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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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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익명 (미확인) | 수, 2018/11/21- 13:51

임시정부 비서장 차리석은 일제가 항복한 지 21일 만에 쓰러져 순국했다. 아내 홍매영과 아들 영조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홍씨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닥칠 위험을 직감하고 아들 영조씨 성을 신씨로 바꿨다.

1942년 봄, 중국 시안에 있던 임시정부(임정) 광복군 훈련소에서 한 젊은 여성이 허드렛일을 도왔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남편을 일제 경찰의 흉탄에 잃은 홍매영이었다. 서른 살 홍매영은 망명 생활을 하던 동암 차리석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차리석은 평양 숭실학교 졸업 후 신민회에 가입했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조작 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9년 평양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임정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 뒤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뒤 일제 탄압으로 임정이 위기에 몰리자, 차리석은 국새와 핵심 서류 등을 가지고 항저우로 피신했다. 그는 항저우에서 흩어졌던 임정 각료들을 불러 모아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이런 활동으로 그는 ‘임정 버팀목’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차리석과 홍매영은 화촉을 밝힌 지 2년 뒤인 1944년 1월17일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조국 광복 소식을 가져다줄 하늘의 축복이라며 아명을 ‘천복’으로 지었고 중국인 작명가에게 부탁해 ‘영조’라는 본명까지 지었다. 임정 요인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던 차영조가 태어난 지 20개월째, 1945년 8월15일 드디어 광복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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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차리석의 아들 영조씨(사진)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며 ‘꿈에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다’고 말했다.ⓒ시사IN 이명익

임정 비서장으로 살림을 맡던 차리석은 환국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임정 27년 역사가 깃든 서류 더미 선별을 하던 차리석은 1945년 9월5일 밤 과로로 쓰러진다. 병원으로 실려간 차리석은 자신이 못 일어나리라는 걸 직감하고 홍매영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젊은 당신한테 큰 짐을 떠안기고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 미안하오. 해방된 나라로 돌아가면 정부건 국민이건 당신과 어린 영조 하나 정도는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죽어도 부디 맘 편히 귀국해 새 삶을 시작하기 바라오.” 나흘 뒤 9월9일 그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국했다. 그는 충칭에 임시 안장됐다. 백범 김구는 동암의 영전에 “귀국 후 정식 정부가 수립되면 반드시 고국으로 모셔가겠다”라고 약속했다.

1945년 11월 부산항을 통해 어머니와 함께 귀국한 차영조는 이제 74세 할아버지가 되었다. 광복 후 그는 어머니 홍매영 여사와 어떻게 살아왔을까? 기자와 만난 차영조씨는 품속에서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어머니 홍매영 여사가 임정 사무실 앞에서 돌이 갓 지난 그를 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옆에는 아버지 차리석과 백범이 지켜보고 있었다.

충칭에서 귀국한 임정 인사들에 대한 미군정 당국의 대우는 한마디로 철저한 무시였다. 부산항을 통해 입국한 뒤 어머니와 차영조가 머문 곳은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미호텔이었다. 정부 수립 전이라 백범이 미군정과 협상 끝에 우선 일제 적산가옥이었던 한미호텔을 받아내 귀국한 임정 가족의 임시 거처로 삼았다. “생계 대책이 막막하니 어머니가 한미호텔 1층에 양담배 좌판을 깔고 미군 양담배 장사를 했어. 미군정 경찰 단속이 심했지. 어린 나는 좌판 곁에서 놀다가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좌판을 걷어차면 어머니랑 거리를 기어 다니며 흩어진 양담배를 주웠던 일이 아직도 생생해.” 어머니는 수시로 중부 경찰서에 붙들려가서 조사받았다.

