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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전몰자 유골 발굴서 ‘조선인 차별’…시민단체 “반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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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전몰자 유골 발굴서 ‘조선인 차별’…시민단체 “반환해야”

익명 (미확인) | 금, 2018/02/09- 14:33

[앵커]

일제강점기 때 전쟁에 강제로 동원됐던 조선인들의 유골이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골 발굴 사업 대상에서 조선인은 빼놓았기 때문인데 우리 정부도 사실상 손 놓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윤설영 특파원입니다.



[기자]

태평양전쟁 말기, 남태평양 마셜군도에는 조선인 1000여명이 강제동원됐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전장에서, 혹은 보급이 끊겨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은 최소 22,000구로 추정됩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관련법을 만들며 유골발굴 사업에서 조선인을 대상자에서 제외했습니다.

심지어 신원이 확인 안되면 유골을 소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일 가능성이 있는 유골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일시민단체로 구성된 전몰자유골귀환 추진 모임이 오늘(8일) 일본 정부에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습니다.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팀장 : 이 문제는 정치적인 협의대상이 아니라 인도적 입장에서 일본 정부 스스로 해결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일본의 조선인 차별에도 한국정부는 일본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화면제공 : 국사편찬위·미국기록관리청)

<2018-02-09> JTBC

☞기사원문: 일, 전몰자 유골 발굴서 ‘조선인 차별’…시민단체 “반환해야”

※관련기사

☞한겨레: “한국인 유골 반환 한국 정부가 나서달라”

연합뉴스: 억울하게 죽었는데 묻힌곳 몰라…죽어도 눈못감는 조선인 전몰자

연합뉴스: “日정부에 조선인 유골반환 요청않는 韓정부, 도저히 이해 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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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랑스러운 아버님을 두었지만 내 아이에게는 미안한 아버지입니다
– 2017년 독립운동 공적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은 임국희 선생 자제 임병욱 회원

정리 : 이명숙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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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광복절 즈음이면 어김없이 회자되는 말이 있다. ‘친일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를 언급하며 이 말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했다. 나라와 민족을 우선했던 애국지사, 해방이 되고도 합당한 예우를 하지 않았던 국가, 오히려 친일파가 득세했던 세상이 있었다. 그 사이 애국지사의 가족 대부분은 3대가 망한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번 호 인터뷰 주인공은 광주지부 임병욱 회원이다. 그가 들려주는 선대 이야기와 자신의 삶에는 동학농민운동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근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제와 불의에 저항했던 선대가 남긴 건 가난이었지만 선대의 명예를 되찾고자 부단히 노력한 결과, 2017년에 아버지 임국희 선생이 독립운동 공적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문 : 고 임국희 선생께 지난해 11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셨습니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 먼저 묻힐 뻔 했던 아버님의 독립운동 공적을 국가가 인정해준 것이어서 정말 기쁘고, 아버님의 힘들고 어려웠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아버님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문 : 임국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사실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답 : 아버님이 1901년생이십니다. 제가 1960년생이니까 저희 아버님이 60세에 저를 낳으셨구요. 저는 집안의 막내입니다. 누나 다섯 분, 형님 한 분은 이미 돌아가셨고 현재 누이 두 분과 저만 남았습니다. 제가 8살에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당연히 아버님의 과거사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아버님이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11년 전 보훈처 홈페이지에 아버님 함자를 넣어보니 독립운동가 번호가 있더라구요. 그때서부터 아버님의 흔적을 찾아다녔죠. 전국을 다 다녔습니다. 지금처럼 독립운동 자료들이 데이터베이스화되지 않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일 때 누나들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아버지는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주의운동가 즉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고, 그러다가 저까지 잡혀간다고 반대를 많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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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국희 선생의 사회활동과 예비검속 사실을 보도한 1930년대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

 

문 : 임국희 선생님이 어떤 독립운동을 하셨는지 알려주세요

답 : 저희 아버님은 부산에서 신간회의 청년부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부산 지역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와 당시의 한국 실정을 외신기자들에게 영어와 러시아로 설명하셨구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년계몽운동을 하셨다고 독립운동사에 기록되어 있더라구요. 

12[기록으로 전해지는 임국희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 : 부산지역에서 청년운동을 하였고, 주로 부산청년동맹에서 활약했다. 부산청년동맹은 조선청년총동맹 산하 단체로 부산에서 결성된 항일청년단체로 1927년 12월 창립 이후 부산지역의 청년운동 및 각종 사회운동을 지도하며 일제의 지배정책에 저항했다. 주요 활동은 당시 청년들이 처한 현실에 기반한 노동운동이었으며, 각종 강연회와 음악회·운동회 등을 열어 대중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임국희 선생은 부산청년동맹 집행위원 및 조사・연구부 부원, 부산청년동맹 서부지부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며 신간회·근우회 등 부산 지역의 각종 단체에서 개최하는 강연회와 연설회에서 연사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부산조선방직공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노동자파업을 지지·후원했던 일본인 사회주의자 쓰지(辻登喜吏)와 나카무라(中村忠)와 협력하여 파업 전말을 알리기 위한 격문 수백 매를 인쇄하여 조선과 일본 각지로 우송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구금되었다. 석방 후에도 꾸준히 부산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갔고, 1931~1932년 일제에 의해 수차례 예비 검속당했다.]

문 : 주로 청년동맹에서 활동하셨는데, 기록으로 드러난 사실 외에 직접 전해 들으신 독립운동 내용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답 : 직접 들은 이야기는 사실 거의 없습니다. 주위 친척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누나들에게 들은 후문으로는 가정은 잘 돌보지 않고 주로 외부활동만 많이 해서 좋은 가장은 아니었다고들 하셨습니다.

문 : 임국희 선생이 러시아어를 하셨다고 하셨는데, 혹시 해외에서 활동하셨던 건가요?

답 : 잘은 모르지만 일본에서 공부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충청도에서 대대로 대농을 하며 잘 사는 집이었답니다. 큰누이가 살아계시면 지금 아흔 살이 되는데, 소학교를 다닐 때 머슴을 두고 가마를 타고 다녔다고 하니 경제적으로 상당히 여유 있는 집이었을 것 같습니다. 유학파인 아버님은 일어뿐만 아니라 영어, 러시아어까지 4개 국어를 하셨다고 하네요. 이외에도 정치경제학을 비롯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신문에 나와 있는 것으로는 아버님의 귀국 후 활동 중 외신기자들에게 우리나라 주변의 국제정세를 영어와 러시아어로 설명하시다가 체포되신 게 많더라구요.

문 : 원래 충청도 출신이신데, 활동은 주로 부산에서 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답 : 물론 있지요. 제 증조부께서 동학혁명 가담자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총살을 당하셨습니다. 그 울분을 못 참으신 할아버지께서 일본과 가까운 부산으로 가셔서 아버지를 유학 보내셨습니다. 배워야 한다구요. 당시 아버지는 꽤나 영특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저희 집이 부농이라는 것을 숨기고 가족 전부가 부산으로 이사했구요. 할아버지는 농사지으며 아버지 유학비를 대셨고, 귀국 후 각종 사건으로 아버지가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돈으로 빼내셨다 하더라구요. 만약 아버지가 일제 때 독립운동을 안 하셨으면 아마 지금 저도 잘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저희 누나들은 그런 점에 있어 아버지를 살짝 원망하기도 하더라구요.

