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해설:
2천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중화권과 직접 접촉했을 당시, 역자와 역자의 주위에 있는 중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유가를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전통문화 전승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공통적 이해가 있었다. 한국은 중화권의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의 화교권과 함께, 소위 한자문화권의 전통문화를 잘 전승한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대륙은 공산주의 국가 수립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전통문화가 탄압을 받아서 소실되고, 공산주의 이념만이 생활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이 그 대표적 사례로 여겨졌다. 당시 불붙기 시작한 한류열풍과 그중에서도 특히 인기높았던 ‘대장금’이나 전통적 가부장적 관계가 잘 표현된 가족 드라마들에 대한 선호가 그 증거로 제시되곤 했다. 당시에 홍콩, 베이징 등지에서 생활했던 역자는 주로 업무관계를 통한 피상적 관찰과 접촉을 통한 이해에 기반해, 그런 주장에 동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2015년부터 대륙 사람들의 생활을 매우 근거리에서 밀접 관찰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그런 이야기를 수긍할 수 없게 됐다. 그 이유중 하나는 물론, 한국 사회가 98년 IMF 경제위기를 분기점으로 매우 급격히 서구화되면서, 가부장적 사회체제의 골간을 제외하고는 가족을 비롯한 전통사회적 관념과 습관들이 매우 급격히 해체됐기 때문이다. 또, 역으로 중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가 통합 이념으로 전통적 중화문화를 제시하면서, 전통사상을 복권시키고, 정부의 민족주의 자극에 힘입어 중국사회내에서 ‘국학’이라 불리는 전통문화 학습에 대한 붐이 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큰 사회체제’층위의 구조적 변화외에도 필자는 일상 생활에서 중국인들이 생활습관 혹은 인간관계에 있어, 한국이라면 이미 20~40년전에 사라진, 매우 전통적인 사고와 행동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자면, 몸을 둘러싼 각종 ‘양생’의 습관이 그러하고, 풍수등에 대한 실천적 고려, 결혼과 육아에 대한 집착이 또한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가족으로부터 시작해, 이웃, 마을, 사회, 국가로 폭을 넓혀 가면서 유지되는 향토적 혹은 전통적 관념이 매우 강력히 존재하며, 이는 개인적 차이는 존재할 망정, 도시민/농촌민 여부, 교육수준과도 상관성이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예속禮俗이라는, 전통을 쪼개 분석하는 이 논문의 관점을 채택하면, 이러한 ‘중국인과 중국사회에 대한 착시’를 좀 더 줄여볼 수 있는 것 같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한동안 현대화 과정에서 도전받고 해체됐다고 생각하던 중국의 전통은 민간의 생활문화를 구성하는 ‘속’이라기 보다는 국가 체제의 규범을 정의하는 ‘예’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사실 한국인들을 포함한 여타의 동아시아인들보다 ‘속’ 층위에서는 훨씬 전통을 뿌리 깊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또 한가지, ‘예’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분석과 논의도 가능해진다. 중국은 왕조 사회에서 서구적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유가와 이에 기반한 전제정치의 봉건성을 비판하면서, ‘예’를 부정했기 때문에, ‘예’의 전통이 해체된 것처럼 보여왔지만, 실은 중국 특유의 권위주의적 일당독재의 공산주의 체제가 가진 가부장적 성격, 전체주의적 성격 때문에, 일상생활까지 과도하게 대표되는 국가권력이 과거의 ‘예’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산당이 다시금 전통문화사상을 복원시키면서, 통치권력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이, 별로 어색하지 않게 보인다.
사실 이 논문과 저자가 인용하는 중국내의 수많은 민속학, 역사학, 인류학적 연구는 중국의 예와 속 전통, 즉 국가와 민간의 거시정치와 미시정치의 상호관계가 주왕조 이래 삼천년 동안, 발전 및 전승돼 온 것이고, 통일 제국의 실현이래, 국가가 대일통의 유지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온 것 때문에, 민간/지방은 국가/중앙의 독재를 인정해왔다는 역사적 근거와 이에 대한 합법성을 암암리에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런데, 현대 국제 사회에서 이러한 중국 특유의 정치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하고 분석하는 담론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도 함께 역설한다.
역자는 논문 저자의 입장과 중국 사회의 역사적 배경과 맥락, 그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한가지 있다. 역자가 보기에, 예와 속이 근대 이전에 유지하고 있던 미묘한 균형은, 현대중국에서,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가, ‘예’, 즉 국가와 중앙의 통치권력을 극적으로 강화시키면서, 심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는 아무리 황제의 권력이 막강하고, 이를 일상생활에 내면화시키기 위한 상징적 기제가 존재한다든가, 지역 향신을 통한 계급적 지배가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인민들의 일상은 국가/중앙의 간섭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고, 지역도 고도의 자치를 누리고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생활문화의 영역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보통화가 사용되기 전에, 관료로 임용되기 위해 익히던 ‘관화’를 제외하고, 일반인들은 매우 다른 지역 방언을 사용했기때문에, 그들의 의식주를 구성하는 많은 부분은 지역성이 매우 강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현재는, 정치뿐 아니라 경제, 문화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중앙으로의 일극화 현상이 매우 두드러지고 있고, 중국 정부의 문화적, 역사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애국주의 프로파간다가 이를 심화시키고 있다. 본 논문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일통의 개념마저도 단일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정치뿐 아니라, 사상과 문화, 경제 영역에 있어서도 일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고,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영역별 ‘황제의 권력’이 등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추동하는 ‘자본의 독재’가 ‘중화권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실천하고 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지역별로 상당한 역사, 문화, 자연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갖고 있던 중국이 외형적인 경제적 풍요로움의 이면에, 문화적으로 매우 단순하고 해상도가 낮은 사회로 점차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국가와 시장이외의 ‘민간’의 영역이 매우 위축되고 있는 점도 있다. 전통적으로 지역과 커뮤니티에 존재하던 민간, 즉 제3의 영역이 근대화와 함께 확장되면서, 국가와 시장을 견제하거나 보조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점차 활력을 잃고 있다. 중국의 예속전통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우려도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요:
“중국의 복잡한 전통 사회시스템안에서, ‘예禮와속俗의 상호작용’은 국가정치의 설계와 통합적 사회 운용에 기초를 놓았다. 또 ‘5.4 운동’이래 현대민족국가가 건설되는 와중에도 이 작용은 지속됐다. 예禮속俗상호작용의 핵심의의는 전사회의 폭넓은 참여를 통해서, 국가의 정치와 민간의 미시정치가 동조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 시스템이 같은 맥락안에서 움직이게 되고, 문화적인 상호인정의 방식으로 잠재적인 사회 위기를 해소하기도 한다. 글로벌라이제이션과,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중국은 국제사회의 규범, 국가의 법적권능과 민간의 자치권 등에 대한 다양한 고려를 요구받고 있다. 예禮속俗상호작용이 포함하는 전통정치의 지혜와 사회운동기제가 이에 도움을 줄 것이다.
