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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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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4:09

유청렬

편집자 주 ―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8월호에 실린, 유청렬(柳淸烈)의 「옥중의 계명성」이다. 필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만났거나 전해들은 권태산, 엄순봉, 정태식, 이재유, 안창호, 허응철, 여운형 등 7인 혁명가의 옥중 일화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기개와 실천활동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필자 유청렬에 대해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그가 쓴 「倭政 淸津 刑務所 滅亡記」라는 글이 있다.

“8월 15일 감옥문이 열려 민중과 격리되었던 우리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유로운 천지로 나올 때 다시는 이 땅에서 일제시대 모양으로 정치범을 위하여서는 감옥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던” 인민들이 그러한 당연한 희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전에 배(倍)한 다수 정치범이 투옥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은 ????신천지????(1946년 11월)에 게재된 오기영(吳基永) 선생의 「민족의 비원(悲願)」에 솔직히 대변한 바 있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동포들이 동 선생과 더불어 그윽히 간탄(艱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일제시대에 옥중에서 고투(苦鬪)하던 수많은 혁명가들 중에서 특히 인연이 있는 면면들과 그 밖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몇몇 지사들의 죄없는 죄인으로서의 옥중생활을 소개함으로써 독자 제현(諸賢)과 같이 동정을 나누려 한다.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나의 과거의 환경이 지배하던 한도 내에서만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보편적이 아닌 것이며 또 그 중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또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무대에서 역투하는 분들도 있는 고로 혹 결례되는 점이 있지나 않을까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좀 더 광범위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권태산(權泰山) 씨1

왜정의 폭압에 구박과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하는 수 없이 그리운 고향산천을 등지고 정(情) 설은 간도 벽지에 가서 유랑 고초(苦楚)하던 동포들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제히 봉기하여 왜놈들의 등덜미를 서늘케 한 소위 간도공산당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이다.


1 1902~1936. 1930년 5월 간도지역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들이 주축으로 ‘간도봉기’를 전개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타격하였다. 권태산은 간도봉기의 주동자로 활약하여 일경에 피체된 후 1936년 7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씨를 뵈인 것은, 1935년 6월 초순 서대문형무소 구치감 2동 13방이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동지 17명과 같이 수갑을 채워 쇠사슬로 허리에 졸라매어 있었다. 햇볕을 쪼이지 못한 창백한 얼굴에 마점산(馬占山)을 방불하는 8자형 수염이 채 깎지 않았던 탓이었던지 보기에 흉했다.
씨는 첫눈에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그 후 자주 ‘간도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사람이란 수전노처럼 금전을 많이 가질 필요는 없지만은 일가를 유지해 나갈 만한 것은 항상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월급만 받아가지고는 장래에 꼭 시켜야 할 자녀교육도 변변히 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의례히 빚을 지게 된다는 것과 돈이란 단번에 뭉치로 생기는 일은 없으니 양계 양돈 양잠 과수원 같은 것을 다각적으로 부업삼아 경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는 것과 그러한 일은 손쉽게 될 수 있는 고로 재미도 있고 저축도 된다는 것 등을 수차 권고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로운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씨의 이지적인 한마디 한마디의 논지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은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22세 청년이었던 탓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씨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이 날 때는 호랑이 같고 평소에는 좋은 형님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채워져 있는 고로 일거일동이 서투르고 부자유함을 동정하는 동방자(同房者)들이 모든 일을 보살펴주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리어 건강을 해롭게 한다 해서 쇠사슬을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씻고 유리창을 닦고 빗질 걸레질을 하며 내의를 빨곤 했다. 1935년 7월 경성복심법원 제2호 법정에서 재차의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신었던 짚신을 오기(荻) 판사에 던졌으나 그대가는 징벌밖에 없었다.
씨는 이듬해 8월달에 동지 15명과 같이 원통하게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에 있어서도 형장에 임했던 나의 동료를 통하여 최후의 안부를 전해왔던 것이다. 씨는 정의(情誼)가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형장을 향하여 눈물의 묵례(黙禮)를 드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사형집행은 하루에 못 다하고 양일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첫날에는 주현갑(周現甲)씨, 이동선(李東鮮) 씨, 권태산 씨 등 8명이었고 익일에는 나머지 8명이 집행되었다.
첫날에 집행당한 유해는 사형장 지하실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새웠다. 과거의 동지 여덟 분은 좁은 지하실에서 나란히 끼어 누워 있었건만 이제는 말 한마디 없이 참혹한 하루 밤을 보냈던 것이다. 취기(臭氣)가 난다 해서 다량의 얼음을 쟁이고 왜인 도이(土居淸造) 외 완력 있는 자들이 철야 엄중 경계하고 조선사람 직원의 접근을 불허했었다.
언제나 과언 묵묵한 이동선 주현갑 양씨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만은 자필로 썼다. 죽음을 초간(秒間)에 두고 지필(紙筆)을 요구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묵흔(墨痕)도 검게 유언을 쓰는 씩씩한 표정을 연상이나 해보자. 안중근 열사가 여순감옥 교수대에서 사라질 때의 장엄한 광경이 재연되어 민족적 의분을 북돋았던 것이다. 나는 유서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임석했던 자의 말에 의하면 한문시(漢文詩)로 되었는데 그 뜻은 “이 몸은 비록 교수대에 가치 없는 죽음을 감수하되 우리 조선공산당만은 영원히 일관 불변하여 살아 있으리라. 조선공산당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였다는 것이다.

 

엄무봉(嚴舞奉) 씨2

1935년 가을에 국제도시 상해에서 일본인거류민단장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아깝게도 현지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해온 투사이다.
씨는 보기 좋을 만큼 비대한 체구에 딱 들어맞은 중국복을 늘상 입고 있었다. 화기 만면하여 만날 때마다 웃음으로 응수했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자가 취할 태도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히 명랑했다. 더러는 우리들에게 농담도 하고 번잡스런 상해의 뒷골목 이야기도 해줄 만큼 기분이 유쾌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유화한 표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지만은 철석같이 굳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쇄수(鎖手)갑을 채울 때 이것을 거절하여 당장에 사형을 집행할 것을 고집했다. 드디어 수갑을 어거지로 채우고 복심법원에 항소하기를 권했으나 역시 이를 거절했다. 일본놈을 살해한 한국인에게 일본의 법률로 일본인이 심리하는 재판은 백번 되풀이했댔자 매 마찬가지인 것이 명약관화한 것을 형식적인 재판으로 말미암아 헛된 시간을 소비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대서하여 타인의 무인(拇印)을 찍어서 수속을 마치고 말았으나 제2심의 판결에 대해서도 역시 상고를 불응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대서 상고하고 말았지만 결국은 기각을 당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교회사(敎誨師) 기무라(木村融)가 간혹 불러서 딴에는 위안을 시킨다고 여러 말을 했던 것이지만 씨는 마이동풍격으로 들은체 만체 하였다. 하루는 황국신민도(皇國臣民道)에 대한 설교를 하자 “공연한 잔말 말라”고 고함을 치며 노리고 있으니 기무라는 “괘씸한 사람이라”고 노했다. 이때에 엄씨는 책상 위에 놓였던 화분을 들어 기무라의 낯짝을 갈기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황소눈처럼 동그래지며 있는 것을 이번에 책상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나서도 씨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흥분했던 뒷자욱조차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환방(還房)하는 씨의 걸음걸이는 매우 믿음직했었다.
나는 이 순간에 조선남아의 놀라운 기우(氣宇)를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혁명투사가 불원간 교수대에서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만 같았던 것이다.


2 엄순봉(嚴舜奉)의 오기. 1906~1938. 1934년 백정기 등과 함께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육삼정의거) 1935년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 이용로를 처단한 후 피체되어 1936년 3월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태식(鄭泰植) 씨3

정태식 1934. 6. 17.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교수 등과의 소위 성대(城大: 경성제국대학) 사건으로 1934년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권영태(權寧台) 씨 등과 같이 피검된 분이다.
짤막한 체구는 일견 포류지질(浦柳之質)을 면치 못할 것 같았으나 실은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조석으로 행하는 인원점검 식사 입욕 운동 청소 사방(舍房)검사 같은 것으로 인하여 차단되는 시간 이외는 하루종일 독서가 계속된다. 부피가 두툼한 영문서적을 첫줄 첫자부터 끝줄 마지막 자에 사선을 쳐놓고 줄거리만 읽는 것이 특수한 독서법이었다. 온 몸뚱이가 그저 총명의 두 자로 쌓여 있다고 아는 사람들의 화제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빙글빙글 웃기를 좋아하는 씨에게 “어쩌면 그처럼 뱃속이 편하오” 하고 의
아하듯이 물으면 “감옥 터에 웃음은 양약이 된다오. 웃는 것 외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소?” 과연 수많은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언제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화기 있는 얼굴로 명랑한 생활을 하는 것은 서둘러야 하는 수 없다는 자존적 수양의 결과인 것 같았다.
장구한 투쟁을 각오하고 있는 씨로서는 하루하루가 무사태평인 듯 했으나 씨의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당(慈堂)께서는 몸이 달아 형무소 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면회 차입 차하(差下) 같은 것을 한 번에 몰아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여러 차례로 나누어 원서에 찍히는 아들의 무인(拇印)이라도 보고는 만족한 듯. 또한 제한 있는 면회인지라 번번이 만나보지는 못할망정 무사히 있다는 말만 듣고도 그저 좋아서 안심하고 돌아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요 반일운동과 무산대중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자랑할 만한 아들이건만은 어머니로서는 하나의 어린아이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벗어 내보낸 헌옷 보퉁이를 연해 어루만지며 재삼재차 한 말을 되풀이하여 부탁을 하는 열렬한 모성애에 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는 3년의 형이 확정되어 징역감(懲役監)으로 넘어간 후 얼마 아니 되어 자당의 면회도 드물어지고 말았는데 그때로부터 근 10년이나 경과된 수월 전에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근력이 퍽 좋으시다”는 것을 이〇〇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나는 10년 전의 따뜻한 정경이 새삼스럽게 인상에 떠올라 왔던 것이다. 혁명가의 어머니 부디 만수장생하소서!


