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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유엔사-재강화(revitalization) 전략에 대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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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유엔사-재강화(revitalization) 전략에 대한 우려

admin | 수, 2020/06/03- 19:52

서울과 워싱턴 간에 방위비분담에 대한 협상이 어려움에 봉착한 가운데, 한국내의 유엔사령부(UNC)의 역할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소위 유엔사-재활성화(revitalization) 기획은 이점(利點)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정치적인 복선을 지니고 있다.

유엔사-재활성화 기획이 한미연합사의 한국정부로 이양 계획에 대한 대응이라는 염려가 존재한다. 아직 서울과 워싱턴 당국간에 이 점에 대한 확실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고 중요한 내용은 유엔사-재활성화 기획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이는 한반도에서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유엔사의 역할을 미중 간 관계에서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워싱턴의 부담에서 진행되고 있다. 유엔사는 이름과는 달리, 유엔안보리 결의 84에 근거하여, 일차적으로 미국정부의 결정에 의해 이루지는 유엔이 아닌 미국의 기구이자 수단이다.

오랜동안 침묵을 깨고, 최근 유엔사는 기술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연합국으로 참여하여 군대를 파견한 국가들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재확인하면서, 이러한 다국적 군대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한다. 2017년 상그릴라 안보회의에서 미국의 전 국방장관이었던 James Mattis가 강조하여 주장하였듯이, 유엔사의 본래적 성격은 다국적 군대이며, 따라서 참전국가들은 한반도 평화의 유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직 주한사령관이었던 Vnicent Brooks 역시 유엔사 조직의 책임있는 자리에 미군이 아닌 제3국 인이 포함되는 것이 유엔사-재활성화 기획에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2018년 이후 두 사람의 비(非)미국인이 부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 캐나다 군대의 Wayne Eyre와 현직 부사령관인 호주왕립군대 출신의 Stuart Mayer가 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3년 정전협정을 유지하는 유엔서의 기능을 주한미군이 전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한국군과의 연합사의 역할 역시 주한미군이 전담하고 있다.

유엔사의 출범은 상기에 언급하였듯이, 한반도에 평화를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미국이 유엔사령부의 군대를 지휘하도록 한 유엔의 결의에 근거한 것과는 달리, 북한의 남한에 대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연합사령부(CFC)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한다.

이에 따라  유엔사와 연합사의 이중적 역할을 맡게된 주한미군은 산하에 두 개의 거대한 군단인 육군 제 8사단과 공군 7사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주한 미군은 4성 장군이 지휘하도록 되어 있고, 산하 군단 내에 총 7개의 별을 단 장성들을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조직에 따라, 주한미군은 워싱턴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핵심적 지위를 점하게 된다. 한반도의 방어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핵심(linch-pin)을 구성한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있어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체계를 중국이 뒤흔드는 것’을 방어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동시에 북한이 지역 내에서 미국과 동맹들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을 재확인하면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있어,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재강조한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역할이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의 이행유지이라는 유엔사 본래의 업무에서 벗어나 확장된 지위를 갖게 되면서 매우 복잡한 상황을 야기하게 된다. 평화유지를 위한 다국적군대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유엔사가 이와는 별도로 어떻게 미국의 확장된 전략적 목표로 자신의 임무를 전환할 수 있단 말인가?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 그리고 유엔사 사령관이라는 세 개의 직함을 동시에 지닌 현직의 Robert Abrams대장은 유엔사의 역할을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두리뭉실 부인하고 있다. 유엔사의 역할은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주요 임무이며, 비록 한미방위조약에 의해 전쟁억지력을 지원하는 주한미군은, 현실적으로 두 가지 기능(평화유지와 전쟁억지)을 함께 수행한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기능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현상유지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 미군의 전쟁억지라는 방위력의 필요성이 감쇄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제 유엔사의 역할을 1953년 정전협정을 유지한다는 범위를 넘어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확대할 것인가 여부를 분명히 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한국 주도로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김성환과 Scott Synder가 논쟁을 벌렸듯이, 중국은 한국을 위협하던 북한이 사라지면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이 주둔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베이징은 한반도에서 미국이 철수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이 한국에 압력을 가한다 하더라도, 통일된 한반도에서 미군의 주둔여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과 미국 간에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경우에 분단 이후 한반도에 미군의 주둔 여부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 간에 긴장을 가져오면서, 워싱턴의 책임 하에 진행되고 있는 유엔사-재활성화 기획은 추가적이며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작용할 것이다.

유엔사의 재활성화 기획이 어떤 기능을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워싱턴의 전략적 목표가 분명하지 못하면 커다란 혼란과 오판을 불러올 위험이 크다. 특히 통일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의도에 대해 중국이 어떤 판단을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출처: East Asia Forum in ANU, 2020-05-29.

Anthony V Rinna

Sino-NK 리서치 그룹의 편집자, 2014년부터 한국에 거주하면서 동북아에 관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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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번 글을 시작으로 2주에 1번씩 함께살기의 복지국가 5.0 기획칼럼을 게재합니다. 필진은 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시재생, 도시계획, 주거환경, 현실정치, 공론장, 지방분권, 주거/문화정책, 노인복지, 사회사상, 복지국가이론, 사회보장정책, 건강정책, 영유아 돌봄, 청년정책, 세대갈등, 고용정책, 기후변화, 환경/에너지 정책, 행정개혁, 성평등 등 여러분야에 대해 심층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2010년대 초반 무상급식을 중심으로 복지국가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복지국가의 강화를 주창하는 것은 식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일부는 진보진영이 때가 되면 떠들어대는 지겨운 레퍼토리로 치부하기까지 한다. 현재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는 기본소득제 논의도 복지국가의 한계에 대한 지적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깊이 있는 분석과 사유에 기반하기 보다는 한 철의 유행으로 다뤄버리는 현실이기에 씁쓸하다. 정말로 복지국가는 무용해졌을까? 현대의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유럽에서도 복지국가가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나라는 무용론이 적용될 만큼 복지국가였던 적은 있었던가?

 

통치패러다임으로서의 복지국가

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였던 적이 없다. 복지국가는 단순히 제도나 정책의 묶음이 아니라 한 나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의 논리와 가치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조직∙운영했던 적이 없다. 단지 부수적인 것으로 아니면 어려움이 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구성원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그때그때 이용될 뿐이었다.

패러다임은 패턴, 예시, 표본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παράδειγμα)에서 유래한다. 현대에 와서는,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믿음, 가치, 문제해결 방법 등의 총체’라는 의미로 사용된 후[1], 패러다임은 세계관, 사회관, 인간관, 믿음체계, 가치체계 등 보다 근원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이들에 기반해 형성되는 문제의식, 문제해결의 방식과 도구, 제도와 정책 등의 요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즉 하나의 영역이나 분야에 이러한 요소들이 지배적인 모습을 보일 때 패러다임이라 부르고 있다. 한 나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에도 이러한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치패러다임이라 부를 수 있다.

통치패러다임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기준들에 대한 종합적인 틀이기에, 당연히 전 방위에 걸쳐 대부분의 영역에서 적용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복지국가가 ‘복지’와 ‘국가’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용어이기에,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국가’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통치패러다임의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이해는 매우 단편적이며 표면적인 잘못된 이해이다. 복지국가는 통치패러다임에 의거해 복지국가의 사회정책, 경제정책, 문화정책 등을 자율적이면서 체계적인 논리와 기준들에 따라 수립하고 수행한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기존의 다른 유형의 국가, 예를 들어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구성원이 하는 것을 그대로 놔두는, 특히 경제활동에 개입하지도 않고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하지 않는 ‘야경국가 패러다임’을 교체하면서 대두되었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는 국민의 경제활동에도 개입하고 취약계층을 지원도 하며, 더 나아가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개입을 하는 국가이다. 즉 복지국가는 국가의 한 유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재정 전 영역에서 동일한 기준과 방식으로 국가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틀, 즉 통치패러다임을 구축한 국가이다. 이러한 통치패러다임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국가패러다임을 통치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인정하는 국가가 아니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은 사회보장의 상대적 자율성에 기반한다

복지국가패러다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보장의 상대적 자율성이다. 사회보장은 인간은 생존유지, 인간적인 삶 그리고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본래적으로 갖고 있으며 이 욕구를 사회적 연대의 방식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 자체로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다. 다른 어떤 외부의 원인들로 인해 사회보장의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존재이유가 침해되는 순간 인간의 삶은 불충분하게 되어 고통이 발생한다. 사회적 위험이란 바로 앞서 말한 근원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아서 고통이 발생한 상황을 말한다. 아파서, 마음 놓고 기거할 공간이 없어서,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서, 역량 함양을 위한 교육이 너무 비싸거나 교육기관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명확하다. 고통의 해소를 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노력하는 방법도 있고, 주위 사람들과 힘을 합쳐 공동으로 해소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후자의 방식이 사회적 연대의 방식이다. 공통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사회적 위험에 공동으로 대응하여 위험을 해소하는 것이다. 사회보장이란 바로 이 공동의 대응방식을 포함한다.

하지만 단순히 제도와 실천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와 그것이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위험에 자신들도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다는 잠재적 보편성에 기반한다. 즉 제도와 실천 이전에 인간이 나면서부터 갖고 태어나는 욕구와 그것의 미충족 가능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특정의 대응방식 등은 모두가 제도 이전에 인간을 구속하는 것들이다. 오히려 심층적인 요인들이 작동해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제도와 실천이 만들어진다. 사회보장이란 이처럼 보다 심층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현실에서 관찰 가능한 제도와 실천들 모두를 아우른다.

다만 인간이 사회보장을 실현함에 있어서 외부 환경이 이를 도와주거나 방해한다. 예를 들어, 경제체계는 이 외부환경에 속하면서 사회보장의 실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세기의 극단적 자본주의 경제체계는 사회적 위험을 발생시키고 이 사회적 위험에 대한 사회연대적 대응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외부요인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사회보장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내적으로 그 존재의 이유와 발생의 원인을 갖고 있기에 독립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외부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율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사회보장의 실현을 제1의 목표로 삼는 국가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개인이나 1차 집단이 주로 담당했던 역할을 이제는 국가가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 그리고 그 충족의 방식이 사회적 연대의 방식인데, 이러한 욕구 충족과 충족의 방식에 대해 국가가 전면적으로 이를 관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득보장,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등을 관할하는 최종심급이 국가가 된 것이며, 경제 영역에까지 사회보장의 논리를 적용시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국가의 용인이 있어야 가능하게 되었다.

 

적응의 원리와 복지국가의 업그레이드

복지국가는 내∙외적 환경변화에의 적응(adaptation)을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로 삼고 있으며, 이 원리에 의거해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에 태동한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사회보장의 실현은 결국에는 주어진 현실의 환경 속에서 이루는 것으로, 상대적 자율성의 성격에 따라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적응은 바로 이 영향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적응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근원적 욕구의 사회연대적 충족’이라는 목적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당하다는 점이 재천명된다. 그리고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 선택한 기존의 방법과 도구들, 즉 제도, 관행, 실천 등이 목적 실현에 적절한 것인가를 심도 있게 고민한다. 그리고 보다 나은 다른 방법과 도구들이 없는지를 살펴본다. 그 결과 일부는 폐기하고 일부는 새롭게 선택된다. 이렇게 재구성된 방법과 도구들이 누수 없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가, 즉 최대의 결과물들을 낳고 있는지를 재검토한다. 이 과정을 통해, 관료주의가 개선되고 제도의 최종 성과물과 애초에 상정한 목표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효율성을 갖추게 된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의 1.0 버전부터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 경향의 확대에 적응한 4.0 버전까지 단계적으로 변화해 왔다. 19세기 전반기 내내 계속되었던 노동자들의 요구로 노동보호와 관련된 입법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이뤄졌고, 1880년대부터 사회보험체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취약계층에 대한 자선적 의미의 보호가 19세기 말부터는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위생, 전연병, 공중보건 등도 국가의 몫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복지국가 1.0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탄생했다.

태동기의 흐름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사이에 또 한번의 큰 변화를 경험하며 복지국가 2.0이 만들어졌다. 독점자본주의 폐해의 확대 및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내∙외적 환경변화의 대표적 요소들이다. 이에 적응하기 위해,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은 복지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적용대상자의 범위 또한 넓혔다. 스웨덴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집권하여 가족정책과 주거정책 등에서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시장에서도 노사협의의 관행을 만들어냈다. 프랑스는 1930년대 인민전선이 집권을 함으로써 사회보장 제도들이 확대되었으며 미국에서조차 뉴딜정책과 사회보장법이 도입∙집행되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소위 ‘영광의 30년’을 보낸 복지국가 3.0이 형성됐다. 전쟁의 경험이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에 대한 사회보장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전에 준비된 내용들은 입법의 과정을 거쳐 제도적인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복지국가는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영역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성격도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복지국가 3.0은 1970년대에 이르러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명실상부하게 통치패러다임으로 인정되고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생산모델인 ‘다품종 소량생산’이 널리 퍼지고 경제 자유화 및 금융 자유화가 일어나 자원의 국제적 이동이 커지게 되었으며 해외직접투자도 점차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사회적 위험의 내용도 달라졌다. 불안정고용의 증가, 장기실업의 등장 및 대규모화, 근로빈곤의 발생, 한부모 가구의 증가,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각종 차별의 사회문제화, 도시환경의 낙후(도시재생 및 구역개발의 필요성 대두) 등, 소위 ‘신사회적 위험’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각 나라가 구축한 복지국가 3.0의 문제해결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복지국가는 앞 서 2번의 적응능력을 보여주었듯 이번에도 적응에 들어갔다. 인적 역량의 강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투자, 소득보장에 있어서의 최저소득보장체계의 강화, 중산층을 위한 복지의 상대적 축소 및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 강화, 사회서비스의 민간제공주체로의 확대(즉 복지혼합), 사회보장의 지방분권 강화 등이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적응은 결국 복지국가 4.0 버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버전은 다시 새로운 환경변화에 직면하여 또 다른 적응의 압력에 노출되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압력을 가중∙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서의 복지국가의 위상

1980년대의 이후 ‘복지국가의 위기’가 널리 회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축적된 사회보장에 관한 자료들은 복지국가의 ‘후퇴’보다는 ‘안정적 지속’을 보여준다. 일련의 변화는 있었지만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변화들은 GDP 대비 공적 사회지출이 대략 5% 정도 축소하는 결과를 나았다. 즉 복지국가의 합리화가 5%의 축소에 한정해 이뤄진 것이다. 특히 경제체계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안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2]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국가의 실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다. 복지국가의 수준이 높을수록 팬데믹에 대한 대응 또한 잘 되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즉 2020년의 경제성장률은 그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이 국내외의 환경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 능력을 갖췄는지를 판단하는 종합지표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복지국가가 가장 잘 발달되었다는 북유럽 국가들 증 덴마크가 0.7% 증가하고, 핀란드와 스웨덴은 0.89% 하락했다. 이러한 수치는 다른 선진국들의 보인 2~5% 대의 하락과 비교한다면 매우 도드라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도 이와 유사하다. 북유럽 국가들이 0~3%대의 하락을 보인 반면, 다른 선진국들은 3~9%대의 하락율을 보였다. 결국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보다 공고히 자리잡은 나라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다.

국제통화기금(IMF)는 각 국가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실시한 예산사업, 재난지원금 등의 현금 지원, 세액감면 등과 같은 직접적인 지원을 ‘추가지출 및 기존 세액감면(Additional spending or foregone revenues)’ 항목으로 집계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3] 이 자료 또한 복지국가패러다임 구축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북유럽 나라들의 직접지원은 GDP 대비 1~4%인 반면, 미국, 영국 등의 영미형 국가들은 14~16%,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대륙형 복지국가들은 7~11%였다.

결국, 북구형 복지국가들은 팬데믹이라는 응급상황에서 다른 유형의 국가들보다 국가의 지원이 매우 낮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은 더 좋았다. 이는 복지국가패러다임에 의거한 제도들이 촘촘히 구축되어 있어서 내∙외적 위기에 보다 더 용이하게 대응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는 평상 시에도 국민의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위기 시에도 별도의 추가비용 없이 국민의 일상적 삶을 보호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증명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가의 통치가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보여준다.

 

복지국가 5.0의 전면화 가능성 상승

서구 유럽에서의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국가의 위기대응 능력에 대한 인정을 넘어 새로운 업그레이드에 대한 여러 징후들을 낳고 있다. 복지국가의 후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나라인 영국에서조차 ‘복지국가의 복귀’가 언론상에 등장하고 있다.[4] 코로나19 팬데믹 과정에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특히 중산층에게까지 여러 지원을 했고 이로 인해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올라가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과거 황금기의 복지국가가 새롭게 재구축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복지국가 5.0 버전의 출발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복지국가 5.0의 등장은 1980년대 이후 형성된 복지국가 4.0이 해소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축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 여성의 경제참여 확대, 성평등의 제도화, 4차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 및 정보에 대한 사회화, 지방 자치 및 분권의 공고화, 이민자의 사회통합 강화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해, 사회보장의 원리와 원칙이 경제영역에서 보다 더 확대되어야 한다. 그 동안 미뤄두었던 생산수단의 사회화, 기술 및 지식의 사회화, 생산과정에서의 경제적 민주주의 강화,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조직의 역할 증대, 더 나아가 사적 재산권에 대한 제한, 금융의 사회화, 화폐민주주의의 강화 등이 추가되어야 한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의 구축으로 복지국가 5.0을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한국사회에 내재된 여러 문제들을 표면화 시켰다. 사회보장의 기존 제도, 관행, 실천의 한계와 결함을 드러냈고, 지방자치단체의 역량 부족을 부각시켰다. 무엇보다도 IMF가 집계하는 직접지원이 GDP 대비 3.4%라는 점은 사회구성원에 대한 소득보장이 부실함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북유럽 나라들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구축되어 있어 위기상황에도 직접지원이 덜 필요한 반면, 우리나라는 그러한 기반이 없음에도 직접지원은 그들과 유사했다. 결국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의 불가피한 소득결핍의 문제를 사회적 연대 방식이 아닌 개인과 가족의 자구방식, 특히 가계부채에 맡겼다. 이는 우리나라의 통치패러다임은 야경국가패러다임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위기는 기회이다’라는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 유럽연합과 개별 회원국에서 나타나듯이,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기존의 것을 넘어서는 발상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3개의 상이한 압력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다. 아직 복지국가 3.0을 완료하지 못했기에 이를 보완해야 한다. 복지국가 4.0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아직 맛보기 수준이다. 거기에다 다가오는 복지국가 5.0이 해소해야 할 것으로 상정되는 문제들은 아직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우리나라가 당면한 복지국가의 구축은 매우 방대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통치패러다임의 새로운 구성을 위한 공론의 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서구복지선진국이 1945~1975년 사이 복지국가패러다임을 통치패러다임의 지배적 위치에 최종적으로 올려 놓은 그 작업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서구유럽의 경우 복지국가패러다임이 지배적 통치패러다임이 되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렸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가 논의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간 길들을 짧은 시간에 주파하는 저력을 보여왔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의 구축도 그러한 저력이 펼쳐져야 할 장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해야 할 때이다.

 

[1] . 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2nd E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2] . Paul Pierson, The Welfare State Over the Very Long Run, Zes-Working Paper No. 02/2011, 2011.

[3] . IMF, Fiscal Monitor Database of Country Fiscal measures in Response to the COVID-19 Pandemic, 2021/02/03 참고.