중국사회에서 통용되는 말중에 ‘예禮’와 ‘속俗’은 일종의 사회현상이면서 동시에 담론이기도 하다. 비록 근본적 의의로 따지자면 담론은 사회현상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회현상에 대한 인지와 표현은 소위 ‘사회사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그래서 사회연구 측면에서 특수한 의의를 갖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회의 실재이든 아니면 담론의 형식이든 ‘예’와 ‘속’은 모두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사회에서 모종의 보편적인 현상과 사회사상의 일반 특징을 대표한다. 양자간의 상호작용을 실천하는 것은 ‘5.4운동’이래 현대민족국가의 건설속에서 지속됐으며, 국가 정치를 설계하고 전체적 사회운용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시각에 반드시 집어 넣어야 한다. 이 논문은, ‘예’(국가의 예제禮制), ‘속’(민중의 문화)과 ‘예속상호작용’을 학술적 분석도구로 삼아, 중국사회 속의 예속현상과 담론에 초점을 맞추고, 이들이 사회변천시기에 돌출되는 표현에 주목하고, 국가역사진행과정과 민중생활실천의 분석 프레임안에서, 중화문명내부에서, 스스로 제어하는 전통정치의 지혜와 사회운동의 기제간의 균형을 잡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 ‘예’, ‘속’담론의 전통구축
‘예속禮俗’과 관련된 주제는 중국에서는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다루어져왔다. 중국전통사회에서의 자술서로써,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인지와 개괄로써, 다양한 역사 서술안에서 다양한 주체를 통해 그 특징이 규정되어 왔다. 하지만, 일종의 담론으로써는, 이미 선진先秦시대의 다양한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이는 후대까지도 이어진다. 특히 예禮와 속俗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써, 하나의 단어처럼 사용돼 왔다. 그래서, ‘예속’은 중국전통사회안에서는 예속상교禮俗相交로 일컬어진다. 일종의 사회적 상태이자 문화특질이 된 것이다. 그 유래를 찾아보자면, 예禮는 원래 선진시대에는 상류계급의 형성과 함께, 혹은 지역의 민중들이 장기적으로 만들어 온 생활습관이다. 하지만, 중국사회의 언어사용 중에, 둘은 나뉘어질 수 없어서, 서로 작용하면서 틈새를 메워가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를테면, 펑무彭牧의 다음 설명과 같다:
유교의 예禮는 오래된 습속안에서 굳어져서 텍스트가 됐는데, 문화전통이 시종일관 그 근원인 속俗과 거리를 두고 상호작용해 왔다. 오랜 역사속에서, 엘리트들이 예를 속으로 전환시켜왔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간의 속이 계속 예로 발전해왔다.
예와 속은 다른 사회계급안에서 피차 각각의 사회실천행위를 대표해왔다. 엘리트들은 속을 천시함으로써, 예의 순결성과 정통성을 지켜왔는데, 속이 예에 아주 쉽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상의 예는 속에서 만들어지고, 속에서 정제되어 나온 것일뿐 아니라 속과, 실천의 전통을 통해 지속적으로 밀접하게 상호작용해왔다. 속과 현실생활, 구체적인 실천과 밀접한 상관이 있고, 민첩하게 변화해왔다. 속이 예에 근본적인 동력을 제공해왔다. 그래서 양자는 피차 대립과 긴장속에 발전해 왔다.
유학을 그 사상적 뿌리로 삼는 중국의 엘리트는, 문화를 구축하고 생활속에서의 실천을 병행해왔기 때문에, 생활속에 문화를 만들고, 생활의 실천을 문화의 근본으로 삼았다. 언행에 치우침이 없이 중용지도中庸之道를 따라야 한다는, 일종의 철학사상이기도 하고 실천전략으로 보기도 해야 한다. 소위 ‘입덕立德 – 도덕관념을 바로 세움’, ‘입공立功 – 공동체를 위해 공을 세움,’ ‘입언立言 – 말을 바르게 함’ 등 생명이상理想의 설정을 통해, 현실사회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중 개방의 자세를 유지하고, 몸과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며, 집단문화의 창조적 활력을 키워 나간다. 이러한 중용적 태도의 주장은 사회의 균형잡힌 거버넌스를 촉진하고, 일종의 유연하고, 조화로운 정치적 지혜를 표현하기도 하는데, 전술한 예와 속의 담론이 즉 그의 중요한 표현이다. 비록, 예와 속은 본디 상하 구분이 있지만, 양쪽의 공생을 주장하므로, 개인의 수양 측면에서 ‘치중화致中和 – 도덕 수양의 정도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극단으로 가지 않음 (중용中庸)’의 경지를 지향하게 된다. 사회운용 층위에서는 소위 ‘정통인화政通人和- 국가는 안정되고 인민은 안락한 생활을 누린다’를 목표로 삼게 된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리, 문인, 신사는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그 임무로 삼는데, 예와 속 두 글자가 상호작용하며 위로는 나라를 운영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입신의 근본으로 삼고, 이것은 모두 사리에 맞는 일이다. 의문의 여지가 없이, 오래전부터 엘리트들의 예와 속 담론은 위로부터의 ‘이풍이속移風易俗 – 옛습속을 개조하다’이든지, 아니면 아래로부터 ‘인속치례因俗治禮 – 민간의 습속을 관이 받아들여 법규가 됨’였고, 상황에 맞춰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삼례三禮 (역자주: 東漢시대부터 사용한 표현, 周禮,儀禮,禮記를 뜻함)를 학습하는 가운데, ‘예속’문제는 중국 고전사상의 대명제이다. 예를 들어 ‘以八則治都鄙…..六日禮俗’ (주례周禮, 대재大宰 – 역자주: 주나라의 법률인 팔칙중에 도시와 농촌을 다스리는데 백성은 예속으로 다스린다는 표현, ‘禮俗,喪紀,祭祀,皆以地媺惡為輕重之法而行之“(주례周禮, 地官司徒,遂人/土均 – 역자주: 주나라의 관직인 토균이 관장하는 일로 그는 토지세를 균등하게 부과하는데, 예속, 상기, 제사를 조화롭게 해야 한다. 