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아파트 가구의 주민이 베란다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소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제공=서울시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한 이번 여름, 서울시 도봉구 방학대원그린아파트 경비실에선 걱정 없이 에어컨을 틀 수 있었다. 여름철 아파트 경비실은 에어컨이 없거나 있어도 공동전기료를 걱정하는 주민 눈치를 보느라 푹푹 찌는 찜질방 같은 경우가 많다. 이 아파트는 동대표회의를 거쳐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고 경비실 지붕에는 소형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했다. 당연히 경비실의 에어컨 사용으로 인해 공동 전기요금이 인상될 것을 우려했던 일부 주민들의 걱정도 사라졌다. 지붕 위의 미니 태양광 발전기는 눈에 잘 띄어 주민들이 에너지 생산에 동참하도록 홍보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발전기 설치비는 서울시 ‘에너지절약 경진대회’에 참가해 받은 상금으로 충당했다.
입주민들이 전기요금을 아껴 경비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한 사례도 있다. 성북구 석관동 두산아파트 주민들은 2년 전 경비노동자 임금을 19% 인상하고 30명 전원의 고용을 보장했다. <경향신문>은 “입주민들은 2010년부터 경비노동자 임금 삭감 대신 전기료 아끼기에 나섰다”고 소개했다. 냉장고 설정온도 올리기, 에어컨 전기 코드 뽑기 등 노력을 통해 25개동 1998가구 중 1000여 가구가 절전에 동참한 결과 연간 1억원 가량을 절약했다는 것이다. 에너지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에너지 절약과 생산에 나서는 사람들, 즉 ‘에너지 시민’이 만드는 조용한 변화다.
에너지 시민은 어떻게 등장하게 됐을까. 에너지 시민을 적극적으로 불러낸 대표적인 정책은 서울시의 ‘원전 하나 줄이기’였다. 2011년 후쿠시마 핵 사고와 대정전(블랙아웃)을 겪으면서, 에너지 문제를 국가에만 맡기기보다는 지역 차원에서 적극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정책적 전환이 서울시가 내세운 새로운 정책의 특징이었다. 국가적 에너지 위기를 지역의 에너지 정책으로 풀어내겠다는 것이었다.
핵발전 확대를 내세운 중앙정부와의 불편한 긴장 관계를 감수하고라도 서울시가 ‘원전 하나 줄이기’라는 정책 슬로건을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전력소비량이 많은 대도시 지역에서 핵발전소나 송전탑 갈등과 같은 환경 불평등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책임지겠다는 윤리적인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이 슬로건은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시민의 일상 공간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돼왔다.
2012년 4월 수립된 이 정책의 목표는 시민과 함께 에너지 절약 및 효율화,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해 2014년까지 원전 1기의 발전량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생산하거나 절감하는 것이었다. 계획 수립은 소수의 관료와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개적 워크숍과 토론회를 수차례 거쳐 다듬어졌다. 햇빛도시 건설, 건물 에너지효율 개선, 녹색일자리 창출, 시민 주도 에너지절약 운동과 같은 정책은 이렇게 마련됐다. 전담 부설를 신설하는 등 조직과 예산을 갖췄고 시민사회가 적극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운영했다.
결과적으로 ‘원전 하나 줄이기’ 정책은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서울의 전력과 도시가스 사용량은 모두 줄어들었다. 2011년 대비 2015년 전국의 전력사용량은 6.3% 늘어난 반면, 서울의 사용량은 3.2% 줄었다. 같은 기간, 서울시 도시가스 소비량은 15.5%로 크게 줄었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원전 하나 줄이기 사업의 예산 지출로 인한 서울시의 고용창출 효과는 2016년까지 8,484명, 소득창출 효과는 3,930억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원전 하나 줄이기 정책은 슬로건에서 그치지 않고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자체의 정책 의지에 따라서 에너지 절약과 재생가능에너지 확대라는 과제가 결코 실현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지 않다는 긍정적 경험을 쌓았다. 가령, 적은 일조량 등 불리한 기상 조건으로 소극적 인식에 갇혀있던 태양광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 대책을 내놓은 대목이 그렇다. 서울시는 태양광 사업 활성화를 위해서 공공부지의 임대료 기준을 개선하고 소규모 태양광과 시민협동조합을 지원하는 발전차액지원제도와 같은 제도를 선도적으로 시행했다. 지자체가 정책의 계획 수립 후 이행 성과를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적극 공개한 데도 좋은 점수를 받아왔다.
