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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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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4:09

유청렬

편집자 주 ―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8월호에 실린, 유청렬(柳淸烈)의 「옥중의 계명성」이다. 필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만났거나 전해들은 권태산, 엄순봉, 정태식, 이재유, 안창호, 허응철, 여운형 등 7인 혁명가의 옥중 일화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기개와 실천활동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필자 유청렬에 대해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그가 쓴 「倭政 淸津 刑務所 滅亡記」라는 글이 있다.

“8월 15일 감옥문이 열려 민중과 격리되었던 우리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유로운 천지로 나올 때 다시는 이 땅에서 일제시대 모양으로 정치범을 위하여서는 감옥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던” 인민들이 그러한 당연한 희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전에 배(倍)한 다수 정치범이 투옥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은 ????신천지????(1946년 11월)에 게재된 오기영(吳基永) 선생의 「민족의 비원(悲願)」에 솔직히 대변한 바 있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동포들이 동 선생과 더불어 그윽히 간탄(艱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일제시대에 옥중에서 고투(苦鬪)하던 수많은 혁명가들 중에서 특히 인연이 있는 면면들과 그 밖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몇몇 지사들의 죄없는 죄인으로서의 옥중생활을 소개함으로써 독자 제현(諸賢)과 같이 동정을 나누려 한다.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나의 과거의 환경이 지배하던 한도 내에서만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보편적이 아닌 것이며 또 그 중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또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무대에서 역투하는 분들도 있는 고로 혹 결례되는 점이 있지나 않을까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좀 더 광범위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권태산(權泰山) 씨1

왜정의 폭압에 구박과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하는 수 없이 그리운 고향산천을 등지고 정(情) 설은 간도 벽지에 가서 유랑 고초(苦楚)하던 동포들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제히 봉기하여 왜놈들의 등덜미를 서늘케 한 소위 간도공산당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이다.


1 1902~1936. 1930년 5월 간도지역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들이 주축으로 ‘간도봉기’를 전개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타격하였다. 권태산은 간도봉기의 주동자로 활약하여 일경에 피체된 후 1936년 7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씨를 뵈인 것은, 1935년 6월 초순 서대문형무소 구치감 2동 13방이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동지 17명과 같이 수갑을 채워 쇠사슬로 허리에 졸라매어 있었다. 햇볕을 쪼이지 못한 창백한 얼굴에 마점산(馬占山)을 방불하는 8자형 수염이 채 깎지 않았던 탓이었던지 보기에 흉했다.
씨는 첫눈에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그 후 자주 ‘간도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사람이란 수전노처럼 금전을 많이 가질 필요는 없지만은 일가를 유지해 나갈 만한 것은 항상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월급만 받아가지고는 장래에 꼭 시켜야 할 자녀교육도 변변히 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의례히 빚을 지게 된다는 것과 돈이란 단번에 뭉치로 생기는 일은 없으니 양계 양돈 양잠 과수원 같은 것을 다각적으로 부업삼아 경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는 것과 그러한 일은 손쉽게 될 수 있는 고로 재미도 있고 저축도 된다는 것 등을 수차 권고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로운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씨의 이지적인 한마디 한마디의 논지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은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22세 청년이었던 탓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씨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이 날 때는 호랑이 같고 평소에는 좋은 형님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채워져 있는 고로 일거일동이 서투르고 부자유함을 동정하는 동방자(同房者)들이 모든 일을 보살펴주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리어 건강을 해롭게 한다 해서 쇠사슬을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씻고 유리창을 닦고 빗질 걸레질을 하며 내의를 빨곤 했다. 1935년 7월 경성복심법원 제2호 법정에서 재차의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신었던 짚신을 오기(荻) 판사에 던졌으나 그대가는 징벌밖에 없었다.
씨는 이듬해 8월달에 동지 15명과 같이 원통하게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에 있어서도 형장에 임했던 나의 동료를 통하여 최후의 안부를 전해왔던 것이다. 씨는 정의(情誼)가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형장을 향하여 눈물의 묵례(黙禮)를 드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사형집행은 하루에 못 다하고 양일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첫날에는 주현갑(周現甲)씨, 이동선(李東鮮) 씨, 권태산 씨 등 8명이었고 익일에는 나머지 8명이 집행되었다.
첫날에 집행당한 유해는 사형장 지하실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새웠다. 과거의 동지 여덟 분은 좁은 지하실에서 나란히 끼어 누워 있었건만 이제는 말 한마디 없이 참혹한 하루 밤을 보냈던 것이다. 취기(臭氣)가 난다 해서 다량의 얼음을 쟁이고 왜인 도이(土居淸造) 외 완력 있는 자들이 철야 엄중 경계하고 조선사람 직원의 접근을 불허했었다.
언제나 과언 묵묵한 이동선 주현갑 양씨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만은 자필로 썼다. 죽음을 초간(秒間)에 두고 지필(紙筆)을 요구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묵흔(墨痕)도 검게 유언을 쓰는 씩씩한 표정을 연상이나 해보자. 안중근 열사가 여순감옥 교수대에서 사라질 때의 장엄한 광경이 재연되어 민족적 의분을 북돋았던 것이다. 나는 유서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임석했던 자의 말에 의하면 한문시(漢文詩)로 되었는데 그 뜻은 “이 몸은 비록 교수대에 가치 없는 죽음을 감수하되 우리 조선공산당만은 영원히 일관 불변하여 살아 있으리라. 조선공산당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였다는 것이다.

 

엄무봉(嚴舞奉) 씨2

1935년 가을에 국제도시 상해에서 일본인거류민단장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아깝게도 현지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해온 투사이다.
씨는 보기 좋을 만큼 비대한 체구에 딱 들어맞은 중국복을 늘상 입고 있었다. 화기 만면하여 만날 때마다 웃음으로 응수했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자가 취할 태도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히 명랑했다. 더러는 우리들에게 농담도 하고 번잡스런 상해의 뒷골목 이야기도 해줄 만큼 기분이 유쾌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유화한 표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지만은 철석같이 굳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쇄수(鎖手)갑을 채울 때 이것을 거절하여 당장에 사형을 집행할 것을 고집했다. 드디어 수갑을 어거지로 채우고 복심법원에 항소하기를 권했으나 역시 이를 거절했다. 일본놈을 살해한 한국인에게 일본의 법률로 일본인이 심리하는 재판은 백번 되풀이했댔자 매 마찬가지인 것이 명약관화한 것을 형식적인 재판으로 말미암아 헛된 시간을 소비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대서하여 타인의 무인(拇印)을 찍어서 수속을 마치고 말았으나 제2심의 판결에 대해서도 역시 상고를 불응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대서 상고하고 말았지만 결국은 기각을 당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교회사(敎誨師) 기무라(木村融)가 간혹 불러서 딴에는 위안을 시킨다고 여러 말을 했던 것이지만 씨는 마이동풍격으로 들은체 만체 하였다. 하루는 황국신민도(皇國臣民道)에 대한 설교를 하자 “공연한 잔말 말라”고 고함을 치며 노리고 있으니 기무라는 “괘씸한 사람이라”고 노했다. 이때에 엄씨는 책상 위에 놓였던 화분을 들어 기무라의 낯짝을 갈기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황소눈처럼 동그래지며 있는 것을 이번에 책상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나서도 씨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흥분했던 뒷자욱조차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환방(還房)하는 씨의 걸음걸이는 매우 믿음직했었다.
나는 이 순간에 조선남아의 놀라운 기우(氣宇)를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혁명투사가 불원간 교수대에서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만 같았던 것이다.