모두 토질의 좋고 나쁨으로 법의 경중을 실행하여) “古者……其歲時聚會以為朝覷,聘問,歡欣交接以為射鄉,食饗,合眾興事以為師田,學校,下至里閭田畝,吉凶哀樂,凡民之事,莫不一出於禮;由之以教其民為孝慈,友悌,忠信,仁義者,常不出於居處,動作,衣服,飲食之間。蓋其朝夕從事著” “鄉飲酒之禮,六十者坐,五十者立以聽役政,所以明尊長也。。。。。。孔子曰:’吾觀於鄉,而知王道之易易也’” (儀禮,鄉飲酒 – 역자주: 주나라 때, 국가가 권장하는 풍습으로, 지방관료/귀족들이 술자리를 베풀때, 어떤 예의와 순서, 형식을 취해야 하는지, 자세히 기술한 내용), “道德仁義,非禮不成;教訓成俗,非禮不備“,“禮從宜,使從俗”,“君子行禮,不求變俗”(禮記,曲禮 – 역자주: 도덕과 인의도 예로써만 이룰 수 있다.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것도 예가 없으면 실행할 수 없다. 예는 때에 따라 마땅한 바에 좇고, 사신으로 가서는 그나라의 풍속을 따른다. 군자가 예를 행하는데, 그 나라의 습속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등. 한漢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전하기를 “子曰:禮失而求諸野“(漢書, 역자주 – 공자왈, 상류사회의 예의가 무너질 때는 농촌에 가서 다시 찾는다. 오히려 편벽한 변방에 예의가 잘 보존돼 있을 수 있다.)이와 같이, ‘예’가 갈수록 제도화하는 가운데, ‘속’은 점점 백성들의 생활속으로 숨어들어 가면서도 하지만 끈질기게 계속 국가의 정치제도 운용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이는 세계문명의 보편적 발전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안정과 인민생활의 안락 政通人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간에서 유행하는 노래 등의 풍속을 관찰하여 정치의 득실을 파악하는 것 命太師陳詩,以觀民風”,”지도층인사는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君民者,彰好以示民俗” 등의 제도설계가 필요했을뿐더러, 선진先秦시대의 ‘중국문화의 특색’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이 지속돼, 국가가 흥하는 전형적인 조건으로 후대에도 제시됐다:
노공魯公보친伯禽은 노魯나라에 분봉된 후, 삼년후에야 주공周公에게 보고하였는데. 주공이 왜 늦었느냐고 묻자, 속을 변화시키고, 예를 혁신하는데 삼년이 걸려서 늦어졌다고 답한다. 반면 태공太公은 제濟나라에 봉해지고, 5개월만에 주공에게 보고하였는데, 어찌 이리 빠르냐고 묻자, 군신의 예를 간소화하고, 현지의 습속을 따랐다고 답한다. 주공이 한탄하기를 “노나라가 후대에 제나라에 복속되겠구나 ! 정치가 복잡하면 백성이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쉬우면, 백성은 따르게 마련이거늘”
근대중국에서 국제적 시각으로 세계를 내다 본 첫번째 인물로 평가받는 황준셴黃遵憲은 여전히 “예속”을 들어 시대의 병증을 고칠 수 있는 이상으로 삼는다. 옛습속을 바꾸고, 나라를 다스리며 민중을 변화시킨다라는 등의 전통적 예속정치가 중국정치 현대화의 살길이라고 주장했다. 십여년 넘는 외교관 생활을 하며, 넓은 바깥 세상을 보고 들은 그가, 깨달은 것은 “태평한 세상은 민이 주인이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강력한 “속”의 힘이었다:
예라하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다. 인정人情에서 나온 것이다. 인정은 무엇인가 ? 일종의 습속이다. 강이 흐르는 곳과 산이 있는 곳이 구분되어, 오가는 것이 수월치 않고, 지역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습속도 다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습관이 오래 지속되면서 형성되면, 바뀌기도 쉽지 않다. 예와 속은 모두 여기서 나온다. 퐁속은 시작할 때는 아주 미세해서, 쟁취할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한두명이 시작하고, 수백 수천명이 동조하고, 사람과 사람간에 교환되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전해지고, 따라서 행하고, 그렇게 만들어져서, 비록 그 시작은 비루하고 미약하지만, 나라 전체의 습속이 되기도 한다. 큰 지혜로도 통찰하기 힘들고, 완력으로 끌어 당길 수도 없으며, 엄한 사법체계로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방관자의 입장에 서거나 혹은 겉으로만 이해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예인 것이 이쪽에서는 속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온나라 사람들의 습속이 되고, 거기서 뒤집히거나 고정될 수도 있어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습속이 사람을 속박하게 되는 것이다!
황종이黄宗羲, 구옌우顾炎武, 황준셴黄遵宪등의 근대정치사상가들 이후에, 베이징대학이 발간한>으로 대표되는 현대가요운동은 현대 지식인들이 민요, 이야기, 풍속을 발굴해낸 대표적인 움직임이며, 예속전통 현대화의 시작이었다. 민요, 이야기, 풍속 등 전통의 ‘속’은, 당시는 정통문화의 변이 혹은 타자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1928년, 구지에캉顾颉刚은 >의 발간사에서, “귀족 중심의 역사와, 성현聖賢문화가 고정적인 생활방식이 되는 역사도 타파하여, 민중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자 한다.”라는 말로, 민중역사관을 고양하려 했다. 이러한 현대문화교육을 받은 신지식인 계층은 구국의 일념으로 민중의 강렬한 역사적 사명감을 일깨워서 민간문화가치를 발견하고 혁명과 개혁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려 했다. 이러한 목표하에, 필연적으로 당시 사회와 문화이해가 “예”와 “속’으로 나뉘어서, 대립하는 상태가 됐고, 백화문운동이 제창되기에 이른다. 귀족의 문장과 대립하는, 민중의 지혜를 계몽하기 위한 문학혁명이 시작됐고, 옛문화의 통일천하 사상 등등을 전복하려 했다. 전통의 예와 속의 언어는, 이때, 명확하게 이원론을 적용하여 ‘민’, ‘민속’, ‘민간문예’가 당시사회의 절대다수 서민들의 생활과 문화로 일컬어지고 ‘민심’이라고도 설명됐다.
