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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장을 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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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장을 열면서

admin | 월, 2019/11/04- 20:15

편집자의 글:

올해도 예외 없이 기후변화에 따른 온갖 재난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모두를 열거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현상들이 해가 갈수록 정도를 더하고 있고, 연전(年前)부터 국제회의마다 기후변화를 넘어서 생태위기와 인류세의 멸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무감하고 무책임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에너지 과소비의 산업구조, 일인당 폐비닐 배출 세계 1위 국가, 탄소배출량을 감소하기는커녕 화석연료발전소 건설을 금융 지원하는 악당국가, 겨울과 봄철이면 찾아오는 미세먼지의 공습 등이 오늘의 대한민국 자화상이다.

근본적인 성찰과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개 평범한 시민들은 일상에 빠져있는 가운데 무능한 정부는 성장률과 GDP수치만 타령하고, 무지하고 시대역행적인 의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셈법에만 빠져 있다.

<다른백년>은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주제를 연구해온 한윤정 박사와 함께 한국사회의 현실을 돌아보고 깨어있는 시민 여러분들의 연대를 통하여 미래세대를 위한 실천적 좌표를 제시하고자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라는 주제의 글들을 매주 연재하기로 하였다.


[1] 현재 우리 문명은 어떤 토대 위에 세워졌을까

기후변화는 잘못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전환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것의 가장 뚜렷한 증상은 만연한 위기와 불안이다.

가장 큰 위기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이다. 이미 지난 세기부터 나온 진부한 이야기, 아직 극단적 상황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이야기로 여기기에는 심각한 상황들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다. 매년 최고기온을 경신하고 대형산불이 나고 경작지가 줄고 수많은 종이 사라진다. 플라스틱이 바다를 뒤덮고 가축전염병이 국경을 넘어 창궐한다. 이른바 인간이 지구의 대기와 지질을 바꿔놓은 ‘인류세’로 접어들었다.

이렇듯 병들어가는 지구 위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힘들고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극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중산층부터 빈곤층까지 모두 시스템의 노예가 돼서 어디로 향하는지 확실하지 않은, 모호한 미래를 향해 달린다. 불평등은 점점 심화한다. 불안을 가져오는 두려움의 대상은 때로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로, 때로는 인공지능이라는 신기술로, 때로는 무역전쟁과 마이너스 경제로, 나아가서는 계층 갈등과 정치적 혼란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대책 마련에 부심한다. 기후변화를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기후붕괴에 대응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을 상상해 거기에 맞게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저성장 나아가 마이너스 성장시대에 맞춰 청년이나 노인 수당을 신설하거나 복지제도를 개편한다. 모든 이해관계가 모이고 조정되는 정치에 관한 한 대안 마련이 더욱 쉽지 않지만, 분권이나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위기는 기회라는 점에서 현재는 대안과 혁신을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고정관념은 과감한 혁신이나 도전을 어렵게 한다. 고정관념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사고의 프레임, 지식의 패러다임,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존재론과 우주론, 즉 철학과 과학이다(과학이라고 하면 실험과 수치에 입각한 실증과학을 가리키기 때문에 실재를 질문하는 자연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현재가 어떤 토대 위에 형성됐는지 그 사고의 뿌리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화석연료가 우리 문명의 기반이다

현재 우리 문명은 어떤 생각의 토대 위에 세워졌을까.

경제주의: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은 모든 가치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한다. 우리는 돈 없이 절대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다. 그 규모와 운영원리가 공공의 통제범위 바깥에 있는 글로벌경제, 특히 금융경제의 시스템 속에서 현상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닥치며,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다고 믿는다.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미국 민주당이 월 스트리트와 결탁한 것처럼 한국 민주당도 재벌을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긴다. 생산과 소비인구를 늘리려는 출산장려 정책은 물론, 소득주도성장처럼 진보적으로 보이는 정책의 배경에도 지독한 경제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개인주의: 돈이 절대적인 이유는 남이 나를 돕거나 책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심지어 가족관계에서도 금도가 됐다. 성인이 된 개인은 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전통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개인의 자유를 다시 반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이란 관계의 구성물이다. 사람은 가족, 친구, 이웃,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삶의 의미와 행복은 관계와 인정감에서 나온다. 아무리 복지사회를 위한 재원과 제도를 마련하더라도, 공동체에 대한 관념과 믿음이 없다면 이는 시혜와 수혜의 일방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분과주의: 오늘날 대학의 전공분야는 놀랍도록 세분화돼 있다. 직업의 세계도 그렇다. 지식인, 전문가는 한 분야를 좁고 깊게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전문분야만 탐구하는 데도 시간과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는 아예 귀를 닫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들은 가치와 당위를 말하는 거대담론에 대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냉소적 반응을 보인다. 학벌주의, 능력주의와 합쳐진 분과주의는 여러 분야를 연결하는 폭넓은 사고를 가로막는다. 학문간 융합은 시장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며,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조차 문화콘텐츠나 테크놀로지를 위한 실용성을 갖추는 수단으로서 스스로의 지위를 유지한다.

실증주의: 실증주의는 이른바 객관적, 과학적 사고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지 않는다. 세속화한 세계에서 종교는 초월적 세계와의 교감이라기보다는 오랜 관습과 제도의 관성으로 남아있다. 때로 자연에서 에너지와 영감을 얻지만, 그것은 지구 자원을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대 경제시스템에서 더욱 유능하게 일하기 위한 휴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관심은 희망과 가치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절실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경험을 사람 사이의 에너지나 우주와의 교감으로부터 설명하기보다 심리학과 뇌과학이 발견한 인간 내면의 사건으로 환원시킨다.

서구에서는 이삼백 년, 한국에서는 백 년 이상 사회를 지탱해온 이런 사고들이 합쳐져 현재의 생태위기, 인간의 위기를 초래했다. 경제주의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서구 산업문명을 세계화하는 원동력이 됐고, 그 결과는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 나타났다. 파국적 결과가 눈에 보이는데도 에너지 전환은 여전히 경제적 이익과 연관돼 논의되고, 탈성장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된다.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물론, 자연과의 교감조차 어려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며, 넓은 시야를 비전문성의 증거로 간주한다. 사회의 엘리트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며, 경제적 수요에 부응하는 교육이 이를 부추긴다는 것은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다소 위악적으로 서술한 우리 문명의 토대는 그러나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자신의 근시안적 이익만을 위해 행동할 만큼 이기적이지 않다. 이타성이 최고 수준의 이기적 선택임을 밝혀주는 생물학적, 역사적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지식이든 재산이든,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과거의 유산과 동시대인들에게 빚진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산업문명을 탄생시킨 사유화(인클로저)에 저항하는 공유화(커먼즈)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청년세대는 대학이 가진 권위와 대학 자체의 경제주의에 저항하면서 비제도권에서 폭넓은 지식을 탐구하는가 하면, 유목민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꿈꾸며 실천한다.

그럼에도 이런 경향은 아직 비주류에 머물고 있다. 주류의 사고와 행동은 여전히 과거의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며, 그만큼 전면적 변화는 요원하다.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마저 현재 궤도에 결박된 삶과 이를 거부하는 앎 사이에서 자기분열을 겪으며 조금씩 열정을 소진해간다. 문명의 전환은 명백한 시대적 과제이지만, 그것을 분명한 언어와 힘찬 주장으로 제시하고 많은 이들과 공유할 때만효과적으로 이행될 수 있다. 경제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우리의 존재와 관계를 틀 짓는 개인주의와 분과주의, 실증주의를 극복하기는 훨씬 어렵다.

 

생태문명은 전환의 방향이다

생태문명은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개념으로 제안됐다. 생태는 지구상 모든 존재와 생명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며, 문명은 사회시스템을 구성하는 모든 분야가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생태문명은 기후변화나 환경파괴의 문제와 연관이 깊지만, 그것을 넘어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지구 전체의 생활양식을 아우르는 말이다. 생태문명은 생태와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전환의 방향을 가리킨다. 경쟁하고 배제하는 게 아니라 협력하고 공유함으로써 적절한 물질적 수준과 최고의 정신적 수준을 가진 문명을 만들자는 이 주장은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유토피아적인 관념인지도 모른다.

생태문명이라는 단어는 여러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지구헌장: 2000년 유엔총회에서 발표된 지구헌장은 “지구는 우리의 집이며 지상 모든 것의 집이다. 지구는 그 자체로 살아있다. 인간은 훌륭한 삶의 형태와 문화를 가진 지구의 한 부분이다”라고 선언했다. 또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지구를 보호하거나 우리 자신과 다양한 생명을 파괴하는 것,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자신과 지역사회, 소유와 존재, 다양성과 획일성, 단기와 장기, 사용과 육성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산업기술문명사회를 재고찰해야 한다”고 했다. 지구헌장은 1992년에 열린 역사적인 리우 환경회의 이후, 유엔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영성적 지도자와 NGO들이 제시한 환경보존과 지속가능개발 원칙을 바탕으로 1994년 초안을 마련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네덜란드 정부의 지원으로 1995년 30개국 대표와 70개 이상의 단체가 모인 가운데 첫 번째 국제워크숍이 열렸고, 1996년 지구의회가 조직돼 5년간의 검토와 보완과정을 거쳤다. 리우 회의의 성과인 ‘아젠다21’의 점검과 지속가능발전목표의 형성에 깊이 관여해온 지구의회가 발표한 2002년 보고서는 지구헌장의 원리를 “생태문명의 원리”라고 명시했다.

중국정부: 중국은 199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지속가능발전을 국가발전전략으로 채택했다. 지속가능발전은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1987년 발표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라고 정의한 개념이다. 그런데 10년 뒤인 2007년 제17차 당대회에서는 지속가능발전 대신, 생태문명을 건설하자는 제안이 등장한다. 이는 지속가능발전이 제시하는 경제성장과 환경보존의 상호관계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생태문명은 2012년 공산당 당헌에 포함돼 정치기본노선이자 국가통치전략으로 격상하며, 이때 권력을 승계한 시진핑 주석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목표로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생태문명 건설이 조화를 이루는 ‘오위일체론’을 제시한다. 2018년 생태문명 건설과 환경권을 담은 헌법 수정안이 통과됐고, 행정부처의 대대적 개편에 따라 기존 환경보호부를 포함한 6개 부처와 기구의 환경오염 관리 기능을 통합한 ‘생태환경부’가 탄생했다.

중국의 생태문명 정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모범이 될 만큼 혁신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현실이 따르지 않는 이상주의이자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새로 부상하는 녹색경제에서 세계시장 제패를 노리는 ‘시진핑의 세일즈 전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유엔은 중국정부를 지지해왔다. 유엔환경계획은 2013년 중국의 생태문명을 지지하고 확산시키는 결의안(결정 27/8)을 채택했다. 또 2016-2030년을 목표연도로 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수립하면서 중국을 적극적인 동반자로 끌어들였다. 2016년 유엔환경계획이 발행한 중국생태문명 홍보책자 『Green is Gold』(“청산녹수가 금산은산”이라는 시진핑 발언을 인용한 제목)는 “중국의 생태문명 건설노력은 2030 아젠다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의 확산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라며 혁신, 조화, 녹색, 개방, 공유를 원칙으로 내세운 제13차 경제개발계획(2016-2020)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우리의 삶은 생태적 원리로 재조직돼야 한다

2015년은 생태문명 개념 확산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 그 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 환경회의는 지구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에 비해 섭씨 2도 이하로 억제하고, 가능하면 섭씨 1.5도 이하가 되도록 노력하자는 결의안인 파리협약을 채택해 198개국의 서명을 받았다. 각국이 이행계획을 마련해 보고하고 유엔이 이행을 감시하기로 함에 따라 한국도 2030년 이산화탄소 배출추정치의 37%를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그러나 전체 탄소배출량의 12%를 차지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4월 이 협약을 탈퇴했다. 한국의 에너지 전환 속도 역시 약속이행을 담보하기 어렵다.

파리협약이 체결되기 몇 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리우 환경회의 이후 50년(2012년)이 되도록 유사한 회의와 결의만 계속됐지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는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에 나오는 한 대학생은 2011년 유엔환경회의장에서 각국 대표들을 향해 “당신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회의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화가 없이는 기후변화를 막을 수도, 이를 부추기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자원착취적 경제구조를 억제할 수도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적, 종교적, 철학적 각성을 촉구하는 선언이 이어졌다.

찬미받으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6월 자신이 주제 선정부터 집필, 발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주도한 첫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했다. 회칙이란 보편교회에 대해 교황이 발표하는 공식 사목교서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윤리적 문제에 비춰 해석하고 적용원리와 방안을 제시한다. 회칙의 핵심은 통합생태론인데, 이는 생태위기가 비단 환경문제가 아니라 경제사회적 조건과 결합돼 있기 때문에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풀어가야 하며, 이를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경제와 발전에 대한 다른 이해방식을 찾으라는 요청, 모든 피조물의 고유한 가치, 생태계의 인간적 의미” 등을 고려할 것을 주문했다. 통합생태론은 생태문명과 동의어이며 유엔과 지구헌장 그룹, 주요 종교지도자들, 과학계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다.

클레어몬트 컨퍼런스: 같은 2015년 6월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에서는 과정신학자(과정신학은 앨프리드 노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응용한 미국의 진보신학운동이다)이자 환경사상가인 존 B. 캅 주니어의 주도로 ‘대안을 잡기: 생태문명을 향하여’라는 주제의 국제 컨퍼런스가 열렸다. 생태문명이라는 주제로 열린 사상 최대의 학술행사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1500여명의 사상가, 작가, 활동가,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을 끌어 모았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기후변화에 당면한 인류의 미래를 토론했다. 컨퍼런스 이후 주최측은 행사의 취지를 잇기 위해 비영리법인인 ‘생태문명연구소(Institute for Ecological Civilization)’를 만들었다. 이곳은 지속가능하고 생태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학제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지방정부 및 연구기관, NGO와 협력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삶이 어떤 방식으로 재조직돼야 하는지 규명하는데 헌신한다.

세계종교의회: 1893년 창설돼 종파를 초월해 가장 많은 종교인이 모이는 세계종교의회는 2015년 10월 유타주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행사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면서 생태문명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새로운 생태문명이다. 이는 생명의 다양성이 확장되고 평화, 정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되는 세계이다. 우리는 지구공동체 안의 인간 가족으로서 생태문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 선언은 지구공동체(지구상 모든 생명의 공동체)라는 상위 시스템에 속한 인간사회의 하위시스템으로 생태문명을 규정한다.

이밖에 생태문명과 유사한 개념은 적지 않다. 문화사학자이자 환경사상가인 토마스 베리는 물리학자 브라이언스 윔과 공저한 『우주이야기』(1997)에서 생태대(Ecozoic Era)라는 조어를 썼다. 지질학 용어를 차용한 생태대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생명중심주의, 지구중심주의로 옮겨간 시대이며, 이를 실현하려면 지구와 적절한 관계를 맺으려는 인간의 결정과 투신이 중요하다. ‘만인과 만물이 하늘(物物天 事事天)’이라며 공경의 대상을 한울과 사람을 넘어 만물(동식물)까지 확대한 최시형의 동학사상, 동학정신을 계승해 산업문명의 위기와 기계론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간 안의 우주생명’을 도모한‘ 한살림 선언’(1989) 역시 생태문명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생태문명은 진정한 글로컬 문명이다

생태문명 담론은 여전히 형성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따르면, 생태문명은 실체가 아닌 과정이다. 생태문명을 위해서는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과 단체가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유기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해야 한다. 문명의 토대를 바꾸기 위해 철학, 종교,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를 가로지르는 학제적 구상이 필요하며 이론과 실천, 담론과 정책이 만나야 한다. 견고하게 형성된 현재 상황을 개선하는 데서 시작하기보다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미래를 꿈꾸면서 이를 실현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되짚어 내려오는 과감한 혁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생태문명의 시공간은 산업문명의 시공간과 현저히 달라질 것이다. 산업문명에서 미래는 무한히 진보하고 확장되는 시간이다. 과학기술은 발전하고 생산력은 증대하며 경제는 팽창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 용량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생태문명에서 미래는 순환하는 시간이다.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모두 써버리는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아니라 가을에 추수를 마친 뒤 이듬해 봄의 파종을 위해 씨앗을 보관하는 것처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미래, 즉 자본가와 도시노동자가 아닌 농부의 시간이 될 것이다.

생태문명의 공간은 이중적이다. 산업문명처럼 생태문명은 글로벌 문명이다. 서구 근대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미 전 세계로 퍼져나간 지금, 지구화 이전 삶의 형태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산업문명이 차등근대화와 분업을 통해 전지구적 착취구조를 형성한 것과 달리, 공동체에 기반한 에너지 자립과 지역순환경제를 추구하는 생태문명은 보다 평등한 세계를 만들 것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지구를 고려하며 살아가는 글로벌 문명인 동시에, 마을 단위로 각자의 삶을 꾸리고 실험하는 커뮤니티 문명이다. “범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에서 실천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구호는 지역의 차이를 활용하는 후기자본주의의 경영전략이 아닌, 생태문명의 구호로 전유돼야 한다.

앞으로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에 연재될 국내외 필자들의 글은 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가 미국 과정사상연구소와 생태문명연구소, 중국 후현대발전연구원, 한국 지구와 사람 등 국내외 여러 기관과 협력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개최한 컨퍼런스의 성과물이다(2017년 11월 클레어몬트에서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 2018년 10월 파주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생태적 전환’, 2019년 10월 서울에서 ‘생태문명을 향한 전환: 철학부터 정책까지’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생태문명을 향한 담대한 꿈과 실천적 제안들이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앞당기는데 영감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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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것은 엄동설한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굳굳히 광장을 지켜냈던 촛불시민들이었다. 하지만 그 항쟁의 과실은 고스란히 야당 정치세력에게 돌아갔다. 이후 시민들에게는 단지 선거 당일의 투표와 자신들에 대한 지지 그리고 상대당에 대한 반대만이 요구되었을 뿐, 더 이상의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대의민주주의는 요술방망이였고, 이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정당’만 쥐고 있으면 누가 싸웠든 누구의 희생으로 획득되었든 권력은 언제나 그리고 철저하게 그들의 소유물이었다.

동지는 간 곳 없고, 탄식만 남았다.

 

‘대의 원리’에 근거하여 대표자만이 정책결정 권한을 독점한다

흔히 대의제는 민주주의와 등치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하면 대의제는 하나의 통치기구의 구성 원리, 또는 국가의 의사 결정 원리로서 단지 민주주의의 하위 체계일 뿐이다. 그것은 권력분립, 선거제도, 정부 형태, 지방자치제도 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여러 형식 원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용어법상 직접 민주주의는 직접 결정방식, 대의제의 간접 민주주의는 간접 결정방식이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한편 의회민주주의란 의회 중심의 통치 질서에서 파악되는 것으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정부 형태와 관련된 개념이며, 이는 단지 대의제의 한 형식에 속할 뿐이다.