문 : 지난해 서훈 신청이 처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간 어떤 과정을 겪으셨나요?

답 : 네, 딱 10년 걸렸네요. 이명박 정권이 시작되던 해에 처음 서훈 신청을 했고, 1년 후에 연락이 오더라구요. 결과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3번 더 신청서를 넣었지만 마찬가지 결과만 돌아왔습니다. 왜 우리 아버님의 독립운동이 인정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었습니다. 혹시 연구소에 자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마지막으로 도움을 요청했지요, 아버님의 공적을 확인해 주기를요.
그런데 연구소에서 저희 아버님의 공적에 대해 너무도 자세히 조사해주고, 잘 정리해주었습니다. 사실 그 양식 그대로 보훈처에 제출했는데 그로부터 2달 후 서훈이 결정되었다고 연락이 오더군요. 서훈 결정은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보통 10년 이상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연구소에서 조사해주신 공적내용이 보훈처에 제출하는 ‘독립유공자평생이력서’에 잘 들어맞게 정리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연구소에 감사드립니다. 또 저와 같은 독립운동가 유족이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연구소가 힘써주시면 좋겠습니다.

문 : 아버님이 어릴 적 돌아가셨는데, 기억에 남는 아버님과의 추억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답 : 아버님은 늦게라도 아들 하나를 더 보시겠다고 저를 막내로 낳으셨어요. 남들에게는 구부정하신 할아버지였지만 저에게는 아버지였죠. 부산에 살고 있을 때 많은 분들이 저희 집에 자주 오셨어요. 그분들이 모두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동지들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제가 5살 때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셨습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같이 3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많이 힘들어하셨던 기억이 있어요. 가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숨어 사신 것 같아요. 부산에서는 항상 감시당하시고 조봉암 사건[1959년 이승만정권이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사건] 이후로 숨어사시다시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늘 우울해 하시던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8살 되던 해에 서러움과 가난으로 자진하셨습니다.

문 : 해방 후에도 아버님께서 감시당하고 숨어사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왜 그러셨는지, 또 조봉암 사건을 말씀하셨는데 어떤 연관이 있었나요?

답 : 제가 태어나기 전이거나 아주 어린 나이라 직접 듣거나 기억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로 주위 친척이나 누나들에게서 전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버님은 일제로부터 36년 만에 해방이 되었는데 또 다른 나라에 지배당할 수 없다고 하시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항상 ‘방첩대’의 감시 하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희 아버님과 같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시가 심했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더더욱 극심해졌다고 합니다. 이후 조봉암 사건이 있은 후에도 감시가 심해 사실상 가택연금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여서 집 밖 외출도 어려우셨습니다.
[방첩대 :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북한정권의 대남간첩활동 조사, 대북 첩보·정보수집 등 반공·방첩·정보업무 수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군사기구이다. 실제적으로는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사찰·탄압 등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49년 10월에 창설되어 1950년 10월까지 1년여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이후 유사한 방첩업무를 담당했던 부대까지 통칭하여 ‘방첩대’라 불렀다.]

문 : 증조부 때부터 무려 4대에 걸친 가족사가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떠나보내신 후, 회원님의 삶도 순탄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기까지 생활은 어떠셨나요?

답 : 아버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서 처음으로 청운동 근처 산골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1968년 김신조 사건이 일어난 후 청와대 인근 산속 마을을 전원 소거하면서 우리 가족들은 봉천동의 습지대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천막 하나 내주며 살라 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려서 그 상황이 나쁜지 어쩐지도 잘 몰랐었죠. 그곳에서 큰누나와 막내누나, 저 셋이 살던 중 큰 물난리를 겪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홀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때가 고1 때였는데, 세검정에 자리를 잡고 구두닦이 등으로 품을 팔아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려웠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죠.

문 : 서울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는지요. 또 어떤 계기로 지금의 광주에 오시게 되었나요?

답 : 가난의 대물림이란 것이 정말 무섭더라구요. 그 와중에도 대학에 가고 싶어 음대를 지원했습니다. 다행이 합격해서 밤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수십 년의 서울살이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포에 계시는 장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광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연고가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어 오히려 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대통령표창을 받으신 아버지가 계서 너무나 자랑스러운데, 그간 어려운 생활들로 저는 제 자식에게 해준 게 없어서 많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문 : 연구소와는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답 : 저는 2012년 연구소에서 만든 〈백년전쟁〉 특히 ‘프레이저보고서’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명박 정권 하에서 이런 것을 제작해서 배포할까, 거긴 어딜까, 이런 궁금증으로 찾다보니 민족문제연구소를 처음 알게 되었구요. 연구소의 면면을 살펴보고 이런 단체라면 적은 돈이지만 후원해야 할 듯해서 회원이 되었습니다.

문 : 얼마 전 광주에서 열린 ‘적폐청산 항일음악 토크콘서트’에서 광주지부 회원님, 상근자들을 처음 만나신 것으로 압니다. 첫인상은 어떠셨어요?

답 : 마음 같아서는 항상 연구소 행사에 찾아가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통 못 가보다가 제가 있는 광주에서 그것도 항일음악콘서트를 한다고 하여 꼭 참석하기로 마음먹었지요. 제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거든요. 처음 들어보는 ‘항일음악’이 어떤 것인지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 콘서트를 본 후 쇼크가 더 컸어요. 이런 항일음악은 중고등학교에서 알아서 자체적으로 교육하고 콘서트도 진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학생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이런 내용을 연구소가 전국을 찾아가서 하고 있다니. 더 나아가 현재의 음악교육에 친일음악, 친일음악인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에 우리의 교육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충격 속에서도 콘서트 자체는 정말 좋았습니다. 다만 시간이 길어 나이 먹은 사람은 오래 있기 좀 힘들었습니다. 무릎이 아프더라구요.

문 : 앞으로의 계획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답 : 하루빨리 아버님을 국립묘지에 안장해 드리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얼마 전에 신청했고, 지금 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아버님의 업적을 찾을 수 있는 만큼 더 찾고, 동학혁명으로 돌아가신 증조부의 행적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버님의 서훈 이후 후손에 대한 예우보상을 일정 부분 받게 되었는데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꽤 있더라구요. 독립유공자 자녀의 평균 연령은 87세, 손자녀는 77세로 모두 상당한 고령이십니다. 집안 막내인 저는 60대로 독립유공자 손자녀보다도 젊은 편에 속하죠. 그런데 친일파의 후손 중 자녀도 제 나이 또래는 상당히 있습니다. 김무성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겠죠. 그런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에 “독립유공자의 자손들은 3대까지 국가로부터 합당한 예우를 받도록 하겠다.”며 보훈 보상 체계 개선을 말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령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조금이라도 더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앞으로 조속한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 또한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의 자손이란 긍지를 갖고 연구소 활동에 더욱 관심을 쏟으며 연구소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도 찾아볼 계획입니다.

