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중국 광저우는 무림고수 황비홍(황페이훙·黃飛鴻: 1856~1925)과 엽문(예원·葉問: 1893~1972)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저우에서 조금 떨어진 포산(佛山)이라는 도시에는 두 사람의 기념관도 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리롄제)과 견자단(전쯔단)의 영화 덕분에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광저우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를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 역시도 광저우하면 황비홍과 엽문을 먼저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중국무술 애호가로서 두 무림고수의 발자취를 좇아 떠나는 광저우·포산기행은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 포산에 위치한 “황비홍기념관”. 바로 근처에 엽문을 기념하는 “엽문당”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가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래서 광저우 탐방은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혁명의 도시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의 박호균 사무국장은 광저우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국제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만, 근대 시기 광저우는 늘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1911년 손문(쑨원·孫文: 1866~1925)의 광저우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17년에는 군벌에 반대한 손문이 광저우에 내려와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1927년에는 국민당 장개석(장제스·蔣介石: 1887~1975)에 맞선 중국 공산당의 ‘광둥코뮌’도 일어났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광저우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바로 그 혁명의 현장들을 차례 차례 방문하면서, 숨겨져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 기의열사능원 기념탑 앞에서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단체사진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부른 ‘아리랑’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은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공산당원 5000여 명의 합동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1955년에 정부가 나서서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매우 크고 웅장하게 조성해놨다.
▲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전경 ⓒ 김경준
공산당 숙청 작업에 나선 장개석 세력에 맞서 일어난 광저우봉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150~200명가량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합동 묘역에 우리 한인 청년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답사단은 어제에 이어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다 스러져간 한인 청년들의 넋 앞에 술을 올렸다. 이번엔 특별히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를 제주(祭酒)로 올렸다.
▲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5000명의 유해를 매장한 합동묘역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합동묘역 앞에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올리는 청년백범 답사단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광저우봉기에 참여했던 최용건(북한의 국가 부주석 역임)이 1964년 광저우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이다.
▲ 중조인민혈의정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안에 세워진 비석. 앞에 있는 꽃은 답사단이 방문하기 전날,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의 아들이 놓고 간 꽃이다. ⓒ 김경준
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정이여! 오래도록 푸를지어다!
혹자는 ‘결국 이 비석은 중국과 북한의 우정을 기념하는 비석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최용건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워진 비석이지만, 광저우봉기 당시 전사한 조선 청년들에게 과연 남과 북이 따로 있었을까? 오로지 중국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싸우다 스러져간 하나의 한국, 하나의 조선 청년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비석조차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역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광저우봉기 당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을 둘러보며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답사단원들 ⓒ 변량근
그런데 비석 앞에 웬 조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답사단 모두 누가 그 조화를 올려놓고 갔을까 궁금해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답사단이 방문한 바로 전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이 놓고 간 꽃이라고 한다.
우리 답사단이 광저우를 떠나는 날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아리랑로드’ 팀이 다시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찾는 후손들이 있으니 이곳에 잠든 넋들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적잖이 감격스러웠다.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亭)
기의열사능원에서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답사팀들이 기의열사능원을 방문했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주목하지 않았던 장소다. 바로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자 ⓒ 김경준
혈제는 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하고, 헌원은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을 뜻한다. 즉 중국을 위해 피의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숙연해진다. 여기에는 주문옹(저우웬용·周文雍: 1905~1928)과 진철군(첸티에쥔·陳鐵軍: 1904~1928)의 슬픈 로맨스가 있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비밀 연락책으로 활동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행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1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1928년 1월 27일,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주문옹은 “아내와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두 사람은 감옥 철창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옥중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2월 6일, 홍화강(紅花崗)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주문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동들의 총성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포 소리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한쪽에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수갑을 차고 형장에 끌려온 비참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혁명에 대한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또 한 커플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박열(1902~1974)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부부다.
▲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 ⓒ 위키피디아
그들 역시 옥중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죄를 성토하면서 혁명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주문옹과 진철군 부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도 이들 부부가 끌려가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 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닮은 두 커플의 이야기는 가히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하지 않을까? (*3부에서 이어집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소속 작가들이 친일 문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동인문학상 폐지 촉구 작가행동은 오늘(27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식민지 지배를 겪고 강대국의 침략을 받은 세계의 수많은 국가 중에서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민족을 팔아먹은 범죄자, 역사 반역자, 민족 반역자들을 두둔하고 그들을 기리는 기념상을 만들어 찬양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작가행동은 “누구보다도 올바른 양심을 지키고 문학적 자존감을 지녀야 할 작가들이 이 같은 공모에 영혼을 팔고 있다.”며 “조선일보에서 주는 친일 문인 기념상의 대표격인 ‘동인문학상’을 한국의 소설가들은 그렇게도 받고 싶은가”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들은 김동인이 자발적으로 황군을 위문하는 문단의 사절로 활동했고,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 작가 간담회에 출석해 ‘내선일체’를 선동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 일제에 협력하는 글을 썼고, 친일 소설과 산문도 여러 편 썼다고 설명했습니다.
작가행동은 “동인문학상은 이제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역사의 문제이자 문단 적폐 청산의 중대한 과제”라면서 “동인문학상을 주관하는 조선일보사는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하고 더는 동인문학상을 운영하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어 “우리말을 가르치고 우리글을 쓰는 평론가, 대학교수, 소설가들은 국민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친일 문인 기념 동인문학상 심사와 수상을 당장 거부할 것을 촉구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일보에 친일문학에 관해 토론할 의사가 있으면 언제든지 토론의 장으로 나오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79)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리영희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저작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에 대화 상대자로 나왔다. 1960년대 말부터 리영희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40여년 동안 가족 말고는 가장 가까이서, 가장 자주 지켜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임 소장은 리영희 선생을 “우리 사회과학을 ‘식민학문’에서 주체적인 학문으로 바꾸어낸 학자”로 기억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했다.
―가까이서 지켜본 리영희 선생은 어떤 분이었나?
“대단히 냉철한 지식인인데, 냉철한 가운데 인간미가 있는 분이었다. 휴머니즘을 마음 바탕에 깔고 있었고, 사람에 대한 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할 줄 아는 분이었다.”
―어떤 계기로 리영희 선생과 가까워졌나?