‘민간의 지혜’ ‘민생’등의 개념이 사회혁명과 개혁의 기반 역할을 수행했다. 뤼웨이呂微는 현대국가가 민족주의 이념에 기대는 것은 사실 어떤 문화전통, 특히 숨어있는 민간문화 전통의 구조를 재발굴하고 전환시킨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상상속의 ‘민족국가’의 문화 공동체가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5.4운동’시기 전통속에서 발굴된 민간이 표상하는 것은, 우선 일종의 사회성과 현대성 이념이다. 학자와 혁명가가 발견한 민간에 연관된 그 표상과 이념은 협애한 민족관념을 초월할 때, 민간문화는 당연히 일종의 현대민족국가의 문화창조 역량이 된다. 자오실위趙世瑜는 더 나아가서, “중국의 민속학자가 최초로 발견한 민중과 자아의 인식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중국의 사회문제와 문화의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함으로써 여기서 자신의 회귀지점을 찾는 것이다. “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인, 지행합일, 즉 문화의 건설과 생활의 실천을 병행할 것을 강조하는 유학의 전통은, ’5.4운동’에 참여한 엘리트 지식인들에게도 이어졌고, 면모를 일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그들은 ‘민간’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전통의 ‘사대부’와 결별함으로써 실은 근현대사회의 담론안에서, 자신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신식 ‘엘리트’의 역할을 창조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사회에서 ‘예’와 ‘속’의 분리가 단순히 ‘관’과 ‘민’의 이분법이 아니었지만, 신식엘리트들은 ‘계몽’의 필요에 의해서, 문화범주의 ‘예’, ‘속’과 사회신분인 ‘관’과 ‘민’의 직접적인 대응을 현대적 의미의 ‘예’와 ‘속’의 대립 혹은 대항으로 설정하는 선구자가 된 것이다. 비록 5.4 운동에 참여한 엘리트집단은 관료 집단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였지만, 개별적으로는 다양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그들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전통과 현대, ‘학문’과 ‘국가의 일’사이의 어디쯤엔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스胡適, 류반농劉半農, 루쉰魯迅, 져우쭤런周作人, 구지에강顧頡剛 등 5.4운동의 주역들은 그런면에서 모두 대략 시대의 징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민간가요운동을 제창할 때, ‘학술적’인 면과 ‘문예적’인 면의 이중 목적을 설정하고, 초기에는 점차 격렬하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거침없이, 작지만 끈질기게, 문화적 사명을 가지고, 천마가 하늘을 날듯, 문학혁명, 문학과 역사학술과 사회계몽 사이에서 주유하고, 얽히면서 그 인생 궤적이 공과 사의 사이에서 많이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했다. 그후 전체 민국시기를 거치며, ‘예속개조’는 중국사회내부에서 정부에서 엘리트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는 주제였고, 관련된 학술적 실천은 사회문제로써 전개됐다. 비록 소수의 학자들이 자신과 민중, 학술과 정치간의 관계를 반성하며, 전체적 의미의 민중생활과 민간문화를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했으나, 시대정치의 요구와 충분히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운동과 학술담론시스템안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변경에 위치하게 됐다. 전통적인 예와 속 담론은 일단 근현대사회로 진입하면서 복잡하게 서로 얽히고, 작용하는 가운데 변신해서 나타났다: 션지에沈潔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렇게 슬픈 눈빛을 지닌 개혁가들이 진정으로 중국 민중의 생활세계와 정신세계, 그리고 역사성을 가진 생활현장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자명하고 정확한 입장, 그리고 낙관적인 진보관념은 회의를 낳지 않았을까 ? 개조가 정말 필요하기나 한 것인가, 어떻게 개조하여 새로운 태도와 생각을 만들어 낼 것인가 ?
바로 이런,일종의 긍정적 태도로 민간사회로 들어가는 노력이, 학술연구방식으로써 전개하는 문화혁신운동이 가진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돕는다: 이것은 상류사회 사람들이 하층민중에 대해서 고개를 숙이는, 측은지심에 기반한 사상과 태도의 개조가 아니라, 대등한 눈높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다보니, 역사속에서 매우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개조자’들이 민간문화에 의해서 역으로 개조를 당한 면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은 매우 오래전에 ‘예속사회’를 형성했고, 국가의 정치와 민간 자치가 협력하는 사회형태를 만들어 냈다. 우선, 일종의 사회적 사실로써, ‘예’와 국가정치가 결합하여 일종의 문화제도를 만들었고, 한편, 매우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서 ‘속’이 지역생활 속에서 민간의 ‘마이크로 정치’의 다양한 사회양태를 만들어 왔다. 이를 기초로 하여, 중국사회는 유구한 역사를 거치며 예와 속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해왔다. 이런식으로 ‘국가대일통’의 이념과 지방사회 발전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담론을 만들어 나감에 있어, 예와 속은 점차로 중국전통사회안에 정부와, 지식인 엘리트 그리고 일반 민중의 중요한 연결도구가 됐고 다른 사회계층안에서 각기 다른 작용을 수행했다. 이를테면, 국가통치계층에게는 나라와 민중을 다스리는 기술이 됐다. 지식인 엘리트계층은 이를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근본으로 삼았고, 민중은 사회교류의 수단으로 여겼다. 이렇게 형성한 예속사회문화는 각 그룹에 소속된 내부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를 이해하며, 정치의 잠재규칙을 실행할 수있도록 내재화됐다. 다시 지적해야 할 것은, 비록 전통사회가 예로써 속을 다스리고, 예속상교禮俗相交가 사회정치의 이상상태로 보이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각 사회계층이 각자의 본분에 맞게, 실행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무슨 뜻이냐면, 예와 속은 각자가 병립하면서 전통을 지켜나감으로써만, ‘예속의 상호작용’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사회질서의 유효한 통제하에서 운용이 가능했다. 그러던 것이 근현대 중국에 와서 수천년간 볼 수 없던 변화가 일어났다. 한무리의 지식인 엘리트들이 “민중이 바로 가장 영광스러운 스승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예속사회’의 전통 구조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2. 예와 속의 현대적 함의
전통중국은 하나의 복잡한 사회 시스템으로, 민간생활과 국가정치간의 복잡하고 깊은 공생공존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사회성’의 기존 연구속에서, ‘국가대일통’을 중시하는 것은 과도하게 ‘예제하행禮制下行’의 사회흐름을 강조하게 되고, 반대로 지역사회를 중시하는 것은 과도하게 지방자치 시스템의 성장과 자주적 운용을 강조하게 된다. 여기서 중국사회에 대한 편견이 생기는데, 양쪽 극단에 서서, 관과 민, 국가권력과 민의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면, 양자간의 사이를 더욱 벌려놓게 되거나, 심지어는 양자간 대립을 강조하게 되고, 예속사회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지혜와 담론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
중국사회는 오랜기간, 일종의 대단히 견고하고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해왔다. 여기서, 과도하게 관과 민의 대립을 강조하고, 민간역량과 국가권력간의 다양한 형태의 협력을 과소평가하게 되면, 반드시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양자간의 복잡하면서도 깊은 공생공존관계에 대해서, 최근 학자들이 필드조사에서 출발하여,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등의 다양한 연구방법을 종합적으로 동원함으로써, “문화를 능동적인 요인으로 삼아서, 개인이 역사의 주체가 되게 하고, 그들의 일상생활 혹은 장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영향을 본다”라는 식으로 뚜렷하게 학술활동 결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연구경로는 지역 사회의 생활을 발굴해냄으로써,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중국사회전통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핀다. 그 후에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면, 의심의 여지없이 창조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앞서 언급한 필드조사 중심의 학술연구와 달리, 지행합일을 수행하며, 유학을 통해, 세상을 구한다는, 일군의 소위 ‘현대신유학’학자들이 위에서 아래로 중국의 전통을 찾아 해석하고, 현지와 해외사상과 실천의 다양한 상호작용속에서, 이미 백년을 넘게 이어 온 영향력 있는 일종의 사회문화운동이 있다. 양자가 모두 디테일한 사회생활속에서 사회질서의 건설을 증명하는 것을 중시하고, 각자의 본보기를 갖고, 객관적으로 서로 보완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본논문은 분량의 한계로, 주로 전자를 설명하기로 한다.
