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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의 고정관념 허물기(2) – 이호철의 한국문단 종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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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의 고정관념 허물기(2) – 이호철의 한국문단 종횡기

admin | 수, 2020/12/3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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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의 고정관념 허물기(2)

– 이호철의 한국문단 종횡기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연줄로 미군 JACK부대 경비원이 되었는데, 마침 종군작가로 해군중령이었던 염상섭의 조카와 그 딸이 같이 근무하는 걸 알고 그 소개로 자기 소설을 염상섭에게 전하게 되어 싹수가 있다는 촌평을 들었다. 1953년(22살), 미군 기관 경비원으로 상경한 그는 황순원과 연이 닿아 문예살롱으로 찾아가 소설 습작을 본격화했다.
1954년, 한국은 예술원을 설립했는데, 초대 회원으로 염상섭 박종화(이상 서울 출신), 김동리 조연현 유치진(이상 경상도 출신), 서정주(호남) 윤백남(공주 출신)으로 월남 문학인은 전무했다. 제2대에야 황순원(평남) 이헌구(함북 명천) 모윤숙(함남)이 김말봉(부산) 곽종원(경북 고령)과 함께 추가되었고, 1960년에는 신석초(충남 서천) 박영준(평남 강서)이 추가됐다. 그러나 주요한 오상순 유치환 김광균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광섭 김동명 신석정 이은상 노천명 김현승 김용호 등 시인, 주요섭 안수길 계용묵 박계주 정비석 오영수 등 작가, 김팔봉 백철 등 평론가들은 초기에 소외되어 있었다. 이 명단을 참고하면 예술원의 편파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게 한국문단을 파벌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황순원과 인연을 맺은 이호철이 보기에 한국문단은 조연현과 <현대문학>의 독무대였다. 예술원이 발족하자 이에 대한 반감으로 한국자유문학자협회가 창립(1955.4)되었는데, 위원장 김광섭, 부위원장 이무영, 백철 모윤숙 김팔봉 서항석 이헌구 등이 주도했다. 문단 비주류 파인 한국자유문학자협회는 기관지로 <자유문학>(1956.6)을 창간했으나 1963년 8월호 통권 71호로 종간됐다.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자유문학>은 <현대문학>과는 달리 현실비판 의식이 강한 작가 남정현 최인훈 박용숙 유현종 등과 시인 권용태 황명걸 이세방 등을 등단시켰다.
역시 비주류파가 주동이 되어 나온 <문학예술>은 1954년 4월에 창간했는데, 주간 오영진 편집 박남수 부주간 원응서 등이었다. 사무실은 <사상계>가 있던 한청빌딩 3층으로 장준하의 호의로 10평 정도의 공간을 사용했는데, 2호까지는 <문학과 예술>, 3호부터 ‘과’가 빠졌다. 조연현의 <현대문학>과는 달리 외국문학에 지면을 대폭 할애한 게 특징이었다.
<문학예술> 등단자로는 평론가 유종호 이어령 이환 이교창, 소설가 이호철 최상규 조백우 선우휘 송병수 김성원 송원희, 시인 박희진 박성룡 인태성 성찬경 신경림 민재식 이희철 조영서 신기선 이일 임종국 허만하 등을 배출했다. 1957년 12월 33호로 종료됐는데, 이 계열의 문인들은 나중 <사상계>로 합류했다.
<사상계>에서는 조연현을 사갈시했다고 이호철은 증언하는데, 그러나 조연현은 “다부진 배짱이며 날카로운 평론으로서는 당대 1급”이며 명강의로 유명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사상계>가 문학인뿐만 아니라 함석헌 신상초 지명관 안병욱(다 북한출신) 등 문사철 지식인들에다 김팔봉 백철 안수길 손우성 여석기 나영균 김진만 김붕구 등 외국문학자들, 그리고 <문학예술> 출신 문인들의 대거 활약으로 한국 지성사의 풍토가 변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이승만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초기 동인문학상 수상자는 거의 북한 출신으로 채워졌다. 1회(1956) 김성한 「바비도」, 2회(1957) 선우휘 「불꽃」, 3회(1958) 오상원 「모반」, 4회(1959) 손창섭 「잉여인간」, 5회(1960) 이범선 「오발탄」과 서기원 「이 성숙한 밤의 포옹」 공동수상, 6회(1961) 남정현 「너는 뭐냐」, 7회(1962) 전광용 「꺼삐딴리」, 7회 이호철 「닳아지는 날들」로 이 중 남한 출신은 서기원과 남정현 둘뿐이었다.

