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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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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09

[인터뷰]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관공리・유력자>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부부 회원이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 아내와 함께 회원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입니다. 저와 아내, 작은딸(대학교 3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모금에도 참여했는데 남에게 강요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큰딸(대학교 4년)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아마 큰딸도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치와 역사박물관 설립취지에 동감한다면 조만간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 : 연구소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답 : 1992년부터 자료 조사 때문에 연구소에 가끔 연락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93년 경희대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봉우 소장을 비롯해 상근자 서너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기록한 1만3천여 장의 친일파 행적을 손수 기록한 인명카드를 비롯해 총독부 관보와 일제시기 신문 영인본 등 소장 자료를 그때 처음 보고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상근자들이 직접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했습니다. 비록 차린 것이 많지 않았지만 고등어찌개는 정말 맛있었고 서로 간의 정이 느껴지는 정겨웠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연구소 사람들은 풍찬노숙하며 역사전쟁을 주도하는 전사들이었고 한솥밥을 먹는 한식구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렵긴 했지만 일심동체라는 동지적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문 : 2000년 『명석면사』 출간 보도를 보고 지역사 연구의 획기적인 성과란 걸 직감했습니다.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 때여서 지역 친일파 연구에 천착하던 김경현 회원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석면사』는 어떻게 해서 집필하게 되었습니까?

답 : 1987년 6월항쟁 이후 1988년 민주화 이행기가 도래하면서 국민주주모금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진주시민사회에서도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에 대항하는 지역신문 창간을 서둘렀습니다. 1991년 진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시민주주로 <진주신문>을 창간했는데(이 신문은 2009년 등록이 말소될 때까지 18년간 진주지역의 참언론으로 역할했음), 이때 <진주신문> 발행인이던 시인 박노정 선생의 배려로 대학 졸업반인 4학년 때 수습기자로 입사했습니다. 나름 민완 기자로서 취재 업무에 재미를 느껴갈 무렵 1997년 IMF사태(국제구제금융신청)가 터져 신문사가 폐업 위기에 놓였습니다. 저는 남아있는 신문사 후배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퇴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때마침 그때 저는 1998년 진주문화원에서 <진주이야기 100선>이란 책을 냈는데 그 책을본 당시 진주시의회 손태기 의원이 자신의 선거구였던 명석면의 역사책 집필을 의뢰해 왔습니다. 저는 단순한 지리지나 ‘내고장 전통’류 같은 ‘면지’가 아닌 면단위 역사책인 ‘면사’를 집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손의원이 이에 동의하자 저도 흔쾌히 집필에 찬성했습니다.
<명석면사>를 집필하기 위해 문헌조사와 병행하여 많은 면민들을 탐방하고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과 강제징용, 해방직후 좌우대립, 6.25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팩트’와 저널리즘 시각에서 면사를 집필했습니다. 원고를 탈고한 후 편찬위원회에 보이니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좌우대립시 누가 누굴 죽인 것까지 공동체 촌락에서 매우 민감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져 있었고 일제 면협의원과 면직원, 경방단, 순사, 각종 친일부역자와 우익청년단, 남로당원 및 빨치산까지 다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편찬위원회에서는 문제 인사들의 이름을 복표(□□)로 처리하고 민감한 내용을 줄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저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습니다. 진주에는 3대 토착성씨가 있었는데 진양 하씨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과거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낸 하순봉 의원이 바로 진양 하씨로 진주 출신입니다. 하씨 문중에서 문제를 삼은 것은 명석면 출신의 하판락입니다. 하판락은 경남에서 유명한 악질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하여 반민특위에 기소된 인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실렸고나중에국가기구에서도 하판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친일파 중의 친일파를 하씨 문중에서는 완전히 빼지 않으면 <명석면사>를 출간할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하판락이 고등계 형사를 지냈지만 해방 후 면민들에게 취직 알선 등 좋은 일도 했다면서, 면사가 면민의 화합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오히려 면민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며 반대 이유를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저로서는 면사에서 하판락을 제외한다면 집필을 포기하겠다고 강조하며 편찬위원회에 사표까지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명석면사>에는 미관말직이라도 일제의 관공리라면 학교소사까지 조사해 실었는데 정작 고등계 형사를 뺀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주위 인사들이 <명석면사> 출간의 역사적의미를 생각해 하판락의 이력을 빼더라도 면사를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력히 조언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하판락의 이력과 관련된 내용을 모두 지웠는데 인쇄 직전에 하판락의 친일 경력이 하씨 문중의 요구에 의해 빠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을 넣으므로써 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즉 삭제된 부분에 괄호를 치고 “(반민특위에 체포된 명석면 관련인물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추진위의 결정에 따라 전체내용을 모두 삭제함)”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문 : 친일파의 변명•변호 논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군요. 김경현 회원은 위암 장지연 명예훼손사건 등 몇 차례 필화사건으로 소송을 겪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첫 번째 소송은 <진주신문> 기자로 있을 때 토호세력과 벌어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입니다. 1993년 남강댐 보강공사와 관련한 수몰지역 측량비리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 비리에 경남 사천군의원(이 자는 후에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자 사천시의회 의장까지 지냄)이 연루되었음을 폭로한 것입니다.
이때 박노정 시인이 <진주신문> 발행인이라는 이유로 사천군의원으로부터 저와 함께 고소를 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진주지검에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검찰은 죄질이 불량하다고 하며 취재기자와 발행인에게 각각 징역 3년을 구형했고, 1심(진주지원) 재판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는데 창원지방법원에서 진행된 2심에서는 취재의 정당성과 보도의 공익성을 어느정도 인정하여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벌금형도 용납할 수 없어 단돈 10원도 낼 수 없다고 하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기 위해 혼자 서울에 올라왔는데 덕수궁 뒤쪽 일제 때의 고등법원 건물(현 서울시립미술관)이 당시 대법원 청사여서 그곳에다 접수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소송의 결과가 앞으로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생각하니 까닭모를 서글품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법원에서 원심이 파기되었고, 창원지법에 되돌아온 환송재판에서 저와 발행인은 무죄를 최종적으로 판결받았습니다.
두 번째 소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을때 일어났지요. 장지연사건의 발단은 <경향신문>이 2005년 3월 연구소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의 출간소식을 전하면서, 저자인 제가 그 인명록에서 장지연의 명백한 친일 행적을 밝혀냈다고 보도한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고 장지연 후손이 저한테 ‘허위사실유포’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청량리경찰서(지금의 서울 동대문경찰서)의 출두일인 2005년 6월 10일자에 맞춰 <경남도민일보>에 ‘신(新)시일야방성대곡’이란 칼럼을 발표하고, 장지연의 친일행적을 비꼬면서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는 속았다. 우리 4천만 겨레여, 친일의 망령으로 노예된 겨레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왕검 이래 5천년 가까운 민족정신이 위암 선생의 친일의혹으로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진상규명으로 민족정기를 다시 회복할 것인가. 정말 원통하지만 상징 조작된 위암 선생을 단상에서 끌어내리고 진정한 항일언론인 상을 다시 세우자. 겨레여! 겨레여!”라고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청량리경찰서에는 당시 방학진 사무국장(현 기획실장)과 함께 출두했습니다. 방 사무국장은 조사담당경찰관에게 실실 웃으면서 저를 가리키며 조사할 때 때리지 말라고 거듭 말했는데 조서를 작성하던 그 경사가 황당해 하며 방국장을 황급히 밖으로 내보냈던 해프닝이 기억납니다. 담당경찰은 친일 행위가 사실이라더라도 이를 언론매체를 통해 공포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그렇다면 장지연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국민이 받게 된 명예훼손은 누가 보상하는가”라고 주장하며, 입증자료로 <경남일보> 주필 당시 메이지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신문사의 천장절 기념행사 관련 기사를 비롯해 하세가와 총독 부임 때 장지연이 이를 축하하며 <매일신보>에 발표한 한시 등 1차 사료와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관련 연구 성과물을 제출했습니다. 그해 11월 서울 북부지검으로부터 장지연 명예훼손에 대한 혐의가 없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제게 제기되었던 필화사건으로 첫 번째 소송은 무죄로 끝났고 두 번째 소송은 무혐의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앞으로 제 생애에 소송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보니 제가 직업적으로 소송을 수행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문 : 소송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듣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일제강점기 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를 저술하여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가 되셨습니다. 출간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임종국상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진주인명록>은 <명석면사>를 집필할 때 조사된 지역의 인물들을확인하기위한용도로 처음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제시기를 중심으로 진주지역에서 활동한 관공리와 유력자 3,400여 명의 인적사항을 모아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진주지역 친일파인명록’으로 이름을 붙였으나 출간하는 과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언을 좇아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 제목을 바꾸었습니다.사실일제의관공리나식민지배의 유력자로 행세했다고 모두 친일파라고 규정할 수 없는 현실도 작용했습니다. 이 책에는 학교 소사까지 다 들어가 있었거든요.
또 제목에 ‘인명록Ⅰ’이라고 로마자를 붙인 것은 <진주인명록>과 같은 지역 인명록이 계속 발간되기를 지역연구자들에게 촉구하는 의미에서 붙였지만 이후 유사한 작업성과가 나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작업을 한기억만 남아있는데, 마지막 교열작업 때는 아예 서울로 와서 2004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청량리에 있던 연구소 인근의 떡전사거리 근처에서 2개월 가량 여관에 묵으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지금 저와 인터뷰하는 조세열 상임이사님과 이를 녹취하는 박광종 선생님 등 연구소 식구들과 함께 밤이 깊도록 친일청산을 토론했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연구소 초창기에 임종국 선생의 인명카드를 보고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명석면사>와 <진주인명록>을쓰 는데 큰힘이되었습니다.사실 제가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가 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너무나 과분한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5월 대통령 소속 국가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족되자 그해 7월에 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임종국상을 수상함으로써 반민규명위에서 대단한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친일인물에 대한 조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임종국상을 받은지도 벌써 13년이나 흘렀는데도 여전히 이 상의 취지에 맞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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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부터 윤경로(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전기호(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장), 이기형(시인), 임정택(임종국선생 자제), 정병화(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 김시업(심산사상연구회장), 박중기(4·9통일평화재단 이사), 이건(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앞줄 왼쪽부터 김영만(열린사회희망연대 의장, 사회운동부문 수상자), 정길화(MBC방송 PD, 언론부문 수상자), 김경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팀장, 학술부문 수상자), 조문기(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이이화(임종국상 심사위원), 이만열(임종국상 심사위원장), 주섭일(임종국상 심사위원), 함세웅(임종국상 심사위원)

