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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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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익명 (미확인) | 목, 2019/01/24- 17:52

식민지 비망록 43

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이순우 책임연구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에 나온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광고란에는 다음과 같은 행려사망(行旅死亡)에 관한 내용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1. 본적: 미상 2. 주소: 미상 3. 성별: 여, 성명 나혜석, 연령 53세 4. 인상(人相): 신장 4척 5촌, 두발 장(長), 수족 정상, 입 코 눈 귀 정상, 체격 보통, 기타특징 무(無) 5. 착의(着衣): 고의(古衣) 6. 소지품: 무 7. 사인(死因): 병사 8. 사망장소: 시립자제원(市立慈濟院) 9. 사망년월일: 단기 4281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 취급자 서울시 용산구청장 명완식(明玩植) 단기 4282년 1월 3일

나혜석의 행려사망 사실이 기록된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해당 지면

 

관보의 말미에 겨우 수록된 행려 사망자의 내역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는 참으로 의문이지만, 여기에 언급된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 살아간 천재예술가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바로 그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는 철저하게 여느 사람들의 망각 속에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나마 여기에 기재된 이름 석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죽음에 관한 이토록 희미한 기록마저 영영 잊힐 뻔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숨진 곳은 ‘시립자제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일제시기 의료구호기관이던 경성불교자제원(京城佛敎慈濟院, 원효로 1가 12번지)이었고, 해방 이후에 ‘서울시립 자혜병원’ 시절을 거쳐 1960년 1월 1일에는 시립남부병원(市立南部病院)으로 전환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 병원이 서울중부병원과 합쳐 1977년 7월 2일에 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 이전된 뒤에는 도로확장공사 탓에 부지 일부를 상실한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원효로 1가 25번지)가 이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자리의 내력이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그 흔적이 저 멀리 1904년 러일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용산시가도> (1929)에 나타난 ‘불교자제원’의 위치이다. 바로 인접한 곳에 선립상업학교와 일본인 사찰 서룡사 및 흥국사가 포진한 것이 눈에 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각사등록(各司謄錄)> ‘외부일기(外部日記)’ 1904년 2월 17일자에는 일본공사관의 조회(照會)를 통해 “우리 북진군(北進軍, 일본군)이 내일 18일에 약 2만 명 내외의 병력이 일시 경성에 도착하여 2, 3일 머문 후 발정할 예정이므로 이들이 머물 곳으로 경복궁 안의 사용 무방한 청사를 일시 빌려서 이들 병력의 숙소로 충당”하겠다는 내용이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일본공사의 알현시 용산에 있는 별영창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및 정미소(精米所) 3곳도 신속히 차용하기로 윤허를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서울 인근에 일본군 병력이 대거 밀려들게 되자 당연히 이들이 묵을 공간 확보 문제가 긴급 현안으로 대두되었는데, 이에 따라 한국군 주둔지와 다수의 관공서 또는 학교 터가 징발되어 그들의 숙소로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1934), 731쪽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 18일 이후의 입성병(入城兵)에 대해서는 일본인측 가옥으로는 가장 먼저 수용의 여지가 없어졌으므로 한국 측으로부터 용산 별영창(龍山別營倉, 현 원정 3정목 조선서적인쇄회사 내의 옛 건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경성 원정 1정목 경성불교자제원의 부지 내), 서대문밖 평양병병영(平壤兵兵營, 현 죽첨정 1정목 서대문경찰서 적십자병원 부지 내 일대의 지점), 서소문안 시위제일대대(侍衛第一大隊, 현 서소문정 120번지 총독부 관사 부지의 일부), 통내(統內) 친위제일대대(親衛第一大隊, 현 연지동 전매지국의 부지 내), 동궐 앞 친위 제이대대(親衛第二大隊, 현 운니동 99번지 이왕직분실), 저동 공병대(苧洞 工兵隊, 영락정 1정목 전매국 부지 내)의 각 병영 및 명동 장악원(明洞 掌樂院, 현 황금정 2정목 동척회사 부지의 서남 모서리), 필동 잠업과(筆洞 蠶業課, 현 앵정정 2정목 186번지의 지점) 등의 여
러 장소를 빌려 받아 숙영(宿營)했다.