문단 비주류에 뿌리 내리기
1955년(24살), <문학예술> 7월호에 「탈향」으로 문단의 첫 관문을 통과한 이호철의 앞길은 창창했다. 그러나 고향 선배 S에게 미군부대를 그만 두고 교사로 취직시켜준다는 사기에 걸려들기 직전까지 갔던 이호철은 황순원의 소개로 출판사 광문사에 취직. 이후 홍릉, 삼선동, 청운동 등지로 옮겨가며 하숙생활을 했다.
1958년(27살), 이호철은 단편 「여분의 인간들」을 <사상계>에 게재하면서 장준하와 교분을 텄고 함석헌과도 알게 되었다. <사상계>에는 작가 한남철이 근무하며, <현대문학>에서 소외된 문인들의 거점이 되었다.
자유당 치하의 살벌했던 시절에 이호철은 조봉암의 진보당 비밀 청년회원이었고, 이로 인해 조봉암 사건(1958년 1월 구속, 1959년 7.31. 처형) 이후 그 천하태평의 이호철도 약간은 전전긍긍했다고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자유문고, 2018)에서 털어놓았다. 아마 가입 후 별 활동은 없었던 듯하나, 그 계열의 인사들과의 교류는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의 문단 질서가 4·19와 5·16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는데, 이호철은 5·16 직후 서정주가 국문학자 조윤제와 연루되어 잠시 검거됐던 사실을 놓치지 않고 증언해 주기도 할만큼 오지랖이 넓었다.
1960년(29살), 판문점을 방문한 이호철은 북한 기자에게 이종사촌 형(소련 유학 간 형) 이름을 대니 경제학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놀랐다. 이듬해에 다시 판문점에 가니 이대 출신 여기자가 팔꿈치로 그를 건드리며 “뭘 그런걸(소설 「판문점」, <사상계>, 1961.3 게재) 써설라므니 그 동무를 이젠 이쪽에는 못 나오게 해요”라는 말을 들었다. 바로 소설 「판문점」의 후일담인데, 이호철이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소설처럼 남남북녀가 애정 표현을 짙게 하진 않았고 다만 몇 마디 대화만 오가면서 눈길에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소설에 나타난 바로는 마치 북녀(북측 여기자)가 남남(남측 남자 기자)에게 말려들어버린 것처럼 묘사되어 그 여기자가 판문점 출입을 봉쇄당했다는 후일담이다. 예기치 못한 남북 간의 첫 필화가 발생한 셈이다.
이 무렵 이호철은 청운동 꼭대기에서 하숙하며 한남철과 의기투합, 그를 통해 나중 기업인이자 문화운동가이며 교육자인 채현국과 평론가 백낙청 등 많은 인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1961년(31살), 첫 창작집 <나상>(사상계사)으로 제7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5·16 쿠데타 직후인 6·17포고령 제6호로 모든 분야의 사회단체가 해산당하고 단일화조치로 한국문인협회가 결성되었다. 한국문인협회는 조연현이 주도해 전영택(1963년까지), 박종화 (1969년까지) 이사장 체제로 온존되었다. 1964년(33살), 박정희 정권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던 불평등한 한일협정 체결 반대를 위한 6·3항쟁사태 무렵 작가는 명보극장 앞 초동 골목에서 하숙하며 <소시민>을 연재(<세대>)했다.
이듬해 1월 9일 밤, 명동에서 전혜린, 전채린 자매, 작가 김승옥 등등과 술을 마시다가 김승옥을 데리고 초동 하숙방으로 갔는데, 이때 김승옥은 스케치 <1965년 1월의 이호철>을 그렸고, 그 이튿날 아침 전혜린은 작고하여 충격을 주었다.
한국 문단사와 지성사에 일대 전환기를 이룩한 시기를 이호철은 1966년으로 잡는데, 이때 그는 원효로로 하숙(1966년 봄)을 옮겼고, <서울은 만원이다>(<동아일보>)를 연재했는데, 이 해에 <창작과 비평>(1966.1.겨울호)이 창간됐다. 문우출판사(文友出版社, 7호까지), 일조각(一潮閣, 14호까지)을 거쳐 1969년 가을·겨울 합병호인 제15호부터 창작과비평사 발행으로 정착됐다. 1967년(36살) 1월, 조민자와 결혼한 이호철은 문단의 호남 총각으로 한때는 최정희가 사윗감으로 탐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해 10월, 세계문화자유회의(1950년 베를린에서 창립, 한국지부는 1961년 시이덴스티커 등이 내한하면서 개설) 주관으로 워커힐에서 ‘작가와 사회’ 세미나가 열렸다. 세계문화자유회의는 미 CIA가 배후라고 <뉴욕타임즈>가 이미 1966.4에 시리즈로 폭로했기에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던 행사였다. 이후 한국문단과 지식인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적인 틈새를 보여주는 순수-참여논쟁이 끈질기게 전개되었다. 물론 이 세미나는 참여문학을 봉쇄하기 위한 기획이었으나 논쟁은 참여문학의 불가피성으로 여론이 변해갔다.
사이덴스티커(Edward George Seidensticker 1921~2007)는 콜로라도 출신으로 일문학을 전공,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번역하여 노벨상(1968년 수상)을 받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설국(雪國, Snow Country)>의 첫 구절 “國境の長ぃトンネルを拔けると雪國でぁった”)을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boder tunnel into the snow country”(열차는 국경의 긴 터널을 나와 설국으로 들어섰다)로 의역하여 원문보다 더 빛나는 문장을 창작했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여기서 말하는 터널은 시미즈(淸水)이며, 국경(國境)은 ‘콧쿄’가 아닌 ‘쿠니 자카이’(지방 행정 경계)이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미‧일의 숭배열이 극에 달했던 터라 사이덴스티커의 명성은 대단해서 한국 펜클럽엘 자주 들락거리며 거드름을 피워 나같은 신진 평론가는 그를 존경의 염으로 바라봤는데, 지금 생각하니 오롯이 억울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가 참석하여 창립한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위풍당당했다. 워커힐에서의 이 세미나에서 불문학자 김봉구가 ‘작가와 사회’란 주제로 발제를 하면서 참여문학과 사르트르를 맹공했다. 이 발제는 치열한 공방전을 야기, 남정현 임중빈 등이 정면으로 반박한 데 이어 전 문단이 참여문학 논쟁으로 토론장화했다. 이호철은 「작가의 현장과 세속의 현장」(<동아일보>, 1967.10.21.)에서 “그 시대 사회의 도덕적 위기나 사회적인 문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제때제때에 경고를 발하는 것은 작가다”라고 주장했다. 이호철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든 신호탄이었고, 이 논쟁은 1968년까지 지속됐다. 바로 참여문학을 압살하기 위한 일환이었음이 드러난 것은 그뒤의 일이다. 이 논쟁의 끝자락에서 김수영(1968년 작고), 신동엽(1969년 작고) 두 시인이 타계한 것은 무척 애석한 일이다.
이호철에게 한국의 기성 비평문학은 임화와 백철, 조연현의 삼각구도로 비춰졌다. 최일수를 비롯한 몇몇을 임화 계열로 본 그는 중도론자인 백철에 대해 그리 신뢰감을 주지 않은 대신 문단적으로는 맹비난하면서도 조연현과 작가 김동리를 높이 평가했는데, 이건 필시 중년기를 지난 만년의 작가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1980년대까지의 이호철은 조연현(1981 작고)의 문단 주도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감과 비판이 지속됐다. 중년기의 이호철은 <현대문학>과 조연현 지배체제의 문단 위계론에 매우 날카롭고 싸늘하게 대했는데, 만년에 너그러워진 관점이 반영된 것이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이다. 필시 이런 관점은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떠난 이후 그의 문단 친밀도와 문학관에 변화가 생긴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한가운데서 김질락을 비롯한 통일혁명당(1968년 구속 사태 일어남)의 일부 활동가들과 그 월간지 <청맥> 인사들과의 교우도 특기할 만하다. 이 정도로도 이호철의 활약상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었음을 알 만하다. 당시 <청맥> 편집실에서는 한국문단 작가로는 김승옥, 시인으로는 주성윤, 평론가로는 조동일을 높이 평가했다.
불광동으로 이사(1968)한 이호철 작가는 무남독녀 이윤정을 얻었고, 장편 <공복사회>(홍익출판사), 작품집 <자유만복>(서음출판사) 등을 내며 한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모윤숙은 화양동 자택에서 ‘라운드 클럽’이라는 비공개 친목단체를 만들어 그 클럽회원들의 사교와 자유로운 토론을 월 1회씩 개최했다. 김광섭 박종화 이헌구 전숙희 이호철 남정현 최인훈 박용숙 이철범 김후란 등 20여 명의 문단 비정통파들이 참여했으며, 그 밀착도는 아주 높았다.
이호철은 회고록에서 펜클럽 주최 대구 마산 부산 등지의 강연 때 곽복록(펜클럽 전무이사, 당시 서강대 독문과 교수)의 요청으로 모윤숙에게 보고 사항이 있는데 상대가 할머니지만 여성이라 혼자 가기엔 찜찜하대서 함께 들어갔는데 그냥 누운 채였던 그녀는 스스럼없이 양해하라고 했다. 넉살 좋은 이호철은 안마나 해드릴까요 하니 모윤숙은 “고향 젊은이에게 안마 한번 받아 보자꾸나”라고 선뜻 응낙하여 “파자마 입으신 엉덩이를 타고 앉아 그렇게 등을 두드리고 주무르면서 능청 섞어” 한 말이 “모 여사님 등허리를 이렇게 타고 앉기는, 하나, 둘, 셋, 그러니까 내가 네 번째 정도나 될까요?”했다. 춘원, 안호상, 인도의 메논을 빗댄 이 멘트에 통큰 모윤숙도 참지 못하고 “비켜라, 이눔 자식”하며 와락 등을 흔들어 이호철을 떼어냈다. 물론 그런 일로 꽁할 모윤숙은 아니다.