[4] . The Economist, “Covid-19 has transformed the welfare state. Which changes will endure? The pandemic may mark a new chapter in the nature of social safety-nets”, 『Briefing』, 2021/03/06.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정치학도로 시작해 프랑스 파리제1대학과 그로노블정치대학(IEP de Grenoble)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한 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연구실장으로 활동했음. 현재는 복지국가를 마을에서부터 만들기 위한 운동을 진행 중. 사회사상, 복지국가와 복지정치, 사회보장, 건강 및 요양, 복지도시 등을 사회성(the social)과 이론-실천의 통합 관점에 기반해 연구 중

목, 2021/08/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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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나는 지식경제를 국한되고 얕은 형태와 확산되고 심화된 형태로 구분하여 해명하고 지식경제를 심화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요구사항들과 이러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한 배경조건을 탐구하였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 주제에 관해 더 큰 세 가지 시각을 검토하겠다. 첫 번째 시각은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선택지들과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두 번째 시각은 세계 최고 부국들의 정치경제학 및 정치와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세 번째 시각은 경제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측면(공급과 수요의 상호수용이나 반복적인 불균형)에 대한 지식경제(고립적 형태이든 포용적 형태이든)에 관한 나의 주장이 갖는 중요성이다. 이 세 번째 시각은 이어서 경제이론의 일부 중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 책의 주장이 함축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세 번째 시각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연구가 경제생활의 가장 심층적이고 보편적인 특성들을 파악하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의 판단을 지지한다.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은 명백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20세기 후반의 발전경제학의 중요한 공식은 산업화가 표준적인 형태의 포드주의 대량생산의 수립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산업화를 통한 가장 부유한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 공식은 내가 차차 논의하려는 이유들로 인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이 공식에 대한 대안, 즉 지식경제의 확산되고 포용적인 형태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강력한 제도적 역량과 교육적자원을 가진 가장 부유한 경제들조차 이런 방향에서 크게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건에서 더욱 빈약한 개발도상국들이 전진한다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낡은 전략은 실패한다. 새로운 전략은 낡은 전략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까다롭고 너무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발전에 대한 모든 사유는 이 딜레마와 교전함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 딜레마는 경제발전에 가장 절박한 실제적인 도전이 되었으며, 동시에 현재 활용 가능한 발전 관념들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를 상기해보자.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은 기초 여건들, 즉 교육과 제도들에 의해 제약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전경제학이 ‘인적 자본’의 형성에 대해 했던 입에 발린 말에도 불구하고 발전경제학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 제도적 구조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에서 욕망의 현실적인 표적이었던 대량생산 방식의 산업화는 교육의 면에서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요한 요구는 노동자들에게 기계처럼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교육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타 근본적 제도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발전경제학은 역사적 상황(규제받는 혼합적인 시장경제)에서 기성품으로 발견한 경제적 제도들을 거의 수정 없이 추천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였다. 중요한 관심사는 투자자들이 그들의 재산에서 또한 재산이 창출한 소득흐름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점과 국가가 장기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이러한 전략을 단기정책으로 전환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계획기구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중단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최상의 방식은 노동자와 자원을 경제의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농업에서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갖춘 제조업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대량생산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의 천편일률적인 특성과 대량생산을 위한 교육적 제도적 전제조건들의 상대적 소박성은 생산성 증가와 더불어 성장 증가가 단시간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장 증가는 계속 전진하다가 기초 여건에서의 상응하는 전진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한계에 직면한다. 그러나 선행하는 제약조건들과의 충돌은 위험요소가 되기보다는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관철된 부문(포드주의 제조업)으로 노동자와 자원을 이전시키면서 시작되었던 변혁을 지속시키는 자극으로 봉사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자본집약적인 대량생산이 가장 부유한 사회들과 연결되었던 세계경제에서 산업화는 국제적 노동분업의 증가를 의미했다.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이러한 처방에 더는 의존할 수 없으며, 자신들과 가장 부유한 국가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도 없다.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오래 전부터 너무 이른 탈산업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겪어왔다. 또 다른 개발도상국들은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거대기업들에 유용한 지구적 가치사슬에서 (국제기준에 비추어) 저임금과 분업화되고 종속적인 틈새를 결합함으로써 대량생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개도국들은 그 상부국가, 즉 전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부국에서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친숙한 고립적 형태를 범례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의 상품화된 측면을 끌어안았다. 소수의 국가들(특히 중국과 인도, 어느 정도는 러시아와 브라질)만이 언제나 고립적 형태로서 세계적인 지식경제의 전초기지들을 설치해왔다.

발전경제학의 표준적인 산업화 처방이 작동을 멈춘 데에는 서로 연관된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세계에 산재한 그 독점적 기지들로부터 나온 선진적인 생산은 철 지난 대량생산을 점차 경쟁에서 물리칠 수 있다. 선진적인 생산은 전통적인 제조업의 제품들을 더 효율적으로 더욱 우수하게 생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내가 초-전위주의라고 불러온 체제 아래서는 선진적인 생산은 생산라인의 표준화된 부분을 대체로 임금과 세금이 낮은 다른 나라에 위치한 공장에 할당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업은 발전경제학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전위라기보다는 이제 지구적인 생산라인들에 대한 위성(짝패)으로 변한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적 산업화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의 증가와 더 이상 연관되지 않는다. 세계 경제에서 더 유효한 구분선은 제조업과 여타 모든 것(특히 농업) 사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선은 (과학적) 영농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확립된 선진적인 생산의 프린지와 여타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한다.

셋째,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의 중대한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부문들 간의 구분들은 효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구분들의 경직성은 상대적 후진성의 신호를 나타낸다. 모든 형태의 지식경제는 일천하고 제한적인 형태이든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이든 이러한 구분들을 전복한다. 지식경제는 특히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넷째, 대량생산 제조업이 생존하는 경우에는 노동과 조세에서의 차익취득이 낙후한 생산의 입지를 몰아냄에 따라 대량생산 제조업은 더 낮은 임금과 더 작은 세금을 향한 경주에 입각해서만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생산의 기반설비로서 운송, 통신, 에너지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능력에 대한 공적투자 재원의 부재와 저임금은 전위부문을 향하는 운동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계승형태는 대체로 어떤 일반적인 견해와 처방을 포기하였다. 그 계승형태는 빈곤층에 대한 상이한 정책들의 차별적인 효과들에 대한 미시적 연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은 결함 있는 구조적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 계승형태는 현대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와 일치하여 구조적 비전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경제 여건에서 이곳에서 그곳으로 이르는 데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매개적인 조치들을 통해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에로의 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낡은 메시지에 대한 대안을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낙담할지도 모르겠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약속과 그다지 격차를 보이지 않는 경제체제에서도 포용적 전위주의가 외견상 영웅적이고 불가능한 기획으로 머문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교육적, 도덕적, 제도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일이 더욱 요원해 보이는 사회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교육 및 법의 기초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극단적인 불평등과 방향들 및 체제들의 혼란(이러한 혼란은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독재를 통해서만 중단된다) 사이에서 자주 표류하는 나라들이다. 이러한 나라의 시민들은 최저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도 허약한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최대치를 요구할 수 있는가라고 반론을 펼지도 모른다.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을 고려하기 전에, 이 문제가 21세기 초반의 브라질과 같은 경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추구라는 과업이 제시한 도전이 부유한 경제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불가피한 이유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사례도 문제를 해결하기 적합한 형태로 다시 규정하는 작업에 일조할 것이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자극 아래서 브라질의 남동부, 특히 상파울루 주에 위치한 브라질 제조업의 핵심은 대량생산이었다. 대량생산은 처음 설치된 시점에서도 이미 철 지난 것이었다. 대량생산은 제조업에서 탁월성의 기준에 도달하였고 그 이래로 일반적으로 이 기준을 유지해왔다.

어쨌든 대량생산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핵심에서 퇴행적인 제조업 생산양식으로 점차 변모해왔다는 부담 아래서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철 지난 포드주의는 노동수익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빈번히 속류-케인스주의의 엄호 아래 제공된 신용보조금과 세금우대 등) 국가지원에 대한 의존을 대가로 해서만 경쟁력을 갖는다.

지식경제는 브라질에서도 출현했지만 매우 고립적인 형태로 몇 군데에서 신생기업들과 첨단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출현하였다. 유명한 준(準)국가적인 기술학교와 지원센터의 네트워크(바르가스 치세의 조합주의의 유산)는 선진적인 제조업에서 이러한 고립적인 활동들을 지원해왔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은행 중 하나를 포함하여 막강한 공공은행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가장 까다롭고 매우 이례적인 지원 형태, 즉 생산적 관행(농업 외의 확장 서비스)의 개선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기구도 보유한다. 이러한 지도관행에서 발전된 원리는 정부와 신흥기업 간의 분산적 협력관계와 그러한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을 서술한 “지역적 생산 협정제도(local productive arrangements)”의 개념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경제체제들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선진적인 중견기업)은 대체로 결여되었다. 나아가 브라질의 제도적 장치나 발전의 원리들(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재정적 신뢰의 추구까지) 중 그 어느것도 브라질이 너무 이른 탈산업화의 가장 두드러진 실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1세기 첫 10년간 상품가격의 상승과 농업, 목축업, 광업 제품에 대한 중국발 수요의 여파로 제조업은 생산과 수출품들의 백분율에서 극적으로 감소했다. 철 지난 포드주의는 대체되거나 전환되기보다 간단히 위축되었다. 브라질은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가는 중이었으며, 지식경제를 성취하기도 전에 대량생산을 상실하고 있었다.

한편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기업적 문화들 중 하나를 계속해서 지원했다. 두 번째 혼혈인종의 프티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경로를 따르려고 시도하고 독립성과 주도성을 추구하는 이 계급의 문화를 포용하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브라질 노동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강력한 담지자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경로를 따르고자 하였다.

동북부의 반-건조한 오지들과 같은 일부 극빈지역에서 17세기 선대제수공업부터 20세기 후반의 낡은 대량생산에 이르기까지 유럽 시장경제들의 다양한 관행, 법적 기구들, 심지어 기술이 공존하였던 페르남부코내지의 섬유산업지대와 같은 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기업가적 정신은 대체로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방향을 잃었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였다. 국가발전의 새로운 의제가 제시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례는 그러한 의제의 원재료였다.

이러한 상황들이 제기한 질문은 온 나라가 나중에 다른 것이 되기 위해 철 지난 포드주의의 연옥에서 한탄하면서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가 먼저 되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이 나라와 이 정부가 남동부의 낡은 산업 중심지들 바깥에서 포드주의 이전 단계에서부터 포드주의 이후 단계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조직할 수도 있는 지였다. 이 질문에 대한 전자의 답변은 이 장의 도입부에서 열거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자의 경로를 답습하는 것은 전자의 결과를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대답은 세상에 전례가 없는 어떤 것의 성취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앞선 지면에서 기술한 발전의 딜레마의 브라질다운 형태에 불과하였다.

브라질 사례는 발전 딜레마의 몇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 번째 요점은 이 딜레마가 허위의 딜레마라는 점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은 어떤 조건에서도 어렵지만, 개발도상국의 조건에서는 특히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업에 사후(死後)세계를 부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에 응답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더 나쁜 것이며 실로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한 제조업은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가정하였던 것과 같은 “무조건적 수렴”의 매개체로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으며, 앞서 내가 논의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작동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공장제 대량생산은 더 이상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므로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는 더 위축되고 더 제한적인 어조를 띤다. 그 메시지는 개발도상국에게 “관례적으로 산업화하고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명백히 겸손함의 호소력을 갖는다. 메시지는 잘 알려진 경로에서 인내심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우리의 생산능력의 진화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 노동분업에서 일어날 불가역적인 변화들을 고려하지 못한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주장은 모든 경제체제들이 자신보다 앞서는 경제체제들의 과거를 나중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미래로 예행연습하면서 똑같이 가차 없는 진화의 순서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견해에 의존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본성은 하나의 장소에서만 변화해온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은 세계의 모든 주요 경제체제에서 변화해왔으며 그 본성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입지는 직접적으로 또한 국제적인 노동분업에 대한 생산방식의 영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량생산을 국가적 발전의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브라질의 예에서, 브라질 경제의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로 바꾸려는 시도는 사라진 세계와는 다른 어떤 것(퇴각임과 동시에 투항으로 이해되는 후퇴, 달리 말하면 국제적 전위부문에서는 퇴각이고 생산의 전선에 도달한 국가들과 기업들에 대해서는 투항)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는 두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주요한 구성 요소가 세계의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포용적 전위주의와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구분해주는 (앞의 장들에서 논의한) 조건들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진적인 방식의 형성에 관건적인 자원(사회에 널리 확산된 부단한 활기와 기업가적 충동)이다. 그 특징적인 의식형태는 엄청난 수의 빈곤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기보다는 프티부르주아적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과 독립성을 열망한다. 욕망의 기본 목표는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가족기업이다. 경제의 핵심적인 불행은 기회와 수단의 부족으로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와 생명의 엄청난 저량(貯量)을 거부하고 통제하고 위축시키면서 탕진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에서도 대량생산은 자립과 주도성의 세계로 진진입하려는 후보자들 중에서 소수만을 채용해왔다. 대량생산과 제조업의 제휴와 표준화의 이면으로서 대규모 대량생산에 대한 의존은 대량생산이 다수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고립적이고 일천한 전위주의의 엘리트주의적 제약 아래에 있는 것으로 현재 알려진 지식경제는 이와 같은 내재적 제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용적이고 심화되는 지식경제로 가는 경로는 고단하다.

개발도상국의 상황에서 광범위한 경제성장을 위해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를 활용하려면 두 가지 문제, 즉 정치적 전략적 문제와 개념적 제도적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전략적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기획을 자신의 대의로 삼는 좌파가 소생산자계급과 이들의 물질적 야망과 도덕적 태도를 공유하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품고 있는 편견이다. 좌파들은 이러한 프티부르주아 계급을 이러한 계급의 관점에서 만나고 이 계급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는 형태들에 대한 관념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대신에 전통적으로 이들을 적으로 선택하였으며, 이는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는 실제로 그러든지 혹은 말로만 그러든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게 고립되고 후진적인 가족기업이라는 기본형태 이외에도 자신의 야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제공해야할 필요성이다. 그것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조건에 대한 나의 앞선 논의에서 제시한 의제이다. 이 의제는 시장질서의 제도적 재구축에서 시작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처음에는 생산자원의 접근 수단을 적절하게 수정함으로써, 그 다음에는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분권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조정을 형성하는 법적 혁신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분권화된 경제주체들이 사회의 자본자원을 이용하고 서로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조건들의 근본적인 확대와 다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예증된 세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에 봉사하도록 시장질서의 쇄신을 시작할 제도적 기제가 단편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제도적 기제의 부분들은 모든 주요 경제에 존재한다. 제도적 쇄신작업은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브라질 정부와 심지어 지역 주정부들도 내가 앞서 설명한 제도혁신의 첫 번째 단계에서 요구된 다수의 기구들에 의존할 수 있다.

즉 개발은행들, 자신의 관행을 개선하려는 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조직들, 개발도상국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업들이 보유한 수용의 여건과 역량에 기술을 적응시킴으로써 기술의 개발과 전수를 목표로 한 기구들, 선진적인 제조업을 전담하는 지원센터와 학교를 포함하여 기술학교들의 준정부적인 네트워크 등에 의존할 수 있다. 여전히 결여된 요소는 이러한 도구들을 종합하고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에 복무하도록 활용하는 방식이다. 접근형태들을 조정하는 방식이 없다는 점보다는 대량생산이 절정에 이른 이후에 일어나는 발전경로에 관한 지도적인 이론적, 프로그램적 견해가 없다는 점이 더욱 중차대하다.

이러한 발전의 딜레마는 진짜 딜레마가 전혀 아니다. 이 딜레마의 한축(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권고한 경로를 계속 따라가고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개발도상국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도달지평으로 수용하라는 선택지)은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놓는다. 딜레마의 첫 번째 축이 제공하는 것은 기껏해야 미래의 전망이 없는 현상유지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접근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견해가 없으므로 이러한 후방진지는 현실주의라는 부당한 평판을 획득한다. 이러한 후방진지는 익숙한 것에 대한 공상적 견고함에 의존할 수 있다. 21세기 초에 부유한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쇠락하는 대량생산을 국내외 경쟁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일이 우파 포퓰리즘과 동시에 전통적인 사민주의의 경제프로그램의 큰 부분을 이루었다.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영향은 이윽고 정신적 식민주의의 확립된 작동기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서 그 위신을 높여왔다.

이 딜레마의 다른 축(개발도상국의 여건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지식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러한 대안을 실천하는 열쇠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조각들로 분해하고 이를 단계별로 실천하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요건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실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도중에 지도를 수정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궤도를 따라서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은 이 경로를 여행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거의 항상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식]경제로 나아갈 가능성이 가장 부유한 국가들보다 주요한 개발도상국에서 더 제한적이라고 예상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주장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장 발전한 국가에서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야 다른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비교해 보자. 마르크스의 추론은 경제사회의 조직형태들이 단선적인 진화적 계기를 이룬다는 동일한 가정에 의존하였고, 이러한 가정이 그의 모든 사회경제이론을 고무시켰다.  오로지 선진경제들만이 불가피한 여정의 모든 단계들 완성하였을것이기 때문에 선진경제들은 역사가 지정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역사는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상대적 후진성의 조건에서 수행된 이행은 과정과 결과에서도 이론이 제시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서유럽에서 착수된 혁명적 사회체제들의 짧은 경험들이 보여주었듯이 선진경제국에서도 이행은 그러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주변부 경제에 대한 중심부 경제의 우위성 관념은 도전적인 교란이 유발하는 독보적인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관념은 다른 곳에서 수입된 제도적 안배들이 원래 있던 곳과는 달리 이곳에서 기능하지 않았고 기본적인 필요나 높은 희망을 충족시키지도 못함으로 인해 이러한 안배들을 거부하는 데에서 나오는 장점을 깨닫지 못했다. 중심부 경제에서 더욱 근본적인 대안들에 대한 개방성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 재앙의 자극이 없다면 점차 성취되기 어렵다고 드러났다. 그러한 자극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엘리트들의 국가적 혹은 초국가적 연대는 역사적 기회의 창을 닫아걸고 중요한 대안들로 인해 동요하지 않는 질서를 복원한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대체로 증명하였다.

다음 두 가지 요인들은 서로 결합하여 개발도상국들(특히 자신을 세계에서 지배적인 이익과 사상에 저항하는 거점으로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라들)에게서 고립적 형태보다는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았다. 첫 번째 요인은 이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허약성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집단적 전제주의에 희생되거나 아니면 그 변혁적 잠재력이 북대서양 국가의 헌법적 안배들을 모방하면서 빠져나갔다.

두 번째 요인은 정신적 식민주의이다. 개발도상국의 지적 생활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가장 체념적인 나라들에서 우세한 사조에 굴복하는 현상이다.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발전과 제도의 지역적 이단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제는 해독제가 겨냥하는 메시지만큼 그 목표에서 국제적인 메시지를 공식화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 정통[무조건적 수렴테제]에 맞서 이단들을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은 기존 생산형태의 한계점에 도달한 사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발전의 가장 믿을만한 공식[무조건적 수렴]이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응답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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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8/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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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개혁’이라는 주제는 연구하고 조사하기도 어렵다. 우선 관련 정보와 문헌이 부족하다. 교수 등 지식인들이 ‘관료개혁’이란 문제를 다룬 문헌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연구 발주자의 구미에 맞춘 논문들 이외에 거의 찾을 수 없다. 필자가 전부터 써왔던 낯익은 관련 기고문들만 보인다.

우리 사회가 ‘관료 지배사회’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직감한다. 혹여 관(官)에 미운털이 박히게 되는 날이면, 관에서 제공하는 일체의 연구과제나 프로젝트 혹은 각종 위원회 참여라는 기회를 모조리 상실하게 되고 평생 ‘강제로’ 청빈하게 살아야만 한다. 그러니 이 땅의 지식인들이란 그저 갑(甲)인 관(官)에 알아서 길뿐 감히 비판할 엄두를 낼 수 없다. 우리 사회 권전교역(權錢交易)과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무소불위 권력으로 군림해왔던 검찰 조직, 사법농단으로 얼룩진 법원 조직 그리고 권위주의적 폐쇄형 계급구조를 지닌 관료조직은 우리나라 외에 세계 다른 나라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검찰 조직과 법원 조직 그리고 관료집단의 비정상적 왜곡의 기원은 바로 박정희 유신 정권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하여 권력의 총체적 집중을 도모하면서 이들 조직들을 권력 유지의 도구로 왜곡시켰다. 그리고 그 왜곡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개선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왔다.

 

유신 정치권력에 의해 왜곡된 법원 시스템

헌법 제104조 제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조항이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에 의하여 기존에 존재하던 ‘법관추천위원회’는 전격적으로 폐지되어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하도록 바뀌었고, 현재의 헌법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명문화하고 있다.