해방된 조국은 더 이상 아버지가 유언하던 ‘꿈에 그리던 조국’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친일파들이 득세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치한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파의 공격을 받았다. 어머니는 어린 차영조에게 “고국에 돌아왔어도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와중에도 백범은 충칭에서 순국한 동암 차리석의 영전에서 한 약속을 앞당겨 이행할 결심을 한다. 이를 위해 백범은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했다. “백범이 1948년 5월에 남북 협상하러 평양에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자마자 아들 김신에게 ‘중국에 들어가서 석오 이동녕 선생과 동암 차리석 선생 두 분 유해도 모셔오라’고 명하셨지. 1948년 9월 아버지 유해가 이동녕 선생 유해와 함께 돌아왔고, 백범 선생 주도로 사회장 장례식이 거행됐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조의금 1만원을 냈더라. 백범은 무직인데 2만원, 친일파 거부 박흥식이 3만원을 냈고.” 당시 아버지 장례식장 연단에 오른 백범은 이렇게 추모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가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했다. 탁월한 사무처리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은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 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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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9월12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차리석 선생 장례식 사진ⓒ시사IN 이명익

동암을 효창공원에 모신 백범은 1년 뒤인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백범도 1년 만에 이곳에 안장됐다. 김구 선생마저 암살당하자 어머니 홍매영 여사는 충격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이유로 어린 아들에게 닥칠지도 모를 위험을 직감했다. “백범이 암살당하고, 의열단 김원봉 선생이 악질 일제 고등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나와 격분해 월북하신 것을 본 어머니는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하셨지. 6·25 전쟁이 나자 피란을 간 부여에서 내 성을 차씨가 아니라 신씨로 바꿔서 학교에 넣으셨어. 차씨의 한자 위아래 획을 하나씩 떼버리면 신씨가 돼.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은 나를 신영조라고 불러.”

피란지 충남 부여에서 차영조의 삶은 신산했다. 6학년 때 어머니가 행상을 하다 중풍으로 쓰러졌다. 어린 영조는 학업을 그만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일했다. 부여에서 여관과 식당 등을 전전하며 허드렛일을 하고, 오일장이 서면 국밥 배달 일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어. 왜 독립운동을 하셔서 가족을 이리 고생시키냐고.”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때는 광복 후 17년이나 지난 1962년이었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통성이 약하니까 고심했겠지. 독립유공자를 일부 인정해주기 시작한 거야.” 이때부터 모자에게 정부 지원금이 나왔다. “하루 세끼 챙겨 먹을 정도”의 적은 돈이었다. 곧은 성품으로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던 어머니 홍매영 여사도 어린 영조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고생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남편의 옛 동지를 찾아 나섰다. 외면하는 이도 있었지만, 도움을 주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독립운동가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이었다. 임정 법무부장을 역임한 최동오는 만주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화성의숙 숙장을 맡아 활동했다(이때 김일성은 6개월간 이곳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최덕신은 이승만 정권 시절 군에 있다가 박정희 정부 초기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순화동에 있는 외무부 장관 공관을 찾아가 차리석 아들이 왔다고 했더니 안에서 최덕신 장관의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죽었던 놈이 살아서 나타나다니’라며 기쁘게 반겨주셨어. 이분은 임정 시절에 내가 태어난 사연을 알고 계셨거든. 중풍 걸린 어머니 소식을 듣고는 차비를 두둑이 주시며 곧바로 부여에 내려가 모셔오라고 했어.” 이때부터 차영조는 어머니와 함께 외무부 장관 공관의 부속실에 들어가 생활했다. 최덕신 장관의 어머니뿐 아니라 부인 류미영 여사도 차영조 모자를 챙겨주었다. 우선 차영조를 야간 고등공민학교에 넣어주었다. 차영조는 낮에는 공관 청소 등을 돕는 한편 저녁에는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최덕신 장관은 퇴임해서 사저로 돌아갈 때도 차영조 모자와 함께했다. 차영조가 2년제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자 최 전 장관은 상업고등학교에 편입시켜주었다. “그 학교 교장선생님 집이 최 장관 바로 윗집인데, 하루는 교장선생 집을 찾아가 ‘내 아들인데 나이가 좀 많지만 공부를 시키고 싶다’며 설득해 중간에 편입시켜주셨어. 그리고 바로 독일 대사로 나가셨지.”