특히 선거로 선출된 의원은 특정 선거구민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대표하고 전체적인 공공복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대의제의 이론은 명령 위임을 부정하고 자유 위임을 주창하고 있는 바, 이는 시민 세력을 배제시키면서 그와 유리되어 결국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성격은 프랑스와 영국 대의제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결국 대의제라는 간접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고착되었다. 부르주아 세력은 국민세력을 동원하여 군주를 타도한 뒤 자신들의 정파 간의 무력적 권력 투쟁을 선거를 통한 정당 간의 권력 교대 혹은 경쟁이라는 ‘대의제’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기제를 창출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의원)는 특정 선거민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전체 국민을 위한 전체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국민에 책임을 지는 명령 위임을 배제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명령 위임을 배제시킨 바로 그 순간 선출된 대표자는 국민에 봉사하는 위치로부터 국민 위에 군림하는 위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대표자의 결정은 언제나 ‘전체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전체 국민’이라는 실체가 없는 관념적 존재일 뿐이다.

대의 관계에서 대표되는 실체는 없으며 대표하는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는 행위와 대표자가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행위뿐이다. 그리고 대표자의 이러한 행위는 ‘전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그리하여 국민을 구속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의제에서의 대표자란 더 이상 선거민의 단순한 대변자가 아니며 대리인(Agent)이나 수임자(Kommissar)도 아니다. 그는 ‘전체 국민’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언제나 ‘공명정대’하게 행동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결정과 판단에 영향을 주는 어떠한 힘으로부터도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된다. 물론 이러한 논리의 배경에는 탁월한 인물이 무지몽매한 국민의 의사나 명령에 따른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는 우월적 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국민들은 오직 자신들을 선출할 ‘권리’ 혹은 ‘자유’가 있을 뿐 통치는 자신들처럼 탁월하고 고귀한 사람들만이 담당할 고유 영역이다.

역사적으로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으로 마무리되었고 시민 세력은 탄압을 받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의제는 굳건한 통치원리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국민이 직접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며, 따라서 당연히 통치자와 피치자가 별개의 존재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통치자와 피치자가 구별된다는 사실은 결국 대의제가 국민의 자기 통치를 통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의제는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대의 기관을 통한 통치를 의미한다.

이러한 대의제에서 무엇보다도 대표자의 독립성 보장이 강조된다. 왜냐하면 대표자는 국가의사 결정에 있어서 항상 피치자(被治者)보다 탁월한 능력이 있으므로 대표자가 피치자로부터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대표자의 올바른 결정에 장애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민의 특수 이익보다는 일반 이익 즉, 전체 이익이 존중되며, 무엇이 전체 이익인가에 대해서는 오직 대표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대표자에 대한 시민의 통제는 철저하게 관심 밖의 문제로 전락된다. 대중이란 기껏 무지몽매한 존재이므로 애초부터 일체의 정치적 권한을 줄 필요가 없거나 혹은 체제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어떠한 정치참여의 기회도 제공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대의제는 이른바 ‘대의 원리’에 근거하여 시민을 정치적 권한으로부터 배제시킨 채 대표자만이 정책 결정의 권한을 가지고 있게 됨으로써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은 명망가인 대표자에게 독점되었다. 결국 이러한 명망가 중심의 이른바 ‘명망가(혹은 명사, 名士) 민주주의’의 통치가 대의제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명망가에 독점된 이러한 배타적 결정권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익에 기초하여 행사되기보다는 대표자 개인의 시각에서 그리고 자신들과 관련된 이익에 의하여 행사된다. 나아가 이들 대표자는 반드시 뛰어난 자질에 의하여 대표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 혹은 이른바 ‘이너서클’의 인간관계 그리고 그를 앞세운 배후 세력의 사회경제적인 힘에 의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성격은 과연 대의제가 사회 구성원 전체 이익의 공공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가, 즉 대의제 하에서 특수 기득권의 부분 이익(특수 이익)의 지배로부터 공적(公的) 업무의 공공성 보장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결국 대의제란 대표자의 활동에 따르는 위험성에 대한 담보가 오직 대표자의 양심과 인격에만 맡겨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 대표자의 양심과 인격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익 추구로 변질된다(여기에는 선거와 당내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갖가지 정치공학도 당연히 포함된다). 대의제가 지니는 근본적인 제도적 허약성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루소는 대의제 하의 국민은 대표자를 선출할 때만 자유로울 뿐 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노예상태로 전락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직접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그러므로 대의제 민주주의는 공공선(公共善)이나 일반 의사의 지배가 아니라 정당 또는 정치인의 ‘부분 의사’가 지배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다시 말하면,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특정 집단의 이익과 가치가 특정 정당에 의하여 대표되는, 즉 ‘부분 의사’가 대표되는 정치 제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최소주의적’ 대의제 민주주의 개념은 민주주의 가치를 축소시켰으며,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결코 보장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시민의 정치 참여에 의하여 자유, 평등, 정의라는 기본 가치를 실현시키고 시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시민의 통치 형태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신을 정확하게 실현하는 방식은 바로 직접 민주주의이다.

화, 2021/01/1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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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집권 4년은 세계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트럼프는 미국식 대의 민주주의의 ‘완벽한’ 절차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선출된, 그것도 전통에 빛나는 미국 공화당의 후보로서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권 이후 백인우월주의의 인종차별 정책과 극단적 미국 이기주의에 토대한 국제질서 부정으로 일관하면서 전 세계를 경악시켜왔다. 마침내 극우파 시위대의 의회 난입이라는 폭거는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조종을 울리는 신호탄이다.

 

미국,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세계적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처음 미국에 건너간 이주민들은 같이 배를 타고 와 정착한 동료들과 생활의 근거지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곧 town이었다. 인구가 약 2천 내지 3천 명에 이르렀던 town에서 주민과 밀접한 업무는 자신들의 손에 의하여 마을집회(town-meeting)에서 직접결정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주민들이 직접 처리할 수 없는 업무는 마을에서 선출된 사람들에 의하여 처리되었는데, 그들은 주민들이 위임한 실무적인 일만 처리하였을 뿐, 공적인 일에 대한 판단은 주민들의 직접 투표로 결정하였다. town에는 주요 행정기능을 수행하는 다수의 관리들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마을집회에서 직접 선출되었고 그 공적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책임이 뒤따랐다.

이러한 주민 자치제도는 특히 뉴잉글랜드에서 1650년에 확고하게 정착되었고, town의 독립성 역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다.

미국이 세계적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그 직접민주주의의 힘에 기초하고 있었다.

 

차별성 없는 미국의 두 정당, 양당제의 역설

세계적인 석학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명예교수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눠진 미국의 정당 체제에 대하여 “기업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측면에서 사실 1당 체제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미국을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 체제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체제 하에서 일반 대중들은 통제당하고 주변화 한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상은 특히 미국과 같이 기업들의 주도력이 강한 사회에서 더욱 뚜렷하다면서 선거에서 홍보 대행 산업이 활개를 치는 것은 대중을 통제하고 주변화 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경제는 1970년대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금융화와 상품 수출이 강화되는 방향이었다. 여기에 부의 집중, 인구의 1%에 부가 몰리는 과격한 악순환을 조장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력 집중도 초래되었으며, 경제 집중을 유도하는 국가 정책들이 쏟아졌고, 그러면서 정당들은 자연스럽게 자본의 휘하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촘스키 교수는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별로 다르지 않다면서 미국의 차별성 없는 양당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사회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도 일찍이 “정치란 대기업들이 사회에 던진 그림자”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상황은 “언론 등 정치 선동의 수단을 지휘하면서 은행과 부동산, 산업을 사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사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에 권력이 있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석학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ugene Stiglitz)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미국 사회가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가장 잘 발전된 국가로서 공정한 사회의 모델로서 자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국가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미국 의회 의원 대부분은 선출되는 순간 상위 1%의 돈으로 유지되는 상위 1%의 멤버들이 되며, 무역과 경제정책의 핵심 고위관료들은 대체로 상위 1% 출신들이다. 또한 미국의 대법원은 선거비용 지출 제한을 철폐함으로써 기업이 정부를 돈으로 움직일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驕兵必敗, 교만한 병사는 필패한다

이제까지 미국의 양당 제도는 장기적으로 오랫동안 미국 정치의 장점으로 역할 해왔다.

하지만 그 장점은 이제 다원화되는 사회계층의 이해와 다양화되는 사회문제를 포괄해내는 데 경직성을 노정시키면서 오히려 미국 쇠퇴의 중요한 단점으로 작동하고 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광범한 대중에 토대한 사회(민주)당의 존재에 의하여 대중들의 이해가 보다 강력하게 정당정치에 반영됨으로써 그만큼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의 원칙 못지않게 소수 의견에 대한 존중 역시 중요하다. 이 점에서 독일의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는 소수 정당의 존립 근거를 마련해줌으로써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의 소수 그룹을 존중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제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레이건 정부는 부자들에게 세금을 덜 내게 하고, 군사비 등을 제외한 공공 서비스와 공공 투자를 줄였다”라며 미국 사회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레이거노믹스 시대 이래 상위 1%의 소득은 지속적으로 증가한 반면 나머지의 소득은 계속 정체되고 끔찍한 실업에 시달렸다고 비판한다. 그는 “다가올 시대의 중요한 도전은 99%의 번영을 이룩하고 그들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정치에 대한 금권의 지배는 이미 구조화되었다. 개방형 경선과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므로 특혜 정책을 위하여 돈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 대기업의 정치자금 기부가 기부 액수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다. 미국 정치제도는 기업들의 로비 자금에 의하여 운용되고 있고, 이로 인하여 정작 교육, 의료, 에너지 등 대중들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경제 분야는 점점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미국이 현재 세계에서 코로나 19 환자와 사망자가 많은 나라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교병필패(驕兵必敗), 건강한 신대륙의 건국 정신은 사라지고 패권국가로 너무 오래 교만하게 군림해왔다. 미국은 더 이상 아름다운 나라, 美國이 아니다. 쇠락의 추세는 비단 정치만이 아니라 그간 미국이 자랑하던 외교, 인권, 경제 그리고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현시되고 있다.

더 큰 비극은 바이든 정부에서도 그다지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소준섭

화, 2021/02/0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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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 두 대통령 스캔들로 2019년을 뜨겁게 달군 베네수엘라 사태가 일어난 지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국회도 아닌 광장에서 스스로 대통령으로 ‘셀프선언’한 야당 과이도 의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일이다. 그는 2019년 1월 베네수엘라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선에 성공한 마두로 대통령 취임식 직후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물론 이는 라틴아메리카 전대미문의 정치권 ‘희극’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어설픈 시나리오와 기획,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발연기’가 그야말로 압권인 ‘작품’이었다. 국제사회를 상대로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위기’라는 설정으로 일정부분 ‘흥행’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을 했다. 미국이 주도하고 이에 보조를 맞춘 외신들의 호들갑스러운 ‘공모’ 덕이다.

과이도 의원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셀프임명’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 열강들은 앞다퉈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발표를 쏟아냈고, 아쉽게도 한국도 그중의 하나였다. 애초부터 적법한 절차나 정당성을 상실한 이 같은 ‘선언을 위한 선언’은 그저 베네수엘라에 대한 국제사회의 ‘명분’있는 개입, 더 나아가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위한 시작이었을 뿐이다. 야당조차 국내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민주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베네수엘라 야권이 지난 2년간 보여준 행보는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다.

게다가 민주적 해결이라면 대화 혹은 선거라는 장치를 통하는 것인데, 야당은 여당 지지층의 결집에 대항할 세력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가 더는 해법이 되지 못했다. 야권과의 정치적 합의를 끌어내려는 마두로 정권의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합의된 대화에 불참하거나 불이행하는 방식으로 한 걸음의 진전도 허용하지 않는 전략으로 일관해왔다.

지난 2년간 베네수엘라 부르주아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G4의 야당 연합은 줄곧 국내적으로는 폭력적인 가두시위를 선동하고, 대외적으로는 특히 미국의 군사개입을 노골적으로 지속해서 요청해왔다. 이는 같은 해 9월 미주연합기구(OEA)의 미주상호방위조약(TIAR)을 발효, 즉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개입을 공식화하는 수순으로까지 이어진 바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난 2년간 베네수엘라 사태의 정점에 있던 자칭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홀로 ‘군림’했던 과이도 의원의 퇴장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우선, 지난해 12월 베네수엘라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이 277석 중 256석을 얻어 의회 권력을 다시 회복했고, 의회 권력을 통해 현 정권을 사보타지 했던 야당은 이제 국회라는 ‘합법적’인 정치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베네수엘라 야당 내에서는 물론 일반 야당 지지층 국민 사이에서도 처음부터 지지가 높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가장 큰 기반은 미국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 뿐이다. 국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상태로, 명분은 고사하고 적법한 정치적 절차나 정당성 상실, 게다가 국경을 맞대고 군사적 긴장 관계에 있는 콜롬비아 마약 범죄조직과의 연루설과 불법 자금 유용 등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은 여전히 산적하다.

아래 사진[사진1]은 얼마 전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미국 의회를 ‘점령’한 일을 풍자하며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과 베네수엘라의 트럼프 지지자들”이라는 태그를 달고 SNS로 공유되는 사진의 일부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의 담을 넘는 모습과 과이도 의원이 2020년 베네수엘라 의회로 들어가기 위해 의회의 ‘담’을 넘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다.

베네수엘라에서 과이도 의원은 이미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그를 빗댄 풍자와 해악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사진1] 베네수엘라에서 공유되는 과이도와 미국을 풍자하는 SNS 캡쳐화면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2019년 국회의원 의장 임기가 끝나는 과이도 의원을 이어 새로운 의장을 선출해야 했던 2020년 초 베네수엘라 의회에서 일어난 진풍경이다. 새로운 국회의장 선출을 ‘보이컷’한 과이도 의원이 뒤늦게 의회로 진입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2019년 과이도 의원이 베네수엘라 국회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16년 거대 야당 연합으로 차베스 진영에서 국회 권력을 가져온 야당의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즉 국회의장 자리를 주요 거대 4개 야당(G4)에서 번갈아 맏기로 하였고, 그 결과 과이도 의원 소속 정당인 민중의지(Voluntad Popular)당 차례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임기가 끝나는 2020년 1월 그는 국회의장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고, 의석수 불충분이라는 핑계로 선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소수의 과이도 지지자를 제외한 야당 연합 G4은 정의제일당(Primero Justicia)의원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며, 지난 1년간 ‘명실상부’하게 두 명의 국회의장을 두는 초법적 선택을 하며, 야당의 끊임없는 자중지란이 이어졌다.

스스로 국회의장이라는 자격을 내세워 대통령으로 셀프선언하고 1년이 지났음에도 이렇다 할 정치적 ‘성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야당 내 자중지란으로 귀결되었으나, 과이도 의원의 ‘위상’에 이만저만한 생채기가 적지 않았음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과이도 의원은 베네수엘라 야권과 그 지지층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쏟아진 지나친 해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기실 베네수엘라 사회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정치적 위상이나 헤게모니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져 왔다. 어쩌면 베네수엘라 야당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줄곧 ‘무대’에 올랐던 그는 국제사회가 유일한 그의 관중이었을 지도 모른다.

미국의 그림자가 강력히 드리워진 베네수엘라의 주요 4대 야당 연합은 속칭 G4라 부른다. 과이도가 속한 소수정당인 민중의지당을 포함, 민주행동당, 새 시대, 정의제일당 등을 포함한 이 연합은 가장 극우적 성향의 집단이다.

한편, 과이도 의원의 소속 정당인 민중의지당의 실세는 레오폴도(Leopoldo)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과이도 의원의 정치적 ‘멘토’이기도 하다. 차베스 사망 이후 끊이지 않았던 폭력사태(병원건물방화, 길거리 폭력시위 등)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대법원판결에 따라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얼마 전 일어난 군부 쿠데타에 가담한 정황이 드러나자 주베네수엘라 스페인 대사관에 ‘신변 보호’를 요청, 지금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생활하고 있다.

참고로 그의 아버지 레오폴도 길(Leopoldo Gil)은 지난 2015년 스페인 국적을 취득, 현재스페인 보수정당이자 집권당인 인민당(Partido Popular)소속으로 2019년부터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과이도 의원의 대통령 ‘셀프선언’ 이후 스페인이 과이도 ‘체제’를 옹호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레오폴도는 법의 심판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였으나, 외신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잠시 해외로 몸을 피한 ‘애국자’인 듯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정작 베네수엘라 국민이 궁금한 것은 그의 ‘애국행위’가 아니라, 그가 마드리드 고급 아파트에 매달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진 약 만유로(한화 1300만원)의 출처다.

최근 치러진 총선의 결과는 베네수엘라의 핑크빛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막대한 자본을 가진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의 야당 연합 G4의 계속되는 정치권 사보타지,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병적인 집착은 바이든의 민주당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 상기해보면, 베네수엘라를 미국 안보의 ‘위험’으로 간주한 것은 2015년 오바마 시절의 일이다.

과이도의 등장으로 국제사회가 떠들썩할 때, 카라마스 도심의 한 공원에서 레크레이션을 즐기는 모습

지금까지 베네수엘라를 다루는 거대 자본의 미디어들은 대부분 진실보다 자극적인 소재와 왜곡된 기사를 쏟아냈다.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사실관계 파악이 아닌 외신을 번역해서 나르는 일이 전부였다.

2019년 과이도 의원의 등장으로 야단법석을 떤 것은 오히려 국제사회였을 뿐 정작 베네수엘라는 평온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베네수엘라의 변화가 이를 희망하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한, 그들의 시간은 묵묵히 그들의 편에서 흐를 것이다. 비록 국제사회의 부르주아 계급들이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선택을 끊임없이 막아설지라도.

이제는 그만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그들의 미래를 맡겨야 하지 않을까.

 

정이나

목, 2021/02/0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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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즉 세계적 유행병인 코로나19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의학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 ‘이동량’이나 ‘사회적 거리두기’, ‘사적 모임 제한’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또한 사회학적 문제임을 알게 된다. ‘사회학적’이라 함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어떤 무엇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발병 및 확산 초기에 그 ‘어떤 무엇’은 사회적 심성 또는 지배적 규범의 문제로 해석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유교 문화권 국가의 ‘순종적’ 국민 덕에 방역이 잘 된다고 해석되었다. 물론 신천지 등 일부 개신교 집단에서 전체 사회보다 자기 집단에 ‘순종적’인 문화가 방역에 가장 큰 장애가 됨이 곧 밝혀졌지만 말이다. 이처럼 사회적 관계의 질서에서 ‘집단도덕’이 핵심이라고 보는 견해는 근현대 주류 사회학의 고전적인 주장이다.