2014년 8월, 서울시는 원전 하나 줄이기 1단계 사업을 마무리하고 2단계 사업인 ‘에너지살림도시 서울’을 시작했다. 이번엔 2020년까지 전력자립률 20% 달성, 원전 2기에 해당한 에너지 절감, 온실가스 1,000만 톤 감축이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목표를 설정했다. 자립, 나눔, 참여로 서울의 에너지를 알뜰하게 살림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슬로건의 이번 정책은 시민의 삶과 환경을 살리고 타 지역 주민들과도 함께 살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지역 주도의 에너지전환은 단순히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발전설비를 늘리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새로운 경제와 일자리 모델을 만들고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매개가 되고 있다. 서울시 태양광펀드에 1천 명의 시민들이 총 82억5천만 원을 출자했다. 지난 1년간 약 5,105MWh의 전기를 생산해 약 13억원의 매출을 얻었다. 연 4.18%로 출자한 시민들에게 배당하고 매출액의 1%는 에너지복지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서울에는 55개의 에너지자립마을이 있고 ‘에너지슈퍼마켙’ 등을 통해 에너지절약 노하우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에너지 문제뿐 아니라 먹거리, 주거환경관리, 일자리와 연계한 공동체 사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더 좋은 소식은 에너지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한 지역 단위의 행동과 네트워크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 46개 기초지자체가 참여한 탈핵-에너지전환을 위한 도시 선언을 시작으로, 2015년엔 4개 광역지자체(서울, 경기, 충남, 제주)가 ‘에너지전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제주도와 경기도는 2030년까지 각각 전력사용량의 100%와 20%를 신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는 목표를 제시했다. 지난달인 2016년 12월에는 안산, 당진 등 화력발전소와 원전을 보유하고 있는 25개 지자체가 ‘에너지정책 전환을 위한 지방정부협의회’를 구성했다.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제종길 안산시장은 “현재의 경제성 위주의 에너지 정책의 잘못을 바로잡아 환경과 사람이 우선하는 에너지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25개 지자체가 공동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너지 수요를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는 지역적 행동이 늘어나면서 정부의 낡은 에너지 정책 기조에 대한 의문은 커진다. 얼마 전 열린 한국전력공사의 초고압직류송전 기술 설명회에서 이런 의문은 더 심해졌다. 한전 관계자는 교류에서 직류로 송전 기술 방식을 바꾸는 문제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정작 왜 동해안에서 수도권을 가로지는 230킬로미터 구간에 초고압 송전탑이 400기를 새로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수도권 시민들이 에너지를 줄이고 재생에너지 생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마당에 정부는 동해안에 원전과 석탄발전소 건설을 강행하면서 대량 공급을 하겠다는 발상에 단단히 묶여있다.
다수의 시민들이 원전과 석탄발전소에 반대를 표명했고,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스스로 생산자가 되거나 추가 비용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재정과 기술적 대안은 충분히 마련됐으며 가장 필요한 것은 에너지전환을 위한 과감한 비전과 제도적 지원을 통해 에너지 시민의 적극적 의지를 실현하는 일이다. 2017년에 수립될 새로운 전력계획은 지역의 의욕적인 에너지전환 정책을 반영한 전향적인 방식으로 마련돼야 한다.
이지언
이 글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 <함께 사는 길> 2017년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