최덕신은 1963년 9월 외무부 장관을 그만둔 뒤 서독 주재 대사로 부임했다(최덕신은 동백림 사건 이후 서독 대사에서 물러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눈 밖에 났고 미국으로 떠났다. 최덕신·류미영 부부는 1986년 자진 월북했다). 최 전 장관이 서독 대사로 간 뒤에도 그의 자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차영조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한국전력(한전) 검침원으로 취업했다. “당시 한전 박영준 사장의 부친이 내 아버지와 임정 동지였어. 최덕신 장관 어머니가 얘기를 넣어줘서 박영준 사장을 찾아갔더니 인사부장을 불러 바로 검침원으로 채용해주셨지.”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예우인가’

10년 동안 검침원 생활을 하던 차영조는 추석날 아버지 성묘하러 효창공원에 들렀다가 아버지와 함께 묻힌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 당시 대우그룹 부회장을 만났다. 이석희 부회장은 그의 근황을 묻더니 대우그룹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그렇게 대우 가서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 나가 10년간 일했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대개 어렵게 살고, 나도 어린 시절 어렵게 컸지만 돌아보면 난 아버지 영광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 한전 검침원도 그 인맥으로 갔고, 대우로 간 것도 다 아버지 덕분이었으니까.”

그가 대우에 입사해 중동에 나가 있던 1979년 어머니 홍매영 여사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얼마나 강직하신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가시는 날까지 손수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해결하셨어.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한 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김구 선생의 권유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셨는데, 아직도 어머니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다는 게 자식으로서 한이야.”

그는 임정 수립 99주년이던 지난 4월13일 효창공원 순국선열 묘역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대접을 받았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효창공원 묘역에서 열린 그날 기념식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해 후손과 동행하자고 했지. 아버지 묘소 앞에서 헌화 분양하는 국무총리 뒤에 서 있다가 ‘이게 얼마 만에 받는 예우인가’ 생각했더니 감정이 거대하게 물결치더라고.”

그는 10월1일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는 운동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다. 대한민국의 뿌리인 임정에서 국군의 뿌리를 찾지 않으면 일본군이 우리 군의 뿌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육사)의 뿌리가 되어야지. 그래서 이번에 육사에서 신흥무관학교 107주년 기념식을 열고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이회영 선생 흉상을 세웠어요. 육사 생도대장이 건배사 한마디 해달라고 해서 ‘금년부터 졸업하는 생도는 임정에 뿌리 둔 광복군, 독립군의 후예로 졸업하니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했지. 육사 생도가 이제부터는 독립군이 뿌리라는 얘기에 이의 제기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더라고.”

정희상 기자 [email protected].k

<2018-11-21> 시사IN
☞기사원문: “독립운동 집안 숨기려 성을 바꿔 살았다”

※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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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북한군 전시작전 진입
– 북한 잠수함 총출동 징후 포착. 북한의 스텔스 고속정이 서해에서 지속적인 활동이 포착되고 있다. 최근 북한의 동향을 살펴보면 고속정 활동과 동시에 잠수함 운영을 하는 것이 기본 작전의 형태로 파악된다. 괌 타격의 시각, 위치 등을 공개했던 지난 시기 내용을 고려해보면, 타격 성공률이 높은 SLBM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목, 2017/09/0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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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남산 예장자락 통감관저터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국치의 현장을 함께 걷는 역사탐방행사가 열리고 있다. 경술국치의 아픈 역사를 담은 남산길 1.7km 구간은 국권 상실의 현장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뜻으로 ‘국치길’로 이름 붙여져 내년 8월 개방된다. (연합)

최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길 조성과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 현장을 걸으며 역사 의식을 고취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 등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이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7일 서울시에 따르면 오는 2018년 8월 일제강점기 국권 침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울 남산 예장자락 1.7㎞ 구간이 ‘국치길’로 조성될 계획이다.

남산 예장자락은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 강제병탄 조약에 조인한 한국통감관저와 1921년 의열단 단원 김익상이 폭탄을 투척한 조선총독부청사 등이 자리했던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들어서 100년 가까이 시민들이 다가갈 수 없는 곳으로 남아 있었다.

서울시는 국치길의 역사적 의미를 더하기 위해 국세청 별관 건물 철거과정에서 나온 일제 조선총독부 산하 체신사업회관 건물지의 폐 콘크리트 기둥을 사용해 길의 기점마다 표지석을 세울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덕수궁길에서 정동길로 연결되는 ‘고종의 길(왕의 길)’ 복원 계획을 내놨다. 이 길은 올해 말까지 공사가 완료될 예정이다.