다음으로, 그 사회적인 ‘어떤 무엇’은 공공의료제도라는 ‘제도’의 문제로 이해되었다. 특히 한 국제기관에서 독일의 공공의료제도를 높이 평가하여 한국보다 방역에 앞서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내 공공의료제도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그와 같은 의견이 대두했다. 그러나 스페인 등 여타 유럽 국가의 환자까지 실어와 병상을 제공했던 독일에서 코로나19 방역이 실패하여 사회폐쇄가 연장되면서, 이런 관점은 설득력을 잃었다. 또 공공제도가 잘 갖춰진 대표적 북유럽 복지국가인 스웨덴에서 난데없는 ‘집단면역 실험’을 했다가 실패하면서, 단순히 ‘제도’만의 문제가 아님이 명백해졌다. 이렇게 의료제도를 문제의 핵심으로 보는 경우는 의료사회학적인 입장이다.

최근 들어 코로나19의 감염 동선을 추적하기 어려운 경우가 잦아지면서, 사회적인 ‘어떤 무엇’의 핵심은 역학조사 및 그와 관련된 개인정보 수집의 문제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회폐쇄 여부, 즉 개인들의 이동량 통제 문제로 넘어갔다. 결국 3차 유행에 와서는, 역학조사 중심의 초기 감염병 대응에서 실패하여 익명적, 집단적 자유제한 정책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던 유럽과 유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서구와의 차이가 나타났다. 서구에서는 사회폐쇄에도 불구하고 이동량이 크게 줄지 않아서, 젊은이들의 파티와 사적 모임에서의 감염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리하여 학교나 직장과 관련된 이동량까지 줄여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이동량 감소로 상당히 잘 연결되는 결과를 보여왔다.

지금까지 경과를 보면, 결국 사회적인 ‘어떤 무엇’에서의 핵심은 ‘사회적 거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단순히 정부 방침에 잘 따라주는 ‘순종적’ 심성의 문제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의 문제로 볼 것인지가 핵심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또 다른 ‘사회적 거리’의 표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택배 노동자의 과로, 아파트 경비원 폭행 주민, 정인이 사건 등의 아동학대 부모에 대한 분노를 통해 나타났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에 대한 공감은 인간적 공감의 형태로만 표출될 뿐, 과로를 강요하는 산업의 이익분배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독일에서 간호 및 돌봄 노동자의 처우개선에 대한 문제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집단적 목소리로 표현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아파트 경비원 폭행에 대한 분노 역시 노동권의 문제보다는 개인 인권의 측면에서 공감대가 확대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살인과 구별되기 힘든 양상의 아동학대에 대한 분노는 단순히 인격적 분노가 아니라 제도의 작동불능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아동학대 신고 절차를 제대로 따른 행위자가 시민들 개인에 한정되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찰이나 입양기관과 같은 조직적 행위자는 모두 책임회피와 무시로 일관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학대 부모에 대한 인간적 분노 못지않게 컸다. 그러나 정인이에 대한 젊은 부모들의 진정성 있는 추모의 물결은, 그 이전의 세대들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전경이기도 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정인이에 대한 추모가 ‘남에 대한 추모’라는 거리감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거리감의 변화

택배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학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2차 집단’ 관계 속에서 개인들이 느끼는 ‘사회적 거리감’이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인들은 ‘남’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다. 과거 ‘정’은 인연 맺기와 유관한 친밀감이다. 일회적이거나 익명적인 성격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공감이 아니라, 인연 지속의 기대감 속에서 호혜적인 감정을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사회학에서 말하는 ‘1차 집단’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택배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아동학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연고가 배제된’ 공감으로서, 사회학에서 말하는 ‘2차 집단’적인 관계에 가깝다. 주류 사회학에서는 ‘2차 집단’ 관계의 핵심은 이익이라고 보았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결합한 ‘차갑고’ ‘계산적인’ 관계라고 규정했다. 물론 거기에도 호혜성이 성립하나, 그것은 ‘인격적 친밀감’이 아니라 ‘공적 의무’에 기초한다. 즉 만일 공감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한층 추상적인 시민적 공감이다.

서구에서는 그런 시민적 공감이 공적 제도화를 낳았고,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다양한 절차들이 확립되었다. 즉 서구에서 제도화는 곧 규범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실현 역시 의미한다. 그런데 택배 노동자나 아파트 경비원의 경우를 통해 보이듯이, 한국에서 공적 공감은 제도화로 쉽게 연결되지 못한다. 공감되는 개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 자체가 기대되기 어려운 현실이다. 제도화가 어려운 이유는 규범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고용자의 산업 논리가 더 우선인지, 아니면 피고용자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가 사회적으로 논의된 적조차 없어서 규범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규범의 상태이다. 또는 정인이 사건에서처럼, 제도화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그 제도는 작동하지 않는다. ‘남’에게 공감하는 개인들은 제도를 따름으로써 그 규범에 동조하지만, 제도를 지켜야 할 권력기관은 제도를 무시할 만큼 규범에 무지한 것이다.

시민 개인의 시민적 공감과 제도 규범 간의 이러한 괴리는, 아마도 민주주의 절차를 권위적으로 제도화한 한국 정치사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즉 제도화를 위해서는 대표된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대표자에게 이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에서는 이런 중간 과정이 아예 생략되거나 아니면 단순 절차적으로만 적용되어왔다. 권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유대상이 되어 그 자체가 이익으로서 분배된다. 권력을 대표자에게 이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권력 대표자에게 전달이 되지 않으므로, 개인들은 추상적인 시민적 공감의 수준을 넘어 사무치게 인격적인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제도화가 개인들의 마음과 괴리되어 있는 만큼, 그리하여 제도화가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권력의 표현이 되고, 그리하여 사회적 규범이 무엇인지 확인이 안 되는데 개인들의 감정만 확인되는 상태에서, ‘남’에 대한 격한 인격적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내 집단’과 ‘남의 집단’을 엄격하게 나누어 이질적으로 집단 관계를 규정하던 고전적인 사회적 관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오히려 ‘나’, ‘공감되는 다른 개인’, ‘권력기관’으로 상호작용의 대상을 삼분하여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고, ‘나’를 포함한 ‘개인’과 ‘권력기관’ 간의 권력 비대칭성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마음의 상태가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말하자면 시민 개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들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한국에서의 방역 성공은 권력기관에 대한 이러한 불신과 쌍을 이루는 듯이 보인다.

주권자로서 미약한 개인의 처지에서 신뢰할 수 없는 권력기관을 마주하여, 스스로 솔선수범해서 방역의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한국에서 지금까지 방역이 성공했던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한 방역 역시 서구의 방역 못지않게 위태로울 수 있다. 서구의 경우 개인 주권자 의식이 강한 개인들이 정부의 방역 정책을 불신하여 방역이 어렵다면, 한국에서는 제도적 권리가 약한 개인들이 최악의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방역 정책을 따르기 때문이다. 시민 개인들의 이런 자발적 동원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헌신적인 솔선수범이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제도화한 권리’의 형태로 보상받아야 한다. 현재의 방역 성공은 한국의 의료제도, 경제 제도, 이익분배 방식 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스스로 솔선수범하고 타인에게 마음 깊이 공감하여 ‘시민적 동원’의 최고치를 만들어낸, ‘좋은 시민’들 덕이기 때문이다.

 

홍찬숙

화, 2021/02/09-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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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를 직접 봤더니

얼마 전 경기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국회 전문위원이 작성한 검토보고서를 직접 읽고서 개탄하는 기고문을 발표하였다.

보건복지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를 읽어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상임위원회의 검토보고서라면 해당 정책을 논의하는 중요한 기초자료인데, 그 가운데 기본소득에 관한 사실관계(fact)가 틀린 곳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정책이 이런 허술한 자료에 근거하여 논의되고 결정된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 검토보고서는 기본소득의 기초적 개념조차 모르는 전문위원이 작성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동안 몇몇 기고에서 수석전문위원이 초선 의원 5~6명을 합한 것보다 힘이 세다는 것, 그것은 수석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 때문에 국회의원이 입법에서 소외되기 때문이라는 것, 이러한 폐단은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하여 드디어 참여연대가 이처럼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훼손하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는 것 등을 간간이 보아 왔다. 그렇지만 그저 문제가 많은 제도구나 라고 어렴풋이 느꼈을 뿐, 그 깊은 내막까지는 잘 몰랐었다. 그런데 이번에 검토보고서라는 것을 직접 보고 나니 그 폐해가 피부로 느껴진다. 이렇게 부실한 검토보고서로 저렇게 막강한 권한을 누리다니 얼마나 우려스럽고 위험한 일인지…(정원호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원, “국회의 기본소득 검토보고서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2020, 12,30)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는 단지 ‘검토’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지엄한 ‘선언’이요 ‘결정문’과도 같은 위상으로 된지 이미 오래다. 세계 의회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회공무원, 즉 입법관료에 의한 법안 검토 시스템이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입법관료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하지만 이른바 ‘국회 전문위원’은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국회에서 순환 근무하는 국회 공무원들일 뿐이다. ‘전문’이란 그 명칭과 부합되지 않는다.

 

국회는 입법관료의 하부 구조인가?

필자는 오래 전부터 국회 전문위원이 피감기관이나 행정부 소속기관 공무원에게 “갑중의 갑”이라는 ‘증언’을 많이 들었다. 그들이 법안과 예산에 대한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권한을 비롯해 국정감사 제도를 통하여 커다란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연전에 국회의 한 전문위원이 자신의 직무가 “국회의원과 비슷한 영향력이 있다”며 해당 상임위 소속기관에 국회의원급의 식사와 골프 접대를 요구했다는 논란이 각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국회 전문위원 스스로도 자신들이 국회의원에 준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실이다. 국회의원 스스로 부여받은 권한을 행사하지 아니하고 그 직무를 유기하면서 생긴 권한의 공백이 국회 입법관료들의 수중에 쥐어진 셈이다. 그러니 국회가 “입법관료의 하위 구조”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는 최근 “국회법상 전문위원은 국정감사를 지원하고, 법안에 대한 조사 등을 통해 검토보고서를 제출한다. 국회는 법안 심사 시, 첫 단계로 해당 법안에 대한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고, 전문위원의 검토보고가 국회의원들의 법안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며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훼손하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제도 폐지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국회란 숟가락만 얹어놓기선수들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국회가 법률 해석과 관련하여 법제처의 ‘유권해석’을 요청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었다. 그러나 법제처는 행정부 각 기관에 법률 문제와 관련된 자문을 수행하는 행정부의 일개 부처로서 국회가 그러한 법제처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하는 것은 전혀 위상에도 맞지 않고 자존심도 버려버린 상황이다. 또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회는 늘 자신들의 정쟁 문제를 검찰에 고소 고발하고 법원 판단에 맡겨놓고서 ‘하염없이’ 그 결정을 기다린다. 그런가 하면 국회 내에서 여야끼리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이제는 국회 사무처에게 ‘유권해석’을 의뢰한다.

매사에 숟가락만 올려놓는 자세로 일관한다. 이런 자세로 일관하니 마땅히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법률 검토도 (세계 의회사상 유례가 없이) 국회 공무원에게 맡겨놓고 이제 거꾸로 그 ‘검토’를 신주 모시듯 모시면서 ‘분부’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물론 국회의원 본인들은 자신들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자부할 게 분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법안을 ‘발의’하고, 본회의에도 열심히 출석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며, 매일 같이 상대당을 향해 질타한다. SNS 활동 또한 대단히 열심이다. 또 줄줄이 찾아오는 민원인과 이해당사자들 만나느라 분 단위로 약속이 잡혀있고, 게다가 지역주민들의 경조사를 비롯해 각종 모임 등등… 너무 바쁘고 너무 열심히 일하는 선량의 삶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것이다. 하지만 외화내빈, 속빈 강정이다.

 

근본을 잃게 되면 모든 일이 본말전도된다

오늘 우리 국회의 모든 왜곡과 혼돈은 근본적으로 국민이 부여해준 입법권 수행이라는 직무를 사실상 유기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만약 우리 국회의원들이 다른 나라 의원들처럼 법안 검토를 국회 공무원에 넘겨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불철주야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지금처럼 주야장천 아수라장의 정쟁에만 몰두하는 시간 자체가 없게 될 것이다. 또 마치 연예인처럼 SNS 활동과 ‘재담(才談)’에만 몰두하는 국회의원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기본과 근본을 잃게 되면 모든 일이 본말전도된다. 국민들이 부여해준 입법권을 스스로 수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면, 결국 내가 아니라 그 다른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국회의원 중 세계 의회사상 유례가 없는 이 왜곡된 전문위원 검토보고 제도를 개혁하여 자신들이 직접 수행해야 한다고 나서는 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아니 이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의원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언제 제대로 된 국회의원을 볼 수 있을까?

 

소준섭

화, 2021/02/1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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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이상 돌림병이 여전히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 전쟁판 같은 엄청난 불안과 공포,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미군사훈련을 꼭 해야 하나? 한국과 미국 군부는 신종 코로나 바리어스 감염증(COVII)-19)의 세계적 만연이라는 대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3월 둘째 주부터 9일간 한미연합훈련을 실시키로 했다. 참으로 어이없고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한미연합훈련은 실제병력이 투입되는 야외 실기동훈련(FTX, Field Training Exercise)이 아니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연합지휘소연습(CPX, Command Post Exercise)으로 시행될 예정이다(다음 <그림 1> 참조). 그 훈련 규모와 훈련 계획 등 세부사항은 양국 군부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림 1> 2021년 3월 실시 예정 한미훈련 개요 및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추진 현황 <출처: 동아일보 2021. 2. 15. A8면>

이 한미연합훈련은 사전연습인 연합지휘소훈련(CCPT, computer-simulated Combined Command Post Training)에 이어 위기관리참모훈련(Crisis Management Staff Training, CMST)이 진행되어 1부는 5일간, 2부는 4일간 실시된다.

그동안 한미양국은 이런 군사훈련을 매년 연례행사로 실시해왔다. 특히 주목할 점은 키리졸브 연습, 독수리 훈련,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 비질런트 에이스 연합공중훈련 등이 연중 계속 이어져왔다는 점이다(다음 <그림 2> 참조). 말하자면 한미 양국은 연중 한 차례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이름으로 수시로 군사훈련을 해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실시와 연기, 미실시를 반복해 온 한미군사훈련의 사례부터 살펴보자.

키리졸브 훈련은 2018년 3월에 실시되었으나 2019년엔 연합지휘소 훈련으로 축소되어 실시되었다가 2020년에 COVID-19 악화로 무기 연기되었다. 그리고 이번 2021년 3월에 컴퓨터 시뮬레이션방식으로 실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수리훈련은 2018년 4월에 실시되었으나 2019년 폐지되었고, 2020년 8월에 규모를 축소하여 실시되었다.

츨지프리덤가디언연습은 2018년 중단되었다가 2019년 8월에 연합지휘소훈련으로 대체되었고, 2020년 8월에 10일간 규모를 대폭 축소하여 실시했다.

비질런트 에이스 연합공증훈련은 2018년 12월에 다른 훈련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2019년에 아예 연기되었고, 2020년 4월에 4일간 실시되었다. 이런 군사훈련은 1년에 전반기화 후반기에 실시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북갈등이 고조되던 때나 남북대화가 진행되던 때나 가리지 않고 한미동맹을 내세워 한미연합 군사작전을 연습해 왔다. 이게 대한민국이 불완전한 주권국가임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림 2>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주요 한미연합훈련 진행현황 <출처: 문화일보 2021. 2. 15.>

이 군사훈련 실시와 연기, 폐지, 대체 현황에 관해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이번 2021년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통일부뿐만 아니라 외교부에서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견을 보여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와 같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보자고 생각했다면 그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지난 1월 노동당 제8차대회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과 첨단무기 반입 중단을 요구했다. 이런 그의 요구는 2018년 6월 11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성사와 4·27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에 비추어보아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특히 919 군사합의에 의해 군사분계선에 존재했던 양쪽 전방초소들을 파괴한 이후 아무런 군사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춰보아도 한미군사훈련을 이 시점에서 강행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이번 2021 한미연합훈련은 전시작전통제권의 한국으로의 전환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는 이번 한미연합훈련에서 미래연합군사령부의 완전운용능력(FOC, Full Operational Capability)을 검증해야 한다고 전해진다. 2020년 후반기에 실시되었던 한미연합훈련에서 완전운용능력을 검증해야 했으나 사실상 무산되어 예행연습만 실시되었다. 따라서 한국은 이번 상반기 연합훈련을 통해 완전운용능력을 검증하길 원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2021년 완전임무수행능력(FMC, full mission-capable) 검증까지 완료하여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완료하려면 이번 상반기 훈련과정에 완전운용능력 검증을 완료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 즉 한국군은 북한의 반발 등을 감안하여 훈련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완전운용능력 검증을 이번 훈련에서 병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 주장대로 별도의 시기에 별도 방식으로 얼마든지 검증할 수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전시작전통제권을 전환한다면서 굳이 한국군과 미군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연합군사령부를 구성, 운영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셋째, 한미 양국 군부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후 구성, 운영될 한미 미래연합사령부의 전시 지휘통제소 위치를 둘러싸고 견해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군은 수도방위사령부가 관할하는 남태령의 B-1 문서고를 전시지휘소로 선호하고 있고,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를 위한 리모델링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미군측은 이 전시지휘소를 성남시 미군 전용 핵 ‘CP 탱고, CP TANGO, Command Post Theater Air Naval Ground Operations; TANGO탱고’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 핵벙커는 구글 지도에 위치가 노출된 이 미군전용 지휘통제소이다.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하려면 한국군이 원하는 장소나 위치에 전시지휘소를 설치, 운영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넷째, 이런 한미군사훈련 실시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해 한미간 견해차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미군측은 COVID-19 등 이유로 미래연합군사령부의 완전운용능력 검증을 뒤로 미루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측은 아예 그런 이류로 한미연합훈련 자체를 연기하자는 주장을 왜 펴지 못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네 가지 의문조차 풀지 못하고 있으면서 안보공백 타령이나 하면서 자주국방을 말하는 게 우습지 않은가 묻고 싶다.