근대 중국의 예와 속의 초기연구에 있어, 개념층위에서, “예속禮俗”이 “민속民俗”을 대체해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거나 혹은 “민간신앙을 지칭하거나, “예속사회”를 중국사회의 특수한 성질로 간주해서 깊이있게 살펴보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남아 있다. 연구측면에서, 비록 보편적으로 예와 속간의 관계를 살펴본다고 해도, 예가 속에서 만들어진다거나 예를 낮추어 속으로 삼는다거나, 예속의 변화 등을 대충 설명함으로써, 중국사회와 문화역사를 지나치게 성기게 정리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민과 관 모두 학자들은, 예속이 상호침투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중국사회의 성질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창진창常金槍의 “주대周代예속연구”는 비록 주周왕조의 예의禮儀제도의 발생과 변천에 집중하고 있으나, “예가 속에서 생겨난다” “예와 속이 대치한다” “예는 등급이 있으나, 속은 제멋대로이다”등의 판단의 근거를 가지게 됐다. 양즐강楊志剛은 “예속이 중국문화속에서 하나의 특수한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고, 모순운동의 태세가 역사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고 제약을 가했음”을 비교적 일찌감치 의식했다. 하지만 본 논문은 주로 그 정합성과 유도성 역할의 역사적 정리에 치중하되, 상응하는 사회시스템과 기제의 전개에 대해서는 논술하지 않는다. 왕꾸이민王貴民은 중국역사상 “예속”이라는 말의 출현과, “예”와 ”속”에 대해 각각 나눠 정리했다. 그의 연구는 비록 여전히 중국문화사의 큰 얼개의 흐름에 그치고 있지만, 예와 속을 일종의 상호흡수와 결합의 운동형식으로 이해했다. 또 이것들이 중국 전통정치의 통치기초이자 사회적 인프라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었다. 샤오펑리邵鳳麗는 예와 속 담론이 표상하는 중국사회의 성질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였다. “예속은 중국전통문화라는 말의 개괄로 보면, 예를 속되게 하고 예로써 속을 절제하게 하는 생활문화의 모델이다.” 동시에 생활의 현실 층위에서 예와 속 양자의 긴밀한 관계를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상황에도 주목했다. 류즐친劉志琴은 예와 속의 출발점을 나눠 보고 “예속의 상호관계의 시각으로 중국인의 의식주를 고찰하면, 중국의 국가적 상황과 민간의 성질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출발해서, “중국사상사는 관념의 역사라는 한계를 벗어나, 예속상호작용에서 사상의 발전맥락을 설명할 수 있고, 이로써 중국사상사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데,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다:
예와 속은 국가와 민간이라는 두개의 다른 층위에 속한다. 속은 일단 예에 의해서 형성되면, 규범화기능과 강제적 역량을 갖는 칙령과 규정의 제도로 업그레이드된다. 그렇게 속을 교화시키고 통합되도록 요구한다. 엘리트문화는 예를 속화하여 지배이념을 하층민중에게 교육한다. 그렇게 평민들의 생활을 이성적으로 만든다. 엘리트 사상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예속을 통합한 결과로써, 예안에 속이 들어오고, 속안에 예가 침투한다. 예와 속은 상호의존하고, 접합하고, 쌍방이 엘리트문화와 민간문화간의 삼투를 강화한다…… 예속사회의 존재, 예를 속화하는 교화의 사명에 의해서, 엘리트사상의 사회화를 촉진한다. 예속과 관련한 사상은, 중국 특색의 명제를 풍부하게 갖고 있는, 일상의 학문안에 대량의 문헌자료를 남기고 있다. 아직 충분히 연구, 발굴되지 않았을 뿐이다. 중국사상사를 연구한다면, 관념으로써의 역사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사회생활을 고찰함으로써, 예속의 상호작용안에서 중국 사상의 발전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역사의 실제이고 이로써 중국사상사의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상술한 주제 연구의 최대가치는, 중국사회역사상 예와 속과 관련한 담론과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여, 예와 속의 분립과 상호작용 관계를 통해 중국사회의 일반성질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비록 포인트는 중국역사에서 위에서 아래로, “예를 속화하고, 엘리트사상을 사회화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민간사회에 대한 능동적 관계를 상대적으로 경시하면서, 중국사회에서 예속상호관계의 전체상을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과업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고, 사례별로 연구층위에서만 일부 성과를 내고 있다. 한편으로 소수의 학자들이, 예와 속의 관점으로 중국 역사를 통시적으로 관찰하는 대신, 특정 시대를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중국사회 전체의 정치 구조와 전체적 사회운동 기제의 관계를 설명하려 시도하고 있다. 뤄즐티엔羅志田은 남송시대부터 시작하여, ‘대일통’하에서 형성된, ‘군현郡縣이하의 황제권력 공백’에 대해서 사대부들이, “백성들을 예로 다스린다”라는 방식으로 하층민간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고, “우리가 꼭 지방과 국가의 대립 혹은 대치관계만을 주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서로 보조하는 관계에도 의미가 있다”라고 일깨워 준다. 치우보䎿波는 주周대의 예치禮治정치로 거슬러 올라가, 예속의 ‘상호관계’를, 향촌민, 사인士人와 군주의 정치적 관계와 사회실천으로 간주함으로써 중국 예속 전통의 전인민동원적 성격을 설명한다:
예속상호관계로 보자면, 성공한 정치적 실천은 (가문의) 종법宗法적 가치질서에서 (개인) 인격적 가치질서와, (사회의) 정치적 가치질서로의 승화가 필요하고 나아가 인격 가치질서와 정치 가치질서가 민중의 생활안에 다시 자리잡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착근만이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고, 민중이 지닌 본래의 숭배와 공경의 심리를 필요로 한다.