3 1910~1953. 1929년 경성제대 법학과 입학. 1934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이론가로 활약. 1953년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됨.

 

이재유(李載裕) 씨

이재유 1936. 12. 26.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씨는 1937년 서울 교외 공덕리 노상에서 검거되던 날, 씨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검거는 드디어 씨의 옥사(獄死)를 결과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경찰서에 두 번이나 검거되었으나 두번 다 감쪽같이 탈출하여 서울대학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관사 지하실에 숨어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미야케 교수와 함께 정원을 산보하며 환담하고 외부와 부절히 연락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미야케 교수의 피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다시 탈출하여 지하운동을 계속중 불행히도 다시는 탈출하지 못할 최후의 검거망에 걸렸던 것이다.
씨가 굳센 실천력과 사람을 능히 움직이는 감화력을 가졌다는 것은 옥중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흔히 조선민족의 진로라든가 소련의 실정이라든가 조선공산주의 청년의 의기라든가 조선에 있어서의 반일투쟁을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것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미결감(未決監)에 있을 때의 일상생활은 매우 깨끗했다. 언제나 독방이니만큼 혼잡하지 않은 관계도 있었지만 감방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히 되어 있고 서적 일용품 의류 등은 말짱하게 정돈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하였다.
소량의 음료수나 세면수 같은 것도 따로따로 받아두었다가 먹고 남은 물로는 식기를 씻어서 햇살이 담뿍 쪼이는 창턱에 말리고 세수를 마친 물은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 몇 번이나 방안을 닦았다. 씨는 결핍과 옹색함을 능히 극복하는 위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물마저 이중 삼중으로 이용하는 면밀한 성품은 살림꾼의 편모를 엿보게 하였던 것이다. 관급(官給)하는 세끼는 자양분이 적은 것이지만은 좁쌀 한 알 남기는 일없이 오랜 시간에 충분히 씹어서 먹는 습관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에 있을 때에 비교하여 신중(身重)이 훨씬 늘었다고 자랑도 했었다.
씨는 그다지 비대한 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육중한 몸뚱이의 소유자처럼 매우 느릿느릿했고 힘이 있었다.
“걸음을 좀 더 가볍게 걷는 것이 청년답지 않소? 지금은 양반걸음이 유행될 때가 아니지 않소?” 하고 빈정거리면 “내가 양반같이 보이오? 감옥살이는 우보격(牛步格)으로 내 집 마당을 산보하는 셈치고 살아야지 성급히 굴면은 말라죽는 법이오. 초조하면 3년 징역도 10년을 사는 것 같으니까…
” 역시 일생을 두고 싸우려는 씨에게는 감옥이 자기 집만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혁명객들의 감옥에 대한 철학인 것이다. 씨가 애인 박진홍(朴鎭洪) 씨에게 보내는 서신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란 한 개에 천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씨는 언제나 봉함엽서의 풀칠한 선계(線界)까지 꽉 차게 쓴다. 그처럼 가는 글자건만 보기에 어지럽지 않게 명확하게 씌어 있었다.

 

안창호(安昌浩) 씨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의 총독부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민심의 동정에 대한 사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바 드디어 민족진영의 거물들을 격리함으로써 전쟁으로 하여금 배태하는 독립사상의 확대 강화를 억압하려는 정책으로 나왔다. 즉 흥사단을 모체로 하는 동우회의 주간급을 전국적으로 대량 검거하여 투옥한 것이 이 사건의 전모이다. 안창호 씨를 비롯 하여 정인과(鄭仁果) 씨, 백남운(白南雲) 씨, 조병옥(趙炳玉) 씨, 이윤재(李允宰) 씨, 이광수(李光洙) 씨 등 우리나라 사상계 경제계 문화계를 망라하여 당초에는 구류장이 집행된 분이 물경 100여 명에 달하였다.
사건은 이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고바야시(小林長藏) 판사의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시국이 일본에 유리하게 되는 정세에 감(鑑)하여 취조의 진전에 따라서 제1심 공판이 개시될 때까지에는 거의 다 보석 출감되었었다.
도산(島山) 선생은 머리에 백발을 얹은 노객(老客)으로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쇠약한 수구(瘦軀)에는 오랜 혁명투쟁으로 오는 피로가 역력히 나타났으나 그러나 강직한 성격과 사람을 쏘는 듯한 영롱한 안광(眼光)은 젊은이의 정열을 능가할 만한 것이 보이어 옥내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이다.
씨는 고령하신 데다가 병약한 탓이었는지 약간 신경질인 편이었다. 독방생활의 고적함을 풀려는 심정인지 더러는 우리들을 붙들고 보통 이상의 이야기를 했었다. 하루 걸러서 의무실로 진단하러 갈 때마다 바싹 마른 팔뚝을 힘껏 추켜 붙들고 반행(伴行)하는 나에게 씨는 비틀거리면서도 “번번이 이처럼 친절히 간호해주니 진실로 고맙소. 감옥살이도 수차 했지만 이제는 외부에서 보살펴 주려는 사람도 경찰의 이목이 무서워 점차 꺼리게 되고 보니 그저 당신네들의 친절만이 여간 고맙지 않소. 당신은 일본말을 썩 잘하오. 가장 발음이 좋은 것 같소. 아직 젊으니 부디 공부 많이 하기를 힘쓰오” 하며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투사의 어조에는 어쩐지 적적함이 묻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한다는 바람에 나는 이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선생께 칭찬받는 것이 퍽 기뻤다. 나는 이만큼 어리석은 자였다.
그 후 씨의 병환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고 오히려 구금생활의 신고(辛苦)가 박차를 가하여 감옥의(監獄醫)로서는 완치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친지가 차입하는 사식도 드는둥 마는둥 할지경에 이르렀다. 1937년이 저물어가는 12월말에 보석이 허가되어 대학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4개월 만에 애처롭게 서거하고 말았다.
오늘날처럼 해방된 천지에서 씨의 혁명생활이 종말을 지었던들 그 장의(葬儀)는 성대했을 것이며 국민의 애도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마디의 말인들 조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똑똑한 책까지도 안심하고 읽을 수 없을 만큼 왜정의 폭압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는지라 씨의 장례에 참예하는 자는 곧 사상을 의심받아야 하고 과거의 민족운동자로서는 피검(被檢)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이 여기에 나타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오호라! 일생을 조국광복운동에 바친 도산 선생은 세인이 모르는 새에 쓸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허응철(許應徹) 씨4

수많은 혁명지사 중에도 허씨만은 특수한 품격을 가졌었다. 아무리 열렬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어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때로는 풀리고 너그러워지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인데 씨만은 철두철미 변함이 없었다. 무릇 사람들이 옥중생활의 부자유함과 고적함과 우울함을 견디어 백이려고 동방(同房) 사람끼리 또는 만나는 사람들과 때로는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명랑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건만은 씨는 한번도 웃는 낯을 뵈이는 일이 없었다. 독서할 때나 방외(房外) 출입할 때나 용무로 대담할 때나 가족과 면회할 때나 여하한 처지에 있어서든지 얼굴이 변색되는 일이 없고 종시일관 긴장하고 있었다.


4 1910년생. 본적은 함북 성진. 주소는 청진부 북성정. 1934년 5월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출신 현춘달(玄春達)과 함께 함북지역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청진 나남 지역 책임자를 맡음.
그해 메이데이 격문을 살포하였고 11월에는 공산혁명을 선동하는 격문 1만 2천장을 청진 나남 등지에 살포.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94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이 언도됨. 출처: 『경성일보』 1935.2.17. 2면, 허응철 관련 집행원부·형사사건부(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사이트)

 

씨는 일본사람을 지목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데키(敵)’라는 두명(頭名)을 부치고 말했다. 데키 아무개 간수장, 데키 아무개 간수, 데키 아무개 과장이라는 식으로— 하루는 나카시마(中島)라는 교회사와 구론(口論)이 벌어졌는데 그 사유를 기무라(木村) 간수장에게 전달하였던바 기무라는 씨를 데려다가 취조한 일이 있었다. 씨는 “‘데키’ 나카시마가 나에게 대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기를 권하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말끝마다 ‘데키’라고 하니 곁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왜놈들이 저마다 노하여 “철저한 녀석이라”고 중얼대니 “너희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 데키가 아니냐?” 하고 당당하게 반박했었다.
다음날 나카시마가 다시 불러서 따뜻한 말씨로 이야기를 걸었으나 역시 “너로 하여금 ‘데키’ 기무라에게 봉변을 당했노라” 하며 응답을 거절했었다.
이론으로는 어떠한 왜놈이 따져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핑계 좋은 징벌을 가하려고 했다. 연(然)이나 징벌에 해당할 만한 범칙(犯則)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가족과의 면회를 고의로 중지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사정을 모르는 그 부인은 때가 되면 꼬박꼬박 면회를 청해 왔지만은 언제나 형편에 의하여 시킬 수 없다는 구실로 허가되지 않았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구속된 이래 수 3년이 넘었으나 남편의 옥중고(獄中苦)를 조금이라도 위로 코저 멀리 함경도로부터 서울에 와서 침모(針母: 바느질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표모(漂母:빨래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같은 품팔이를 하여가며 차입도 하고 면회도 오고 편지 연락도 하는 등 정성이 지극한 어진 부인이었다. 어느 날은 면회할 때에 허씨가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너무나 고생을 끼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며 당신 자신도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장차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재가(再嫁)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자 부인은 문턱을 붙들고 소리 높여 흐느껴 울었다. 남편이 출옥할 때까지 죽음이 다다르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서 고생하는 남편과 똑같은 고생을 나누려고 결심한 그 부인에게는 너무나 원망스럽고 무자비한 포악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그 후 품삯 생활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세태가 되자 대화숙(大和塾)의 식모로 공규(空閨)를 지키며 남편의 출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呂運亨) 씨

1943년 초두, 씨는 육해군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피고사건으로 재차 투옥을 당하였다. 동경에 있을 때에 친히 목격한 B29의 동경 공습의 실정과 B29의 성능이 일본기(日本機)에 비하여 극히 우수하다는 것을 모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조언비어(造言飛語)’가 되었던 것이다.