현재 세계 어느 나라도 대법관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나라는 없으며, 이는 이른바 ‘유신 잔재’이다. 유신헌법은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임명과정을 종래의 사법주도형에서부터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는 정치주도형으로 변질시켰고 이러한 왜곡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왜곡으로 인한 각종 폐단의 총화는 사법농단으로 발현되었다.

 

유신헌법에 의한, 세계 유일의 헌법상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헌법 제12조 3항에는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고 명문화되어 있다. 이러한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규정이 헌법에 규정된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오늘 검찰 조직의 뜨거운 ‘권력의지’는 이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조항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의 이 조항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헌헌법에는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라는 명문화된 것은 바로 박정희 군사쿠데타 직후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개정한 헌법부터였다. 그리고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라는 이 규정은 이후 유신헌법에서 한 발 더 나가 “검사의 요구에 의하여”로 다시 개정되었다. 이는 결국 검찰의 권력의지와 절대 권력을 행사하려는 박정희 유신 체제의 권력의지가 상호 결합된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군대에 이어 관료조직을 수족으로 삼다

한편, 박정희는 군대조직에 이어 공무원 조직을 ‘제2의 군대조직’으로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조직으로 삼고자 했다. 먼저 기존에 주로 인맥에 의한 엽관제로 운영되던 공무원 채용을 시험에 의해 공무원을 채용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공무원 채용을 체계화시켰다. 이는 평생 일본을 롤 모델로 삼았던 박정희가 시험에 의한 일본의 공무원 채용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이어서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하여 “법령에 의하지 아니하는 한 본인의 의사에 반한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여 공무원에 대한 신분보장을 규정하였다. 그렇게 이 땅의 관료조직은 박정희 권력의 충견(忠犬) 조직으로서 양육되었다.

박정희 권력의 칼날은 언제나 국회를 향하고 있었다. 1972년 12월 27일, 이른바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 체제의 근거를 만든 유신정권은 곧이어 1973년 2월 7일, 국회법을 개정하였다. 그 개정에서 특히 “전문위원은 당해 상임위원회의 제청으로 의장이 임명한다.”는 국회법 제42조 제2항 규정을 “전문위원은 사무총장의 제청으로 의장이 임명한다.”는 규정으로 바꿔놓았다. 국회의원의 전문위원 선출권을 박탈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수족 집단으로서의 관료로 대체한 것이었다. 그 목적은 바로 ‘국회의 무력화’에 있었다.

 

검찰, 법원 그리고 관료조직, 박정희가 구축한 구체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중국 역사상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중요한 정책은 우선 중앙에서 여러 방법으로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다음으로 지방에서 지방장관의 권한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방법은 지방장관의 임기를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지방 정무에 숙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각 아문(衙門)의 조문들은 모두 아전(吏)들이 제정하였다. 사실상 실제적인 일체의 사무에 있어 그들 아전들이 전문가였고, 따라서 그 처리는 전적으로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황제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아전’들과 기꺼이 천하를 함께 통치하였다.

박정희 유신 정권도 이와 동일한 방식을 취했다. 영구집권을 획책하면서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의 총체적 집중을 도모했던 박정희는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검찰, 법원 그리고 관료집단을 양육하였고 자신의 의도를 언제든 실행시킬 수 있는 조직으로 활용했다. 동시에 그들을 (중앙정보부 그리고 경찰과 함께) 자신의 정적과 민주 세력을 탄압하는 조직으로 도구화했다. 이렇게 양육되어 특권세력화한 조직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혁된 적이 없는 채 우리 사회의 건강한 전진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검찰, 법원 그리고 관료조직은 박정희가 구축한 ‘구체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주요 거점이다. 윤석열, 최재형, 김동연. 지금 기묘하게도 검찰, 법원 그리고 관료의 세 집단에서 모두 대선 주자들이 나왔다. ‘박정희 구체제’가 여전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입증시켜주는 장면이다.

지금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바로 박정희가 구축했던 ‘구체제’를 넘어서야만,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소준섭

화, 2021/08/2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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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순전히 중국판 무협 판타지 장르라는 쉔환玄幻과 (짐작하시는 바와 같이 현학玄學의 나라 중국답게 판타지奇幻이나 SF科幻에 빗대어 이런 표현을 만들어 냈다.) 이미 5억명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중국 웹소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설맞이 영화대목(春節檔이라 불린다)에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영화<소설가를 암살하라刺殺小說家>를 보러갔다. 나뿐 아니라 같이 영화를 본 중국친구들 모두, 트레일러만 보고, 성공한 웹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었다. 한 유명 인문사회과학출판사가 영화의 원작이 된 중편소설집 <비행가飛行家>와 작가인 솽쉐타오雙雪濤를 띄우는 것을 보고, 중국 웹소설의 수준이 대체 어느정도인지 궁금해졌다.

솽쉐타오 双雪涛

진짜 디스토피아가 돼버린 홍콩을 대체해 대륙의 영화촬영지로 입지를 굳힌 수직도시 충칭重慶과 액자소설속의 전설버전인 경성京城의 몽환적이면서도 화려한 배경, 빠른 이야기 전개와 이에 걸맞게 게임을 방불하는 그래픽이 압도적이었다. 알리바바의 마윈을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재벌기업의 총수가, 전설속에선 신이 된 빌런 적발귀赤髮鬼로 등장해 붉은 갑옷을 입은 ‘세일러문 전사’에게 응징당한다. 코믹하게 보일정도로 브리꼴라쥬 정신을 갖춘 중국판 X-man들이 소설가를 사이에 두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이런 2차원문화 (중국 청년들이 일본 망가의 영향을 흉내내어 보이는 기상천외한 정서를 의미한다) 요소들도 꽤 신선했다. 영화의 주인공인 루저屌絲소설가와 유괴당한 딸을 되찾아 주는 것을 댓가로 그 소설가의 암살을 강요받은 전직은행원은 둘다 작가의 분신이라는 것은 대충 알겠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대자본가를 처단하겠다는 뻔한 결기말고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책을 뒤늦게 사읽고 원작이 웹소설과 아무 연관이 없는 둥베이 문예부흥의 대표주자인 빠링허우 소설가의 순문학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가는 등단직후부터 타이완, 대륙의 문학상을 차례로 휩쓸어 왔다.

<역사, 기억, 생산>(2016)이라는 둥베이 지역문화연구서에 의하면 이곳은 우리가 흔히 조선족자치구가 있는 그 지역에 갖고 있는 편견과 달리, 50-70년대에 일제의 만주국이 남겨 놓은 공업기반과 6.25를 계기로 시작된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1949년에 갓 건국한 ‘공화국의 장자’ 노릇을 톡톡히 해낸 곳이다. 이곳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고, 여기 사회주의식 노동자 문화를 꽃피워 민중들이 노동자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1978년 실은 바텀업으로 촉발된 중국의 개혁개방이 한때 농촌과 지역의 일시적 경제적 부흥을 가져왔다. 하지만, 90년대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둥베이의 대공장은 구조조정으로 문을 닫고, 자산은 조각조각 나뉘어 사기업에 팔려나갔다. 마치 작가의 고향인 션양瀋陽을 연상시키는 경성이 적발귀에게 당한 것처럼. 이를 반대하고 공공의 자산을 보호하고 싶어하던 이들은 사적이익을 노리는 소인배들에게 문자그대로 ‘암살’됐다. <북방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에서 소설가의 아버지, <암살..>에서 적발귀에게 죽임을 당한 소설가의 극중 아버지 지우텐久天 이야기이다. 그렇게 둥베이는 점점 슬픈광야가 되어 갔다. 둥베이문학과 영상예술은 이 과정에서 벌어진 비루하면서 아름답고, 비장하면서 익살스러운 이곳 사람들의 만인보를 그려나간 작품들이다.

이때 ‘정리해고’를 당해 길거리의 노점상으로 나앉은 후에도 가부장적 체면에 죽고 사는 북방의 노동자들은 표정을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자녀세대인 빠링허우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살기를 갖춰야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청소년기에 IMF사태를 겪은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가 가볍지 않다고 본 중국 정부는 둥베이부흥東北振興을 외치며 지역경제와 그 기반이 되는 대형국영기업을 살리기 위해 뒤늦게 돈을 쏟아부었다. 때마침 둥베이 집단, 향토, 사회주의 오락문화가 키워낸 쟈오번샨趙本山이 주도하는 희극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대도시에 진입하기 위해 분투하는 ‘촌스럽고 거친’ 둥베이인들의 위화감이 주요한 웃음의 소재였다. 리얼리즘의 대가 쟈쟝커도 둥베이를 가상다큐멘터리<24성이야기二十四城記>로 기억한다. 이 영화는 션양에서 청뚜로 이주한 한 군수공장단지에 거주했던 노동자군상과 그 가족들의 연대기이다. 국영기업의 일터와 그 임직원이 거주하는 사택단지가 하나의 독립된 공동체이자 세계였던 중국의 ‘따유엔大院’문화를 잘 묘사했다. 한국의 강우석도 투자한 저주받은 블랙코미디 <공장의 피아노鋼的琴>도 둥베이의 회한을 연극적 무대로 잘 표현했다. 둥베이의 황금기에 대한 노동자들의 향수와 이를 재현하고 싶어하는 의지는 극중극의 환상속에서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채색된다. 2010년 이후에는 자오번샨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빠링허우 희극배우 따펑大鵬이 이번엔 둥베이출신 농민을 지식노동자와 사업가로 업그레이드한 루저屌絲男士씨리즈로 성공을 거뒀다. 작년에 그는 뜻밖에도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동원해, 희극대신 동아시아의 향촌마을, 친족관계의 ‘살아있는 화석’인 둥베이 이야기를 극사실주의로 표현한 <길상여의吉祥如意>(2020)를 선보이며 둥베이문예부흥을 이어간다.

“영화속에선 소설이 시작되는 장백산(백두산)도 이름을 지워 장소성을 희석했더군요. 마윈을 현실에서 물러나게 한 건 소설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예술가가 아니라 소설속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시)황제쟎아요? 지금 중국에서 대자본 욕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어요? 둥베이문학을 웰메이드 차이나 블록버스터로 완전히 탈바꿈시킨 감독의 역량을 극찬하던 중국의 평론가들은 결국 현실의 무력감을 철지난 포스트모던 타령으로 때우려는 것 아닌가요?” 좀 직설적으로 물어봤더니, 젊은 중국인 평론가가 의미심장하게 답한다. “제가 보니 이 소설은 왕샤오보王小波의 대표작 <완쇼우쓰萬壽寺>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네요.” 중국의 카프카나 조이스로 불리는 요절한 천재 작가 왕샤오보는 글좀 쓰고 싶어하는 중국 젊은이들이 한시절의 성장통처럼 빠져드는 대표적 자유주의 지식인이다. 솽쉐타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액자소설 형식을 갖는 이 소설은 명문가출신 한족무장으로 한때 안록산의 난에 가담했다가 다시 황제에게 투항한 역사적 인물 설숭薛嵩과(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설인귀이다!) 그 주위 여성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이 설화를 이리 비틀고, 저리 뒤집어 변주하는 수많은 ‘리셋’ 서사로 반복하면서 권력자와 지식인을 통렬하게 풍자한 소설속 작가의 입담에 배꼽을 잡게 된다. 만일 솽쉐타오가 정말로 이 소설을 왕샤오보에게 헌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의 근대성 비판은 실로 매우 중층적일 것이다.

둥베이문예부흥과 달리 중국 정부의 대규모 투자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지난 10년간 이 지역 인구의 30%가 감소했다. 100년전 이 지역에서 저들의 구호인 협력 및 화합과 달리 오족을 고통에 빠뜨린 일본제국주의의 만행도 역사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백약이 무효라지만, 북조선과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열린마음으로 ‘신오국협화’를 이룬다면 둥베이에 다시 공화국의 봄이 올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한 라디오 방송에서 주한 중국대사가 둥베이지역에 대한 한국의 관심과 투자를 환영한다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다(SCMP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둥베이 지역 정부는 미국기업들에게도 둥베이 투자를 권유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이 서평의 축약본이 실렸습니다. 경향신문의 허락을 득하여, 다른백년에도 전재합니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105281413001

목, 2021/08/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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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이러한 발전을 정치-경제적 기획으로서 상상조차 못한 것은 부유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국가의 정치에서 좌파와 우파에게도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관념의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정치생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요인들과 계급적 이해관계만으로는 부유한 국가들에서 정치의 방향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러한 요인들이 성장을 어떻게 촉진시키고 불평등을 어떻게 줄이는지를 알아낼 수도 없다.

이러한 사회들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사회들의 역사적 경험은 관념의 형성적 역할과 관념 부재의 형성적 역할까지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러한 역할의 실례로서 동시에 이 장에서 탐구한 여건들에 대한 배경으로서 미국과 여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집권한 진보파들과 개혁파들이 포용한 의제의 진화를 고려해보겠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협력자 다수는 제도와 정책에 있어서는 견결하고 진정한 실험주의자들이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은 변혁적 의제를 추구할 수 있는 비상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뉴딜의 제도적 실험주의는 연방정부와 대기업 간의 조정된 행동에 관한 조합주의적 관념을 그 조직원리로 삼았다. 이러한 조합주의적 관념의 주요한 목표는 시장질서를 민주화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를 재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조정된 행동의 실천은 나중에 전시경제의 여건 아래서 극단적으로 계속되었다. 경제 회복과 재건에 대한 활기찬 가정들과 회복과 고용을 위한 많은 정책들의 세부사항에서 초기 뉴딜은 초기 나치 정권을 포함하여 같은 시대 다른 국가들의 정부가 경제 불황에 대해 취한 대응과 닮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들은 그들이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때에는 필요로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 싸워야 할 유일한 장애물은 권력과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민주당원과 독일 독재자는 모두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의 지배를 받았다. 조합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대안을 발견하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뉴딜 정책의 발전에서 조합주의적 충동은 경제불안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초점을 한정하였다. (사회보장 프로그램은 그 가장 중요한 실례였다.) 경제불안에 대한 해독제의 제공은 전쟁과 전쟁경제 이후에 대량소비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들로 차례로 이어졌다. 대량소비로의 전환은 부채와 신용의 확대, 흑자경제와 적자경제 사이의 극명한 불균형, 그리고 대중적인 케인스주의의 정신에서 경기순환에 대응하는 경제운영에 의존했다.

궤도의 각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동일한 가정들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러한 가정들에 따르면, 국가는 시장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할 수 있고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이용하여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완화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은 시장체제의 구성적인 제도적 법적 안배들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배들은 원래 그대로이다.

지식경제의 포용적 형태의 발전에 유용한 사유는 이러한 가정들에 도전해야만 한다. 하나의 청사진이나 하나의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경로로 이해되는 법적 제도적 요건들은 이러한 대안의 조건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이 경로는 정책적 아이디어들의 기성 재고를 구성하는 기획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경로는 재산과 고용의 법적 체제들에 대한 혁신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혁신들은 국가에 맞서 시장의 공간을 증가시키거나 축소하는 것 그 이상을 행한다. 그러한 혁신들은 하나의 시장질서를 다른 시장질서로 대체한다.

이러한 관념과 경험의 역사는 현대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의 담론형태를 설명하는 데 일조한다. 한동안 북미와 서유럽에서 통치 엘리트들의 지배적인 기획은 기성의 경제적 제도와 법을 거의 수정하지 않으면서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과 유럽식 사회적 보호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국가적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 중요한 의제는 사민주의를 효율성과 공정성의 이름으로 더욱 “유연하게” 만들고 동시에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주된 방법은 안정적이고 자본집약적인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내부자와 현직자들을 보호하는 노동법을 고쳐서 실업자와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경제적 권리들이 어떤 특정한 직업보유에 의존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휴대 가능한 것이 되도록 이러한 권리들을 설계하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자는 주요한 제안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에서 발생하는 이득에 비례하여 경제불안에 대한 보증수단들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종종 실현되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이러한 제안의 이행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흔히 있었던 것과 같이) 급속한 경제성장의 배경 아래서 행동하는 재정적으로 원활한 국가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성장은 경제 전반에 걸쳐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확산으로 가능하게 된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을 요청할 수도 있다.

경제적 기회와 권한을 향상시키고 불안정고용과 투쟁함으로써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랑할 만한 종합을 사실상 후퇴시키는 가운데 사민주의를 공동화하는 것이다.

요원한 경제적 정치적 성취물이 아니라 생생하고 영향력 있는 관념으로서 포용적 지식경제의 부재는 오늘날의 부유한 나라에서 우파와 죄파 나아가 중도파에게도 정치와 정책을 형성하는 데에 조력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이러한 부재가 경제 침체와 불평등에 미치는 결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렇게 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또한 이러한 부재가 경제정책과 경제성장의 현재 경로에 대한 대안들의 가정에 대해 미치는 효과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렇게 했다. 원리에서나 실제에서도 이러한 대안의 결여는 1930년대 위기에서 정부와 기업 간의 조합주의적인 조정 행동에 대한 발전된 대안의 빈곤이 야기한 영향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사민주의적이고 사회자유주의적인 중도파의 왼쪽에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주도에 대한 신뢰를 잃었지만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사민주의의 자유주의화가 진보파들의 역사적 목표를 완수하는 방법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인식하는 좌파들이 있다. 그 중도파의 오른쪽과 사회민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파의 프로그램의 오른쪽에는 우익 포퓰리즘이 존재한다. 우익 포퓰리즘은 중도파의 기획이 해결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거론조차 못했던 문제들과 열망들을 가진 노동계급 다수의 충성을 얻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우파와 좌파의 공유된 가정들을 고려하고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대안을 인정함으로써 이들 간의 논쟁이 변화될 수도 있는 방식을 고려해 보자.

첫째로, 19세기 이래로 고전적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두 세력도 여전히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변형들”에 대한 문헌에서 탐구된 차이들과 같이 매우 제한된 범위의 변형만을 허용하는 안정적인 법적, 제도적 건축구조를 갖고 있다고 상정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초기 단계를 넘어 발전을 이루려면 제산체제와 자유노동의 법형식에 대한 혁신뿐만 아니라 국가 또는 국가가 수립한 분권적 기구들이 기업과 함께 작업하고 기업들이 서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조건들을 규정하는 안배들과 같은 근본적인 안배들에 대한 혁신까지 요구하지만, 앞서 말한 좌파와 우파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을 아예 배제한다.

둘째로, 현대의 진보파들과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대안적인 시장체제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해 변혁적인 접근법을 가질 수 없다. 진보파들은 대체로 보수파들에게 공급측면을 내주고 수요지향적인 정책의 우선성에 전념해왔다. 공급측면에 대한 전통적인(고전적 자유주의적인 또는 신자유주의적인) 보수파들과 포퓰리스트들의 기획은 그들이 자명하다고 여기는 법적 제도적 내용을 가진 시장질서를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제도들을 재편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으로 낙인찍고 시장을 억압하는 것과 이를 쇄신하는 것도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시장체제의 존재를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셋째로, 구조적 대안이 없는 경우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대량생산을 선진적인 제조업과 관련된 서비스업(경제생활의 부분들에서 지식경제가 취하는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하기보다는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을 방어하는 데 몰두한다. 스위트하트 약정은 해당 국가를 떠나거나 사업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기업들을 처리하고 무역 규제들도 동일한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의 방향을 구성한다.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더욱 발전된 후속 형태로 만들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서 대량생산을 지지하는 것과 포드주의 제조업의 사후세계를 사라진 대안의 대체물로 사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계속 누리고 있는 권위에도 불구하고 철지난 포드주의 대량생산은 개발도상국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동일한 이유로 [선진국에서도]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정책이다.

넷째로,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경제성장의 기본전략으로 금융완화정책(중앙은행이 시행하는 확장적 통화정책)의 사용을 묵인한다. 정부활동에 대한 재정적 제약은 확장적 재정정책의 역할과 특히 경제의 물리적 기반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공투자의 전망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금융완화정책은 잃어버린 경제성장 전략을 대신할 수 없다. 성장과 고용을 촉진하는 금융완화정책의 효과는 곧 소진된다.