앞서 언급한 연구경로와 달리, 일군의 학자들은 필드연구를 통한 현지조사에서 출발해서, 중국사회안의 예와 속 담론과 예속상호관계의 전통, 국가와 지방사회의 대소정치전통과 연계하여, 비교적 개괄적인 학술적 관점과 탄탄한 연구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커따웨이科大衛이다. 그는 오랜 기간 중국의 여러 지역사회에서 필드연구를 하면서, 지방의 종교, 조상에 대한 제사, 커뮤니티의 축제와 절기, 민중의 문자 전통, 주택과 사찰의 건축 등을 “의의가 있는 예의禮儀의 표지로” 보여주고, 지역사회가 어떻게 자신의 특성에 맞는 역사를 획득하고 인정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국가의 대일통 문화역사를 받아들이고 통합하는지 설명한다. 이는 “지역 사회통합을 통한 중화제국 형성의 과정”을 의미한다:
역사상,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지역과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두 ‘대일통’을 추구했으나, 그들이 정의하는 대일통이라는 레이블의 의미는 꼭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지역의 전통을 대일통범주로 들이는 과정에서, 자아에 대한 인지와 대일통에 대한 인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노력해왔지만, 자신들이 만드는 대일통 모델과 다른 이들의 대일통 모델은 개념과 행위에 있어서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했다. 문제는 이런 차이가 얼마나 크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통적 이해와 정의에 따를만한 규칙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한가지 요구가 모든 지역에서 모두 같은 대일통을 말하는 것은 당연히 단지 표상일 뿐이다. 하지만, 대일통은 여러 층으로 중첩된 개념들의 조합이지, 각지에 존재하는 표준에 대한 단 하나의 요구가 아니다. 천년간 형성된 대일통은, 절대로 한 종류의 표상일 수 없다.
중국의 대일통 형성의 역사는 중국역사의 형성이기도 하다. 유가가 주도적으로 대일통을 외친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주장한 역사의 특정한 시기일 뿐이다. 중국의 대일통의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해서 건설한 역사이기 때문에, 대일통의 역사를 명백히 해야 이런 참여 과정을 명백히 할 수 있다.
이 문장은, 중국사회의 역사진행과정에 대해, 대일통의 국가건설과 지역사회발전간의 상호관계를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고, 이를 “중국의 역사형성”으로 간주한다. 실은 ‘예의禮儀라는 레이블‘이 다른 사회계층별로, 각기 받아들여져서, 다원적으로 교차운용됐기 때문에 중국사회의 ‘예속상호관계’가 발생했다. 하지만, 민간사회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국가에 대한 정통의식의 수립활동이, 외부인의 시각으로는 황당하게 보일지언정, 계속 일종의 전통으로써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고, 국가의 권위에 대해서, 민간에는, 천지전신天地全神, 우주의 도道와 같은 부호형식의 존경과 숭배의 태도가 유지되고 있다. 자오실위趙世瑜는 대규모 필드연구를 통해서, 큰역사와 작은역사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역사는 본래 하나이고, 생활이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④.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의 두가지 연구 시각을 결합시키고 있다.
이러한 두가지 연구 관점을 교직하여 만들어낸 “상하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이념은, 중국사회의 컨텍스트안에서 예속상호작용으로써 기본위탁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에서, 샨시山西타이유엔진사太原晉祠를 예로 들었는데, 여기서 속이 예로 들어간 후 어떻게 국가와 지역사회가 광범위하게 상황을 공유하는지 묘사한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사회역량이 공동으로 작용하는 예와 속의 관계는 현실 중국사회의 문화정치의 일반적인 운용 메커니즘으로 대표된다. 본 저자는, 바로 지방사회의 다양성과 국가 대일통간의 상호융합에 기반하여, 부단히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예속상호작용을 중국 전통사회구조의 특징으로 상정하고, 민간사회의 문화적 인정이 여전히 예와 속 정치 프레임의 기본이라고 본다. 류티에량劉鐵樑은 국가정치와 민간자치간의 상호작용관계는 단지 사회조직의 기본형식을 만들어내는 것 뿐 아니라 사회생활 층위의 문화교직 현상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국가의 촌락의 정치에 대한 간섭과 민간자치간에는 오랜 상호작용의 역사가 있고, 결과로 오늘의 (가족촌락)취락연합체의 기본조직형식이 만들어졌다.
어떤 문화도, 만일 오로지 일종의 엘리트 혹은 사대부의 언어속에만 존재한다면, 이런 문화는 민족의 명운이 달린 근본 문화가 될 수 없다. 민족문화는 필수적으로 사회생활 층위에서 표현될 수 있어야, 민족의 생명이 될 수 있다. 자연히, 생활 층위의 일부 풍속과 습관은, 문인사대부가 갖는 일정한 논리에 의한 정리나 자기들끼리만 알아 듣는 모호한 표현으로는, 모든 사람이 문화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성현聖賢의 문화는, 만일 완전히 민간생활안에서 표현될 수 없다면, 튼튼한 생명력도 갖지못하고, 우리 민족의 것도 될 수 없다. 어떤 문화이든, 만일 민중생활중에 표현해낼 수 없는 것이라면, 오래 가지 못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예와 민간의 속은 담론형식상 명확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가지다른 문화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같은 문화가 내부에서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나 표현이 다르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단지 전자는 국가정치 층위의 제도화 규정이고, 후자는 민중생활층위의 자발적인 계승에 가깝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졍젼만鄭振滿은 왜 역사인류학의 연구방식을 “민간의 문헌과, 필드연구를 중시하고,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민속으로부터 역사를 연구하는 것”으로 정리하였을까. 하지만, 진정으로 민속으로부터 역사연구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민속과 국가행정운용, 지역사회발전 등에 대한 종합연구를 진행하되, 오랜 기간, 넓은 지역에 걸쳐야 하고, 미시정치 등의 시각도 결합해야한다.
국가정치에 근접해서, 지역사회가치의 층위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민속의 정치성이 대면하는 것 중 하나이고, 안정성과 반복성을 특징으로 하고, 지속적으로 지역사회생활에 작용하고, 특히 민중개체에게 생명귀속감과 인생의 의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민속의 본질이다. 사회실천층위에서, 예가 대표하는 국가 제도의 규약성과 속이 대표하는 민간 생활의 자발성간에 존재하는 거대한 ‘텐션’은 서로 돕고 보조하는 동시에 서로 제재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상호간에 돕는다는 것은, 국가 거버넌스가 민속문화의 생존공간을 변화시키고, 부단히 발생하는 변화를 촉구하며, 민속발전이 일정 정도 정치 거버넌스 전략의 제정과 수정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상호간에 견제한다는 것는 양자간에 조성된 통제와 반통제 관계를 의미한다. 중국 사회정치 전통안에서, 예속상호작용을 빌어, 국가정치와 민간의 ‘미시정치’가 관철되고, 국가정권의 합법성이 민속전통의 신성성위에 자리잡게 된다. 그렇게, 양자 사이에 가능한 서로 견제하는 관계를 통해 교묘하게 약화시키거나 혹은 출구를 제공한다.
3. 예속상호작용의 필드연구 결과
우리는 화베이지역의 필드연구에서 이러한 “예속상호작용”의 예를 관찰했다. 일종의 사회현상이 민간에서 풍부하게 표현된 것일 뿐아니라, 민중의 마음속에 관념이 보편화된 것이기도 하다. 마을사람들이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실은, 예와 속의 이중 규칙을 동시에 적용하고 있다. “예禮(理)를 기준으로 말하고”있지만 반드시 “속俗이 내포돼”있으면서 양자가 함께 생활을 구성한다. 한 사람의 언행이 타당한지, 사회관계가 적절한지, 마을의 여론안에서 도리에 맞는지, 예를 따르는지 아닌지 판단을 하게 된다. 이러한 담론의 배후에 예와 속의 논리와 공공기제가 하나로 묶여 숨어 있다.