“1960년대 말에 내가 잠깐 <주간경향> 기자를 했는데, 그때 <조선일보>에 계시던 리영희 선생을 찾아가서 만났다. 그분이 쓴 글이 존경스러워서 직접 뵙고 싶었다. 1970년 월간 <다리>가 창간되자 거기서 일하면서 리 선생을 자주 뵀다. 그러다 리 선생이 필화사건으로 1977년 감옥에 가고, 나도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통에 1983년에 출소한 뒤에야 다시 선생을 만났다. 1980년대 후반에 한길사에서 <사회와 사상>이라는 월간지를 냈는데, 리영희·강만길·박현채·김진균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이 편집위원을 맡았다. 잡지를 내야 하니까 수시로 만났고, 좌담회도 자주 열었다. 이 월간지에 리 선생이 ‘남북한 전쟁 능력 비교연구’를 비롯해 당시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한반도 관련 글을 발표했다.”
―리 선생은 언론인이고 학자였는데, 학자로서 리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나는 함석헌과 리영희를 분단시대의 두 지성으로 꼽는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함석헌, 70년대와 80년대는 리영희가 우리 지성사를 주도했다. 특히 리 선생은 사회과학 영역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리영희야말로 국제정치학을 주체적 학문으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베트남 전쟁과 현대 중국 연구도 우리 현실을 비판하고 타개하려는 궁극적 목적 아래서 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정치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전혀 주체적이지 못했다.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고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좌우하고 있는데,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국내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리 선생은 ‘한국 교수들 대다수가 미국 유학을 통해 거의 자기를 상실할 정도로 미국 숭배자가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식민지 시대의 학문 태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을 깨뜨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사회과학을 다시 세운 분이 리 선생이다.”
―문학평론가로서 ‘리영희 글쓰기’를 어떻게 보는가?
“리 선생은 9매짜리 신문 칼럼을 쓰기 위해 그 열 배에 이르는 자료를 메모해 줄여나가는 식으로 철저하고 꼼꼼하게 작업했다. 그런데 그렇게 쓴 글들은 이해하기 쉽고 명쾌했다. 특히 리 선생이 모범으로 삼은 사람이 중국 작가 루쉰이었다. 루쉰의 모든 작품을 깊이 읽었고,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글을 쓸 것인가’ 하는 글쓰기의 자세와 방법을 루쉰에게서 배웠다. 억압하는 강자들에게서 억압받는 약자를 해방하려는 루쉰의 태도와 정신에 늘 감명을 받았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르면서도 은유·풍자·유머·기지가 있는 문체가 거기서 나왔다. 사회과학적 글쓰기에서는 보기 드문 문체다.”
―리영희의 삶에서 후배들이 배울 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리 선생은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세워 지켜 가려고 분투했다. 그런 자세를 지금 언론인들이나 학자들이 배워야 한다. 리영희의 기자정신이 지금 젊은 기자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하다. 리 선생이 기자 시절 수많은 특종을 했지만 누군가에게 얻어듣고 쓴 것은 거의 없고, 스스로 해당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완전히 파악한 뒤 취재를 통해 확인하는 방식으로 쓴 것들이었다. 그런 정신에서 나온 것이 리 선생의 책들이다. 리영희의 책들은 지금도 한반도 상황이나 미국의 본질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창원시가 전국 최초로 창원지역사랑상품권인 ‘누비전’에 지역 독립항쟁가를 새기기로 했다. 2021년 새해에는 바라만 보아도 가슴 뭉클한 창원의 대표적 독립항쟁가 얼굴이 새겨진 누비전이 시장과 동네가게를 찾는 창원시민들의 손에 들려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처음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지난여름 도의회에서 열린 ‘대일항쟁기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토론회’에서였다. 발제 중 이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경남도에서 ‘도내 인물조형물 설치 내역’을 요구해 받아봤더니 도내 33개 동상 중 독립항쟁가는 불과 3개였다. 국가에서 훈·포장, 표창을 받은 도내 독립유공자 수만 해도 1039명이다. 입증할 서류가 없어서 서훈되지 못했으나 대내외로 인정받는 독립항쟁가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상당하다. 경남에 기릴 만한 독립항쟁가가 단 3명뿐이던가, 한탄하던 즈음이었다.
결국, 나는 지난 10월 지역사랑상품권에 독립항쟁가를 새기자는 5분 발언을 했고, 여기에 창원시가 제일 먼저 화답했다. 창원시에 큰 박수를 보낸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치열한 독립항쟁사를 가진 나라지만 화폐 속 인물에 독립항쟁가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그런 일을 창원시가 해냈다.
그런데 여기에 딱 두 가지만 보태려고 한다. ‘누비전’ 시안을 보면 경남의 여성독립항쟁가가 없다. 남녀 기계적인 형평성을 맞추자는 게 아니다. 여성 독립항쟁가는 잊히고 묻혔을 뿐 남성 독립항쟁가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시대를 생각해보라. 여성은 운신 범위가 결코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남은 많은 여성독립항쟁가를 배출했다.
김조이(金祚伊·1904∼?)는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사법살인의 희생자 조봉암 선생의 동지이자 아내로, 여성·민족해방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청년단체를 조직해 항일항쟁을 하다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으나 그나마 2008년 건국포장 수훈으로 국가의 위로를 받았다. 진해구 성내동 출신인 김조이는 조선왕조 마지막 진해(웅천)군수의 손녀였다.
김명시(金命時·1907~1949)는 마산합포구 오동동에서 태어나 19살 마산을 떠난 후 26년 동안 중국과 만주벌판에서 빛나게 암약했다. 일제에 붙들려 7년간 옥살이 후에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 입대, 총을 들고 무장독립투쟁의 최전선을 누볐다.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수식어는 김명시란 인물에 호기심을 갖게 하는 작은 기제일 뿐이다.
대표적으로 이 두 분을 언급했으나 경남의 여성독립 항쟁사가 유구하니 경남의 남녀 독립항쟁가 여러분이 누비전에 나란히 있는 모습은 의미가 클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현재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있는 애국지사 사당의 명칭이다. 애국지사는 법적 용어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항쟁으로 서거한 분은 순국선열, 생존한 분은 애국지사로 나뉘어 예우가 달라진다. 그러나 현재 애국지사 사당에는 순국선열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유족이 만든 기념비 등에서 용어를 혼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공공기관이 만든 사당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애국지사 사당 대신 ‘독립지사 사당’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의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네 번째 행사에 참가한 답사단 일행이 인천일보에서 진행된 사전강의를 마친 뒤 사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지난 6일 오후 ‘인천지역의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과 노동문학 현장‘을 돌아 보는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네 번째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1, 2부로 나눠 ‘인천지역의 근대 노동운동 역사 돌아보기’와 ‘노동문학 현장 탐방’ 순으로 진행됐다. 1부 해설은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2부는 장회숙 인천도시디자인연구소장이 각각 맡았다.
