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 사회적 합의를 반기며

 

글 :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

기쁜 낭보

 

지난 21일 오전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과로사 대책 1차 합의문이 발표됐다. 큰 낭보였다.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처벌등에관한법률이 통과 된 이후라 겹경사가 난 느낌이었다. 20년 가까이 안전보건활동을 하면서 이렇게 큰 성과들이 쏟아지는 것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코로나192020년 배송물량이 크게 늘어나자 여기저기서 노동자들이 쓰러졌다. 2020728'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출범하기 전 4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드러난 것만 이 정도였다. 그 이후 대책위원회가 활동하는 동안에도 노동자들은 계속 쓰러져 연말에는 거의 15명 노동자들의 주검을 마주해야 했다. 싸우고 있지만 지속되는 죽음을 멈출 수 없었던 상황은 그야말로 참혹한 현실이었다.

 

사회적 합의로 사회적 편익을

 

추석명절을 앞두고 더 많은 노동자가 사망할 것이라는 추측 속에서 분류작업 거부 투쟁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택배사들은 분류작업 인력 한시적 투입이라는 조건을 걸었고 작업은 계속됐다. 그러나 회사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놀아나듯 사망해 갔다. 설 명절을 앞두고 노동조합은 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번 합의가 없었다면 파업이 진행됐을 것이다. 더 이상 노동조합은 회사의 거짓말에 놀아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론이 좋아하는 물류대란이라는 표제를 단 기사가 줄줄이 띄워졌을 것이다. 많은 소비자가 피해를 봤을 것이고 노동자들은 무임금을 겪는 고통(사실상 적자다. 각종 서비스 이용료, 자동차 할부금 등 고스란히 지불되어야 할 비용들이 있기 때문이다.)을 안게 되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한 사항이지만 합의가 필요한 한국사회

 

이번 합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를 부추겼던 공짜노동 분류작업을 더 이상 배송을 담당하는 택배노동자들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택배 운송업이 시작된 지 28년 만에 이루어진 쾌거이다. 따라서 택배사들은 택배노동자에게 분류가 완료된 상태로 상품을 전달하거나, 부득이하게 택배노동자들이 분류작업을 수행할 경우 추가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가 올 상반기 내 구축될 때까지의 과도적인 조치이다. 또한 당연히 분류작업에 소요되는 인건비는 택배사와 대리점이 분담하는 구조가 된다.

한편 소비자로부터 받은 택배비가 변종 리베이트로 작용하는 구조(G마켓 등에서 소비자로부터 2,500원을 받은 택배비를 택배사에게 1,700원만 지급함)를 정상화하고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낮은 택배요금(미국 9,000, 일본 7,200, 한국 2,269)을 일부 인상하는 등의 논의도 추가로 진행키로 합의했다. 변종 리베이트는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 푸는 불공정거래이자 불법이다.

반가운 내용 중 하나는 이제 관할 부처인 국토교통부가 나서서 분류작업, 작업시간, 불공정거래 행위 금지 등을 반영한 표준계약서를 마련하고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현장 갑질 근절방안(일방적 계약해지, 과중한 위약금 부과, 수수료 미지급·지연지급, 계약 외 업무강요, 비용부담 강요 등)도 표준계약서에 명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렇게 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 했던 것이다.

마지막 문제는 어떻게 이행을 강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택배사들은 이미 수차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국토교통부는 매년 택배사업자들의 등록인준을 진행하는데 등록인증 조항에 표준계약서 이행 여부를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택배사업자의 등록을 인증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강력한 이행 강제력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아쉬운 합의는 택배노동자 노동시간을 주당 60시간으로 제한한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주당 80시간 이상 일하고 있는데 60시간 상한이 마련된 것만으로도 좋다고 한다. 그렇지만 주당 52시간만 일해도 택배 노동자들처럼 추위, 더위와 싸워야 하고 무거운 택배를 하루에 수 백 개씩 다뤄야 하며 심야에도 일해야 하는 작업의 경우 과로사할 수 있다는 산업재해 인정기준에 따르면 60시간은 너무 높은 설정이다.

 

사회적 합의의 명품

 

금번 사회적 합의에 참여한 단위는 더불어민주당 민생연석회의,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고용노동부,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한국소비자연맹, 한국온라인쇼핑협회, 한국TV홈쇼핑협회, 한국통합물류협회, 전국대리점연합회, 우정사업본부로 이해당사자 집단 모두가 참여했다. 사용자협회 쪽의 참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기관과 소비자 조직의 입장이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회적 합의가 진행되었지만 약자, 소수자를 위한 합의를 이끌어 낸 적은 거의 없었다. 이는 통상 노··정 논의구조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는 정부가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나타났던 문제였다. , 정부의 입장이 소수자, 약자인 노동의 편에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은 항상 사회적 합의 과정에서 문을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아도 죽지 않고 일할 권리, 공짜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 일하는 사람이 보호받을 권리를 구현한 합의안이다. 소수자 인지적, 약자 인지적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진 모범 중의 모범이다. 사회적 합의는 신뢰관계가 구축된 고신뢰 사회에서만 구현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이러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던 데에는 사회전반의 저신뢰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자 운동도 시민사회의 한 축으로 작동하면서 저신뢰 구조를 조금씩 해체시켜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택배 노동자 더 있다

 

5만 명으로 추산되는 택배 노동자들 중 금번 합의에 포함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가 아니라 물류플랫폼 회사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이다. 쿠팡, 마켓컬리, 이마트, 롯데마트에 전속적인 운송 계약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새벽배송, 총알배송도 해야 한다. 노조가 없어 그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 해 집단감염 사태를 불러 온 물류센터 노동자들이 있다. 이 노동자들은 택배 배송을 위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주로 심야에 작업하는 노동자들이다. 이 분야에서도 노동자 여럿이 쓰러졌다. 이번의 혁혁한 성과를 멈추지 말고 택배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운송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 보호로 확산시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