문학인 민주화 운동 1세대
1970년(39살)은 한국문인협회에 일대 파란이 일어난 해였다. 문단에 감투 바람이 일어난 것은 이 해에 김동리가 박종화에 도전하면서였다. 형식적인 선거로 월탄을 묻지 마 추대해오던 문단에서 김동리가 이사장 출마로 도전하자 월탄을 지지하던 조연현이 대립각을 세웠다.
우정도 감투 앞에서는 쪼개지고 마는가. 김동리 지지파에는 강용준 하근찬 박경수 이문희 송병수 정인영 이문구 등 작가에다 정창범 김상일 구인환 등 평론가가 뛰어들어 김동리의 승리(1973년까지 이사장)를 견인했다. 김동리 체제의 한국문인협회에 이문구가 근무하면서 참여문학 쪽 문인들과 문학과지성 쪽 문인들의 출입이 잦아졌는데, 이호철도 그중의 한 분이었다.
이후 문인협회는 조연현(1973~1976), 서정주(~1978), 조연현(~1982), 김동리(~1988), 조병화(~1991)로 이어졌다.
1971년(40살), 명동 대성빌딩에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발족(4‧19)했다.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3인 대표에 함석헌 지학순 장일순 법정 이호철 등 운영위원, 사무국장 전덕용이었다. 이호철은 이 단체에 가입하게 된 계기가 한남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1971년은 4‧27대통령선거(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에 이어 5‧25총선이 겹쳤던 해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선거감시를 주요 투쟁목표로 삼아 범국민적인 참관인단을 모집, 전국적으로 파견했다. 문학인으로는 이호철 남정현 박용숙 권일송 구중서 박태순 한남철 신상웅 임헌영 등이 참여, “총칼에 의하여 짓밟힌 민주주의가 나약한 종이와 인주에 의해서 도로 찾아지기를 실로 열망”하였으나, “사탄이 성서를 인용하듯이 이번 선거야말로 다시 한번 정상배가 선
거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자기 합리화의 구실”로 삼은 “총성 없는 또 하나의 조용한 쿠데타”라고 논평하였다.
문인협회의 감투싸움 태풍이 1971년 펜클럽에도 닥쳤다. 1954년에 설립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는 변영로(1~2대 대표) 정인섭(3대) 주요섭(4~5대) 모윤숙(6대) 주요섭(7~9대)에 이어 백철이 10~19대(1963~1978)에 걸쳐 장기집권할 정도로 무풍지대였다. 1966년부터 계속 부회장을 맡았던 모윤숙이 1971년에 회장에 도전했는데, 문제는 문단의 중견들이 거의 그녀를 지지한 것이었다. 위로는 안수길부터 전광용, 조병화 등에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이호철, 남정현, 박용숙 등이 모윤숙 시인 추대(라운드 클럽 회원들)에 적극성을 띄어 가히 전투적이라 할 정도였다. 펜 선거에 낙방한 모윤숙은 몇 달 뒤 총선 때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1972) 유신독재로 금배지를 떼야 했다. 신출내기 평론가로 펜클럽 최연소 이사였던 나로서는 백철, 조병화(둘 다 東京高師 출신) 두 거물 스승 사이에 끼인 새우 꼴이었지만 굳이 촌수를 따진다면 은사였던 백철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이때가 내 문단생활 중 가장 난처한 시기였을 것이다. 더구나 백철의 당선으로 막을 내리자 모윤숙 지지자들은 그 앙금을 꽤나 오랫동안 간직한 채 씹어댔다. 심지어 조병화는 한동안 나에게 만날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하곤 했다. 모윤숙이 다시 펜 대표가 된 것은 1979~1982년이었다.
1972년(41살), 7‧4남북공동성명이 있는 등 서광이 비칠 듯했던 한반도는 불과 석 달 뒤에 암흑의 유신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호철은 펜클럽 일본문학 심포지엄에 참여, 15일간 여행 중 원산중학 동기로 작가가 된 고토 메이세이도 만나 옛 정을 나눴다. 작품집 <큰산>(정음사), 이회성의 <다듬이질 하는 여인>(정음사) 번역으로 이호철은 인기 절정이었다. 조총련에서 전향한 이회성은 이호철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당시 이회성의 소설은 한국의 진보적인 독자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유신독재 치하의 한국을 본격적으로 다룬 <금단의 땅>(미래사, 1988)은 이호철, 김석희 공역으로 논쟁의 폭풍을 자아냈다. 5‧16쿠데타 세력에 의한 유신독재를 이 소설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3년(42살) 1월, 육군본부 주선으로 베트남 파병 국군방문 작가단에 김광림 고은 최인훈 등과 함께 참여, 사이공 퀴논 나트랑 등을 두루 다녀왔다. 이 해 10월에는 육영수의 나주 나환자촌 방문에 동행 요청을 받고 한하운과 함께 갔다. 이호철은 초청 전화를 받고 자신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 활동하는 걸 모르고 있나 망설이다가 참여하면서도 끝내 육영수와 함께하는 사진은 교묘히 피했다는 걸 자랑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1973)에서 기존 김동리에 조연현이 도전했다. 이문구가 김동리를 결사적으로 옹위했기 때문에 이호철도 반 조연현 편이었다. 총 회원 971명 중 조연현 334표, 김동리 284표였다. 이에 이문구는 삭발로 그 분노를 삭였다. 패배 원인이 문학지의 부재로 본 김동리는 <한국문학>을 창간, 이문구가 편집을 맡았다. 1976년 경영난으로 이근배에게 넘어간 이 잡지는 이내 조정래가 인수했다가 이후에는 홍상화가 맡았다.
1974년(43살), 1월 7일 문학인들이 유신헌법을 반대하여 시국성명을 내자마자 박정희 독재정권은 긴급조치를 선포(1.8)했다. 시국성명에 서명한 문인들을 중앙정보부가 일일이 탐방하여 반성문을 작성하던 중 문인간첩단사건(1.14, 보안사 연행)이 터졌다. 바로 이 글 맨 앞 장면에서 묘사한 것이 이때의 이호철의 보안사 연행이다. 작가 이호철과 정을병, 평론가 김우종과 장백일, 그리고 임헌영으로 엮어진 문학인 간첩단 사건은 간첩 조작 사건의 사례로 국제적인 비판여론을 일으켜서 엠네스티에서는 <남한의 5명의 솔제니친>이란 팜플렛을 제작하여 뿌렸다. 이 옥중 체험기를 이호철은 연작으로 묶어 장편소설 <문>이란 제목으로 냈는데, 실록이라
할 만큼 사실에 충실했다, 다만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지명이나 학교명 등을 바꿔버려 독자들에게 혼란을 자아내기에 여기서 그 인물들의 실명을 밝혀둔다.
1970년 한국에서 개최되었던 국제펜대회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기념 촬영한 화보에 등장하는 문인들은 박철(백철, 괄호 안은 실명), 고인숙(모윤숙), 한모모(이호철) 등이다.(문학세계 판 <문>, 32쪽, 이하 쪽수만 표시함)
서대문구치소에 갇힌 이호철에게 사과 서른 개를 영치물로 넣어준 것은 천상수(천승세, 39쪽)이며, 구치소 부소장실로 취조차 나온 건 이 검사(이창우, 47쪽), 북쪽 고향의 출신학교는 원강고급중학교(원산고급중학, 59쪽)이며, 장정후(장준하, 74쪽), 재일 동포 잡지는 <한성>(<한양>, 95쪽)이다. 5명의 문인간첩단 사건 연루자는 조알봉(정을병), 안한웅(임헌영), 장북일(장백일), 곽어중(김우종)이다.(145쪽) 공변호사(강신옥, 151쪽), 현 변호사(한승헌, 154쪽), 김종려(김정례, 164쪽) 등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김정례는 여성유권자연맹을 이끌던 투사로 김철 통일사회당 당수(김한길의 아버지)와 항상 함께 검사실을 방문, 다섯 문학인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을 추가해둔다.
한웅(함석헌, 166쪽), 차검사(최상엽, 168쪽), 정광우(전병용, 213쪽)도 자주 등장한다. 전병용은 교도관으로 서대문교도소에서 많은 정치범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해준 이후 1987년 박종철 사건 폭로에 일조해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 체험을 <감방별곡>(공동체, 1990)이란 저서로 묶어냈고, 영화(<1987>)에도 등장했다.
“곽이중(김우종)을 맡은 늙은 변호사”(219쪽)는 권순영 변호사다. 그는 1955년 희대의 플레이보이 박인수 사건 제1심을 맡았던 판사로서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취지로 혼인빙자 간음죄에 무죄를 내린 것으로 유명했다. 백고안(227쪽)은 백기완이다.
문학인간첩단 사건을 주관했던 기관은 육군보안사령부 대공처였고, 당시 처장은 김교련, 사건담당관은 우리들 앞에서 ‘강 전무’로 호칭했는데, 전두환 독재 때 언론 통폐합을 맡았고 민정당 조직국장과 사무차장을 지낸 공주 출신 이상재 의원이었다.
1975년(44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 이호철이 출마, 조연현과 맞대결했다. 출마 첫 제의는 한남철이 했고, 고은이 선거총책을 맡고 이문구 박태순 이시영 송기원 손춘익 등이 적극 뛰었으나 총회원 1,180명 중 조연현 528표, 이호철 266표였다. 이미 결과를 예측했으면서도 기존 문단에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 이호철의 속내였다.
1978년(47살), 김지하 석방 기도회 참석 후 ‘노래’ 사건으로 원주에서 구류를 살았고, 이듬해에는 박정희 피살 직후 계엄 치하에서 YWCA강당에서 항의집회를 위한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구류를 살았다.
1979년 10월에 나는 모종의 사건으로 다시 투옥(1983년 출옥)되어 이호철 작가의 활동 주변에서 멀어져 버렸기에 기록에 따라 그 뒤 경력을 정리한다.