끝으로 묻는다. 이제 대한민국은 한미군사동맹이 우선인가 민족간 교류와 협력이 우선인가 여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언제까지 미국이 원하면 국토 어디에서라도 미군을 위해 군사기지를 제공해야 하는지 라는 물음에 응답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군사동맹만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필수조건인가? 그렇다면 남북대화나 남북교류와 협력은 접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제 한미군사동맹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남북관계 개선과 도약을 통해 한반도 평화 대전환을 추구하는 게 민족문제 해결의 급선무라는 가치전환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한반도 평화 대전환은 모든 국정목표의 우선목표요 대상이어야 한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주권국가임을 증명해 보여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주권국가임을 증명하려면 군사주권,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으로부터 어서 빨리 회수해야 할 것이다. 70년이나 철 지난 한미군사동맹의 낡은 신화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허상수

목, 2021/02/18-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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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에서 대충 파악이 되듯이 이번에는 우리나라 축산과 육식의 과다 섭취의 문제이다.

통계상 우리나라는 1인당 육식섭취량이 일본보다 2배 정도 많다고 한다. 1년에 먹어치우는 닭의 양이 2억 마리가 넘는다. 이것도 2019년 통계이니 코로나로 인해 집콕생활을 강요받았던 지난해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 가능할까?

그건 미국을 비롯해 외국에서 값싸게 들여오는 GMO(유전자조작농산물) 사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사료용으로 천 만톤 정도의 GMO 사료를 수입한다. 우리나라 쌀 생산량(2020년도 약 350만톤)의 약 세배 가까이나 된다. 수입량에서 짐작되듯이 우리나라는 많은 식용 가축을 키우고 있다.

불과 20~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농가는 대부분 소 한 두 마리를 키웠고 그 소들은 일소로 쓰이기도 하고 농가소득에서 짭짤한 부수입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료를 공급하는 곡물 수출국의 기상이 악화되어 사료값이 오르면 소를 한 두마리 키우는 농가는 버티기 힘들다. 또 부업으로 한 두 마리를 키우던 농가의 농민들이 나이가 들면서 사료 급여와 분뇨 처리가 힘들어지면서 사육을 포기하게 되었고 축산은 점점 규모화 되어갔다.

이제 시골 농가에서 부업으로 소 한 두마리를 키우는 농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축산은 농가에서 생산하는 여러 작물이나 품목 중 하나가 아니라 축산업이라는 영역으로 독립되었고 전문 경영자들에 의해 좁은 공간에서 대량으로 사육되고 있다.

조류독감(AI)이라든가 구제역, 아프리카 돼지열병(ASF) 같은 가축전염병에 감염되어 농장에 있는 가축을 전부 살처분했다는 얘기는 20~30년 전만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얘기이다.

좁은 땅에서 많은 가축을 키워야 하니 조밀하게 키우는 밀식 축산을 할 수 밖에 없다. 동물 학대니 동물 복지니 하는 얘기는 문제가 되는 그 때 뿐이고 축산 환경은 개선되지 않는다. 가축전염병은 한번 돌면 밀식, 밀접된 축산농장 안에 사육되는 동물에게 급속히 전염이 된다. 특히 요즘 지어지는 양계장은 냄새를 줄이고 외부의 전염병을 차단하기 위해 창없이 밀폐된 축사를 짓는다. 무창계사라고 한다. 전염병이 침입하면 집단감염이 일어나기 딱 좋은 시설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조류독감이 이번 겨울에 다시 나타났다. 조류독감에 감염된 농장의 닭이나 오리들은 모두 살처분된다. 살처분이라는 말에는 섬찟, 끔찍, 폭력, 잔인이라는 느낌이 잘 안드러나지만 감염이 되면 이 농장의 닭들은 농장 주변에 땅을 파고 안락사 과정도 없이 생매장으로 살육된다. 조류독감이 발생한 농장의 닭이나 오리들은 물론 살처분되고 반경 3km 이내의 농장에 있는 닭이나 오리들도 모두 예방 행위로 똑 같이 살처분된다. 한 농장에서 키우는 닭이나 오리들은 수 십, 수 백 마리가 아니라 수 만, 수십 만 마리가 된다. 이 생명들이 영문도 모르고 한꺼번에 구덩이로 내몰려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경기도 화성에 가면 ‘산안마을’이라는 농사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사육방식을 이용해서 유정란을 생산한 곳이며 친환경 축산과 동물복지농장을 실현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농장 가까운 가금류 농장에서 조류 독감이 발생했다. 반경 3km 안에 포함된 산안마을 양계장의 닭들도 살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농장 앞에는 공무원들이 초소를 세워 달걀 반출과 사료반입을 막고 있다. 공동체 식구들은 살처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고 이 공동체 대표를 지낸 윤 모 대표는 가축들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더라도 막겠다고 농성을 하고 있다.

산안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은 양계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공동체를 통해 개인과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성찰하는 삶을 택했고 강요나 유혹이 아닌 공명과 스스로의 결단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존엄을 지키는 만큼 자기들이 키우는 닭과 가축도 존중하고 건강과 행복권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정부는 동물학대와 가축전염병으로부터 동물들을 지키고 동물권, 행복권, 동물복지를 실현하는 동물복지농장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산안마을은 그 가장 앞자리에 있다.

산안마을 양계장은 2014년 조류독감 대유행 때도 매몰 명령이 떨어졌으나 끝까지 버텨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은 곳이다.

전염병에 감염된 가축은 멀리 이동할 수 없다. 그래서 농장 가까운 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살아있는 가축을 집어넣고 묻는다. 지금은 살처분 광경이 끔찍하다고 TV에 잘 안나오지만 우리는 그 전에 얼마나 잔인하게 처리했는지 기억한다. 거대한 구덩이에 대형덤프트럭으로 가축들을 쏟아부으면 멀쩡한 소나 돼지가 살겠다고 가파른 구덩이를 기어오르고 굴삭기 대형 삽날로 밀어넣고 찍어누르던 장면을.

가축 살처분은 그 지역 주민과 공무원들에게 생명을 죽여서 받는 정신적 고통 – 트라우마를 남긴다. 가축 주인들에게는 경제적 타격과 실의를 남긴다. 지역은 토양과 지하수 오염의 위험에 빠진다.

대량 밀집 공장형 축산의 필연적 결과이다.

육식의 제한없는 섭취. 신 선진국 대한민국의 반성 지점이다.

지금과 같이 육식을 과잉섭취하면 동물복지농장을 확대하기 어렵다. 대량 밀식 축산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사료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식량자급율을 올릴 수도 없다.

육식의 대량 섭취는 건강에도 좋지 않지만 지구환경에도 악영향을 준다. 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 환경위기의 1/4이 축산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경기도 가축방역심의회에서 ‘산안마을’의 상황을 확인하고 조류독감에 감염되지 않고 앞으로도 안전이 유지된다고 파악하여 농식품부에 건의하면 살처분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

다행히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산안마을 상황을 보고받고 ‘예방적 살처분은 공장식 밀집사육을 전제로 만들어진 규정’이라며 친환경적으로 동물권을 존중해서 운영하는 동물복지농장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이점이 없으니 경기도 차원의 기준안을 마련해 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경기도가 산안마을의 닭들에게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적용한다면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일방적 처리 방식에서 농장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새로운 길이 열리더라도 과다한 육식의 섭취를 줄이지 않으면 전염병이 돌 때마다 예방적 살처분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구를 위해, 우리의 건강을 위해, 동물 복지를 위해, 식량자급을 위해, 축산농장의 이웃주민들을 위해 고기를 조금만 먹기, 일주일에 한번 이하로 줄이기를 함께하기를 간절히 요청드린다.

인간과 동물, 자연과의 관계를 착취와 수탈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관계로 회복하지 않으면 가축들은 늘 살처분의 위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산안마을이, 산안마을 닭들이 살아남기를 기원한다.

간절히…

 

이재욱

화, 2021/02/2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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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현장과 정책분야에 십여 년을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온 필자로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복지정책에 대한 논쟁, 특히 기본소득에 대한 자해적 비난에 대하여 개탄과 경악을 금치 못한다.

상기 타이틀에 한국정치인들에게 고함이라는 부제를 달았으나, 이의 대상에는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부패정치인의 대명사를 배출한 수구적 야당의 정치집단을 논의에서 제외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나, 다만 상황에 따라 살아남은 이들의 현존을 그저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현실정치제도의 결함과 역사적으로 누적된 부패를 청산하기에 역부족인 시민운동역량의 한계를 탓할 뿐이다.

동시에 지난 4년 간의 문재인 정권과 여당인 민주당의 무능과 실책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부터 부동산투기의 천국으로 변모한 대한민국에서 최고 최상의 복지정책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친 후 안락함을 제공해줄 주거의 해결이다. 현정권의 출범이래, 핵심적인 부동산과 주거의 정책으로 진보적 시민사회는 보유세강화와 양도차익의 회수를 중장기적인 근간으로 삼고 가난한 서민을 위한 장기공공임대주택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민간영역의 사회주택 활성화를 촉구해 왔다. 그러나 현 정부는 주택정책을 수요공급의 시장논리로 환원시키고, 단기적이며 수치적인 경제성과를 시현하기 위하여 오히려 부동산투기를 조장하여 왔다.

복지는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산업현장의 제1차적 영역과 사후적으로 안전망을 구축하는 사회정책이라는 제2차적 영역으로 구성된다. 근래에 들어오면서 제1차적 영역의 중요성이 보다 강조되면서 사회정책 역시 산업경제정책의 핵심적 중심의 영역으로 재구성되어 제1차적 영역과 제2차적 영역이 상호 결합되고 서로를 지원하며 순환하는 역동적 체계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제1차 영역의 기본적 조건으로 적정임금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최저임금의 시간당 1만원과 주당 노동시간의 52시간 제한을 내세운 대선공약을 충분한 설명도 없이 자본자산들의 압력에 밀려 일방적으로 포기했으며, 경제력 10위의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국제노동기구의 기본요구 수준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현정권이 과연 복지를 논할 자격이 있는가 반문해 본다.

이에 더하여 복지제도를 확장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정적 지원이 뒤따라야만 한다. 뒤에 보다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복지의 주요 지표인 공공지출 비중에 있어 대한민국은 복지선진국의 1/3 수준이며 OECD평균의 40%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복지국가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산누진세를 중심으로 조세개혁과 증세가 필연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정권은 무슨 까닭인지 출범부터 일체의 증세논쟁을 거부하여 왔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여의도 국회의원들이 미국상원의 진보적 정치인인 버니 샌더스와 엘리자베스 워런의 최근 눈부신 활약을 본받기 바랄 뿐이다.

본격적인 기본소득의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서구의 복지역사를 간략하게 일별하여 본다.

인클로우저 운동으로 농민들을 농지에서 추방하여 이들 다수가 실직 상태에서 부랑자로 전락하면서 사회적 불안으로 증대하자, 빅토리아 왕조의 영국은 강제노역을 포함한 빈민법을 제정하여 근대적 개념의 사회복지를 국가단위에서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공공부조를 중심으로 한 빈민법은 이후 스핀햄랜드 시행과 신빈민법을 거치면서 낙인효과라는 복지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이렇듯 복지역사의 과정에서 실책으로 인하여 산업화를 가장 먼저 이룩한 영국이 현재처럼 이류국가로 전락하는 불행을 맞이한다. 복지정책의 중대성을 다시 일깨우는 대목이다.

전기의 발명 등으로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시기인 19세기말 후발의 산업국가로 강대국 대열에 뒤늦게 참가한 독일은 대규모의 공장제 실시로 인한 노동자 조직과 갈등 및 공산화의 위협 등에 대응하여 수혜자 부담원칙의 본격적인 사회보험을 실시하게 된다. 이후 사회보험제도는 유럽대륙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으로 안착하고 제도적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국외자들에 대한 ‘포용’을 중심과제로 삼게 된다.

북유럽의 스웨덴은 후진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1930년대에 勞農연정의 기반 위에 진보적인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국가의 역할을 ‘인민의 집’으로 선언하고 이후 현재까지 보편적 복지를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시행해 오고 있다. 30년대의 사회연대임금 타결과 60년대의 렌-마이드너라는 산업혁신정책, 그리고 제3차 산업혁명과 세계화 이후 젠더 이슈(여성의 부엌으로부터 해방과 사회참여)와 생애주기의 맞춤형 복지를 도입하면서 사회수당과 사회서비스 영역을 확충하고 강화하여 왔다.

이렇듯 서구 복지정책의 역사는 산업화의 단계와 상황적 조건에 따라 복지정책의 내용이 공공부조에서 사회보험을 넘어 사회수당과 사회서비스 분야로 확산 발전되어 왔다. 여기서 반드시 눈여겨볼 지점은 항상 후발참여국가가 앞서 시행한 선발국가들의 제도적 한계를 뛰어넘어 복지의 새로운 영역을 혁신적으로 추동하여 왔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해당국가군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여건이 주요하게 작동한 배경도 있겠지만, 복지제도가 갖는 특유의 성격인 구축효과(embedding effect)의 영향이 매우 크다 할 것이다. 한번 시행을 도입하여 구축되면 이에 따른 시혜자의 절대적인 이익관계가 형성되면서 정책의 변경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렵게 된다. 따라서 한번 복지정책의 경로를 설정하면 이를 수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에 산업화 과정의 초기, 제2차 산업혁명 그리고 제3차 산업혁명과 세계화 등에 상황의 변화에따라 영국은 빈민법에 기초한 공공부조, 유럽대륙은 포용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보험, 그리고 노르딕 지역은 보편적 사회수당과 서비스를 복지정책의 역사적 궤적에 따라 각자의 중심축으로 삼게 되었다.

현재 세계경제의 여건과 흐름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전후 케인즈 이론 중심의 정책이 황금기를 구사하다가 7-80년대의 스태그-인플레와 고실업 문제로 몰락하고, 금융통화중심의 세계화라는 명분과 때마침의 소비에트 몰락으로 신자유주의로 대체되면서 이후 소위 워싱턴-콘센서스라는 미국중심의 단일체제가 대세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의 통화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고하고 대안의 체제를 암중 모색하는 와중에 있으며,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양적완화라는 긴급수단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더하여 산업경제의 영역은 제3차 산업혁명기와 탈산업화의 과정을 지나 소위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필자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 대신에 지식혁신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하고자 하며, 지식혁신경제에 대한 상론은 다른백년이 3월 말경 출간예정인 하버드대학의 석좌교수인 로베르또 M. 웅거의 최근 저술 “지식경제 시대의 도래”를 참조하여 주시길 요청한다.

세계경제포럼 등 주류사회의 예측대로 미래사회가 전개된다면, 거대기술기업들이 사이버 포털과 기술기반을 거점으로 지구적 규모의 독점과 수탈을 강화하여 양극화가 심화되는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과 혁신에 따라 인류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 대부분이 과거처럼 육체노동과 사무관리 업무에 의존하지 않은 채 시스템 자체의 운용과 개선을 통해 이루어질 전망이다.

특히 사회복지 영역의 핵심주제인 일자리 부문에 있어서는 기존의 관행과 형태를 넘어서는 격변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산업화 이후 전형적인 방식으로 아침 8-9시에 출근하여 하루 8시간 이상의 노동을 진행한 후 저녁 6시경에 퇴근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유연모델과 비선형적 형태, 필요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가 사라지는 GIG(이벤트식 직업)방식, 그리고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불리는 불안정한 계약직 등의 확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코로나-19사태 이후 비대면 작업과 재택근무의 가능성이 확인된 만큼, 이러한 방향의 급속한 확산 가능성을 우리는 현재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상황의 전개가 목전에 다가왔는데 과연 기존의 산업체계에서 발전해온 전통적 복지체계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일자리와 직업체계가 마구 무너지는 상황에서 기존의 일자리만을 방어하는 고용보험의 강화가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한가지 예로 북유럽이 시행을 자랑하며 기존 산업체계에 부응해 시행하여온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실효성을 상실하면서 심각한 비판에 직면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상황의 전개에는 새로운 해법과 대응책이 필요하다.

18세기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앞서가는 선각자들에 의해 기본소득의 선행적 개념들이 제기되어 왔으며, 1980년대를 지나면서 벨기에의 루뱅 대학이 중심이 되어 이론적 체계와 정책적 대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주요 선진국가들에서 국민발안과 실험적 정책 그리고 양심적인 기업인들과 대선과정의 주요 후보들에 의해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이미 일부의 시행결과로 긍정적인 성과들을 상당히 누적하여 왔다.

작년 미국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도 기본소득이 주요한 현안으로 부상하였으며, 최근에는 코로나-19 충격에 따른 구제지원정책의 후속작업으로 미국의 산업경제 정책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제임스 칼브레이스 교수가 문화예술 분야와 사회적 경제영역에 기본소득에 준하는 지원책을 제안하고 나섰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주창하고 나선 정치인 이재명 경기도지사 역시 십 수년 전부터 이 분야에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들과 수 년간 학습과 토론을 진행하여 왔으며, 전문가 입장인 공동저자로서 본인이 직접 단행본을 출간하면서 기본소득의 국제네트워트인 BIEN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일부의 여당 정치인들이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이 아직 본격적 수준에서 시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이의 시행을 선도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무책임하며 소모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 무지한 것인가? 이들의 발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사회보험을 도입한 당시의 독일과 보편적 복지를 내세우며 사회수당과 서비스를 전면화했던 당시의 북유럽국가들은 모두 후발적 참여국가들이었으며, 당시의 선진 제국들이 시행하지 않았던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한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위에 언급한 것처럼 세계10위권의 경제강국인 대한민국은 이제야 복지국가를 향한 여정의 초입에 서있어, 구축효과의 부담이 상당히 적으며 따라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구체적으로 기술하자면 복지정책의 주요한 평가기준으로 GDP 대비 국민분담률을 살펴보면 선진복지국가군은 45%에 달하여 OECD 평균은 35%수준을 유지하는데 반하여 한국은 겨우 27-8%에 머물고 있다. 자산에 대한 누진과세 등 조세의 여력이 상당히 있다는 반증이다.

직접적인 복지지출액에 대해서도 선진복지국가군은 GDP의 30%가 넘어서고 있고 OECD 평균 역시 22-25% 수준을 보이고 있는데 반하여 한국은 겨우 10%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적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현재의 복지재정을 2-3배로 확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더구나 지식혁신경제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한국은 기존산업의 추적자 지위에서 혁신의 선도자(prime-mover) 위치로 전환을 해야 하는 시점에 서있다. 자연스레 선도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산업적이며 기술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혁신을 가능하게 하고 촉진할 수 있도록 복지체제에도 역동성을 도입해야 하는데, 다행스럽게 구축효과의 부담이 가장 적고 복지재정의 잠재력이 상당한 한국이 새로운 복지개념을 도입하는데 매우 유리한 환경과 자체적인 필요를 지니고 있다. K-방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대한민국이 선도적 혁신국가로 나서는 것이 단순하게 빈말로 이루어질 일은 아니다.