 

문 : 연구소에서도 제1회 임종국상 시상이라 수상자 선정에 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김경현 회원을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진주인명록』이 지역 연구의 모범이 되고 신진 연구자의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반민규명위에서 친일진상규명조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곳에서의 활동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당시 반민규명위는 60년 만에 부활한 ‘반민특위’라고 하여 사회 각계에서 반민규명위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연구자들이 강만길 초대 위원장을 중심으로 민족사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성심성의껏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진상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위원회가 활동을 마칠 때까지 총 1,006명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했습니다.
제가 맡은 분야는 경찰, 밀정이었습니다. 사법기관이 작성하는 조서처럼 증거주의와 문서주의에 입각하여 일제 문헌자료와 당시 발행된 신문・잡지 등을 뒤져 친일행적을 입증했으며. 계급이 낮더라도 항일독립운동가를 체포・살상한 고등계 형사 및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이 큰 사건에 관여했다면 가장 낮은 계급의 순사보나 헌병보조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를테면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학살에 적극 관여한 조희창이란 순사보의 경우 일본에 출장가 공문서관에서 찾은 것이 이력서 한 장밖에 없어서 구체적인 행위를 입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제암리 학살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유력한 증거로 채택함으로써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반민규명위 활동 당시 관련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가 미비했고 한정된 조사 기간 등으로 인해 미진한 부분이 많아 친일 진상 조사가 완전히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친일 경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제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문 : 그 각오가 엄중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반민규명위가 해산되고 행정안전부에 남아 위원회의 송무업무를 맡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에 보고서 보유편 발간으로 위원회 업무는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그간 수십 차례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소송에서 2차례의 부분 패소 외에는 전승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특히 홍난파, 이해승, 김성수, 방응모 등 지난한 상대와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는데 그 당시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위원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6개월 만에 끝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사람의 유족들이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송은 주로 위원회 말기인 2009년부터 쏟아졌지만 이미 중추원 참의 조진태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 이재면과 그 아들 이준용, 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고손 이해승 등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고, 나아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음악가 홍난파, 총독부 판사 김세완 등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취소 소송도 잇따라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시 위원회는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몰려오는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2대 위원장이던 성대경 위원장이 각 부서 팀장을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법무팀을 따로 구성할 시간도 인력도 어려워 소송수행은 각 조사팀장이 담당한 분야에서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위원회 말기에 조사3팀장을 맡고 있던 제가 조사3팀에서 결정한 기타단체의 이재면・이준용과 경제의 조진태・김연수 등에 대해 소송을 직접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위원회가 종료된 후 청산절차가 진행되는 3개월 동안에도 소송수행자가 계속 필요했습니다. 특히 홍난파사건을 심리하던 법원이 유족의 효력정지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홍난파가 반민규명위 보고서 인쇄중에 빠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상황이었고, 또한 윤보선 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 중추원 참의에 대한 친일결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도 들어오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원회 사무처의 요청으로 저는 위원회 청산기간에 다른 조사팀의 소송과 헌법소송까지 모두 맡게 되었고, 청산기간이 끝난 후 소송이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자 저도 역시 행안부로 넘어가 지금까지 전문위원으로 근무하며 계속 소송업무를 전담해 왔던 것입니다.
위원회가 해산되고 소송이 행안부로 넘어갈 무렵, 그때까지 제기된 친일 관련 소송은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용직으로 있으면서 준비서면만 써주고 공무원이 아니어서 변론석에 앉지 못하고 방청석에 앉아 메모만 받아적다가 나중에는 법정에서 직접 변론하기 위해 계약직 전문위원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어쩌다가 공무원이 되었다는 ‘어공’이 된 셈이죠. 그런데 한때 제가 일용직으로 있다는 말을 들은 위원회의 한 지인이 ‘연구자 망신 그만시키고 당장 그만 두라’고 하는 등 핀잔도 들었으나 4년여 동안 위원회가 거둔 성과를 무산시켜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으로 그 일을 다시 맡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정소송 23건과 헌법소송 6건(이중 1건은 위헌법률심판제청) 등 총 29건의 소송업무를 진행했습니다. 소송 당사자의 면면을 보면 이들이 한국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귀족회장 이해승,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금융계 현준호, 음악계 홍난파, 문학계 김동인 등입니다.
이중에 이해승 사건은 2009년 취소소송이 제기된 이래 2010년 1심에서 쌍방간에 일부 패소해 각기 항소했고 2014년 2심에서 우리쪽이 승소하자 상대방의 상고로 2016년 3심이 선고되었는데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우리가 최종 승소했습니다. 이해승 사건은 확정종결될 때까지 7년여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해승의 친일재산과 관련된 송사가 법무부와 국가보훈처에서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한 소송이 행안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심지어 행정소송을 넘어 소유권이전이나 부당이득 반환청구 등 민사소송까지 진행되면서 국가와 후손간에 법리다툼과 입증공방이 한층 더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특히 이해승 후손이 법원(당시 재판장 박병대)의 법률해석에 따라 친일의 대가가 없다는 이유로 시가 3백억원대의 친일재산을 되찾아가는 일이 일어나자 사회적 공분에 휩싸이면서 국회가 관련 특별법을 개정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친일재산조사법과 반민규명법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인해 관련 사건진행이 장기간 표류했는데, 이해승 사건을 진행하는 각 심급 법원은 ‘한일합병의 공’을 삭제한 개정된 법률조항에 대한 위헌시비를 가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날 때까지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이해승 관련 소송은 모두 국가승소로 귀결되었고 개정법률 이후 진행된 친일재산 관련 소송도 모두 승소해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성수와 방응모 사건의 경우도 이해승 못지않게 장시간 끌었던 지난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거대 메이저언론사의 설립자나 사주였던 관계로 이들의 변론은 막강한 변호인단으로부터 조력을 받았는데 저는 변호사 선임없이 오직 혼자 법정에서 항변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김성수와 방응모측의 변호인들은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입증하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등에 대해 총독부기관지 또는 일본측 신문이란 점을 들어 조작・날조・왜곡・도용되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제기했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제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은 학계뿐이 없었습니다. 특히 친일문제에 있어 독보적인 자료와 연구성과를 갖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쁜 연구소의 연구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 같아 지금도 송구합니다. 이때 소송을 진행하면서 법원에 낼 준비서면이나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의견서에 대한 법률적 자문은 위원회의 율사출신 위원이던 박연철 변호사를 비롯해 연구소의 고문변호사였던 이민석 변호사와 제 사건을 지휘하는 서울고검의 공익법무관 및 정부법무공단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밖에 개별사건과 관련해 위원회에서 조서를 썼던 조사관들과 위원회 안팎의 여러 선생님들의 지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은 김성수와 방응모 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문 : 김성수와 방응모 관련 소송에서 부분 패소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유효한 것이죠

답 : 네. 그렇습니다. 김성수의 경우 학병・지원병・징병・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고, 일본제국주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국민정동연맹 및 국민총력연맹 등) 간부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것은 인정되었으나 사회・문화 기관 및 단체를 통해 일제의 내선융화나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했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방응모의 경우는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게재하여 전쟁을 선전・선동한 점만 인정되고 일제에 군수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감사를 지내고 조선총독부 외곽단체 간부로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받지 못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패소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패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친일행적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판결이 아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위는 위원회의 결정대로 친일반민족행위로 유지된 것입니다.

