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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글: 이선용(91/정외)"12월 5일에 만나요!"

화, 2015/11/24- 12:46 익명 (미확인) 에 의해 제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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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학번들에 대한 긴급제언



12 5일에 만나요!

요즘 토요일이면 광화문광장 또는 청계광장에 나간다. 나가지 않은 주말엔 뭔가 찝찝한 느낌이며 다녀온 사람들이나 거기 있는 분들에 대해 죄책감 마저 든다. 지난 11 14일에는 민중총궐기에 나갔는데 누군가의 말이 들렸다.
“이 나이에까지 나오리라는 걸 예전 학생 때는 생각도 못했네.
주위를 둘러보니 나보다 젊어 보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은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또래들도 많지가 않다. 대부분 누나, 형들이다.

‘그 때 그 친구들은 다 어디 갔을까?

캠퍼스 안에서 사전 집회 후 교문 앞에서 최루탄에 콜록대던 기억. 한양대, 고려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동국대, 그리고 멀리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도 순회공연을 다녔지. 어렵게 신나를 구해 휘발유 섞어 현수막 천 / 화장지 뭉쳐 손 아프게 화염병 만들고 다음날엔 두려운 마음으로 운반했지. 종로와 을지로에서 흰 장갑 끼고 동을 떠 도로를 점거할 때는 곧 일어날 싸움에 대한 긴장에 앞서 잠시 쾌감도 들었던 건 젊은 날의 패기였을까?

X세대를 기억하십니까?

90년대 초·중반 학번은 동구권의 몰락 후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이다. 많은 이들이 구 공산권의 붕괴에 실망하여 떠났다고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를 넘어 진정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가능하리라 믿었다. 어찌 보면 80년대 투쟁의 성과 위에서의 낭만주의적 실험이었다고도 하겠다. 96년 여름의 연대항쟁을 끝으로 폭투는 점차 사그라들었고, 00년대 들어는 데모 자체가 없어졌다.

나도 졸업 후에는 거리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메이데이 말고는 집회, 시위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에게도 ‘민주정권 10년’이었던 것이다. 1야당 아닌 진보정당을 지지했지만, 민주정권에 그나마 ‘비판적 지지’로써 호사를 누린 것 같다.

‘그 때가 좋았는데….

다시 거리로 부른 건 MB였다. 그의 당선부터 시작된 허탈감은 광우병-한미FTA 정국과 4대강 강행 등으로 거리로 불려 나왔고, 문성근 선배의 백만민란 캠페인과 나꼼수 등 팟캐스트에도 관심 갖게 했다. 이후 나의 SNS는 일상에 관한 포스팅이 정치 이야기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ㅂㄱㅎ 선배가 되고 말았다!

“이럴 수가….
대부분의 우리 민주 동문들도 그렇겠지만, 나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삶의 희망이 사라졌다. 일도 안 잡히고 멍하니 보냈다. 팟캐스트만 들으면서 은둔에 가깝게 1년여를 보냈다. 박선배의 폭정은 놀라웠다. 청계광장 국정원 부정선거 집회에 혼자라도, 잠깐이라도 가보지 않으면 주말이 뒤 덜 닦은 느낌이기 시작한 게 이 때부터이다.
그러던 중 이건 또 뭔가? 작년 4.16 세월호가 터진 것이다.

아니, 이건 사고가 아니잖아?’

다시 한 번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점점 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고, 거의 모든 사람과의 자리는 이런 문제를 빼고는 대화가 불가능해졌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이 주제가 아닌 다른 소재나 일상생활을 논할 수가 없다. 세계 곳곳에서 무지막지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의 문제부터 풀기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
노동개악, 역사 되돌리기 등 끝없이 치닫는 박정권의 퇴행에 대해 김갑수 선생은 얼마 전 노유진의 정치카페 테라스 51(2015. 11. 5)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는 망해 가고 있습니다. 저들은 모든 힘을 가지고 날뛰고 있는데 이를 막아낼 세력이 없잖아요.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나 학계, 어디에든 예전만큼 힘이 있습니까? 망하지 않을 거라는 어떠한 낙관적 근거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는 거에요. 그러면 필리핀이나 멕시코, 아르헨티나 꼴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다시 민중이다!

요즘 민중이란 단어가 지양되고 있다. 전에 하도 많이 쓰여 식상해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되돌아가지 않았는가? 대체 얼만큼 후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민중의 궐기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더한 폭력으로 무력화시켰다. 닭장차와 물대포가 최루탄과 백골단 보다 세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이번 주말에는 종교계, 야당이 나서 평화시위를 한다니까 불허한단다.
그렇겠지, 지들 주도의 폭력시위가 원안이고, 원천적으로 집회/시위를 봉쇄하는 건 차선책일 테니까.
이번 2차 민중총궐기에 지난 달 보다 많이 나서지 않으면 저 놈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승리하지 않으면 철저히 유린당하는 것, 이것이 계급 간의 투쟁이다.

‘서강 민동의 깃발은 크다.

대략 1.5m×1m는 됨직하다. 전국민동 뿐 아니라 웬만한 단체보다 크다. 작게 새로 만드시라고 권했다, ‘사람도 적은데 들기만 힘들다. 그런데, 이번 주말은 지나고 나서 줄여 만들든 하시기 바란다. 이번 한 번만은 제발 서강민동기 아래를 채워줬으면 바래 본다.

옛날에도 시위 나가기는 귀찮았다. 덥거나 춥고 다리 아팠다. 느지막이 나가 폭투 안하고 얌전히 일찍 끝나기를 바랬다. 흠냐, 이런 생각을 또 할 줄이야. ~ 하지만, 당시에도 뺀질대던 선·후배, 동기들, 또 나 자신에게 다시금 말해야 할 것 같다.

귀찮아도 좀 나갑시다~’

우리가 20년 전 집회·시위에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 X세대 혹은 문화 시대는 80년대 민주화 시대와 그 세대에 빚졌다고 보지 않는가? 당시에도 그런 생각에 싸웠듯,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나간단 말인가?

옆에 있는 동지들을 믿기에

그 학우들과 다시 나가면 백골단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 화염병과 파이프를 주면 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시 한 번 정권 타도를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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