경제활동 규제의 범위, 공공 서비스와 사회적 권리들의 수준, 금융조달 및 재분배적 특성, 누진세의 미덕, 심지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공적자원과 정부시책의 이용과 관련하여 이러한 좌파와 우파의 차이들은 실질적이다. 그러나 정책의 수립과 실행에 이르면 그 차이들은 정도의 문제로 내려앉는다. 내가 열거한 실천적인 정치경제학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차이들의 의미를 제한한다. 공유된 가정들은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확보 실패가 공유된 가정들의 호소력을 떨어뜨리는 상황에서도 경제적 유연성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하고 사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적 프로젝트의 생명력을 갱신한다.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지평 축소는 그 의미를 해명해주는 역사적 배경(20세기 중반의 사민주의적 타협안과 타협 조건들에 대한, 내가 말한 중도파, 좌파, 우파의 재론실패)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타협안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란스러운 시기에 예견되었고 대전 직후 30년 동안 마무리된 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협상의 조건 아래서 생산과 권력의 조직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세력들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했다. (혹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 그들은 국가정치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대가로 국가는 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하고 누진적 과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며 경기순환에 맞서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사용하여 경제불안을 완화시킬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시장질서를 새로이 상상하고 만들려는 시도의 완전한 포기는 하나의 관념 그 이상으로 변하였다. 그러한 포기는 이러한 나라들에서 제도나 관행 나아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경제적 교리로 정립되었다. 그러한 포기는 내가 말한 중도, 진보, 보수적 입장들의 제도적, 이념적 맥락을 규정했다. 이러한 입장들의 전제들은 각 입장의 가정들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러한 타협안의 제도적, 이념적 여건들 안에서 해결될 수도 없고 심지어 거론조차 될 수도 없다. 그러한 문제들을 거론하고 해결하려면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제도를 혁신함으로써 사민주의적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구조적 변화가 일상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방식으로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급진적인 프로그램적인 의제들이 상상하듯이 하나의 확정된 제도적 체제를 다른 제도적 체제로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형태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선진부문과 후진부문 간에 경제의 계층적 분할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분할은 대다수의 근로자와 기업이 더욱 생산적으로 되는 데에 필요한 수단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기반을 파괴한다. 역사적인 형태이든 최신의 자유화된 형태이든,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선진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사정은 그러한 사회의 현재 정치생활에서 매우 특징적인 좌절, 즉 노동계급 다수에게 자신의 이익과 열망이 희생당해 왔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바로 여기에 세계 최고 부국들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의미가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가정과 제안들은 이러한 중도파, 좌익, 우익 진영의 그것과 차이를 보인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만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에 응답을 제공할 수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20세기 중반의 타협안이 배제한 것(시장과 국가의 관계에서 행동의 여지를 다소간 부여하기보다는 시장을 규정하는 안배들을 쇄신하려는 시도)을 고수함으로써 이러한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 그 이상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에서 하나의 입장을 구성한다. 이러한 입장은 그와 같은 정치경제학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세 가지 연결된 주제들 중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나머지 두 주제는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 나아가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재정은 나쁜 주인보다는 좋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재정은 스스로에게 봉사해도 무방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생산적인 의제들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을 위한 자금조달은 현재로서는 자본시장 활동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장차 주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지식경제는 단순히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기획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급진적 혁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수단과 긍정적인 수단을 둘 다 활용함으로써 이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산출물 증가와 생산성 향상에 그럴 듯한 기여를 하지 못하는 금융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부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을 생산으로, 특히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로 연결시키고 자본에 대한 접근과 첨단 기술, 관행, 지식에 대한 접근을 조합하는 안배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긍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지식경제가 갇혀 있는 고립적 전위부문들 바깥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려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노동의 지지를 강화하는 일련의 제도적, 법적 혁신들이 필요하다. 노동수익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진시키는 데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더욱이 노동의 권한을 강화하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더욱 확산된 형태가 간직한 경제적 잠재력은 자산 소유자의 재정적 이익이나 경영자의 권력적 이익에 희생되지 않게 된다. 심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는 자유노동의 여건에서 번창한다. 한마디로 더 자유롭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포용적인 지식경제의 법적 제도적 요구사항들에 대한 나의 논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그러한 요구사항들의 함축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우리는 생산의 재편이 세계경제에서 분산적인 계약상의 안배들과 노동과 세금 차익에 근거하여 노동력의 점차 많은 부분을 불안정한 고용에 내모는 것을 저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공장제 대량생산(민간고용)과 행정적 포드주의(정부고용)의 상황에 부응하는 기존 노동법 이 외에 새로운 생산의 현실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제2의 노동법을 만들어야 한다. 제2의 노동법은 시간제 업무, 임시적 업무 및 하도급 업무 혹은 임노동자가 누리는 보장과 혜택도 갖지 못한 임노동의 변형으로 수행된 비자발적인 자영업 등 변칙적인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대표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들이 적절하게 조직 및 대표될 수 없거나 조직과 대표의 결과들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 제2의 노동법은 불안정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고용관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보호형식은 가격중립성이라는 법적 요건일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 아래서 수행되는 노동은 안정적인 전일제고용체제 아래서 수행되는 가장 근접한 등가적인 노동과 최소한 동일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고차적인 형태, 즉 독립자 영업과 협동조합 또는 동업관계에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노동은 장기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진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이 자원의 대규모 집적의 요구[규모의 경제]와 양립할 수 없다면,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자유노동의 지도적인 형태가 될 수 없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의 조건, 즉 재산 및 계약 체제에 대한 혁신이 없다면 그러한 요구와 화해를 이룰 수 없다. 전통적인 통일적인 재산권은 분산적인 경제적 주도권을 조직하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재산과 계약에 관한 대안적인 사법체제들은 동일한 시장경제 내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해야만 한다.

지식경제의 보급되고 급진화된 형태의 확립, 금융을 생산에 더 훌륭하게 가동하기 위한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재편, 불안정노동의 보호에서 시작하여 자유노동의 고차적 형태인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으로의 전진 등이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자유사회주의와는 다른 대안의 핵심이다. 이러한 방안들은 20세기 중반에 자유화된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더 이상 성취할 수 없는 과업, 즉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경제의 계층적 분할로 인한 불평등을 해결하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의제의 주요한 축들을 규정한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은 초기 단계들을 넘어 전진하려면 이 책의 앞부분[특히 제3장과 제4장]에서 논의된 사회, 정치, 문화에서의 여타 변화들에 의존해야만 한다.

첫째로,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이러한 의제는 의제에 합당한 역량을 갖추려면 기계와 백과사전으로서의 정신에 맞서 상상력으로서 정신을 지지하는 교육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의제는 모든 문화영역에서, 심지어 경제활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도 실험주의의 강화에 의지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가 없다면, 우리 경험의 지배적인 성격은 발견에 대한 제약들과 함께 경제적 재건 프로그램을 압도하고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둘째로, 이러한 의제는 사람과 그 능력에 대한 투자라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최대 유산을 포기하기보다는 발전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적 포드주의(표준화된 공적 서비스의 관료적 제공)를 고수하는 것과 계약을 통해 공적 서비스를 이윤 추구 기업으로 이전하는 것 사이에 양자택일적으로 체념해서도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 공적 서비스의 제공은 광범위한 협력적 활동을 통해 정부와의 협력관계에 시민사회를 참여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을 쇄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법적 제도적 형식에서도 혁신을 이루어야만 한다.

셋째로, 이러한 의제는 시장의 조직과 공적 서비스의 제공을 위한 안배들을 포함하여 사회의 기성구조를 압력과 시험의 대상으로 삼는 고에너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위기를 변화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구조변화를 일상적 경험의 평범한 연장으로 만든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우리가 사회와 경제의 형성적 안배들과 가정들을 부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로 바꾸도록 허용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온도를 높이고 정치의 속도를 촉진하는 정치 제도 하에서 그렇게 한다.

심화되고 보급된 지식경제, 변증법적인 교육, 공적 서비스 제공에서 국가와의 협력을 통한 시민사회의 자체 형성, 고에너지 민주주의 등은 상호보완적인 기획들이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서든 진전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 우리의 진전이 제약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기획들은 어떤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상황과 선택은 다른 전선에서 전진의 실패로 부과되는 제약조건에 봉착하기 전에 어떤 전선들에서 우리가 먼저 전진해야 할지를 정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의 과정에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모든 도덕적 이익뿐만 아니라 물질적 이익도 상당한 경제적 침체와 무력화의 상황에서는 달성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경험, 권능, 보수를 공유할 기회를 거부한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노선을 따라 사유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치에서 좌파, 우파, 중도파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중적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환상적인 비제도적인 지름길로서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사고와 행동 형식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생산역량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 이익과 행위주체성(개인들로서, 나아가 국가의 보호 아래 조직된 사람들로서 경제와 국가의 기성제도에 대해 작용하고 혁신하고 형세를 전환시키는 우리의 능력)의 고양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이익을 연결시킨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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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8/2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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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및 먹을거리 운동 진영에서는 대선 시기가 되면 대통령 후보들이 농업과 먹을거리에 대해 관심가지고 발언하기를 기대한다. 국민들의 먹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데 경제에서 차지하는 농업 비중이 낮으니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고 따라서 후보들도 이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대권 후보 중 한 사람이 국민들의 먹을거리 문제를 가지고 한마디 했다.

야권의 유력 대선후보 한 사람이 ‘먹으면 사람이 병 걸리고 죽는 것이면 몰라도, 부정식품이라고 하면 그 아래라도 선택할 수 있게,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라고 먹을거리 선택권을 부정식품에 까지 확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 후보의 말은 “없는 사람들은 부정식품, 싸구려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말이냐?” 라는 음식 불평등 문제로 확대되었다. 어떤 후보는 “없는 사람들은 주 120시간 노동하면서 부정 식품이나 그 아래 것을 먹는 나라를 만들려는 것이냐”고 비판했고, 또 다른 후보는 “불량 후보다운 불량 인식에 경악한다”고 비꼬았다.

국가는 모든 국민이 굶지않도록 할 뿐 아니라 안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관리하여야 하고 경제 불평등이 음식 불평등으로 이어져 열등감과 자괴감이 들지 않도록 적절한 규제와 지원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국가의 운영을 책임지겠다는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그저 죽지 않는 정도면 싸구려 부정식품도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면 되겠는가?

사실 필자는 이 후보의 부정식품 발언이 도화선이 되어서 각 후보들이 농업이나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해 자기의 의견이나 정책을 밝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비난만 한바탕 쏟아내고 지속가능한 농업과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급하는 국민 먹을거리 계획에 대해서 얘기하는 후보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율은 40% 수준이고 곡물자급율은 21%이다. 그나마 쌀이 자급에 가까운 생산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쌀을 제외한 나머지 곡물 자급율만 따지면 10%도 안되는 지경이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도망 온 인민군 장교가 동막골 이장에게 물었다. “큰소리 한 번 치지 않고 주민들 휘어잡은 영도력의 비결은 뭐임메.” 이장은 답한다. “뭐이를 마이 멕이야지 뭐….” 지금 우리는 식량 자급율 40%, 곡물 자급율 20%인 나라에 살지만 국민들이 못 먹어서 불만이진 많다. 오히려 과잉 섭취와 비만을 걱정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해외에서 수입하여 배불릴 수가 있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이제 대선 후보들은 농업과 먹을거리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할 때가 되었다. 싸구려 부정식품 선택권이 아니라 먹을거리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지속가능하게 공급하기 위한 전략을 말이다.

공공의료라는 개념이 있다.

‘국가와 지방정부가 지역이나 계층, 분야에 관계없이 국민들의 보편적인 의료 이용을 보장하고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보건의료기관을 설립하여 의료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무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공공의료처럼 먹을거리도 공공 지원 서비스 개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공공식료’라고 하는데 이는 「먹을거리 불평등을 해소하고 누구나 안심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공공식료는 시설이 필요한 게 아니다. 자국의 농업을 지키고 성장시켜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시스템이며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현재 농식품부와 농업 관련 정부기구를 정비하는 일이다.

공공식료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 농업은 경쟁력, 규모화, 효율성 중심 농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리 경쟁력을 강요해도 우리 농업은 외국 농업에 비해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 그러면 우리 농업은 도태와 폐기 대상이 된다.

농업을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소수의 농업자본가와 농업 기술자에게만 맡겨서는 안된다. 우리 농지는 사람들이 직접 기계와 농구를 사용해야 농사지을 수 있는 경사지와 조건 불리 농지들이 많이 있다.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면 농사짓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그래야 농업 자급력도 높이고 농산물 수출국에서 생산, 공급의 위기가 왔을 때 대처할 수 있다.

우리 대선 후보들이 선거를 치를 때 까지 수시로 먹을거리 문제에 관심가지고 공공식료의 관점에서 우리 농업을 새롭게 조명하고 이에 대한 정책을 내놓으면 좋겠다.

싸구려 부정식품 선택권 말고.

 

이재욱

화, 2021/08/3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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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복지국가는 국민의 행복증진을 목적으로 하며, 복지국가의 성숙도가 높을수록 국민의 행복 수준 또한 높다고 여겨진다. 유엔의 「세계행복보고서 2021」에 따르면, 핀란드(1위), 아이슬란드(2위), 덴마크(3위), 스웨덴(6위), 노르웨이(8위) 등 복지국가의 모습을 가장 잘 갖추었다는 나라들이 행복순위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다.[1] 이러한 주장은 직관적으로는 이해가 쉽다. 하지만 여기에는 복지국가의 정착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중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복지국가 5.0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복지국가와 행복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부정적/긍정적 감정과 행복

우리나라 표준국어대사전은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영어의 happiness는 ‘기쁨이나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불어의 bonheur는 “인간이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얻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고 다양한 열망을 완전히 달성하며 개성들의 조화로운 발전에 있어서 균형을 찾았을 때, 인간이 정신차원에서 일반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행복이란 “원하는 바을 얻었을 때 도달하게 되는 긍정적인 감정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감정들 중에 기본감정(primary emotion)이란 범주가 있다. 연구자마다 다소 다르지만, 기본감정은 대략 6~8개의 감정들로 구성된다. 플루치크(Plutchik)의 8감정(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기대, 놀람, 신뢰, 증오)이, 희로애락애오욕(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증오, 욕심)이라는 칠정(七情)이 대표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수백 가지의 감정은 바로 기본감정에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기쁨이란 기본감정에서 감정의 정도가 낮으면 평안 높으면 황홀이 된다. 그리고 2개의 기본감정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감정이 만들어진다. 기쁨과 신뢰 사이에서 사랑이, 두려움과 놀라움 사이에서 경외라는 감정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연구들은 행복이란 감정을 기본감정으로 여기지 않고, 둘 이상의 기본감정을 포함하는 집합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위 사전적 규정에 따르면 행복은 최소한 기쁨(joy), 만족(satisfaction), 즐거움(amusement)이라는 3가지의 기본감정을 아우르는 분류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기뻐도 행복한 것이고 만족해도 행복한 것이며 즐거워도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욕망이나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생기는 기쁨, 만족, 즐거움만을 행복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다면, 슬픔∙두려움∙고통 등이 없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은 행복이라 부를 수 없을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도 행복이라 여긴다. 따라서, 행복을 규정할 때 슬픔∙두려움∙고통 등의 부정적 감정과 함께 동시에 기쁨∙만족∙즐거움 등의 긍정적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조합으로 구성해보면, 1) 슬픔∙두려움∙고통이 있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없는 상태, 2) 슬픔∙두려움∙고통이 없고, 기쁨∙만족∙즐거움도 없는 상태, 3) 슬픔∙두려움∙고통이 없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상태 등 총 3가지가 나온다 (그림1 참고).

그림. 동일 사안에서의 행복과 불행의 감정 범위

 

행복의 2가지 유형: ‘0의 행복’, ‘+의 행복’

동시에 긍정-부정의 감정을 스펙트럼으로 보는 것 또한 행복의 의미 구성에 중요하다. 현재의 나의 감정은 최대의 부정상태에서 최대의 긍정상태까지 연속되는 스펙트럼 중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런데 문제는 긍정-부정의 스펙트럼의 중간에 0의 영역이 있다는 점이다. 즉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상태가 있다. 원래 건강했던 사람의 다리골절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날 자동차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다면 부정(-)의 상태가 되고, 수술과 통증치료를 잘 마치게 되면 고통이 없는 (0)의 상태가 되며, 물리치료, 운동치료 등의 재활을 잘 해서 다시 운동도 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 원래의 긍정의 상태인 (+)상태가 된다.

이제 2가지의 기준을 동시에 적용하여 종합적으로 행복을 규정해 보자. 우선, 하나의 사안과 관련해 아픔∙걱정∙고통 등이 있다면, 동시에 기쁨∙만족∙즐거움이 있을 수는 없다. 다리골절은 고통이지 기쁨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슬픔∙걱정∙고통 등이 있다면 기쁨∙만족∙즐거움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이는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상태이며, 소위 말하는 불행이라 할 수 있다. 불행을 나타내는 불어의 malheur라는 용어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함을 어둡게 하고 그것을 정신적인 비참함과 절망에 빠뜨리는 고통의 상태”라고 사전적으로 규정되는데, 바로 이런 상태이다.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해당 슬픔, 걱정, 고통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없앤다고 해서 곧바로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긍정적인 정신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단지 부정적인 정신상태로부터 해방되었을 뿐이다. 이 상태가 바로 슬픔∙걱정∙고통도 없고 기쁨∙만족∙즐거움도 없는 (0)의 상태이다. 나는 이런 상태를 ‘0의 행복’이라 부른다. 이 유형의 행복은 주로 편안함, 안정감, 평화로움 등의 감정이 지배적이다.

(0)의 상태에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 앞의 예를 다시 들자면, 고통이 없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재활과정을 거쳐 능동적인 활동이 가능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운동이나 여가생활 등의 신체적 활동을 해야 비로소 건강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슬픔∙걱정∙고통은 없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상태를 ‘+의 행복’이라 부른다. 요컨대, 당장의 슬픔, 걱정, 고통 등을 없애거나 사전에 이런 부정적 감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함으로써 이르게 되는 슬픔, 걱정, 고통이 없는 상태가 ‘0의 행복’이고, 여기에 더 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 기쁨∙만족∙즐거움을 얻는 상태가 ‘+의 행복’이다.

 

현재의 복지국가의 목표는 주로 ‘0의 행복’의 실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0의 행복’과 ‘+의 행복’을 구분하는 것은 복지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복지국가의 정책들 중에 상당 부분은 ‘0의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안되었다. 복지국가의 핵심적인 정책인 사회보장정책은 눈앞에 나타난 질병, 실업, 육아, 요양, 장애, 주거, 소득부족 등의 사회적 위험, 즉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 결핍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을 벗어나거나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들이다. 건강보험은 아팠을 때, 국민연금은 노후시기의 소득 부족을 대비하기 위해, 고용보험은 실업에 따른 소득 결핍을 위한 것들이다. 소득보장 관련 정책들은 소득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복지국가는 ‘+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제공하기보다는 주로 그것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우선, 사회구성원의 역량(capability)를 키우는 데 초점을 둔다. 유럽 복지국가들은 19세기부터 ‘교육국가’라고 부를 정로도 공교육의 제공을 제일 중요한 책무로 여겼다. 현재에도 대부분의 유럽 복지선진국은 대학교까지 공교육체제를 갖추고 있어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며 학비걱정 없이 역량을 쌓을 수 있다. 또한, 직업고등학교도 잘 발달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높다. 최근에는 직업재교육체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대학교 및 대학원 진학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사회구성원은 ‘+의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제도와 관행 그리고 암묵적 규칙 등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노력과정이 더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는 장치들을 깔아주는 것이 ‘+의 행복’을 위한 복지국가의 두 번째 방점이다. 요컨대, 복지국가는 시민들이 원하는 ‘+의 행복’에 필요한 조건들을 제도적으로 구축하는데 힘을 쏟는다.