요약하면, 대한민국이 기본소득을 선제적으로 도입 시행하는 것을 위험하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혁신을 주도하기 위한 자체의 필요와 여건에 따라 앞서 나가는 포석이라고 높게 평가하면서 심도있는 논의와 연구를 진행해야 마땅하다.

이미 진보학자들의 국제적 추이는 기존 복지체계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으로 혁신적인 경제운용성과를 전국민에게 배분하는 배당성격의 기본소득과 모두에게 가장 소중한 공공재로서 과학기술과 이에 기반한 산업기반에 대한 공적 통제를 강화하고, 공유적 소유개념에 따라 사회적 상속을 통한 개별단위 기본자산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의 토마 피켓티 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만 필자의 견해는 사회적 상속 혹은 자산의 중과세에 기반한 기본자산에 대한 논의는 기본소득의 점차적 시행과 추후 안정적 기반이 형성된 이후 이에 대한 반성과 평가 위에서 재론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판단한다. 지금은 기존의 복지정책과 기본소득 간의 상호적 보완과 결합에 올곧이 집중할 시점이다.

오히려 보좌진들이 올린 몇 페이지의 보고서에 의존하여 기본소득을 백안시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으로서 대단히 무책임한 행동이다. 기본소득을 무조건 부정하는 자세가 아니라 이를 여하히 미래지향적으로 검토하고 실천적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함께 동반되어야 마땅하다.

모름지기 시대의 흐름과 필요에 의해서 제기된 정책의 정합성을 검토하고, 실천적 의지와 지속적인 노력을 담아내고 시행 이후 실효적인 반성과 발전적인 재구성을 통하여 더욱 진전시켜야 한다. 기존 복지제도의 강화론자이든 기본소득 도입의 지지자이든 ‘모 아니면 도 (all or nothing)’라는 자세를 버리고 法古創新의 자세로 상호보완과 결합을 검토해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의 기본소득에 대한 전향적 비판을 아래에 열거하고자 한다.

우선 조만 간에 시행할 기본소득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본자산의 도입은 미래를 향한 올바른 방향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만병통치의 해법일 수는 없으며, 맹점의 하나인 정책의 무지향적 성격을 기존 복지제도로서 보완하여야 한다. 전반적으로 적용하기에는 기본소득 제도에 대한 경험의 역사가 일천하고 여전히 실험단계에 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는 제한된 영역과 부문 혹은 계층과 지역에 일차적으로 적용해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욱이 한국처럼 다층적 다면적 갈등과 차별이 전면화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무조건의 일반적 적용이라는 이상적인 기본소득의 모델은 한국사회가 제1차적 영역에서 상대적인 공정성과 안정을 일정 수준으로 확보한 이후에야 비로소 보편적인 방식으로 시행을 검토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지원의 내용이 용돈수준의 푼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비판은 지극히 옳고 타당하다. 재정적 여력과 준비상황에 따라 시차를 두고 점차적으로 적용의 대상과 범위를 확장하여 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적용대상을 선택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하되 지원액수가 실제적인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수준에서 시작할 것을 조언한다.

예건데, 사회신참의 청년실업군, 농어산촌민, 문화예술인 등에 대하여 월단위 4-50만원, 연간 500만원 수준 이상의 지원으로 시작하는 동시에, 참여를 전제로 하는 방식으로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활동하는 해당 개인들에게 일정한 보조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미래의 새로운 일자리를 일구는 것을 검토해 보자.

기본소득이 가지는 잠재적 매력과 행정적 용이함(공정을 포함)을 충분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구체적인 현안에 집중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지향적 기존 복지정책의 강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기본소득과 무관하게, 교육과 공공보건, 의료체계와 재난구제, 주거와 장애 등 영역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개입과 책임성은 더욱 강화되어야 하며,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여건과 환경의 조성에도 정부는 과감한 투자를 지속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의 도입은 다가오는 미래사회에 대응하는 역동적이며 정합적인 필요조건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서구사회가 시행하고 발전시켜온 시회안전망이라는 복지제도를 경험의 한축으로 삼되, 새로이 전개되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조건에 발맞추어 새로운 개념(기본소득)의 사회정책을 조세개혁과 더불어 현실적 방식으로 도입하는 정치권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래경

목, 2021/02/2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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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저술한 『진보의 미래』에서 “(자신이) 그냥 앉아서 관료에 포획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한편, 문재인 정부에서도 실패하고 있는 관료 문제에 대해 어느 교수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사람들)’들은 ‘늘공(늘 공무원인 사람들)’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실 현재의 5년 단임제는 ‘영원한 관료지배의 충분조건’일지도 모른다. 각 분야 관료개혁의 세부적인 각론 없이 허허벌판에서 총론만 들고 적폐청산을 외치다 보니,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관료들에게 각론을 의지하게 된다.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장·차관, 기관장 몇 명 바꾸고 새로운 정책을 편다 해도 관료사회는 꿈쩍하지 않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문재인 정부, 아직 임기 500여일이 남았다”, <오마이뉴스> 2021. 1. 10.)

우리 사회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대통령 한 사람이 홀로 우뚝 서서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채 온 나라를 좌지우지 통치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청와대 권력이란 단지 전체 공무원 조직에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관료들은 바뀌지 않은 채 언제나 강고하게 온존하면서 그 핵심적인 자리를 장악한다. 국민들이 이름을 아는 장관은 거의 없을 만큼 너무도 수시로 바뀐다. 그러니 행정부 부처의 실질적 주인은 필연적으로 관료일 수밖에 없다. 환경정책이나 노동정책도 대통령과 장관이 지휘하는 듯 보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불과 몇 가지 정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정책들을 관료들이 행사하고 있다.

국회 역시 겉으론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온갖 비난을 모두 들으면서 정치와 입법을 좌지우지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국회 입법관료들이 보이지 않은 실권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사실상 관료들이 지배하는 관치(官治), 관헌(官憲) 국가이다. 이 나라는 대표적인 행정 비대 국가다. 정책 하나하나마다 수백 수천 명의 이해가 걸려 있다. 공무원이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법제가 입헌군주 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강점기에 만들어졌고, 그 뒤에도 그것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우리 법제에는 관헌국가적 잔흔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을 하고자 하는 자는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행정청의 권한을 간접적으로 규율하는 방식이 그 예이다. 이는 국민을 행정권 발동의 단순한 수동적 존재로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官)주주의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법’과 ‘규정’이 사회를 일상적으로 지배하게 된 이른바 ’87체제 이후 ‘법치주의’의 이름하에 결국 이들 관료집단의 지배력이 갈수록 확고해져왔다. ‘시험 권력’이 ‘선출 권력’을 사실상 조종하고 지배하는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실종된 사회다.

 

행정사무그리고 규정만이 군림하다

원래 행정사무 업무란 보조적 업무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무 및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이 부합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전반적으로 행정사무 업무가 오히려 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그 대표적 사례다.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재판을 보조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인사관리와 기획조정 업무를 장악하면서 스스로 법관에 대한 감독기관으로 군림하였다. 국회사무처 역시 전형적 사례이다. 독재 권력이 국회를 하수인 혹은 거수기로 전락시키기 위하여 도모한 국회사무처 소속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기제는 국회 입법관료에게 과도하고 ‘위헌적인’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관료 조직은 대부분 행정사무 부서가 인사와 예산 그리고 각종 사무분담 업무에 의거해 원래 보조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객전도요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공공성과 가치와 철학은 사라지고, 대신 오직 사무와 규정이 군림하면서 상명하복과 형식주의만이 만연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국회를 비롯하여 감사원, 대법원, 정당 등등 국가의 공공 시스템과 기관 중 자기의 명칭에 부합하는 위상을 지니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국회 전문위원’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전문가’들이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모두가 국회에서 순환 근무한 국회 공무원들이다. 이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검토보고’라는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 국회 공무원이다. 미국 의회의 위원회에 근무하는 전문가 스태프 조직은 모두 정당에 소속되어 있다. 독일 의회에서 이들 정책 ‘전문위원’은 독일 사회의 각계 전문가 출신으로서 자부심이 높은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시 정당 소속이다.

미국 의회 소속기구인 법제실의 법제관은 변호사나 법학박사 등 모두 법제 전문가로 구성된다. 반면에 우리 국회의 경우, 모두 순환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또 미국 의회예산처의 처장은 주로 경제학을 전공한 인사가 임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주로 국회사무처 공무원인 수석 전문위원 출신이 임명된다. 부실하고 왜곡된 우리 입법지원 기구의 모습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엉망이 된 우리의 정치과 경제, 사회, 노동 그리고 환경문제의 저변에는 언제나 관료집단이 도사리고 있다. 관료집단은 본질적으로 현상 유지와 친(親)재벌 사고방식의 보수적이고 기득권 편향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변화와 개혁에 저항한다. 더구나 외부로부터의 진입이 철저히 차단된 독점구조에서 감시견제 기제가 부재한 채 책임감과 의식 부재가 더해져 스스로도 갈수록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관료집단은 일반 시민과의 접촉은 별로 없고(혹 만나더라도 부정적이거나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기업 측 인사들은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관료집단은 ‘시장 친화적’이며 시장경제 옹호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등등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이 고착화되고 보수화가 강화되며 한 치의 변화와 개선조차도 어려워지기만 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관료지배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심각하기 짝이 없는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의 문제에서도 관료집단은 아무 의식 없이 그저 규정과 관행만을 내세우고 모르쇠, 시간끌기로 일관할 뿐이다.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없다.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관료개혁 없이는 우리 사회의 어느 것 하나도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우리의 미래 역시 없다. 우리의 미래를 이들 낡은 관료조직에 맡길 수 없다.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시험에 의한 공무원 선발, 과연 공정한 것인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시험에 의하여 공무원을 선발하는 방식이 최고의 미덕으로 치부된다. 그렇지 않은 그 어떤 공무원 채용도 불공정성으로 매도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공무원 선발제도를 일률적으로 중앙인사기관이 독점하여 고스란히 관리하는 시험제도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는 없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각 부처별로 인력을 충원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에는 1993년 정부혁신처(NPR; National Performance Review)가 설치되면서 인사관리의 분권화와 권한 위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처에 채용권한을 위임하고 각 부처는 자체 실정에 맞게 채용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운영 형태가 각기 상이하다.

일본의 공무원제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우리의 경우 중앙인사위원회에서 일괄적으로 선발하여 각 기관에 배분하는 형식을 취하는 반면, 일본은 시험을 중앙 인사원에서 일괄적으로 실시하지만 각 기관별로 채용후보자 명부를 작성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바로 임용되지 않고, 우선 ‘채용후보자 명부’에 등록되어 명부 순으로 각 행정기관에 추천된다. 따라서 성적이 좋을수록 희망하는 기관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각 기관은 엄격한 면접과 심사로 임용을 다시 결정하기 때문에 어려운 관문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대통령 공공관리 인턴(PMI: Presidential Management Intern)’ 프로그램이라는 고급공무원 임명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공공정책 분야에 우수한 석․박사 인력을 충원하기 위하여 1977년 카터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의하여 도입된 제도이다.

매년 공공정책 프로그램의 분석 또는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약 200명 이상의 젊은 인재들이 미국 국민에게 연방정부 공무원이 되는 지름길로 인식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2년 동안 연방정부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들은 ‘순환 인턴십 기회’를 통하여 거의 모든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게 되며, 이 프로그램에 의하여 우수한 석․박사 인력들이 연방정부에 채용되고 있다.

프랑스는 유명한 국립행정학교, 즉 에나(ENA)를 통하여 고위공무원을 채용한다. 2003년의 경우 총 선발인원은 100명으로서 이 중 50명은 외부 경쟁시험, 41명은 내부 경쟁시험, 9명은 ‘제3의 시험’을 통하여 선발된다. 외부경쟁 시험은 28세 이하이고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 내부경쟁 시험은 현직 공무원에게만 지원 자격이 주어지고, 학력 제한 없이 5년 이상의 공공 부문 근무경력을 충족시킨 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실시한다.

‘제3의 시험’은 40세 미만이고 전문직 또는 지방자치단체 의원으로 8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자에게 응시자격을 준다. ‘제3의 시험’은 고위 공무원의 사회적, 지리적 배경을 다양화시켜 공무원 충원의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이다. 프랑스는 이렇게 하여 고급 공무원의 사회적 배경의 균형을 추구하고 전문가의 공직 진출 가능성을 제고시키기 노력하는 한편, 그밖에도 계급제의 단점인 충원 형태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하여 공개채용시험 외에 다양한 충원 형태를 운영하고 있다. 특별채용과 전체 공무원의 20%에 이르는 계약직 공무원 제도의 활성화로써 계급제 하에서 인력운영의 탄력성을 높이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한편 영국의 경우에는 속진(速進) 임용제를 적용하여 공무원 중 고위직 공무원 직위에 도달할 수 있을 우수 인재를 선발하여 별도의 훈련 및 능력개발기회와 조기승진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 영국 고위공무원단의 1/3에 가까운 인원이 속진 임용제를 통하여 선발된다.

 

고시 출신의 군림과 육두품 출신의 슬픔

공무원이 기피대상으로 되던 시기가 있었다. 공무원 임금이 너무 낮고 대우도 좋지 않아 일반 대졸자들이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5급 고시는 우수한 인력을 공무원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유인책’의 제도였다.

그러나 이제 공무원은 이 나라 모든 젊은이들의 꿈으로 되었다. 9급 공무원 시험도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이다. 가장 우수한 인력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려들고 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이 밀집해있는 노량진역 부근은 공시족으로 언제나 인산인해다. 몇 년 전부터 이제 5급 공채(고시)나 7급 시험이나 차이가 없다는 주변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 우수한 인력들을 공무원으로 선발해 잘 운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문제는 고시 출신, 고시족들이 전두환 시절의 군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처럼 공무원 사회를 장악하고 독점하는 데 있다. 모두 고시 몇 기 몇 기로 통하고, 이들끼리 모든 요직과 지휘계통을 장악한다. 고시 출신이 아닌 다른 공무원은 마치 신라 시대의 ‘육두품’처럼 들러리로 전락한다. 진골과 성골 그리고 육두품의 출신 성분은 너무도 명확하다. 서슬이 퍼런 이런 계급 사회에서 기상천외하게 아부하는 재주가 있지 않는 한, 육두품 출신이 요직에 오르기 어렵다. 비(非)고시 출신으로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여 요직에 오르게 될지라도 이미 비고시로서의 정체성은 상실된다. 아니 오히려 비고시 집단에 적대적으로 스스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고시족 집단에 대한 높은 충성심이 이미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을 위한 역동성이나 미래지향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국회사무처의 경우를 살펴봐도 수석 전문위원과 전문위원을 비롯한 요직과 국장급에서 5급 공채, 즉 ‘입법고시 출신’의 비율은 매우 높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강화된다. 최근에는 과장급까지 고시 출신의 독점 현상이 나타난다. 실제 국회사무처의 주요 보직 중 고시 대 비고시 출신 비율은 2006년 48: 52였는데, 2011년에는 58: 42였고 2016년에는 80: 20으로 그 독점 현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5급 공채로 관료사회에 진입하면 30대에 이미 3급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지나치게 빠른 승진이고, 국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 경험이 적은 본인에게도 불행이다. 최근 판사 임용도 최소 3년 내지 5년의 법조 경력이 요구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와 같이 5급 공채라는 ‘특급 대우’를 제도적으로 제공하는 나라는 없다.

다양한 나무 품종으로 이뤄진 숲이 가장 번성한 숲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시험이라는 한 가지 단일한 형태로만 공무원을 선발하는 현재의 방식은 “우리가 남이가”의 가족주의와 온정주의를 낳고 이는 결국 부패와 무능을 심화시키게 된다. 그것은 오직 특권과 독점의 상징으로 되었고, 상명하복으로 권력에 무조건 아부하고 줄서기와 승진에만 몰두해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국회 고위 공직자로 있던 어떤 후배는 필자에게 4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필자는 대부분의 4급 이상 공직자들에게 ‘승진’에만 필요한 비상한 능력을 보유하고 발휘한다는 점 이외에 그들에게 특별히 대단한 능력을 가졌거나 실행하는 모습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공무원 조직도 과거와 같은 일반 행정가로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 앞으로의 공무원은 ‘일반 행정가(generalist)’ 보다는 공직사회 내에서 특화된 전문 능력을 보유하면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종합적인 관리 능력을 보유한 ‘전문성을 지닌 행정가(specialized generalist)’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은 1940년대 이후 지역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가능한 ‘대표관료제(representative bureaucracy)’를 채택하고 있다. 대표관료제란 한 나라 전체의 인구 구성에서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집단별 인구비례에 따라 정부 공직이 배분되어야 한다는 인사 원칙이다. 미국에서는 이 대표관료제를 적용하여 고용평등조치, 차별철폐조치 그리고 적극적인 고용할당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인재의 지역할당제 역시 이러한 적극적인 인재할당 대표관료제의 일종으로서 인력충원에 지역이라는 변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일종의 ‘지역주권’의 신장을 추구한다. 대의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지역별 비례에 의하여 국가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선발된 인력이 국가 공직사회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과정에서 출신 지역과 관련된 이익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적 대표성(political representativeness)’, 혹은 ‘정치적 대의성’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시험만에 의한 공무원 선발, 현대 국가에 적합하지 않다

고시제도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각급 공무원 시험제도는 사실 과거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흔히 과거제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공평성의 측면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왔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과거제도는 본래 치국의 인재를 배양하고 선발할 수 없고 도리어 황제 전제정치의 필요에 충실하게 부응한 제도이기도 하였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 고염무는 팔고문(八股文: 과거 시험이 엄격하게 요구했던 여덟 가지 형식)의 폐해가 진시황의 분서(焚書)와 같으며 인재에 대한 파괴는 오히려 진시황의 갱유(坑儒)보다 더 심하다고 갈파하였다. 그리고 결국 중국은 크게 낙후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선진국들은 공무원을 직무별로 수시 채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직 암기식의 단일시험 제도를 통해 일시에 공무원을 선발한다. 그리고 연공서열에 의하여 결정되는 승진과 급여 체계 대신 이제 성과와 실적에 의하여 결정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시험만으로 우수하고 도덕적이며 유능한 공무원이 선출될 수는 없다. 시험으로만 선발되는 현 공무원 제도 그리고 연공서열에 의하여 모든 시스템이 운영되어서는 전문성과 창의성 그리고 역동성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수요에 결코 효과적으로 부합할 수 없다.