여운형 1929. 7. 29.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피고사건은 곧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돌렸는데 이 공판은 비공개리에 개정되었었다.
공판의 내용에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나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승리할 것이냐 미국이 승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남방의 자원지대의 확보 여하에 승패는 달렸다. 일본이 이 지대를 제압하고 있지 못하는 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다”고 언명하였다. 씨의 놀라운 선견지명은 이 공판이 끝난후 2년 만에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씨가 미결감에 있는 동안 조카 되는 분이 자주 면회를 왔었는데 그는 동경에 주재하며 씨의 민족운동의 반려자가 되어 음양으로 활약하는 모양이었다. 면회를 할 때마다 용건이 끝나면 “ 아무개 공작은 무사하고” “아무개 남작은 평안하냐”고 연해 물어보기도 하고 “아무개 자작에게 안부나 전해두라”는 등 예절을 차리기에 조심했었다. 그들은 민족의 원수들이요 정적의 으뜸가는 자들이건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들 정객과의 친분이 있어야 상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씨를 처음 뵈인 것은 씨가 대전형무소에서 2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지 얼마 아니 되어 대전 경심관(警心館)에서 강연을 하던 날이었다. 열광하는 청중이 관내에서 삐져나와 관외에까지 꽉 차서 실로 성황이었다. 연단 좌우에는 속기사가 수명, 말 한마디 헛듣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앉아 있고 왜경의 금테 둘이가 즐비하게 늘어앉은 가운데 씨의 웅변은 토해졌던 것이다.
민족정신을 북돋으려 청년들의 각성을 채찍질하는 구절에 이르자 입회 경관의 난데없는 “중지!” 명령이 내렸다. 씨는 잠자코 흥분한 청중을 흘겨볼 뿐 계원에게 이끌리어 대기실로 들어간다. 잠시 있다가 다시 나타난 씨는 “전언(前言) 몇 구절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취소하겠다”고 선언한 후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또 중지가 된다. 약 3시간가량의 강연에 ‘중지’ ‘전언 취소’가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나는 씨의 강연 중에 단 한마디만은 아직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인리(隣里)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경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의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리게 될 때에 용기백배하여졌던 것이다. ” 힘있게 외치는 바람에 청중은 벽력같은 박수를 보내었건만 입회 경관은 이제 또 씨를 대기실로 인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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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통님의 숨은 뜻을 아주 잘 이해하는 청년이네요.
우리가 이렇게 중국에게 사드 보복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중국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사드는 반드시 배치되어야합니다.

중국대사관 지나는 길에 오늘날 진정한 애국을 몸소 실천하는 1인 시위 사진입니다.
사드를 수호하고자 하는 많은 깨시민들이 같이 해보면 좋을 듯~~

목, 2017/09/2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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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홍영표의원의 할아버지는 민족의 반역자이자,

역대급 친일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참고로 을사오적은 중추원 고문이었다

조선인으로 더이상 오를 수 없는 직책까지 오른 사람이 홍영표의 조부다

사과하면 용서되는가? 무려 조선총독부의 참의인데?

민주당의원은 가만히 두는 이유는?

공론화 시키지 않는 이유는?

금, 2017/09/2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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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전쟁의 잿더미로 만들고 수백만의 전쟁기아 및 전쟁고아를 만들게 한 북한 김일성 돼지새끼의 북괴를 찬양고무하는 한총련 똥진당 놈년들의 빨갱이척결이 우선이니라~

국가보안법을 더더욱 강화하야~

북괴 김일성 돼지새끼가 일으킨 6.25전쟁 거지나라였던 한국에게 구호식량과 구호물자를 주며 도와준 고마운 미국을 욕하는 빨갱이놈년들을 맥아더 장군 동상아래 무릅꿀쳐 모가지 자르기 대회를 열어야~

그리고 북한 김일성 돼지새끼가 일으킨 6.25전쟁을 북침이라고 우기는 빨갱이새끼들과 남침이라고 바로 대답못하고 어물쩡대는 놈들도 빨갱이라고 인정 모두 국가보안법의 최고형으로 대갈통을 잘라야~

토, 2017/09/23- 03:16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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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수신 거부 신청합니다.

토, 2017/09/23- 11:09
205
0

정기간행물 수신 거부 신청드립니다.

토, 2017/09/2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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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혈서 군관지원’

 

9월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317호 법정, 10시로 예정된 재판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선고 당일인데 정미홍씨는 10시가 넘어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무죄를 확신하는 것인지 마음이 매우 느긋한가 봅니다. 반면 연구소 법무책임자인 저는 매우 초조했습니다.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운 만큼 패소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정미홍씨가 법정에 들어왔고 뒤따라 수십 명의 어르신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은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되어있는 배지를 옷깃에 달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법정에 자리 잡았습니다. 의자에 앉지 못한 분들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순서가 후반부에 있는지 다른 여러 재판이 먼저 진행되었습니다. 한참 후에 시작된 재판, 정미홍씨가 선고를 받기 위해 피고인석에 섰습니다. 재판부는 판결을 내린 경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공소장의 내용, 재판의 쟁점사항, 원고와 피고 간 주장의 충돌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정리했습니다. 마치 원고와 피고 그리고 방청객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설득 과정 같았습니다. 이 재판의 쟁점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 조작’ 여부였습니다. 만약 조작이 있었다면 정미홍 씨가 주장한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기사조작’ 이란 트위터는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조작이 없었다면 정미홍 씨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 되기 때문에 유죄가 인정될 것이었습니다.

정미홍 씨는 연구소가 박정희 혈서기사를 발굴했다며 언론에 만주신문을 공개한 2009년 이전 5년 동안 만주일보에 해당기사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수차례 밝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만주일보가 1939년 당시 폐간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되자 만주신문으로 말을 바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바꾼 사실이 조작의 증거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재판부도 이 부분을 쟁점으로 여겼습니다. 연구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공식적으로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려 있다고 말한 증거를 정미홍 씨가 제출한다면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없었습니다. 연구소는 만주신문에서 해당 기사를 발굴하기 전까지 어떤 신문에 박정희 혈서기사가 실렸다고 특정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증언만 있을 뿐 1차사료인 혈서기사를 본 적이 없으니 특정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5년 동안 만주일보라고 주장했다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것인지 출처가 궁금할 뿐입니다. 하지만 연구소는 만주일보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5년 동안’의 시작이 되는 2005년에 연구소가 공식적으로 발간한 출판도서에서 증거를 발견했고 이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재판부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미홍 씨에게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적인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 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벌금형이 내려지자 정미홍 씨는 판사를 향해 “판결을 인정할 수 없으며 역사왜곡을 바로 잡는 활동을 계속 하겠다. 이 법정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는데 잘못 걸려 있다. 제대로 다시 걸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방청객도 술렁였습니다. 몇몇이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경위들이 나와 제지했고 그분들은 이내 복도에 나가 재판부에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소리가 법정 안에까지 들렸습니다.
정미홍 씨는 기자 인터뷰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며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번 재판은 박정희 혈서기사와 관련된 형사재판이었습니다. 연구소는 이미 민사재판에서 최종 승소하였습니다. 지난 1월 대법원은 박정희 혈서가 날조라고 주장한 강용석 씨에게 500만원, 정미홍 씨에게 300만원, 일베회원 강모씨에게 300만원의 손해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이 중 강용석 씨와 정미홍 씨는 해당 금액을 연구소에 보내왔고 일베회원 강모씨는 벌금을 연체하여 이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월, 2017/09/2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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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법정에 선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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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9일 횡령 및 포고령 위반 혐의에 대한 박흥식의 1차공판이 열렸다. <동아일보> 1946.3.20.>

1946년 2월 15일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인 박흥식은 신내영 검사가 지휘하는 검사국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경찰부장으로 있던 장택상의 농간으로 담임검사의 허락도 없이 풀려났다가 이튿날 다시 잡혀왔다. 그는 검사국에 구속된 지 열흘 만인 2월 26일 장물기장죄(贓物寄臧罪)·횡령·사기·포고령 위반 등의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검사의 공소장에 의해 박흥식의 피의사실을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박흥식은 1945년 8월 27일 조선군사령관 고쓰기 요시오 중장로부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정리기금이란 명목으로 3,150만 원을 받아 식산은행의 차입금, 민규식 외 351명의 주주들에게 주식대금을 지불하고 남은 1,300만 원을 착복하였다.
둘째,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강제 징용되어 끌려온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퇴직금과 위로금 문제로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8월 27일 박흥식이 조선군사령관에게서 노자문제 해결기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2천만 원을 받았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주지 않고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등에 가족, 친척, 회사 임원 명의로 차명 예금하여 이를 은닉하였다.
셋째, 1945년 11월 15일 화신백화점을 개업하면서부터 박흥식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종업원에게 조선총독부가 배급해준 포목 등 생필품을 전부 매장으로 돌려 매입가의 최고 45배로 판매하여 1946년 2월까지 70만 원의 폭리를 취했다.