예를 들어서 산둥의 와즈中洼子마을에서, 마을역사를 회고하면서, 여러 차례 여러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많은 이들의 기억을 모아서 통합하는 과정을 거쳤다. 겨울에 따뜻한 거리에서 친척과 친구들이 어울리는 잔치에서, 텃밭과 농장에서, 시장에서, 작은 공장에서, 잡화점에서 수많은 노년의 마을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둘러앉아 오래된, 혹은 새로운 화제를 놓고, 오랜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되새길뿐 아니라, 끊임없이 내용을 덧붙이고, 풍부하게 하고 혹은 수정하고, 구체적으로 빠진 것이 있는지, 없는지, 실재했는지 토론하고, 혹은 특정인이나 특정사안의 옳고 그름을 논했는데, 실은 진真과 선善은 모순될 수 있었다. 전자는 진상真相에 대해서 명확히 판별하는 것이고, 후자는 사리事理를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사자에 대해서 토론한다면, 사리를 명백히 하고”明白事理“, 일을 함에 도리에 맞아야 하고, 타인의 뜻을 선의로 해석해야 한다 ”通情達理“, 하지만 실제로 꼭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不明事理”,“不通情理“. 평가의 기준은 구체적인 일事에 의해야 하고, 통상적인 도리理에 따라야 한다. 또, 어떨 때는 더 권위있는 예禮를 참고해야 한다.
그런데, 실은 마을 방언에 따르면 예禮와 리理가 완전히 같은 발음을 갖고 있었다. 사실은 중첩된 관계속에서 아주 미묘한 차이만 존재한다. 주로 대면 대화를 선호하는 현지 주민들에게 예와 리에 대해서 비슷한 감각이 존재한다. 즉 리가 예이고, 예가 리이다. 당연히 각 가정에서, 결혼식이나 장례식과 같이 상당히 엄숙한 분위기가 요구되는 경우에, 마을사람들은 틈날 때마다 예의범절에 따라서 “老話說”,“論老禮說” 라는 표현을 상용하면서, 의식의 신성함과 그 디테일의 불변성을 강조함으로써, 향촌생활을 예禮로 대표하여 권위를 부여하는 국가 담론에 일치시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왜냐하면, 화베이 지역은 일찌감치 중화세계에 통합되었고, 국가대일통의 개념도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됐기 때문이다. 민간의 언어와 정부의 공식언어‘官話’사이에 상호 침투와 작용이 충분히 성숙돼 있다. 샤오펑샤蕭鳳霞는 “중화제국말기 국가의 권위”와 “모든 곳에 국가의 권력이 미친다”라는 문화관념의 배경하에서 “민중들 자신이 제국의 은유를 사용해,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자신의 신분을 정의”하게 됐다. 민중의 이러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제국의 은유가 그들의 지역 신분을 확립하는데 사용됐는지,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향촌생활속에서 “예절老禮”과 “올바른 생활”을 매우 중시하는 주장을 하는 보수적인 이들과 마을에서의 관행적 역할의 연기를 잘해내려고 열심이거나 가족의례 문제에 대해 안절부절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정통이라는 관념을 고집하지만, 실은 정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른 이해를 갖는다. 왕스푸王斯富는 민족국가에서 경찰과 국가방위역량이 대표하는 무력독점의 대원칙하에, 현실사회속에는 여전히 일종의 무력을 행사하는 조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국가기구 바깥의 무력조직은 두가지 본질적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저항성이다. 이는 국가질서유지에 일정한 위협이 된다. 또 하나는 교류성이다. 그것은 연기 형식과 일상생활을 통해서 암시적이고 상징적 관계를 갖는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창조 선택이다. 그는 허베이河北성 자오趙현의 范庄판좡의 龍牌會롱파이회를 예로 들어서, 중국 전통 묘회廟會(역자주: 설에, 도시의 사당이나 사찰에서 벌이는 축제)에서 무술시범을 보이는 활동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는 시민을 자구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잠재적 발언권을 시위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일종의 연기일뿐인가라고 묻게 된다. 어떤 학자는 왕스푸가 중국농민의 정치의식과 열정을 과대포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나아가서, 묘회에서의 무술시범에 참가하는 농민은 상상속의 국가의례에 따라서 상징적인 연기방식으로, 마을의 질서에 대한 “군기를 잡는”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지, 국가권력시스템으로부터 정치자원을 쟁취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또, 혹자는 민간사회의 이러한 공공의식의 주기적 표현이 의도하는 것이, 단순히 국가와 문화를 나누는 것이지 권력경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다시 와즈 마을의 경우를 보면 사실은 마을사람들이 익숙한 교류의 언어속에서, 속을 논하는 가운에 예에서 신성한 근거를 찾는 것을 알 수 있고, 신성한 예가 일상생활속에서 소환되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집담이 지역 정치에 대한 평가로 확대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지역의 하급관료들이 합리적이고 예를 따르는지도 판단을 한다. 왕왕 이런 형태를 빌어, 자신의 뜻을 드러낸다. 관점을 바꿔 보자면, 마을 주민들의 지역의 필요에 의해, 전통의 예와 속 담론의 신성성을 빌어, 새로운 공공담론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중국사회 예속간의 상호관계의 중요한 표현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매년 정월에 허베이성 남부 광종廣宗현에서 성행하는 다쟈오打醮(한해의 농사를 마치고 신령에게 감사하는 동시에 이듬해의 농사도 순조롭기를 기원하는 구복성 도교 법회)의식이 있다. 주변지역의 도사를 초빙해서 의식을 치루는데, 여남은 명에서 십여명의 인원을 하나의 반으로 묶는다. 도장에는 고색창연한 과의서科儀書(도교법회의 형식과 순서를 정리한 교본)를 놓아 두는데, 하지만 도사는 의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책을 참고하지는 않는다. 법회를 청한 이들과의 사전 합의하에 삼일이나 오일간 정도 식을 치루고, 어떤때는 현장상황에 따라서 그들과 상의한 후에 구체적인 조정을 결정한다. 우리가 연구중에 알아 낸 것은, 이 도사들은 도교 시스템안에서 하나의 정파이고, 대대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해진 (과의서에 정의된) 의식전통을 행하지만 한편으로는 법회를 요청한 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별도의 의식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후자는 이미 속俗의 요구로 만들어진 파생된 전통이고, 일종의 생존비결이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통상적으로는 일종의 내부지식으로만 비전할뿐, 외부로 알리지는 않는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는 단순한 “도교제사의식”으로써, 도사를 초빙해 의식을 집행하는 것뿐이지만, 실은 그 마을의 크고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모여 정성껏 의례를 조직하고, 현지의 사정을 잘 살피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잘 아는 이들이 함께 힘을 모아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앞서 설명한 다양한 참여자들이 의식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로써 “국태민안 國泰民安,길상여의吉祥如意,천하태평天下太平“과 같이 국가와 마을, 개인의 안위를 기원한다. 말하자면, 마을 주민들이 이런 거대한 목표를 직접 실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리를 다하는 ‘국가’와 선한 통치를 펼치는 청렴한 ‘관료’에게 위탁함으로써,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도교 의식과 판좡 롱파이회의 무술시연, 와즈마을의 집담은, 모두 민중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신성한 의식이고, 예속상호작용의 전통안에서 민간의 참여 형식을 대표한다.