2 엄순봉(嚴舜奉)의 오기. 1906~1938. 1934년 백정기 등과 함께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육삼정의거) 1935년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 이용로를 처단한 후 피체되어 1936년 3월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태식(鄭泰植) 씨3

정태식 1934. 6. 17.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교수 등과의 소위 성대(城大: 경성제국대학) 사건으로 1934년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권영태(權寧台) 씨 등과 같이 피검된 분이다.
짤막한 체구는 일견 포류지질(浦柳之質)을 면치 못할 것 같았으나 실은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조석으로 행하는 인원점검 식사 입욕 운동 청소 사방(舍房)검사 같은 것으로 인하여 차단되는 시간 이외는 하루종일 독서가 계속된다. 부피가 두툼한 영문서적을 첫줄 첫자부터 끝줄 마지막 자에 사선을 쳐놓고 줄거리만 읽는 것이 특수한 독서법이었다. 온 몸뚱이가 그저 총명의 두 자로 쌓여 있다고 아는 사람들의 화제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빙글빙글 웃기를 좋아하는 씨에게 “어쩌면 그처럼 뱃속이 편하오” 하고 의
아하듯이 물으면 “감옥 터에 웃음은 양약이 된다오. 웃는 것 외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소?” 과연 수많은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언제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화기 있는 얼굴로 명랑한 생활을 하는 것은 서둘러야 하는 수 없다는 자존적 수양의 결과인 것 같았다.
장구한 투쟁을 각오하고 있는 씨로서는 하루하루가 무사태평인 듯 했으나 씨의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당(慈堂)께서는 몸이 달아 형무소 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면회 차입 차하(差下) 같은 것을 한 번에 몰아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여러 차례로 나누어 원서에 찍히는 아들의 무인(拇印)이라도 보고는 만족한 듯. 또한 제한 있는 면회인지라 번번이 만나보지는 못할망정 무사히 있다는 말만 듣고도 그저 좋아서 안심하고 돌아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요 반일운동과 무산대중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자랑할 만한 아들이건만은 어머니로서는 하나의 어린아이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벗어 내보낸 헌옷 보퉁이를 연해 어루만지며 재삼재차 한 말을 되풀이하여 부탁을 하는 열렬한 모성애에 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는 3년의 형이 확정되어 징역감(懲役監)으로 넘어간 후 얼마 아니 되어 자당의 면회도 드물어지고 말았는데 그때로부터 근 10년이나 경과된 수월 전에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근력이 퍽 좋으시다”는 것을 이〇〇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나는 10년 전의 따뜻한 정경이 새삼스럽게 인상에 떠올라 왔던 것이다. 혁명가의 어머니 부디 만수장생하소서!


3 1910~1953. 1929년 경성제대 법학과 입학. 1934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이론가로 활약. 1953년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됨.

 

이재유(李載裕) 씨

이재유 1936. 12. 26.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씨는 1937년 서울 교외 공덕리 노상에서 검거되던 날, 씨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검거는 드디어 씨의 옥사(獄死)를 결과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경찰서에 두 번이나 검거되었으나 두번 다 감쪽같이 탈출하여 서울대학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관사 지하실에 숨어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미야케 교수와 함께 정원을 산보하며 환담하고 외부와 부절히 연락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미야케 교수의 피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다시 탈출하여 지하운동을 계속중 불행히도 다시는 탈출하지 못할 최후의 검거망에 걸렸던 것이다.
씨가 굳센 실천력과 사람을 능히 움직이는 감화력을 가졌다는 것은 옥중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흔히 조선민족의 진로라든가 소련의 실정이라든가 조선공산주의 청년의 의기라든가 조선에 있어서의 반일투쟁을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것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미결감(未決監)에 있을 때의 일상생활은 매우 깨끗했다. 언제나 독방이니만큼 혼잡하지 않은 관계도 있었지만 감방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히 되어 있고 서적 일용품 의류 등은 말짱하게 정돈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하였다.
소량의 음료수나 세면수 같은 것도 따로따로 받아두었다가 먹고 남은 물로는 식기를 씻어서 햇살이 담뿍 쪼이는 창턱에 말리고 세수를 마친 물은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 몇 번이나 방안을 닦았다. 씨는 결핍과 옹색함을 능히 극복하는 위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물마저 이중 삼중으로 이용하는 면밀한 성품은 살림꾼의 편모를 엿보게 하였던 것이다. 관급(官給)하는 세끼는 자양분이 적은 것이지만은 좁쌀 한 알 남기는 일없이 오랜 시간에 충분히 씹어서 먹는 습관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에 있을 때에 비교하여 신중(身重)이 훨씬 늘었다고 자랑도 했었다.
씨는 그다지 비대한 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육중한 몸뚱이의 소유자처럼 매우 느릿느릿했고 힘이 있었다.
“걸음을 좀 더 가볍게 걷는 것이 청년답지 않소? 지금은 양반걸음이 유행될 때가 아니지 않소?” 하고 빈정거리면 “내가 양반같이 보이오? 감옥살이는 우보격(牛步格)으로 내 집 마당을 산보하는 셈치고 살아야지 성급히 굴면은 말라죽는 법이오. 초조하면 3년 징역도 10년을 사는 것 같으니까…
” 역시 일생을 두고 싸우려는 씨에게는 감옥이 자기 집만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혁명객들의 감옥에 대한 철학인 것이다. 씨가 애인 박진홍(朴鎭洪) 씨에게 보내는 서신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란 한 개에 천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씨는 언제나 봉함엽서의 풀칠한 선계(線界)까지 꽉 차게 쓴다. 그처럼 가는 글자건만 보기에 어지럽지 않게 명확하게 씌어 있었다.