 

이 사건의 첫 공판은 3월 19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재판소 대법정에서 이천상 판사의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방청석에는 박흥식 가족과 화신 관계자, 박흥식의 심리광경을 보고자 몰려온 군중들이, 변호사석에는 강병순, 배정현, 백붕제, 김광근이 앉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흥식은 고동색 두루마기에 회색 바지, 검정운동화, 귀를 덮은 머리에 용수를 쓰고 손목에 고랑을 차고 간수에게 끌리어 법정에 들어섰다.
이천상 재판장이 “피고는 어떠한 뜻으로 일본 군부가 관계하는 조선비행기회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는가”라고 묻자, “당시 총독부와 군사령부에서 강제적으로 시켜 피할 길이 없이 부득이 취임하였을 뿐이며 군부에서 받았다는 돈도 회사에서 당연히 받을 돈이며 이 돈 역시 나 개인을 위해 쓴 일은 없으며 앞으로 이것을 활용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대학도 세우고 큰 병원도 설립하고 이외 여러 가지 대사업을 하려고 설계를 세우는 도중에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유창하게 답변하였다.
제1회 공판에서 시작하여 7차 공판까지 열렸는데 그동안 박흥식이 복역하던 서울형무소 감방에는 전기히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감방이 아니라 별장이나 다름없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변호인단은 담당검사의 병환으로 공판이 연기되자 판사를 찾아가 공판 강행을 요청하거나 박흥식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병보석을 강청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일삼아 사회적인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3월 26일 제6회 공판으로 심리를 전부 마치고 신내영 검사는 “박흥식은 세상이 다 아는 민족반역자이므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도 가할 것이나 그 법적 근거가 아직 없음이 유감이다. 그러나 장물기장, 폭리 등 죄상이 뚜렷하니 징역 3년에 벌금 200만 원을 구형한다”고 준엄하게 논고하였다. 검사의 징역 3년 구형에 대해 사회적으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박흥식에게 실형 언도가 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천상 판사는 5월 3일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언도하였다. 그는 “미군정하에 있는 본 법정으로서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고 운을 뗀 후 검사가 제시한 피의사실 세 가지에 대해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49년 반민특위 재판정에서도 박흥식은 전혀 반성함이 없이 모든 친일행위를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 것이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덕택으로 2천 명의 동포가 목숨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철저히 망가진 반민특위는 결국 적반하장의 매판자본가 1호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역사정의 실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08
진남포 미곡상에서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박흥식은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 지역 토호였던 부친 박제현과 모친 이선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1살 연상의 친형 박창식이 일찍 죽고 아버지도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박흥식은 1915년에 용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며 한학을 배우다가 17세 때 진남포로 나와 진남포상공학교를 다녔으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1919년 2월 박흥식은 진남포 비석리에서 미곡상을 시작했다. 19세 때인 1920년 2월에 평안남도 용강에서 선광당인쇄소를 설립했으며, 1924년 3월 자본금 10만 원의 선광인쇄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25년 10월부터 1928년 5월까지 면화와 미곡 등 지역물산 매매와 알선을 하는 서선흥산주식회사를 경영하였다. 미곡상을 시작으로 상업활동에 투신한 박흥식은 천부적인 상술과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사업에 성공, 용강 지역 최대 지주로 성장하였고 이후 인쇄업과 무역업을 통해 향후 지물업을 시작할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박흥식은 1926년 서울로 올라와 그해 6월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의 출판사와 인쇄소를 중심으로 영업하였는데, 인쇄용지를 다량 구입하는 고객에게 금강산 관광과 일본 유명 관광지 여행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판매전략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받아 전국 각지의 수백 군데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27년 지물업의 메이저 사업인 신문용지에 도전하였다. 박흥식은 신문용지를 공급받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굴지의 제지회사와 교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수입선 다변화를 꾀해 스웨덴의 제지회사와 교섭하여 양질의 신문용지를 훨씬 싼 가격에 공급받았다. 더욱이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알선과 박리다매 전략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1929∼1932년 매년 150만 원을 초과하는 판매액에 2만 원 안팎의 당기순이익을 얻었다. 25만 원의 소자본으로 출발한 선일지물주식회사는 이후 2배로 증자하고 연간 판매고가 500만 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초반은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차차 가라앉고 서구자본주의경제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고, 일제는 상품시장 확대와 원자재 확보를 위해 만주 침략을 강행한 시기였다.
1920년대를 거치며 조선인들의 문화수준과 소비성향이 한껏 높아졌고, 이 무렵 호경기를 반영하듯이 서울에서도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히라타 등 4곳의 일본백화점이 경합을 벌이며 성황 중이었다. 박흥식은 오랜 기간 관심을 두고 있던 자본주의의 꽃인 백화점사업에 진출하였다. 1931년 신태화가 경영하던 금은 잡화의 화신상회를 인수하여 자본금 100만원의 화신상회를 설립하였고, 1932년 5월 목조 2층 규모의 화신상회를 콘크리트 3층으로 증개축해 최신식 초대형 종합잡화상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두 달 뒤 바로 옆에 들어선 최남이 경영하는 동아백화점과 2개월간 전쟁 같은 혈투를 치렀다. 박흥식은 혈투 직후 염가양품(廉價良品) 전략 즉, 질 좋은 상품을 싸게 판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일본 오사카에 3층 빌딩을 임대하여 그곳에 오사카 구매부를 설치하고 일본 제조업체로부터 각종 상품을 공장가격으로 직수입하였다. 그 덕택에 동아백화점은 물론 일본 백화점보다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내놓아승리할 수 있었다. 1932년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해 종로 상권을 평정하였고, 평양에 세워진 평안백화점까지 인수하여 조선인 유일의 백화점 사장이 되었다. 1935년 연초에 화신상회가 화재로 전소하자 화신백화점 신축공사를 추진해 1937년 11월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 화신백화점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광복 직후까지 화신백화점은 서울의 명물이자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1938년 6월에는 진남포에 3층짜리 화신백화점 진남포지점을 개설하였다.

 

09

 

111937년 11월 새로 신축된 화신백화점. 지하 1층과 지상 6층, 연건평 2,034평, 엘리베이터 4대, 에스컬레이터 2대를 구비한 최신식시설로서 당시 미쓰코시, 조지아 등 일본백화점의 규모를 능가했다. 옆의 도면은 1937년 개장시 화신백화점의 층별 매장 배치도.

 

1934년 박흥식이 백화점사업과 연계해서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연쇄점 방식의 유통업 진출이었다. 당시 4대 일본백화점이 주요 지방도시에 지점을 설치해 현지 중소 상인의 타격이 컸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박흥식은 1934년 6월 연쇄점 모집 공고를 일간신문에 발표하였다.
조선 전역에 걸쳐 1천여 개소의 화신연쇄점을 개설하는 한편, 화신측이 이들 연쇄점에 자금과 상품을 공급하는 등 자금과 판매를 일원화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지방의 소상인들로 구성된 가맹점의 자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자금 대신 부동산을 받아 이를 담보로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았다. 이 자금으로 상품을 구입해 연쇄점에 공급하며 상품 결제도 현금이 아닌 장기 어음으로 하도록 하고 그 어음을 식산은행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하려는 것이었다. 1934년 11월 제1기 계획으로 350개의 연쇄점이 개설되었고(1937년 중일전쟁의 여파로 추가 모집을 중단함), 저가 상품 구매를 위해 일본 오사카지점을 신설하는 한편 개별 연쇄점에 대한 원활한 상품공급을 위해 주요 5개 도시에 상품배급소를 설치하였다. 연쇄점 사업이 확대되자 1936년 3월 자본금 200만 원의 화신연쇄점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백화점에서 독립시켰다.
1939년 시점에서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필두로 한 6개의 화신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자본금 25만 원의 선일지물주식회사(용지도매업), 100만 원의 화신주식회사(화신백화점), 200만 원의 대동흥업주식회사(부동산), 200만 원의 화신연쇄업주식회사, 270만 원의 화신무역주식회사, 50만 원의 제주도흥업(부동산, 취체역 사장은 박준석)이 바로 그것이다. 1926년 상경하여 자본금 25만 원으로 시작한 사업을 13년이 채 되지 않아 총 850여 만 원의 재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박흥식은 ‘조선의 백화점왕’으로 불렸고 1938년 호별세 25,000원을 납부하여 서울 조선인 중 최대 납세자에 올랐다. 이와 더불어 그해 말 박흥식은 조선인 기업인 경성방직과 조선생명보험, 일본인 기업인 조선석유와 북선제지화학공업 등 8개 사의 중역도 겸직하였다.
조선비행기공업 설립 주도
1941년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됐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으로 시작된 전시통제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1941년 ‘생활필수물자통제령’과 ‘물자통제령’ 1942년 식량관리법 등으로 철저한 가격통제와 생활필수품 배급통제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1941년 9월 박흥식은 화신무역주식회사, 화신연쇄점주식회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합병해서 자본금 500만 원의 화신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대처해나갔다. 이 무렵 주력기업인 화신백화점은 일본산 수입의존도가 50% 정도여서 경성의 4대 일본 백화점에 비해 유리하여 미나카이, 히라다 두 백화점을 앞지르고 미쓰코시, 조지아 두 백화점과 대등한 영업실적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 수입품 비중이 80%를 차지한 화신연쇄점으로서는 총체적 위기였다. 앞서 말한 각종 경제통제령이 발동되고 물자공급이 중단되면서 1년 사이 350개의 연쇄점은 250개로 감축되었고 1943년에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박흥식은 1942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산업경제인 대표자대회에서 일본 천황을 ‘배알’한 후 비행기 제작에 뛰어들 결심을 하였다.1) 1944년 7월 12일 박흥식의 주도로 조선비행기공업 설립을 위한 제1회 발기인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이하라 준지 참모장을 비롯해 군부 7명, 총독부 7명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설립 취의서를 확정하고 이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고 7월 17일 조선총독에게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설립 취의서에서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 설립 이유, 예산 및 자금조달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 회사 설립 목적과 사업개요는 조선군의 지도감독에 따라 군용비행기 제조를 목적으로 한다. 1차 사업년도에 제조에 필요한 건설 및 부품 가공설비를 시설하고 2차 사업년도부터 일관작업을 추진해 월 60기 이상 제작하고, 3차 사업년도부터 월 120기 이상 생산한다. 둘째 회사 설립 이유는 세계정세의 가열찬 전국(戰局)을 고려해서 비행기의 대량생산이 초미의 급무이며 국가적 요청이다. 셋째 자금은 자본금의 반액 납입과 일부를 전시금융금고 차입금으로 충당해서 시설하고 사업 확장에 따라 2회 자본금 납입을 통해 조달한다.”