광주시민항쟁 이후
1980년 5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이호철은 남산 지하실에서 2개월간 조사를 받은 뒤 육군본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서대문구치소 9사 상 37방에 갇혔던 그는 징역 3년6개월 선고를 받았으나 11월 4일 석방됐다. 워낙 산을 좋아했던 이호철은 1950년대 중반부터 등산을 즐겼는데, 언젠가부터 이돈명 백낙청 변형윤 박현채 송건호 리영희 박중기 조태일 등과 매주 일요일 북한산으로 오르게 되면서 거시기산악회가 형성됐다.
작품집 <월남한 사람들>(심설당, 1981)을 낼 무렵부터 중앙일보 문화센터에 출강, 창작강의를 하면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는데, 중견작가 박충훈을 비롯한 30여 명의 작가들이 문향회를조직, 동인지 <서울 소나무>를 10집까지 출간했다.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맡은 이호철은 역사상황소설 <까레이 우라>(한겨레, 1986), 작품집<탈사육자회의>(정음문화, 1986), 등단 30주년 기념 작품집 <천상천하>(산하, 1986), 수필집 <명사십리 해당화>(한길사, 1986) 등을 냈다. 1987년, 전두환의 호언선언인 4‧13조치 반대 투쟁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6‧29선언을 맞은 그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사임했지만 변혁을 위한 투쟁의 정신은 그대로여서, 번역본 <푸시킨과 12월혁명>(실천문학), 정경모의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창비)를 냈다. 청계연구소(대표 손세일)에서 <이호철 전집> 기획(1991년까지 7권 출간했다), <퇴역선임하사>(고려원, 1989), <네겹 두른 족속들>(미래사, 1989), 산문집 <凹凸과 지그재그론>(푸른숲, 1990) 등을 출간했다.
1991년(61살) 10월, 약 50일간 소련 폴란드 헝가리 독일 이태리 프랑스 등 취재여행을 다녔는데, 이 기행 때 소련에서 김레호를 만났다. 함흥사범 출신으로 소련에 유학한 그는 이호철 작가의 육촌 형도 함께 유학해서 잘 아는 사이였다. 귀국 않고 소련에 체재한 김레호는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교수였는데, 그를 보며 작가는 자신이 북에서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면 저랬을까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이듬해 이 기행을 <세기말의 사상기행>(세계일보, 1992)으로 연재,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1993년 출간했다.
이 무렵, 연변작가들이 자주 모국을 방문했는데, 연변작가의 집 건립을 위한 캠페인에 이호철은 앞장서서 적극 도와주었고, 이를 계기로 이호철은 김학철, 이근전 등과 교유를 맺었다. 예술원 회원(1992)이 된 작가는 장편 <개화와 척사>(민족과 문학사, 1992), <한살림 통일론>(정우사, 1999)을 냈다.
<한살림 통일론>은 통일론 중 특이한 견해를 담아내고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이호철의 문단활동은 변곡점을 그린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서울 은평구청 주관 이호철 통일로문학상이 2017년 제정되어, ①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한 글, ② 앞의 글을 수정 보완하여 <동리목월문학>, 2017, 겨울 게재, ③ 「해설」 이호철, <우리네 문단골 이야기> 전2권, 자유문고, 2018, 위 3가지를 보완)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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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2018 상반기 시민강좌 ‘한 시대, 다른 삶’ 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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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은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과 연계하여 시민강좌를 개설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 이래 70년간의 일제 침략, 그 중에서도 식민지배 35년은 우리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나라와 민족이 위기를 맞은 그때, 어떤 이들은 목숨과 전 재산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으나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부와 출세를 위해 제 민족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번 강좌는 전시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과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일제강점기 서로 다른 길을 걸은 다양한 인물들을 대비하여 조명한다.
강좌는 총 7강으로 6월 12일(화)부터 28일(목)까지 매주 화, 목요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되며, 30일(토) 오전 10시 특별강좌와 전시 관람으로 마무리한다. 근현대사를 심도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일반 성인 40명을 모집하며 수강신청은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www.mhmh.or.kr)와 전화(02-903-7580)로 가능하고 무료로 진행한다. 이번 강좌는 수강을 원하는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고 지리적 접근성을 높이고자 2018년 6월에 새로 개관한 삼각산 시민청에서 이루어진다. 작년 9월에 개통한 우이신설경전철을 타고 솔밭공원역에서 내리면 바로 강의실까지 올 수 있다. 1강부터 6강까지 삼각산 시민청 강의실에서 진행되며, 7강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 후 전시를 관람한다.