여기에서 용산 별영창의 위치를 ‘조선서적인쇄회사’라고 적어 놓은 부분은 잘못된 설명이다. 별영창은 원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속한 군병들의 급료 지급을 맡았던 한강변 창고이며, 한강 조망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했던 읍청루(挹淸樓, 청암동 168번지)라는 누각도 이곳의 구역 내에 함께 있었다. 위의 글에서 ‘원정 3정목’에 있다고 잘못 적어 놓은 것의 정체는 군자감 강감(軍資監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일대) 터를 말하며, 이곳에는 용산 전원국(龍山 典圜局)과 총독부 인쇄국에 이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를 거쳐 1936년 12월 이후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서게 된다.
앞의 내용에 등장하는 ‘초자제조소’는 대한제국황실에서 필요한 유리창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 유리제조공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조선신문> 1925년 5월 19일자에 게재된 경성불교자제회 실비진료부의 광고 문안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포함된 「한정(韓廷) 고용 외국인 해용(解傭) 처분에 관한 건(1904.5.30)」에 따르면, 유리제조기사로 초빙된 러시아인 화학교사 메이로(Meiro)와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李容翊)사이에 고용계약이 성립한 것은 1902년 1월 31일의 일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 당시 “대한정부
의 한성(漢城) 및 부근지에 건립될 황실유리창 공역에 투입된 기계검사와 제조 등의 사무”가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하지만 이 자리는 오래지 않아 러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러시아인 기사가 퇴각함에 따라 버려진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인 거류민단의 이시이 신(石井信)과 소가 츠도무(曾我勉)가 주축이 되어 한국정부로부터 이곳을 무상 양수하여 전염병자를 위한 한성병원 부속 청파피병원(靑坡避病院)을 설립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나중에 이곳에 들어선 것이 바로 ‘경성불교자제원’이었다.

 

옛 초자제조소 자리에 들어선 ‘경성불교자제회 부설 실비진료소’의 입구 모습이다. (<조선사회사업요람>, 1924)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자에 수록된 행려병인구호기관 ‘불교자제원’에 대한 탐방기사이다.

 

이 단체는 원래 1908, 9년 무렵 ‘대곡파 본원사 경성별원’, 즉 동본원사(東本願寺, 남산동 3가 33번지)의 경내에 행려병인의 구호를 위해 설립한 것이 시초였으며, 차츰 수용자가 증가하자 1917년 4월 20일에는 경성각파불교사원연합회(京城各派佛敎寺院聯合會)의 성격을 지닌 경성불교자제회(京城佛敎慈濟會)가 성립되어 이곳의 새로운 경영 주체가 되었다. 또한 1921년 7월 1일 이후에는 행려병인의 수용 이외에 일반구료(一般救療)를 목적으로 하는 실비진료소(實費診療所)를 두는 한편 양로구조(養老救助)의 업무도 개설하기에 이른다.
옛 청파피병원 터에 경성불교자제회가 옮겨온 시기에 관한 자료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1일자에 실린 「수용소 준공기(收容所 竣工期)」 제하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경성부(京城府)에서 행로병인수용소(行路病人收容所)에 관하여는 본지(本紙)에 누차 보도함과 여(如)하거니와 용산 청파(龍山 靑坡) 원 피병원적(元 避病院跡)을 개축하여 차(此)에 당(當)할 계획인데 기(旣)히 부(府)에서 경성불교자제회 기타(其他)에 인계하여 총독부(總督府)에서 보조금(補助金) 5천 원(圓)도 하부(下附)가 될 터인즉 지(遲)하여도 4월까지에는 차(此)의 준공을 견(見)함에 지(至)하겠더라.

 