  1. 흔히 반민특위 박흥식 공판자료에 의거해 박흥식이 비행기 제작에 참여한 이유가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끈질긴 회유와 종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면도 작용했겠지만 극심한 전시통제기에 이르러 유통업의 전망이 어두워지자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자 하는 박흥식의 야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다음은 7월 17일 조선비행기공업의 설립인가를 받은 후 박흥식 설립위원장이 앞으로의 포부를 밝힌 글인데, 비행기 제작 참여 계기와 그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재작년 12월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1인으로서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께 배알의 분부를 받자옵는 파격의 광영을 입었는데 이때 나는 산업경제인으로서의 책무의 중대함을 깨닫고 국가를 위한 직접 봉공의 길은 없을까 하고 생각한 결과, 비행기 증산을 위하여 정신(挺身)하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의와 계획을 총독부 및 군부에 피력하였던바 파격적인 지원 아래 직간접으로 편달을 받고 또 재계 각위의 절대한 원조에 의하여 예의 본사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매일신보> 1944.8.19. 2면)

 

1944년 9월 임시발기인총회를 열어 총 자본금 5천만 원 중 제1회 납입자본금 2,500만 원의 출자관계를 결정, 주식총수 100만주 가운데 85만주는 발기인에게 배당하고 나머지는 조선금융단에 의뢰해 전국에서 공모하기로 하였다.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공업이 정식 설립하여 박흥식이 사장에 취임하였고, 12월에는 일본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받았다. 설립 직후 조선비행기공업의 출자구성을 보면, 법인주주로는 전시금융금고(지분율 17%) 조선식산은행(17%) 동양척식(16%) 화신주식회사(15만주, 15%) 등이고 발기인 주주 중 조선인으로는 박흥식(2만주, 지분율 2%) 박중양(0.1%) 장직상(0.3%) 한상룡(0.3%) 민규식(0.3%) 김연수(0.5%) 박춘금(1%) 백낙승(2%)이다. 박흥식과 화신주식회사는 총 100만주 중에 17만주와 17%의 지분율이고 금액으로는 400만 원으로 조선인 주주 중에 압도적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비행기공업에서 만들고자 한 비행기는 ‘キ79丙’ 기종의 목철(木鐵)혼합기였다. ‘キ79丙’ 고등연습기는 만주비행기제조가 생산한 전투기 기종으로 1939년 노몬한 전투에 참가한 79식 전투기를 고등연습기로 개조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지도하에 이 기종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만주비행기제조와 기술협약을 맺고 비행기 생산자재를 수입하였다. 이와 별도로 박흥식은 10월 하순 기술진을 초빙하고 공작기계를 마련하기 위해 도쿄와 상하이를 찾아갔다. 도쿄에서는 중앙당국과 선진 비행기공장 임원들과 교섭한 결과 군수성 칙임기사 하타에 외 60여 명의 기술진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주둔 노보리부대와 교섭하여 비행기 부품 제작에 필요한 공작기계류 550대를 입수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직물과 동양방적의 안양공장 및 인근 토지 10만 평을 매수해 정비와 조립공장, 격납고와 비행장을 순차적으로 건설토록 하였다. 또한 기술자 양성을 위해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전환해서 항공과와 기계과 두 학급 240명을 선발하여 기술교육에 힘썼다. 박흥식을 비롯한 조선비행기공업 임원들의 노력으로 1945년 5월 당시 1호기의 주익(主翼) 제작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이 성공하였다. 이어서 제2·3호기의 부분품 제작도 9월말에 완료할 예정으로 안양공장의 비행기 양산체제가 완성될 즈음 일제 패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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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79’ 고등연습기의 하나. 만주비행기제조(주)가 97식 전투기를 디그레이드하여 고등 연습기로 제작한 것이다.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도 이와 동일한 기종의 비행기를 생산키로 하였다.

 

정경유착과 그 귀결로서의 전쟁협력

박흥식의 성공 신화 이면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 곧 제국주의 권력과의 추악한 정경유착이 자리한다. 1926년 상경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차리고 신문용지의 거래처를 확보할 때 조선총독부 관료의 개입으로 가능했고, 1930년대에 들어와 화신백화점과 화신연쇄점의 설립자금과 운영자금을 국책은행이었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받았다. 사업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조선총독이나 총독부 관리와의 비밀 회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1935년 연초 대목 때 화신백화점이 화재로 전소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우가키 총독을 만나 구 종로경찰서 자리를 빌려 임시매장을 차리는 것을 허락받아 화신백화점의 영업 손실을 최소화했다는 일화는 총독부와의 유착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통제기에 들어서자 박흥식은 관변단체, 친일단체 간부로서 활동하고,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강연과 기고, 국방헌금 헌납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표적인 관변단체·친일단체 활동을 살펴보면 사상범의 전향업무를 담당한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1937), 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1938),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쟁협력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이사(1938),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1939),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배영동지회 상담역(1939),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194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상무이사(1941)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 겸 국민총력 경기도연맹 참여(1943) 그리고 패망 직전인 1945년 2월 미영격멸, 성전필승을 내건 대화동맹 심의원으로 활동했고 그해 6월 전쟁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목적으로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위원을 맡았다.
이와 함께 막대한 자금을 직접 국방헌금으로 헌납했을 뿐 아니라 국방헌금을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일어나자 종로경찰서에 5,000원을 냈고, 9월에는 애국경기호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9년 종로경찰서 신축 기성회비로 5만 원을 기부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관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하여 일반인에게 국방채권을 강매하였다. 그해 12월 화신주식회사와 화신상사의 종업원에게 국방헌금 3만 원을 갹출하여 종로경찰서에 헌납하였다. 1943년 7월 민규식 김연수와 함께 청소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쓸 연성비 5만 원씩을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헌납했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시통제시책에 순응하며, 징병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과 연설, 기고를 하였다.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광명의 천지를 향하여」(<조광> 1942.2), 미나미 총독의 이임에 즈음한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매일신보> 1942.5.30), 1942년 12월 일본산업경제간담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여 천황을 만나고 그 감격을 피력한 「배알의 광명의 감읍」(<매일신보> 1942.12.16)과 「배알 1주년-지성으로 봉공」(<매일신보> 1943.12.17) 등 다수의 친일 논설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세 번의 구속, 그리고 사후의 역사적 심판

해방이 되자 박흥식은 1946년 12월 화신백화점, 흥한피복주식회사,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50년 화신산업주식회사 사장, 재판법인 흥한재단 이사장, 1953년 흥한방직주식회사 회장, 1959년 신선무역주식회사 회장을 지냈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 1차년도 때 외자 도입을 통해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전력난과 불경기로 큰 적자를 보고 2년 만에 손을 뗐다. 1980년 10월 화신과 그 계열사들이 300억 원의 연쇄부도로 파산하면서 박흥식은 재계를 떠났다. 1994년 5월 10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방 후 박흥식은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등 각 시기에 걸쳐 한 차례씩 모두 세 차례나 구속되었지만 그때마다 용케 빠져나왔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1946년 2월 횡령과 폭리로 미군정하 서울지방법원에서 기소되어 징역 3년과 벌금 200만 원이 구형되었으나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번째는 1949년 1월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제7조(범죄자 옹호·도피 협조자)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제1호로 체포되었으나 9월 26일 그는 ‘공민권 정지 2년’이라는 가벼운 구형에 이어 당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세 번째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회의에 의해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7월 석방되었다.
여러 차례 구속과 무죄판결을 반복하며 정경유착과 친일의 죄를 무난히 넘겨온 그였지만 2009년은 절대 피할수 없는 역사적인 심판의 해였다.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 황민화정책과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한” 죄목(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2조 11호 13호 14호 17호 18호 각호 위반)으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였고, 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이 소상히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제강점기 최고의 성공신화로 포장되어온 화신기업의 성장은 제국주의 권력과의 유착과 굴종의 대가였고 일제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종속된 매판자본이었음이 역사자료에 의해 남김없이 드러났다.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경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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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었던 박흥식동상. 이 동상은 박흥식 사후인 1996년 광신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그의 아들이 세운 것이다. 2001년 10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서울관악동작지부 회원들이 광신고등학교 정문에서 박흥식 동상 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그해 연말에 자진 철거되었다.

∷ 박광종 선임연구원

월, 2017/09/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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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이형철 위원장

04인터뷰어 :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 조한성 선임연구원

지난 7월 12일 우정사업본부는 서울중앙우체국에서 열린 우표발행심의위원회 회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년 기념우표의 발행 계획을 철회했다.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은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추진되었던 대표적인 역사적폐 중 하나로 꼽혀 왔다. 이번 기념우표 발행 철회에는 1년여 간 발행 철회를 끈질기게 요구해온 우정사업본부 소속 공무원노동조합의 가열찬 투쟁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이
에 적극 동참한 바 있다.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 철회를 이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이형철 위원장을 만났다.

문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공무원노동조합 우정사업본부 노조는 어떤 노조인지 소개해 주세요.
답 : 사실 우정사업본부에 노조가 상당히 많습니다. 집배원과 우체국 창구에서 근무하는 분들로 구성된 전국우정노조가 있는데 이분들은 2만 7천여 명 되구요. 저희는 2선에서 행정 관리를 지원하는 행정기술직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입니다. 정 조합원이 5천여 명 되구요, 후원회원까지 포함하면 7천여 명이 됩니다.

문 : 어떻게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년 기념우표 발행 철회 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답 :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우표 발행 문제는 작년 9월 국정감사에서 처음 불거졌습니다. 기념우표 발행에 대한 심의는 작년 5월에 있었는데, 심의 사실을 꽁꽁 숨겨놓고 있다가 국정감사에서 심의 사실이랑 발행 계획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된 거죠. 신경민 의원 등이 문제 제기를 하자 우정사업본부는 절차대로 합법적으로 진행한 것이라고 변명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원래 정치적 학술적 종교적 논쟁이 있는 경우에는 우표 발행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우표발행심의원회의 회의록을 보니 이러한 원칙이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았고, 사실상 논의자체도 제대로 한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9월 29일 우리 노조는 우정사업본부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노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거쳐서 기념우표 발행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우정사업본부는 우리의 문제제기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어요. 본부장 등 관리자들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당시는 박근혜정부가 아직 살아있는 권력이었고 대통령의 아버지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말도 못 꺼내게 했습니다. “과거에 친일을 했어도 해방 후 조국 근대화에 큰 공로가 있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합리화하기까지 하더군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론에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과 최명길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을 통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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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기념우표 발행 철회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였겠군요?