제1강은 신효승 연구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이 3대에 걸친 석주 이상룡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도와 그래픽을 통해 설명하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의의를 살펴보았다. 2강에서 권시용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언론인과 문인으로 명성을 떨친 심천풍(우섭)과 심훈(대섭) 형제의 일생을 시기별로 상세히 다루고 심훈의 일기 등 사료를 통해 형제의 엇갈린 선택을 설명하였다. 3강은 홍명희 3대의 친일과 항일을 주제로 김덕영 연구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서민교 연구원(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조선인(4강)을 구체적인 사료와 함께 다루며, 이명숙 연구원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왕, 광산왕, 기부왕(5강)이라는 소재로 조선인 거부(巨富)들의 이면을 파헤친다.
제6강은 임헌영 소장이 강사로 나서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로 꼽힌 이광수와 최남선의 변절과 해방 후 반민특위특별재판에 회부된 상황까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제7강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의 전시 주제를 아우르는 박수현 연구실장의 강의 후 전시 관람으로 전체 강좌를 마친다.

• 최인담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사

월, 2018/07/0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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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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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이 지난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 86-1번지 설화산 일대에서 진행한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가 마무리되었다.
공동조사단은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4월 12일부터 23일까지 발굴된 희생자의 유해와 유품에 대해 아산시 공설봉안당에서 감식을 진행하였으며, 5월 14일 같은 장소에서 안치식을 치른 후 세종시에 위치한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추모관’에 봉안되었다. 조사단은 이 지역에서 최소 208명의 유해와 551점 이상이 유품이 발굴하였는데,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 당시에 희생된 부녀자와 어린이들로 밝혀졌다. 유해감식 결과 최소 208명 가운데 어른이 150명, 미성년의 어린이가 58명으로 확인되었다. 유품으로는 M1과 카빈 소총의 탄두와 탄피, 비녀, 귀이개, 단추류, 버클, 고무신,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 등과 함께 여성용 비녀가 최소 89점 발견되어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녀자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아산시의 예산 지원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보다 연구소 아산지회 회원들의 물심양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한편 5월 29일에는 아산시청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조사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은 유해발굴 및 감식결과 보고를 통해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국회 입법 필요성을 강조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월, 2018/07/0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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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연구소는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박혜영)와 함께 5월 31일 오후 1시 30분부터 덕성여대 대강의동 104호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는 한편, 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관장 한상권)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올해 심포지엄은 왜 ‘3·1운동’이 혁명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 노동자 등 새로이 조직화한 ‘3·1운동’ 참여 계층의 성격과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의 이념적 지평〉이란 기조발제에서 3·1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 민주혁명, 국제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곧 3·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으며 3·1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근대적 주체-청년, 여성, 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3·1혁명은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1910년 7월 6일자 ????신한민보????논설에서1919년4월제정된「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각종선언서의분석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사상적 흐름을 짚었다. 끝으로 3·1혁명이 좁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국제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 발표에서 여성사에 있어서 3·1운동이 갖는 의의로서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남녀평등을 천명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1920년 이후 전개된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 ‘독립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으로 장을 나누어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사 100년의 관점에서는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운동이자 페미니스트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라며 당시 여성운동이 갖은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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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청년〉 발표에서 조덕진, 박헌영, 장병준, 강석봉 등 개별 사례 분석을 통해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과 기억이 이후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로 만들고 조선사회를 실질적인 정치·문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바탕이 3·1운동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사회변동〉 발표에서 3·1운동이 “주체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선택한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 이후 조선인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과 지배자의 변화 모습을 고찰하였다.
종합토론은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주재하였고, 약정토론자로는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이태훈 연세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이자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서거 63주기 추도미사가 함세웅 신부의 주재하에 차미리사 선생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 편집부

월, 2018/07/0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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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운음

홍익미술대학 출신의 SNS 1인 미디어 만화가로서 고 노무현대통령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와 일러스트 등을 그리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다룬 웹툰 『노공이산』과 캐릭터 일러스트 모음집 『바보 노공화』가 있으며,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몸 바 이태준, 김필순, 박서양, 황에스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만화 <조국의 심장을 지켜라>를 펴냈다.

월, 2018/07/0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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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제11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제11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5월 18일 금요일 오후 6시 숙명여대 100주년기념관 7층 한상은라운지에서 각계인사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학자들의 도전적 탐구정신을 격려하고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2007년 제정되었다. 수여식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수령자 발표, 지원금 수여, 최덕수 고려대 교수,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의 축사, 수령자의 소감연설 순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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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심사대상은 2016년 8월과 2017년 2월에 수여된 17편의 한국근현대사 관련 박사학위논문으로 2월 20일 예비심사를 거쳐 4월 9일 심사위원회에서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미래인재양성사업단 연구교수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가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비롯하여 지수걸 공주대 교수, 최기영 서강대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조재곤 동국대 교수, 장영숙 상명대 교수, 한모니까 카톨릭대 교수, 김태우 외국어대 교수가 예비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수령자인 유바다 박사의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는 그간의 국제법적 연구와 만국공법의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의 연구로서 한국사와 국제법 연구자들에게 주목받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국내외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그동안 등한시해 온 당대 유럽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까지 확보하여 분석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앞으로 개항 이후 조선의 국제법적인 지위에 관한 활발한 연구와 논쟁이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 김혜영 연구원

월, 2018/07/0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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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일제의 병영으로 가득한 땅
– 용산시가도龍山市街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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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시가도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용산이 일제침략의 총본산이었음을 알려주는 1929년에 발행한 지도이다. 축적은 1:7,500이며 색인으로 행정구역(町, 洞, 里) 표기와 함께 관청과 회사, 학교를 표기하였는데 총독관저, 보병영步兵營, 병기지창兵器支廠, 군사령부, 군사령관 관저, 야포병영, 공병영工兵營, 기병영騎兵營, 사단사령부, 사단장관저 등 군사시설과 철도국,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장, 철도병원 등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철도관계 시설, 용산소학교, 중학교, 효창보통학교, 삼판三坂소학교 등 학교 시설, 용산경찰서, 경성형무소, 형무소공장 등이 기재되어 있다.