답사단은 인천일보 강당에서 열린 사전 강의에 이어 중구청-최초의 노동쟁의 현장인 야적장-인천역-송월동 일대의 공장지대-노동문학의 현장 외국인 묘지-동일방직-인천도시산업선교회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이 교수는 사전 강의를 통해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된 도시지만 수도 서울의 관문 항구로 어느 지역보다 일찍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황해문화 2014년 여름호(통권 83호)에 실린 윤진호 인하대 교수의 특별기고 ‘개항기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인용, “인천은 한국 노동운동이 처음 발화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이 논문은 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이 인천항에서 설립됐고 이 조합에 의해 1892년 이전에 이미 노동쟁의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교수는 “만약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노동운동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898년 함경남도 성진부두조합이 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이고, 같은 해 목포에서 발생한 부두노동자의 쟁의가 최초의 근대적 노사분쟁’으로 알려져 왔다.
이어 ▲정미업 선미여공들의 투쟁 ▲인천 성냥공장의 원조인 ‘조선인촌 주식회사 여공들의 지난한 파업 투쟁 ▲일본육군조병창 등을 사례를 들며 “인천은 식민지체제에 저항한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이며 일제 강제동원의 현장이자, 징용노동자의 귀국항”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식민지시대 인천에서 전개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인천노동총동맹을 이끌었던 노동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면서 “해방 이후 노동운동의 분화와 분단과정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 인천 노동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인천일보 강당에서 진행된 사전 강의에서 ‘인천지역의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상훈 기자 [email protected]
2부 현장 답사 진행을 맡은 장회숙 소장은 “인천 최초의 산업지대가 형성된 항동과 북성동 일대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었고, 북성포구를 중심으로 이태준의 ‘밤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현덕의 ‘남생이’ 등의 작품이 탄생했다”고 소개했다.
강경애의 ‘인간 문제의 무대인 동일방직과 월미도는 수많은 사연이 켜켜이 쌓여있다.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은 한 때 우리나라 방직업의 메카이자 여성노동운동의 현장으로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었다.
1934년 강경애가 동양방직에 근무하는 조선인의 고단한 삶을 그린 ‘인간문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공장에서 살인적 노동을 강요당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생생한 필체로 그려냈다.
이 공장에서 1978년 발생한 ‘오물 투척사건’은 한국노동 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여성 집행부를 상대로,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 통에 ‘오물’을 담아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뿌려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구사대의 똥물 사례를 받은 1백 명의 여성 노조원들이 해고를 무릅쓰고 민주노조를 사수하려고 분투했지만 끝내 신군부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장 소장은 1961년 이후 인천의 노동자들의 삶을 지켜온 화수동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 답사단을 이끌었다. 70-80년대 군사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온몸을 던져 온 산업선교회 지도자들의 고난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설명했다.
1972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조승혁 목사, 1974년 미국으로 추방된 이 교회 설립자 조지 오글 목사, “도산이 침투하면 회사가 도산한다, 때려잡자 조화순”이라는 중앙정보부와 전두환 신군부의 용공 선전공세의 주인공 조화순 목사의 사연 등을 상세히 풀어나갔다.
▲장회숙 인천도시디자인연구소장이 ‘노동문학 현장 탐방‘ 해설 순서에서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인천지역 노동운동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욕의 중심지였던 화수동은 이제 화수부두가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고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낡은 집과 노인들만 남아 재개발을 기다리는 쓸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 소장은 “산업선교회 교회 건물이 민주화 기념지로 남겨져 학생들의 방문교육의 현장으로 쓰인다면 더 바랄게 없다”는 김도진 목사의 바람을 탐사단에게 전하는 것으로, 이날 행사의 현장 해설을 마무리했다.
[기고] 이육사·김동인 기리는 문학상, 친일과 민족의 자존 사이 고민해야… 박몽구 시인, 순천향대 객원교수
결실의 가을이 저물어가고 있다. 농부들은 한해의 결실을 들에서 과수원에서 거둬들이고, 강가에 선 은행나무들은 샛노란 결실을 길손들에게 나눠주며 긴 겨울을 넘길 채비를 하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들 역시 한해의 결실에 바쁜 모습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잡지사 우편함에 쌓이는 시집들을 보면, 제아무리 코로나19가 음험한 병마로 위협한다 하더라도 시인들의 살아있는 정신을 억누를 수는 없는 모양이다.
시인, 소설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펴내는 작품집과 함께 문단의 큰 결실 가운데 하나는 가을 들어 곳곳에서 들려오는 각종 문학상 수상 소식일 것이다. 축하하는 마음과 부러움이 뒤섞인 반응들이 SNS 등을 통하여 퍼지는 걸 보면, 새삼 한 해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인다.