 

안창호(安昌浩) 씨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의 총독부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민심의 동정에 대한 사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바 드디어 민족진영의 거물들을 격리함으로써 전쟁으로 하여금 배태하는 독립사상의 확대 강화를 억압하려는 정책으로 나왔다. 즉 흥사단을 모체로 하는 동우회의 주간급을 전국적으로 대량 검거하여 투옥한 것이 이 사건의 전모이다. 안창호 씨를 비롯 하여 정인과(鄭仁果) 씨, 백남운(白南雲) 씨, 조병옥(趙炳玉) 씨, 이윤재(李允宰) 씨, 이광수(李光洙) 씨 등 우리나라 사상계 경제계 문화계를 망라하여 당초에는 구류장이 집행된 분이 물경 100여 명에 달하였다.
사건은 이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고바야시(小林長藏) 판사의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시국이 일본에 유리하게 되는 정세에 감(鑑)하여 취조의 진전에 따라서 제1심 공판이 개시될 때까지에는 거의 다 보석 출감되었었다.
도산(島山) 선생은 머리에 백발을 얹은 노객(老客)으로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쇠약한 수구(瘦軀)에는 오랜 혁명투쟁으로 오는 피로가 역력히 나타났으나 그러나 강직한 성격과 사람을 쏘는 듯한 영롱한 안광(眼光)은 젊은이의 정열을 능가할 만한 것이 보이어 옥내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이다.
씨는 고령하신 데다가 병약한 탓이었는지 약간 신경질인 편이었다. 독방생활의 고적함을 풀려는 심정인지 더러는 우리들을 붙들고 보통 이상의 이야기를 했었다. 하루 걸러서 의무실로 진단하러 갈 때마다 바싹 마른 팔뚝을 힘껏 추켜 붙들고 반행(伴行)하는 나에게 씨는 비틀거리면서도 “번번이 이처럼 친절히 간호해주니 진실로 고맙소. 감옥살이도 수차 했지만 이제는 외부에서 보살펴 주려는 사람도 경찰의 이목이 무서워 점차 꺼리게 되고 보니 그저 당신네들의 친절만이 여간 고맙지 않소. 당신은 일본말을 썩 잘하오. 가장 발음이 좋은 것 같소. 아직 젊으니 부디 공부 많이 하기를 힘쓰오” 하며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투사의 어조에는 어쩐지 적적함이 묻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한다는 바람에 나는 이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선생께 칭찬받는 것이 퍽 기뻤다. 나는 이만큼 어리석은 자였다.
그 후 씨의 병환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고 오히려 구금생활의 신고(辛苦)가 박차를 가하여 감옥의(監獄醫)로서는 완치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친지가 차입하는 사식도 드는둥 마는둥 할지경에 이르렀다. 1937년이 저물어가는 12월말에 보석이 허가되어 대학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4개월 만에 애처롭게 서거하고 말았다.
오늘날처럼 해방된 천지에서 씨의 혁명생활이 종말을 지었던들 그 장의(葬儀)는 성대했을 것이며 국민의 애도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마디의 말인들 조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똑똑한 책까지도 안심하고 읽을 수 없을 만큼 왜정의 폭압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는지라 씨의 장례에 참예하는 자는 곧 사상을 의심받아야 하고 과거의 민족운동자로서는 피검(被檢)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이 여기에 나타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오호라! 일생을 조국광복운동에 바친 도산 선생은 세인이 모르는 새에 쓸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허응철(許應徹) 씨4

수많은 혁명지사 중에도 허씨만은 특수한 품격을 가졌었다. 아무리 열렬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어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때로는 풀리고 너그러워지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인데 씨만은 철두철미 변함이 없었다. 무릇 사람들이 옥중생활의 부자유함과 고적함과 우울함을 견디어 백이려고 동방(同房) 사람끼리 또는 만나는 사람들과 때로는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명랑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건만은 씨는 한번도 웃는 낯을 뵈이는 일이 없었다. 독서할 때나 방외(房外) 출입할 때나 용무로 대담할 때나 가족과 면회할 때나 여하한 처지에 있어서든지 얼굴이 변색되는 일이 없고 종시일관 긴장하고 있었다.


4 1910년생. 본적은 함북 성진. 주소는 청진부 북성정. 1934년 5월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출신 현춘달(玄春達)과 함께 함북지역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청진 나남 지역 책임자를 맡음.
그해 메이데이 격문을 살포하였고 11월에는 공산혁명을 선동하는 격문 1만 2천장을 청진 나남 등지에 살포.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94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이 언도됨. 출처: 『경성일보』 1935.2.17. 2면, 허응철 관련 집행원부·형사사건부(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사이트)

 

씨는 일본사람을 지목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데키(敵)’라는 두명(頭名)을 부치고 말했다. 데키 아무개 간수장, 데키 아무개 간수, 데키 아무개 과장이라는 식으로— 하루는 나카시마(中島)라는 교회사와 구론(口論)이 벌어졌는데 그 사유를 기무라(木村) 간수장에게 전달하였던바 기무라는 씨를 데려다가 취조한 일이 있었다. 씨는 “‘데키’ 나카시마가 나에게 대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기를 권하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말끝마다 ‘데키’라고 하니 곁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왜놈들이 저마다 노하여 “철저한 녀석이라”고 중얼대니 “너희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 데키가 아니냐?” 하고 당당하게 반박했었다.
다음날 나카시마가 다시 불러서 따뜻한 말씨로 이야기를 걸었으나 역시 “너로 하여금 ‘데키’ 기무라에게 봉변을 당했노라” 하며 응답을 거절했었다.
이론으로는 어떠한 왜놈이 따져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핑계 좋은 징벌을 가하려고 했다. 연(然)이나 징벌에 해당할 만한 범칙(犯則)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가족과의 면회를 고의로 중지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사정을 모르는 그 부인은 때가 되면 꼬박꼬박 면회를 청해 왔지만은 언제나 형편에 의하여 시킬 수 없다는 구실로 허가되지 않았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구속된 이래 수 3년이 넘었으나 남편의 옥중고(獄中苦)를 조금이라도 위로 코저 멀리 함경도로부터 서울에 와서 침모(針母: 바느질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표모(漂母:빨래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같은 품팔이를 하여가며 차입도 하고 면회도 오고 편지 연락도 하는 등 정성이 지극한 어진 부인이었다. 어느 날은 면회할 때에 허씨가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너무나 고생을 끼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며 당신 자신도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장차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재가(再嫁)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자 부인은 문턱을 붙들고 소리 높여 흐느껴 울었다. 남편이 출옥할 때까지 죽음이 다다르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서 고생하는 남편과 똑같은 고생을 나누려고 결심한 그 부인에게는 너무나 원망스럽고 무자비한 포악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그 후 품삯 생활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세태가 되자 대화숙(大和塾)의 식모로 공규(空閨)를 지키며 남편의 출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呂運亨) 씨

1943년 초두, 씨는 육해군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피고사건으로 재차 투옥을 당하였다. 동경에 있을 때에 친히 목격한 B29의 동경 공습의 실정과 B29의 성능이 일본기(日本機)에 비하여 극히 우수하다는 것을 모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조언비어(造言飛語)’가 되었던 것이다.