문 : 방응모의 경우는 1심, 2심, 3심 판결이 다 달랐는데 특히 한 가지 법호만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가장 미약했습니다.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뒷거래가 연일 폭로되고 있는데 〈조선일보〉와의 유착관계도 혐의가 짙어 보입니다. 대법원의 부분 패소 결정도 ‘상고법원 설치’와 관련하여 은밀한 거래가 있었지 않나 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반민규명위 소송의 마무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답 :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가 요즘 불거지면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조선일보〉가 사주 방응모에게 적용된 친일행위결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법원과 뒷거래한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응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파기환송으로 귀결되고 환송된 고법에서 일부 행위에 대한 판결이 달라졌지만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은 방응모가 저지른 행위를 모두 친일반민족행위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엄연히 역사와 증거가 살아있는한 어떠한 사법농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응모와 김성수는 가장 논란이 많았고 그 때문에 재판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달라진 점도 있었으나 이들의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가 분명하다고 인정되었으며, 다른 사건들도 모두 위원회의 결정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6건의 헌법소송은 모두 반민규명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났는데, 올해 마지막으로 있었던 이해승과 관련한 헌법소송은 개정된 반민규명법의 법률조항도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끝나면서 반민규명위 소송은 행정소송이든 헌법소송이든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친일반민족행위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번에 그 결과를 정리했는데 방응모와 김성수에 대한 각 심급 판결문을 비롯해 법원의 효력정지결정으로 보고서에 등재되지 못한 홍난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서를 다시 실은 보고서 보유편을 발간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으로 일부 변경된 부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끝으로 위원회가 남긴 마지막 업무와 후속조치를 마무리지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문 : 김경현 회원은 29건의 반민규명위 관련 소송에서 전승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치하 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108주년 국치일인 8월 29일 개관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관련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저는 연구소 초창기부터 관계했기 때문에 연구소 안팎의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현재의 연구소가 정말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했고 조직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연구소 초창기에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하는 사람들 간에 억척스러움과 아울러 정겨움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성과를 거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소가 초창기의 열정과 현재의 시스템을 잘 엮어 운영하고자 한다면 ‘임종국정신’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임종국선생이 없는 연구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요. 모든 일에 있어서 진실은 빛을 드러낸다는 운명의 힘을 믿고 그 운명을 엮는 사람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 나간다면 시스템도 조직도 사람도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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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국회에서는 침략신사 야스쿠니 문제를 보편적인 국제인권의 시점에서 조명하고 UN인권기구에 이 문제의 해결을 호소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같은 주제로 201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번 행사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와 강창일 의원이 주최하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연구소가 주관하였으며 동북아역사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김민철 책임연구원의 사회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이희자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공동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한국과 일본의 시민연대를 통해 노력해 온 전문가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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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은 ‘아베 정권과 메이지유신 150년 그리고 야스쿠니’라는 발표를 통해 메이지 유신 150년을 앞두고 아베 정권이 시도하고 있는 ‘메이지 영광의 부활 프로젝트’의 본질을 파헤치고, 이것의 극복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과제에 대해 발표하였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 근현대연구실장은 ‘한국의 시점에서 본 메이지 150년과 야스쿠니신사 문제’라는 제목으로 메이지 시대가 한국사회에 갖는 의미, 야스쿠니신사가 기억하는 메이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고 야스쿠니신사의 기억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연대를 호소하였다.
야스쿠니 소송 담당 변호인으로 한국 원고들과 함께 오랫동안 야스쿠니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워 온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아사노 후미오(浅野文生) 변호사는 야스쿠니 소송의 국내외적 의의와 소송의 현황과 쟁점 그리고 전망에 대해 발표하였다.

마지막으로 백가윤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는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오랫동안 UN인권기구의 국제회의에 참여하며 얻은 경험을 소개하면서 야스쿠니 문제를 UN인권기구에 제기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언을 발표하였다.
종합토론에서는 조시현 연구위원의 소송 전략에 대한 제안과 향후 이 문제의 구체화를 위한 실천적인 방법 등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번 회의에는 야스쿠니에 가족이 합사되어 있는 한국 유족을 비롯하여 연구자, 변호사, 활동가 등 50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는 침략신사 야스쿠니 문제의 본질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소중한 자리였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목, 2017/11/16- 15:35
17
0

어느 집단이 이나라에 더 해로운가요??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목, 2017/11/16- 20:12
121
0

식민지 비망록 30

<매일신보> 1937년 6월 22일자의 지면에는 임사일(林士一)이라는 사람이 기고한 연재물 「창의문 밖의 기억」 첫 회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그 다음달 7월 2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분할 연재되었는데, 창의문 밖을 벗어나 부암동 중턱의 무계동천과 윤웅렬 별장에서 시작하여 석파정을 거치고 골짜기 아래의 부침바위, 세검정, 연융대, 홍지문, 보도각 백불(白佛) 일대를 죽 탐방하는 행로가 그려져 있다.
이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듯 아닌 듯 이 일대의 옛 모습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 연재물에는 여기저기 채석장에 관한 언급이 유달리 많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7년 6월 27일자에 수록된 ‘4회’ 연재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묘사되어 있다.

실상 인왕산 주변을 살펴보면 예전에 채석장으로 사용한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홍제동 쪽에 자리한 문화촌현대아파트 104동의 후면에도 바로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쌈지마당놀이터’라는 이름으로 남은 작은 공터가 보이고, 그 동편에 절개지 절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광경에서 이곳이 한때 채석장이던 공간임을 실감하게 된다.

 

20서울 홍제동 문화촌현대아파트 104동의 후면에 자리한 쌈지마당놀이터 전경

21

옛 홍제동 채석장의 한쪽 바위면에 새겨진 마애관음보살입상의 모습

가만히 살펴보니 한쪽 바위면에는 가히 이곳의 명물이라고 할 만한 ‘마애관음보살입상’ 한 구가 새겨진 모습도 눈에 띈다. 기껏해야 반세기 남짓 그 안쪽 시기에 만들어졌을 이 보살상이 정확하게 어느 때 누구에 의해 조성된 것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듣기로는 1972년 이후 1994년까지 문화촌현대아파트 101동 자리에 사현사(沙峴寺)라는 사찰이 옮겨와 있던 기간에 이 절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가 이를 조성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곳 홍제동 채석장은 어떤 내력을 지닌 곳이었을까? 이 장소에 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18호(1942년 6월 18일자)에 탐방기 하나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현지보고(2) 착암공양성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 글을 쓴 목적에 대해 “본란은 고도국방건설을 목표로 조선 내에 약동하는 각종 시설을 있는 그대로 평이 간명하게 소개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획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홍제정(弘濟町)의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려, 오른쪽으로 꺾어 야채밭을 반천(半粁, 500미터) 남짓 나아가면 눈앞에 황색 빛을 띤 밝은 건물이 나타난다. 경성부 홍제정 산(山) 1번지, 이런 복잡한 지번인 ‘조선총독부 착암공양성소(鑿岩工養成所)’. 산금반도(産金半島), 지하자원 적극 개발의 요청에 응하여 소화 13년(1938년) 8월 1일에 개설된 광산전사(鑛山戰士)의 연성도장(鍊成道場)이다.
4월, 8월, 12월, 1년을 3기로 나눠 1기에 약 4개월, 이미 530여 명의 졸업자를 배출한 이 양성소에는 지금 제12기생, 이번 4월 입소한 50여 명의 젊은 산남(山男, 산사나이)들이 착암부(鑿岩夫)로서 홀로서는 어봉공(御奉公)의 날을 마음에 그려가면서, 인왕산 뒤편 암벽에 묵묵히 수행의 투혼을 끓어오르게 하고 있다.(중략)
매일 아침 6시 기상, 7시 아침밥,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 라디오체조를 행하고 발랄하게 현장으로 향한다. 매주 화요일에는 소장인 키노(木野) 본부(本府) 산금과장(産金課長)의 수양훈화가 행해진다. 1일 8시간의 실습을 마치고 숙사로 돌아오면 즐거운 저녁밥이다. 그리고 밤은 녹초가 되어 피곤해진 몸으로, 내일의, 또 한 번 큰 미래의 설계를 그리면서 유쾌한 잠자리로 빠져들어 간다. 그리하여 4개월, 배우고 익힌 이 팔뚝에 착암기를 힘차게 쥐고, 지하자원개발의 기운찬 광산전사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22