목, 2018/01/2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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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사랑의 노래, 독립의 노래
– 항일음악회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를 보고

송복남 경기고양파주지부 회원

 

종종 생각한다. 길을 걷다가 혹은 누군가 물어온 길을 알려주거나 앞서 걷는 다른 이의 등을 보며. 그것은 일종의 측은지심이거나 익명의 사람에 대한 애틋함인지도 모른다. 뒤따르는 막연한 후회감도 감출 수 없다. 그 감정이 순간의 감흥이거나 감상 따위가 아니기를 바라서다. 하지만 매일 보고 스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
사람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지나온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제 막 써내려가기 시작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수도, 또 앞으로 쓰일 이야기를 디자인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지난 이야기들. 거기에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 아는, 타인에게는 감쪽같이 묻혀버린 그만의 시간이 존재한다. 그의 감정과 흥분과 슬픔과 때론 분노와 절망 나아가 희망 같은 것들. 그 지점에 이르면 비로소 측은지심이 생긴다. 세상에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온전한 개인 순수의 경험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알아주기도 전에 묻혀버린 알 수도 없는 무(無)로서의 존재.
항일음악회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이 성도 없이 만주 벌판에서 산골짝에서 죽어간, 그 적막하고 두려운 공포의 시간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던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지난 이야기들.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 언젠가 누군가 부른 누군가와 같이 부른 노래. 노래가사들은 하나같이 독립을 이야기한다. 일제를 무찌르기 위해 싸우러 나가야 했고, 싸우기 위해 군가를 불렀다. 하지만 그 노래와 리듬에서 전투를 상상하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노래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불타오르는 누군가의 사랑의 속삭임. 한참 뒤 알았다. 그때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진정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전투를 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노래가 사랑노래처럼 들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민요를 빌린 ‘애국가’를 타국의 노래처럼 듣지 않고 우리 가슴속 울림처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아일랜드 목동의 하루를 노래한 ‘목동가’가 결코 목가적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도, 등잔 밑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자던 ‘압록강행진곡’이란 한국혁명군의 출전가가 사랑을 고백하러 가는 여정처럼 느껴진 것도. 진정 누군가를 그 무엇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절박함, 거기에는 조급증이나 우울, 천한 분풀이가 없다. 오로지 신명뿐이다. 타국의 리듬이 결코 다른 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것은, 우리 몸의 신명이 그 리듬을 불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랑과 신명은 동의어 같기도 하다. 밀양아리랑과 경기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을 모두 합친, 오래전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부르던 아리랑 노래. 토하듯 긁어 올리듯 부르는 아리랑 노래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사랑은 절박함이 있을 때 더욱 빛난다. 평소 삶이 지속적으로 그것을 요청하고 있을 때, 비로소 절박함은 노래가 된다.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는 이미 오래전 자신의 몸을 던져 사랑한 사람들,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의 애틋하고 힘 있는 노래다. 훗날 누군가 당신의 삶을 기억할 때 그 삶에서 사랑을 느끼게 될까. 내 삶에는 내 노래에는 얼마만한 사랑이 담겨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러면 노래를 부르자, 사랑노래를.

 

우리는 한국혁명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목, 2018/01/2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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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료

12월 27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1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료영수장, 전시채권 등이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심정섭 지도위원에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8/01/2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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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퇴니스

나도정말 함분 해보고 시픈 운동인데,

사지발란스가  문재인아이가!   $$$$$$$$$$$

정현과퇴니스테니스정호영?!…….주인마님포품보징금월세이다아내………….. 감동>>>>>>>>>>>>>>>>남녀기와북녀기가   언자는….희길해야  될낀데,

잘할랑가!   오데로……….오대로….오대오로….깅남민언련!  9090313151815!?$$$$$$$$$$

노통시절의  창녕지역의  글마가  생각나는군$$$$$$%>>>>>>>? (말도안대는정지디카사진참조)

목, 2018/01/2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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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의 솔직한 대화를 하자고 한 그 슬로건을 폐지시키고 국민들과 소통하자고 합니다.

 

 

블로그 총방문자 4,107,166 명을 돌파하면서 네티즌 여러분들께 고합니다.

http://blog.daum.net/hblee9362/11307710

 

 

독립운동가의 묘지 표지석을 보고도 국가보훈처는 불인정을 하는가?

 

▲ 홍덕문 선생의 묘비를 살펴보는 일행

 

 

▲ 소요산 입구에 위치한 홍덕문 선생 비각

 

동두천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옥중 고문으로 출소 직후 사망한 홍덕문 선생의 묘지가 포천 신북면 계류리에서 발견됐다. 홍덕문 선생은 구한말 애국지사로 본명은 병준, 본관은 남양이며, 홍복영의 아들로 1864년(고종1년) 10월 1일 동두천시 걸산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9년 음력 2월 25일 동두천 장날 정오에 1000여명의 군중을 인솔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만세를 연창하며 백절불굴의 의지를 보였으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결국 고문과 형독(形毒)으로 1923년 5월 17일 걸산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이런 선생의 얼을 되살리기 위해 1975년 동두천 노인회가 독립유공자추모회를 결성해 시민의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고, 1991년에는 동두천 애향동지회 주관으로 비각이 건립되었다. 현재 비각은 동두천 소요산 입구에 서있다.

 
동두천시는 홈페이지에 홍덕문 선생의 업적을 게재해 놓고 있으며, 추모비각은 1986년 4월 28일 동두천시문화재로 지정됐다. 동두천시가 1999년 펴낸 ‘동두천시 역사와 문화유적’을 보면 ‘1919년 3·1운동 때 홍덕문 선생 등이 1000여 군중을 인솔하여 동두천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도 홍덕문 선생의 묘지에 대한 사료가 없어 33년간 방치된 채 무연고 묘로 전락해 갔다. 본지 취재진은 지난 20일 김정자 시의원, 이명수 향토학자, 동두천문화원 이계홍 사무국장 등과 함께 포천 신북면에 위치한 홍덕문 선생의 묘지를 찾아 나섰다. 이계홍 사무국장에 따르면 홍덕문 선생의 묘지가 포함된 임야가 경매에 의해 소유자가 변경되었고 해당 소유자가 사업장을 확장하려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순간 홍덕문 선생의 묘지가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는 판단이 들어 부랴부랴 묘지의 실체를 확인하기로 한 것.

 
물어물어 찾아간 홍덕문 선생의 묘지는 관리가 전혀 안된 듯 잡초와 수풀로 뒤덮여 있었다. 또렷한 비문이 없다면 도저히 누구의 묘지인지 조차 확인할 길이 없을 정도로 세월의 풍파를 홀로 맞이하고 있었다.
향토학자 이명수 씨는 “홍덕문 선생의 묘지를 속히 이장해야 하는데, 선생의 직계후손들이 거의남아 있지 않아 동두천시와 남양 홍씨 종문에서 이장을 서둘러야 한다”며 후손된 도리를 망각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정자 시의원은 “이번에 묘지이장은 물론 홍덕문 선생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홍덕문 선생의 얼을 되살리고,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해 동두천시와 남양 홍씨 종문, 애향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덕문 선생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동두천시와 사회단체들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연천군에 거주하는 이희빈 씨는 홍덕문 선생과 대고모부(고모할아버지) 관계로, 홍덕문 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매번 자료부족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희빈 씨는 “보훈처가 요구하는 증거를 찾으려면 국가기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국가보훈처가 요구하는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을 호소해 왔다.