 

‘+의 행복’을 위한 복지국가의 노력들

노동을 통한 사회참여는 일상의 1/3~1/4를 차지하므로 ‘+행복’의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이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그런 직업이 차별 없이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직업선택이 잘못 되었을 때, 취업서비스, 직업재교육, 실업시기의 소득보장 등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직업으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복지선진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 구축에 있어 매우 앞서 있다. 그 결과 국민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다. 특히 복지국가 4.0에서 가장 앞선 북유럽 국가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으며 스웨덴의 경우에는 2019년 기준으로 73.4%에 이른다.[2]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여유시간의 보장은 ‘+의 행복’을 위한 또 다른 주요 조건이다. ‘+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절대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직장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길수록 다른 곳에서의 행복을 느끼기 위한 활동을 할 여지는 줄어든다. 물론 근래 유럽에서 나타나는 노동시간단축은 일자리를 나누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단축된 노동시간을 자신의 역량 개발이나 여행이나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는 등에 사용함으로써 ‘+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은 지방자치제도의 완성도를 높여 국가의 주요 사무들이 주민들의 ‘+의 행복’을 실현하는데 공헌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지방정부가 사회서비스에 대한 규제, 관리, 재정 모두에 대해 책임과 자율권을 가지고 있다. 시민사회 출신자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지방정부의 주요 요직에 자리잡음으로써, 그들이 주민들과 맺은 네트워크가 주민들의 직간접적인 참여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반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0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을 직접 기획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즉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지역주민의 일원으로서 지역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위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구조는 사회서비스의 영역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복지선진국이 보여주는 정책상의 특징 중 하나는 동행서비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행서비스는 사회구성원이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 부족한 요소들을 보조하는 인원이 동행하면서 채워주는 것이다. 장애인의 경우 직업교육이나 직업생활을 할 때 동행인인 함께 생활하면서 활동에 도움을 제공한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일환으로 각각의 구직자에게 동행인을 붙여주어 취업계획작성부터 시작해 취업이 될 때까지 현장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이러한 동행서비스는 각 개인이 삶의 주체가 되어 일상에서 중요한 일들을 스스로 기획하고 결정하며 그것을 추구∙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의 행복’의 실현을 가능하도록 한다.

 

 

복지국가 5.0은 ‘0의 행복’ 보장을 유지하면서 ‘+의 행복’ 보장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구축된 복지국가 4.0은 ‘0의 행복’과 ‘+의 행복’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다. 위에서 기술한 ‘+의 행복’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 4.0은 ‘0의 행복’의 보장에 치우쳐 있다. 이런 불균형은 복지국가 4.0이 주로 보장하는 행복과 국민이 실제로 요구하는 행복 사이에 미스매치가 낳고 있으며, 이는 결국 복지국가 5.0으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압력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

유럽의 복지선진국은 ‘0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와 프로그램을 이미 촘촘하게 갖추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는 이미 형성된 슬픔, 걱정, 고통에 대한 방지책으로 인해 편안함과 안정감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즉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축된 제도와 프로그램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주는 효능감이 낮아지고 있다. 따라서 ‘0의 행복’의 강화를 위한 요구는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다만 ‘0의 행복’을 지원하는 제도들을 축소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할 뿐이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의 행복’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져가고 있는데 이를 충족시킴에 있어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당장의 실업률의 문제로 인해, 정부는 취업 자체에 초점을 맞추느라 일자리의 질에 대한 고려는 줄어들고 있다. 비록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일을 제공하고자 노력은 하지만 충분치가 않은 상황이며, 특히 새롭게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층의 불만은 커져가고 있다. 경제활동에 있어서의 주체적인 참여 요구는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단순히 취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생산을 주도적으로 관장하려 하지만 그를 위한 토대가 별달리 구축되어 있지 않다. 현재 도입된 노동이사제는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운영권 내지는 결정권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조합원의 주체성을 보장하는 협동조합이 활성화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복지국가 5.0으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위해,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은 ‘+의 행복’의 증진을 위한 정책들을 새롭게 도입하고 강화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황이 좀 더 복잡하다.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0이 행복’에 대한 인식 없이 ‘+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자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 또는 임금이 높은 일자리를 원한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항상 보다 높은 자리 또는 높은 위상을 가지려 한다. 주거의 안정성보다는 자기의 집을 사려는 데 보다 더 큰 열의를 쏟아 붓는다. 적당한 소득보다는 자기가 벌어들일 수 있는 최고의 소득수준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맥락에서 ‘0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복지국가는 국민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게 된다. 결국, 행복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이해는 복지국가패러다임을 지배적 통치패러다임으로 위치 지우는 데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 행복’은 ‘0의 행복’을 보장하는 제도들을 조건으로 달성 가능한 것인데, 우리나라는 토대가 없는 사상누각을 꿈꾸고 있다.

 

[1] Helliwell, John F., Richard Layard, Jeffrey Sachs, and Jan-Emmanuel De Neve, eds., World Happiness Report 2021, New York: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 2021, p.18.

[2]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2KAA301_OECD&conn_path=I3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정치학도로 시작해 프랑스 파리제1대학과 그로노블정치대학(IEP de Grenoble)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한 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연구실장으로 활동했음. 현재는 복지국가를 마을에서부터 만들기 위한 운동을 진행 중. 사회사상, 복지국가와 복지정치, 사회보장, 건강 및 요양, 복지도시 등을 사회성(the social)과 이론-실천의 통합 관점에 기반해 연구 중

목, 2021/09/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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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개발도상국이나 세계 최고 부국의 실천적인 전망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경제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인 공급과 수요의 관계에 대한 확산된 지식경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 명료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다.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경제의 경제적 성장과 위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적어도 19세기 후반의 한계주의 전향 이래로 주류의 경제적 사유는 시장의 작동방식에 결함이 없는 경우 수요와 공급은 서로 조정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결함은 완전경쟁에서의 이탈로 이어진다. 이러한 결함들이 없는 경우에 수요와 공급은 균형에 이를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 과정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 인간의 노동을 포함해서 자원들이 가장 효율적인 용처들에 투입되는 것을 보장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에 따르면 공급과 수요의 각 원천들은 수요와 공급이 상호 조응하게 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기제에 대한 이해와는 관련이 없다. 공급이나 수요의 원천이 무엇이든 간에 (시장 지배력뿐만 아니라 정보를 포함한 어떤 차원에서도) 완전경쟁의 실패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방해하지 않는 한 수요와 공급은 결국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서로 조정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 아래서 우리는 수학적 표현을 이용하면서 수요와 공급을 각기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정량으로 상상한다. 이제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에 대한 수학적 분석과 수요와 공급의 확장이나 축소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구별할 수 있다. 우리는 경제학의 개별적인 분야들, 특히 경제성장 이론과 경기순환 연구나 더 일반적으로 (그런 분과가 존재 한다면) 경제위기 연구에 인과적 탐구를 할애할 수 있다.

나는 공급과 수요에 대한 사유의 또 다른 방식, 즉 포용적 전위주의를 제안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지식경제와 그 미래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을 밑받침하고 있는 일부 가정들을 명료화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견해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까지 희망할 수 없지만, 이러한 견해가 경제사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많은 부분을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측면 중에는 지식경제의 진화와 현재 상태와 관련되는 측면들도 있다.

모든 일반적인 견해와 마찬가지로 내가 개략적으로 제시한 견해도 직접적인 경험적인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견해가 경험적 도전에 난공불락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사실문제에 대한 결론들에서 넓은 주변부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그러한 주변부에서 반증가능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관념들이 있다.

첫 번째 관념은 경제성장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인 돌파구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성장이 지속되기 위해서 경제의 수요측면에서의 진전은 공급측면에서의 상응하는 진전을 만나야만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도 이와 똑같은 관념을 통합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적인 접근은 특정한 시장의 불완전성이 가로막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에서 공급측면의 진전과 수요측면의 진전 간의 일치가 자동적이라고 표상한다.

우리가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에 붙잡혀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하나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모든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공급의 증가가 수요의 증가를 창출하고 수요의 증가가 공급의 증가를 유발한다면 공급과 수요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아야 한다.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지금까지 경제생활에서 보편법칙의 배역에 가장 그럴 듯한 후보자)이 경제적 침체를 충분히 해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혁신들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주류사고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을 수도 있다.

두 번째 관념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확장하는 방법들은 다양하다. 각 방법은 각각의 작동방식과 그 잠재력과 한계와 같은 각기 고유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경제의 수요나 공급측면에서 확장을 지속시키는 이와 같이 특징적인 방식들은 각기 다른 파급 범위, 유효성과 지속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식은 다른 방식보다 더 일천하고 더 단명하다. 어떤 방식들은 신속히 소진되지만 다른 방식들은 자체 보존적인 성격을 더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들은 경제주체들의 역량과 경제적 제도와 관행에 대해 더 변혁적인 효과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양상들을 계층으로 배열할 수 있다. 마치 이러한 확대양상 중에서 하나의 양상이 지닌 잠재력을 소진시키고 나면 다음 양상으로 이행이 보장되는 듯이 하나의 양상에서 그 다음 더 강력한 양상으로의 직접적인 혹은 자동적인 이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공급이나 수요를 증가시키는 하나의 기초에서 계층적으로 우위에 있는 그 다음의 기초로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나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를 불연속적이라고 부른다. 지배적인 관념들과 달리 공급과 수요의 단기적 부침들과 경제성장 및 경제침체의 원인들을 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불연속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중에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위한 이와 같이 다양한 기반들을 개관하고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는 잠재력의 역순으로 그러한 기반들의 순위를 매겨보겠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경제성장 메커니즘의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에 있어서 각각의 기반은 그 이전 단계의 기반보다 전도유망하다.

세 번째 관념은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이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진전과 공급이나 수요의 다른 측면에서의 진전 사이에는 자동적인 일치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수요를 지지하는 데에서 진전으로부터, 즉 이러한 진전을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또 다른 기초로 진전된다는 것(예컨대, 가계부채의 장려를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에서 누진세 및 사회 지출을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으로부터 경제의 공급측면에서 일치하는 진전(예컨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이 없는 공급 확대에서 그러한 혁신을 동반한 공급 확대로의 진전)을 달성할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타율성은 불연속성의 효과를 심화시킨다. 불연속성은 일면적이다. 불연속성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그 다음 더욱 효과적이고 변혁적인 기초로의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타율성은 양면적이다. 타율성은 경제의 한 측면(수요나 공급)에서의 진전이 다른 한 측면에서의 진전을 보증할 수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네 번째 관념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불연속성과 타율성이 경제불안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중단되기 쉬운 근본적인 이유는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것(시장의 결함이 없는 경우에 공급과 수요는 상호조정을 거쳐서 자원과 노동을 가장 효율적인 용처에 배정하는 것을 보장한다)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공급확대와 수요확대 사이의 자동적인 일치의 부재가 경제불안의 제 1의 원인이라면, 경제불안의 제2의 원인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관계가 과부하상태이고 가변적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이 장의 다음 부분에서는 케인스가 매우 강조했던 이 관계의 측면(화폐가 중요하다)을 논평하겠다. 특정한 생산적 활동과 유리된 화폐시장균형들의 유동성은 그러한 균형들이 두려움과 탐욕, 절망과 희망과 같은 충동들의 유순한 도구로 복무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에 따른 이와 같은 화폐비축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가 보여주는 더욱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측면에 대해서 부수적인 사정일 뿐이다.

시장체제의 조직에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이 없는 것처럼 시장체제의 한 측면, 즉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형성에서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은 없다.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상이한 방식들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이완시킬 수 있다. 금융과 실물경제의 연결이 느슨해질수록 또한 실물경제의 거래가 더욱 금융활동의 참된 관심사라기보다는 그 구실이 될수록 그와 같은 금융이 폐해를 야기할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진다.

부유한 국가들에서 현재 확립된 안배들 하에서 생산체계는 대체로 금융을 자체적으로 조달한다. 생산자금은 주로 기업의 재투자용 사내유보이익, 따라서 생산체계 안에서 창출되는 자금에 의존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을 창출하는 것(벤처캐피털 및 유사한 금융형태들의 관심사)은 금융활동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심지어 1차적인 기업공개나 2차적인 기업공개도 금융의 비교적 작은 부분을 나타낸다. 이러한 안배들 아래서 금융은 좋은 하인보다는 나쁜 주인이 될 공산이 크다.

경제불안 혹은 경제위기에 관한 이론은 경제성장 이론의 이면에 불과하다. 경제불안과 경제위기에 대한 이론은 성장의 붕괴가능성을 다룬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시간에 맞게 동적으로 서로 조정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경제성장과 경제불안의 문제를 단기적으로 처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다섯 번째 관념은 만일 우리가 공급과 수요의 확대에 대한 제약들을 극복하는 방식들의 [단계]를 멀리 넘어 가서 이러한 제약들을 폐지하는 더욱 파급력 있고 더욱 지속적인 방식들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러한 방식들이 공급을 증가시키는 데에 사용한 똑같은 수단으로 수요를 확대시키는 일단의 해법들(생산의 자원, 기회 및 역량에 대한 접근의 제도적 확장)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경제생활의 자연적인 상태로 상정하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은 실제로 경제조직의 예외적인 변형들(더 많은 경제주체들에게 생산적 활동의 수단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수요공급의 한계를 깨뜨리는 속성을 가진 변형들)이 가진 속성이다.

여섯 번째 관념은 다섯 번째 관념이 제시한 여건들 중 특히 유력하고 전도유망한 부분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집합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을 확장함으로써 수요공급의 제약을 깨뜨린다. 공급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경제의 가장 생산적인 분야의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증가시킨다. 수요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회고적이고 보상적인 재분배의 수혜자가 아니라 부의 창조자로서 그들이 생산에 기여한 부에 대한 몫을 청구할 지위를 부여한다.

이와 같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라면, 수요와 공급의 확대 잠재력은 특히 크다. 지식경제는 기술혁신을 영구화하는 경향을 띠고 생산과정에서 투입요소의 증가에 대한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을 완화시키거나 역전시키겠다고 약속하는 생산적 활동형태를 허용한다.

헨리 포드는 한때 노동자들이 포드사의 차를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급여를 후하게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물건을 사거나 포드사의 경쟁업체들이 만든 차를 구입하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포드의 발언으로 야기된 문제에 대하여 [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계약상 해결책은 없다. 제도적인 해결책 밖에 없다.

지식경제의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로서 포용적 전위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도적 해결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더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수요공급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들이 불완전경쟁이 가로막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일어난 다고 그릇되게 가정하는 것[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시장경제에 새로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달성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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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21/09/0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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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필자는 이제까지 각종 선거에서 투표를 할 경우 대부분 정의당과 녹색당에 표를 주었던 것 같다. 그것이 거대 양당을 견제하고 우리 사회의 정치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녹색당은 불가능한 것인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 상황에서 필자는 내심 녹색당을 많이 지지하고 싶다. 독일에서는 메르켈 총리 이후 녹색당의 집권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주목받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환경과 기후위기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은 대단히 높다. 그러니 이러한 객관적 조건에 조응해 녹색당의 활동은 당연히 활성화되어야 마땅할 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녹색당은 그 활동이 대단히 미미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취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잘 알고 지내는 선배 한 분은 오랫동안 녹색당을 후원해오셨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선배분께서 녹색당이 완전히 ‘개판’이 되었다고 하셨다. 혹시 잘못 들었나 생각하고 자세히 들어보니, 녹색당 당원들의 온라인 대화에 거의 반려견과 고양이 얘기밖에 없다는 말씀이었다. 결국 선배 분께서는 오랜 후원을 끊으셨다.

과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녹색당 후보가 녹색의 기치 대신 페미니즘을 기치로 들고 나왔던 것도 당의 정체성을 크게 혼란시켰다.

이 심각한 기후위기의 시대에 부디 녹색당이 의미 있는 존재로 활동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한다.

 

정의당, 그 정체성은 무엇일까?

한편, 정의당은 그간 적지 않은 진보적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정체성에 의문부호가 많아지고 ‘집권당 2중대’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심상 정의당’이란 풍자(최근에는 ‘류호정의당’)가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의 비례대표들은 정의당의 정체성과 그리 부합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 이후 비례대표로 당선된 한 후보는 수행비서 해고와 관련해 물의를 빚음으로써 ‘노동’을 중요한 기본 가치로 하는 정의당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만들기도 했다.

2019년 비례대표 선거법 협상에서 거대 양당에 의한 ‘듣도 보도 못한’ 위성정당이 만들어지는 등 눈가리고 아웅하는 왜곡이 극성을 부렸다. 하지만 정의당은 이에 전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더구나 당시 선거법 개정 특위 위원장은 심상정 의원이었다. 사실 그는 비례대표 배분의 산식은 국민은 알 필요가 없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써 엉망진창 결과에 한몫한 셈이었다). 그 뒤 ‘무늬만’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서도 정의당은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쳐다만 보고 있어야 했다.

 

시대정신으로부터 비켜 서있다

그 두 번의 상황에서 정의당은 결국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거대 양당만 비난하면서 막을 내렸다. 특히 ‘위성 정당’과 같은 사안은 사실상 “판을 완전히 깨는 행태”이기 때문에 정의당이라면 마땅히 소속 의원들이 의원직 사퇴 혹은 총선 불참이라는 최후의 강수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자신들의 ‘그 작은’ 기득권조차 끝내 버리지 않는다는 비판과 책임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돌이켜보면, 오늘 정의당의 문제는 자신의 비례대표 구성으로부터 출발되었다. 비례대표 선출 당시부터 그 선발 방식에 문제 제기가 잇달았다. 현재 당 소속 의원 6명 중 남성은 단 한 명에 불과하고, 2030 남성 의원은 없다. 편중성은 부인될 수 없다.

필자는 고 노회찬 의원 생전에 그에 대한 평론 글을 몇 번 썼다. 그가 주최하는 토론회에 토론자로 나서기도 했고, 국회 앞에서 둘이 식사도 했다. 노 의원은 내가 책을 출간했을 때 금방 자신의 SNS에 좋은 책이 나왔다며 알리기도 했다. 노 의원이 뜻밖에 세상을 떠난 날, 필자는 추모 글을 프레시안에 실었다. 그가 없는 정의당은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도 시대정신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센세이셔널한 이슈나 시류에 영합하는 퍼포먼스 위주로 되면서 정작 사회 양극화와 기후위기 문제라는 시대정신과 시대적 과제에서 비켜서 있다.

요즘 들어 정의당에 대한 비판의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 터이다. 무관심 혹은 기대가 없는 것, 이야말로 가장 좋지 못한 상황이다.

최근 정의당은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당원 이외의 시민을 참여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득권 유지의 차원을 넘어 ‘외부 차단’의 의도가 읽혀진다. ‘통진당’ 시기 자신들의 투쟁 대상이던 ‘소수 전위’의 데자뷰일까?

화, 2021/09/0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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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를 늦추거나 줄일 수 있을까? 기후변화는 단순한 자연재해의 증가가 아니다. 기후변화를 인간들의 만들어 낸 공업문명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면 기후변화를 늦추거나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과연 그러한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2021년 7월은 지구표면 온도 역시 뜨겁고 더운 기록의 연속이었다. 특히 유럽은 1880년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후덥지근하고 무더운 온도를 나타내 보였다(https://www.ytn.co.kr/_ln/0134_202108150718517976).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기상이변의 상당한 사례들이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고 일어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예전과 달리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양상은 폭염과 폭우가 나타나는 등 극한기후의 모습을 띠고 있다. 지표면이 가열되면서 산불도 늘어나고 있고 그 피해면적도 더욱 넓어지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오랜 가뭄으로 지하수 고갈과 농작물 작황 피해로 고생하고 있는 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폭우와 홍수 등으로 물난리를 겪고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를 막아보려고 인류는 모든 나라 대표들이 나서서 앞으로 50년 동안 지구온도 1.5~2.0 °C를 낮추자고 약속했다. 지난 8월 발표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6차 보고서(기후물리편)은 최근 기후변화가 광범하며 급속히 가속화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산업화(1850~1900년) 이전보다 섭씨 1.5도 상승 시기가 10년 정도 앞당겨졌다.

<그림> 기후변화의 다양한 영향들 <출처: IPCC 제6차 평가보고서(2021)>

190개국 대표들은 2015년 파리기후협약에 합의하여 지구온난화를 가져오는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목표 달성을 약속했다. 파리협정문에는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2℃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 및 1.5℃까지 제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공동 목표를 명시했다.