그런데 올해에는 각종 문학상 주변을 놓고 설왕설래하는 걸 보면서 왠지 축하와 부러움에 머물러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서는 지방자치단체들이 각종 문학상 만들기에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상이 그 본질과는 관계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문학상을 만들어 시행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문학상 제정의 원점이 되는 문인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 문학상의 제정 시행이 손쉽고도 비용이 적게 드는 지역 홍보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상 급증 촉발한 지자체들
요즈음은 지자체마다 도서관 등을 건립하는 데 수백억 원씩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정작 거기에 비치할 도서 구입 예산은 조족지혈로 편성하여 문제가 되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심지어 우수문학 도서의 경우에도, 지역 도서관들에서 수준 높은 이론서나 어려운 시집보다 누구나 읽기 쉬운 수필류의 책을 선호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리고 출판사마다 각지의 도서관에서 도서 기증을 요청하는 편지들이 쇄도하기도 한다는데, 다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지자체들이 문학상 제정을 손쉽게 생각하고 그 시행에 신중을 기하지 않는 것도 이 같은 잘못된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게 아닌가 한다. 실제로 남쪽의 한 지방자치 단체에서는 그 지역 출신의 모 시인이 생전에 그를 내세운 문학상을 제정 시행하더니, 불과 3회째 시상을 한 후 지역 문인들로부터 각종 민원이 끊이지 않자 급기야 상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이에는 그 지자체의 섣부른 행정도 문제지만, 해당 지역 출신 문인들이 자신들에게는 상이 돌아오지 않고 외지인들에게만 돌아간다며 민원을 제기한 것이 큰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문인들의 속 좁은 처신도 문학상의 건전한 발전에 한 저해 요인이 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면 한국 문학이 수백 개의 문학상을 제정하여 시행할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며, 그 기반이 탄탄한가 자문해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답이 훨씬 더 많을 것은 자명하다. 상은 그것이 표방하는 바와 내용이 얼마나 일치하는가가 가장 큰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모 출판사에서 제정한 ‘만해 문학상’의 첫 수상자 배출 경위는 눈여겨볼 만하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아마 1974년인가 이 상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에서 이 상에 값할 만한 수상자들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제정 이후 몇 년 동안 수상자를 내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엄혹한 시절 만해의 정신에 부끄럽지 않게 문학 행위를 하고 있는 문인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경우지만, 1964년 장 폴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그는 1964년 수상자로 선정되자 모든 공적인 훈장과 명예를 거부한다는 원칙을 밝히며 수상을 거절했다. 작가는 어떤 기관이나 제도에 편입되면 안 된다는 소신을 지킨 것이었다. 아울러 “이런 상은 억압받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해 온 파블로 네루다나 러시아의 솔로호프에게 먼저 돌아가야 한다”라고 천명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문학적 명성이 전 지구촌에 퍼짐은 물론 요즘 화폐 가치로 13억 원에 달하는 상금이 걸린 상을 거부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는 당시 스웨덴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 상태에서 노벨상은 객관적으로 서방 블럭 작가나 동방의 반역자들을 위한 영예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벨상이 중남미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인 ‘파블르 네루다’나 충분한 자격이 있는 ‘루이 아라공’에게 주어지지 않음이 그 예다. 또 노벨문학상이 솔로호프에게 수여되기 전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소련 작품으로서 노벨상을 탄 것은 단지 해외에서 출판되고 소련에서는 금지된 작품인 <닥터 지바고>뿐이었는데 이는 균형이 잡히지 못한 시상 방법이었다.”
모름지기 깨어 있는 작가라면, 모든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멀리할뿐더러 자신 말고도 더 문학적 사명과 작품의 진정성에 충만한 사람을 돌아보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이만한 기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표리부동한 문학상의 속출
모두에 밝힌 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문학상은 수백 개에 달한다. 이 같은 상을 주관하는 측은 하나같이 때로는 숭고하고 거창한 상의 제정 취지를 내걸고 있지만, 문제는 그 제정 취지와 어긋나는 상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이런 양상은 상의 제정에 따르는 재정 여건이 열악한 문학 전문지 등이 제정한 문학상보다 예산 여건이 충분한 지자체나 대형 언론사에서 제정한 상들 쪽에서 빈번하게 드러나고 있다.
올해 들어 문단 내외에서 적잖은 물의를 일으킨 ‘이육사 시문학상’은 일그러진 문학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에서 나온 성명서에 따르면 ‘2020년 제17회 이육사 시문학상은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인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한 문학평론가가 심사위원이었고, 대표적인 친일문학상인 미당문학상 후보를 두 차례나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전두환 취임 때 찬양시를 쓴 시인을 기리는 편운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되어 수상하였다. 주최 측은 좋은 시를 쓴 시인을 선정하여 시상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과연 그 같은 반응은 변명인가 아니면 괴변인가.
이 상 제정의 정신적 근간이 되고 있는 이육사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이 아닌가. 경북 안동(安東) 출생인 그는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하였지만, 일제의 폭압 정치로 고향에서 살 수 없어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벌이다 절명한 사람이다. 그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1937년 윤곤강(尹崑崗)·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한 일제하 가장 실천적인 삶을 꾸린 지사가 아닌가. 그런 분을 기리는 문학상에 친일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들이 심사위원을 하고, 미당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이름을 올린 사람이 기왕의 여러 차례 수상에 이어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아 또다시 상을 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육사 시문학상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불거지자, “‘이육사 문학관’ 측은 ‘이육사 시문학상’ 운영의 주체가 아니다. 상의 운영은 ‘이육사 시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며, 제1회부터 제17회에 이르는 지금까지, 이 위원회는 ‘이육사시문학상’ 시행 기관인 ‘TBC문화재단’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이육사 시문학상’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은 이 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회의 고유한 권한이다”라고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항일 투사 시인 이육사의 정신을 기리는 이육사 문학관이 시상식 공간을 제공하고, 상의 운영에 대하여 바른말을 아꼈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성명서는 “그동안 일부 ‘이육사 시문학상’ 수상자나 심사자들의 면면을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들의 상당수가 미당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하였거나 심사자였다. 친일문학상 후보자도 상당했고, 박정희를 찬양한 시인도 있었다. 그 이름을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심각하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문학상 수상자나 심사자가 ‘이육사 시문학상’뿐만 아니라 이육사문학관에서 시행하는 각종 행사에도 대거 초대되었다. 학술토론회, 낭독회, 문학학교, 문학강연회 등의 행사에 초대되어 어린 학생을 비롯해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상을 제정한 지방의 유력 언론사에만 책임을 돌릴 게 아니라, 작게는 한국 문단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이육사’라는 거대한 정신의 거봉을 앞에 내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친일과 민족의 자존 사이에서
최근 언론에 두 문학상의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두 문학상의 수상자는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다. 보도에 따르면, 김숨 작가는 장편소설 <떠도는 땅>으로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제51회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이어 <부산일보>가 선정하는 제37회 요산 김정한문학상 수상자에도 이름을 올려 문단 내외에 물의를 일으켰다.
김동인은 일제가 패망하던 날 아침에도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 구성을 자신에게 일임해 주면, 일왕에게 백배의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그는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주장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고 일제의 징병에 조선 청년들이 자원할 것을 독려하는 글도 실었다. 그는 창씨개명과 함께 ‘황군 위문 작가단’ 활동도 한 대표적인 훼절 친일지식인이다. 반면에 요산 김정한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도 일체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이승만에서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이르는 시절 불굴의 정신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부산을 올곧게 지킨 지사형 작가가 아닌가. 특히 김정한 선생의 작품들 곳곳에는 일제에 항거한 기층 민중의 뼈아픈 삶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친일의 거두를 기리는 상을 받은 사람이 다시 비교도 하기 어려운 상을 수상하다니 문인 정신이라곤 털끝도 찾아볼 수 없는 치졸한 처신이다.