경성부 홍제정에 착암공양성소가 개설될 예정임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8년 5월 28일자 보도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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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보> 제118호(1942.6.15)에 수록된 착암공양성소 실습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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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38년 11월 16일자에 수록된 착암공양성소 입소허가자 명단을 살펴보면, 전체 50명 가운데 일본인은 9명에 불과하고 절대다수는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홍제동 산 1번지’는 실상 인왕산의 서쪽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번이다. 이 가운데 지금의 홍제동 채석장 터 일대에 들어선 것이 ‘착암공양성소’였던 것이다. 공기착암기와 전기착암기를 다루는 숙련공을 배출하는 실습교육장인 이곳은 일제가 1937년에 추진한 이른바 ‘산금(産金) 5개년 계획’과 관련하여 만들어졌다.
이 당시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시체제가 본격화하면서 광물자원의 확보가 더욱 긴요한 상황이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금(金)은 결제수단으로서 전통적인 위상과 더불어 장차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 내에서 기준화폐로 사용될 엔화(圓貨)의 통화 신용유지를 위해서라도 증산의 필요성이 우선적으로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금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한 방안을 집중 강구하여 1936년 기준 연간 20톤 규모이던 것을 5년 사이에 연간 75톤으로 확장하는 정책을 국책(國策)으로 삼게 되었다.
1938년 5월 12일에 공포된 제령 제20호 조선중요광물증산령(朝鮮重要鑛物增産令)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금을 비롯한 주요 전시 광물자원의 생산은 대개 함량미달로 채산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놀려두고 있던 저품위 광산을 개발하거나 매광(賣鑛)을 촉진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이를 위해 조선총독이 중요광물을 목적으로 하는 광업권자에 대해 사업의 착수 또는 사업의 계속을 명령할 수 있다거나 중요광물의 증산을 꾀하기 위해 산금장려비와 시설보조비를 지급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이 법령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총독부 식산국(殖産局) 내에는 종래의 광산과에서 산금과(産金課)를 분리 신설하여 산금정책을 전담하게 하였고, 이때 착암공양성소도 함께 만들어 산금과장에게 이곳의 운영을 맡겼다. 착암공양성소의 설치 이유는 무엇보다도 실무적으로 원활한 금 생산을 위해서는 광산도로의 개설, 송전시설의 보강, 착암공과 광부의 알선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38년 7월 31일자에 수록된 개소식 관련 보도내용을 보면, 착암공양성소가 홍제동 일대에 설정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일찍이 총독부에서 그 개소를 준비중이던 착암공양성소는 키노(木野) 산금과장을 소장으로 하여 부내 홍제정 발파연구소(發破硏究所)의 일부를 빌려서 8월 1일부터 개소하기로 되었다. 강습생은 응모자 250명 중에서 50명이 전형 결정되어 이미 양성소 전용의 압기기공장(壓氣機工場) 75마력도 완성하여 이것을 요하는 착암기는 부내 각 판매점에서 다투어가며 기부신청이 있어 벌써 십 수 대가 준비되어 있다. 여길 보면 착암공양성소가 들어선 곳은 원래 발파연구소가 있던 구역이라고 되어 있다. 광산개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발파연구소는 1936년 6월에 만들어졌으며, 화약의 제조 및 취급과 관계된 이유로 애당초 총독부 식산국이 아닌 ‘경무국(警務局)’의 소관 기관으로 설정되었다.

25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홍제내리가 발파연구소 후보지로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6년 7월 3일자 보도내용

그후 산금장려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이에 발맞춰 1940년 7월에 부설기관인 ‘발파기술원양성소(發破技術員養成所)’가 정식으로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광산과 기타 공사장에서 종사할 발파기술원들을 체계적으로 배출하기 위해 20명 남짓 선발된 교육생을 대상으로 6개월 간에 걸쳐 화약 종류의 취급과 발파법에 관한 교육이 이뤄졌다.
이처럼 두 기관이 하나의 공간에 들어서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폭약을 터뜨리고 또한 착암기로 쉴 새 없이 뚫어대니 아무리 바위산인들 어찌 온전할 리가 있었겠는가.
지금에야 어찌 어찌 세월이 흘러 그 앞에 들어선 아파트 숲으로 인해 조금은 시야에서 가려진 형국이지만,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이곳의 속살을 대면하게 되면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생채기들이 이토록 많았던가 하는 점을 저절로 수긍하게 된다.

목, 2017/11/1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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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와 정치에 관심 많은 후원 회원으로 몇 가지 드리고 싶은 의견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1. 요즘 새로운 문재인 정부의 기조인 적폐 청산과 관련되어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죠.
국정 교과서 폐기에 적폐들이 하나 둘씩 구속되어 감옥에 가고 어렵지만 순조롭게 적폐청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박정희 동상 건립과 관련해서 박정희 숭배자들이 일반 시민과 건립 반대자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는데요.
플랭카드에 친일 독재자 박정희라고 쓰시는 것보다는 일왕에 혈서 쓰고 만주에 독립군 잡으러 다니던 일본군 장교 다까기 마사오의
기록과 사진(혈서 쓴 사진, 장교복), 동료 교사였던 분의 증언 등을 담고 남조선 노동당 당원(남로당) 원조 빨갱이 사진 박정희의 사진과
활동 기록, 구호를 들고 건립 반대 외치시면 어떨까요??

또한, 박근혜가 2000년대 초반 김정일과 나란히 사진 찍은 것과 국가의 허락없이 서신을 주고 받은 것들을 부각시켜 플랭카드에
보여주면, 저쪽에서 아무 소리 못할 것 같습니다.

2. 상암동에 박정희 도서관 폐관 운동을 추진해 주십사 하는 의견을 드립니다.
서울 시장인 박원순 시장님께 요청하여 폐관하는 운동을 추진하고 그 건물은 다른 목적의 문화 시설 등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건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3. 2년전부터 망치부인님의 방송을 들으면서 정치 판세를 읽곤 하는데 이 분을 초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강의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동상 건립하는 곳에서 생방으로 직접하실 수 있고, 어제 망치님 방송에서 망치님이 직접 언급하셨던 내용입니다.

4. 식민지 역사 박물관 건립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싶습니다.

현재 매월 2만원을 기부(카드로 정기 자동 결제)하고 있고, 1만원을 추가(카드로 정기 자동 결제하여 이를 식민지 역사 박물관 건립에
쓰일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하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게 전화나 메일 주시면 됩니다.)

5. 매국 식민 사관이 아닌 민족 정기를 이어 받을 수 있도록 자주적 독립 사관, 바른 역사관들을 세우고 자라는 우리의 아이들,
학생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바른 역사 교과서 제작 추진이 될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지금보다 더 많은 홍보와 노력을 기울이시고 계신 줄은 압니다만, 자라나는 학생들이 새로 배울 수 있게 하려면 아무래도 학교 교과서에 
바른 역사관이 들어가야 할 듯 하여 글을 남깁니다.

목, 2017/11/1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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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 아산시 배방면 폐금광 시굴조사


1117-10

▲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이 아산시 배방면 중리3구 야산에 위치한 세일 폐금광(배방읍 수철리 산 181-2번지)에서 유해매장 여부를 확인하는 시굴조사를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 달 아산유족회 회원들이 폐금광을 찾아 절을 하는 모습이다.

충남 아산에서 한국전쟁 당시 부역혐의로 학살된 민간인의 유해 매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조사가 시작됐다.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은 시굴조사를 통해 희생자 유해가 확인될 경우 아산시와 협의해 내년 중 본격 발굴을 할 예정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아래 공동조사단)은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아산시 배방면 중리3구 야산에 위치한 세일 폐금광(배방읍 수철리 산 181-2번지)에서 유해매장 여부를 확인하는 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증언에 따르면 학살된 주민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여성 등 일부 마을 주민 대부분이 포함됐다. 임산부가 학살된 경우도 있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이곳 세일 폐금광에 유기된 희생자는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된다.

가해 책임자는 경찰이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에 의해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와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주로 경찰과 우익청년단이 잡아들이고 총살한 후, 이곳 폐금광에 시신을 유기했다. 희생자들은 주로 온양, 배방, 신창 등지의 주민들이었는데 시신을 매장할 때에는 중리3구 청년들이 동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이 면내 10여개 마을을 돌며 ‘마을 회의’ 또는 ‘도민증 발급’을 해주겠다며 속여 주민들을 소집, 곡물창고와 창고 등에 감금한 후 새끼줄로 묶어 끌고 가 학살했다.”(목격자 증언, 진실화해위원회)

“우리 집에서 거리가 200미터 정도도 안 되었기 때문에 총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를 들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어두울 때인데 그날도 차에 사람을 싣고 지나가더니 총소리가 났었는데, 누군가 와서 삽을 달라고 해서 삽을 준 적이 있습니다.”(목격자 진술, 진실화해위원회)

암매장지는 이곳을 비롯해 여러 곳에 걸쳐 있다. 아산유족회에 따르면, 매장지역은 탕정면 용두1리 탕전지서 뒷산, 영치면 대동리 세지기 공동묘지, 산양리와 산양1구, 배방리 중리3구 뒷산폐금광 등이다.