이 조직은 1936년 12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 이름도 ‘경성불교자제원’으로 변경하는데,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4월 28일자에 게재된 ‘법인조합등기’ 항목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법인설립
▪ 명칭: 재단법인 경성불교자제원 ▪ 사무소: 경성부 원정 1정목 12번지 ▪ 목적: 불교의 정신에 기초한 자선구제의 사업을 행함 ▪ 설립허가 연월일: 소화 11년(1936년) 12월 18일 ▪ 자산총액: 금 59,792원(圓) 55전(錢) ▪ 출자의 방법: 일반 기부 및 기타의 수입 ▪ 이사의 씨명 주소: 경성부 서사헌정 166번지 이사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경성부 서사헌정 산4번지의 5 이사 우에노 쐌에이(上野舜頴), 경성부 대화정 3정목 26번지 이사 타케오 라이쇼(嶽尾來尙), 경성부 장사동 182번지 이사 카잔 타이기(華山大義), 경성부 약초정 107번지 이사 고토 쵸신(後藤澄心), 경성부 본정 3정목 50번지 이사 쿠가 지코(久家慈光), 경성부 남산정 3정목 33번지 이사 우에노 코진(上野興仁), 경성부 원정 1정목 18번지 이사 후지 토넨(富士洞然), 경성부 한강통 11번지 이사 카토 칸센(加藤觀穿) ▪ 대표이사: 이사장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여기에 수록된 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광운사(光雲寺, 고야산 경성별원), 박문사(博文寺), 조계사(曹谿寺), 묘심사(妙心寺), 약초관음당(若草觀音堂, 진종본파 본원사별원), 정토종 개교원(淨土宗 開敎院), 동본원사(東本願寺), 서룡사(瑞龍寺), 용광사(龍光寺) 등 경성 지역에 두루 포진한 일본인 불교사찰들의 주지 또는 포교관리자가 망라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총후사회사업시설(銃後社會事業施設)의 이모저모 (5) 행려병인 구호, 불교자제원 편」 제하의 탐방기사에는 설립 이래 이곳에서 수용구제를 받은 연인원(延人員)이 21만 740여 명이고, 사망자도 3,540여 명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대개 농촌을 떠나 직업을 찾아서 도회지로 나왔으나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거리를 전전하다가 병마로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잘 걸리는 병으로는 폐결핵이 40퍼센트, 위장병이 30퍼센트의 순서이고 사망률도 15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나혜석의 경우에도 일제패망기 이후 경성양로원(京城養老院, 청운동 산4-3번지; 청운양로원)과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옥천동 126번지)의 안양농장, 그리고 공주 마곡사 등지를 떠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끝내 1948년 11월 무렵에 경성불교자제원의 후신(後身)인 ‘시립자제원’에 간신히 정착을 시도하였으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질병으로 인한 최후를 맞이 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56년 1월 31일자에 수록된 ‘김창룡 저격사건의 현장약도’. 여기에 묘사된 ‘자혜병원’ 바로 앞 사건현장은 도로구조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경성불교자제원에 관한 흔적을 찾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있다.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으로 자유당 시기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악명을 떨친 김창룡(金昌龍, 1916~1956)이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저격되어 죽은 곳이 바로 자혜병원(慈惠病院, 시립자제원) 앞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날 아침 ‘원효로 1가 17-5번지’ 자택에서 짚차를 타고 ‘원효로 1가 51번지’ 지점을 지나는 도중에 다른 짚차로 길을 막아선 저격자(옛 부하였던 육군대령 허태영의 지시를 받은 특무부대 출신자들)가 쏜 여러 발의 권총탄에 맞아 피살된 바 있다.
겉으로만 보면 행려병자의 구호기관이 오랜 세월 터를 잡았던 곳으로만 인식되기 십상이지만, 그 내면을 파고들면 이곳 역시 근현대사의 굴곡이 제법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공간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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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북한군 전시작전 진입
– 북한 잠수함 총출동 징후 포착. 북한의 스텔스 고속정이 서해에서 지속적인 활동이 포착되고 있다. 최근 북한의 동향을 살펴보면 고속정 활동과 동시에 잠수함 운영을 하는 것이 기본 작전의 형태로 파악된다. 괌 타격의 시각, 위치 등을 공개했던 지난 시기 내용을 고려해보면, 타격 성공률이 높은 SLBM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목, 2017/09/0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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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남산 예장자락 통감관저터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국치의 현장을 함께 걷는 역사탐방행사가 열리고 있다. 경술국치의 아픈 역사를 담은 남산길 1.7km 구간은 국권 상실의 현장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뜻으로 ‘국치길’로 이름 붙여져 내년 8월 개방된다. (연합)

최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길 조성과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 현장을 걸으며 역사 의식을 고취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 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이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7일 서울시에 따르면 오는 2018년 8월 일제강점기 국권 침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울 남산 예장자락 1.7㎞ 구간이 ‘국치길’로 조성될 계획이다.

남산 예장자락은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 강제병탄 조약에 조인한 한국통감관저와 1921년 의열단 단원 김익상이 폭탄을 투척한 조선총독부청사 등이 자리했던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들어서 100년 가까이 시민들이 다가갈 수 없는 곳으로 남아 있었다.

서울시는 국치길의 역사적 의미를 더하기 위해 국세청 별관 건물 철거과정에서 나온 일제 조선총독부 산하 체신사업회관 건물지의 폐 콘크리트 기둥을 사용해 길의 기점마다 표지석을 세울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덕수궁길에서 정동길로 연결되는 ‘고종의 길(왕의 길)’ 복원 계획을 내놨다. 이 길은 올해 말까지 공사가 완료될 예정이다.