 
한편, 이장과 관련해 남양 홍씨 종문인 홍운섭 의원은 “근 시일 내에 종문회에 묘지 이전이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 알리고 종문회 차원의 도움을 모색하겠다”고 밝혔으며, 비각 세우기를 주관했던 애향동지회 김승희 회장은 “애향동지회 측에서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해 내부 중지를 모아 홍덕문 선생 유해를 동두천시로 이장하는데 지원을 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겠다”뜻을 피력해 동두천시로의 유해 이장이 본격화 될 전망이다.

 

 

 

홍승철기자([email protected])

 

 

양주.동두천신문& yangju.newsk.com 콘덴츠,정보 전재할 경우 출처를 명기하여 주십시오
Copyright by yangju.newsk.com

 

 

현충일 추념식 동영상입니다.

http://asx.kbs.co.kr/player.html?title=특집&url=1TV$20100606$special20100606_01_00_00_m&type=201&chkdate=20100607003324&kind=300_2week

 

위애서처럼 언론에서는 아니 국가에서는 이렇게 현충일이라고 추념식을 하면서 이명박 대통령께서 추념사를 하셨는데

아래의 내용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내동댕이 치고 계신지? 이 글을 보시는 전국민들께서 객관적인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이래도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칠 수가 있는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아 래 ———————

 

 

언제까지 이 치욕의 역사를 그렇게 방관만 하고 계시렵니까?

 

또다시 이 땅에서 이렇게 국회에 이렇게 일장기 걸리는 모습을 보시려고 그러십니까?

 

이 민족의 그 처절했던 과거를 잊으면 결코 미래가 보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짜 유공자를 배출해 온 국가 보훈처
http://blog.daum.net/56dhyoon/15846428

윤덕호 감독 님께서
‘ 동두천시 명예가 걸린 독립투사 홍병준(덕문) 선생
서훈을 정부에서 인정하게 하는 일 ‘ 이라고 하시면서
과거의 그 오욕의 역사를 재조명하시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니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께서 깊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행여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서는 이 억울한 사연을 꼬오옥 인지하시고
아래 동영상을 한 번 보십시오!
동영상 자료를 올립니다!

 

본 동영상 자료는 민족반역자 처단협회의 도움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http://blog.daum.net/hblee9362/11301461

 

 

 

 

그 언제나 밝고 명랑한 국민들의 웃음과 희망을 보게 될려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랍니다!

 

 

경기북부일보 기사내용입니다.

http://www.kgbnews.kr/sub_read.html?uid=3518

 

 

동두천문화원에서는 지난 10일 10:30 구한말 애국지사인 홍덕문 묘(포천 신북면)를 화장하여 소요산입구 지사각에 안장하고 중요무형문화제104호 새남굿 주관으로 위령제를 지냈다.

홍덕문선생은 1864년 동두천 걸산동에서 출생, 구한말의 애국지사로 자는 덕문(德文),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복영(福永)의 아들로 일제시대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했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형독(刑毒)으로 걸산동 자택에서 타계한 애국지사 홍덕문선생의 빛난 얼을 되새겨 의열(義烈)의 감(感)을 후세에 지표로 삼기 위하여 시민의 성금으로 추모비를 동두천상봉암동 산32-1번지 세웠으며, 홍덕문 추모비는 1986.4. 28 동두천시 향토유적지 제3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출처:동두천시청<콘덴츠는 해당기관의 홍보자료임을 밝혀드립니다.>

Copyright ⓒ 경기북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http://blog.daum.net/hblee9362/11304072

 

 

 

 

http://blog.daum.net/hblee9362/11304073

 

 
http://blog.daum.net/hblee9362/11304074

 

 

이렇게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위령제를 지낸다 천도제를 지낸다 하면서
행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렇게
이 분의 독립운동사실을 불인정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요산 관광 안내도에 홍덕문 선생 추모비 안내

동두천시 노인회에서 노인들께서 직접 목격하신 분들이 성금으로 세운 추모비 입니다! 십시일반으로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신 그 분의 넋을 기리고자 사비를 털어 세운 것입니다! 국가에서는 예산이 없다는 등 파기시켜 버렸는지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어데다가 감추었는지 알 수도 없는 기록을 찾아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목격자의 진술을 무척 심도있게 다루면서 어떻게 그 때 목격하시고 그 고문을 당하시고 그렇게 결국 돌아가시게 된 그 분의 모습을 보신 분들이 그렇게 국가에 상정을 하였어도 아니라고 들어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아니라고 우기는데 현충일을 맞이 한다고 행사를 기념한다고 공휴일로 지정하여 숭고한 애국애족을 기리자!

고, 하면서 이렇게 증거가 있는데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의 비문도 거짓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동북공정을 하여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고구려의 옛 땅도 우리나라의 땅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한 생각으로는 도저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막아낼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동두천시 사적자료입니다! 이렇게 지방자치단체에서 사적자료로 보관하고 있는 역사가 허위란 말입니까? 만약에 허위라면 이렇게 기록하고 관리해서는 아니될 것이지요! 그것은 아이들에게 ” 거짓말 하라! ” 고, 가르치는 꼴이 될 것이니까요!

지금이라도 꼭 밝히십시오! 그 오욕의 역사를 말입니다!

그 일가붙이들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하다못해 다른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봐 전전긍긍하던 그 때에 그래도 이 민족의 등불이 되겟다고 그 일본의 만행을 보다못해그렇게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다가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오직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던 댓가가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데도 아니라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동두천시에서는 향토문화유적 제 3 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유적이 국가보훈처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런데 왜?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 분께서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기록하여 자랑하는 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버젓이 내세워서 붙여놓고 여기를 보라는 듯이 경기도 동두천시민들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아닌가 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동두천시민들께서는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그 분의 독립운동 사실을 꼭 밝히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요산 역에 광장에 그렇게 광고를 하실 수 없지요!

그 분의 집안과 일가붙이들은 일본놈들에게 멸문지화를 당하였는데도

국가에서는 인정은 고사하고 그 분의 명예마져 회복시키려 하지 않는데

왜? 광고를 하면서 동두천시 자랑을 하십니까?

 

삼일절은 태극기가 부끄러운 국경일입니다.
홍덕문선생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서 추모서명을 받습니다.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33119

토, 2018/01/2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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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보고 연구소에서 정말 근거가 있는지 말해주세요.

일, 2018/01/28-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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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은 시민의 것…시민들에게 계속 다가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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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민중의소리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그 사이 해방을 맞이하고도 반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건국 시점과 친일 등 근대사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말 중국 방문 중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말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보수 진영에서 “1948년 정부수립이 건국”이라고 문 대통령의 발언에 반발하면서 박근혜 정부 시절 있었던 ‘건국절’ 논란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처럼 역사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난 12월 제11대 독립기념관장에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이준식 신임 관장이 취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이 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고 미래와 직결돼 있다”고 말한다.

이 관장은 16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진행된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 중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며 “또 다른 하나는 해방된 다음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구상이 해방에 담겼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이어 “임시정부가 만든 임시헌장 서문에 보면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으로 규정했지만, 오랫동안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구상이 실현되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한국이 지향해야 할 바가 독립운동 역사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독립운동 역사는 살아있다”고 강조했다.