두 상의 수상자 소설가 김숨은 여성을 유린한 반인륜적 범죄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작품화한 보기 드문 작가라는 점에서 납득이 어렵다. 김숨은 <조선일보> 수상 인터뷰에서 <떠도는 땅>의 집필 동기에 대해 “역사에 대한 특별한 의무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작가로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위안부 할머니나 강제이주열차를 탄 우리 동포 모두 일제의 가증스러운 탄압으로 떠도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피나는 역사를 놓치지 않는 김 작가의 주목에 놀라면서도, 그가 그 작품으로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 수상을 수락했다는 점에 우리는 더욱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인 문학상은 보수 진영에 선 대표적인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시상하는 상이면서, 거액의 상금을 내 거는 등 자칭 가장 권위 있는 상임을 자부한다고 한다. 일제 하 <조선일보>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연재하고 민족지의 역할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이 신문사는 하루 빨리 친일의 거두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 폐지에 나서야 할 것이다. 문인들 또한 언론의 영향력과 상금의 유혹에서 벗어나 올곧은 비판 정신을 되찾아야 마땅하다.
몇 해 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의 현현을 내건 ‘5.18문학상’에 그 정신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시작 활동을 해온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가, 문단은 물론 사회 각계에서 비판 여론이 크게 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수상자로 선정된 사람이 망설임 없이 수상을 포기하면서 겨우 봉합된 적이 있다. 이 상의 경우에는 그 뒤에도 뚜렷한 궤적을 긋지 못한 채 작품성을 평가받은 이들이 수상자로 선정 시상되고 있다. 하지만 모두에 밝혔듯 만해나 5.18의 경우에는 그 이름에 값하는 문학 행위를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따라서 지자체나 유력 단체 및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상을 만들고 뚜렷한 궤적을 그리지 못한 채 실망을 안겨주기보다,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그 취지를 살리는 길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해온 대표적인 시인 가운데 하나인 조태일 선생을 기리는 문학상의 경우에도, 상의 취지와 어긋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최근 우리 문단에서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있는 문인들을 두고도 뜻있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어떤 문인은 불과 몇 년 사이에 10여 개의 문학상을 거머쥐는 등 양식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적지 않다. 특히 수상자로 선정된 상 사이에 제정 취지나 정신의 공통성을 찾기 어려운 마당에, 이른바 유명세에 편승하여 특정 문인들에게 상이 계속 주어지고 있고 해당 문인들 또한 아무런 자기 정제나 작품성의 향상 없이 상을 연거푸 받는 풍토는 매우 큰 문제이다.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이 국제 무대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가히 전성시대라 할 만큼 범람하고 있는 문학상의 남발도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차제에 한 문학상을 수상한 이들이 다음 상에 도전하려면 객관적으로 인정할 만한 작품성의 향상 등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묵시적 약속도 필요하리라 본다. 나아가 제도적으로 문학상을 탄 문인들에게는 적어도 5년 이내에 다른 상을 수여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약속도 필요한 시점이다.
아무튼 문학상이 개인의 영예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한국 문단 전체에 신선한 자극을 선사하면서 우리 문학을 한 단계 비약시키는 지렛대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정 취지에 맞게 문학상이 운영됨은 물론, 작품성과 공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문인 정신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 박몽구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7년 <월간 대화> 등단. 시집 <황학동 키드의 환생>, <단단한 허공> 등 있음. 순천향대, 추계예술대 객원교수.
▲ 역사 달력 표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헌신을 공부하며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달력에 담고자 했다. ⓒ 서부원
올해도 탁상용 역사 달력을 만들었다. 재작년 2018년에도 ‘현대사 달력’이라는 이름으로 시도해 본 경험이 있다. 그땐 기말고사가 끝난 뒤 겨울방학을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 작업했다면, 올해는 코로나로 교문이 닫혀 아이들의 재능을 활용할 수 없었다.
대신 올해 새로 부임해온 동료 교사와 의기투합했다. 그는 전공에 대한 자긍심과 수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청년 교사다. 같은 역사 전공자로서, 그는 나의 후배 교사이기 앞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걸어가는 도반으로서, 배울 점이 많은 스승 같은 존재다.
그도 역사 교사로서 2020년 올해를 허망하게 보내는 데 대한 아쉬움이 컸다고 했다. 해를 넘기기 전에 뭐라도 하자는 것에 흔쾌히 동의했고, 내년 달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하자고 뜻을 모았다. 재작년과는 달리 예산 확보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봤다.
연초 다양한 교육 활동을 위한 예산이 잡혀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손발이 꽁꽁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한 해를 보내야 했다. 교육 활동은커녕 준비를 위한 모임조차 쉽지 않았다. 학교마다 불용 처리하여 반납하거나, 비대면 수업을 지원하는 데 쓰이는 게 고작이었다.
특히, 올해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라 이곳 광주에선 학교마다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물거품이 된 상황이다. 하다못해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는 일조차 연기해야 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행사였는데 말이다.
일제강점기 인물을 달력에 넣기로 했다
▲ 역사 달력 앞면 10월 앞면으로, 가급적 덜 알려진 인물을 알리는 데 애썼다. 예컨대,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안중근 의사를 후원한 최재형 의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 서부원
아이들의 손은 빌릴 수 없지만, 역사 교사 둘이서 만들면 시간은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주제를 정하고 관련 자료를 모아 정리하는 등의 작업 설계도를 함께 그렸다. 다만, 머릿속에 구상한 디자인을 컴퓨터로 편집하는 것은 달력 제작 업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재작년엔 주제를 해방 후 현대사 속 사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잡았는데, 올해는 바로 앞선 일제강점기를 다루기로 했다.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우리 사회 적폐의 뿌리가 친일 잔재 청산의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판단에서다. 얼추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 아닌가.
알다시피, 미소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친일의 후예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거듭나 장구한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 그들이 수많은 정적과 시민들을 학살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해온 것이 우리의 핏빛 현대사 아닌가. 오죽하면 6.25 전쟁이 ‘친일파들의 해방 전쟁’으로 귀결됐다고 한탄할까.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하되, 내용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면면을 다루는 것으로 정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역사는 인물사다. 아무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그와 관련된 인물의 자취가 없다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할 테다. 우리는 사건이 아닌 사람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인물을 선정하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우선, 2015 개정 교과서에 수록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배열해보았다. 달력이 그저 책상 위의 장식품이 아니라, 역사 공부에 도움을 주는 보조 교재로 활용될 수 있으려면, 교과서 내용과 연동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다.