고종의 길의 복원을 위해 문화재청은 미국과의 협의에 따라 미국 대사관저와 덕수궁 선원전 부지 사이에 길이 110m, 폭 3m의 담장을 만든다. 문화재청은 복원될 고종의 길이 을미사변 이후 1896년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이동한 길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60여년 간 공개되지 않았던 덕수궁 돌담길 100m가 공개되기도 했다. 1959년 영국대사관이 점유하면서 철문으로 막혀있던 이 곳은 고종과 순종 임금이 제례의식을 행할 때 이용하던 길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서울시는 덕수궁 돌담길 100m를 시민들에게 개방하기 위해 지난 2014년 10월 영국 대사관에 ‘덕수궁 돌담길 회복 프로젝트’ 공동 추진을 제안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역사적 의미가 담긴 길의 공개는 역사의식 고취라는 긍정적 평가도 나오지만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평범한 산책길에 역사성을 뚜렷하게 부각했기 때문에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는 효과적이다”면서도 “접근 방법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고종의 길이나, 국치길 등 길을 명명할 때 모호하게 뭉뚱그리기보다는 정확한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실을 일반인들에게 전달해야 길의 의미가 더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조언했다.

최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2017-09-07> 브릿지경제

☞기사원문: 2% 부족한 서울시 ‘역사 바로 알기 사업’

목, 2017/09/0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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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노린가  무서바서  우찌살건노?

방센밀리가이꼬

안들쟁이는 친정보내도라꼬  쫄라대제..

대묵은 끄떡끄떡 다가오고,

책값   “친일인명사전” 도  밀려이꼬 , 희비도  민미린지  알수도  엄꼬?

쌤형교수님을  담뽀로  구입한  다이아스타루비보다  소중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문학론

시워래 상경  예정이오니, 쌤형교주님   똥술  한박끄럭  하입시더…  아남동이나 신초이나….

몬난제자후배동상          마산 오동동S호영드림.

 

금, 2017/09/08-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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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자의 의견 중 발췌한 것입니다

Putin has suddenly realized that negotiations are not an option.
So we invade or sit on our hands and hope for the best.
An invasion would ONLY work with China and Russia.
The USA cannot invade North Korea with China opposed.

북한 접수는 러시아 나 중국 이 동조할때만 성공할 것이며
미국은 중국의 승인없이는 결코 북을 접수할수 없다.

…..

어제, 그제
중국에서 사설에 북한 접수 주장이 2 건이나 올라왔는데
드디어 미국 본토에서
세계적 권위자의 의견으로 북한접수 의견이 나왔습니다

두려운 시점입니다. 나름의 대책을 준비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금, 2017/09/0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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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자의 의견입니다

Putin has suddenly realized that negotiations are not an option.
So we invade or sit on our hands and hope for the best.
An invasion would ONLY work with China and Russia.
The USA cannot invade North Korea with China opposed.

북한 접수는 러시아 나 중국 이 동조할때만 성공할 것이며
미국은 중국의 승인없이는 결코 북을 접수할수 없다.

…..

어제, 그제
중국에서 사설에 북한접수 주장이 2 건이  올라왔는데
드디어 미국 본토에서
세계적 권위자의 의견으로 북한접수 의견이 나왔습니다.

두려운 시점입니다.

금, 2017/09/0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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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핵실험수는 1000번이상  북한의 핵실험수는 6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많은 제나라의 핵무기부터 없애치우고 주둥이를 나불거려라

 

도적이 매를 드는격으로 일본에 핵폭탄을 터트려 죄없는 민간인들을 죽여버린 미쿡놈들이 제켠에서 제재를 떠드니 미국부터 제재함이 마땅하도다

토, 2017/09/0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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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후원금 출금동의 관련 전화하셨을때 못받은것같은데
그 이후로 전화가 안와요ㅎㅎ
다시 전화한번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수고하십니당!

일, 2017/09/1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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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09/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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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13화 1부 – “뉴라이트 역사 쿠데타 7편 – 박정희 신화의 허구 ④”

팟빵 링크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7/09/1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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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역적 여름특집3] 북 콘서트 ‘항일음악 330곡집’ 2부 – ③

출연 : MC 노기환, 박한용

이야기 손님 :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작곡가 노관우

노래손님 : 가수 이소연, 김성헌

화, 2017/09/1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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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09/1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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