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주간 논평에 노동시장 구조개혁 관련 칼럼을 쓰게 됐습니다.
아래 기사 링크입니다. 창비 주간 논평에 실린 글은 허핑턴 포스트에도 실립니다.

창비 주간 논평
http://weekly.changbi.com/?p=6373&cat=3
허핑턴 포스트
http://www.huffingtonpost.kr/joohwan-lee/story_b_8013114.html?utm_hp_ref...

사람’을 생각지 않는 박근혜정부의 노동개혁

박근혜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높다. 정부가 개혁 대상으로 지목한 노동 측에서 특히 그렇다. 사회적 대화를 통한 개혁을 불신하는 민주노총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타협적인 한국노총도 반대 입장을 밝히고 올해 4월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했다. 정부가 현 상황의 피해자이며 개혁의 수혜자라 여기는 청년층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 캐릭터, ‘장그래’로 드라마에서 인기를 모은 젊은 배우가 고용노동부의 노동개혁 공익광고에 목소리를 빌려줬다가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럼에도 박근혜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혁 추진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외부에서는 잘 알 수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박근혜정부 내부에서 형성된 ‘진정성’을 믿는다. 정당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현재의 노동개혁 방안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느끼는 ‘행동의지’가 정부 내에서 울림을 잃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때문에 더 문제다.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들이 객관적인 데이터로 설득을 해도 통하질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막무가내 행동의지의 맥락을 명료화하는 것이 그 울림에 대항할 수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첫 단계일 것이다.

대통령 담화문에 드러난 정부의 진단과 처방

지난 8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을 검토한 결과, 정부는 다음과 같은 진단과 처방에 근거해 노동개혁을 동기화하고 있었다. (이하 큰따옴표로 묶은 단어나 구절은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한 것으로, 여러 개념을 은유적으로 이어주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다.)

먼저, 담화문에 나타난 현재 노동시장의 진단(diagnosis)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노동은 “경직”됐다. 경직된 노동은, 공공·금융·교육과 더불어 한국 경제의 신진대사 저하와 “체질” 약화의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국가경쟁력을 낮추고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노동이 경직된 이유는 “절벽” 위의 안전하고 풍요로운 땅을 “기성세대”가 모두 차지하고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절벽 아래 메마르고 불안정한 공간을 차지한 “청년들”의 절망을 키우고 있다. 청년들이 절벽 위로 올라 풍요로운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업들”이라는 이동기구를 이용해야만 하는데, 이 기계가 절벽 위 기성세대의 압력으로 인해 잘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담화문에 나타난 구조개혁의 처방(prognosis)은 다음과 같다. 노동의 개혁이 잘 이루어진다면 국가경제의 체질이 개선될 것이다. 그러면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이라는 “신성장동력”이 국가의 신진대사를 활성화할 것이고, 이는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높여, 세계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도록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개인과 국가의 선순환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노동개혁은 일자리(증대)다.” 일자리는 청년층과 기성세대 간 위치를 바꿈으로서 만들어질 수 있다. 더 많은 인건비를 받는 기성세대를 안락한 절벽 위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더 많은 청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저출산”에 묶여 있는 청년층이 생산성을 발휘하도록 할 수 있다. 따라서 임금피크제도 도입, 해고요건 완화 등이 필요하다.

정말 청년들의 절망을 생각하는 걸까

이상의 진단과 처방은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첫째, 노동시장 분절구조는 “절벽” 같은 ‘자연질서’의 산물이 아니고, 기업은 ‘기성층 1명 해고=청년 2명 채용’과 같은 공식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장치’가 아니다. 구조는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규칙이고, 이는 합의와 소통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 또한 기업은 불균등한 권력을 가진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생산과 소비를 두고 상호작용하는 정치적 공간이다. 담화문 작성자가 기업에 “(노동유연화가 되면) 정규직 채용에 앞장서 주셔서”라고 예외적으로 존칭을 사용한 것도, 그 메커니즘 뒤의 권력구조를 무의식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청년실업의 개선은 기업들만이 시장논리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 정부가 다양한 정책수단을 동원할 수 있으며, 사회적 연대를 요구하는 언론과 시민사회의 목소리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담화문은 이를 자연질서의 산물로서 “절벽”이라는 은유로 은폐하고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공기관 인턴제도를 “고용디딤돌” 프로그램이라 부르면서, 정부가 청년고용 문제 개선을 위해 이를테면 ‘사다리 정책’이나 ‘밧줄 정책’도 도입할 수도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그럼에도 다른 정책적 수단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은, 사실 청년세대의 “절망” 자체는 박근혜정부의 직접적인 관심 대상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할 것이다.

요컨대 박근혜정부의 일차적 관심사는 청년의 절망과 고통이 아닌 것 같다. 담화문의 구조는 “청년”이라는 행위자의 절망 상황으로 포장돼 있지만, 실은 “국가”의 시장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가 더 깊이 자리하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진실로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것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 “노동개혁은 일자리”라는 직관은 살아 있는 사람의 고통을 우선 고려하는 입장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환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2015.8.19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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