여운형 1929. 7. 29.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피고사건은 곧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돌렸는데 이 공판은 비공개리에 개정되었었다.
공판의 내용에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나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승리할 것이냐 미국이 승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남방의 자원지대의 확보 여하에 승패는 달렸다. 일본이 이 지대를 제압하고 있지 못하는 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다”고 언명하였다. 씨의 놀라운 선견지명은 이 공판이 끝난후 2년 만에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씨가 미결감에 있는 동안 조카 되는 분이 자주 면회를 왔었는데 그는 동경에 주재하며 씨의 민족운동의 반려자가 되어 음양으로 활약하는 모양이었다. 면회를 할 때마다 용건이 끝나면 “ 아무개 공작은 무사하고” “아무개 남작은 평안하냐”고 연해 물어보기도 하고 “아무개 자작에게 안부나 전해두라”는 등 예절을 차리기에 조심했었다. 그들은 민족의 원수들이요 정적의 으뜸가는 자들이건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들 정객과의 친분이 있어야 상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씨를 처음 뵈인 것은 씨가 대전형무소에서 2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지 얼마 아니 되어 대전 경심관(警心館)에서 강연을 하던 날이었다. 열광하는 청중이 관내에서 삐져나와 관외에까지 꽉 차서 실로 성황이었다. 연단 좌우에는 속기사가 수명, 말 한마디 헛듣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앉아 있고 왜경의 금테 둘이가 즐비하게 늘어앉은 가운데 씨의 웅변은 토해졌던 것이다.
민족정신을 북돋으려 청년들의 각성을 채찍질하는 구절에 이르자 입회 경관의 난데없는 “중지!” 명령이 내렸다. 씨는 잠자코 흥분한 청중을 흘겨볼 뿐 계원에게 이끌리어 대기실로 들어간다. 잠시 있다가 다시 나타난 씨는 “전언(前言) 몇 구절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취소하겠다”고 선언한 후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또 중지가 된다. 약 3시간가량의 강연에 ‘중지’ ‘전언 취소’가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나는 씨의 강연 중에 단 한마디만은 아직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인리(隣里)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경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의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리게 될 때에 용기백배하여졌던 것이다. ” 힘있게 외치는 바람에 청중은 벽력같은 박수를 보내었건만 입회 경관은 이제 또 씨를 대기실로 인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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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반대측 피케팅 속에 기증식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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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시민들이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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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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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시민들이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기증식이 13일 열렸다.

박정희기념재단과 박정희동상건립추진모임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기념·도서관에서 기증식을 열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 등 반대 진영의 피케팅 때문에 행사 자체는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박정희동상설치저지 마포비상행동’ 등 시민단체들은 전날 오후부터 불침번까지 세우며 동상 설립을 규탄하는 집회를 이어갔다. 행사를 앞두고 양측의 신경전이 격화되고 크고 작은 몸싸움이 이어지자 경찰이 기념관 계단을 경계로 둘을 분리했다.

성우 김영민씨의 사회로 진행된 기증식에는 자유한국당 백승주·이철우 의원,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조우석 KBS 이사, 김영원 조각가, 박근 전 유엔 대사 등이 참석했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일(1917년 11월 14일)을 하루 앞두고 동상 제막식까지 하려고 했던 주최 측은 반대 피케팅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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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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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에 전달된 소형 박정희 동상의 모습.ⓒ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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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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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이동복 동상건립추진모임 대표는 “우리나라가 절체절명의 위험한 지경으로 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도 꺾이지 않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일할 12척의 함선(이순신의 ‘상유십이척’ 인용)을 생각하는 자리다. 이 소란스러움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건네줄 수 없다”고 말했고, 좌승희 박정희기념재단 이사장도 “진영 논리에 따라 반대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선진시민의 자세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한 좌 이사장은 “(서울시로부터) 영구임대를 받고 있지만, 대통령기념관 자리로 임대했으면 기념관 주인공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 아니냐?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대통령 기념관에 동상 없는 곳이 없다. 박정희만이 아니라 이승만, 김대중, 노무현까지 대통령기념관에는 주인공의 동상이 있어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포 지역구의 노웅래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생각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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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 갑 지역구인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동상 설치에 관련한 입장을 전달을 위해 방문 했으나 보수단체 회원들이 저지하고 있다.ⓒ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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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 갑 지역구인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동상 설치에 관련한 입장을 전달을 위해 방문 했으나 보수단체 회원들이 저지하고 있다.ⓒ 이희훈

“마포는 유신시절 야당 당사가 있었던, 민주화운동의 심장부 같은 곳이다. 경찰이 진입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떨어져죽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곳에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화를 위축시킨 장본인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을 누가 용납하겠나? 반면에 산업화에 대한 공은 비교적 많이 인정받고 있으니 그런 지역에 동상을 세우면 되는 것 아닌가? 동상에도 자기 자리가 있는 법인데, 이런 분란 일으키는 것 자체가 박 대통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날 기증 증서를 전달받은 박정희기념재단은 서울시에 동상 설치 승인을 요청할 방침인데, 서울시는 ‘공공미술 설치 및 관리 조례’에 따라 19일경 신설되는 공공미술위원회에 심의를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시의회의 압도적 다수(106명 중 71명)를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동상 건립에 부정적인 만큼 동상 설치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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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경찰을 사이에 두고 각각 찬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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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경찰을 사이에 두고 각각 찬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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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끝난 직후 보수단체 회원이 동상 설치 반대 천막을 훼손 하려다 경찰에게 저지 당하고 있다. ⓒ 이희훈

<2017-11-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박정희 탄생 100돌’ 앞두고 동상 세우려 했지만…

※관련기사

☞뉴시스: [종합]’박정희 동상’ 기증식 몸싸움까지…”원조적폐” vs “종북좌빨”

노컷뉴스: 박정희 동상’ 기증식 개최…”동상설치는 상식” vs “원조적폐 반대”

스포츠경향: 박정희 동상 놓고 충돌 “빨갱이 물러가라” vs “친일파 동상 반대”

아시아경제: “우리 먹여살린 분” vs “원조 적폐”…박정희 동상 갈등 최고조

파이낸셜뉴스: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친일행적 알림팻말 같이 세워야” 동상 둘러싸고 논란

신문고뉴스: ‘박정희 동상’ 설치하려던 기념재단 ‘혹’ 붙는다

한국경제TV: 박정희 동상, 진짜 목표는 광화문?