 

소준섭

화, 2021/03/0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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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산물 자급율이 43% 정도 된다고 하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43%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맞는 말이지만 따져 보면 우리 농산물이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종자의 대부분은 수입하고 있다. 이를 심기위해 밭을 만들어야 하는데 농기계는 수입 석유로 가동한다. 결정적인 건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손인데 국내 농업노동 자원이 점점 고령화되고 부족해지면서 외국인 노동자 의존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조수익(농산물 총 매출액)에서 생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올라가 60%를 상회하는 수준이 되었다. 만원어치 팔면 6천원은 농지 임차료, 농기계값 상환, 농기계 임차료, 농업노임, 종자대, 비료값, 시설비, 기타 경영비 등으로 들어가고 농민들 손에 들어오는 농업소득은 4천원이 채 안되는 수준. 1년에 1억 매출을 올리는 농민들은 말이 ‘억대 농부’이지 실상 농업 소득은 4천만원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농민들은 비닐 하우스 등 시설을 늘리거나 소득이 높은 인삼이나 과일 농사 혹은 축산으로 전환하며 규모를 늘린다. 시설이든 농지 면적이든 규모를 늘리면 혼자 감당할 수 없고 마을에서도 품을 구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노동력을 사와야 한다. 한동안은 농촌에 살다가 인근의 도시지역으로 이사가 살고 있는 아주머니, 할머니 들이 외부 농업노동을 감당했었는데 이들이 고령화되어 더 이상 노동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지난 해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꾼을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부족한 노동력으로 인해 임노동비용도 크게 올라 이중고를 겪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국내에 남아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농장들은 그나마 농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서 올리는 수입이 줄어드니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규모를 늘려도 실제 소득은 크게 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생활여건이나 노동조건을 보장해 주기가 쉽지 않다.

소득을 늘리기 위해 규모를 키워야 하고 늘어난 농사규모를 감당하자니 농업노동자를 고용해야하고 늘어난 일꾼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려고 다시 규모를 늘리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출신 여성노동자인 ‘누온 속헹’(31세)씨가 지난 해 12월 20일에 비닐하우스로 만든 숙소에서 자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올해 2월 1일에는 여주에서 또 다른 캄보디아 출신 남성 노동자가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람 다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속헹씨는 가장 추운 겨울날 전기가 끊겨 전기장판도 못켜고 자다가 숨졌다고 한다.

‘속헹’씨 사고가 일어난 후 고용노동부는 올해부터 외국인 노동자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비닐 하우스 내 컨테이너나 조립식 패널로 만든 숙소를 제공하는 농가에게는 외국인 노동자 고용허가를 내주지 않는 ‘외국인 근로자 숙소 기준강화 방안’ 을 적용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에게도 차별없이 노동법을 적용하고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행복추구권과 사람답게 살 권리 역시 똑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주거환경을 갖춘 숙소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농가들은 대부분 외국인 들을 위한 주택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이유를 들자면 숙소를 짓는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 두 사람이 거주할 정도의 공간인 열평짜리 집을 평당 5백만원의 최소비용으로 지어도 농지전용비, 설계비, 대지 조성비 등을 포함하면 7~8천 만원의 목돈이 들어간다. 집을 짓는 비용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지만 농민들 대부분은 남의 땅을 임차하여 농사를 짓기 때문에 땅 주인들이 집을 짓게 허락을 해주지 않는다. 또 집을 지으면 1가구 2주택이 된다.

고용노동부의 조치가 나오자 농민단체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고용노동부의 방침대로 하자면 대부분의 농업 경영주들은 외국인 노동자 고용허가를 받지 못하게 되어 인력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사실상 농사를 중단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고용노동부의 조치도 이해가 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열악한 환경을 강요하는 것도 중단해야 하고 가중되는 생산비에 코로나 위기로 인해 인력을 구하기도 힘든데 제대로 된 숙소까지 마련하기 힘든 농가의 처지도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 농축수산물 생산과정의 상당 부분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존하는 현실을 금방 바꿀 수도 없다. 현재 우리 농업 현실은 외국인 노동자들 없이는 그나마 절반도 안되는 식량자급율을 유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농가에 압박을 가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개선하려면 단기적 과제와 중장기적 해결책을 세워야 한다.

나름 급한대로 장·단기적 대안을 생각해 봤다.

단기적 해결책으로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을 최소한이라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따뜻한 지역 사람들이다.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난방시설을 설치하고 취사와 화장실, 욕실 등 생활시설은 개선되어야 한다. 고무통을 묻고 널판지 두 어개 걸치고 거적대기로 가리는 곳에서 용변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

중장기 대책으로는 냉난방 설비를 갖추고 조리와 현대식 화장실과 욕실을 갖춘 표준화된 거주시설을 농식품부와 지방정부가 설계하고 이런 시설을 갖춘 농가에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고용허가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 시설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 농가에 신고만으로 설치할 수 있게 하고 비용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부 보조하고 농가가 부담하되 시설 자금은 저리로 융자할 수 있는 보조금을 만들어 농가가 큰 부담없이 외국인 주거시설을 갖추도록 한다.

이 글을 처음 구상할 때는 어떤 대안이라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변의 농민들이나 농민들의 처지를 잘 이해한다는 생활협동조합의 임원들 그리고 농업전문가들과 대화를 해봤다. 그런데 여러 가지 규제가 얽혀있어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농식품부와 법무부, 고용노동부, 외무부 등 부처 간에 풀어야할 문제 그리고 세제와 보험 가입, 교통법 등 많은 부분에서 얽혀 있다.

그렇지만 이대로 규제와 압박 그리고 불법과 관행으로 유지할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 잊혀지길 기다린다면 제2, 제3의 속헹씨는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농업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시선과 태도가 바뀌고 식량안보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범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쨌든 그들이 현재 우리 국민들의 먹을 거리를 해결하는 가장 큰 일꾼이고 이들을 대신할 수 있는 농업 노동력을 단기간에 쉽게 확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재욱

목, 2021/03/0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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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글은 지난 2월 말 이라크 미군기지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친이란의 시리아 민병대를 타격한 것과 관련하여 미국무장관 블링컨이 행한 회견식 연설을 지켜본 후, ‘전쟁없는세상-WbW’의 설립자인 Swanson이 작성한 내용으로 미국 신임국무장관의 복잡한 개인적 성향과 상호모순적인 미국외교정책의 향방을 암시하고 있다. 힌반도-프로세스에 암울한 전망을 던져주고 있다.


미국 국무장관이자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의 지지자이며, 이라크를 3 개국으로 나누는 것을 실무적으로 기획한 인물, 영구적 전쟁(endless-war)을 끝내고 싶지 않은 인사, 정부로부터 뻔뻔한 이익을 얻는 무기회사들을 위한 회전문 로비업체WestExec Advisors의 공동 설립자이었던 블랑컨(Antony Blinken)이 지난 수요일에 기자회견을 겸한 연설을 행하였는데, 여러 가지 입장이 혼재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성격을 살펴볼 기회를 제공하였다.

평화를 듣고 싶은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었을 것이고,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전쟁을 선호하는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탐색하려는 사람들은 평화에 대한 암시와 주요한 지역에 대한 군대병력의 전환배치 그리고 전쟁의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군사주의에 대한 실행 등이 뒤섞인 상호 모순된 내용을 들었을 것이다.

그의 연설은 “국가 안보”와 “미국의 힘을 새롭게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고 미국만이 세계를 “지도lead할 수 있다”는 고집스러운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재적인 외국 정권에게 판매한 수천억 달러의 무기거래에 대하여 공개적인 자랑도 없었고, “적으로 간주하는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협박도 없었고, 결론부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던 미군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도 생략하였다.

블링컨은 연설의 서두에서 미국의 외교관들이 그동안 미국국민들의 이익과 외교정책을 연계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연설이 끝날 때까지도 그가 원하는 것이 ‘색다른 홍보’인지 아니면 ‘색다른 정책’인지를 분명하게 전달하지 않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을 제외한 국제사회도 중요하지만, 미국의 미디어 매체나 공론이 국제적 현안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블링컨은 이란핵협정이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함으로써, 협정에 복귀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협상을 지속하는 것에 시사하면서도, 동시에 협상과 관련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협상의 복귀를 어렵게 하는 사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이란핵협상은, 이란이 의도했던 일을 중단시키지는 못했지만, 미국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막아냈다.

미국의 양당 공히 잘못 곡해하고 있던 것은 1951년에 있었던 이란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카터 대통령이 1979 년 독재자였던 Shah의 미국입국을 승인했던 의무적인 실책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다. 1979 년 당시에 순진했던(?) 미국인들은 자기 방식의 인도주의가 무조건 옳고 옛 친구에 대한 의리 역시 좋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반면에 미국인들에게 이란은 지구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나라로 그냥 무시해도 좋으며, 이란 자신들을 위하여 미국의 의도에 복종해야 하며, 쓸데없는 전면전은 피해야 하고, 미국이 독재자였던 통치자와 조력자들에게 무기 판매를 판매했던 사실을 언급하거나 기억해서는 안되는 국가일 뿐이었다.

역사적 사실이 분명한데도, 미국이 수십 년 전 이란에 행한 잘못에 아무런 단서가 없다는 듯이 블링컨은 지난 수요일에 행한 연설의 모든 내용을 이란이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블링컨은 오바마 정권 당시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이 세계를 하나로 모았다고 과시했다. 이것은 미국이 향후 기후위기를 다루는데 일정의 관심이 있음을 시사하지만, 기후협정을 방해한 미국의 과거 역사를 숨기려고 노골적인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단지 사실(Truth)이 사실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Biden 대통령이  “가치”를 말할 때마다 항상 제시되는 된 네 가지 중 하나이며, 미국 정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으로 세계공동의 이익과 미국의 이익을 일치시키기 위해 세계를 한데 모으려는 미국의 역량과 희망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블링컨이 줄곧 주장해 왔던 진실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슬로건으로 “국제사회는 스스로 조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유엔의 존재를 언급하지도 않았고 미국이 저지른 전쟁범죄행위를 조사하려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게 미국자신이 국제적으로 가장 무법한 제재를 가하고 있는 사실도 무시하고, 미국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가입한 주요 인권조약에 미국이 빠져 있음을 외면시하였다.

블링컨은 미국이 “앞장서 지도하지 않으면” 국제사회가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미국이 방향을 반드시 주도적으로 제시해야 하며 다른 모든 국가들이 이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국제기구를 통해 공정하게 협력한다는 제안은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바꾸려 숨을 돌리면서, 그는 향후에도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계속 보유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미국의 외교역량은 군사력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블링컨은 자신의 구상을 다음의 8가지로 분류하여 언급하였다.

1) 코로나-19의 대응

팬데믹 상황에서 반사이익을 얻는 민간업체들에 대한 조치와 공공선을 위해 행동하고자 하는 계획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었다. 미래의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하는 많은 약속이 있지만, 팬데믹의 발생원인을 조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2) 경제 위기와 불평등의 해소를 위한 조치

국무부와 관련이 없는 국내문제에 대한 언급과 향후 무역협상이 노동자들에게 공정해야 한다는 원론적 주장을 길게 늘어 놓았다. 지겹게 들었던 내용의 반복일 뿐이었다.

3)블링컨은 Freedom House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위협 받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그는 프리덤 하우스에 근거한 가장 억압적인 50개 정부 중에는 미군의 무장, 훈련 또는 자금의 지원을 받은 48 개 정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가 비판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 스스로 더욱 민주화되고 미국이 모델이 되어 전세계의 민주주의를 방어할 것을 제안하였다(제발 그러길, 그런데 젠장 지금의 미국 꼴이라니! ).

“우리는 국제사회에 민주적 모델을 장려하지만 값비싼 군사적 개입을 통해 또는 무력으로 권위주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통해 민주주의를 장려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러한 전술을 시도했습니다. 의도는 좋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확산에 나쁜 영향만을 미쳤고 미국인들은 신뢰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일을 다르게 진행할 것입니다.”

정말 좋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어긴 이후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를 되풀이하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일이다.

미국은 아프칸에 대한 약속을 저버렸다. 예멘에 대한 어정쩡하고 불명확한 약속, 군사지출을 평화적 프로젝트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제동, 이란핵협정에 대한 파기, 이집트를 포함하여 포악한 독재 정권에 대한 무기판매, 시리아에서의 전쟁 지속, 이라크 이란 독일 등에서 군대 철수를 거부, 베네수엘라에서 쿠데타를 지지(블링컨이 더 이상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로 같은 날, 베네수엘라 정부 전복의 시도를 공개적으로 지원함), 다수의 정부고위직에 전쟁경력의 군부인사를 지명,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대한 지속적인 제재, 사우디왕실의 독재자에 대한 지속적인 구애 등에 대해서는 일체의 해명이 없었다.

그는 ‘값비싼’이라는 형용사를 남발했다. 과연 블링컨이 향후 어떤 군사개입을 비용이 들지 않는 것으로 분류할는지 궁금하다.

4)이민제도의 개혁(Immigration reform)

5) 동맹과 파트너 국가의 구축

6)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

전세계 인구의 4% 비중인 미국이 기후온난화 원인의 15%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그는 미국이 앞서나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선언했다.

7) 기술현안

8) 거대한 중국의 도전

블링컨은 러시아 이란 북한을 적국으로 적시했지만, 미국이 규정하는 “국제적” 시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이들은 중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경제적 성공과 군사적 위협을 종합하면 결코 좋은(유리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중국과의 이해관계와 약속이행 그리고 장단점들을 길게 언급한 후, 그는 미국이 지난 주 시리아에서 과시한 것처럼, 필요하다면 군사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만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의 기준에 따를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는 인권, 민주주의, 법치, 진실의 네 가지 이름을 지정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암시했다.

하지만 시리아를 공격하여 유엔헌장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사전에 알았다면 미국시민들이 결코 인정하지 않을 행동이 아니던가? 유엔헌장에 따라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무차별 폭격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지 않는가?

2006년 미국 선거가 생각난다. 2006년 출구조사는 주요 이슈가 전쟁이라는 것을 압도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전쟁중단’이 선거 및 출구 여론조사와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가장 분명한 단일문제로 이는 국민적 명령이었다. 선거의 결과, 미국 유권자들이 이라크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연방양원 모두 민주당에게 다수의 의석을 주었다.

2007년 1월 워싱턴-포스트에 “전쟁에 반대”하라는 선거의 결과를 무시하고 민주당 정권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Rahm Emanual(편집자: 민주당 주요 인사로 오바마 시절 백악관 수석보좌관과 시키고 시장을 역임)의 칼럼이 실렸고 오바마가 실제로 2008년에 이를 실행하였다. 그는 집회 연설에서는 전쟁을 “반대”한다고 약속하고는, 뒤에서는 기자들에게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이중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대중을 혼란케 하는 매체와 엘리트층만을 위한 매체를 잘 식별해야만 한다. 비밀은 없다. 이제 곧 유권자를 속이고 엘리트로 군림한 Rahm Emanual이 중국 혹은 일본의 대사로 블링컨의 외교팀에 합류할 것이 예상된다. 이에 대하여 나는 아래 같은 일본식의 短詩Haiku를 남기고자 한다.

Send Rahm to Japan (Rahm을 일본으로 보내자)
He protects killer police (그는 사람죽이는 군대를 옹호하지)
U.S. troops need him (미국군대는 그런 작자가 필요해)

 

출처: WorldBeyondWar 홈페이지 on 2021-03-03.

David Swanson

전쟁없는세상World BEYOND War의 설립자이자 대표활동가이다

토, 2021/03/0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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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한국의 여론조사 등에서 사회갈등의 축으로 확인된 것은 주로 이념, 세대, 성, 연령, 계층 등이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이념 갈등은 오랫동안 정치적 갈등의 핵심이었고, 소위 ‘광화문 집회’ 등으로 코로나19 상황에서 한층 더 두드러졌다. 세대 간 문화적 및 사회경제적 격차는 정치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심화 속에서 ‘세대론’의 프레임을 통해 계속 지적되었다. 특히 노인 빈곤의 확대와 청년층의 전망 부재가 새로운 불평등의 의제로 주목받았다. 또 청년층 내부의 기회 격차가 ‘부모 찬스’나 ‘흙수저-금수저’ 등 이념 차이보다도 우선 작용하는 광범위한 계층 대물림의 현상으로 인식되면서, ‘공정성’이라는 말이 청년층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남성성 변화를 압박하는 사회경제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특히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루저’ 자의식 또는 ‘성공한 사람’과 단순 동일시하려는 주관적 현실 인식이 크게 확산했다. ‘디지털 성폭력’ 문제를 중심으로 청년 여성들이 정치적 주체로 떠오르면서, 이처럼 복잡한 사회불평등은 ‘젠더 정치’의 프레임으로 단순화하는 중이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발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위에서 거론한 이념, 세대, 소득, 재산 불평등과 빈곤 위험이 한층 악화하며 소위 ‘K형 양극화’가 우려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다른 불평등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특히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그 의미가 주변화되었던 ‘돌봄’ 관련 불평등, 그리고 되풀이되어 발생해도 해결되지 않는 ‘폭력’의 문제가 새로운 불평등으로 떠올랐다. 이처럼 사회불평등이 한층 더 악화할 뿐만 아니라 더 복잡한 양상으로 드러나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는 그 이전의 ‘정상성’으로 단순히 회귀할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특히 팬데믹으로 인해 또는 그 와중에서, 지금까지 비교적 서서히 진행되던 사회변화, 예컨대 디지털 경제의 확대 등 산업구조 변화와 기후변화나 쓰레기 문제와 같은 생태변화의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새로운 사회를 향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돌봄 관련 불평등