지도는 모눈의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축적과 형식을 갖춘 시가도, 특히 경성시가도 같은 지도를 모눈에 이어서 맞춰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범례로 교량, 산악 등고선, 성벽, 철도, 전차선로, 행정구역 경계까지 표시하였는데 이렇게 상세한 범례와 모눈의 형식은 군사용 지도로 사용하기에도 손색이 없다. 시가지에는 지번과 함께 주요 건물들을 모양대로 그려 넣었으며 지도의 범위는 북쪽으로 서울역 아래, 동쪽으로 이태원, 서쪽으로 마포, 남쪽으로 용산역까지 보여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서울지도>의지도전시관에도“용산시가도”를볼 수 있는데1927년에 발행된 것이다. 연구소 소장 “용산시가도”(1929년판)와 다른 지형이 세 곳인데 이는 모두 을축년 대홍수(1925년)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먼저 1927년판에 보이던 용산역 하단의 이촌동 지역 마을이 1929년판에서 사라졌다. 해마다 비만 오면 침수문제로 이재민이 발생하던 이촌동이 을축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촌동 주민들을 노량진(500戶)과 공덕리(215戶)로 나누어 이전시켰다.
원래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한 이전지는 효창원이었는데 관철되지 못하였다. 대신 효창원 부지에는 용산역에 있던 철도관사를 옮겨 지은 것을 1929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용산역 위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하천을 정비하여 직선화한 모습도 보이는데 2년 만에 이와 같이 변화된 지형도는 을축년 대홍수와 관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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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 이촌동, 『매일신보』 1925. 7. 13.

 

용산역 근처에는 구획이 정리된 신시가지의 모습과 함께 거대한 일제의 군사시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조선의 중심부에 일제의 군대를 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는 마지막 보루인 군대를 상시적으로 주둔시켜 안정된 통치기반을 조성하려는 의도와 함께 대륙침략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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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가 걸려 있는 조선군사령부 정문, 사단대항연습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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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대항연습사진첩일본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관병식 장면 항공사진, 사단대항기념사진첩

 

이처럼 1929년판 “용산시가도”는 용산 주둔 일본군의 관계시설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민족사랑> 2014년 9월호에 실린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과 함께 보면 용산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
• 강동민 지료팀장

수, 2018/08/0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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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 • 이홍관 정리

현재 국제운송회사 로드 원(ROAD 1) 로지스틱스를 운영하고 있는 홍남화 아산지회장은 2000년 9월부터 연구소 회원에 가입했다. 2016년 5월에는 아산 둔포면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 공덕비를 제보하였고, 아산지역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2017년 1월~5월)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우리에게 ‘톨레랑스’라는 화두를 각인시킨 <나는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선생과사촌지간이다. 찾아간 날, 마침 홍남화 회원은 업무상 무언가 바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곳저곳으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를 받고 처리하면서도, 성의 있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인터뷰는 아산의 신정호수 인근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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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의 회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답 : 저희가 80명 정도 되요. 3년 전까지만 해도 천안아산지회였는데 분리하고 보니까 좀 아쉽게 느껴집니다.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지회의 발전을 전망하면서 힘들더라도 각자 독자적으로 가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문 : 천안아산지회로 활동하셨을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지요?

답 :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임종국 선생님 추모사업을 했었죠.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니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에 임종국선생의 조형물을 세웠고 앞으로 지역의 명소로 가꿔 나갈 계획입니다.

 

문 : 아산에 내려오시기 전에 이미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지요?

답 : 제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1997년 또는 1998년 무렵 수원 북문 부근에서 북한동포돕기 캠페인을 보고 그 단체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갔더니 연구소 경기남부지부와 관련되어 있더라구요. 그것이 연구소와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북한동포돕기 성금으로 5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무렵 수원지역에서 열린 강연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수원역전의 경기서적에서 리영희 선생님 강연에도 참가해 제가 “DJ와 YS는 둘 다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왜 차이가 납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 사람은 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은 철학이 없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원청소년문화센터에서 노동은 교수님의 친일음악 강연도 참석했습니다. 노동은 교수님 강연은 화성시가 홍난파기념관 건립을 계획하자 반대운동 차원에서 연구소 경기남부지부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는데 현재 방학진 기획실장은 기억을 못하시네요. 그 후 오산으로 이사해서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 수원에서 오산으로 다시 천안에서 고향인 아산으로 계속 내려오셨네요?

답 : 제 회사 이름이 로드 원(ROAD 1)입니다. 1번 국도를 타고 대륙까지 오가자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사를 살펴보니 큰 집은 북한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고 소련군에 쫓겨 인천으로 내려옵니다. 우리 집안을 보면 수백 년간 한 곳에서 살다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는 천안, 아버지는 홍성, 저는 아산에서 태어납니다.
지난 100여 년의 격동과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집안이 이리저리 내몰렸던 거죠.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기억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하다보니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오게 되었고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를 80% 정도는 복원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고,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명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가족사를 복원했던 것 같습니다.

 

문 : 아직 복원하지 못한 가족사의 20%는 무엇입니까?

답 : 6·25전쟁 전후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의한 망각이 그 20%입니다. 그래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 당시 희생될 뻔 하셨습니다. 아산 현충사 부근의 황골이라는 마을은 대대로 남양 홍씨(홍남화 지회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 집안이다) 집성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와중에 황골에서 우익에 의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1950년 추석 무렵입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던 중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사촌이며 큰어머니가 모두 끌려간 후였습니다. 우익 청년들이 동네 사람들을 공회당에 가두어놓고, 좌익 혐의자에 대해 인민재판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운좋게도 친척 되시는 할머니가 두둔해주어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큰어머니를 비롯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홍세화 선생도 그때 죽을 뻔했습니다. ????나는빠리의택시운전사????에그 내용이 실려 있구요. 그 후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가해자들과 한평생 사셨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집과 살림살이는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부터 6·25 이야기를 알음알음 알아 오면서 자랐고, 숙명처럼 민간인 학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을까, 시골마을에 두레패가 왜 둘이나 있는지 의문을 품었지요. 난리가 끝나고 마을 한켠을 지키던 왜가리떼도 사라지고 맙니다.