머니투데이: “박정희 동상, 세종대왕상과 나란히 세워지길 바랐다”

월, 2017/11/1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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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조상이 친일인명사전에 있는 남정철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SNS상에 상당히 많습니다. 더불어 친일경찰 노덕술의 아들이 노재봉 전 국무총리라거나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건희 회장이라는 글들도 있구요. 사실 관계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 문의드립니다.

수, 2017/11/1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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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1/1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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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1/1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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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1/1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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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1/1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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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아닌, 누구나 새기고 나눠야 하는 위안부 이야기

우리 청춘들이 뜨겁게 노래한다.

서울시청소년국악단 <귀향 끝나지 않을 노래>

2017.12.5.() 세종M씨어터

서울시청소년국악단이 들려주는 우리의 아픈 역사

 음악으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고,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감동의 무대

 

75천명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국민의 영화 <귀향> 이 무대에서 재탄생됩니다.

잔혹하고 불편한 기억이지만

우리들이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입니다.

오늘을 통해 힘으로 굴복되어지는 피해자가 없고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예매는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goo.gl/f2gf9f

– 2016년 개봉한 영화 <귀향>(감독 조정래)이 무대로 탄생한다

작곡 황호준, 영상감독 조정래와의 작업으로 한층 더 깊은 메시지를 던질 무대 <귀향>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아픈 역사, 청소년국악단의 음악으로 새로이 기록 한다

영화 <귀향>의 주연배우 강하나, 박지희양이 직접 들려주는 나레이션과 아리랑 노래의 감동의 무대

공 연 명

서울시청소년국악단 제49회 정기연주회 귀향끝나지 않을 노래

일시장소

2017. 12. 5() 오후 730/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티켓가격

R40,000 S30,000

관람연령

7세 이상 관람 가능 (미취학 아동 관람불가)

제작진

총연출 및 예술감독: 유경화 단장 / 연주: 서울시청소년국악단

영상연출: 조정래 감독, 위촉작곡 황호준

협연 JC curve, 씻김 바라지 박성훈, 무녀 박미옥

나레이션/노래:강하나, 박지희(영화귀향주연배우)

예매문의

세종문화회관 02-399-1000 www.sejongpac.or.kr

인터파크티켓 1544-1555 ticket.interpark.com

공연문의

서울시청소년국악단 02-399-1181~3

목, 2017/11/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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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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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독재와 억압, 불의와 부정의 토대인 친일을 청산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70년 넘게 채워진 질곡의 사슬을 풀고 민주와 정의, 화합과 평등이 넘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만들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친미독재,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자비한 군사독재, 그리고 이들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권력을 이어받고자 했던 이명박과 박근혜의 국민분열, 친일반역, 국정농단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의 비열한 통치와 압제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체제가 반복되어 온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세력들의 인적, 제도적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와 친일, 그 뿌리 깊은 잔재는 오늘날 정치, 사회, 학문, 자본, 언론, 예술 등 모든 곳곳, 요소요소에 악의 고리로 남아있다.
1919년 3·1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은 모두 ‘친일세력의 근원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최후의 정점에 이승만을 몰아낸 민주혁명의 힘이 박근혜를 권력에서 끌어내린 촛불혁명으로 타올랐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보다 일제에 빌붙어 수족행위를 하고 나팔수 노릇을 한 친일파가 더욱 악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친일파들은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재산을 탈취하고, 항일투사들을 잡아들이고 살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학도병, 강제징병, 강제징용, 위안부 모집의 선동대가 되는 온갖 악행을 도맡아 저질렀다.
1948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구체적인 죄목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하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에 조인하거나 모의한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하거나 지휘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간부, 칙임관 이상 관리, 밀정, 독립운동 방해단체 간부, 군경찰 간부, 군수공업 경영자, 관리 중 악질적 죄질이 현저한 자, 도(道)나 부(府)의 자문기관 또는 의결기관 의원 중 현저한 반민족 행위자, 종교 사회 문화 경제 등 각 부문에서 반민족적 행위자,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 위해(危害)를 가한 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급 이상 관공리, 헌병, 경찰, 헌병보, 고등경찰 등이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방해로 인하여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친일파는 단 한 명도 단죄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살아남은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더욱 승승장구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치하에서도 그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했다. 나라의 권력은 오로지 친일파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후광을 입은 그들의 후손들도 역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현재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다.
문단을 예로 들어보자. ????친일인명사전????(2009)에 오른 친일문인은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용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등 무려 40인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미당 서정주는 가장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문인이다. 서정주야말로 친일에서부터 친독재까지 철저한 권력의 시녀였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문단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은’ 그는 대학강단에서, 문단에서, 관계에서, 수없이 많은 제자들을 키우고 또 그 제자들은 그를 스승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시인으로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였던 서정주는 죽어서도 그 권력을 문단의 후학들에게 그대로 넘겼다.
반민족적, 반문학적 친일의 과오가 명백한 그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이 만들어지고, 바로 그 문학상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증거한다. 이런 기이함은 미당 서정주를 ‘국민시인’, ‘민족시인’으로 칭송한다. 심지어는 올해 여름에 발간한 미당전집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은 미당을 ‘민중시인’이라고까지 말했다. 북한의 3대 세습 정권에서도 있을 수 없는 망언이었다.
미당은 1942년 7월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문학 작품을 썼다. 이미 여러 경로로 밝혀진 바와 같이 친일어용문학지인 ????국민시가????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들을 양산했다.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징병의 신성화와 정당화는 물론 학병지원을 권유했으며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적극 동조했다.

미당이 남긴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인지 그 평가는 차치하고, 그는 민족의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를 문학상 등으로 기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지어낸 천여 편의 시들도 ‘겨레의 말’이 아니라 일종의 기가 막힌 언어도단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류의 도덕적 보편성과 정의를 따르고자 하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미당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인간 본연의 품성이 그릇된 자였다. 그릇됨을 덮고 가치관마저 전도시키는 그의 문학은 우리 모두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원숭이가 손목이 잘려도 바나나를 놓지 않듯, 권력도 움켜쥔 힘을 쉽사리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반성과 성찰을 바라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사회권력과 관료권력, 종교권력과 문화권력 등이 그러하듯이 문학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은 물러났어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승계되고 이어가고 있다. 지배권력은 다른 피지배세력이 그들의 권력을 쟁취하기 전까지 유구한 것이다.
미당이 생전에 지닌 문단권력은 현재 그의 추종세력들에게 전이되었다. 추종자들에게는 미당의 매국적인 친일문학 행위도, 군부독재를 찬양한 행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점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미당문학상으로 미화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 그의 행적을 문인이 아니고 정치인에 대입시켜보면 참으로 소름끼치는 존재다. 그럼에도 미당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무리들이 미당을 기리는 것은 미당이 건재해야만 자신들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당문학상에 대한 비판 또는 폐지의 주장은 고사하고 그 상을 심사하고 수상하는 사람들이 우선 자기 검열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에게도 있을 터이다.
동서고금의 예술을 살펴보면, 정치권력과 결합한 예술은 차후에 거의 모든 평가가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대다수 예술에 대한 평가는 당대가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예술 등은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를 넘겨 한 세기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친일세력들의 영향력과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독립은 했으나 아직도 정신적 독립은 온전하게 하지 못한 결과다.
완전한 독립, 그리고 온전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이 득실거리는 시대, 누군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의의 역사를 모른 체 하면 대대손손 청사에 물려줄 정의의 역사는 사라진다.