그러나 트럼프 미 대통령은 2016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선언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이산화탄소 배출국가이면서도 미국은 경제대국으로써의 자기 의무조차 준수하지 않는 데 앞장섰다. 각국 정부가 제출한 이행계획은 아무런 강제나 페널티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준수하여도 그만, 이행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었다.

2018년 IPCC 제5차 평가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추계했다 : “인간 활동으로 인해 산업화 이전 대비 현재 약 1.0℃의 지구 온난화가 유발됐다. 현재 속도로 온난화가 지속된다면, 2030~2052년 사이에 지구 평균온도 상승 폭은 1.5℃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10년마다 약 0.2℃ 상승하는 꼴이다.”

많은 국가들은 이런 추계를 바탕으로 2050 탄소중립 계획을 수립, 시행하기 시작했다. 한국도 국가 차원의 중장기 계획을 서둘러 수립하고 시행에 돌입했다. 이 IPCC 2018 보고서에서 밝힌 기후 회복적 경로들은 적응과 적응, 지속가능한 발전(Climate-Resilient Pathways : ADAPTATION, MITIGATION, and Sustainable Development)이다. 2050년까지 기후변화 대책을 수립, 시행해 오던 인류 앞에 기후변화 적응과 저감, 지속가능한 발전은 더욱 화급한 정책목표가 된 것이다.

 

기후변화 적응과 저감, 지속가능한 발전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대량 폐기물배출이라는 기존 생활양식을 폐기해야 한다. 이 어려운 과제들을 한꺼번에 수행하기에 인류는 너무 많은 인공물의 세계에 길들여져 있고 쉽게 살아 온 이 편한 길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기후변화 저감을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최소화하거나 감축하기 위한 획기적 전환정책을 도입, 시행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미래세대가 그들의 욕구들(needs)를 충족할 수 있는 기반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세대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을 의미한다. 이 발전 개념 역시 인류의 오랜 경험과 지식,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참여하여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한 상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의식 아래 정초된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국가들은 국제연합의 안내에 따라 국가지속가능발전전략들(National Strategies of Sustainable Development)을 수립, 시행해 오고 있다.

즉 과도한 성장으로 인한 생태적 안정성 저하, 개발중심의 경제성장, 배타적인 커뮤니티의 형성에 따른 사회적 부정의 심화라는 지속불가능한 발전상태에서 생태적 안정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추구하면서 경제발전을 도모한다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표 1> IPCC 제1실무그룸 2013년 및 2021 보고서 요약

<그림> 생태적 안정성 + 사회적 형평성 +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발전 <출처: https://isd.snu.ac.kr/isd/SustainableDevelopment.php>

국제연합은 새천년개발목표들(Millenium Developmnet Goals, 2000-2015) 시행을 종료하면서 다음 15년 계획을 제안했다. 2015년 9월 국제연합 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에서 채택한 것으로써 인류 보편의 문제, 지구환경문제, 경제사회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의제들을 모두 망라하였다. 즉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들(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을 설정, 시행할 것을 각 국가에 제안했다.

<그림 > 17가지 지속가능발전 목표들(SDGs)

1992년 6월, 세계환경개발정상회의에서 발표한 「리우선언」이후 UN은 의제21 실천계획 수립 및 이행평가를 위하여 각 국에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NCSD) 설치를 권고했다. 한국은 환경운동가들로부터 기후악당국가라는 지적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이런 국제적 요구와 주문에 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2000년 9월,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발족시켜 각종 국가환경계획과 지속가능발전전략 모색에 시민사회의 참여를 보장했다. 국가계획 수립에 민간인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상을 높이고 정부 정책의 지속가능성 보장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국가지속가능발전전략연구를 수행하였다.[1]  마침내 정부차원에서 국가지속가능발전전략을 수립, 시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7년 8월에 지속가능발전기본법을 제정하여 2008년부터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이런 국제규범 이행은 근본부터 무너졌다. 녹색성장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애초에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과 4대강사업, 원자력 발전 등을 두루 망라한 기본법 제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반발이 거세게 대두하자 녹색성장 기본법 제정에 그쳤다. 이에 따라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대통령 직속에서 환경부 장관 아래로 그 위상이 떨어졌고, 녹색성장은 지속가능한 발전 그 위에 위치하는 황당한 위상이 세워졌다. 개발도상국에 적용할만한 정책을 세계 유수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국가정책 기조로 못을 꽝꽝 박은 것이었다.

<그림> 녹색성장 : 환경과 경제의 선순환

“지속가능한 발전”은 “환경과 경제, 사회와 문화의 동시 추진과 통합”을 의미한다면 녹색성장은 말 그대로 ‘경제와 환경의 선순환’을 뜻한다.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 정책은 한국 정부가 추구해 온 지속가능한 발전의 이행결함을 자초하면서 엄청난 정책 후퇴를 낳았다. 이 시절 한국에서는 원자력발전을 기후변화 대책의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고 강조되었다. 심지어 원자력발전의 해외 수출을 위해 대통령이 직접 나설 정도였다. 이렇게 한 번 뒤집어진 정책과 제도를 바로 잡으려면 법률 개정과 제도 개혁이 불가피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탄소중립 2050 시나리오를 발표하여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의견과 건의를 수렴한다고 설명했다. 이미 일부 기업에서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Environment and Society, Governance)” 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흐름으로는 기업 운영에 필요한 에너지는 모두 재생에너지 100%를 사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RE100).

이에 비해 녹색세척(green wash), 녹색분식이라고 불리는 악덕 기업행동 역시 지적받고 있다. 겉으로는 환경보호나 녹색 중시라고 하나 따지고 보면 그것들과 무관한 기업행동을 함으로써 빈축을 사고 있는 경우가 등장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 역시 기후변화 저감을 위한 제도적 변화의 하나이다. 그런데 일부 기업들은 이를 이용해 한편으로는 온실가스 배출권을 팔아 이윤을 보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rmPfaPhz63g&t=63s)

모두 지구 생태계의 한계 용량(carrying capacity) 범위 이내에서 우리 모두 숙고해야 할 일들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정부가 발표하고 많은 나라에서 추구하고 있는 “탄소중립”이란 온실가스 배출량과 제거량이 상쇄되어 순배출량이 ‘0’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일명 넷제로 (net-zero) 또는 배출제로라고 부른다. 탄소중립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물리적으로 계속 줄이는 것이 아니라, 배출이 되더라도 그 배출량을 제거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순배출량을 0 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표> 2050 탄소중립 3개 시나리오

* 수송부문 배출량 일부는 차량의 대체연료(e-fuel 등)로 인한 배출량(9.4백만톤)이나, 동 배출량만큼을 대체연료 생산과정에서 온실가스 포집, 상쇄 가정.

**CCUS : CCUS기술은 이산화탄소가 생산되는 근원지에서부터 공기 중으로 방출되는 것을 막고(Carbon Capture) 필요한 곳에서 사용(Utilization)하거나 지하에 저장(Storage)하는 기술로써 국제에너지기구에서는 탄소배출제로를 가능하게 할 유일한 기술로 평가.[2]

한국은 제조업·에너지소비 업종의 비중, 주요국 대비 석탄발전 비중*이 높아 전반적인 구조 전환이 없이는 획기적 감축이 곤란하다. 주요국 석탄발전 비중(‘19, %)을 보면 미국 24%, 일본 32%, 독일 30%, 영국 2%, 프랑스 1%에 비해 한국은 무려 40.4%에 이르고 있다.

<그림> 주요국 제조업·에너지다소비업종 비중(‘19)

한국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교해 볼 때 압도적으로 높은 제조업 비중(28.4%), 에너지 다소비 업중 비중(8.4%)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한국 경제는 이런 높은 제조업 및 에너지 다소비업종 비중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2050탄소중립 목표 달성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엄청난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림> 주요국 GDP 대비 수출 비중

한국의 GDP 대비 수출 비중은 2010-2014년까지 독일보다도 앞선 세계 1위였다. 2019년 현재 한국은 독일에 이어 여전히 2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9년 한국의 GDP대비 수출비중은 32.9%였다.

2050 탄소중립위원회가 제시한 50년 이후 “2050 탄소중립 사회의 모습”(2021)을 보면 신재생 에너지의 대폭 확대, 친환경차 보급, 연료 및 원료 등 생산공정의 스마트화, 이산화탄소 배출 제로 건축, 그린 건축, 메탄가스 발생 최소화, 쓰레기 배출 최소화와 분해 가능한 가소성 물질 이용 등을 내세우고 있다.

<그림 > 2050 탄소중립 사회의 모습

 

[1] 허상수 외 2005 『국가지속가능발전전략연구』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376쪽.

[2]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허상수

목, 2021/09/0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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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을 쓰는 과정에서 영화에 대한 중요한 아이디어와 논의를 해주신 인제대학교 통일학부의 안지영 박사님에게 감사드린다. 이 글은 북한영화전공자인 안지영 박사님과 농민의 직업세습과 영화를 주제로 한 공동논문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영화관련 글에 안지영 박사님의 커멘트를 가져온 부분이 있음을 밝힌다.

최근 수년간 조선영화 제작은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유튜브에 올리는 조선영화들은 전례없이 많다. 빈곤 속의 풍요다. 김정일시대와 달리 김정은 시대에는 영화의 제작편수가 대폭 줄어들어 한 편 한 편이 더없이 귀한 상황에서, 유튜브에만 조선영화 풍년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제작되는 영화는 한 해에 한편이나 예술영화를 만들까말까 한다. 영화제작 편수가 대폭 줄었으니 김정은 정권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인민에게 꼭 전달해야 할 메시지만 영화에 담을 것이다. 이 척박한 문화현실에서 당첨된 그야말로 ‘올해의 영화’다. 여러분도 유튜브를 통해 손쉽게 접근 가능하다. 최근 10년간 북한 김정은시대 포전담당제를 중심으로 한 농업개혁의 흐름을 배경으로 한 두 편의 농민영화를 소개한다. ‘분조의 주인’과 ‘벼꽃’이다. 김정은식 개혁국면이 막 시작하던 2012년도에 “분조의 주인(2012)”이 제작되었고, 개혁이 곤경에 부딪혀 개혁이 방향이 어긋나기 시작한 게 대략 2016년이후이니 2015년에 제작한 벼꽃(2015)은 개혁의 끝자락 쯤에 있다.

이 영화에서 농장을 이끌어가는 간부인 작업반장이나 분조장과 같은 말단 농촌관료들의 일태도는 외부자가 보기에도 상당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농촌관료를 대신할 누가 있을까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달 것인가? 조선의 존망을 지고 가는 식량생산문제를 걸머질 주체가 없다면 개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농민들이나 선동원이 책임을 지고 솔선수범으로 나서 당과 수령이 원하는 과학영농을 이루고 식량증산의 주체로 그려진다. 이게 북한당국의 꿈이자 속마음일 거다. 수많은 간부들보다 한 사람의 농꾼이 귀할 게다. 우리 조선영화 속 세상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사회주의를 향해 달리는 제 2 고난의 행군

김정은이 집권이래 처음으로 행한 대중연설은 2012년 4.15일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탄생 100주년 기념 열병식이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인민들에게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겠다고 선포했다.【1】 이러한 결심은 2012년 6.28 조치와 2014년 5.30 담화를 통해 농업분야에서는 <포전담당책임제>, 공업분야에서는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로 경제개혁의 두 축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2017년 대북제제강화를 필두로 9년이 지난 지금, 북미회담 결렬에 이어, 핵문제, 코로나, 북한관련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그간 분분하게 논의되었던 우리식경제관리방식이나 포전담당책임제,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 등 북한경제개혁에 대한 논의와 기대, 희망섞인 관측과 평론은 사라졌고 지난 4월에는 세포비서 대회에서 제 2의 고난의 행군이 선언되었다. 8월 현재 2000년대 시장화 이후 가장 강력한 봉쇄와 고립의 사회주의 국면이 전개되는 중이다.

현재는 수령과 당, 인민들이 하나로 뭉쳐 다시 천리마 시대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사회주의건설에 총력을 다하자는 식의 전쟁터로 휘몰아쳐가는 새로운 코로나/제재의 봉쇄국면이다. 김정은이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했던 시기는 불과 5년전으로 2012년~ 2015년도에 짧은 개혁기를 경과하였으며, 2017~ 2019년까지는 관리와 시장통제의 국면에 들어선데 이어 2020년부터 엄혹한 코로나 봉쇄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왜 이렇게 개혁은 사라졌을까?

 

포전담당책임제 개혁은 실종되었나?

오늘날 봉쇄와 사회주의 회귀의 국면에 당시 4년간(2012~2015년)의 개혁국면을 다시 한번 복기해보자. 김정은이 내세운 ‘우리식 경제관리의 핵심은 한마디로 하면 현장에 경영권한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박형중, 2013: 2)’【2】 김정은 시기에 가장 큰 갈등 중의 하나가 농업개혁, 즉 분조관리제에서 포전담당책임제를 둘러싼 기득권세력과의 투쟁이었다. 식량배정에서 우선순위를 가진 정권 특권기관 그리고 농촌관료들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농민들에게 생산의욕을 북돋우고자 한 개혁시도는 주춤해졌다. 2012년도에 시작하여 2013년도 약 1년간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면서 가족단위의 분조관리제(포전책임담당제)의 도입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으며, 농민:국가의 3:7제나 분조의 규모를 줄여 가족영농책임제 도입 등 당초 계획했던 원안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결국 농촌관료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형되어갔다. 심지어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높이고자 했던 포전책임담당제가 오히려 부자농민을 위한 제도로 변질되었다는 평들이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자유아시아방송, 2020, 3월 4일 보도). 【3】 “돈 있고 뒷배 있는 농민들에게 농경지가 집중 분여되면서 대부분의 가난한 농민들은 더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필자 역시 직접 농장간부 출신 탈북민과의 면담결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포전담당제 실시를 했다고 하면 뭐 더 잘 살 수 있지 않느냐? 하는데 (농장원은)오히려 더 힘든 거죠. 국가에서 하라는 건 해마다 더 많아지고 그렇다고 해서 비료나 씨앗이나 뭐 살초제를 더 충분히 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그럼 기일 안에…농장에서 비료를 주는데 씨앗도 주는데 다 빠듯하게 줘요. 그러면 잘 사는 집은 또 추가를 해서 넣을 거란 말이죠. 비료랑 또 이만큼 넣을 걸 이 사람들이 이만큼씩 넣으면 당연히 이 사람들(잘사는 집)이 더 크죠. 그런데 못 사는 집들은 주면 준대로만큼 넣어요. 그러면 이삭이 이만해요. 그러면 땅이 4 정보면 예를 들어서 수확물을 석톤 200kg을 바쳐야 된다면 이 집은 그게 안 돼요. 다 까보고 해도 안 돼요. 그러면 사는 집은 그나마 사는데, 못 사는 사람들은 더 못살게 되는 거죠. ” (농장원, 2017년 탈북, 2021년 4월 25일 필자면접)

한 여성 농장원이 전하는 포전담당책임제 이후의 농장의 현실은 한마디로 농촌에서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들간의 격차가 더 커졌으며 간부들의 힘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포전담당책임제 이후 잘사는 집(가구)들은 비료를 농장에서 제공하는 량에 추가로 더 사서 수확고를 올리지만, 못 사는 집(가구)들은 농장에서 주는 것만 넣는 바람에 수확량이 종전보다 줄어들었다. 돈이 많은 가구에 더 많은 땅을 분배하는 지역도 생겨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식량 분배투쟁의 격화

물론 북한당국이 개혁을 통해 양극화라는 결과를 내고자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박형중에 의하면, 북한 당국이 애초에 실시하고자 했던 분조관리제【4】의 개념은 두 가지 극단의 어느 한 지점에 있었다(박형중, 2013: 25). 한 극단은 가족단위 분조를 도입하여 수확물을 국가와 농민이 7: 3으로 나누는 약정하에서 농사의 자율을 분조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는 협동농장의 해체에 준한다. 다른 한 극단은 기존에 존재하는 협동농장 관료체계 간부의 기득권을 최대한 존중하고 농민통제를 손상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분조규모만 축소하여 국가 대 농민의 분할비율을 7대 3으로 나눌 것을 약속한다. 두 개의 청사진 사이에서 분조관리제는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편차를 가지고 시행되었다. 대체로 첫 번째 방향, 즉 협동농장의 해체 형태로 가기보다는 두 번째 방향, 즉 분조규모만 축소하는 형태로 점차 진행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김정은시대에 농업개혁은 분조규모만 축소하는데 그쳤고 그 이상의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결국 기존질서에서 상대적으로 이득을 얻어왔던 중간간부층이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와 분배권 등을 없애는 분조관리제로의 개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간부들의 반대를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포전담당제로의 농업개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고비였으나 김정은정권은 이를 넘어서지 못했던게【5】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 공장이고 농장이고 할 것없이 간부들은 노동자나 농장원 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편이다. 농장의 경우, 농장원 수가 200명이라면 초급당 비서를 비롯한 정치일꾼과 행정간부, 분조장 등만 40~50명에 달할 정도로 간부들의 비중이 컸다(박형중, 2013). 농업개혁을 완수하고 알곡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간부 중 상당수를 줄이고 일하는 노동자의 수를 늘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으나 농촌관료들은 순순히 이를 수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조직체계에서 권리를 행사해온 농장관리위원회나 농촌경영위원회 간부들 모두 분조관리제 도입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고, 애초 농민의 생산의욕을 자극하여 수확량을 증가시키려는 농업개혁의 방향은 시작부터 관료집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6】

요약하자면, 포전책임담당제가 당초 국가가 목표한 개혁을 달성하지 못한 이유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농이나 가족농 중심으로 농업개혁이 이루어질 때 자신들의 직위가 없어질 것을 우려한 농촌관료층의 반대. 둘째, 농민 통제의 어려움이다. 농작물에 대해 개인의 처분권이 늘게 되면 간부들의 권한은 축소된다. 따라서 간부들이 농민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중앙의 지시나 방침들이 더 이상 농민들에게 먹혀들지 않는 사태를 예상할 수 있다. 셋째, 생산물 통제 문제. 농민들이 생산량을 속이고 빼돌리는 현상에 대해 적절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 등. 이같은 세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농업개혁은 2013년 말부터 제동에 걸렸고(박형중, 2013). 그 결과, 식량증산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전국적으로 힘차게 추진해야 할 포전담당책임제는 2014년에 이르면, 현장에 맞추어 진행되는식으로 축소되었다. 2021년 현재 포전담당책임제가 어떤 상황까지 왔는지 그 정확한 실상을 아는 사람은 없다. 지역에 따라 포전담당책임제 추진의 편차가 워낙 크고 실태도 다르기 때문이다.【7】

 

올해의 영화?

위에서 서술한 북한 김정은시대 포전담당제를 중심으로 한 농업개혁의 흐름을 배경지식으로 깔고 김정은시대에 제작된 두 개의 농민영화를 감상해보자. 개혁국면이 막 시작하던 2012년도에 제작한 분조의 주인(2012)과 개혁이 어려움에 부딪혀 개혁이 방향이 어긋나기 시작한 2015년에 제작한 벼꽃(2015)의 작업반장이나 분조장과 같은 말단 농촌관료들의 일태도가 안일하기 그지 없다. 과학영농을 기피하고, 기존의 하던 방식으로만 한다는 등의 비판이 영화에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문제는 대안인데, 기존의 농촌관료를 대체하여 누구를 호명했는지가 관전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하겠다. 김정일시대와 달리 김정은 시대에는 영화의 제작편수가 대폭 줄어들어 한 편 한 편이 더없이 귀한 상황에서 당국에서는 인민을 대상으로 꼭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해에 한편이나 영화를 만들까말까한 척박한 문화현실에서 당첨된 그야말로 ‘올해의 영화’인 셈이다. 여러분도 유튜브를 통해 손쉽게 접근 가능하니 한 번쯤 감상해보자. 우선 2012년에 제작한 ‘분조의 주인’을 살펴보자.

충수염으로 쓰러진 분조장은 자신을 대리할 농장원을 주위를 둘러싼 농장원 중 찾다가 그만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된다.