 

문 : 그래서 이번에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열심히 참여하셨군요?

답 : 네. 6·25전쟁기에 민간인 학살은 학살의 주체나 피해 유형이 다양합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요시찰대상처럼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사상자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구실로 보도연맹을 만들고, 이들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산지역에서 보도연맹건으로 희생된 사례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산의 경우 UN군이 들어오면서 북한군 지배가 끝나가는 2~3일 전후 치안 공백기에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차별 학살을 벌였고 이후 치안이 확보된 상황에서 경찰이 좌익 혐의자들을 검거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발굴한 설화산 민간인 희생자 유골은 1951년 1월 평택까지 중공군이 내려오자 후퇴 직전의 경찰이 학살한 좌익 혐의자들의 유골인 거죠.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기록에는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800명 정도로 추산했지만, 일부에서는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던 점을 들어서 1,300명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천안의 경우 당시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이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아산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문 : 내년에 제2기 진화위가 출범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러면 현재 직업을 잠시 접어두고 조사관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 진상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답 : 이번 설화산 유해 발굴 현장에 진화위 당시 아산지역 조사관으로 활동하신 경찰관이 휴가를 내고 조용히 찾아주었는데 본인도 당시 조사가 미흡했다고 말하더군요. 여하튼 2기 진화위에서는 1기와 달리 위원회뿐 아니라 아산시 등 지자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예상되는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이 없도록 명확한 조사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아산시장이 후보 때 공약으로 내건 민간인 학살 실태 파악과 공청회 개최, 인권기념관 건립이 반드시 이뤄지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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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아산지회는 이밖에도 친일파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교체운동도 열심히 벌이고 계시지요?

답 : 우선 새로 출범한 아산시의회와 충남도의회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하고 표준영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표준영정 퇴출 서명운동에 함께 했던 아산지회 회원들 중에 각각 아산시의원(홍성표 회원)과 충남도의원(안장헌 회원)에 당선되어 아주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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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바다에 마을사람을 수장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산 구성리에서도 마을사람들을 좌우로 길게 세워서 바닷가로 나가게 하고, 물이 차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자 총을 쏴 살해해서 그대로 수장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을 목격한 희생되신 분의 딸이 노인이 되어 증언합니다. 엄마한테 동네 청년들이 남편이 어디 있냐고 묻자, 마당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 길로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됩니다.
현재 이 같은 증언을 할 분들은 찾기 어렵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간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6·25전쟁 때 학살된 유가족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고, 반대로 한 사람을 통하면 가해자와 연결되지 않을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며 어설프게 덮기보다는 민족사의 상혼을 드러내 근원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응어리진 아픔을 보듬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수, 2018/08/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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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헌법에 반대하다 간첩 누명을 썼던 임헌영 소장이 6월 21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수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로부터 불법적인 수사를 받으면서 작성된 진술서 및 피의자신문조서는 모두 그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라고 무죄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은 1974년 문인들이 개헌 지지 성명 등을 발표하자 보안사가 임 소장을 비롯해 이호철·장병희·정을병·김우종 씨 등 문인 5명을 상대로 고문과 가혹행위 끝에 거짓 자백을 받아낸 뒤 처벌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는 일본에서 발행된 잡지 『한양(漢陽)』에 글을 기고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했고, 법원은 임 소장을 비롯한 이호철·장병희·김우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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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이 사건을 재조사한 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던 보안사가 불법 수사했으므로 잘못된 판결”이라며 재심을 권고했다. 이후 이호철·장병희·김우종 씨 등은 재심 청구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편 검찰은 2017년 독재정권 시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 중 하나로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던 임 소장을 대신해 재심을 청구, 무죄를 구형한 바 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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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465개 독립·민주화운동 단체, 교육·학술단체 등이 활동하고 있는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이하 국정화저지넷, 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는 6월 6일 오전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앞서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대구 교육감 후보로 출마한 강은희의 심판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반 헌법적이고 불법적인 국정농단 사건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인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비수를 꽂은 인물, 국정농단 세력을 비호한 인물, 강은희 후보에게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려달라”며 “2·28민주화운동 정신과 촛불정신으로 강은희 후보를 단죄해달라”고 대구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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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1일 대구시교육청 앞에서도 국정화저지넷과 대구 5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 대구네트워크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무너져 가는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대구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교육청의 수장이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강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역사의 산증인인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위안부합의 주동자인 인물이 내가 사는 대구에서 교육감 후보로 나온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각계의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6월 13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은희 후보는 40.7%의 득표율로 대구교육감에 당선됐다. 그러자 대구의 학생·청소년들이 강은희 대구교육감 당선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며 학생들 손으로 교육감을 뽑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강 교육감은 2015년 새누리당 의원 시절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간사로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며 역사교과서 국정화지지 여론조성에 앞장섰다. 또 여성가족부 장관 재직 당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옹호하며,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일본 정부의 ‘위로금’을 받도록 회유하고 종용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2014년 국회 교문위 회의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 입학 등을 비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송민희 홍보팀장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사무국

수, 2018/08/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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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회 회원인 박노정 시인이 7월 4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 시인의 부고기사가 여러 언론에 났지만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제목에 가장 공감이 간다.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 별세〉.
박 시인을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박 시인이 ????진주신문????대표이사 시절 그의 소개로 진주의 어른인 남성(南星) 김장하 선생을 만났으니 아마도 1990년대 후반으로 짐작한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진주신문????은1990년진주시민들이모여창간한신문으로지역의수구적인여론에맞서 정론직필 그리고 ‘진주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조식 선생의 호의’ 등 3가지를 꼽았다.
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이사뿐아니라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진주민예총회장,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주문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를 빼놓고 진주의 시민운동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던 2005년 5월, 박 시인은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의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을 뜯어내 박 시인을 포함해 4명이 각각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벌금 대납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당시 4명의 벌금은 2,000만원이었지만 나중에 보니 성금이 이보다 더 많은 2,370만원이나 모아졌다. 박 시인 등은 나중에 이 성금 중 일부를 연구소 진주지회 결성(2012년 3월) 자금으로 내놓았다. 실제로 박 시인은 연구소 진주지회의 숨은 설계자였다.
박노정 시인은 ????진주신문????대표시절이던1990년대초부터논개영정폐출운동을시작해 2008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린 새로운 논개 영정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박 시인은 2006년에 친일잔재청산을위한진주시민운동을 만들어 진주 출신 친일가수 남인수의 이름을 딴 ‘남인수 가요제’를 ‘진주 가요제’로 바꾸기도 했고 ‘을사늑약 100년 남북공동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친일잔재 지도’ 제작도 추진했다. 이처럼 ‘진주사람’ 박노정 시인의 일생은 올바른 ‘진주정신’의 발굴과 계승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18/08/0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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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85점 보내와
6월 1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7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보성문화>, <새전남>, <월간호남> 등 전라도 지역에서 발행한 잡지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기금전달식 후 자료 기증 잇달아
▪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7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지난 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기금전달식에서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6월 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일본역사사진첩>(1914), <황족화보>(1930)등 총 5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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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카와 마사키(재한군인군속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씨가 2003년 재한군인군속 추가 제소에서 사용한 플래카드, 2009년 군군재판 도쿄고등법원 판결 후 지원하는 모임이 받은 플래카드 2점을 기증했다.