더욱이, 내년에 쓰일 한국사 교과서는 근현대사 위주여서 이번 달력과 조응하기 쉽다. 참고로, 이번 개정 교과서는 내용과 구성이 이전의 것과는 판이하다. 4개의 대단원 중에 3개가 개항기 이후의 역사, 곧 근현대사로 채워졌다. 곧, 1단원의 범위가 선사시대부터 조선 말까지다.
다른 교과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1년 전에 모두 바뀌었는데, 한국사는 한 해 늦춰진 것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교과서 도입이 전격 추진되다 온갖 분란을 일으키며 취소되는 사달을 겪은 탓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겪은 만큼 새 교과서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다.
착착 진행되던 작업이 난관에 부닥쳤다. 월별로 당대의 인물을 끼워 맞추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인물의 면면도 고려해야 하는 데다 월별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라 무척 까다로웠다. 가독성을 위해서 한 달에 7~8명 넘게 배치하는 건 무리였다.
해당 인물과 인연도 없는 일자에 무작정 배치할 수도 없어 고민이 컸다. 우선, 생몰 일자와 관련 사건의 발생 일자를 일일이 조사했다. 신뢰도를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나 민족문제연구소 자료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인터넷 백과사전의 내용은 교차 검토 과정을 거쳤다.
삼척동자도 아는 인물만 대상으로 한다면 그다지 어려울 게 없었다. 관련 자료가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 그럴 거였다면, 애초 달력 작업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교과서의 보조 교재로 활용되려면, 잊힌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것이 취지에 더 부합한다고 여겼다.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선, 반대편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인물도 다루는 게 효과적이다. 하여 드문드문 월별 빈자리에는 그들의 행적을 끼워 넣었다. 여성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도 소홀히 다룰 수 없었고, 당시 활약한 외국인까지도 챙겼다.
교사 본인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은 없었다
▲ 역사 달력 뒷면 11월 달력 뒷면에는 3일에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친일인명사전 발간 사실을 담았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아니지만, 친일 잔재 청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러 실었다. ⓒ 서부원
사실, 이번 개정 교과서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낯선 이름의 독립운동가들이 여럿 등장한다는 점이다. 당장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별도로 소개한 단원이 눈에 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바퀴로 연대와 경쟁을 거듭하며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려주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인물의 선정과 자료 조사, 배열에만 꼬박 일주일 넘게 걸렸다. 큰 산은 넘었지만, 정작 달력에 기록될 내용을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해당 인물의 사진을 챙기는 한편, 백과사전 등에 수록된 행적을 핵심만 뽑아 요약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이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누어졌다. 그는 달력에 삽입할 사진 자료를 챙기며 도안을 구상했고, 난 선정된 인물의 행적을 한 줄로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다. 비록 힘든 작업이었을지언정 교사로서 큰 도움이 됐다. 고백하건대, 일제강점기의 인물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본 적이 없다.
신경 써야 할 건 또 있었다. 사진 자료 등의 저작권 문제가 바로 그것. 가져다 써도 되는 자료인지를 법적으로 따져보는 건 교사에겐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하여 채택한 교과서 속 자료를 우선 사용하고, 없는 건 정부 기관 등에서 가져왔다. 돌다리도 두드려본다는 심정으로 교육청에 문의하기도 했다.
달력의 뒷면도 비워둘 순 없었다. 앞면을 인물로 채웠으니, 뒷면은 그달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다루기로 했다. 말하자면, 3월엔 3.1운동을, 6월엔 6.10 만세운동을, 9월엔 한국광복군 창설을, 11월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하는 식이다.
이 또한 모두가 다 아는 뻔한 사건만 올릴 순 없었다. 가능하면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했거나, 당시엔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 등에 관심을 두고자 했다. 한편, 일제강점기 문화재 도굴 행위와 같은 이면까지도 담아보려 무진 애를 썼다.
1941년 12월에 있었던 호가장 전투와 해방 직전 7월에 벌어진 부민관 폭파 사건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소개한 건 그래서다. 또, 신라 금관이 최초로 출토된 때가 1921년이었다는 것과 함께 졸속으로 발굴된 까닭에 많은 역사적 진실이 묻히게 됐다는 사실도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일은 아니지만,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도 부러 11월 달력 뒷면에 소개했다. 발간일이 11월 8일이어서다. 굴절된 우리 현대사가 친일 잔재 청산의 실패에 기인한다는 점을 알리려는 게 달력을 제작한 취지인 만큼 빼놓을 순 없었다.
보름 넘는 작업 끝에 얼개가 완성됐다. 정리한 내용을 업체에 건네고 원하는 디자인을 상세히 설명했다. 업체는 생소한 주제인 데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애를 먹었다. 탁상용 달력 디자인을 고집한 그들과 수업용 보조 교재여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가 소통에 혼선을 빚은 것이다.
디자인이 확정되고 교정을 마치니 출력은 일도 아니었다. 불과 며칠 만에 달력이 완성되어 학교로 배달되었다. 개정 교과서로 배울 내년 신입생들에게 나눠줄 선물이니, 겨우내 교무실에 소중히 보관할 참이다. 달력을 받고 나니, 올해의 허망함이 조금이나마 가신 느낌이다.
내친김에, 예산이 확보되고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내년엔 온전히 ‘현대사 속 여성’을 주제로 달력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세상의 반은 여성이라는데, 교과서에 등장하는 여성은 여전히 채 1/10도 안 되는 것 같다. 자료를 찾는 게 쉽진 않겠지만, 이런 일은 힘들고 어려워야 제맛 아니겠는가.
고양 일산서구 금정굴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권종술 기자
“지금 전국의 한국전쟁 기념시설을 찾아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범죄의 현장에 승전비를 세웠다. 이곳 아산의 민간인 학살도 가해자들에겐 여전히 공적으로 되어 있다.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도 역사를 다시 재구성해 평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시기다.”