편집자주 시인 정세훈은 1955년 충남 홍성 출생으로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작품에는 시집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과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등이 있고 현재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 한국작가회의 이사, 한국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목, 2017/11/1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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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선임연구원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한 번 맑아지고 땅이 한 번 편안해지매 통서(統緖)를 전하는 데에서 보록(寶籙)을 넓어지게 하였고, 별이 다시 빛나고 바다가 다시 넘실대매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데에서 영전(令典)을 송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업이 한이 없게 되었고, 척의(尺依)는 점차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천황 폐하께서는, 상제(上帝)께 밝게 받아서 후인들을 열어주셨습니다. 뇌사(雷肆:書筵)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림에 용안(龍顔)에는 기쁜 빛이 돌고 진저(震邸)에서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하는 칭송이 퍼짐에 따라 인지(麟趾) 역시 어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억만년토록 태평을 누릴 아름다움에 응하였기에, 바야흐로 황태자를 미리 세우는 예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자질은 공자의 학문을 세우는 데 부끄러우나, 정성은 요(堯)임금이 되기를 축원하는 데 간절합니다. 사해에서 구가(謳歌)의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만리 밖까지 덕스러운 교화가 퍼짐에 모두들 성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정 5년(1916년-필자) 11월 3일에 조선총독부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 신(臣) 이인직(李人稙)은 지어서 올립니다.

14<경학원잡지>제12호에당시경학원사성이었던이인직이일본태자(뒤에 쇼와천황)를 세우는 예식의 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으로 쓴 글의 일부입니다.
대단하지요. 이인직이 신소설의 개척자지만 그 글의 문학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이 문장은 그가 가장 ‘빛나는’ 글을 쓸 때가 언제인지를 알려줍니다. 그의 지향과 정체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을 쓸 때입니다.

 

숨겨진 행적
최초의 신소설<혈의누(血의淚)>로잘 알려진국초(菊初)이인직(李人稙)은1862년에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한산(韓山) 이씨 양경공파(良景公派) 25세손으로 이윤기(李胤耆)와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5살 때 1866년 생부 윤기가, 18살 때인 1897년엔 생모 전주 이씨가 각각 사망합니다. 그리고 9살 때 3대조 면채(冕采)의 손자인 은기(殷耆)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외 이인직에 대한 기록은 38살인 1900년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900년 관비유학이라는 공식적인 기록이 나타나기까지 이전 행적은 찾기 힘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행적은 38살부터 55살까지 16년간의 기록입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인직이 을미사변과 관련해서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전문 외교관 출신으로 통감부와 총독부의 초대 외사국장을 역임한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회고록(<明治外交秘話>,東京千倉書房,1936)에서이인직을조중응(趙重應)과함께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서 과외생(課外生)으로 자신의 강의를 들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중응은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으로 일제하 자작, 중추원 고문을 지낸 대표적 친일파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을미사변 후 법부 형사국장으로 명성황후의 폐비 조치를 강행하는 등 사후처리를 담당했습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1906년에 사면되어 귀국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는 아관파천으로 망명한 한국인들을 을미망명자(乙未亡命者)로 분류했으며 그 인원은 31명인데, 그 명단 중 이인직의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마쓰의 지위나 명망을 생각하면 그의 회고를 허위나 거짓으로 보기에 힘듭니다. 더불어 김기장(金基璋)의 증언까지 고려하면 이인직이 조중응과 일본 망명 생활을 함께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김기장의 경우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동경전문학교(현 와세다 대학)를 졸업하고 주일 공사관 참서관, 경리원 감독을 역임했던 자로 조중응의 일본 망명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는데, 그는 “조중응과 이인직은 일본에 재류할 때부터 거의 주종과 같은 관계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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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웅

 

아마 이인직은 조중응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인직이 일본으로 함께 망명한 것은 을미사변이나 김홍집 내각 하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서 피신했다기보다 정황상 함께 동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고서는 망명자가 귀국하여 관비 유학생 자격을 얻은 다음 1900년에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동경정치학교와 이인직

국비 유학생으로 이인직은 1900년 9월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 정식 입학합니다. 최소한 이인직의 자필이력서에 그렇게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동경정치학교가 이인직의 사상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근래 연구 성과는 이마저도 의구심이 들게 만듭니다.
동경정치학교(이하 정치학교)는 마쓰모토 쿤페이(松本君平)가 1898년 10월 ‘고등문관, 의회의원, 외교신문기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입니다. 3년제이며 17세 이상의 남자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교육을 통해 전문적 지식을 가진 정치가나 신문기자 등의 양성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고마쓰는 위 회고록에서 이인직과 조중응이 과외생으로 자신이 그 학교에서 강의했던 열국정치제도(列國政治制度)를 강습(講習)한 제자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인직이 관비 유학생 시절인 1900~1903년 사이 고마쓰는 정치학교에서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관비 유학생 이전 일본 체류 시기에 일종의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고마쓰의 기록 외에 다른 증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의문을 갖게 하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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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 미도리의 <명치외교비화>

우선 정치학교는 제대로 운영된 적이 별로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경부통계서>에 의하면 학교규모는개교 당시 1898년 강사 40명, 학생 97명, 1901년 강사 10명, 학생 120명, 1902년 강사 10명, 학생 13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강사 수가 급격히 줄었을 뿐만 아니라 1899년과 1900년 2년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2년간의 공백은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사실상 휴교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정치학교는 1903년 9월 경영부진으로 폐교됩니다.
실제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의 회고를 통해 본 정치학교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정치학교는 사루가쿠초 변에 있는 중학교의 낡은 교실을 빌려 개교했지만 수업이 시작되고 보니 학교라기보다는 고작 강습회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중략) 2, 3개월 채 되지 않아 점차 출석률이 나빠졌다. 학생의 출석이 아니라 선생님의 출석이었다.(중략) 나도 포기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山川均, <日本人の自伝>,平凡社,1982)

 

그러면 1900년 9월 정치학교에 입학해서 1903년 7월 졸업했다는 이인직의 이력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입학과 졸업 자체가 사실인지도 불투명해집니다. 이인직의 행적은 이토록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활자로 조합된 그의 글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 줍니다.