이 관장은 역사 논란이 다시 불거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그냥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건 기본적인 거고 그 이상이 있다”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피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와 직결돼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이 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잘 녹여내서 보는 사람이 쉽고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도록 전시 공간을 구성하는 게 중요한 문제”라며 “독립운동이 지금 우리의 삶과도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형태로 전시를 더 강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질문: 독립기념관은 건립 30년을 넘겼다. 독립된 지도 70년이 훌쩍 넘었는데 젊은이들이 이를 되새기는 것이 왜 중요할까?

답변: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됐다고 말한다. 지금은 해방보다 독립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해방이라고 더 많이 표현했다. 해방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다음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 때 어떤 나라를 만들까에 대한 구상이 해방에 담겼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헌법을 개정한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라고 하는데 서문에 보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를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 해방 뒤 이런 구상이 제대로 실현 안 됐다. 일단 일제 식민지배 이후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려고 했는데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38선이 그어져서 민족이 분단됐다. 완전한 자주 독립하고 거리가 멀다.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상도 오랫동안 실현 못 됐다. 현재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바가 과거 역사,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 역사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이지만 아직도 독립운동 역사는 살아있다. 독립운동역사는 과거에 흘러간 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고 앞으로 미래와도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질문: 독립기념관을 과학전시관과 비교한다면 좀 어렵고 오래된 이야기라는 느낌도 든다. 영상과 모바일에 익숙한 젊은 층과 어린이 세대를 위한 시설이나 행사는 어떤 것이 있나?

답변: 몇 해 전부터 독립 기념관에서 어린친구들을 위함 체험학습관을 꾸준히 운영해 왔고 교육프로그램 중에서도 어린이들이 흥미를 이끌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왔다.

겨레의 집을 리모델링 중인데 그 중 일부는 ‘펀(Fun)체험관’이라고 해서 특히 어린 관람객이 뛰어 놀면서 독립운동 체험할 수 있도록 꾸미려고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독립운동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놀이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강화하려고 한다.

질문: 눈썰매장이나 캠핑장 등 가족들을 위한 시설이나 시기별 행사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데 소개를 한다면?

답변: 독립기념관이 가진 강점 중 하나는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의 전시관은 역사지만 동시에 독립기념관을 둘러싸고 있는 좋은 자연이 있다. 점점 가족단위 관람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자연과 접하면서 레크레이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기념관 전시관을 방문하거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역사를 접하는 좋은 기회를 독립기념관이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천안 지역사회와도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 1월1일에 해맞이 행사를 했는데 7~8천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독립기념관을 생활 속의 일부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시민에게 다가가겠다. 천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지역사회 주민과 계속 호흡을 해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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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여름 야영장ⓒ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그간 많은 전시, 행사, 교육을 수행했지만 이를 이용할 시민들에게는 좀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이다. 직전에 강북구청 근현대사기념관장도 역임했는데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문제에 대해 구상하고 있다면?

답변: 근현대사기념관을 운영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기념관이든 박물관이든 근현대사를 다루는 시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시민들과 결합하는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기념관은 아마 죽은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은 시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기념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 욕구가 뭔지 잘 파악하게 된 것이다.

독립기념관은 상대적으로 규모도 크고 대규모 전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상당히 효과적인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는 묘역 같은 현장감 있는 공간이 독립기념관에 없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문: 최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대중서도 발간했는데 어떤 내용의 책자이고, 발간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식민지근대화론이 처음 등장한 거는 벌써 20년 정도 된다. 우리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어서 오랫동안 학계에서 밀려있었는데 10여년 전부터 식민지근대화론이 힘을 얻어서 이를 바탕에 깔고 있는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면서 논란이 됐다. 지금도 일부 언론에서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논조를 펴기도 하고, 일부인사들이 주장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도 식민지근대화론은 살아있다.

독립기념관의 기본적인 입장은 독립운동 때문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인데 독립운동에 반대되는 식민지 지배 때문에 오늘날이 가능했다고 하는 설명은 독립기념관의 설립취지와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고 실제로 쉽게 풀어 쓴 책이 나왔다.

경제사학계에서 오랫동안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앞장섰던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가 집필했다. 허수열 교수가 경제사를 전공하셔서 경제사학회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맹점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 국정 역사교과서 같은 역사 논란이 다시 불거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답변: 일제 강점기에 벌어졌던 독립운동 역사를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독립기념관의 역할이 있다.

독립 운동가들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이루려는 독립에는 나라의 독립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 젊은 시민들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 운동이 민주주의 문제와도 연결돼 있고 독립운동이 지금 민족의 숙원인 평화 통일하고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통일문제 관련해서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이후 분단이 됐을 때 분단이 곧 민족상잔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정신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독립운동가들이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희생한 측면도 있는데 그런 면을 강조함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피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민주주의와 직결돼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중국을 국빈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현지시각) 중국 충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관람을 마치고 독립유공자 후손 등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7.12.16ⓒ제공 : 뉴시스

질문: 내년에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 일부 보수층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경 임시정부 청사 방문이나 건국 100주년이라고 국립현충원 방명록에 적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답변: 역사적으로 이야기하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의 과정이자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당시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라는 임시헌법을 재정한다. 임시헌법 제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규정이다. 그 규정이 현재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출범과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에서 공표한 제헌헌법 전문에 보면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돼 있다. 그리고 ‘이 헌법을 제정함으로서 민주공화국가를 제건한다’고 돼 있다. 재건의 핵심적인 과정은 임시정부 대신 정식 정부를 세우는 거다. 그래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데도 거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다.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 자료가 보여주는 바대로 해석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앞으로 이런 논란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문: 독립기념관도 건국 100주년을 앞두고 올해 준비할 일도 많을 듯하다. 어떤 점을 중요하게 준비해나갈 것인가?

답변: 문재인 대통령이 한 명의 독립 운동가라도 찾아내서 포상을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2019년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발굴이 중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향후 몇 년 동안 새로운 독립 유공자를 발굴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올해 범정부차원으로 100주년 기념 민간 사업회가 출범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독립기념관도 그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 같다.

또 독립기념관의 주요사업 중 하나가 독립운동가 인명사전을 내는 것인데 중간보고 겸 100주년인 2019년에는 독립운동가 인명사전 특별편을 내려고 한다. 특별판은 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분들을 대상으로 해서 100명 남짓의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할 것 같다. 그것과 병행해서 독립운동가 1000명 정도로 웹 전시관도 내려고 한다.

독립운동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문제,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사업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질문: 박근혜 정부 당시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정부가 잘못됐다는 점을 사과하고 후속조치를 마련 중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강하게 반발해 난항이 예상된다. 독립기념관장인 동시에 근현대사를 연구한 학자로서 어떻게 보는가?