앞서 정부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보고서를 통해 “경찰과 대한청년단, 태극동맹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해당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조사에서는 아산지역에서 당시 희생자 중 모두 77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이번 시굴 조사는 늦은 감이 있지만 아산시(시장 복기왕)의 큰 관심과 의지로 가능했다. 아산시는 지난 2015년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사업과 유해발굴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아산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공동조사단에는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인권재단사람, 장준하기념사업회, 제주4·3희생자유족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평화디딤돌, 포럼진실과정의, 한국전쟁유족회 등이 참여하고 있다.

<2017-11-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부역 혐의로 학살된 아산 주민 유해 햇볕 볼까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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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11/1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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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재은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건립에 대해 국민 10명중 7명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서울시 소유의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부지에 ‘박정희 동상’ 건립을 추진하며 논란을 빚고 있다.

16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대표 이택수)가 tbs의뢰로 박 전 대통령의 동상건립에 대한 국민여론을 조사한 결과 ‘반대한다’(매우 반대 50.7%, 반대하는 편 15.8%)는 응답이 66.5%로, ‘찬성한다’(매우 찬성 16.3%, 찬성하는 편 13.8%)는 응답(30.1%)보다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잘 모름’은 3.4%.

지지정당별로는 정의당 지지층(찬성 1.7% vs 반대 94.5%)과 민주당 지지층(2.5% vs 93.8%)에서는 반대 응답이 90%를 넘어 압도적으로 높았다. 국민의당 지지층(40.6% vs 59.4%)과 바른정당 지지층(41.3% vs 48.7%)에서도 반대가 대다수이거나 우세한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자유한국당 지지층(찬성 91.3% vs 반대 7.4%)과 무당층(52.2% vs 43.9%)에서는 찬성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거나 절반을 넘었다.

이념성향별로는 진보층(찬성 4.0% vs 반대 94.2%)과 중도층(33.1% vs 62.6%)에서는 반대가 압도적으로 높거나 대다수인 반면, 보수층(68.0% vs 28.7%)은 찬성이 대다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대구·경북 등 영남권을 포함한 모든 지역에서 반대가 우세했는데, 광주·전라(찬성 13.2% vs 반대 81.4%), 경기·인천(21.9% vs 73.4%), 서울(26.4% vs 68.2%), 부산·경남·울산(37.5% vs 59.6%), 대전·충청·세종(42.5% vs 57.5%), 대구·경북(45.8% vs 54.2%) 순으로 반대가 높았다.

연령별로는 30대(찬성 11.1% vs 반대 86.3%)와 20대(14.7% vs 80.2%)에서는 반대 응답이 10명 중 8명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높았고, 40대(21.4% vs 77.2%)와 50대(36.1% vs 60.5%)에서도 반대가 대다수로 조사됐다. 반면, 60대 이상(찬성 56.7% vs 반대 38.7%)은 찬성이 대다수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는 2017년 11월 15일(수)에 전국 19세 이상 성인 9069명에게 접촉해 최종 511명이 응답을 완료, 5.6%의 응답률을 나타냈다. 무선(10%) 전화면접 및 무선(70%)·유선(20%) 자동응답 혼용, 무선전화(80%)와 유선전화(20%) 병행 무작위생성 표집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 방법으로 실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3%p이다.

김재은기자

<2017-11-17> 이데일리

☞기사원문: [리얼미터]박정희 동상건립 66.5% `반대`..한국당지지층 찬성 91.3%

※관련기사

☞뉴스1: 박정희 前대통령 동상 건립…찬성 30.1% vs 반대 66.5%

☞국제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건립 반대 67% vs 찬성 30%

☞아시아경제: 박정희 동상 건립…반대 67% 찬성 30%<리얼미터>

☞서울신문: 박정희 동상 건립 10명중 7명 “반대”

☞서울경제: ‘박정희 동상’ 건립, 국민 대다수가 ‘NO!’…압도적 반대

☞뷰스앤뉴스: [리얼미터]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66.5% vs “찬성” 30.1%

금, 2017/11/1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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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팟 인터뷰]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시간에 쫓겨 못한 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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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에 이런 혈서가 실렸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합격을 위해 충성 맹세했을 그때, 백강 조경한 선생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입교에 성공했을 즈음, 선생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있었으며, 1944년 4월은 또한 두 사람 모두에게 중대한 시점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조경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낯설었던 선생의 이름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귀에 꽂혔다. 14일 윤소하 의원(정의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 덕분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 당시 보훈차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백강 선생 유족의 지원 요청 “몇 차례 잘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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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강 조경한 선생 생가 안채 후면 모습 ⓒ 윤소하 의원실 제공

“1919년 3.1 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으시고, 1981년에는 독립유공자협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돼 계십니다. 선생은 유언에서조차도 동작동 국립묘지에 친일파 일부가 묻혀 있다고 같이 묻힐 생각이 없다, 평생을 강직하게 살아오신 분입니다.

하지만 선생의 고향인 순천에 추모비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추모시설 조차 없어요. 사진 한 번 봐주세요. 완전히 방치되어 있는 백강 선생 생가의 안채와 사랑채 전면과 후면의 현재 모습인데요. 임시정부 국무위원, 그리고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의 기념시설조차 없고 생가마저 방치되어 있는 것은 부끄러운 겁니다. 전남 동부 보훈지청을 통해 유족들이 생가 복원 사업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자기 돈 들여서,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는 답과 함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이 설명을 끝으로 페이스북 영상은 끝났지만, 윤 의원으로서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했다. 윤 의원의 질의가 나왔던 시점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앞 동상 건립을 놓고 논란이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던 때. 14일 전화통화에서 윤 의원은 “시간이 부족해 매우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윤 의원 역시 “솔직히 백강 선생을 잘 몰랐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손들이 자신들의 돈을 더해 복원하겠다며 몇 차례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보내 온 자료들을 통해 조경한 선생이 살아오신 궤적을 살피게 됐다”고 했다. “1억 8000만 원 정도 되는 예산이 몇 차례 잘려버렸다고 하더라”는 그의 음성에는 화가 묻어 있었다.

이어 윤 의원은 “이건 예산 얼마를 확보하고 못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 잔재들이 정치·사회·경제적 기득권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반대편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애국지사들의 삶이 있다”며 “박정희 탄신 100주년이라고 동상 건립 논란이 있는 상황을 백강 선생과 대비시켜 이게 현실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비밀독립군”, 백강 선생 이용했던 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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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백강 조경한 선생. 지난 8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독립운동가 조경한을 찍은 흑백 사진’을 공개하면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맞다. 왜냐하면, 부모를 제대로 봉양 못 하게 되고, 자녀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없으며, 자신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란 선생의 말을 함께 소개하기도 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그리고 윤 의원은 거듭 “적폐 청산은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라고, “단순히 이번 정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졌다”는 이와 같은 윤 의원의 주장은 자유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이 과거 백강 조경한 선생을 이용해 박 전 대통령이 ‘비밀 독립군’이었다고 강변했던 것을 떠올리면 더 명확하게 와 닿는다.

2015년 10월 새누리당은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백강 조경환(조경한의 당시 새누리당 측 표기 오류) 선생께서 박 전 대통령을 독립군을 도운 군인으로 기억했다는 증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2004년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의 <세계일보> 기고글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선생을 찾아가 자신을 일본군 중좌 다카키 마사오라 소개했고, 이에 선생이 조선인 병사들을 상해 임시정부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이름으로 익히 알고 있어 반가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이와 같은 새누리당 주장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선생 이름은 조경환이 아닌 조경한이며, 만주에 있던 박정희가 당시 중국 남서부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로 조선인 병사를 빼돌렸다는 말은 성립 불가능하다”라고 지적했다.

또 백강 선생 외손자 심정섭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역시 “박정희와 외조부가 나눈 실제 대화는 기고문과 많이 다르다”라고 반박했다. 자신이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쿠데타 당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고백했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박 전 대통령 스스로 비밀 독립군설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과거 증언까지 줄줄이 소개됐다.