답 : 네. 올해 3월 9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난 후 우리 노조는 4월 3일 다시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념우표 발행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재차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정사업본부 본부장과 임원들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상급단체인 국가공무원노조에 기념우표 발행 문제를 과잉 의전 문제와 함께 우정사업본부 내 적폐사례로 보고하고 공동 투쟁을 요청했습니다.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확대시키는 것이었으니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우리는 6월 12일 기념우표 발행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표발행을 책임지는 우편사업단장과 면담하여 발행 취소를 하지 않으면 반대투쟁에 나설 것이고 발행을 강행할시 우표발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내겠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6월 13일부터 7월 12일까지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고, 국가공무원노조에서는 6월 29일부터 정부세종청사 우정사업본부와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6월 22일에는 광화문1번가 국민인수위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규탄 집회도 가졌습니다. 우리는 언론사들과 여러 번 인터뷰도 했는데, CBS 권민철 기자가 자세히 다뤄주면서 여론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6월 29일 좋은 소식이 들려왔어요. 당시 심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심의위원들의 문제제기로 재심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7월 12일 재심의가 이루어졌는데 장소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피케팅을 했는데 민족문제연구소도 함께 해주셨죠. 원래는 광화문우체국에서 하기로 했었는데 1시간 전에 서울중앙우체국으로 바꿨다고 해요. 우리가 광화문우체국에 모여 있으니 회의 장소를 바꾼 거 같아요. 결국 참석한 심의위원 12명 중에 발행철회 8명, 발행찬성 3명, 기권 1명으로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이 취소되었습니다.
투쟁에는 승리했지만 노조 입장에서는 잃은 것도 많았습니다. 우정사업본부장이 8월 16일 퇴임하면서 노사간 이미 합의했던 12개 사항에 대한 사인을 해주지 않고 갔거든요. 적지 않은 희생을 통해 얻은 소중한 승리인 만큼, 아무쪼록 우리의 투쟁이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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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2009년 9월에 민족문제연구소에 가입해주셨는데 어떤 계기로 가입하셨나요?

답 : 당시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사회적 이슈이기도 했구요. 처음 민족문제연구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정래의 <한강>에서 임종국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하면서였어요.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소설에 실명으로 등장할까, 궁금한 마음에 임종국 선생님이 쓴 『친일문학론』도 구해 읽고, 인터넷도 뒤져봤어요. 그런데 그분이 친일연구를 하다가 자기 아버지의 친일 사실을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묻자, 친일연구서를 쓴다면서 나를 빼면 그 책은 죽은 책이 된다고 하셨다고 해요. 이런 분을 기리는 단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문 : 원래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답 : 학창시절엔 그다지 역사에 관심은 없었는데, 아이들 키우면서 박물관 같은 데를 자주 갔어요. 박물관에 가서 책도 사주고 그러다 보니 아들이 전북대 사학과에 들어가더라구요. (웃음) 원래 저희 아버지가 역사에 관심이 많으셨는데, 자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을 보면 좀 그렇더라구요.

문 : 요즘 시대 화두가 적폐청산인데 앞으로 우정사업본부 노조의 계획은 어떤 것이 있나요?

답 : 제가 지난번에 민족문제연구소 여름수련회에 참가하면서 아산 현충사 표준영정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됐어요. 이런 문제도 공무원들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인데요. 문화재청 출신인 국가공무원노조 안정섭 위원장과 얘기를 나눠보니 표준영정 문제도 담당이 문화체육부와 문화재청으로 나눠져 있어서 사정이 복잡하더라구요. 그래도 해당 부처 일이니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얼마 전에 안정섭 위원장이 저와 함께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했습니다. 그 결과 이번 8월 15일 국가공무원노조에서 친일청산과 표준영정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문 : 노조측에서 친일청산운동에 적극 나서 주시니 저희로선 큰 힘이 되네요.

답 : 사실 지금까지 노동조합운동을 하면서 노조가 사회적 이슈에 적극 동참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흔히 노조들이 처우개선이나 연금문제 같이 자기 문제에만 매몰될 때가 많은데요. 그럴 경우 국민들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통하지가 않거든요. 저희가 작년부터 계속 얘기해온 것이 우리 노동조합도 뭔가 사회적인 이슈에 참여하고 국민들이 호응할 수 있는 일에 함께 나서야 우리들이 우리의 문제를 풀어갈 때 국민들에게 부탁도 할 수 있는 거라는 거예요. 이번 박정희 기념 우표 발행 취소 운동을 하면서도 느낀 것이 우리 노동조합의 힘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시민단체와 연대하고, 국회의원실, 언론과 힘을 합친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이지요.

문 : 국가공무원노조는 26개 부‧처‧청의 노조가 모여 있는 곳이잖아요. 연구소가 적폐청산, 친일파 청산 문제를 다룰 때 대개 첫 번째 부딪치는 곳이 공무원조직인데, 그런 점에서 앞으로 연구소도 국가공무원노조와 연대할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답 : 네, 표준영정 문제가 두 번째 연대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교부도 우리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지부니까 야스쿠니 문제도 다룰 수 있을 거구요. 앞으로 우리 공무원노조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연대해 친일청산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월, 2017/09/2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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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조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

 

북한은 지난 7월 두 차례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마침내 미국 본토 타격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 동북아 전략 구도의 게임체인지 순간이 다가왔다.
ICBM은 현대 군사 기술의 집약체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속옷도 제대로 못 만드는 북한의 ICBM 개발이 미스터리라고 하면서, 성공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봤다. 첫째, 지난 수십 년 간 ICBM 관련 과학자들을 꾸준히 관리했으며, 둘째 스스로 확보한 비공식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사일 개발 비용을 감당했고, 마지막으로 김정은이 미사일 개발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연합뉴스???? 2017.7.10).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는 워싱턴포스트 분석보다 뿌리가 더 깊다.
북한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됐다. 이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올인했다. 모든 국가자원을 다 쏟아 부었다. 북한 스스로 핵개발 의도를 미국의 핵위협 대처, 재래식 무기의 엄청난 비용 부담에 따른 코스트 측면에서 핵개발, 그리고 민족통일의 원동력 구축임을 밝히고 있다. 북한의 ‘피포위 의식’과 미국의 대북 핵위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 무기로서의 핵’이라는 데에 북핵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북한 비핵화 전략은 실패했다. 왜 실패하고 말았는가?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우려하면서도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가 군산복합체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었고, ‘불량국가’와의 협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국 미국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미국은 좀체 북한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체결의 세 이벤트가 주목된다. 그해 말 전술핵무기가 철수되었다. 독일 통일(1990.10.3)을 전후하여 한소수교(1990.9.30), 한중수교(1992.8.24)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과 미일과의 교차승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2년 초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 용인을 전제로 북미수교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거절했다. 그러자 북한은 핵프로그램 추진으로 돌아섰다.

 

북핵, 협상 실패의 역사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몇 차례의 협상 타결이 있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로 제1차 핵위기가 봉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발목잡기에 걸려 경수로 건설의 첫 삽을 뜨는데 3년 가까이 걸렸다.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다시 미국의 주목을 끌었다.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의 「북미 공동코뮤니케」(US-DPRK Joint Communique)로 한반도의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공동코뮤니케는 다음해 부시 대통령에 의해 찢겨지고 말았다.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으로 제2차 핵위기가 불거졌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 8월 다자간 협상틀인 6자회담이 개최되어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거의 완벽한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 자금을 묶은 BDA(방코델타아시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음해(2006.10.9) 마침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놀란 미국은 다시 북미 양자 협상을 서둘렀다.
2008년 6월 영변 5MW 원자로 냉각탑 폭파, 10월 테러지원국 해제 등 북핵 협상이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의 6차 회담을 끝으로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김정일이 2008년 8월 스트로크(뇌졸중)를 맞았다. 갑자기 건국기념일(9월 9일) 행사가 취소되었다. 그러자 김정일 사망 관련 예측 보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미국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김정일 사망 후 대책이 얘기됐고, 미국과 한국에서 북한붕괴론이 크게 부각되었다. 학술 세미나,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미국은 협상 판을 걷어 치웠다.
김정일은 ‘유감스럽게도’ 3년이나 더 살았다. 그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를 수차례 방문했고, 핵미사일 소요 첨단 소재와 장비들을 구입했다. 2009년 1월 김정은을 세습 후계자로 내세웠다. 김정일은 3년의 후견 기간을 통해 절대 미국을 믿어서는 안 되고, 핵미사일만이 살 길이라는 점을 확신시켜주고 떠났다. 김정일의 사망이 급변사태나 붕괴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북한 비핵화, 2단계 접근
미국은 본토 침공을 두 번 당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12.7), 2001년의 9․11 테러가 그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언어폭탄으로 미국 시민의 충격은 크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는 사실상 전략적 무대책으로 실패했다. 그렇다고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 예방전쟁(preventive war) 카드를 함부로 휘두를 형편은 못된다.
북미 간 치킨게임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는가? 북한의 협박 자제와 한미연합훈련 축소로 일단 긴장국면을 넘긴다면, 이제 본격적인 협상 모멘텀을 찾아 나서야 한다.
2단계 접근이 가능하다. 1단계는 위기 봉합과 핵·미사일 상황 악화 방지에 초점이 있다. 이는 ‘동결 vs 제재·압박 해제(완화)’의 맞교환이다. 2단계는 장기전망 구도 위에서 ‘핵폐기 vs 평화체제’ 협상틀이 예상된다. 1단계 진입이 쉽지는 않지만, 협상 이외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편집자주 – 이 시론은 8월 25일 접수된 글이라 이후 북핵 위기의 변동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다.