답변: 전제는 ‘일본군 위안부’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일본이 국가의 이름으로 사죄를 하는 게 마땅한데 그걸 오랫동안 안하고 미뤄오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하면서 더 이상 과거 일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다 끝냈다고 그동안 주장했고, 이게 한일 관계를 정상화 하는 데 장애가 되니까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국민 정서상 잘못된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독립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정 재정 당시 제9조를 보면 사형제 폐지, 공창제 폐지가 명시돼 있다. 독립운동가들은 여성의 몸을 상품화한다는 데 대해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독립운동단체 강령 가운데서도 남녀평등 조항이 빠진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군 위안부도 식민지 공창제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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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시관ⓒ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단절됐던 남북 간 대화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해빙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립운동은 남과 북이 공유하는 민족사이고, 그 완결점인 통일국가 건설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교류협력이 진전되면 남북의 독립운동 유적이나 기념이 교류 등이 가능할까?

답변: 여건이 허락한다면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는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역사학계 차원의 교류도 있었다. 특히 독립운동이나 일본에 강제동원과 관련된 자료가 있으면 서로 공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실제로 일정부분 성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경색이 되면서 오랫동안 진행된 이런 사업이 중단됐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해빙된다면 다시 한번 이런 사업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굉장히 아쉬운 것은 내년에 3.1운동 100주년인데 3.1만세 시기는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북한 지역에서도 굉장히 많은 시위가 일어났는데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한 자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북한이다. 그래서 100주년을 맞이하기 전에 북한 자료도 입수해서 남북 간 공동사업도 할 수 있을텐데 앞으로 남은 시간에 가능할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질문: 이번에 취임 소식과 함께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라는 점이 다시 한번 알려졌다. 성장과정에서 집안의 내력이 영향을 끼친 점이 있나?

답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중‧고등학교때 무조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학원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들은 독립운동이야기가 많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사실 얼마 전까지 주위에 누구 외손자라는 이야기를 안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독립운동은 살기위해서 삼시세끼 밥 먹는 일이나 숨 쉬는 것이나 같은 일이지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예전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에 있던 외할아버지 묘소를 가거나, 외삼촌이 계시는 현충원을 가면 어머니에게 ‘여기에 계신 분들은 이름 석자를 남겨서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고, 현충원이라는 좋은 데서 쉬고 계시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희생당한 분들이 훨씬 많다. 그런 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래서 이름을 남기신 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높은 뜻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제가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가진 개인적인 꿈은 아주 번듯한 무명 독립투사 기념시설물을 하주 좋은 곳에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동상 같이 길을 가면서도 들릴 수 있는 그런 곳에 무명의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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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민중의소리

질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신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립기념관장이 되면서 시민단체 활동이 도움 되는 점과 또 달라지는 점이 있을 것 같다.

답변: 저에게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굉장히 득이 됐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경처럼 읊조리는 말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라는 이야기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게 역사라고 이야기 많이 하는데, 그야말로 책에서나 듣는 이야기지 실제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 치열한 문제 인식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부족한 게 많다.

다행스럽게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그게 누가 써놓은 멋있는 문구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 연구가 지향해야 할 바라는 것을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친일파 청산도 관여했고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등 현안에 대해서도 관여했다. 시민단체에서 얻은 경험, 시민들의 역사 인식을 독립기념관을 운영하는데 최대한 반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아마 독립기념관 관장이라는 공직을 맡아서 과거와 같이 자유롭게 시민단체 활동을 할 수 없겠지만 시민단체에서 활동에서 가졌던 문제의식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겠다.

질문: 젊은 학생들에게 강의도 꽤 많이 하셨는데, 독립기념관장으로서 젊은이들에게 꼭 남겨주고 싶은 교훈이나 정신은 무엇인가?

답변: 지금 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관심 갖는 게 일자리라고 한다. 청년 실업문제가 심각하니까 ‘살기 팍팍하다’, ‘기성세대에 비해 우리가 많이 힘든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돌이켜보면 내가 젊은 때도 그런 것 같다. 아버지 세대보다 우리세대가 더 힘들다고 생각했고 우리 자식 세대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한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나라를 잃었을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기록을 봤더니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 살고 있던 사람 가운데 10~20% 사람들이 해외로 나갔다. 그렇다고 번듯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 가서 노동자로, 만주에 가서 소작농하면서 힘들게 살줄 뻔히 알면서도 해외로 나갈 정도로 일제강점기 상황이 나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나간 동포도 다 독립과 해방의 꿈을 잃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께서도 만주에서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돌아가시기 전에 회고록을 남기셨는데 그중에 인상 깊은 것은 어린 시절 해마다 8월 29일 국치일이 돌아오면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하루 세끼를 굶었다고 한다. 단순히 나라 잃은 설움 때문만은 아니라 설움을 승화시켜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려고 한 것이다. 그런 의지들이 모여서 결국은 독립을 이뤘다.

젊은 세대들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희망을 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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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기념관 전경ⓒ독립기념관 제공

질문: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 청산’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친일이 가장 큰 적폐’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친일청산 작업을 했던 분으로서 친일청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저는 개인적으로 적폐의 출발점은 친일청산을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다른 민족의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에서 해방 뒤에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지 않은 사례는 한국밖에 없다. 그러니까 반민족 행위라는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청산되지 않는데 웬만한 잘못은 그냥 청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풍조가 만들어 진거다. 그래서 친일청산을 실패한 게 그 이후 쌓인 여러 적폐의 출발이라 생각한다.

질문: 젊은 층에게는 친일 청산 이야기가 그저 과거 이야기일 수 있다. 최근에는 유명 배우의 할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어 젊은 층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답변: 친일청산도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연좌제를 금지하는 것이다. 친일파 후손이라고 낙인을 찍고 멍에를 씌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할 때도 친일파 후손을 공개하는 것을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친일파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 대신 반성하고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정당했던 것처럼, 그래서 친일청산이 잘못된 것처럼 이야기할 때는 후손 이름을 공개하면서 잘못됐다고 이야기한다.

친일 이야기가 나오면 젊은 사람들은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냐’, ‘뭐하려고 다시 꺼내냐’라고 하는데 지금의 잘못된 역사는 친일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서 친일은 잘못된 일이었고 독립운동은 우리가 제대로 기려야 할 일이었다는 것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육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질문: 끝으로 독립기념관 관장으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답변: 독립기념관은 시민의 것이다. 시민들이 찾아와서 편안하게 이용했으면 좋겠다. 시작도 시민들이 낸 성금으로 출발했고 지금도 시민들의 관심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독립기념관이라는 이름 때문에 딱딱하게 느낄 수 있는데 독립기념관은 단순히 역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도 있다는 것에 많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자연과 역사를 아울러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김백겸 기자 [email protected]

<2018-01-21>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인터뷰] 이준식 신임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금, 2018/01/2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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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czrYA…

월, 2018/01/2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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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47r1f…

월, 2018/01/2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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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2018년>

2017년은 북의 핵무력의 완성과 트럼프 정권의 온갖 난폭한 만행으로 특징지어지는 한 해 였으며, 한국사회에서는 친미보수세력이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진 격변의 한 해였다.

중장거리 탄도미사일과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발사와 핵시험으로 완성된 북의 핵무장력은 화성 12, 14 그리고 15형의 완성으로 미국이 핵타격 범위 내에 들어왔음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이에 맞서 트럼프는 분노와 화염이라는 극단적인 수사를 동원하며 전쟁으로 위협하기도 하고 중국을 겁박해서 북에 대한 극단적인 제재와 압박 정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무능하고 부패한 박근혜 정권과 친미보수세력이 수백만의 촛불항쟁으로 붕괴되면서 개혁정권이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 격동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이처럼 격동적이며 발빠르게 전개된 정국의 변화는 북미대결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으며 이제 2018년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에서 정국이 펼쳐지려 하고 있다.