그럼에도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권력’은 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든 독립군으로 공식화하려고 했다. 2016년 10월 국방부는 박 전 대통령 추모식 행사를 알리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그의 약력을 기술했다. 기자들의 반박에 당시 국방부 대변인은 “사실 관계를 확인해 알아보겠다”고 답을 피했다고 한다. 윤소하 의원은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기념사업에 1400억원… “적폐 청산은 긴 숨 갖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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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지난 10월 1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의 답변을 지켜보고 있다. ⓒ 남소연

“적폐 청산은 단순히 정치적 공방의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예요. 전면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적폐 청산은 계속 돼야 합니다. 이런 의지를 지금 정부가 얼마나 갖고 있는지가, 백강 선생 생가 복원에 대한 정부 입장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정부, 전전 정부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폐 청산은 긴 숨을 갖고 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2009년 포항시를 시작으로 박 전 대통령의 동상 세우기 경쟁이 불붙었다. 서울 중구는 신당동 박 전 대통령 가옥에 228억 원을 들여 ‘박정희 공원’을 조성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박정희 기념사업에 국가 예산을 포함해 1400억 원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친일파와 함께 묻히기 싫어 동작동 국립묘지를 거부했던 독립운동가, 백강 선생 생가 보존에 국가가 이제까지 쓴 돈은 공식적으로 ‘0원’이다.

<2017-11-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혈서 쓴 박정희 1400억 독립투사 생가예산은 0원

※연관기사

☞연합뉴스TV: 내년 3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친일청산’ 바람

금, 2017/11/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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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평균 7만원이던 기부금, 金 비서실장 취임 이후 월 7억원대로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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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사진=이한형 기자/노컷뉴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가 박근혜 청와대에 상납된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상납이 빈번하던 그 무렵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 재단'(이하 재단)으로도 수상한 뭉칫돈이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돼 주목된다.

민주당 김경협 의원과 CBS노컷뉴스가 국세청 공익법인공시를 확인한 결과 재단으로 2013년 11월과 12월 두 차례 거액이 기부금이 들어갔다.

11월에 재단 계좌에 찍힌 기부금은 10억 6천 만 원. 이어 12월에도 5억 원을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으로 전환한 이후 5개월간 월 평균 7만 원 정도 밖에 안됐던 기부금이 두 달 간 월 평균 7억 원 넘게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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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의 기부금이 돌연 1만 배 넘게 폭등한 시점이 묘하게 김기춘 씨의 청와대 입성직후다.

김 씨는 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3개월 만에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영전한다.

김 씨가 재단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재단의 기부금이 7만 원 선이었는데, 김 씨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옮긴 이후 기부금이 7억 원으로 늘어난 셈이다.

이는 최근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난 바처럼 그해 5월부터 청와대로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상납되던 시기와도 겹친다.

하지만 문제의 기부금이 국정원 특활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경협 의원은 재단으로 수상한 돈의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2014년 문창극 당시 총리 후보자 청문회를 준비하면서 파악했다.

김 의원은 문창극 씨가 총리후보로 지명되기 직전까지 재단의 이사로 재직중이었던 만큼 재단 ‘회보’ 등을 바탕으로 문 씨의 재단 내 역할 등을 살펴보던 중 거액의 기부금이 모금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재단 회보와 재단 홈페이지 등에는 대략적인 기부금 액수만 공개돼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기부 금액과 기부 시점이 확인된 것은 이번 국세청 자료를 통해 새로 밝혀진 부분이다.

더욱이 재단이 기부금 관련 내용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2014년 문창극 씨 청문회를 앞둔 시점에 재단 홈페이지에는 2013년 기부금이 뭉칫돈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 게재돼 있었지만 지금은 관련 내용이 삭제돼 있다.

국세청 자료에는 2013년 15억 원의 기부금이 재단에 들어간 이후 기부금 규모가 다시 수 백 만 원 대로 줄어든 것으로 돼 있다.

다만 지난해 말까지 5차례 정도 거액의 기부금이 추가로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

5천 만원(2014년 1월), 1억 1800만원(2015년 5월), 1억 1600만원(2015년 9월), 2억 1,111만원(2015년 12월), 1억 원(2016년 12월) 등이다.

김경협 의원은 “국정원 적폐 청산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의 권력자들이 국정원 예산을 쌈짓돈으로 사용하거나 전경련에 압력을 가해 기업 돈을 보수단체에 지원한 사례 등을 봤을 때 박근혜 정권이 박정희 재단에도 금전적 지원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이 부분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재단측은 기자의 통화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서울시 부지에 박정희 동상을 설립하는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된 이후 재단의 공식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2017-11-17> 노컷뉴스

 ☞기사원문: [단독] 김기춘 靑 입성하자 박정희재단에 수상한 뭉칫돈

금, 2017/11/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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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내년 2월 발굴 예정… 충남 아산 배방리 설화산 자락 유해매장지 찾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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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67년 만에 드러난 희생자 유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 공동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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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자들의 두개골이 67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 공동조사단

“여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산기슭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땅속 지형을 살펴보던 박선주 유해발굴단장은 “이곳은 폐광산 터가 아니다”고 결론 내렸다.

지난 17일. ‘아산시'(시장 복기왕)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아래 공동조사단)은 아산시 배방면 복리 3구 야산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약식 개토제를 지낸 뒤 삽 자루를 움켜잡았다. 1951년 부역 혐의로 억울하게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들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 암매장 위치를 찾는 시굴조사였다.

아산유족회원들은 물론 아산시와 공동조사단 일원인 4.9통일 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천안 아산지부 등도 힘을 모았다(관련 기사 : 부역 혐의로 학살된 아산 주민 유해 햇볕 볼까)

유해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67년 동안 지형이 바뀐 곳이 많은 데다 온전하다고 해도 증언에 의존할 수 없다. 이번 유해 매장지는 흔적이 사라진 당시 세일 폐광산 입구를 더듬어야 했다. 게다가 폐광산 입구가 산자락 여러 곳에 있었다는 증언마저 나왔다.

[11월 17일] 허탈하게 산자락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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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해가 발견된 곳은 희생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바로 아래쪽이었다. 하지만 조사단은 유해를 찾기까지 꼬박 3일 간 야산 곳곳을 뒤져야했다. ⓒ 공동조사단

증언을 간추려 산 중턱에 위치한 한 곳을 선정해 조심스럽게 흙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해는 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 유해발굴단장은 “오랜 시간이 흘러 유해매장지를 찾는 일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 일원들이 흙먼지를 털며 허탈하게 산자락을 내려왔다.

18일, 몇몇 마을주민들이 전날 유해발굴에 실패했다는 얘기를 듣고 내 일처럼 현장으로 달려왔다. 당시 희생자들이 끌려가는 모습과 폐광산 입구를 기억한다는 증언자의 의견에 따라 능선 부근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오전 9시에 조사를 시작했지만, 오후 내내까지 흔적을 찾지 못했다. 적어도 금을 캐던 폐광산의 징후들이 나와야 했지만, 이곳에서도 광산을 일구었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다시 또 하루가 갔다.

애초 공동조사단은 시굴조사 기간은 이날까지로 한정했다. 이틀 내내 실패하자 현장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회의결과 조사 기간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

[11월 18일] 또 다시 실패, 조사 기간, 하루 더 연장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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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주 유해발굴단장(가운데)이 유해매장지를 찾기 위해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있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19일, 산자락 아래쪽으로 발굴 대상지를 선정하고 시굴조사를 시작했다. 한 시간 넘게 탐색을 했지만, 이 곳 또한 암매장지가 아닌 것으로 판단됐다.

오전 10시. 이번에는 희생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바로 아래쪽으로 위치를 재선정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30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작업자 중 한 명이 작업중단을 외쳤다. 사람의 뼈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개골과 치아 등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삭고 부서진 유해가 햇빛을 보았다.

당시 경찰이 사용한 탄피,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흰색 단추, 신발 조각도 발견됐다. 박 유해발굴단장은 “드러난 치아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0대를 비롯해 임산부 등 가족 단위 주민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희생됐다는 증언과도 일치한다.

주변 마을에 사는 이봉의(79,중리 3구) 씨가 당시를 떠올렸다.

“당시 마을 이름은 지금의 중리3구가 아니라 ‘검배리’야. 검배방앗간에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이 아산지역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끌어다 가둬 놓았어. 그 날은 눈이 많이 왔어. 오후 3~4쯤 됐을까? 경찰과 우익 단체단원들이 사람들을 끌고 산으로 가기 시작했어. 펑펑 눈이 쏟아지는데 일렬로 줄을 세워서… 애기를 등에 업고 양손에 아이 손을 잡은 아낙도 있었어. 어린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조금 있다가 산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지. 광산 입구에 몰아넣고 죄 쏴 죽인 거야. 총소리가 저녁 7시쯤까지 났어. 100명씩 세 번을 끌고 가 전부 죽었으니까 못해도 300명은 될 거야. 후에 다른 마을에서 시신을 찾겠다고 왔는데 다 그냥 돌아갔다고 해. 광산입구를 흙으로 파묻은데다 시신이 뒤엉켜 있응께니 찾을 엄두가 안 난 거지 “

[11월 19일] 드러난 유해,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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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러난 탄피는 가해자가 누구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가해자는 경찰과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였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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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아산시 배방리 산기슭 폐광터에서 발겭야된 희생자 유해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같은 지역 주민 맹봉주(78)씨는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들이 확인 사살을 위해 폐광 동굴 안으로 불까지 지폈다고 말했다.