지난 2019년 5월, 충남 아산서 열린 민간인 학살 유골 발굴 개토제 현장에서 만난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은 전쟁 승리로 기록된 역사의 뒷면을 파헤치고 있었다. 신 소장은 경찰과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와 전국 각지에 세워진 승전비와 기념관엔 승리한 전투로 왜곡된 채 기록돼 있다면서 이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성과를 ‘전쟁의 그늘’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책 ‘전쟁의 그늘’ⓒ인권평화연구소
신 소장은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 온,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고양에서 벌어진 금정굴 사건을 접한 이후 사건 진상규명과 함께 전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해 왔다. 그는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마친 지금도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 시간 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한다’,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 등 10권 넘는 책을 출간하며 한국전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진실을 다뤄왔다. 이 중 한국전쟁 전후로 학살당한 민간인 1만4천343명의 명단을 수록한 책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시상하는 제12회 임종국상 학술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10권 넘는 책을 쓰며 추적해 온
민간인 학살의 진실
그가 이렇게 10권이 넘는 책을 쓰면서까지 한국전쟁, 그 가운데서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파헤치게 계기는 무엇일까?
“진실화해위원회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활동 기록은 그 기관의 활동이 멈추면 모두 국가기록원으로 사라지게 된다. 일제 하 강제동원 조사나 친일파 조사, 의문사 조사, 친일재산 환수 조사 등의 기록은 그때뿐이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다시 원점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일까? 지금 가동되고 있는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나 5.18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여전히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제가 몸 담았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조사부터 평가와 반성, 성과의 확대 작업이 필요함을 느낀다. 저는 개별 피해를 넘어 지역과 더 나아가 전국적 사건의 해석, 세계적 공통점 비교 분석까지 계속해 나갈 생각이었고, 역사적 진실에 대한 평가도 중대한 목표였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오랜 기간 민간인 학살을 추적해온 그였지만 ‘전쟁의 그늘’을 출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려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혀내기도 어렵지만, 승전으로 기록된 역사를 뒤집어 그것이 학살이었음을 밝혀내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국가보안법과 분단체제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에선 ‘이적(利敵)’이란 공격이 언제 날아들지 모를 위태로운 연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이 될까봐…….
청년은 물론 어린이, 여성, 노인까지 학살
“고양 금정굴 사건의 경우도 전쟁 시기 발생한 전투의 하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저는 ‘1950년 10월이면 전선이 북쪽으로 훨씬 넘어가는데 뭔 헛소리야’라고 주장했고, 민간인 학살을 부수적 피해의 하나로 돌리려는 책임 회피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역을 확대하면서 보니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0년 7월 집중되었던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남은 청년들이 적이 될까봐 우려해서 저지른 대량 학살이었고, 1.4후퇴 시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린이, 여성, 노인들을 집중적으로 학살한 사건들이 발견되었다. 가해자들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래의 적을 제거하는 행위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신 소장이 연구를 진행하고, 책으로 출간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가해자인 경찰과 국군이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연구를 하며 당시 학살이 적을 제거하는 전투행위처럼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2018년 8월 진행된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민간인 학살 피해자 발굴 현장 모습. 흙더미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오는 민간인피학살자.ⓒ구자환 기자
또, 정확한 학살자 규모를 파악하고자 하는 차원의 연구이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자는 10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이 많았지만, 실제 확인되는 기록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국방부가 쓴 ‘한국전쟁사 4권’ 760쪽에는 이승만 정부 당시 비상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부터 10월 사이 106만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한 내용이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기에, 100만 명 넘게 학살됐다는 주장이 거짓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왜 확인이 되지는 않는 것일까?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적’, ‘인민군’은
민간인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사’와 각종 기록, 현장 증언 등을 종합한 신 소장의 결론은 학살이 전투로 뒤바뀌어 기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먼저 토벌 작전(1950년 9월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남한에 고립된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의 피해에 대한 기록을 봤다. 예상했던 것에 대부분 일치했다.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인데 노획물은 소총 몇 자루에 기관총까지 등장했다. 전투로 위장했던 것이다. 제가 최근 직접 조사한 사례는 곡성이었다. 화려한 전쟁 공원으로 보아 대단한 전투가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증언은 달랐다. 과장되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상주 화령장 전투를 기념하는 화령전승기념관. 상주 화령장 전투는 남하하는 인민군에 큰 타격을 입힌 중대한 전투였다고 한국전쟁사 등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철 소장은 이런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신기철
심지어 인민군 주력 부대와의 전투로 기록된 것 중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전투로 둔갑시킨 사례가 많았다고 신 소장은 말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그는 가장 유명한 전투로 손꼽히는 화령장 전투, 낙동강 전선의 전투, 인천상륙작전 등을 꼽았다.
“화령장 전투에는 패잔 인민군을 소탕한다면서 사살한 마을 주민들이 확인되었다. 전투 역시 일방적으로 우마차를 공격한 것이어서, 이를 전투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낙동강 전선의 전투는 실제 피란민의 죽음이 더 많았다. 너비 7~8 키로미터의 주민 거주지를 소개했으니 해당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것이라며 영흥도와 덕적군도에서 벌어진 섬 주민 학살 사건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인민군도 없었고 인민위원회라 해봤자 한 달이나 있었는지 의문스러운 지역이었다. 그리고 수시로 해군 첩보부대들이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사는 총살당한 섬 주민들을 ‘적’으로 만들어놨다.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적’, ‘인민군’은 민간인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피란민과 민간인이 인민군으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인민군 범죄로 둔갑···….
“전쟁이라기보다 학살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 책에서 신 소장은 여러 사례와 각 지역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앞서 소개했듯이 피난민, 주민 등이 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충북 영동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처럼 미군이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잠입했다며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을 ‘한국전쟁사’는 인민군이 지뢰지대를 통과하면서 피란민을 앞세워 지뢰를 제거하려 했던 행위로 왜곡했다. 하지만,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인해 학살의 진실이 세계에 알려졌고, 인민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임이 밝혀졌다.
아울러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도 다뤘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의 북진 이후 후퇴하던 12월 초까지 이북 지역에선 민간인 학살, 폭격 등에 의한 인명 피해(부상자 포함) 등으로 268만 명이 고통을 겪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건은 신천 학살 사건이다. 미 1군단 24사단 19연대가 진입하면서 벌어진 이 사건의 피해자는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3만 5천 명이 넘는다. 당시 신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피해였다.
신천 학살과 관련한 유물들ⓒ기타
이런 사건들은 한국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은 민간인 피해가 군인들의 사상과 비교해 훨씬 많았던 전쟁이었다.