1. 미국은 북미대결에서 이제 완전한 피동으로 몰렸으며 세계 정세, 경제 현황에서도 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17년 6월에 이미 미국의 정보기관은 북이 핵탄두의 소형화 기술, 미국 전역을 범위로 하는 탄도미사일 기술, 탄도재진입 기술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최근에 북의 핵기술 완성은 앞으로 2~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여론을 내돌리더니 국방장관이라는 자가 북의 핵기술에 대해서 엄밀한 평가가 필요하며 최종적인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애매한 말을 해대고 있다.
작년에 이루어진 북의 각종 미사일 시험은 사실 핵무력의 완성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의 영향력을 축소하거나 자신들의 무능함에 대한 비판여론을 피하기 위해서 (혹자는 트럼프의 전쟁의지를 제어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도 한다.) 온갖 거짓여론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북의 핵무력은 완성되었으며 미국이 본토의 핵참화를 피할 수 있는 대북군사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 정세의 본질이다.

여기에 맞서는 미국은 피동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며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낙인찍힌 트럼프의 행동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북의 핵무력 완성에 맞서 자기는 더 크고 작동하는 단추를 가지고 있다는 유아적 태도를 취하는가 하면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전개되자 처음에는 비핵화 없는 대화는 필요없다느니 하다가 이제는 지켜보자고 하며 말 그대로 갈팡질팡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국회의원이나 정신과 전문의들이 트럼프의 정신을 진단해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트럼프 때문에 미국민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북과 핵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니 아마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안보위기 상황이 아니겠는가 한다. 하와이에서 있었던 실전 미사일 대피에 대한 경보발령의 오작동에 의한 일대 대혼란과 공포는 그 일단에 불과하다.

미국 경제의 성장 동력도 갈수록 꺼져가고 있다. 세일 가스, 4차 산업 혁명, 투기광풍을 일일으키고 있는 가상전자화폐들이 지금 미국 실물경제의 취약한 나상을 가리고 있지만 오랜 경험을 가진 경제 전문가들은 미국의 실업률과 산업생산 가동률, 화폐 유통률 등이 정상범위에서 벗어나 조만간 경제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가상전자화폐와 같이 정부 보증도 없는 화폐에 많은 자본들이 몰리고 있다는 것은 정부에 대한 경제적 신뢰가 밑바닥을 치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는 부분이다.

미국은 그 세계적 위상에 있어서도 결정적 분기를 맞고 있다. 지난 2017년 북의 핵무장력 완성 앞에 미국은 온갖 험악한 발언을 일삼고 군사적 압박을 최고조로, 광란적으로 가했지만 어떤 것도 북의 핵무장 완성을 막지 못하였다. 이로써 전 세계 앞에 미국이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17년 북의 괌포위사격 선언이 이제는 미본토 포위타격 선언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중국을 동원한 강력한 제재만을 외치는 미국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 유럽에서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의 정부들(영국도 국민들은 트럼프를 극렬 반대, 혐오하고 있음이 여러 계기들에 드러남)이 미국의 일방적 독주에 반대하거나 경계하고 있으며 중동 지역에서 미국은 결정적 패퇴 국면에 처해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간과 이라크전을 일으키고 중동의 리비아를 붕괴시켰으며 시리아를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나아가 미국은 이스라엘이라는 든든한 동맹국가와 석유거래를 기반으로 형성된 사우디 왕족과의 유대에 기초해서 중동의 반미국가들을 거세하고 친미 친이스라엘 연합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라크에는 친이란 정권이 들어서고 시리아에서는 서방과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의 연합 작전에도 아사드 정권은 건재하고 오히려 이란과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점차 반군을 제압해 가고 있다. 이는 시리아, 이란-러시아 연합을 태동시키고 있으며 예멘 전쟁과 저유가로 심각한 재정적자를 맞이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위기의식을 키우고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사우디 왕가의 난(현 국방장관이 나머지 사우디 왕자들을 위협해서 재산을 갈취한 사건으로 사우디는 이들 왕가의 재산이 1500조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도 이런 심각한 정치, 재정위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지난해는 또한 미국이 무시해 오고 업신여겨 온 러시아가 북미대결의 중재자로 나서면서 중국을 통한 북한 압박이라는 미국의 전통적인 대북정책에 큰 파열구가 생겼다. 최근 러시아는 크림공화국 병합과 시리아에 대한 군사적 지원, 북미핵대결의 중재자 역할로 미국의 패권에 파열구를 내는 하나의 세력이 되고 있으며, 최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신형 전차로 무장한 강력한 국방력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 자체를 급속도로 허물고 있다.

2. 북한은 이제 핵보유국으로 그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동북아 정세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가련한  처지에 반해서 북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핵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7년에는 연속된 탄도미사일과 수소탄등 신형 무기 시험 및 완성으로 인하여 북한은 이제 동북아 지역에서 군사강국, 실질적인 핵무력을 확보한 국가로 그 세계적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특히 작년 북한의 국무위원장 성명 이후 전 세계에 트럼프의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몰골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세계 각국에서 북한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또한 대북 적대시 정책을 펴왔던 온갖 황색언론들이 북의 핵능력이 문제가 있네 어떻네 하는 험담 자체를 일순간 늘어놓지 못하게 되었다.

자강자력을 기치로 내달려 온 북한은 최근 온 사회가 공사현장이고 도시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북한의 도시 건설은 단조롭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도시와 거리들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을 방문한 여행객들은 과거와 다르게 교통량이 늘어나 교통체증이라는 것을 느꼈고 수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핵무력을 증강하는 것은 사회적 자원을 비생상적인 부문으로 집중하는 것이기에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북한은 핵무력과 경제건설 병진노선을 국가 노선으로 채택하였고 국무위원장이 직접 과수원과 가방공장, 신발공장 등을 현지 지도하며 핵무력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경제 건설에 집중할 수 있다, 아직도 멀었다, 더 큰 복을 민중들에게 차려주자고 나서고 있다.

최근에 미대사로 지명된 빅터 차라는 인물은 구 소련은 어느 날 갑자기 붕괴되었다, 북도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국가에 불과하다며 지금 대화니 압박이니 이런 것보다 북한의 붕괴를 대비한 대책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북한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자립자강이며 지도자와 모든 민중이 하나의 대가족이 되어 전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은 지금 중국을 통한 고립, 압박에 무슨 기대를 거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중국이 북한과의 거래를 끊으면 동북3성의 경제가 심각하게 후퇴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중국도 이제는 북한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변명을 해대고 있는 형국이다.

북한의 경제발전은 철저히 자신들의 원료와 연료, 과학기술로 이루어져 나가고 있다. 핵무장을 완성할 수준의 경제력, 과학기술력이 북한의 경제 발전을 더 강력히 추동해 나갈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북한 스스로도 강력한 핵 억제력을 통해서 경제발전을 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한다.