“전해 들은 얘기인데, 혹시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 봐 불을 피웠다고 해. 짚불로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키려 한 거지.”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이곳 세일 폐금광에 유기된 희생자는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로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정석희 충남유족회장은 “저항도 못하는 어린 아이부터 일가족을 국가가 나서 이렇게 무참히 살해했는데도 정부가 유해발굴에 나서지 않고 있다”며 “이게 유가족과 민간단체가 할 일이냐”고 반문했다.

시굴조사로 유해매장을 확인한 아산시와 공동조사단은 내년 2월경 본격 유해발굴을 시작할 예정이다.

글: 심규상(djsim)편집: 최유진(youjin0213)

<2017-11-2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어린애들이 뭔 죄라고…” 300명 유해암매장지 찾았다

※관련기사

민중의소리: 충남아산, 한국전쟁기 학살된 민간인 매장지 드러나…“어린아이까지 학살”

우리들뉴스: 아산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월, 2017/11/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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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은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라고 말했다. 그 길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어떤 조건으로 친일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를 학문적으로 소화해서 교과서에 정확하게 넣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흥구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놓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이에 ‘말 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고조되는 긴장에 비해 해법은 아직도 묘연하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역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펴낸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역사학자다. 작고한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와 함께 197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대표적 원로 지성으로 꼽힌다. 유신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4년 동안 대학 강단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상지대 총장(2001~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2005~2007년)을 지낸 뒤 강원도 양양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고 있다. 지난 7월 말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던 문재인 대통령이 강 명예교수를 초청해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팔순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왕성한 집필 활동과 강연 등으로 역사의 진보를 설파하는 그를 양양에서 만났다.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북핵 문제가 제일 시급한데, 내가 보기에는 과거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핵 개발 중에도 북·미 관계가 좋을 때는 협상을 통해 북한이 핵 시설을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클린턴 정부 때 북·미 수교, 고이즈미 내각 때 북·일 수교를 놓고 협상할 때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길은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 아니겠는가. 그 길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다.

현재 북한은 수교를 하더라도 핵 보유를 인정받겠다는 입장 아닌가?

북·미나 북·일 수교를 하게 되면 핵은 포기하라든지 하는 조건이 붙을 것이다. 지금까지 북·미가 수교를 하지 않고 해마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벌이니까 결국 핵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하며 북한 상륙작전까지 연습하니까 북한이 핵무기로 무장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평화주의 견지에서 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옳다고 보기 어렵다. 어쨌든 상대가 있으니까 협상에 달렸다. 세계가 평화를 지향해가고 있는 시대이므로 북·미 평화협정, 북·일 수교를 통한 평화 관계도 마땅히 이룰 수 있다.

광복 72주년에 재현된 건국절 논란을 어떻게 보는가?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 이런 문제인데, 광복절이란 우리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기념일로서 이것은 민족주의적 견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건국절 주장은 국가주의적 견해이다. 결국 건국절 논란은 어떤 역사인식을 가질 거냐 하는 문제다. 계속 분단국가주의적 틀 속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통일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역사의식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1945년 광복 당시 건국 개념은 무엇이었나?

1919년 상해에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이 가까워질수록 좌우 합작 정부로 변모했다. 독립운동 내부에 좌익도 있고 우익도 있었는데 광복 후 이들이 합쳐야 하니까 임시정부가 사실상 좌우 합작이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주석이고 김규식 선생이 부주석인데 거기에는 아나키스트, 유림 등 모든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광복이 되면 두 개의 국가가 생길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백범 김구로 말하자면 우익 중의 우익인데 좌우 합작 정부의 주석이었고 분단 이후에는 평양에 가지 않았나. 그것이 우리의 올바른 역사인식이다. 그걸 갈라놓은 게 이승만 정권이고. 오늘날 건국절 운운하는 것은 이승만의 분단주의 연장이나 다름없다.

노무현 정부 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는데 남은 일제 잔재 청산 과제는?

최근 <친일인명사전>까지 나오긴 했지만 문제는 광복된 지 72년이나 됐는데 친일파 연구가 학문적으로 제대로 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로 자료가 전혀 모아지지 않다가 노무현 정부 때 비로소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를 가지고 친일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해 제대로 반성해야 한다. 어떤 조건으로 친일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를 학문적으로 소화해서 교과서에 정확하게 넣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이 화두다. 역사적으로 적폐가 누적된 근본 원인을 뭐라고 보나?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업적을 세웠다는 걸 내세워 독재 체제를 얼버무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이승만 정권의 제일 큰 오점이자 문제점은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민족사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1965년 잘못 맺은 한·일 협정이다. 협정 당시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합법적으로 지배했느냐, 침략적으로 강점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협정 당시 일본의 주장을 따르면 일제 36년이 합법적인 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합법적인 지배에 저항한 잘못된 행동이 된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 합방조약을 1910년 8월29일 한·일 합방이 된 그날부터 무효라고 인식하겠다 하고 아무런 대응 없이 넘어갔다. 역사적으로 큰 과오를 남긴 이 문제가 아직까지 제대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한·일 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를 놓고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다’라 주장했고, 일본은 ‘1948년 대한민국 성립 때까지는 유효했다’고 해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은 한·일 병탄조약을 어떻게 보았나?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이 청일전쟁 끝에 빼앗은 타이완은 중국에 돌아갔다.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땅도 소련에 넘어갔다. 한·일 합방조약이 합법적이라고 연합군이 인정했다면 한반도를 일본의 지배에서 빼낼 이유가 없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걸 침략 행위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일본 영토에서 한반도를 벗어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1965년 한·일 협정 때는 그게 전혀 반영이 안 됐다.

학계에서 그 문제가 전혀 제기되지 않았나?

한·일 합방 100주년이던 2010년 한·일 양국의 양심세력이 성명서를 냈다. ‘1910년에 체결된 한·일 합방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다’라는 공동성명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 해봐야 법적 효력이 있나. 한·일 양국 정부가 하도록 촉구하는 의미였는데 이후 별다른 노력이 없었다. 이제라도 역사학계의 지적을 정부가 귀담아 듣고 일본 정부와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한·일 협정을 통한 청구권 자금이 우리 경제성장의 종잣돈이 되었다며 박정희 정권의 긍정적 업적으로 내세우는 이들도 많은데?

박정희 정권의 업적으로 경제성장을 자꾸 말하는데,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복구 과정에서 경제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일본도 그렇고 독일도 그랬다. 심지어 북한도 1970년대까지는 남한보다 경제 사정이 나았지 않나. 경제성장이라는 게 어느 한 정권 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으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논거로 삼는 것은 역사적으로 잘못되었다.

▲ 2005년 5월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앞줄 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접견실로 향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일본과는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역사교육 문제 등이 있는데 독도 문제는 이미 해결된 거라고 본다. 우리가 우리 영토로 점유하며 증명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잘못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사자들이 뭘 어떻게 원하느냐를 듣고 일본과 교섭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가 일방적으로 해치웠다. 그러니까 피해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와 합의할 때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없었다. 당사자들이 아직 상당수 살아 있다. 그분들 의견이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야 일본도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역사교육 문제는 일본의 지성들이 해결해야 한다. 아베 정권 이전까지 일본 역사학계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내일 더 잘하기 위해 어제를 아는 것이 역사다. 그렇다고 어제를 알고 그냥 끝내서도 안 된다. 잘못된 과오는 반성해야 한다. 일본의 과거 침략주의에 대한 반성이 아직도 부족하다. 한·일 양국 역사학계가 공동으로 교류하면 역사교육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 본다.

아베 정권 들어 일본이 우경화하면서 역사 왜곡이 심해지는데?

일본 정부가 교육을 통해 극우 사상을 넣으려 하는데 거기도 발전하는 세상이라 나는 그것이 오래가지 않으리라 본다. 일본 보수 정권이 비교적 오래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래도 21세기인데 과거의 제국주의적 또는 냉전주의적 상황은 희석될 것이다.

역사학자가 보기에 현재 한반도 처지가 구한말과 비슷한가?

주변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4대 강국 시각에서 보면 한반도가 분단 상태에 있는 게 안전하다. 한반도가 중국이나 러시아 등 대륙 세력권에 들어가면 한반도는 해양 세력, 특히 일본을 찌르는 칼이 된다. 반대로 한반도가 일본이나 미국 등 해양 세력권에 포함되면 해양 세력이 대륙을 침략해 들어가는 다리가 된다. 과거 일제강점기가 대표적인 예 아닌가. 광복이 되면서 남북으로 갈렸다. 이 상태가 4대 강국에게는 안전하다. 4대 강국끼리 충돌을 방지하는, 칼도 안 되고 다리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통일은 어렵다는 얘긴가?