야마모토 나오요시(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계간전쟁책임연구>, 군인군속재판관련자료등책자와문서, 현수막을기증했다.

야스다 치세 씨가 <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사건소송>(1992)을기증했다.

평화교육연구위원회에서 <新潟県内における韓國·朝鮮人の足跡をたどる>(2010), <平和教育委員會資料シリーズ 第2集 新聞などに見る新潟県内韓國朝鮮人の足跡>(2006) 도서 3권을 기증했다.

야노 히데키(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 씨가 활동했던 자료 모음인 플로피디스크, 카드, 명함 파일 등 다량의 자료와 지난 2018 남북정상회담 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 등을 기증했다.

히구치 유이치(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공동대표) 씨가 6월 18일 「용산시가도」(1929)를 기증했다. 이 지도는 용산 일본군기지와 용산역 및 주변의 철도기지 등이 표시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번 호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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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도시코 씨가 2014년 6월 27일 기증에 이어 <일본의 전사>등 강제동원관련도서31권과 ‘일본정부와 피해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라’에서 찍은 사진 등을 기증했다.

 

▪ 3월 24일 김삼웅 지도위원이 1962년 발행한 『동경재판』(전3권)을 기증했다. ‘동경재판’은 극동군사재판소가 제2차 세계대전 중 극동지역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였던 재판으로 정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다. 이 책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조일신문법정기자단에서 작성했다. 동경재판 당시 법정사진과 함께 재판의 모든 과정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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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이덕문 회원이 지난해에 이어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제13회숙명여자대학교졸업앨범>(1964)등 도서 3권이다.

▪ 6월 14일 호시카와 가즈에(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 씨가 아베 반대 표찰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수, 2018/08/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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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청년시대여행이 공동 주관하는 ‘일제 강제동원과 야스쿠니신사-촛불원정대 특강’이 7월 4일부터 매주 목요일 민족문제연구소 강연장과 ‘청년협동조합 몽땅’의 사무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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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강으로 구성된 이번 강좌는 올해 8월 도쿄에서 열리는 ‘야스쿠니의 어둠에 평화의 촛불을’ 공동행동 참가자를 대상으로 마련된 것으로, 현지 행사에 앞서 참가자들이 한일관계와 야스쿠니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동북아 평화공존의 방안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준비되었다.
1강에서 김진영 선임연구원은 일제식민지배의 특징과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개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사례와 한일 양국정부의 대응을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현재 상황을 살펴보았다. 2강에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은 야스쿠니신사의 역사를 바탕으로 ‘천황제’와 야스쿠니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 그 허상과 야만성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현 일본사회의 사상적 근원, 우경화의 연원을 설명하여 강좌 참가자들과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7월 19일 3강에는 영화 ‘안녕사요나라’ 상영회와 주인공인 이희자 ‘보추협’ 공동대표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고, 7월 26일 4강에는 촛불행동 설명회와 참가자 전체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 김진영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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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반민특위 설립 70주년을 맞아 6월 20일 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회원(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이날 간담회에서 김정륙 회원은 당시 서울 충무로에 있던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로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와 김상덕 위원장을 회유한 이야기, 김상덕 위원장이 6·25 직후 납북된 과정과 그 후 비참했던 가정사 등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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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를 마친 후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인장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국무위원 시절 그리고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 사용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김정륙 회원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마련된 2층 전시실에 인장을 직접 진열했다.
김정륙 회원은 아버지의 유품을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에 기증하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며 소중하게 보관해 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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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물 1층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전달식’이 열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하 잇는 모임)이 건립기금 1억 345만 원을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에 전달했다. 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일본 시민과 단체로부터 모은 기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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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금전달식에는 잇는 모임에서 서승 공동대표, 안자코 유카 공동대표,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등 총 19명이 참석했고, 연구소 측에서는 이이화 시민역사관건립위원장,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이민우 운영위원장 등 약 60명이 참석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들도 함께 했다.
기금전달식에 이어 2층 전시실에서 자료기증식이 진행되었다. 잇는 모임은 그동안 기금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전후보상운동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모아왔는데, 이날은 ‘재한군인군속재판의 요구 실현을 지원하는 모임’ 사무국장 후루카와 마사키 씨가 커다란 현수막을 기증했다. “야스쿠니 합사를 하지 마라!! 유골을 돌려 달라!!”라는 구호가 힘찬 글씨체로 적혀 있는 이 현수막은 2003년 군인군속재판 추가제소 당시 일본 법원 앞에서 피해자들과 일본 시민들이 함께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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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는 모임 참가자들은 기금전달식에 앞서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남산 권역을 답사했으며, 6·10민주항쟁 31주년이 되는 날에는 남영동 옛 대공분실을 견학했다. 그들은 일제와 국가폭력으로 짓밟힌 역사가 켜켜이 쌓인 용산과 남산 일대를 답사하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했다.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일본 시민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알리고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

수, 2018/08/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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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화랑연병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음)와 육군사관학교(교장 정진경 중장)가 공동주최한 이날 기념식은 처음으로 육사에서 열렸는데 이는 육사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학교라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육사는 지난 해 12월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특별 학술회의를 열었고, 올해 3월 1일에는 육사 교정에 독립전쟁 영웅 5인(이회영,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의 흉상을 제막하는 등 우리 국군의 뿌리 찾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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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임원, 유족, 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기념식에는 1,100여 명의 육사생도 전원이 연병장에 도열했다. 주동욱 경희민주동문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 준비위원장이 신흥무관학교 경과보고를 했고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기념사를 했다. 윤경로 상임대표는 기념사에서 “신흥무관학교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육사 생도들이 배우기를 원했는데 쉽지 않았지만 촛불시민들의 덕분으로 가능했다”면서 “앞으로도 매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 수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념식을 마친 후에는 육사 생도들의 분열식이 거행되었다. 이어서 독립전쟁 특별전시회를 관람 후 육사 생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을지강당에서 공연된 항일음악회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날 기념식에는 윤경로 상임대표를 비롯해 이항증 공동대표, 정철승 조직위원장, 김용호 행사위원장 등이 참석했고 독립운동가 유족으로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차영조 선생 그리고 김순흥, 권위상, 김희원 운영위원 등이 함께 했다.

• 편집부

수, 2018/08/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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