봉건주의에 대한 혐오

이인직은 1901년 한국공사관의 추천으로 일본 <미야꼬신문(都新聞)>에견습으로들어갑니다. 그는 미야꼬신문에 1901년부터 1904년까지 8개의 논설문을 게재했는데 그의 사상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팔베개를 하고서 사십성상(四十星霜) 동안 참으로 잘 잤다. 곁에서 잠꼬대를 하는 자는 우리 이천만 동포다. (「入社說」, <都新聞>,1901.11.29.)

 

이인직은 당시의 조선을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어찌 깨어났지만 아직 이천만 동포는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잠꼬대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서 동포를 깨우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인직에게 있어 조선이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꾸고 있는 꿈은 ‘봉건적 유습’입니다. 이후에 발표된 「몽중방어(夢中放語)」(<都新聞>,1901.12.18.)에서도당대주요국의상황을꿈으로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한국과 중국을 제외하고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 확대를 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깨어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미 이인직이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던 점은 후술하고, 그는 일관되게 봉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인직은 조선을 미개화 상태, 봉건적 유습이 지배하는 야만의 상태로 파악했기 때문에 일단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봉건적인 유습을 혁파해야만 했고, 그것이 이른바 ‘계몽주의’로 이어집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인직은 마치 봉건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진보적인 개화자강 운동가로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비롯해 구한말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 중 꽤 많은 숫자가 친일파가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타파하고자 했던 봉건 유생이 ‘의병’을 결성하여 일제에 항거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이렇듯 순식간에 바뀌어버립니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대단히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목, 2017/11/1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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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 교육부는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고석규)를 출범시키고 박근혜정권의 국정화 추진과정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사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고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거론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보면서 한 인물을 생각합니다. 전 재산을 들여 평생 동안 친일연구를 한 임종국 선생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친일연구 과정에서 본인 아버지의 이름도 친일인물로 기록하였던 분입니다. 사실에 기초한 기준 이외 혈연, 지연 등 다른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저 역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위원회가 세운 기준을 존중하고 일관성 있는 조사를 추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임종국 선생이 시대의 귀감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단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의 역할이 컸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에 대한 요구는 연구소 출범 당시부터 조금씩 논의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착수한 계기는 2003년 8월 22일 〈KBS 1TV 인물현대사〉 ‘임종국 편_배반의 역사를 고발하다’(연출 김정중)가 방송된 직후부터다. 방송 이후 선생의 대표 저작인 ????친일문학론???? 판매가 급증하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나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준비에도 힘이 부쳐 기념사업은 언감생심이었다.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연구소 재정 외에 외부의 안정적인 재원 마련이 필요하였다. 그러던 차에 당시 연구소 조문기 이사장이 광복군 장이호 선생의 아들이며 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던 장병화 가락전자 대표에게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병화 이사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회장직을 수락했다. 이후부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설립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2005년 2월 3일 준비 모임에 이어 3월 29일 서울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의실에서 정식으로 출범식을 가졌다. 기념사업회는 별도의 사무국은 두지 않고 연구소가 업무를 맡기로 했다.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기념사업회에 힘을 보태고 있는 주요 인사로는 김지철 현 충남교육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이용길 천안민주단체협의회 초대 의장 등이 있다. 기념사업회는 출범 당시 크게 5가지 사업 계획을 마련했는데 임종국상 제정, 추모 조형물 건립, 문화훈장 추서, 평전 발간 및 학술사업, 장학사업이 그것이다.
이들 사업 중에서 출범 첫해인 10월 15일 문화훈장 추서가 가장 먼저 이뤄졌다. 추서 신청에는 당시 작가회의 이사장이었던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동참해 주었다. 그러나 임종국 선생에게 추서된 문화훈장은 총 5등급 중 금관, 은관에 이어 3등급은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삼웅 전 관장은 2000년 서정주에서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 사실을 상기하면서 추서 거부를 언급하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지만 그럴수록 기념사업 활동에 더욱 분발하자고 다짐했다. 임종국상 역시 기념사업회 출범 첫해인 2005년 11월 11일 제1회 시상식을 시작으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전력코자 2008년과 2009년 두 해를 거른 것을 제외하고는 올해까지 11회에 이르고 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임종국상의 권위가 높아지고 있다.
임종국 선생의 19주기를 맞는 2008년 11월 18일에는 정지아 작가가 ????임종국 – 친일의 역사는 기록되어야 한다????(여우고개)를 펴냈고, 기념사업회와는 별도로 정운현 씨가 2006년 ????임종국 평전????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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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12일 임종국 선생의 기일에는 천안공원묘원에서 선생의 추모식이 열렸다. 1990년대 말까지는 천안민주단체협의회를 중심으로 이용길, 김지철, 전재진(현 우키시마호 폭침진상규명위원장), 김영수(현 천안시의원), 장기수(전 천안시의원) 그리고 전교조 선생님들과 전농 회원님들이 수고해 주었고 2000년대 들어서부터 현재까지는 연구소 충남지부, 천안지회, 아산지회 회원들이 추모식을 주관하고 있다. 찬바람이 부는 높은 산에서 진행되는 추모식을 위해 손을 비벼가며 정성스럽게 제사상을 준비하는 회원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임종국 선생과 기념사업회의 존재를 널리 알린 데는 역시 방송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앞서의 인물현대사 외에 2012년 〈EBS 지식채널e : 임종국 편〉과 2013년 뉴스타파에서 방영한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3부작이 그것이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사업은 바로 임종국 선생 조형물 건립이다. 임종국 선생 조형물 건립은 오래 전부터 시도되었지만 천안시(당시 시장 성무용)의 비협조로 진척을 이루지 못하다가 작년 초 천안지회(지회장 전훈진)가 발의하고 7월 9일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용길)가 발족해 본격 착수하여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1월 13일 천안신부공원에 조형물이 건립되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3,626명이 참여해 1억 2천만원이란 거금의 모금으로 이뤄낸 쾌거였다.
앞으로도 연구소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선생의 정신을 더욱 널리 계승, 발전시켜나갈 것을 다짐한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7/11/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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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지도위원, 소장자료 75점 기증