우리는 4대 강국에 의해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4대 강국이 포함된 6자 회담으로 통일 문제나 남북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걸 말해준다. 내가 보기엔 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해결해야 한다.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이뤄진 6·15 남북공동선언은 그런 역사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남북한이 어떻게 주도적으로 풀어야 하나?

통일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생각하면 분단이 어떻게 고착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1차적으로 1945년 삼팔선이 생기면서 국토가 나뉘었다. 다음으로 1948년 남북한 단독 정권이 생기면서 국가가 분단되었다. 이어서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이 갈린 과정을 거쳤다. 이런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남북한은 베트남처럼 사이공 인민주의도 안 되고 독일처럼 흡수통일도 안 된다. 결국은 평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연 시작을 나는 6·15 남북공동선언이라고 본다.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민족이 화해하기 시작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도 열렸다. 통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남북한 사이에 연방제냐, 1정부 2체제냐, 2정부 2체제냐 하는 게 다를 뿐 통일국가 체제 논의도 상당 부분 합의가 이뤄졌다. 결국 2정부 2체제로 가는 건 공통분모다.

박근혜 정부 때도 역사학자로서 정부 승인을 받아 방북했는데?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기 일주일 전인 2016년 2월 역사 발굴 때문에 개성에 들어갔다. 고려 왕궁터를 비롯해 여러 고려 문화 유적이 남아 있어서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삼자고 했다. 그런데 개성이 2000년대 초반에 비해 많이 달라졌더라. 5층짜리 아파트가 많이 생기고 남루했던 개성 사람들 옷차림도 달라졌다. 개성공단, 해주공단, 원산공단을 지어나가면 통일이 차츰 되어갈 것이다. 통일이란 게 남북한 사람들 의식이 같아지고 생활이 동화되어가는 데서 출발한다. 차츰 남북이 동화되어가면 통일비용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들어갈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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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세 번째)이 방북 중인 김민하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박용길 장로, 강만길 교수(왼쪽부터) 등을 접견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통일뉴스 제공

북한 사람들과 북핵 문제도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내가 북한에 갔을 때 어느 북측 인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기 전에 북한은 달러 한 푼 없이도 살 수 있었는데, 무너지고 나니 달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더라, 결국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북핵을 대미 관계를 풀기 위한 마지막 카드라고 하더라. “우리를 승인하라는 것이고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역사란 지그재그로 발전한다고 강조했는데?

역사는 정치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경제적으로는 인간 생활을 균등하게, 사회적으로는 인간을 평등하게,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이게 직선으로만 가지 않는다. 그랬다면 인류의 역사가 여기 머물러 있겠나? 훨씬 더 많이 앞으로 갔을 것이다. 역사는 중간에 가다가 반작용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반복되는 게 아니고 나선형으로 올라간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침략과 분단 등을 겪었지만 우리는 왕조시대를 극복하고 넘어섰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나 중국의 신해혁명 같은 것은 없었지만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해갔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분단도 극복하고 통일도 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자신감을 갖는 게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취임 100일을 맞은 문재인 정부에 할 말이 있다면?

내치야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북 문제가 걱정이다. 미국 트럼프 정권도 대북 강경책을 쓸 가능성이 높아서 지난 10년간 닫힌 남북 관계를 푸는 게 쉽지 않다. 북·미 관계가 나빠지면서 야당과 수구 보수 세력이 정부를 비판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남북 관계의 문을 열어야 한다. 정부 내 대북 정책을 맡은 사람들의 의식이 중요하다. 얼마나 빨리 북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느냐보다는 방향이 맞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의식만 있다면 인내심을 갖고 북한을 설득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또 민간단체가 남북 간 교류를 더 넓혀 나가야 한다.

정희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7-9-1> 시사in

☞기사원문: 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월, 2017/11/2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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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스토킹은 적폐인가요 아닌가요

화, 2017/11/21-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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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방향·업체 선정까지 청와대 주도로 집행 
당시 청와대·교육부 직원 등 10여명 수사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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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교과서 홍보물로 제작한 카드뉴스의 하나. (교육부 제공) © News1

박근혜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편성한 예비비 44억원 중 절반이 넘은 25억원을 홍보비로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가 홍보 방향과 업체 선정 등을 주도하면서 제작단가 등을 부풀린 정황도 드러났다.

교육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는 21일 ‘예비비 집행내역 조사’ 결과 홍보비가 과다하게 집행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정교과서 예비비 배정부터 이례적이었다.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행정예고한 2015년 10월12일 기획재정부에 예비비를 요청했고 다음달 바로 예산 배정을 통보받았다. 당시 교육부 기조실장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 비서관에 따르면, 장·차관이 사전에 청와대를 통해 기재부와 조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비비 편성도 기형적이었다. 예비비 43억8700만원은 역사교과서 개발을 위해 긴급 편성한 예산이다. 절반이 훨씬 넘은 24억8500만원(56.6%)이 홍보비로 편성됐다. 정작 국정교과서 개발비로는 40.1%인 17억6000만원만 편성했다.

진상조사위가 홍보비를 우선 살펴본 결과 홍보 예산의 대부분은 청와대 주도로 집행됐다. 홍보비의 51.6%인 12억8000만원은 관련 규정을 위반하며 청와대가 주도해 집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교육부는 사후 행정 처리에만 협조했다. 나머지 12억원(48.4%)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을 통해 집행됐다.

당시 교육부 담당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이 홍보 방향과 업체를 제안하면 이 제안대로 교육부 실무팀에서 추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홍보영상물 제작업체 선정과 지상파 3사 송출 계약 등도 사전에 청와대가 조율해 놓은 대로 진행됐다.

홍보비 집행과정에서 업무상 배임과 직권남용 의혹도 드러났다. 홍보영상 제작과 송출 계약은 당초 지상파 1개사가 제작과 송출을 맡는 것으로 계약했지만 교육부도 모르게 지상파와 A광고대행사가 계약을 맺어 A사가 홍보영상을 제작했다.

A사는 다른 지상파 방송까지 홍보영상을 송출하면서 송출료 중 10~12%를 받는 이면계약을 체결했다. 또 A사는 B사(제작총괄)와 C사(촬영)로 재하청을 주면서 제작비가 약 5000만원 추가되는 등 제작단가가 부풀려진 정황도 확인했다.

인터넷 베너 광고는 청와대 홍보수석실의 오모 비서관이 추천한 업체에 9000만원을 주고 제작했다. 카드뉴스 등은 새누리당 출신의 당시 교육부 정책보좌관이 알선한 업체를 통해 수의계약으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시중단가보다 상당히 부풀려진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발견됐다.

진상조사위는 업무상 배임과 직권남용 의혹에 연루된 당시 청와대 직원과 교육부 직원 등 10여명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진상조사위는 “홍보비 부당집행 과정을 보면 사전에 계획해 일부를 빼돌린 정황이 있다”며 “조사과정에서 고용노동부 등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는 진술이 있어 확대 수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권형진 기자 jinny@

<2017-11-21> 뉴스1

☞기사원문: 국정교과서 예비비 44억 중 25억 홍보비로 지출…청와대가 주도

※관련기사

☞이투데이: 국정교과서 예산 44억 중 25억 홍보비… 청와대 주도 불법 집행

화, 2017/11/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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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7/11/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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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의 동상을 둘러싼 친일 비판이 있었는데요.

내년 3월에는 서울에 일제 식민지 시기를 다룬 박물관이 문을 열 예정입니다.

‘적폐청산’을 넘어 ‘친일청산’ 움직임이 확산할지 주목됩니다.

차병섭 기자입니다.

[기자]

<현장음> “친일파를 청산하자. 친일파를 청산하자.”

이번 주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동상 기증 행사장에는 박 전 대통령을 친일파라 부르는 반대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현장음> “친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김활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

이화여대에 있는 김활란 초대총장의 동상 앞에는 김 전 총장의 친일행적을 알리는 팻말이 세워졌습니다.

박 전 대통령 동상 반대집회를 주도하고, 김활란 친일팻말을 세운 학생들에게 자문을 해준 곳은 민족문제연구소였습니다.

이 단체는 내년 3월 서울 용산구의 5층건물에 일제시기 친일파의 행적을 다룬 박물관을 열 예정입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식민지시절 일제 친일파 행적에 대해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알릴 수 있는 교육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위해 모금운동을 하고 있고요. 내년 3월 개관 예정입니다.”

어두운 역사도 기억해 반면교사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로, 친일 역사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국내 첫 박물관이라는 게 연구소 측 설명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해 친일청산 논쟁에 불을 당긴 바 있습니다.

적폐청산’을 진행하는 현 정부가 일제와 친일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물관 개관이 새로운 논란의 불씨를 지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연합뉴스TV 차병섭입니다.

<2017-11-16> 연합뉴스TV

☞기사원문: 내년 3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친일청산’ 바람

화, 2017/11/2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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