돌봄과 관련하여, 한편으로 코로나19는 정신병원 등 특수 돌봄 수용시설, 노인 요양원, 병원 등 돌봄 취약자 수용기관들에서 집단발병하였다. 그리하여 ‘돌봄 취약자’ 및 ‘돌봄 종사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했다. 집단 수준에서 다소 다른 양상으로 돌봄과 관련되며 감염에 취약함이 드러난 집단은 교회이다. 1, 2차 유행을 가져온 신천지 교회와 사랑제일교회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가 주요 감염발생지로 주목받았는데, 이 종교기관들 역시 영혼을 돌보는 기관들이다. 즉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기관들이 코로나19 집단발병의 최전선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돌봄이라는 의존관계에 있는 사람들, 특히 타인의 돌봄에 의존하거나 돌봄노동을 직접 수행하는 피고용자들이 감염에 가장 취약한 집단임을 의미한다. 이들의 이러한 불평등은 그동안 사회불평등에 대한 논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한편 개인 수준의 돌봄과 관련해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아동학대 사례들이 기사화하면서, 아동이라는 돌봄 의존적 존재가 ‘개별화한 사회적 취약자’ 집단으로 등장했다. 여기서는 돌봄을 직접 수행하는 지위의 어머니들이 가해자로 지목되어, 순리를 위반한 ‘악독한 모성’의 문제로 보도되고 있다. 물론 한때 ‘잔혹 동시’ 형태로 모성의 지배에 대한 자녀의 문제 제기가 보도된 바 있고 또 현재 청소년들 사이에서 ‘어머니’ 관련된 욕들이 난무한다고 하니, 모성 관계나 모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코로나19로 가정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한 데 비해 한국에서는 아동학대가 두드러짐을 고려할 때, 한국 가정의 돌봄 부담이 갖는 특수성이나 부부관계 및 부모-자녀 관계의 특수성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코로나19 감염병은 집단돌봄이나 가정 돌봄 모두가 사회에서 얼마나 취약한 관계를 만들어왔는지를 훤히 드러내는 사회학적 임무를 수행했다. 산업사회의 근대적 주체는 ‘노동하는 사람’이고 노동은 곧 직업 활동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그간 돌봄 영역은 사회에서 의미론적으로나 실제로 주변화되어왔다. 그런데 그런 실상이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이런 새로운 사회학적 관찰은 코로나19 감염병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라고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산업사회의 프레임으로 사회를 보는 인식론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돌봄 관계의 취약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의미론에 구애받지 않는 감염병은 오히려 자유롭게 사회적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주도한 이러한 인식론적 변화가 앞으로 사회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포괄되어, 다시 돌봄 관계의 취약성이 무시되거나 주변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인식론적 정상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폭력의 문제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집중적으로 폭로된 또 다른 사회불평등의 양상은 ‘폭력’의 문제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아동학대와 같은 개인 간 폭력의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기관과 조직 등 제도적 폭력의 문제로서 드러났다. 아동학대와 같은 개별적 폭력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공감’이 놀라운 수준으로 표현되었다. 많은 부모가 스스로 학대당한 아동의 부모로서 동일시하며, 생면부지 아동의 인권을 호소하며 앞장섰다. 과거 세월호 재난과 여러 청년 노동자의 사고사 등에 부모들이 나서서 자신의 죽은 자녀뿐만 아니라 누군지도 모르는 미래의 잠재적 피해자를 위해 싸웠던 것처럼, 그렇게 부모로서의 동일시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재난과 사고를 통해 국가기관과 기업이라는 거대 권력체의 폭력 앞에서 개인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통감해온 우리 사회의 역사와 유관하다. 아동학대는 개인에 의한 폭력이지만, 성인 부모와 어린 아동의 지극히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는 기관과 개인 간의 권력 비대칭과 유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비대칭적 취약자 지위에 있는 개인에 대한 인권 감수성은 그야말로 ‘개인에 대한 공감’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다. 세월호 재난과 무수한 재난들을 겪으면서 한국 시민은 익명적 관계 속에서의 시민적 동일시를 통해서 ‘촛불혁명’과 같은 변화를 이끌어온 바 있다. 그러나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와 달리, 사유재산에 기초한 기업이나 사용자의 고용관계에서 나오는 폭력과 권력에 대해서는 ‘시민’ 지위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 코로나19는 기존의 무수한 ‘갑질’ 고용 관행으로 피고용자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들 역시 증가시켰다. 배달 노동자들이 죽어갔고, 경비 노동자가 폭행을 당해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으며, 과거에 문제가 되었던 사고사가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되었다. 여성들이 일하는 콜센터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작업장이 감염 취약지로 되풀이되며 등장했다.

이처럼 ‘기관 대 개인’의, 특히 고용관계에서 나타나는 폭력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개인적인 안타까움과 공감으로 대응하고 있다. 배달 노동자에게 위로를 건네거나 택배가 늦어도 참고 기다리며 이해하는 식이다. ‘피고용자’로서, 직장에서 갑질을 당하는 ‘비정규직’으로서, 취약성이 배가되는 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다윗과 골리앗’의 다윗으로서 공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많은 학자는 ‘신자유주의 시대 연대가 사라진 개인화한 사회’의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연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개인화’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개인화한 공감’으로서 연대를 표현한다. 따라서 연대가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연대가 왜 개인화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직전에 가장 두드러졌던 사회정치적 연대의 형태는 청년층의 페미니즘이었다. 다양한 사회불평등이 서로 작용하여 갈등에 대해서 복잡한 인식이 나타나는 와중에도, 공론장을 형성하며 정치적 주체화한 세력은 청년 여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디지털 성폭력 이슈를 중심으로 온라인에서 새롭게 조직화하는 성폭력에 저항했다. 성매매 사이트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텔레그램 n번방 등을 직접 나서서 조사하고 폭로하며, 정치적 의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 새로운 사업체로 떠오르던 온-오프라인 네트워크에 정면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같은 네트워크 기반의 신생 사업체라고 해도 배달이나 택배 플랫폼 기업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연대가 작용하지 않았다. 그들을 연대로 이끌 ‘공통성’이 부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 상황으로 들어서면서, 고용관계와 관련된 집합행동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일어났다. 사회적 연대가 아닌, 자기 집단 연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정부의 정규직화 방침에 반대하는 인천국제공항 사태와 의사 파업이 대표적이다. 기득권자에 속하는 정규직 피고용자들 또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공공성’ 확대에 대한 정부 방침에 집단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여기서도 ‘연대’가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연대는 청년층 페미니즘처럼 ‘네트워크화’하거나,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이나 의사들처럼 성공한 상위 고학력자 층에서 ‘폐쇄화’하고 있다. 뒤의 연대 형태를 과거 막스 베버는 ‘사회적 폐쇄’라고 불렀다. 베버는 ‘계급’ 개념을 ‘사회계급’ 개념으로 바꾼 것으로 유명한데, 거기서 핵심은 계급이 더 이상 단순히 소유관계에서의 차이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급 위계가 다시 신분화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계급별로 상이한 문화와 의례를 보이고, 상이한 소비와 생활양식을 보인다. 즉 계급은 이익으로만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결속한다.

‘사회적 폐쇄’는 그러한 ‘계급의 신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편에서는 태도와 정서, 문화로 은밀하게, 다른 한편에서는 집단적 위력을 통해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대물림하는 것이다. 베버가 살았던 독일 사회는 계급 갈등이 치열하던 사회였다. 그 속에서 사무직이나 전문직을 중심으로 ‘신분화’나 ‘사회적 폐쇄’가 진행됨을 그는 관찰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계급 갈등이 치열하다고 할 수 없다. 몇몇 소수정당과 가입률이 미미한 노조들을 제외하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베버 시절 독일에는 사회민주당이 노동자 계급 정당이었고, 노조는 공산주의부터 가톨릭 계열까지 다양하게 포진해 있었다. 그런 독일도 현재는 디지털화로 인해서 노동자 조직이 약화하고 있다.

한국에서 ‘공공성’ 옹호와 관련되는 사회적 연대는 인권 감수성 강화 방식으로 ‘개인화’하거나, 청년 페미니즘 방식으로 ‘네트워크화’하고 있다. 과거 서구의 계급정당이나 계급조직 또는 과거 한국의 민주화 운동 단체처럼 조직화한 형태의 연대는 점점 약화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고용관계에서 조직화한 힘의 대치가 나타나지 않고 ‘다윗과 골리앗’의 형태가 지속되기 때문에, ‘갑질’이라는 형태의 폭력 수반이 가능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아동학대와 비교될 수 있듯이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가 경제적 ‘계약관계’가 아닌, 비대칭적 권력 속의 돌봄 관계인 양 인지된다. 그리하여 권력이 쉽게 폭력으로 표현되고, 신분적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 ‘정상’으로 인지된다. 성공한 고학력자 층의 신분적 위세 과시 역시 그런 맥락에서 공공연하게 가능해진 것이다.

 

계약관계와 돌봄 관계의 구분 및 그에 따른 이중적 정의 개념의 필요성

이처럼 코로나19 아래 한국 사회의 제반 문제들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사회불평등의 의제는 1) 돌봄 취약성과, 2) 고용관계에서의 유사 신분적 권력관계를 포괄해야 한다. 또 3) 이 두 문제가 한국의 사회불평등 연구 및 인식에서 명확히 가시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구와 구별되는 양상이 나타남에도 유의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문제들을 가시화했으나, 감염병의 사회학적 기여분은 거기까지이다. 그 이후의 작업은 인간과 사회가 이어가야 한다.

이런 복잡하고 새로운 사회불평등의 인식을 위해서 필자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돌봄 관계를 사회불평등의 의제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약관계의 정의(justice)와 돌봄 관계의 정의(justice)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산업사회의 정의론은 계약관계의 정의만을 다루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의 인식론적 기여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돌봄 관계의 취약성 역시 정의론의 의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목격한다. 그러나 돌봄 관계는 개인 능력의 불가피한 격차에 기초한 비대칭적인 관계이고, 거기서 권력관계의 속성은 자율적 개인들 간의 계약관계에서와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정의론은 이중적 형태로 설명되어야 한다. 계약관계에서의 정의와 돌봄 관계에서의 정의를 동시에, 그러나 각각 구분하여 다루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서구 페미니즘에서는 돌봄 관계가 더 원초적이라는 주장이 크다. 물론 돌봄 관계 없이는 개인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그런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서 계약관계를 돌봄 관계로 대치하는 방식으로 사고 전환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앞서 보았듯이, 고용관계의 ‘갑질’과 ‘폭력’은 한국에서 계약관계가 ‘노동력 상품화’의 계약이 아니라 ‘인신 판매’의 계약으로 인지됨을 폭로한다. 돌봄과 같은 의존관계는 비대칭 권력관계를 정당화하기 쉽다. 따라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돌봄 관계 자체에서의 장치가 필요함과 동시에, 돌봄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 관계와의 구별 또한 필요하다. 돌봄 관계는 의존이 ‘불가피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적 자유노동자의 고용자에 대한 의존성은 사회적 힘의 결과이다. 거기에는 어떤 자연적, 물리적 우연성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홍찬숙

화, 2021/03/09-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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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중국 정부는 최근 향촌진흥 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와 실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책 실천과정에서 ‘향촌건설행동’이라는 강령을 제시함으로써, 정부의 정책이 과거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향촌건설운동의 맥을 잇고 있음을 천명했다. 2월말에 발표된 중앙1호문건에도 언급되었다. 2021년 2월25일, 중국의 농촌빈곤 구제 정책의 성공을 시진핑이 공식적으로 선언함과 동시에 베이징에 위치한 국무원부빈개발영도소조國務院扶貧開發領導小組 사무실의 명패를 국가향촌진흥국國家鄉村振興局으로 바꿔 달았다. 2020년 후반기 팬데믹 상황하에서 발표된 쌍순환 경제구조로의 재편 전략에서 국내대순환의 주요한 산업적 역할이 향촌진흥 정책의 실천에 부여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책 성공의 관건은, 농촌 기층행정단위의 지역경제 재구성에 놓인다. 20분 정도의 짧은 강연이지만, 그 역사적 맥락과, 현재의 실천을 위한 주요한 관점을 살펴 볼 수 있다.


2021년 1월16일 원톄쥔 교수가 “칭화清華대학 현역縣域노동력조사” 보고회에서 온라인으로 행한 강연의 녹취내용이다. 

본 강연에서 두가지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근대중국 공업화 초기에 있었던 현縣, 진鎮, 촌村의 기층 농촌 행정단위 종합발전사례. 둘째, 현재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현급지역 경제의 재구성에 대한 것이다.

첫번째 관점을 소개하기에 앞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겠다. 중국이 공업화 위주의 소위 근대화과정에 진입하면서, 초기에 양무운동의 부국강병을 위한 공업화를 발전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중국 정부는 민간 상인과의 협업하에 새로운 공업화단계로 진입했다. 당시 산업을 진흥시켜 나라를 구하겠다는 실업구국實業救國이라는 구호가 있었다. 이때부터, 민간자본과 정부의 자본이 함께 공업화를 진행하면서, 소위 지역경제, 특히 현급 이하의 지역 경제문제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연구와 실천영역으로 여겨졌다. 2020년 시진핑 총서기가 대표적 사례인, 쟝쑤江蘇성 南通난퉁의 장지엔張謇 기념관을 둘러보기도 했다.

장지엔은 중국근대사에 있어, 현급 지역 경제발전을 실천한 대표인물이다. 그는 동시에, 중국 공업화 초기, 양무운동 당시, 민관협력에 참여한 소위 민간자본가로서도 중요하다. 청나라 말기 과거제도 최후의 장원급제자로도 유명한, 그는, 청일전쟁의 패배에 충격을 받고, 1896년 당시 난퉁현에 대생大生그룹을 창업하게 된다. 이것은 놀랍게도, 오늘날 강조되는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 ‘현급지역의 종합발전’ 등으로 익숙하게 불리는 것들을 그런 개념도 채 존재하지 않던, 19세기에 선구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 반대 개념인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은 서방자본주의의 역사발전과정에서, 금융자본의 유동성을 강조하는, 금융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하면서, 출현한 것이다. 산업자본은 초기에는 국가단위로 형성되어, 국적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로컬라이제이션으로 부를 수도 있다. 금융자본과 같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이윤을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단위의 산업자본이 양무운동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사공업위주로 발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의 민관이 협업하는 산업자본은 민간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지역에 기반한 진정한 로컬라이제이션 개념에 부합한다. 장지엔이 난퉁현에서 만든 대생그룹이 지역에서 1,2,3차 산업을 종합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좋은 예이다.

그래서, 다시 지역경제를 재건함에 있어, 이를 잘 참고해야 한다. 또, 난퉁의 실험이 단순히 산업과 자본의 발전이 아니라, 문화, 교육 등 각종 사회사업과 함께 연동해서 진행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장지엔은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농회農會를 만들어 농지를 간척하고 면화를 재배했는데, 이는 일차산업 생산물로 이차산업을 지원한 것에 해당한다. 80년대 출현한 향진鄉鎮기업들의 원형을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농민이 생산한 면화로 방사공장에서 실을 잣고, 다시 개별 농가가 이를 이용해 직물을 짜게 했다. 당시, 강남지역 농민의 방직 역량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전체 사회사업의 발전이 대생그룹의 밑바탕이 됐다. 자본과 민간사회가 대립이 아니라, 상생을 추구했다.

이번 중앙오중전회中央五中全会에서 ‘향촌건설행동’을 특별히 강조했다. 역사속에서 사용된 ‘운동’이라는 표현을 행동으로 대체한 것은, 정치이념적 오해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중에 현급지역 및 그 이하 행정단위의 통합적인 발전 계획 수립에 대한 요청이 있다. 당연히 난퉁의 사례를 참고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하부의 행정단위인 향진鄉鎮급 지역 경제를 예로 들자면, 루쭈어푸盧作孚의 실천사례를 찾을 수 있다. 현재, 충칭重慶의 베이베이구北碚區이고, 당시에는 베이베이진鎮으로 불리던 곳이다. 지역의 각종 자원을 통합해서 발전을 꾀했다. 가장 하부단위인 촌村에서는 푸졘성福建 창러현長樂縣 잉쳰촌營前村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촌장인 황쟌윈黃展雲은 쑨원의 비서로 일하다, 국민당 푸졘성 당서기, 국민당 정부의 푸졘성 교육청 청장을 역임한 거물이었지만, 고위 관직을 사퇴한후 마을발전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모두 지역 자원을 통합해서 발전을 추구한 사례이다.

근대사를 공부하면, 이처럼, 각 행정단위로 좋은 지역경제 발전모델의 사례를 발굴할 수 있다. 일방적인 산업화, 자본화, 공업화가 아니라, 지역에서 도농이 상생하면서, 통합적, 종합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 사례들이다.

두번째는 현대의 새로운 산업발전에 대한 관점이다. 지금 연근해의 지역경제에는 지역별로 구조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갈수록 국면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남방지역에서는 원래, 가공무역 수출형산업이 발전했었다. 외국자본이 들어와 값싼 노동력과 자원환경의 지대 이점을 활용해서 이윤을 얻던 산업들이다. 이제 이런 생산요소들의 비용이 중가하면서, 자본이 외부로 이동하고 있다. 초기의 외국 자본은 이미 일찌감치 철수해서, 중국내 자본이 접수한 상태였다. 이런 경제구조는 다양한 산업과 자원을 통합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므로 로컬라이제이션형으로 볼 수 없다. 성별, 연령 등의 노동력 제한이 있고, 취업난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이미, 과거의 중국과 유사한 조건을 가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로 혹은 그보다는 조건이 떨어지는 태국, 미얀마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노동력 조사에 있어서,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같은 무역형 산업이라고 해도, 져쟝성浙江, 푸졘성, 광둥성廣東의 경우가 다르다. 져쟝성의 일반무역형의 수출산업은 산업내 가치사슬이 모두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훨씬 안정적이다. 이러한 차이에 주목하면, 일반무역형 수출산업이 가공무역형 수출산업에 비해서 로컬라이제이션 성격을 많이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두번째 관점은 이러한 국면이 심층적으로 의미하는 바이다. 팬데믹 위기이후, 특히 미국이 그 이전부터 중국을 상대로 벌여온, 무역전쟁, 과학기술전쟁, 그리고 금융전쟁, 아마도 다음 타자가 될, 환경전쟁 등, 다양한 ‘중국때리기’국면의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 중앙 정부는 베이스라인 底線전술을 강조하고 있다. 외부의 공격과 봉쇄속에서 생존을 위한 베이스라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국내대순환이 주가 되는 쌍순환 전략으로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수출지향의 국제대순환 위주의 경제를 과거 약 20년간 운영해왔다. 반대로 국내대순환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녹수청산 금산은산綠水青山金山銀山”의 양산兩山이론을 현급지역 경제에서 실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생태적 발전이다. 소위 123차산업 융합이 중요하다. 과거와 같이 단일한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업태의 경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모든 생태공간자원을 신경제발전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자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현급지역경제가 중요하다. 그 하부 행정 단위인 향진과 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생태자원의 재산권은 촌단위경계의 연고에 기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촌단위 집체경제를 새롭게 구축해서, 공간생태자원의 관리와 개발에 대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이러한 마을집체가 123차산업 융합과 국내대순환 발전방향의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다.

촌단위의 정치, 행정과 재산권이 중첩되는 것이 이러한 개혁에 유리한 조건이다. 하지만, 촌 단위에서는 개발을 위한 자본 동원 능력이 부족하고, 융자를 해줘야 할 금융기관은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여,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공간생태자원에 대한 표준화된 가치측정기준이 없고, 생태자원은 추상적인 인문자원까지 포함된 통합적 자산인 고로 개별요소로 쉽게 분할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금융기관이 평가와 관리를 할 수 없다.