또한 북한은 확고한 정세 변화의 축이 되고 있다. 2017년 국무위원장 성명 이후 세계 각국이 북한에 대한 험담을 함부로 해대지 못하였고 지금 평창 올림픽을 두고 형성된 남북화해 기류도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년 중반 이후 심심찮게 러시아가 북미관계를 중재하겠다, 남북관계를 중재하겠다는 발언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미국이나 한국정부도 관심을 가지고 러시아와 대화를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동안 동북아에서 변방 취급을 받았던 러시아가 6자회담을 비롯한 동북아 다자 대화의 전면에 나서 왔던 중국보다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은 다음 아닌 북한 때문이다. 북한이 중국을 통해서 국제 무대에 목소리를 내면 중국이, 러시아를 통해서 목소리를 내면 러시아가 그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정세 형국이다.

동북아 정세의 주도권은 이미 북한에게 와 있고 동북아의 주요 국가들은 이제 북한과의 관계 개선 없이는 갈수록 활로를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3. 한국사회에서 친미보수세력은 대중들로부터 버림받는 사멸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폐세력, 국정농단의 후손들로 낙인찍힌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친미보수세력들은 이제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언제나 상위권에서 밀려나는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번 6월 지자체 선거에서 과연 전국정당으로 생존이 가능할지, 영남에서도 지지 기반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 그들의 신세다.

한마디로 지금 국민들은 친미보수세력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를 못하고 있다. 그동안 부패하고 무능한 모습에 진저리를 쳐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국민들의 인식이 친미보수세력들의 활로 자체를 막아 나서고 있다.

자유한국당에서 떨어져 나온 소위 ‘합리적 보수’라고 표방한 바른 정당과 철새 정치인으로 낙인찍힌 안철수가 최근에 합당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합당이 중도 개혁 정당의 복원이라며 색깔론과 무능부패로 낙인찍힌 자유한국당의 색깔에서 탈피한다고 대대적인 정치쇼를 벌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바른정당에서 초등학생이 그린 통일염원 그림에 무슨 국기 시비를 건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며 자신들은 그들과 다르다고 홍보하는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국민들이 친미보수세력들에게 등을 돌린 이유는 보수가 안보와 경제는 잘한다는 환상이 철저히 붕괴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친미보수세력의 전망을 매우 어둡게 하고 있다. 친재벌 정책의 폐해로 한국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져 가고 있으며 북한 비핵화를 내걸고 대북압박을 강화한다, 대북붕괴전략으로 나간다고 떠들어대지만 기실 친미보수정권이 집권한 기간에 가장 빈번한 핵시험과 탄도미사일 시험이 있었다는 것을 국민들을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친미보수세력들은 자신들이 한국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를 튼튼히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고 결국 몰락의 길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문재인 정권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재인 정권 역시 친미보수적이고 트럼프와 찰떡궁합이라는 어찌보면 한심한 한미동맹 광대짓을 하고 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앞으로 닥쳐올 남북 화해와 협력의 대 파고 앞에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 우려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문재인 정권이 남북 화해와 협력의 흐름에 몸을 싣는다면 활로가 열리겠지만, 이에 맞서 나서며 친미반북적 행각에 경도된다면 결국에 심각한 타격을 면치 못할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은 평화와 민족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문재인 정권은 이에 호응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개선의 기운이 계속 확산되도록 하여야 한다.

*

새해를 맞이한 지금 우리는 세계 지평의 변화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1, 2월의 남북관계의 대진전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이 진전 앞에 한미군사훈련이 연기되고 트럼프 역시 감히 맞서지 못하고 있다. 새해부터 시작된 모든 정세 변화의 중심에는 북한이 있으며 그 역할은 더욱더 배가되고 앞으로 세계 정세 전반을 이끌어 갈 것이다. (끝)

월, 2018/01/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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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노&방 팀장&조 작가의 역사를 전하는 수다방!

그 첫번째 에피소드 의열단!!

팟빵 : http://www.podbbang.com/ch/14024?e=22519433

화, 2018/01/3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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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보고서2부를 보고 싶은데요, 어디에서 다운받을 수 있나요?

수, 2018/01/3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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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2일 개토제… 200 여명 암매장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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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사징은 공동조사단이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희생자 유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공동조사단

68년 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아산지역 민간인희생자의 유해가 수습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공동조사단 공동대표, 아래 공동조사단)은 아산시와 함께 오는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9일 간 일정으로 아산 설화산(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86-1번지 일대)에 묻혀 있는 민간인희생자에 대한 유해를 수습한다고 31일 밝혔다. 특히 아산시는 이번 유해발굴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본격 수습은 오는 2월 22일 개토제와 함께 시작할 예정이다.

이번에 수습 예정인 희생자 유해는 1951년 1월께 총살 당한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로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앞서 공동조사단은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 다량의 희생자 유해가 묻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관련 기사/”어린애들이 뭔 죄라고..” 300명 유해암매장지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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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1월 시굴조사에서 드러난 충남 아산시 배방리 산기슭 폐광터에서 발견된 희생자 유해. 공종조사단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해를 오는 22일 부터 본격 수습한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모두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공동조사단은 수습한 유해는 감식과 보존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마련된 임시 안치소 안치할 예정이다.

유해 수습과 발굴 과정에 참여나 참관을 원하는 사람은 공동조사단 측에 날짜를 미리 알려주면 된다.

공동조사단 관계자는 “유해발굴과 수습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한발 다가가고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입법화 요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에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한국전쟁유족회,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인권재단사람, 장준하기념사업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포럼진실과정의 등 1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2018-01-31>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아산 설화산 암매장된 민간인희생자 유해 발굴한다

수, 2018/01/3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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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우표발행은 우정사업본부 고유의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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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대통령 우표(국가기록원 홈페이지) 2017.7.25/뉴스1 © News1 © News1 정우용 기자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우표 발행을 철회한 우정사업본부의 계획에 반발해 소송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유진현)는 1일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가 우정사업본부를 상대로 낸 ‘기념우표발행결정 철회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경우 본안 판단 없이 끝내는 것을 말한다. 본안을 판단한 후 인용 또는 기각 결정을 내리는 것과는 다르다.

재판부는 “우표의 발행은 우정사업본부가 고유의 권한으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제3자의 발행 신청은 우표발행 계획을 수립하는 데 있어 참고하기 위한 것일 뿐, 신청인에게는 기념우표 발행을 요구할 수 있는 법률상 권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구미시는 2016년 4월 우정사업본부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을 신청했다. 이에 우정사업본부는 같은 해 5월 내·외부 인사로 구성된 우표발행심의위원회를 열고 위원 9명의 만장일치로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우상화’ 논란으로 비판이 거세지자 재심의를 결정했다. 이후 재심의에서 격론을 벌이다가 표결에 부쳐 철회 8표, 발행 3표, 기권 1표로 기념우표 발행 결정을 철회했다. 보존회 측은 “정당한 이유 없이 우표 발행 결정을 철회했다”며 소송을 냈다.

<2018-02-01>뉴스1
☞기사원문: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청구 각하
※관련기사

☞연합뉴스: 법원,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청구소송 각하(종합)

☞매일경제: 법원,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청구소송 각하

목, 2018/02/0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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