10월 16일, 강만길 지도위원(고려대 명예교수)이 북한 방문증명서, 리영희·이우성 선생 등과 주고받은 서신, 2004년 평양 남북학술토론회 관련 자료 등 소장자료 75점을 기증했다. 특히 이번 기증자료에는 강만길 지도위원이 1984년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사업’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을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보고서, 탄원서, 공동성명 등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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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9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9월 19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9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각종 보험증서와 통장, 해방 직후 학교 관련 문서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새농민????(1970),????국민독본????(1964),????지방행정????(1964)등박정희 정권기에발행된도서류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7/11/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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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은 10월 20일(금)부터 21(토)까지 1박 2일 청소년 역사캠프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를 개최했다. 이번 캠프는 근현대사기념관 상설전시를 역동적인 체험을 통해 새롭게 접근하고, 강북구의 애국선열 묘역에 잠든 독립운동가를 만나며 선열의 생애와 활동을 되새겨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는데 도움을 주고자 마련했다. 캠프는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오후 1시까지 진행되었고, 사전에 홈페이지와 전화로 선착순 모집한 13~16세 청소년 33명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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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근현대사기념관에 모인 청소년들은 식사 후 특별히 야간 개장한 기념관에서 첫번째로 독립운동가가 남긴 명언과 제헌헌법의 내용과 관련해 빈 칸에 들어갈 단어를 찾아 문장을 완성하는 퀴즈를 풀
고 전시물을 본 후 사발통문에서 사라진 격문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두 번째로 비밀리에 독립운동가, 민중, 일본 순사로 각각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코너별로 태극기 타투, 의병 책갈피 만들기, 독립민주기념비에서 기념사진 촬영 등의 체험활동을 포함한 독립운동 런닝맨을 시행했다. 마지막으로 4·19혁명 당시 상황을 재연한 그림자 연극을 함께 만들었다.
이튿날, 청소년들은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을 답사하며 시대별 태극기를 그려보았다. 또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중국으로 떠난 이시영 선생의 가족사를 스톱모션으로 표현하고, 독립운동가가 되어 자신만의 어록을 남기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캠프에 참가한 한 청소년은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져서 함께해서 좋았고, 학업 스트레스를 잠깐 내려놓고 놀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역사에 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밝혔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더 많은 프로그램을 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쉽다고 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이번 캠프를 계기로 청소년 프로그램 다양화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 최인담 학예사

목, 2017/11/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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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8월 21일부터 10월 30일까지(매주 월요일, 총 9강) 한겨레신문 청암홀에서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이라는 제목으로 연속강좌를 진행했다. 이번 강좌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적폐와 과거청산의 과제를 김미화가 묻고 전문가들이 대답하는 토크쇼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09이번 강좌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포럼 진실과 정의를 비롯하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한겨레21, 한겨레TV가 힘을 모아 마련했다.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진행된 강좌는 검찰과 국정원, 경찰, 군, 재벌, 교육, 언론, 친일파와 대일과거사,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과 인권침해를 주제로 한 전문가 대담에 이어 전체 강좌를 총괄하는 종합 대담으로 마무리되었다. 박주민, 표창원, 김종대 의원을 비롯하여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최승호 뉴스타파 PD, 김동춘 교수 등 각각의 주제에 대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강사진으로 나섰으며, 박한용 교육홍보실장도 친일파와 대일과거사를 주제로 한 강좌를 통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번 강좌에는 고등학생을 비롯하여 남녀노소를 아울러 60여 명의 참가자들이 열띤 열기 속에 참여하였다. 모든 강좌의 동영상은 연구소 홈페이지와 한겨레TV 홈페이지를 통해 순차적으로 게재되며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목, 2017/11/1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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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촛불혁명 1년을 맞아 10월 27일부터 ‘촛불 1년, 다시 부르는 항일의 노래’ 전국순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이 행사는 개관을 5개월 앞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마련과 항일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10월 27일 고양 공연을 시작으로 11월 3일 창원, 11월 9일 대전, 11월 17일 광주로 이어지는 이 공연에는 이재명 시장, 노회찬,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 전 의원이 이야기 손님으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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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역적’으로 호흡을 맞춘 박한용 교육홍보실장과 MC노(노기환)의 사회로 진행된 콘서트는 ????항일음악 330곡집????을 정리한 고 노동은 교수의 아들 노관우 씨(국립전통예술고 강사)의 항일음악 시연과 이야기 손님의 토크가 어우러져 잊혀진 항일음악을 알리고, 항일음악의 현재적 의미와 2017년 청산해야 할 한국사회 적폐문제를 이야기하는 토크쇼 형식의 공연이다.
10월 27일 고양에서 열린 공연에서는 노관우 씨를 비롯한 연주단이 〈광복군 아리랑〉 〈신흥무관학교 교가〉 등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로 만들어진 항일음악과 이상준 작곡 〈깊이생각〉과 한유한 작곡〈압록강행진곡〉 등 창작 항일음악을 들려주며 관객들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이어서 친일 음악가의 노래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 홍난파 작곡)과 〈희망의 나라로〉(현제명 작곡)를 영상으로 보여주었고 최근까지 국가 경축일에 친일음악가의 노래인 〈희망의 나라로〉나 〈선구자〉 같은 노래가 연주되었다는 점이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이날 이야기 손님으로 나온 이재명 시장은 ‘우리 시대 적폐 청산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사회자가 촛불혁명 이후 1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촛불을 든 우리 전사들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갔고, 또 문재인 민주정부가 수립돼서 정권 교체를 이뤘다. 아마 인류 역사상 이렇게 깔끔하게 무혈의, 아무런 피해도 없는 혁명적 결과를 만들어낸 건 아마 처음 아닐까 싶다”면서 “저는 우리 촛불혁명의 결과 정권교체를 했지만 이건 하나의 수단이고, 초입이고… 다음 단계 공정한 국가. 미래 희망이 있는 나라 만드는 게 마지막 과제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11월 3일 창원 공연의 이야기 손님인 노회찬 의원은 ‘우리 시대 적폐 청산의 과제’에 대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적폐가 민중의 삶에 대한 것이라며 “대한민국은 헌법 앞에 과연 모든 국민이 평등한가”라고 자문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법정이나 검찰·경찰 앞에서 차별을 강요받고, 비참한 현실을 요구받는 게 제대로 개선되지 않았다. 적폐 청산에 있어 과거 발생한 특정 권력의 일만 아니라 사회적 일상에서 차별받는 것도 바로잡아 가는 게 중요하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노회찬 의원은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대해서 “일본 야스쿠니 신사 옆에 있는 ‘유슈칸’이란 역사박물관에 가본 적이 있다. 세계지도를 그려놓고 2차 대전 당시 독립된 나라들을 그려놨는데, 인도 등 아시아 나라들이 서양 지배를 받다가 일본 덕분에 독립됐다고 해놨다”라며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우려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연 말미에 이재명 시장과 노회찬 의원은 각각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운동’을 응원하는 영상 메시지를 남기고 역사관 건립 기금 후원에 범국민적 동참을 호소했다.
앞으로 11월 9일(목) 오후 7시에는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관 연봉홀에서 박주민 의원과 함께, 17일(금) 오후 7시 광주가톨릭평생교육원 대건문화관에서 김광진 전 의원과 함께 토크콘서트를 연다.

• 방은희 교육팀장

목, 2017/11/1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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