월, 2017/09/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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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5

 

“찌는 듯이 무더운 남방에서는 아귀 같은 미국과 영국을 쳐물리기 위한 싸움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더위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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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반회보 뒷면>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3년 8월 1일, 국민 총력조선연맹에서 발간한 제32호 애국반 회보 다. 애국반 회보는 1941년 9월 인가를 받아 매 월 1일에 발행되던 간행물로 내용은 전시상황 에서 후방은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특히 32호는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에 발행한 것으로 주요 기사의 내용도 여름 철 후방의 전시준비태세에 관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더위에 지지 말고 몸 을 튼튼히 해서 근로보국에 힘씁시다’에서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더 덥게 느껴지니 더위를 잊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며, 전투 중 인 병정들을 생각하면 덥다는 생각조차도 하 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몸이 약하면 더 위에 지게 되니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 으로 ‘신사나 절, 공원을 청소’, ‘개천이나 하수 도, 농촌이나 공장에 근로봉사’, ‘5리쯤 되는 데 는 걸어 다닐 것’ 등을 소개한다. ‘전시살림은 이러케!’에서는 전쟁은 제일선의 병사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 일터, 거리 등 싸움터가 아닌 곳이 없으며 특히 부엌에서 밥 지어 먹는 것도 ‘전쟁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생 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싸움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활전선에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 어나고 지각과 결근하지 말라고 선동한다. 저금은 나라의 힘이며 시중에 돈이 돌지 않게 되면 물 건값도 올라가지 않고 살림살이도 안정되며 결국 이는 집안이 부자가 되는 것이고 곧 나라가 부 자가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각 가정에 강제저축을 독려했다. 또한 옷감을 만들기 위해 쓰는 양잿물을 화약으로 만들면 대포알 630만 발, 총알 17억 7천 8백 만 알이나 되니 각 가정에서는 헌 옷을 고쳐 쓰고, 애국반원끼리 돌려가며 나눠 쓰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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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반회보 앞면>

특히 ‘언제나 전장에 나간 병사와 갓튼 생각으로’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지 말고 ‘미국과 영국식 옷차림을 좋아하는 자는 우리의 원수’라고 지칭하며 전시 물자절약을 ‘전쟁승리’와 ‘애국’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날은 왓다 징병준비는 다되엿슴니까’에서는 곧 실시될 징병제에 대해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감격’으로 칭하며 징병대상자는 호적을 정리하고 국어(일본어)를 배우며, 대상자가 아니더라도 만17세 이상의 남자는 지망하라고 독려하며 조선의 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다 읽으섯거든 뒷면에 있는 그림을 하나식 따로 오려서 눈에 잘 띄이는 곳에 부쳐 두십시요”라는 문구를 따라 회보의 뒷면을 보면 전시생활에서 지켜야 할 일들을 만화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으싸! 결전생활로’라는 구호 아래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음식을 남기지 말며, 무지각 무결근하고, 옷을 기워 입으며, 출장 갈 때는 각반을 준비해 비상시를 대비하고, 옷소매 폭을 줄여 옷감 낭비를 줄이고, 출정 군인 집이나 그 유가족의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애국반’은 전쟁동원을 선전·선동하고 민간인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목적으로 각종 관변기구와 친일단체를 흡수해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기구로 주민 통제와 조선총독부의 정책 홍보, 물자와 노동력동원 등에 활용되었다. ‘애국반 회보’는 바로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시책을 말단 주민조직까지 전달·관철시키는 수단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월, 2017/09/2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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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주둔 일본군대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다보면, 그들만의 기념행사가 정례적으로 벌어진 흔적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관병식(觀兵式)이니 육군기념일(陸軍記念日)이니 하는 행사가 그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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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26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육군시 관병식(1월 8일)’의 모습. 사이토총독의 참석 하에 광화문 앞길에서 거행되었다.

우선 관병식은 천황 앞에서 군대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열병(閱兵)과 분열(分列)을 포함한 일종의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도 해마다 새해가 되면 일정한 날(대개 1월 8일)을 정하여 조선총독과 군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육군시 관병식(陸軍始 觀兵式)’을 개최하며, 자기들 천황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혹은 천장절축일(天長節祝日)에도 빠짐없이 다수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주둔지의 연병장과 도심지 대로에서 성대한 관병식을 거행했다. 드물게는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과 같은 대규모 군사훈련의 말미에 열리는 관병식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26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가상(街上) 관병식의 성관(盛觀), 도창검극(刀槍劍戟) 일광(日光)에 찬연」 제하의 기사에는 광화문 앞길에서 벌어진 관병식의 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오랫동안 적막하고 있던 광화문통(光化門通) 너른 마당도 8일 아침 11시부터 거행된 관병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었다.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간 기회에 조선에서도 관병식을 거리에서 행하는 실례를 보게 된 것이니 정각 전부터 전차와 인마의 교통을 끊자 모여드는 구경꾼과 각 학교 생도들의 단체관람자로 인하여 광화문 앞에서부터 태평통 본사 앞까지 두 길가에서는 사태가 치밀리는 구경꾼과 기마경관 사이에는 쉬지 않는 승강이가 먼저 시작하였던 것이다. 정각이 되매 맑은 하늘 빛나는 일광을 춤추는 듯한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모여드는 보병, 공병, 기병, 포병의 씩씩한 기치, 창검은 오히려 무사의 위풍이 넘치었으며 ‘선린상업’, ‘경성사범’, ‘경성중학’ 등 세 학교의 학생들까지 뒤를 따라 장쾌한 관병식은 눈에 덮인 광화문 넓은 뜰에서 감개 깊은 광화문을 향하여 성대히 열렸었다. 스즈키(鈴木) 군사령관의 검열이 있은 후 뒤를 이어 분열식도 무사히 끝이 나 조선에서 처음으로 거리 위에 관병식은 이로써 종결을 고하였는데 때는 열두 시 십 분이었었다.17

1874년 12월 2일 태정관 포고 제130호에 의해 제정된 ‘육군연대군기(황색 테두리에 자주색 수술을 두른 욱일기)’의 모습. 보병연대는 장방형이고, 기병연대는 정방형인 것이 다르다.

 

다음으로 육군기념일은 러일전쟁 당시 1905년 3월 10일 일본육군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봉천(奉天)을 점령한 날을 기려 제정한 것이다. 이에 상대되는 것으로 해군기념일도 있었는데, 이 역시 1905년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해군의 연합함대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해마다 육군기념일이 되면 이날에 맞춰 거리행진을 포함하여 모의전투시범이나 한강변에서 폭격연습과 같은 행사도 곧잘 벌어지곤 했다.
이것 말고도 일본군대에서 거행되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연례행사의 하나는 군기제(軍旗祭)이다. 군기제란 것은 천황으로부터 연대(聯隊) 단위의 일본군대에만 하사되는 군기, 즉 ‘욱일기(旭日旗, 쿄쿠지츠키)’를 수여받은 날을 기념하는 행사인데, 바꿔 말하면 ‘부대창설기념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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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0월 7일 칙령 제111호 해군기장조례(개정)에 의해 처음 군함기로 채택된 ‘욱일기’의 모습. 이 규정에 따라 일본군함에는 배 앞쪽에 일장기를, 배꼬리에는 군함기(욱일기)를 게양하게 되었다. 해군기(욱일기)는 육군기와는 달리 일장의 중심이 깃대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해군제도연혁>, 1940)

 

일장기 도안를 바탕으로 16가닥의 붉은 아침 햇살이 묘사된 ‘욱일기’의 제정 연혁을 살펴보면, 1870년 5월 15일에 공포된 ‘태정관 포고 제355호 육군국기장(陸軍國旗章) 병(並) 제기장(諸旗章) 병부성(兵部省) 도등막(挑燈幕) 등의 건’이 그 효시이다. 이것이 1874년 12월 2일 ‘태정관 포고 제130호 육군보기포삼병연대군기(陸軍步騎砲三兵聯隊軍旗) 병(並) 보병대대기(步兵大隊旗) 급(及) 동향도기(同嚮導旗)’로 개정되면서 각 연대 단위로 욱일기가 하사되기 시작했는데, 이에 앞서 1874년 1월 23일에는 일본천황이 근위보병 제1연대 및 제2연대를 대상으로 손수 욱일기를 건네는 최초의 군기수여식이 거행된 바 있었다. 이렇게 하사받은 군기는 그 자체가 제국군대의 상징이 되어 목숨을 걸고 지켜야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 적군에게 포위될 때는 불가피하게 이를 소각하는 방식으로 군기가 탈취되는 치욕적인 상황을 모면하기도 하는데, 이런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군기는 재교부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한 번 하사된 군기는 포탄을 맞거나 총알이 관통하여 깃발이 다 떨어지고 헤어진 흔적이 역력하더라도 회수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테두리만 남은 채 기면(旗面)이 완전히 사라진 경우도 흔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전투이력을 지닌 부대 역사 자체가 자기들만의 대단한 명예와 자부심으로 승화하는 연결고리가 되기도 했다.
한편, 욱일기는 육군기에 머물지 않고 해군기로도 사용되었는데, 1889년 10월 7일에 개정된 ‘칙령 제111호 해군기장조례(海軍旗章條例)’에서 처음 그 흔적이 포착된다. 이때의 규정에 따라 일본 군함에는 뱃머리에 일장기 모양의 함수기(艦首旗; 국기와는 ‘일장’의 크기가 다름)를, 배꼬리에 욱일기 모양의 군함기(軍艦旗)를 각각 게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다만, 해군기로 사용된 욱일기는 육군기와는 달리 일장(日章)의 중심이 바람방향을 고려하여 깃대 쪽으로 치우친 모양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욱일기가 일본제국이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빠지지 않고 그 선봉에 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개항 이후 일본공사관의 경비를 명분 삼아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수비대의 선두에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걸쳐 큰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밀려든 일본함정과 기병대의 말머리에도, 그리고 이른바 ‘의병진압작전’을 위해 이 땅에 무단상륙을 감행했던 임시파견부대의 행렬에도 어김없이 욱일기는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조선주둔 일본군의 연대별 군기수여일 현황>20