“전체 한국전쟁 피해자 600만 명 가운데 민간인은 350만 명에 이른다. 부상자까지 포함한 통계지만 사망자과 실종자만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여기에 전쟁 초기 8개월만 비교하면 더욱 큰 차이를 보인다. 남한 지역의 경우 국군 피해 8~9만 명에 민간인 피해가 100만 명을 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민간인 학살 사례는 국민보도연맹 사건, 형무소 재소자 사건,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 수복 후 부역 혐의 사건, 미군 폭격 사건, 1.4후퇴 시기 예비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다. 이는 전쟁이라기보다 학살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태도만 본다면 친위 쿠데타라고 봐도 될 것이다.”
학살이 전공으로 뒤바뀌면서 학살 가해자에게 훈장이 내려지기도 했고, 국립묘지에도 안장됐다. 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이 멀다.
“학살이 전투로 둔갑되었다는 주장은 아직까지 저만 하는 것 같다. 국방부가 스스로 알아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지만 거짓 기록 위에서 70년 동안 특권을 누려왔던 고급 장교들이 사과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라도 한국전쟁사를 역사의 영역에 포함시켜 일반 연구자들의 연구와 논문 발표를 유도해야 할 것 같다. 전쟁사의 진실에 대해 대중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필요하다. 한국전쟁사와 전투사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불경으로 여기는 풍토가 빨리 사라져야겠다.”
인민군, 좌익세력 등이
자행한 ‘적대세력 사건’도 조사 필요···….
하지만, 우익이 저지른 사건을
인민군이 저지른 사건으로
조작하는 등 왜곡 심각
이런 풍토와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체 때문인지 민간인 학살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일각에선 좌익이나 인민군도 학살을 저질렀다면서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 학살을 희석하려 시도하곤 한다. 상대편 역시 학살을 저질렀다고 해서, 우리 국가가 저지른 학살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 소장은 인민군과 좌익세력 등이 자행한 이른바 ‘적대세력 사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게 남한 군경이 저지른 사건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올해 초 조사한 화순 지역 사례를 들며 민간인 학살이 우익과 좌익 모두에 의해 벌어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 전 국군의 토벌 작전 학살이 있었지만, 이는 인민군의 점령기 동안 큰 보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피해는 수복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발생했고 이를 피하려고 입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총살당하든가 소개지역으로 이동했고 토벌 국군은 마을에서 빠져나갔다. 마을은 소수지만 다시 입산했던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 청년들은 가족들을 학살당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는 공격이 쉬운 마을 내부 배신자를 상대로 보복을 한다. 얼마 뒤 다시 토벌 국군이 마을에 진입했다.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악에 바친 빨치산으로 살아남았다. 이들은 체포되거나 죽을 때까지 투쟁한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악순환이 벌어졌다. 모두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래서 이 유형의 사건들은 수복 후에 발생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이라고 기록됐지만, 실제론 경찰 측 치안대가 주민을 학살한 사건을 조작한 사례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사건이 고양 지역의 타공결사대 사건이다. 1950년 9월부터 11월까지 고양경찰서 신도지서의 치안대 활동을 보조해온 조직이 이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김창용 본부장에게 연행된 뒤 좌익조직으로 조작된다. 결국 이들 타공결사대에게 학살당했다는 100여 명의 주민들은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들이 2019년 5월 22일 국회 앞에서 희생자들의 유골을 놓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 또는 진화위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05.22ⓒ정의철 기자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비롯해 과거사와 관련해 풀어야 할 과제가 아직 많지만, 10년 만에 다시 가동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아직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출범을 선언하긴 했지만, 국민의힘이 야당 몫인 위원 4명의 추천을 아무런 이유없이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이 추천을 해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신 소장은 “과거청산을 반대하는 분들이 9명의 위원 가운데 4명이나 차지할 예정이다. 그 중 한 분은 상임위원으로 민간인 학살 사건 조사를 총괄할 것으로 예상된다. 진실규명 결정을 받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분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정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가
분단 상황에서 내전 또는 국제전 중
독재 권력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 반인륜범죄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독재를 극복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여
민주주의와 통일,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긴다”
신 소장은 2기 진실화해위에 대해 이런 바람을 전했다. “민주적이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신청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2기 위원회는 처리하지 못했던 사건이나 새로 나타난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에 그치는 위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1기 위원회의 연장으로 과거 청산 작업 완성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한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를 덮는 곳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살려내는 것이 임무다. 전쟁 시기는 물론 이후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열사, 희생자들을 역사 속에서 되살려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3년 뒤에는 조사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거나 권한이 없어서 못했다는 말보다는 과거 청산의 다음 단계로 가자는 말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일은 2기 위원회의 출발과 함께 진행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2016년 3월 충남 홍성군 민간인 유해발굴이 종료되면서 66년 전의 민간인학살 유골들이 드러났다.ⓒ공동조사단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활동한 이후 10년 간의 작업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의 시기별, 유형별, 지역별 분석을 해온 신 소장은 이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역사적 의미와 가해자, 가해 행위 분석을 통한 재발 방지 연구에 도전하고 있다. 제 인생에 이 과제를 마칠만한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습니다만, 여기에 더해 이후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의 연속성을 규명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저와 제 주변 인사들의 인생도 이 과정에서 만나 어우러져 왔다. 당시 희생당한 친구들도 있고 여전히 실종 상태에 있는 친구도 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했지만 결국 여전히 실종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저는 조사관이기도 했지만, 신청인의 입장에서 가진 분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제가 겪었던 시대 역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70년 전에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 이후 현대사의 열쇠라고 믿고 있는 저로서는 이후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전쟁의 연장선 상에서 재해석에 도전해 보고 싶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과거를 이야기하냐고 말한다. 하지만, 신 소장은 진정 미래로 나가기 위해 넘어야 산은 민간인 학살 등 과거사라고 강조한다.
“저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가 분단 상황에서 내전 또는 국제전 중 독재 권력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 반인륜범죄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독재를 극복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여 민주주의와 통일,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저는 이 운동이 광범위한 관심과 지지 속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민주화운동하는 분들이나 통일운동가, 평화운동가, 심지어는 인권운동가들조차 주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역사 영역에서는 거의 소외되어 있고, 과거사라며 특별한 분야로 제한하는 경향이 큰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과거사 영역을 더 확장시키지 못하는 저를 더 반성하게 된다. 곧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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