그래서 현급행정단위가 역할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상업은행 지점은 현급단위에 개설돼 있다. 이 단위에서만 농업생산자와 금융공급자를 연결시킬 수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만, 현급지역 경제의 종합적 발전을 꾀할 수 있다.

현재 전국 각지에서 이러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유가증권발행시장의 메커니즘을 도입해서, 농촌의 생태자원을 자산화하고, 현급 플랫폼회사의 자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플랫폼회사의 자산을 토대로, 금융기관들이 평가와 융투자를 할 수 있다. 동시에 금융기관외에도, 국가재정부문, 보험, 농업담보회사 등이 함께 손잡고, 이 투자에 대한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상의 혁신이 현급지역경제의 종합적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장지엔의 100년전 실험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대생그룹은 이미 1,2차산업뿐 아니라, 물류, 저장, 금융, 보험 등을 함께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30년간 지속된 난퉁의 실험은 포용성과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하다.

 

김유익

목, 2021/03/1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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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지지’? 잘못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이 땅 고위 관료의 희화화된 자화상

관료의 대표자 격인 홍남기 기획재정부장관은 지난달 ‘지지지지’ 발언을 해 ‘지지지지’란 말이 한동안 회자된 바 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은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담백하게 나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의연하고 담백하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부터 늘 가슴에 지지지지(知止止止)의 심정을 담고 하루 하루 뚜벅뚜벅 걸어왔고 또 걸어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 기재부 직원들의 뛰어난 역량과 고귀한 열정, 그리고 책임감있는 사명감과 사투의지를 믿고 응원합니다.” – 2월 2일 홍남기 기획재정부장관 페이스북 글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 말은 그야말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잘못된 말’이다.

이 ‘지지지지’란 말은 유명한 국문학자 정민 교수가 조선일보에 쓴 기고문이 그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앞의 ‘지지(知止)’는 알려진 대로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뒤의 ‘지지(止止)’에 대해 정민 교수는 그 기고문에서 “고려 때 이규보는 자신의 당호를 지지헌(止止軒)으로 지었다. 지지(止止)는 ‘주역’ 간괘(艮卦) 초일(初一)에서 “그칠 곳에 그치니 안이 밝아 허물이 없다(止于止, 內明無咎)”고 한 데서 나왔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는 오류다. <주역>이 아니고 <주역>을 모방한 <태현경>이라는 일종의 궤변서로서 쉽게 말하면 ‘짝퉁 주역’이며, 그 책에 나오는 止于止라는 어귀에서 止止를 끌어내 앞의 지지(知止)에 자의적으로 붙여 만들어낸 말이다. 언어유희에 불과한 ‘억지 말’이요 ‘엉터리 말’이다.

이러한 ‘잘못된 문자’를 그것이 잘못된 줄도 모르고서 오히려 그로써 ‘헛된’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한다.

‘지지지지’, 이 땅 고위 관료들의 희화화된 자화상이다.

 

고위 공직을 모두 개방직으로 전환시켜야

말단 직급에서 차관이나 장관까지 올라가는 ‘입지전적 인물’이 미담으로 소개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공직 사회의 후진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공직에서 국장급 이상의 직위는 우리처럼 기본적으로 관료 출신이 자동 승진하여 당연히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 정무직(政務職)으로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 우리나라와 달리 공무원들은 대부분 국장급 아래의 직위에서 멈춘다.

미국에서는 대통령과 정부가 바뀌면 정부 국장급까지 정무직(political appointees)으로서 모두 대통령이 임명하게 된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최고위층 공무원은 EL-Ⅰ에서 EL-Ⅴ까지 5등급으로 분류된다(EL= Executive Level).

EL-Ⅰ: Secretary(장관)

EL-Ⅱ: Deputy Secretary(부장관)

EL-Ⅲ: Under Secretary(차관)

EL-Ⅳ: Assistant Secretary(차관보)

EL-Ⅴ: Deputy Assistant Secretary(국장급)

프랑스 역시 중앙부처의 국장, 임명직 도지사, 교육감, 대사 등 500여 개의 직위가 정치적 임명직(자유재량 임명직)으로서 국무회의 심의 심사를 거쳐 특별 채용하는 등 대통령은 총 7만 여 개의 직위를 임명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대통령의 정무직 공무원 임명권을 제한하는 것은 통상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인 기존 경력직 공무원의 강력하고 뿌리 깊은 관료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차제에 우리나라도 (탁월한 역량을 보유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국장급 이상의 고위직군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으로 구성하는 방안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도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직업 공무원들이 독점하는 고위공무원직을 모두 개방직으로 전환하여 3급 이상 고위 관료군의 문호를 모든 국민에게 개방해야 한다. 이는 유능한 인재 채용의 길이며, 동시에 ‘영혼 없는 관료 현상’의 방지를 위한 실질적 방안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영토, 그들만의 금자탑

관료 조직은 외부에서의 진입이 철저히 봉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지금은 5급 공채로 그 이름만 바꾼 고시 출신의 성골을 비롯하여 진골 그리고 육두품 등등의 차별과 장벽의 철옹성으로 둘러쳐진 이너서클의 조직이다. 온전히 그들만의 영토이고 그 영토 안에서 승진을 매개로 하는 상명하복의 수직적 (vertical) 문화와 관행으로만 ‘잘 훈육된’ 구성원이 존재하며, 그들이 쌓아올린 그들만의 금자탑이다. 그들이 곧 규칙과 룰(rule)의 제정자다.

무엇보다도 민간전문가를 포함하는 일반 국민들의 공무원으로의 진입이 전면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이고 보편적인 공무담임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비단 국가시스템 운용의 합리성 제고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국민주권 강화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무원 제도의 폐쇄적이며 경직된 구조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외부 개방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오늘의 시대정신에도 부합된다. 이는 격변하는 현대의 지식 정보 사회에서 각 분야에 있는 우수 인력에게 국가 관리의 기회를 제공하며, 특히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박탈’된 많은 우수 인력들에게 일종의 ‘패자 부활전’의 장(場)을 열어 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무원이란 영어로 ‘public servant’로서 문자 그대로 국민을 위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며, 한자어로는 ‘국민의 종’이라는 뜻의 ‘공복(公僕)’이다. 우리 헌법 제7조에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공무원의 신분보장과 정년 보장은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정파를 초월하여 국민에 대한 봉사를 하라는 의미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과연 공무원에 대한 이러한 신분 보장과 정년 보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공무원의 신분 보장과 정년 보장이 헌법이 규정한 바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를 게을리 하게 만드는 제도적 온상이 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LH 사태, 빙산의 일각일 뿐

최근 우연히 드러난 LH 투기꾼 공사직원들 사태는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땅의 관료집단은 국가자본주의 시스템과 발 맞춰 성장해왔다. 그들은 겉으로만 봐서는 정치 권력의 하수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 세력들이 정쟁으로 이전투구를 벌이면서 관료들이 챙겨주는 ‘떡고물’과 낙하산 자리 손에 넣을 때, 그 나머지 대부분의 실속은 관료들의 차지다. 그들은 그렇게 정치 권력에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는 한편 아래로는 시민 세력을 완강하게 억압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높다란 장벽을 치고 감시와 견제의 철저한 부재, 혹은 그 유명무실 속에서 전현직 모두 어울려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다.

정치 권력은 원래부터 관료개혁에 의지도 없지만, 더구나 관료들의 도움 없이는 권력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언제나 관료를 우군으로 여긴다. 그렇게 관료공화국의 철옹성은 더욱 강고해진다.

정치 권력은 여전히 관료개혁에 대해 아무런 의지도 없고 시민 세력 역시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변화되지 않는 한, 이 땅의 관료공화국은 반근착절(盤根錯節), 계속 번성할 것이다.

 

소준섭

화, 2021/03/1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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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사회의 부정부패는 일개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여야를 막론하고 역사적 맥락에서 쌓여온 과거의 적폐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국가실패의 일반적 후유증이다.

근현대적 역사의 흐름을 뒤돌아보면, 봉건적 반민중적 관료제의 관비적 성격을 청산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가 서세동점의 국란시기였던 구한말에 이루어지지 못하여 망국의 치욕을 치르고 매국적 성격을 더한 가운데, 해방공간에서도 점령자 미군과 이승만 연합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악화되었으며, 박정희에서 노태우 정부까지의 관료사회는 군사문화에 찌들고 권력에 종속된 하수인으로 철저하게 기회주의적 조직으로 타락하는 과정이었고, 87년 민주화 대투쟁을 통하여 형식적인 민간정부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무능과 야합적 성격으로 민주화 이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민주권적 통제가 실현되지 못한 채 여전히 주요한 역사적 청산의 과제상황으로 남아 있다.

관료의 부패유형을 분류해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역사문화적 배경에 더하여, 1) 공직자가 갖는 제도와 지위적 권한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경우, 2) LH 사건에 보듯이, 시장기제의 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비밀스런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우, 3) 공익과 공공질서를 앞세우면서 재벌 등 특수한 이익을 공공의 이익에 우선하는 경우, 4) 관료사회가 자기 보호와 권한의 확대를 위하여 네트워크를 강화하면서 발생하는 경우 등 열거할 수 있다. 필자는 이를 통칭하여 제도와 지위 그리고 조직망을 악용한 ‘관료적 지대추구 행위’라 부르고자 한다.

행정과 사법의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부패하고 비도덕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점을 넘어서, 네트워크를 형성해가며 기득권 질서와 결탁하여 제도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거부한 주요한 사례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0.26 박정희 시해 사건은 단순히 사감에 의한 김재규 장군의 총격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8년 군사독재 하에서 이루어진 일방적 특혜적 개발독재의 결과 중화학 사업의 과잉중복투자와 정경유착의 부패비리가 심대하여 국가사회의 지속 조건을 유지하기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자, 이를 물리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 일어난 것이며 연이어 터진 광주학살 역시 같은 관점에서 당시 봉착한 사회경제적 한계상황을 광주시민의 항쟁을 구실삼아 군사적 물리력으로 해결하려는 기득권의 음모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군부와 기득권적 행정과 사법세력 그리고 수혜자인 재벌들 간에 암묵적 결탁이 가능했으리라 추측한다.

이후 실권을 장악한 군사정권과 행정사법 세력들은 특혜와 3저 호황으로 비대해진 재벌 등의 금력에 매수를 당하여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삼성그룹의 자동차산업의 진입(당시 이미 기아차의 부실 등 중복투자가 문제였다)을 승인하고, 한보같은 쓰레기 집단에 놀아나 각종 비리와 부패의 종합판인 수서 사건 등을 연출하며, 금융감독기구 역시 인맥과 부패의 고리에 포위되어 예건데 부실한 한라그룹 등에게 천문학적 은행대출을 허용하면서, 급기야 6.25동란 이후 남한 민족의 최대 수난인 IMF 위기를 초래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재벌에 놀아나면서 정치판과 사법행정의 거대한 인맥의 조직적 비리와 부패라는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들어난다.

국란의 위기 속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며 DJP연합정권 하에서 JP계열이 경제정책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IMF 위기상황을 구실로 국민경제의 심장인 금융산업을 거의 통째로 신자유주의의 상징이자 악마적 수탈집단인 월가의 자본에 팔아 넘긴 어처구니 없는 민주당의 실책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관치와 비리의 온상이었던 금융산업을 선진화하고 경쟁체제를 도입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1-2개 정도의 민간상업은행을 외국자본에 넘겨 메기효과를 노리는 수준에 머물렀어야 했고 당연히 공적 기관인 대부분의 은행들은 정부 또는 시민자본의 통제하에 두었어야 옳았다.

이후 오늘까지 한국의 자본시장과 금융산업은 외국자본의 탐욕과 의도에 종속되어 국민경제의 중장기적 관점보다는 자본의 단기적 수익에 매달려야 하는 멍에 속에 갇혀버렸다. 개혁을 열망하던 국민들의 환희와 기대 속에 출범한 참여정부 역시 재벌들의 이해와 실적을 국민경제의 일반적 내용으로 동일시하는 패착을 두면서 삼성그룹(경제연구소)이 제시한 밑그림의 초안을 곧이 곧대로 사회경제적 정책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자유주의의 고착과 양극화의 심화라는 초라한 성적을 결과하여 기어코 이명박이라는 사기꾼에게 정권을 넘겨주며 마감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관료사회는 안으로는 정치권력에 기회적 처신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기득권과 손을 잡으면서 김&장으로 상징되는 대형의 법무회계 법인들을 매개고리로 구조적이고 악질적인 관료적 지대추구행위를 급속히 확대시켜 왔다. 이명박정권이 정부조직을 마치 개인소유의 사기업처럼 악용하고 무리한 4대강 사업의 강행과 해외자원 개발투자 등 광란의 행진을 마구 벌리는데도 어느 부처, 어느 사법기관, 어느 공기업 하나 손을 들어 이를 저지하지 못한 배경에는 이렇듯 광범한 인적 조직적 구조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공동정범 내지는 방조범 역할을 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뒤이은 박근혜 아바타 정권의 어처구니 없는 부패부정에 대한 내용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기에 생략한다.

2008년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 이후 세계경제는 미래적 전망과 좌표를 상실한 채 탐욕과 자본증식의 논리에 물든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세계화라는 구호 속에 이루어져 왔던 무역개방과 상호호혜라는 그간의 세계경제의 기본적 원칙을 폐기하고 지역주의 또는 자국이기주의 및 패권적 경향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선진제국들은 가능한 양적완화라는 화폐금융정책 등을 통하여 타국의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연히 한국정부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재정과 통화정책에 유연성을 가지고 위축되는 수출시장을 보상하기 위하여 OECD 절반수준에도 못 미치는 사회안전망을 대폭적으로 강화하면서 내수시장을 확장하는 수요유발적 정책을 취했어야 했다. 이토록 사안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에 이어 문재인 정부조차 지난 2년 여간 ‘증세 절대불가론’을 고수하면서 긴축재정으로 일관하여 왔고 당연한 귀결로써 취약한 영역인 자영업과 중소기업은 생존의 한계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현재의 경제가 어렵고 자영업 등이 위기를 맞이한 것은 수구언론이 나발 불어대는 것처럼 불과 10조 수준의 최저임금 인상 부담이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주당 52 노동시간 도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무역 환경의 급속한 악화에 더하여 문정부의 사회철학적 부재 및 행정관리적 미숙과 증세거부에 따른 사회안전망의 부실화 그리고 긴축재정에 따른 내수시장의 위축이라는 정책적 패착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시나 기득권세력과 결탁했거나 미리 이들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작동하는 관료사회의 기회적 속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렇듯 정언적인 시대요구를 진행하는데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동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행정과 사법의 조직으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공인이어야 할 이들이 보여주는 노회하고 비도덕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근성과 이들이 형성해 놓은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 그것이다.

세계사적 지각변동을 눈앞에 두고 반드시 겪고 넘어야 할 수많은 변혁적 과제를 지닌 한국사회의 진로를 가로막는 현존의 관료사회는 행정과 사법적 연속성이라는 구실을 방패삼아 여하히 기득권적 지위를 방어하고자 하는 보수적 속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핑계는 레코드 판을 돌리는 듯 항상 반복되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다 ‘ 적폐청산은 법의 규정에 없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은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기득권과 결탁한 관료들에게 새로움과 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적 행위일 뿐이다.

공직자들의 개인적이고 사안적인 부패와 비리는 싱가포르와 홍콩의 사정기구의 경우처럼 이를 성공적으로 시행한 사례를 거울삼아 현재의 감사원을 행정부에서 분리시켜 시민통제하에 있는 독자적인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책임과 권한을 동시적으로 엄중하게 관리하는 제도를 도입한다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바람직한 시행성과가 가능한 사안으로 보인다.

문제는 위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했듯이, 한국사회에 광범하게 펴져나가 암적 존재가 되어버린 사법과 행정 관료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조직적이고 정책적이며 합법성을 가장한 패악질, 즉 위에 언급했듯이 지위를 악용하는 관료적 지대추구의 행위를 여하히 근절하느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서 볼일은 기득권과 연합한 수구정권의 시기보다 민주당 등 중도개혁 정권이 들어서면 경제성장율도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국가부패지수CPI도 대단히 개선되어 왔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 국가부패지수는 서유럽 수준에 접근하였으나, 곧 이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시절에는 아프리카 수준까지 밀려나고 있었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현격히 개선되어 왔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부패지수는 경제성장율과 긴밀한 관계성을 지니고 있어서 지난 수십 년간의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과 미국 공히 중도개혁 정권 시기가 보수정권(미국의 경우 공화당) 때보다 대체로 1-2%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LH사건은 단순히 문재인 정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70여 년간 공직사회가 무대의 장막 뒤에서 벌려온 온갖 부정부패의 연장성에서 터져 나온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다만 LH등 부정부패와 투기의 사건은 착수된 시점과 이것이 표면화되는 시점과의 시차 그리고 우연적 계기에서 표출되고 폭로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물론 문재인은 정부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촛불시민에 의해 국가운용에 대한 수임을 받았음에도, 역사적 과제상황에 대한 정치적 의지는 실종되었고, 적폐를 청산하기는커녕 오히려 법질서라는 이름으로 수구정치 세력과 타협에만 열중하였다. 이에 더하여 무능함을 노출하고 정책적인 방향성을 상실하여 표류하면서 기득권과 노회한 공직사회에 포획되어 급기야 LH사건이 터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솔직히 질문해보자. 기득권과 결탁한 수구정치세력이 과연 민주당보다 공직사회에 대한 부정부패를 다스리고 관리하는데 더 유능할까? 필자의 대답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다.

위에 기술한 역사적 과정의 기록들이 이를 대변한다. 검찰출신들이 해낸다? 근현대사를 가장 심하게 왜곡한 집단이면서 단 한번도 자기고백과 반성을 하지 않은 집단이 바로 검찰과 사법 집단이 아니던가? 처가를 위하여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을 남용한 인사가 과연 부정부패를 다스릴 수 있을까?

결론은 공직사회의 부정부패와 꼼수는 여와 야를 나누어 선택하여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수구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서로가 결탁하여 교묘히 은폐하면서 더욱 악화될 공산이 십중팔구이다.

불행하게도 진보적인 정책정당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2021년 한국의 현실에서, 유권자로서 시민들이 당장 선택할 방법은 출신 정당을 떠나서 출마자들의 역량과 도덕성을 꼼꼼히 따져서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길 뿐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국민입법제를 도입, 직접민주주의를 점차적으로 실현해 가면서 주권자인 시민들이 입법과 행정과 사법의 권력을 견제하고 통제하고 처벌하는 길을 열어가야 한다. 우리민족은 동학혁명 시절의 집강소라는 자랑스런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2021-03-15.

이래경

수, 2021/03/1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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