6월 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일본역사사진첩>(1914), <황족화보>(1930)등 총 5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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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카와 마사키(재한군인군속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씨가 2003년 재한군인군속 추가 제소에서 사용한 플래카드, 2009년 군군재판 도쿄고등법원 판결 후 지원하는 모임이 받은 플래카드 2점을 기증했다.

야마모토 나오요시(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계간전쟁책임연구>, 군인군속재판관련자료등책자와문서, 현수막을기증했다.

야스다 치세 씨가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사건소송>(1992)을기증했다.

평화교육연구위원회에서 <新潟県内における韓國·朝鮮人の足跡をたどる>(2010), <平和教育委員會資料シリーズ 第2集 新聞などに見る新潟県内韓國朝鮮人の足跡>(2006) 도서 3권을 기증했다.

야노 히데키(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활동했던 자료 모음인 플로피디스크, 카드, 명함 파일 등 다량의 자료와 지난 2018 남북정상회담 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 등을 기증했다.

히구치 유이치(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씨가 6월 18일 「용산시가도」(1929)를 기증했다. 이 지도는 용산 일본군기지와 용산역 및 주변의 철도기지 등이 표시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번 호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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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도시코 씨가 2014년 6월 27일 기증에 이어 <일본의 전사>등 강제동원관련도서31권과 ‘일본정부와 피해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라’에서 찍은 사진 등을 기증했다.

 

▪ 3월 24일 김삼웅 지도위원이 1962년 발행한 『동경재판』(전3권)을 기증했다. ‘동경재판’은 극동군사재판소가 제2차 세계대전 중 극동지역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였던 재판으로 정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다. 이 책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조일신문법정기자단에서 작성했다. 동경재판 당시 법정사진과 함께 재판의 모든 과정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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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이덕문 회원이 지난해에 이어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제13회숙명여자대학교졸업앨범>(1964)등 도서 3권이다.

▪ 6월 14일 호시카와 가즈에(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 씨가 아베 반대 표찰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수, 2018/08/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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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청년시대여행이 공동 주관하는 ‘일제 강제동원과 야스쿠니신사-촛불원정대 특강’이 7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민족문제연구소 강연장과 ‘청년협동조합 몽땅’의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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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강으로 구성된 이번 강좌는 올해 8월 도쿄에서 열리는 ‘야스쿠니의 어둠에 평화의 촛불을’ 공동행동 참가자를 대상으로 마련된 것으로, 현지 행사에 앞서 참가자들이 한일관계와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동북아 평화공존의 방안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준비되었다.
1강에서 김진영 선임연구원은 일제식민지배의 특징과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개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례와 한일 양국정부의 대응을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았다. 2강에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은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를 바탕으로 ‘천황제’와 야스쿠니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 그 허상과 야만성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현 일본사회의 사상적 근원, 우경화의 연원을 설명하여 강좌 참가자들과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7월 19일 3강에는 영화 ‘안녕사요나라’ 상영회와 주인공인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고, 7월 26일 4강에는 촛불행동 설명회와 참가자 전체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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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반민특위 설립 70주년을 맞아 6월 20일 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회원(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간담회에서 김정륙 회원은 당시 서울 충무로에 있던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로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와 김상덕 위원장을 회유한 이야기, 김상덕 위원장이 6·25 직후 납북된 과정과 그 후 비참했던 가정사 등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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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를 마친 후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인장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시절 그리고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 사용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김정륙 회원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마련된 2층 전시실에 인장을 직접 진열했다.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의 유품을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에 기증하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며 소중하게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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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물 1층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이 열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하 잇는 모임)이 건립기금 1억 345만 원을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에 전달했다. 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일본 시민과 단체로부터 모은 기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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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금전달식에는 잇는 모임에서 서승 공동대표, 안자코 유카 공동대표,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등 총 19명이 참석했고, 연구소 측에서는 이이화 시민역사관건립위원장,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이민우 운영위원장 등 약 60명이 참석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들도 함께 했다.
기금전달식에 이어 2층 전시실에서 자료기증식이 진행되었다. 잇는 모임은 그동안 기금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전후보상운동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모아왔는데, 이날은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 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후루카와 마사키 씨가 커다란 현수막을 기증했다. “야스쿠니 합사를 하지 마라!! 유골을 돌려 달라!!”라는 구호가 힘찬 글씨체로 적혀 있는 이 현수막은 2003년 군인군속재판 추가제소 당시 일본 법원 앞에서 피해자들과 일본 시민들이 함께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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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는 모임 참가자들은 기금전달식에 앞서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남산 권역을 답사했으며, 6·10민주항쟁 31주년이 되는 날에는 남영동 옛 대공분실을 견학했다. 그들은 일제와 국가폭력으로 짓밟힌 역사가 켜켜이 쌓인 용산과 남산 일대를 답사하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했다.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일본 시민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알리고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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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음)와 육군사관학교(교장 정진경 중장)가 공동주최한 이날 기념식은 처음으로 육사에서 열렸는데 이는 육사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학교라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육사는 지난 해 12월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특별 학술회의를 열었고, 올해 3월 1일에는 육사 교정에 독립전쟁 영웅 5인(이회영,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의 흉상을 제막하는 등 우리 국군의 뿌리 찾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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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임원, 유족, 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기념식에는 1,100여 명의 육사생도 전원이 연병장에 도열했다. 주동욱 경희민주동문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 준비위원장이 신흥무관학교 경과보고를 했고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기념사를 했다. 윤경로 상임대표는 기념사에서 “신흥무관학교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육사 생도들이 배우기를 원했는데 쉽지 않았지만 촛불시민들의 덕분으로 가능했다”면서 “앞으로도 매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 수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념식을 마친 후에는 육사 생도들의 분열식이 거행되었다. 이어서 독립전쟁 특별전시회를 관람 후 육사 생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을지강당에서 공연된 항일음악회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날 기념식에는 윤경로 상임대표를 비롯해 이항증 공동대표, 정철승 조직위원장, 김용호 행사위원장 등이 참석했고 독립운동가 유족으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선생 그리고 김순흥, 권위상, 김희원 운영위원 등이 함께 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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