영상 1. ‘분조의 주인’ 중 충수염으로 쓰러진 분조장과 이를 바라보는 소영. <출처: [조선영화] 분조의 주인, 유튜브 영상>
2012년에 제작한 <분조의 주인>의 제작은 분조장이 과거의 관행에만 매여 형식주의, 허풍주의로 일관하다가, 도시에서 시집온 신참농삿꾼 소영이와 갈등을 빚는 단순한 프레임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평농장원인 소영이 쌀로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분조의 주체로 나서서 무력하고 관행에만 젖었던 분조의 분위기를 혁신하는 이야기가 중심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분조의 주인(2012)’의 줄거리

도시에서 자란 제대군인 출신의 소영(여주인공)은 농촌 작업반 기술원과 결혼을 하여 농장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실 도시 처녀가 농촌에 시집간다는 이런 설정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고 볼 수 있겠으나, 연애결혼 끝에 도시 처녀가 농촌으로 결혼하러 간 사례를 필자도 2021년 올해 면접했으니 전혀 없는 일은 아니다. 기술원인 남편은 아리따운 아내가 농사짓기가 어려우리라 생각하여 분조장에게 부인을 특별히 배려해줄 것을 부탁(?)하고 이에 분조장은 호응하여 퇴비 만들기 목표에서 미달한 소영을 2톤의 목표를 완료한 것으로 배려한다. 소영은 사업총화에서 거짓을 했다는 죄책감에 밤늦게까지 일을 한다. 나아가 니탄을 퇴비로 사용하여 후민산 액체비료 원액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등 당과 수령의 뜻을 받들어 식량증산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러나, 남편과 분조장은 이런 소영의 행동을 모르는 것도 아는 척 하는 사람,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 앉을 자리 설 자리 못 가리는 사람으로 비난하며 소영과 분조장은 갈수록 사사건건 어긋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분조장은 아침 회의 중 갑자기 급성중수염(복막염)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 가게 된다. 그 와중에서도 분조장은 분조의 일을 걱정하여 대리 분조장 직책을 뜻밖에도 소영에게 맡긴다.분조장이 병원에 있는 동안 소영은 군농기계사업소의 도움으로 무동력삭도를 개발하고 이를 이용하여 후민산 액체 비료원액을 만드는데 쓸 수 있는 니탄을 쉽게 옮겨온다. 이것을 본 분조장은 새로운 기술개발에 게을렀던 자신을 반성하며 소영과 손잡고 일하게 된다.

 

분조의 주인(2012)’의 주제의식

낡은 방식을 고수하는 구세대 농촌관료(분조장)을 비판하고 신세대 청년 농장원이 과학영농으로 식량증산의 주체이자 분조의 주인이 될 것을 촉구하는 세대교체 요구가 담겨 있다.

북한당국이 2012년에 ‘분조의 주인’을 제작했던 의도는 무엇일까? 부정인물과 긍정인물을 통해 의도의 일단을 추적해볼 수 있다. 농장에 소영이라는 제대군인 출신의 도시 처녀로 기술원과 결혼하여 농장에 들어오게 된다. 그녀는 농사는 처음이지만, 그녀는 열정적으로 식량증산을 위해 후미산 비료를 만들고자 하며, 이것은 수령과 당의 숙원인 과학영농사업의 실현이다. 소영은 긍정인물인 반면에,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농장을 이끌어온 강 삼 분조장은 부정인물로서 대립각에 서 있다. 강삼 분조장은 나름대로 성실한 인물이지만 기존의 방식만을 고집하다 시대와 당의 요구를 외면하는 부정적 인물이다. 반면에, 도시 처녀로 갓 농삿꾼이 된 청년 소영은 대극점에 선 긍정인물로 과학영농을 통해 당과 수령의 명령을 실현하고자 한다. 긍정인물인 소영은 부정인물인 분조장과 대립하다가 결국 분조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비료의 원료인 니탄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나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함으로서 즉 과학영농을 통해 비료증산을 성공시키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강 삼은 분조의 주인이란 농사경험이 아니라 당과 수령의 명령을 받드는데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현실세계인 농업개혁의 현장에서 기득권을 가진 농촌관료들과 평농장원 간의 갈등은 대단히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갈등은 당과 수령의 명령에 따른다는 사상기조하에 쉽게 봉합된다. 두 사람의 갈등과 대립은 분조장의 반성과 분조장 충수염으로 쓰러진 상태에서 주위 농장원들을 둘러보던 중 분조장은 이제까지 나서기 좋아한다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소영을 자신을 대리하는 분조장으로 세우는 사건을 통해 극적 계기를 맞이한다. 하필 왜 분조장이 병원에 실려가면서 하필이면 소영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소영이 당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나선다는 것을 강삼 분조장 자신이 알고 인정했기 때문이고, 영화 마무리에서 강삼 분조장의 입을 빌어 “농사경험이 많다고 해서 주인이 아니라 당정책을 심장으로 받아들여 관철하는 사람이야말로 분조의 주인”이라고 선언을 통해 분조의 주인을 정의한다.

아마 현실에서는 알곡 수확물의 분배와 경작권을 중심으로 날카롭게 대립되었던 간부와 농민간의 갈등은 이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고 단순하게 봉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포전책임담당제를 계기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평농장원들에 대처하여 간부그룹의 기득권이 개혁의 파고를 이기고 이들을 압도하고 제압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갓 들어온 새댁 농꾼에게 밀려 분조장의 위신은 추락하고 반성하는 장면을 통해, 분조장으로 대표되는 농촌관료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준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농업개혁을 추진해왔던 당국의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농장운영의 기존 질서를 비판하되, 수령과 당의 명령을 받들어 식량증산의 지상과제를 농민에게 주고 쌀로 사회주의를 지킬 것을 강하게 요구하며, 농민들을 사상을 통해 통제하고자 하는 당국의 의지는 영화를 통해 전달된다.

<계속>

 

【1】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15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행한 대중 연설이다. 이 대목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인민 만난 시련을 이겨내며 당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2】 박형중, 2013. <6.28 방침> 1년의 내용과 경과. 통일연구원 온라인 시리즈. 2p.

【3】 rfa, 2020, 3,4, 북 포전담당제, 부자 농민들을 위한 제도로 변질, “당에서는 분조관리제를 융통성 있게 실시해 알곡수확량을 늘이도록 농장간부들이 자율적으로 포전담당책임제를 실행토록 허용했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면서 “돈 있고 뒷배 있는 농민들에게 농경지가 집중 분여되면서 대부분의 가난한 농민들은 더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https://www.rfa.org/korean/in_focus/food_international_org/agriculturenk-03042020085343.html

【4】 분조관리제, 협동농장의 기층조직인 분조 단위에 기초한 협동농장의 내부관리 운영형태.분조관리제는 김일성(金日成)이 1965년 5월 강원도 회양군 포천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면서 처음으로 제시하였으며, 1966년부터 북한의 각 협동농장에서 실시되고 있다.북한은 분조관리제가 “농민들을 집단경리의 관리운영에 적극 참여시키는 훌륭한 생산조직 형태”라고 설명하면서 분조관리제를 실시하는 이유에 대해 “농업생산의 특성을 감안해 농민들의 자각성과 책임성을 높이고, 농업에 대한 국가의 기업적 지도를 철저히 하며, 사회주의 분배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분조란 일정한 조직체에서 기층조직이나 기본조직의 아래에 조직하는 작은 단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통상 협동농장에서 작업반 밑에 조직되어 있는 하부조직을 말한다.분조관리제는 협동농장의 각 분조(10∼25명)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부침땅과 농기구, 부림소, 생산도구 등을 할당하고 이들에게 국가 생산계획에 준하여 수확고 계획과 노력일 투하계획을 설정해 준 다음 계획 수행 정도에 따라 노력일수를 평가해 주고, 이에 근거하여 분배를 실시하는 방법으로 운영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정정현(2018). 북한의 협동농장 생산체제에 있어 분조관리제의 변화와 농업협력방안에 관한 연구. 협동조합경영연구 48: 130

【6】 한 중국 대북전문가는 김정은정권이 실시하는 분조관리제를 통한 농업개혁에 대해 협동농장 경영위원회와 관리위원회 전임간부들은 개혁을 방해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자리의 축소를 우려하는 반면, 농장원들은 전임간부들이 줄지 않으면 자신들의 실제 분배 몫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7】 일부 농장들의 소식이 내부 소식통을 통해 흘러나오거나 농장에서 일하던 탈북민들을 통해 짐작해보는 수준으로, 아직 김정은시대의 농업개혁의 실태와 수준을 전국규모에서 명확하게 규명한 연구논문은 부재한 실정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김화순

화, 2021/09/1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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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을 쓰는 과정에서 영화에 대한 중요한 아이디어와 논의를 해주신 인제대학교 통일학부의 안지영 박사님에게 감사드린다. 이 글은 북한영화전공자인 안지영 박사님과 농민의 직업세습과 영화를 주제로 한 공동논문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영화관련 글에 안지영 박사님의 커멘트를 가져온 부분이 있음을 밝힌다.


벼꽃(2015)의 주제의식: 형식주의에 빠진 간부층을 비판하고 열성당원이 해야 할 일을 제시

작업반장으로 대표되는 낡은 농촌관료층의 농장관리행태를 비판하고, 선동원의 벼꽃 리더십을 중심으로 새로이 농장원들이 식량증산을 위해 하나로 뭉쳐가는 과정을 제시

2012년에 6.28 조치로 농업개혁의 모양을 구체화하기 시작였지만 개혁의 진전은 더뎠다. 2013년에는 외부관측자들에게는 거의 농업개혁이 중단되는게 아닌가 할 정도인 상황이었으나, 2021년 현재 안에서 흘러 나오는 이야기로는 관료들과의 타협 속에서 기득권은 인정되면서 농장은 계속 포전담당책임제가 형태를 달리하면서 실시되는 중인 것으로 보인다.

<영상 2> 벼꽃의 타이틀 롤. <출처: 유튜브 영상>

북한에서 개혁은 2012~2015년에 추진되었는데, 2015년에 제작된 유일한 예술영화이다.【8】 당연히 이 시나리오는 많은 영화 시나리오 중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에 대해 당의 수많은 검토를 거쳐 선정되었을 것이다. 농장에는 청년 동팔, 미경이, 비료를 연구하여 인정받고자 하는 광민이, 시장적인 마인드를 지닌 선화 등 각자의 욕망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이 농장공동체를 구성한다. 선동원 정임은 농사에 의욕을 잃은 농장원들과 신세대들의 이들의 다양한 욕구를 모아 쌀로 사회주의를 지키자는 당의 목표로 이끌어가는 변화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벼꽃(2015)의 인물과 줄거리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선동원 정임이다. 마치 붉은 선동원 리신자를 모델로 삼은 듯한 정임은 전국분조평가에서 제 1작업반을 우수분조로 이끈 열성적인 선동원이다. 그러나, 명예를 버리고 제일 뒤떨어지는 제3작업반의 선동원으로 스스로 배치를 원한다. 제3작업반에는 농장일보다 개인의 실리를 앞세워 과수생산에만 열을 올리는 비사회주의적인 선화, 장기간의 식물성 농약개발연구에도 별 성과가 없어 엉터리박사라 무시당하는 광민, 축구에 푹 빠져 작업반 꼴찌를 하는 청년 동팔이가 속해 있다. 정임은 이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집단노동에 충성을 다하고 쌀로 사회주의를 지키고 분조장과 분조원의 임무를 다하자고 선동하는 정임과 대립되는 인물은 기존 농업운영체계의 간부들과 선화와 같은 부정인물들이다. 특히 작업반장은 분조의 집단노동을 빠지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일을 하는 선화의 뒷배를 봐주는 역할을 하는 부정적 인물이다. 둘 사이에는 모종의 돈거래가 존재한다. 분조장은 이도 저도 아닌 무력한 존재이다. 당비서는 농사짓는 아바이로 이 모든 것을 알지만 묵묵히 지켜보는 인물로 그려진다.

선동원 정임은 혼자 동분서주하면서 농장원들의 생산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헌신을 통해 농장원들의 마음을 사게 된다. 정임은 선화의 다친 아들에게 급히 수혈을 해주고 동팔에게는 축구와 관련한 책을 구해주고 그의 뛰어난 축구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마련하여 미경과의 연인관계를 인정받도록 미경의 아버지 작업반장을 설득한다. 비료를 연구하느라 가짜 박사라는 비웃음을 사는 광민에게도 연구에 적합한 실험환경을 마련해주어 비료발명을 성공시킨다. 정임은 그 소식을 별거 중이던 광민의 아내에게 전해 아내는 딸과 함께 집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해체위기에 내몰렸던 광민의 가정도 다시 회복된다. 농장은 이같은 농장원 한명 한명에 대한 돌봄과 노력을 다하는 정임의 헌신을 밑걸음으로 해서 분조원들은 다시 하나가 되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을 통해 변화해간다. 마침내 영화는 제 3작업반은 우수분조로 표창장을 받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기존 농장운영 방식과 기득권을 상징하던 작업반장조차 이제는 정임이 벼꽃과 같은 사람이라며 칭찬한다. 모든 사람들의 축복과 함께 동팔과 미경이 결혼하며 이를 통해 젊은 처녀 총각이 농사에 마음을 정착한다.

 

벼꽃 리더십: 천리마 시대 붉은 선동원【9】의 후신

일견 벼꽃의 선동원 정임은 천리마 시대에 리현리의 천리마영웅인 리신자의 분신이 소환한 것으로 보인다. 천리마시대에 리현리에서 활동했던 리신자는 붉은 선동원이라는 영화와 연극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업적으로 갓 22살의 나이에 관리위원장으로까지 고속승진했고, 평양 농업국 경영위원장까지 올라갔다. 2021년 현재 북한 당국은 그를 살아있는 신화로 소환하고 있다. 반면 2021년에 새로 소환되는 선동원은 모든 농장원들을 섬기고 그들을 알아주되 자신은 죽이는 벼꽃같은 존재로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천리마정신은 집단주의를 향한 인간개조운동이자 생산량 증대운동이었다. 전체를 위한 하나가 어떻게 하나의 씨앗으로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전체를 위할 수 있고 그러한 노력이 전체 인민들의 정신을 각성시키고 당시 대중을 격동시켜 생산의 열기에 나서게 한 대중운동이었다.

그러나, 1960~70년대의 천리마운동시기가 당시 감동적이었다고 할지라도 50년 전의 영광을 다시 불러낸다고 해서 과연 대중들의 심장을 뜨겁게 뛰게 할 수 있을까? 주인공 정임은 천리마 시대의 붉은 선동원을 소환한 캐릭터로 유명한 공훈 배우 윤수경이 주역인 선동원을 연기하였다. 북한당국의 속내는 두 가지로 추정된다. 먼저, 농업개혁이 농촌관료와 농장원, 그 외 관련자들에 의해 가능한 부드러운 방식으로 원만하게 진행되길 바랐을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벼꽃 이미지를 농촌사회의 다양한 이해당사자 간 갈등을 완화하는 온건하고 통합적인 리더십으로 내세운 것이다.

<영상 3> <분조장의 임무>카드를 분조장에게 전하는 선동원 정임. <출처: 유튜브 영상 “벼꽃”>

그러나, 2015년 당시 격동기 농업개혁기 농장사회에서 들끓는 농촌공동체를 구심이 되어 끌어가는 리더십으로는 무기력해 보였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은 자신의 이익을 창출해가고 작업반장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다른 농장원들의 질시와 선망을 받는 선화라는 인물이다.

<영상 4> 붉은 선동원 리신자를 형상화한 예술영화. <출처: 조선중앙TV 특집 천리마시대의 녀성영웅들- 붉은 선동원 리신자 유튜브 영상>【10】

<영상 5> 영화 벼꽃: 비닐하우스 딸기소출을 계산하는데 골몰한 농장원 선화. <출처: 영화 ‘벼꽃’의 선화, 유튜브>

“뭐니뭐니 해도 지금 계절엔 딸기가 확실히 나아!” 주택의 온실에서 수확한 딸기가 얼마나 소득이 될지를 소형계산기를 두드리면서 계산에 골몰한 모습을 담았다. 김소영(2019)에 의하면 농장원들의 개인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비닐하우스 딸기를 도시의 상층들에게 공급 된다.【11】

농장원 선화는 집단농사에는 슬슬 빠지면서 자신의 텃밭에서 재배하는 딸기에 더 열을 올힌다. 작업반장은 이같은 선화의 뒤를 봐주고 교류하는 관계이다. 선화는 농장원이지만 자신의 주택 텃밭에 온실을 설치하여 딸기와 수박을 재배해 소득을 올리는 일을 한다. 선화가 재배하는 딸기는 그림과 같은 경로를 거쳐 도시 상층에게 공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영화에서 선화는 시장화와 개인주의에 물든 농촌의 새로운 계층을 대변하며, 작업반장이 선화가 집단노력 동원에 빠지는 것을 노골적으로 봐주는 장면은 농촌관료와 농촌 시장행위자들의 간의 모종의 거래가 있음을 암시한다. 북한영화의 체제선전 속성상 이런 비사회주의 행위장면을 담아냈다는 점, 영화에서 집단에서 벗어난 개인주의 행위에 대해 어떤 인과응보 처리없이 지나친다는 점도 의외의 지점으로 관전 포인트이다. 동팔 등의 다른 농장원들은 선화를 뒤에서 비난하면서도 마치 그녀를 선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처럼 영화는 선화라는 농촌 시장화를 대변하는 인물에 대해 시종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연애와 축구에만 열을 올리고 농사일은 슬슬 빠지는 신세대 전형적 인물인 동팔은 연모하던 처녀 미경과 결혼에 성공하면서 농사일에 마음을 주는 결말로 끝난다.

 

분배순위에서 밀린 농민들의 절박한 식량사정은 배제

영화 벼꽃(2015)은 개인 농사를 지어 시장에 파는 선화나 나 자유주의 분자 동팔과 같은 현실적인 인물을 담아내는 등 현실에 근접하려는 여러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영화가 과거에 인민대중들에게 가졌던 호소력을 잃어버렸다. 이는 시장화 현실은 물론 김정은 정권에서 시도한 개혁이나 농장의 현실을 영화가 전혀 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에서 시도한 개혁의 속내나 군량미로 대부분의 식량을 빼앗기고 굶주리는 농민들의 절박한 현실은 철저히 배제된다. 과거 구시대 천리마 노력영웅들은 언제나 앞장서 놀라운 생산능력은 물론, 분조원 개개인의 욕구나 형편을 마치 형제처럼 돌보는 따스한 폭넓은 인품의 소유자들이었다. 정임의 벼꽃 리더십은 형태 면에서는 이런 천리마노력영웅들의 행태와 유사하다. 그러나 왜 오늘날은 호소력을 얻지 못하는가?

이는 시대적 배경 변화가 영화에서 도려내고 천리마정신만 강조되는데 그 이유가 있다. 2010년 이후 시장화와 계층의 분화가 진행되면서 시장화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행위자들이 등장하고 농촌관료층들이 기득권층으로 고착화되었다. 무엇보다 고난의 행군 이래 농촌의 농민들은 군대나 특수기관 등의 군량미 우선원칙에 밀려 농민들은 분배순위에서 ‘군-> 기업소-> 농민’의 순위를 차지하게 되었고(그림 2 참조), 농민의 희생에 기초한 분배구조의 문제로 생산의욕을 상실하였다.

<그림 1> 농산물 수확후 농산물 처리흐름도

이같이 북한 농민들의 억울한 현실이나 농가 가계는 외면한 채 수령님의 뜻만 주장하는한, 영화 속 선동원 정임이 농장원에게 보여주는 헌신과 보살핌, 진정성의 리더십은 무기력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능력과 인품으로 대중을 감화하고자 하는 희생적 벼꽃 리더십만으로는 농촌사회나 농민들의 근본적인 생존문제 해결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국가의 일방적 메시지 전달과 길잃은 조선영화의 향방

과거에는 영화에 대해 안목이 높고 열정적이었던 김정일에 힘입어 북한사회가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영화에서 일부나마 드러내기도 하였다. “줄기는 뿌리에서 자란다”. “한 여학생의 일기” 등에서는 인민대중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최고권력자의 비호가 사라진 현재, 영화는 좀더 조심스러워졌다. 분조의 주인이나 벼꽃에서 몇몇 농장간부들, 즉 분조장이나 작업반장 등과 같은 말단간부의 무기력한 태도를 온건하게 비판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모든 일을 수령님 뜻에 따라 하는 영화의 문법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필자가 면담한 결과에 의하면 포전담당책임제이후 농민의 식량문제는 오히려 절실해졌다.【12】 분배의 순위에서 농민에게 정권기관이나 군량미 등이 분배순위에서 우선되고 농민 자신의 분배는 하위로 밀리기 때문인데 그 문제는 다음에 다루고자 한다.