고종의 길의 복원을 위해 문화재청은 미국과의 협의에 따라 미국 대사관저와 덕수궁 선원전 부지 사이에 길이 110m, 폭 3m의 담장을 만든다. 문화재청은 복원될 고종의 길이 을미사변 이후 1896년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이동한 길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60여년 간 공개되지 않았던 덕수궁 돌담길 100m가 공개되기도 했다. 1959년 영국대사관이 점유하면서 철문으로 막혀있던 이 곳은 고종과 순종 임금이 제례의식을 행할 때 이용하던 길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서울시는 덕수궁 돌담길 100m를 시민들에게 개방하기 위해 지난 2014년 10월 영국 대사관에 ‘덕수궁 돌담길 회복 프로젝트’ 공동 추진을 제안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역사적 의미가 담긴 길의 공개는 역사의식 고취라는 긍정적 평가도 나오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평범한 산책길에 역사성을 뚜렷하게 부각했기 때문에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는 효과적이다”면서도 “접근 방법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고종의 길이나, 국치길 등 길을 명명할 때 모호하게 뭉뚱그리기보다는 정확한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실을 일반인들에게 전달해야 길의 의미가 더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조언했다.

최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2017-09-07> 브릿지경제

☞기사원문: 2% 부족한 서울시 ‘역사 바로 알기 사업’

목, 2017/09/0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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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노린가  무서바서  우찌살건노?

방센밀리가이꼬

안들쟁이는 친정보내도라꼬  쫄라대제..

대묵은 끄떡끄떡 다가오고,

책값   “친일인명사전” 도  밀려이꼬 , 희비도  민미린지  알수도  엄꼬?

쌤형교수님을  담뽀로  구입한  다이아스타루비보다  소중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문학론

시워래 상경  예정이오니, 쌤형교주님   똥술  한박끄럭  하입시더…  아남동이나 신초이나….

몬난제자후배동상          마산 오동동S호영드림.

 

금, 2017/09/08-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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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자의 의견 중 발췌한 것입니다

Putin has suddenly realized that negotiations are not an option.
So we invade or sit on our hands and hope for the best.
An invasion would ONLY work with China and Russia.
The USA cannot invade North Korea with China opposed.

북한 접수는 러시아 나 중국 이 동조할때만 성공할 것이며
미국은 중국의 승인없이는 결코 북을 접수할수 없다.

…..

어제, 그제
중국에서 사설에 북한 접수 주장이 2 건이나 올라왔는데
드디어 미국 본토에서
세계적 권위자의 의견으로 북한접수 의견이 나왔습니다

두려운 시점입니다. 나름의 대책을 준비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금, 2017/09/0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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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자의 의견입니다

Putin has suddenly realized that negotiations are not an option.
So we invade or sit on our hands and hope for the best.
An invasion would ONLY work with China and Russia.
The USA cannot invade North Korea with China opposed.

북한 접수는 러시아 나 중국 이 동조할때만 성공할 것이며
미국은 중국의 승인없이는 결코 북을 접수할수 없다.

…..

어제, 그제
중국에서 사설에 북한접수 주장이 2 건이  올라왔는데
드디어 미국 본토에서
세계적 권위자의 의견으로 북한접수 의견이 나왔습니다.

두려운 시점입니다.

금, 2017/09/0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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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핵실험수는 1000번이상  북한의 핵실험수는 6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많은 제나라의 핵무기부터 없애치우고 주둥이를 나불거려라

 

도적이 매를 드는격으로 일본에 핵폭탄을 터트려 죄없는 민간인들을 죽여버린 미쿡놈들이 제켠에서 제재를 떠드니 미국부터 제재함이 마땅하도다

토, 2017/09/0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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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후원금 출금동의 관련 전화하셨을때 못받은것같은데
그 이후로 전화가 안와요ㅎㅎ
다시 전화한번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수고하십니당!

일, 2017/09/1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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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content/uploads/2017/08/201708.pdf

월, 2017/09/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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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13화 1부 – “뉴라이트 역사 쿠데타 7편 – 박정희 신화의 허구 ④”

팟빵 링크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7/09/1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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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역적 여름특집3] 북 콘서트 ‘항일음악 330곡집’ 2부 – ③

출연 : MC 노기환, 박한용

이야기 손님 :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작곡가 노관우

노래손님 : 가수 이소연, 김성헌

화, 2017/09/1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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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content/uploads/2017/09/201709.pdf

화, 2017/09/1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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