이러한 상태에서 조선총독부에 의한 식민지배가 개시되고 곧이어 일본군대의 주둔방식이 주차군(駐箚軍) 편제에서 상주군(常駐軍) 형태로 전환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916년 봄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전역에 새로 주둔할 2개 사단 가운데 제19사단(용산)이 먼저 창설되어 신설 7개 연대(보병 제73, 74, 77, 78, 79, 80연대 및 기병 제27연대)에 대한 군기친수식(軍旗親授式)이 1916년 4월 18일 일본 동경 황궁에서 일괄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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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4월 21일 용산역에 도착한 제19사단(신설) 소속 연대기들의 모습. 여기에는 보병 제78연대를 비롯한 5개 신설연대(보병 및 기병)의 군기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사단창설기념호(조선사진화보 특별호)>, 1916년 11월)

 

이들 깃발은 이틀 후 부산항에 도착하고, 대전과 대구에 각각 주둔지역이 설정된 보병 제79연대 및 제80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연대기는 모두 기차편을 통해 용산역으로 이동하였다.<매일신보> 1916년 4월 22일자에 수록된 「신연대기 도착(新聯隊旗 到着)」 제하의 기사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기보(旣報)와 여(如)히 보병 제73, 74, 77, 78의 4연대 및 기병 제27연대의 군기(軍旗) 5류(旒)는 각 기수(旗手)가 봉대(奉戴)하고 예정과 여(如)히 작(昨) 21일 오전 8시 50분 용산역(龍山驛)에 도착하였는데 차전(此前)에 이구치(井口) 군사령관, 다치바나(立花), 하시모토(橋本) 양 사단장 이하 군사령부 제9, 19 양 사단 막료, 장교, 동 상당관, 조선장교, 애국부인회, 정내유지(町內有志), 용산 각학교 생도, 기타 일선관민(日鮮官民) 등 수백 명의 출영이 유(有)하였는데 열차가 정각에 도착하매 역내 승강장에 출영한 이구치 군사령관, 다치바나, 하시모토 양 사단장 및 각요부원(各要部員) 경호 하에 기수가 차(此)를 봉지(奉持)하고 제78연대 군기는 복(覆, 덮개)을 제하고 타(他)는 복(覆)을 시(施)한대로 1개 중대의 병사가 차(此)를 호위하고 나팔의 향(響)으로 대오 정정히 제78연대본부에 입(入)하였고 차(且) 78연대는 양삼일중(兩三日中), 기타의 각 연대는 착대 순차(着隊 順次) 다치바나 사단장이 각대에 출장하여 각각 수여식을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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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압식 도록코에 실려 옮겨지고 있는 함경북도 나남 주둔 보병 제73연대 및 기병 제27연대의 군기 모습. (<사진통신> 19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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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제23부대 지나사변기념사진첩> (1940)에 수록된 용산 주둔 보병 제79연대의 군기 모습. 깃발의 일부가 훼손된 것은 이 부대가 중일전쟁과 같은 침략전쟁에 가담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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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육군대사진첩 (소년구락부 1933년 11월호 부록)>에 수록된 일본군대의 전투장면. 여기에는 어김없이 일본국기인 일장기와 더불어 육군기인 ‘욱일기’의 모습이 함께 등장하는데, 기면(旗面)은 몽땅 사라지고 테두리만 남은 군기의 모습에서 무수한 침략전쟁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직후 5월 1일에는 보병 제78연대의 연병장에서 데라우치 총독의 참석 하에 각 부대에 대한 군기수여식(軍旗授與式)과 더불어 사단개청식(師團開廳式)도 이날 함께 열렸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나 1919년 6월에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으로 옮겨가고 제20사단(용산)이 신설되면서 예하 연대의 소속변경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용산주둔 보병연대의 경우 매년 4월 18일이 군기수여일이기 때문에 군기제(軍旗祭)라는 이름의 부대창설기념행사가 꼬박꼬박 거행되었다. 조선군사령부의 창설기념일(1918년 6월 1일)에도 줄곧 기념식이 벌어지긴 하지만, 그 규모가 훨씬 더 성대하고 다수의 군중이 동원되는 것은 ‘군기제’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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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에 파견된 일본군대에 제공된 군용담배 ‘히카리’의 포갑지 도안이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일본군대의 상징인 ‘욱일(아침햇살)’ 모양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대는 단지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시베리아
출병, 간도침공, 만주사변, 중일전쟁, 장고봉사건을 비롯하여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침략전쟁
에 속속 참전했던 내력을 지녔고, 그때마다 파견부대의 선봉에는 ‘욱일기’가 빠지는 법이 없었
다. 이러한 까닭에 전쟁터를 누빈 ‘욱일기’야말로 영예로운 군기이기는커녕 침략전쟁에 의한
고통과 상처, 그리고 일본제국군대가 행했던 폭압과 만행을 상기시켜주는 ‘전범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월, 2017/09/2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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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일이 다가올수록 이렇게 떠나도 되는 건가? 하는 어색함이 자꾸 밀려왔다. 대안학교 교사로 어디를 가든 여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던 것이 몸에 배어 단체여행 전엔 늘 이것저것 챙길 것들과 인솔교사의 책임감으로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내 여권만 잘 챙겨오면 된다는 말에 여권을 잘 챙겨두고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남았다. 직업병이라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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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낯가림 하는 성격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수십 명이 함께 하는 답사를 덜컥 신청한 것은 일정 중에 난징 위안소 진열관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간디마을학교 봄을찾기 프로젝트 수업 중 아이들과 간마소녀상 봄이를 만들며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 강점기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중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서〉란 제목을 단 답사는 아이들과 나눌 것을 풍성하게 해주리라는 기대가 컸다.
4박 5일 동안 고속열차로도 7시간이나 걸리는 난징과 광저우를 누비며 임정주화대표단본부, 항공열사공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지, 민족혁명당 거점, 난징대학살기념관, 신해혁명기념관, 황포군관학교 등 역사의 현장을 빡빡한 일정으로 다녔다. 이동하는 중간 중간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님의 알찬 설명으로 답사지 한 곳 한 곳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깊이 있는 설명을 들으며 답사지 어느 한 곳도 허투루 지나간 곳이 없지만 내게는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이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봄을찾기 아이들과 다시 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난징 시내의 금싸라기 넓은 땅에 오래된 건물과 수천 점의 많은 자료, 할머니들의 슬리퍼에서 화장품 통 같은 소소한 유물까지도 소중하게 보존해 전시하고 입장료도 없이 유적관을 개방하는 중국정부에 놀라움과 감사함을 느꼈다. 난징 위안소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는데 특히 2006년 돌아가신 박영심 할머니께서 끌려왔던 곳이다. 박영심 할머니 방은 당시 모습으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위안소 입구에는 잘 알려진 할머니의 임신한 사진 모습이 커다란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동상 뒤 외벽 위로 흐르고 있는 눈물이 입구 한 쪽 벽을 가득 메운 흑백사진 속의 한·중 위안부 할머니들의 슬픔을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실제 위안소 현장의 생생한 유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할머니들의 무거운 고통과 아픔에도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툭 터진 시점은 위안부 할머니의 흉상에서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마주했을 때였다. 흉상 아래 준비되어 있던 흰 수건으로 계속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렸지만… 정말로 정말로 그 눈물 다 닦아 드리고 싶었는데… 끝없이 흐르는 할머니의 눈물을 다 닦아 드리지 못하고 아픈 마음을 간직한 채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여러모로 보람 찬 답사였지만 4박 5일 동안 수많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덕분에 나로서는 더욱 뜻깊었다. 사람과 사람의 작은 만남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라고 했던가. 그 옛날 비바람 속에 만주벌판을 달리며, 남의 나라 깊은 산 속에서 독립을 위해 군사 훈련을 하며,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다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답사지를 함께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밤이 깊도록 감흥을 함께 나누었다. 마치 여러 권의 명작 사람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좋은 인연들로 후기를 적고 있는 지금까지도 마음 한편이 따뜻하다. 좋은 인연으로 인해 과거를 이해하러 갔는데 과거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현재를 공감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왔다.
아이들을 위해 떠난 답사에서 내가 더 충만해져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다. 앞으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아픈 우리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리고 행동해야겠다.

• 알차고 보람찬 역사 답사를 기획해 주신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 김제영 간디마을학교 교사

월, 2017/09/2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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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7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7차 자료기증을 했다. 주요자료는
1942년생 황OO가 경기도 강화국민학교, 강화중학교,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경기도농촌진흥
원 등을 거치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8월 2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해협????, ????재일조선인사연구???? 등 소장자료 10점을 기증하였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인
8월 8일, 자택에서 소장자료를 정리하다가 기증자료를 발견하여 <조선신궁연보>(1936), <조선문
학사>(1981) 등 26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26

8월 12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가지고 있는 사노 미찌오 호우센 대학 교수가 「야스쿠니의 집靖國の家」 문패 1점을 기증했다.
8월 12일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이 <구일본군조선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2017) 1권을 기증했다.

27

8월 9일 홍종화 작가가 <혈의 누>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8월 18일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단행본 등 다수의 책을 기증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현재까지 피폭자들의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에 앞장서 온 곽귀훈 회원(경기동부지부)이 8월 21일 <世界>(2016~2017)
총 14권을 기증했다.

8월 25일 김승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民族日報>(1990) 1권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7/09/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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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사실인데요. 친일인명 사전은 물론 널리 알렸으면합니다. 자유한국당 정진석의 조부 정인각에 대한 내용입니다.
정진석 의원님 할아버지가 정인각(창씨개명으로 大谷正雄 오오타니 마사오)씨가 계룡시 면장으로 있으면서 군용물자 조달 및 공출업무, 여론환기 및 국방사상보급 선전업무, 국방헌금 및 애국기(당시 일본기, 욱일승천기(전범기)) 헌납자금 모집업무 등을 적극적으로 일본을 위해 열일 하신 분입니다.

화, 2017/09/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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