농민 자신의 절실한 고민 예를 들어 ‘농민들이 어떻게 먹고 사느냐?’의 질문은 여전히 영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됨은 물론, 개혁시기 포전담당제를 둘러싼 갈등이나 현실의 구조적 문제는 은폐된다.

기층 노동자인 농장원의 식량문제는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으며, 분배의 정의는 세워지지 않는다. 농촌사회를 어떻게 이끌어나갈지는 여전히 막막하다. 지역별 포전담당책임제의 적용이라는 미명 하에 농촌관료들의 힘은 여전히 견고하며 이들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속화된다. 포전담당책임제 하에서 이제 비료와 영농자금, 노력을 댈 수 있는 부유한 가구는 더 많은 토지를 받아 더 많은 수확을 얻게 된 반면에, 가난한 이들은 먹을 식량도 없는 현실에서 절망한다. 이러한 와중에서 수확물 분배의 권한을 대행하는 작업반장 등의 농촌관료들과 이들과 유착된 농장원들의 권력은 더 커진다. 포전담당책임제가 농촌 양극화의 문을 연 것이다.

한 평양의 명문대학 출신 청년은 과거 대중들의 마음을 샀고 감동을 주었던 북한영화가 이제는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13】 조선영화와 현실간의 간극은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그러기에 기층대중들은 영화에 갈수록 무관심해지고 있다. 농민이 ‘식량의 주인’으로 인정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분조의 주인’ 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본령은 체제 선전이 아니라 현실에 토대를 둘 때 살아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해주고 있다.

 

(예술영화) 분조의 주인(2012)

평양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제작진/연출, 공훈예술가 전종팔 ; 촬영, 공훈예술가 류승철 ; 미술, 최영식 ; 작곡, 전봉덕 ; 연주, 평양영화음악록음소 ; 후원, 평양시 순안구역 택암협동농장

연주자와 배역진/김은향(소영 역), 한용팔(강삼 역), 리성광(문일 역), 리웅관(기사장 역)

 

(예술영화) 벼꽃(2015)

정임-공훈배우 윤수경, 선화(중학교 동창, 딱친구)-김경애, 광민(초순아버지)-김성철, 반장-한성훈, 동팔-김룡만, 초순어머니(미용사)-박윤

영화문학-김송림, 김서휘, 연출- 선우훈

책임연출-백현구, 촬영-심영학, 정복남, 미술-김학철, 작곡-허준모,

1부 연출-윤창수, 1부 촬영-권형철, 분장-변애경, 리향희, 편집-최옥별

후원-황해남도 신천군인민위원회

<끝>

 

【8】 이영애. “김정은 집권이후 예술영화에 나타난 갈등에 관한 연구: 2015년 발표된 벼꽃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동북아논총 23(4). 2018.12.

【9】 붉은 선동원, 북한에서 ‘천리마 시기’를 배경으로 협동농장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주는 영화이다.962년 조백령의 영화문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민청원 선동원 선자를 주인공으로 천리마 작업반과 농업혁명화를 이야기한다. 민청원 선동원인 선자는 남강을 사이에 둔 이웃 청룡리는 매년 풍년을 맞는데 비해 자기 마을은 사람들이 땅만 탓하면서 패배감에 젖어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6.25전쟁 당시 가족을 모두 잃고 장사를 해 생계를 유지하던 복선은 농사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여 자기 포전을 돌보지 않고, 영애와의 결혼 문제로 선자를 오해한 관필 역시 평양에 가 공장에 취직할 궁리만 한다. 관필의 아버지 진오는 원래 농사꾼이지만 새로운 방식의 협동 농사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공명심 때문에 나선다는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면서도 선자는 복선, 관필, 진오를 작업반의 일원으로 만들어 결국 청룡리 만큼 잘 사는 농촌마을로 만든다. ‘천리마 시기’ 농촌에서 협동농장을 만들며 사람들 사이에 생긴 갈등을 보여주며 청산리 농법을 보여준 영화로 평가받는다. 동명의 연극으로도 제작되었다. 1961년 국립연극단이 제작한 연극은 인민상계관작품상을 받았다. 2006년에 영화배우 김윤홍이 각색하여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10】 지난 2018년 11월에는 조선중앙tv에서는 그 손녀가 농촌에 선동원으로 들어가 리신자의 뒤를 계승하여 활동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11】김소영, “북한 농업부문의 시장화:협동농장과 ‘장마당’을 중심으로”, KDI북한 경제리뷰 2019.10.p. 61.

【12】 “김일성 때 같으면 그래도 암행어사 식으로 현실적으로 농장에 내려와서 37제로 70%는 농민이 먹고 30%는 국가에 바쳐라. 지금은 아예 반대로 된 거잖아요. 말이 37제지 어떤 사람들은 100% 다 바쳐도 수매곡이 안 돼요. 이런 식으로 갔다가는… 제가 살고 있는 그 농장 사람들은 몇 년도 못 버틸 것 같아요, 진짜. 획기적인 게 없이 그런 상태로 그냥 유지가 된다면 진짜 막 몇 년을 못 넘길 것 같아요.” 2021.4.25.일 필자면담, 2017년 탈북 농장원.

【13】 필자면담, 2021년 6월 16일, 2019년 탈북.

 

김화순

화, 2021/09/1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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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개혁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민중이므로 개혁을 지체시키고 있는 기본 원인은 외적인 객관적 조건보다는 민중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개혁을 성과적으로 추진하려면 그 무엇보다 민중이 어떤 이유 때문에 개혁에 소극적인가 혹은 개혁에 반대하는가를 알아야 하고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민중이 개혁의 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밝히고 기본소득이 그것을 없애는데 기여함으로써 개혁을 뒷받침한다는 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정치적 무관심과 기본소득

민중을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고통이다. <풍요중독사회>를 비롯한 저서들을 통해서 줄기차게 강조해왔듯이 한국인들은 심각한 수준의 생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쉽게 말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생존 불안은 돈과 관련된 근심걱정을 끊임없이 유발하고 그 결과 돈에 대한 병적인 욕망을 강제한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위협하는 생존 불안은 그 자체로서 끔찍한 고통이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배고픔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아름다운 풍경에 눈길을 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생존 불안이라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사회개혁, 더 나은 미래 등에 관심을 갖기 힘들다.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한국 젊은이들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고 절규하며 취직준비에만 골몰하고 자그마한 돈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소위 영끌투자를 하는 반면 정치에는 무관심하다. 이들에게 ‘사회 개혁’이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심각한 생존 불안은 한국인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강요한다. 생존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 고통스러운 사람은 정치가 어찌 되든, 나라가 어찌 되든, 지구촌이 어찌 되든 간에 일단은 자기부터 살려고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생존 불안과 민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비례관계에 있다. 민중은 기본소득 – 최소한 최저생계비를 상회하는 수준의 기본소득 – 을 통해 심각한 생존 불안에서 해방되면 자연히 사회개혁, 더 나은 미래에 대해 눈길을 돌리게 될 것이다. 즉 생존 불안을 크게 줄여주는 기본소득은 민중이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정치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고립과 무저항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이 명제를 의심하게 만든다. 1대 99의 사회라는 말이 웅변하듯,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심각한 불평등 사회 속에서 여전히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민중의 저항은 과거에 비해 약화되었다. 왜 민중은 저항하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거의 개인 단위로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어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는 학교 공동체, 직장 공동체, 마을 공동체 등 각종 공동체가 존재했다.

민중이 공동체, 집단으로 묶여서 살아가는 경우에는 억압과 착취를 받으면 반드시 저항을 한다 – 그 시점이 언제일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 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농촌마을 사람들이 공동체로 묶여서 살아간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지주가 마을 사람들 중에서 일부를 폭행하거나 가혹하게 착취한다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여 분노할 것이다. 그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마을 사람들은 농민봉기에 떨쳐나설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마을 사람들이 개인 단위로 고립되어 살아가고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면 어떨까? 지주가 마을 사람들 중에서 일부를 폭행하거나 가혹하게 착취하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그 장면을 보면서 더 겁을 먹고 더 무력해질 수도 있다. 물론 폭행과 착취를 당한 당사자들은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노는 개인적 분노에 그칠 뿐 마을 사람들 모두의 분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분노감정이 건강하게 해소되거나 치유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노감정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우울증을 앓게 될 것이고 그것이 외부로 향하게 되면 타인을 학대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다’는 명제에는 전제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전제조건은 민중이 흩어져서가 아니라 공동체로 묶여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온갖 학대, 갑질, 성희롱 등에 시달리는 데도 저항을 잘 하지 못하고 개혁에 미온적인 것은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가 전멸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개인 단위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민중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 정신병에 걸리거나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게 될 뿐 저항을 하지 못하며 개혁의 주체가 될 수도 없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개혁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민중이 하나로 단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와 기본소득

기본소득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을 단합시키고 공동체를 복원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한국인들을 공동의 이해관계로 묶음으로써 민중적 단결과 공동체 복원을 촉진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단결하려면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발견하기가 어렵고 많은 경우에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민주노총이 개혁적인 부동산정책을 주장하기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 중에 주택보유자도 있고 무주택자도 있어서다.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주택보유자와 집값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무주택자를 하나로 묶기는 힘들다. 물론 한국인들은 근본적인 사회대개혁이라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인들의 의식 수준은 그것을 당면한 자기 문제로 받아들일 정도가 아니므로 근본적인 사회대개혁은 현실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역할을 하기 힘들다. 반면에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제공할 수 있는 기본소득은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이웃과 사회 나아가 기본소득을 추진하거나 실시하는 정부에 대한 한국인들의 우호적 태도와 친사회적 심리를 강화할 것이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웃과 사회가 자기한테 피해를 주면 주지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웃을 경쟁대상으로 간주하여 경계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며 사회에 등을 돌린 채 살아간다. 한국인들은 정부에게 뜯기기만 할뿐 받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금저항 심리가 강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심부터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장차 어떤 정부가 집권하더라도 한국은 미래로 나아가기 힘들다. 지금까지 이웃, 사회, 국가는 생존 불안으로 신음하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외면해왔다. 즉 한국인들은 이웃, 사회, 국가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보호해주는 경험, 위기에 빠진 자신을 도와주는 경험을 거의 해보지 못했다. 이런 조건에서 기본소득은 이웃, 사회, 국가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활동한다는 믿음을 갖게 해줌으로써 이웃, 사회,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능하게 해주고 친사회적인 심리를 강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적 단결과 공동체 복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의식개혁과 기본소득

반복적으로 강조하건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개혁의 성패는 민중적 단결과 공동체의 복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립된 개인의 처지에서 벗어나 공동체로 묶여야만 개인들은 비로소 개인중심적 사고가 아닌 집단중심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고,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다. 한국인들이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면 나의 고통이 곧 이웃의 고통이자 세상의 고통임을 깨닫게 되고 나의 행복만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바라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촉진하는 민중적 공동체의 복원은 우선 의식개혁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개인으로 고립되어 살아왔기에 생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도생의 생존전략에 기초해 각개약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각자도생이 아닌 다른 방법, 집단적 힘으로 사회를 개혁함으로써 생존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즉 기본소득은 한국인들에게 ‘이웃과 미친 듯이 경쟁하고 싸워야만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서로 단결하고 협력하는 방식으로도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겠구나’라는 통찰과 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각개약진이 아닌 모두가 힘을 합쳐 세상을 바꾸는 방식이 있으며 그것만이 살길임을 깨닫게 해주는 의식혁명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 기본소득의 실시는 한국인들의 의식개혁을 촉진함으로써 개혁의 분위기를 크게 강화할 것이다.

기본소득이 촉진하는 민중적 공동체의 복원은 또한 개혁에 대한 민중의 자신감을 강화할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 사회가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사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기보다는 각자도생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어서다. 단결된 집단의 힘은 무한대이지만 고립된 개인은 무력하다. 개인의 힘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개인의 힘만으로는 사회를 개혁할 수 없다. 개인이 최대의 능력을 발휘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경쟁에서 승리해 떼돈을 벌거나 출세하는 것뿐이다. 고립되어 살아가는 개인은 무력감으로 인해 사회 개혁에 대해서는 꿈조차 꾸기 힘들다. 따라서 고립된 개인은 개혁의 청사진이 아무리 멋져도 그것을 냉소적으로 대한다. 이런 조건에서 기본소득은 개개인의 생존 불안을 없애고 공동체 복원을 촉진하여 한국인들을 무력감의 깊은 늪에서 구출해냄으로써 개혁을 힘차게 떠밀어나갈 수 있다. 고립된 개인들이 공동체로 묶이면 묶일수록 민중의 자신감은 백배해질 것이고 개혁에는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국민통합과 기본소득

오늘날 한국인들 사이의 관계는 유사 이래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악화되어 있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 영역에서 한국이 OECD 회원국 중에서 꼴찌를 차지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최악이라는 것은 특정한 사회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개혁과제에 나머지 사회집단이 박수를 쳐주기보다는 배 아파하거나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타깝지만 한국인들은 서로에게 그다지 너그럽지 않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시기와 질투가 심하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특정한 집단에게만 이익이 되는 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찬성률이 낮은 편이다. 예를 들면 노동자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은 사실 자영업자들에게도 이익 – 노동자들의 수입이 올라가면 소비를 많이 할 테니까 – 임에도 그들은 그 제도를 반대한다. 청년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은 사실 그들의 아버지뻘인 중장년층에게도 이익임에도 그들은 그 제도를 반대한다. 이런 식으로 악화된 인간관계는 택시 기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개혁과제를 버스 기사들은 싫어하고 노인세대에게 도움이 되는 개혁과제를 청년세대는 반대하게 만들 수 있다.

민중이 다종다양한 집단으로 분열되어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공적인 개혁의 추진은 불가능하다. 사회가 분열되면 국가적 개혁과제를 제기하기도 힘들고 추진하기는 더더욱 힘들어진다. 특히 어떤 개혁과제가 특정한 사회집단의 생존 불안을 자극할 경우 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취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과감한 부동산 개혁, 토지개혁이 일부 집단의 생존 불안을 건드린다면 그들은 결사반대할 것이다. 최소한 생존 불안에서는 해방되어야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설사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이 전체 사회에 이익이 된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고질적인 사회 분열과 갈등을 완화하고 국민통합에 기여하며 개혁 추진에 유리한 사회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사회 개혁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개혁의 마중물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생존 불안을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평등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평등 수준이 높아져야 ‘너와 나는 다르다’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감이나 일체감이 형성될 수 있다. 또한 위계 간 학대 현상이 근절됨으로써 연대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개혁을 위해서도, 즉 격차를 줄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도 기본소득부터 실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계속 강조했듯이 기본소득으로 생존 불안이 약화되어야 민중의 의식이 깨어나고 정치참여가 가속화되며 민중적 단합이 실현됨으로써 한국 사회가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쪽으로 거대한 방향전환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기본소득과 인권>이라는 글에서 강조했듯이, 기본소득은 민중의 저항 의지와 권리를 든든히 뒷받침해주고 강화할 것이다. 위계 관계나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해고나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즉 생존 불안이다. 직장상사가 갑질을 하거나 성희롱을 해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참는 것은 해고를 당해 생존이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해서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을 생존 불안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불의에 저항할 용기를 내도록 고무하고 격려해줄 것이다. 생존 불안에서 해방된 민중이 조직이나 직장에서 불의에 저항하기 시작하면 한국의 조직 문화, 직장 문화, 사회 문화는 민주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즉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에서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로 바뀌어나가고 각종 조직이나 직장은 조직 구성원들을 더 우대하고 존중해주는 쪽으로 변화해나갈 것이고 그 결과 민주화, 개혁이 촉진될 것이다.

기본소득이 개혁의 마중물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려면 최소한 최저생계비 이상의 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 현재 여당의 대권 주자인 이재명 도지사는 기본소득의 최종목표를 1인당 월 50만 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정도로 개혁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본소득이 되기 위해서는 또 기본소득의 거대한 의의가 충분히 발휘되기 위해서는 월 지급액의 목표치를 더 높이 잡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재명 지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민중은 그의 기본소득 정책을 지지하면서 그것의 목표치를 더 상향조정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다.

 

김태형

토, 2021/09/18-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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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차 사드 철회 기지 공사 중단 

범국민평화행동 

  • 일시 : 2019년 10월 5일(토) 오후 3시 

  • 장소 : 김천역 평화광장 * 소성리 현장 상황에 따라 장소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사드 배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근 국방부는 공사 컨테이너를 헬기를 이용해 매일 사드 부지에 들여놓고 있습니다.

사드철회 평화회의는 태풍으로 잠정 연기했던 제10차 시민행동을 다시 열고, 사드 철회와 사드 기지 공사 중단을 촉구할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의 시작은 '사드철회!'

한반도 평화 방해하는 사드 기지 공사 중단하라! 

 

  • 문의 :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02-723-4250

 

 

토, 2019/09/2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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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제 위한 미국의 유엔사 강화 시도 절대 안 돼

유엔사 권한 강화는 전작권 환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걸림돌

 

미국의 유엔군사령부(이하 유엔사) 강화 움직임이 노골화되고 있다. 전작권 환수 이후 유엔사의 권한과 역할에 대한 한미 간 이견이 드러난 가운데 한미 국방부는 내일(9/26)부터 열리는 제16차 한미통합국방협의체(KIDD) 회의에서 유엔사의 권한과 역할에 대한 이견을 조정할 예정이다. 유엔사는 얼마 전 국방부가 밝힌 대로 "한미연합사에 대한 지휘 권한이 없”으며,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과정에서 해체되어야 하는 기구일 뿐이다. 사라져야 할 유엔사에 대해 미국이 도리어 그 권한을 강화하려는 것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방해한다는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미국은 유엔사 강화 시도를 중단해야 하며, 한국군의 전작권은 온전히 환수되어야 한다. 

 

미국은 정전협정 체제를 유지⋅관리하는 유엔사의 임무를 ‘한반도 위기관리’로 확장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4년부터는 유엔사 근무자를 2~3배 늘리고, 부사령관에 캐나다에 이어 호주 장군을 임명하는 등 유엔사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전력 제공국의 법적 자격을 검토했으며, 독일군 장교를 받으려다 한국 측의 반발로 무산되는 등 다국적 군사기구로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진행된 전작권 환수를 위한 한국군 기본운용능력(IOC) 검증 중에도 미국의 요청으로 평시 위기 사태 시 유엔사의 권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양국의 견해 차이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미국이 전작권 환수 이후에도 유엔사를 통해 한국군을 통제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주지하듯이 유엔사가 DMZ 관할권을 과도하게 행사하여 남북 협력 사업 등에 제동을 거는 일도 빈번히 발생했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6월 통일부가 초청한 독일 인사들의 DMZ 평화의 길 방문도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독일 통일 경험을 전수해주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지만 유엔사는 끝내 출입을 승인하지 않았다. 지난해 9월에는 ‘사전통보시한’을 이유로 경의선 철도 연결을 위한 통행 승인을 거부하기도 했다. 유독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질 때 이를 방해하는 걸림돌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유엔사이다. 

 

유엔은 이미 유엔사가 유엔의 보조 기관이 아니며 해산도 유엔이 아닌 미국 정부의 권한에 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사실상 ‘미국의 유엔사’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틀어쥐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유엔사는 전작권 환수 이후 역할을 조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전작권 환수 이후에도 한반도가 미국의 유엔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

 

 

* 논평 [https://docs.google.com/document/d/1FId_r98WVWxtxEegz7AaetYFXCJ4yCE4TDu8... rel="nofollow">원문보기 / 다운로드]

수, 2019/09/25-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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