내가 역시 주목하는 것은, 중국 각지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황제의 사액” “마을이 있고 나서, 묘회廟會가 있다”와 같은 민간의 서사의 담론이 예와 속의 상호작용 전통안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럼 화베이 지역에서 사용하는 “우선 묘회가 있고 마을이 있다”라는 정반대의 표현을 분석해 보자. 이 말의 배후에는, 민간이 신성한 권위를 빌려 마을의 존재가치를 세우고, 국가체계에 소속되기를 요청한다는 의미가 감쳐줘 있다. 마을의 문맥에서 묘회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자식이 혼인을 하고 분가할 때, “부뚜막 나누기”의식을 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부뚜막 나누기”는 단순히 부자가 대를 이으며, 집기들을 분배하고, 가산을 나누는 경제행위일뿐아니라, 새롭게 탄생한 가정에 독립적인 사회관계의 신분을 부여한다는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집단 거주지가 새로 생길 때, 새로운 마을구성원이 몇명이 됐든, 묘회를 만들지 않으면, 그냥 생활취락지일 뿐이지, 독립적인 마을 공동체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운 묘회에 지붕을 올린 후에야, 사람, 귀신이 모두 갖춰진 하나의 천지우주 체계가 새롭게 들어섰음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국가와 마을이 직접 관련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주민들이 “국가의 교화를 받은 백성”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편벽한 곳이라도, 사람들이 황제의 권위하에 복속할 때, 천지신명의 명의로, 하나의 천지시공질서와 가치체계를 확립하게 된다. 중국의 거의 모든 역사소재의 전설, 희곡, 극본이 모두 황제의 권위, 신령과 관련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의문의 여지도 없이, 국가제도는 “향촌사회의 일상생활”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향촌사회의 문맥안에서도, “국가제도”는 늘 함께 토론하고 교류하고 개조나 변형이 될 수 있는 “문화텍스트’로 여겨져 오기도했다. 이러한 문화적 텍스트가 어떻게 향촌에 뿌리를 내렸는가? 라는 질문은 피상적일 뿐이다. 지역의 전통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민중의 대응방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위에서 아래로 관철되어 온 국가제도는 필수적으로 받아들여져온 현실이지만, 이러한 과정도 다양한 시도와 치환, 고려, 재조의 과정을 거쳤고, 스스로 현실의 생존상태에 합당한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국가와 민간의 이러한 대응은 일상생활의 운용에 기반하고 있다. 자연히 각 지방의 전략을 더하고, 다원적 의의를 만들어 낸다. 가장 근본적인 의의안에서, 국가제도는 사실 민중생활 토양위에 만들어져야 한다. 민중의 세금으로 국가가 운용될 수 있는 것이고, 예와 속의 상호작용의 정치적 지혜가 지역사회의 순조로운 발전에 복무해야 하는 것과 같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정치의 예속일체화 추구는 반드시 전 사회의 광범위한 참여의 생활실천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국가는 사회의 미시적 정치의 공간을 남겨둬야 하고, 민중이 사회공공영역에서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관건이다.
맺음말
중국에서, 전통이든 현대이든, 국가정치와 민간사회 사이에는 늘 상호부조와 공생관계가 이어져왔다. 이것은 서구의 정치학 관점이 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명제이다. 중국에는 예와 속이 결합된 사회전통이 존재해왔고, 이것이 민중의 언행 규범에도 영향을 끼쳐왔는데, 서구 사회의 절대적 법제와는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민속문화는 반드시 민중의 생활의 지혜와 공동체적 의지를 함께 묶어, 민간사회에서 수천년간 형성된 도덕관념, 정신수요, 가치체계 등을 담지한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안정된 군체행위규범을 형성한다. 민간에서 스스로 생성한 “규범“의 역량과 국가권력의지 사이에는 서로 역할나누기와 협력이 있고, 분쟁과 대화도 있다. 대화와 협력안에서 일상규범이 공공가치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을 모색한다. 류티에량劉鐵梁은 이렇게 말했다:
민중이 창조하고 전승한 문화가 지식인들의 시야에 모두 잡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지식인 문화가 반드시 생활의 여과를 거치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엘리트들의 사상을 민중이 모두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역으로 민중의 사상이 엘리트들에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 사이에는 반드시 일정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래서 문화의 계층이론이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나는 모든 문화가 전통이 되고, 많든 적든 생활로 표현이 된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이냐면, 예와 속의 두가지 담론사이에, 어떻든, 함께 묶을 수 없는 일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사실 중국의 예속상호작용 전통의 가치와 활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속상호작용의 핵심은 전사회의 광범위한 참여를 통해서, 국가정치와 민간의 ‘미시정치’가 만나서, 사회메커니즘 내부의 맥락이 원활히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를 인정하는 방식을 통해 현재적이거나 잠재적인 사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근현대사회이래, 이러한 전통이 현대 문명의 거대한 도전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중화문명의 주류전승계보에서 물러나게 됐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표상으로써, 이러한 전통은 사실 정말로 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역사회생활속에서는 계속 유지돼 왔다. 1980년대 이후 다시 출현해, 부흥의 기운이 일고 있으며, 국가개혁과 함께 지속적으로 깊이있게 사회와 호응하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시공이 압축돼 있는듯 보이는 현대사회에서, 국제동향, 국가정치와 지역사회간에 복잡한 상호작용의 태세를 취해왔다. 예속과 관련된 주제는 국가와 지역사회생활의 건설뿐 아니라, 국제적인 지정학 정치문제에까지 관련을 갖게 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따라서, 정보화가 가속되고 있고, 시공간을 넘어서 소통하는 것이 간단하고 직접적이 돼가고 있다. 예속상호작용이 더 광범위한 무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 중국이 직면한 국제적 규범, 국가의 법권력과 민간의 자치권력 등 여러 측면에서 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속상호작용이 함의하는 전통정치의 지헤와 사회운용기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중문원문
https://mp.weixin.qq.com/s/x9_d-9tfnV2Nbiu2lJc0HQ
장실샨 (張士閃)
민속학 박사, 산동대학 문화유산연구원 교수, 유학고등연구원 민속연구소 소장
https://www.rwsk.sdu.edu.cn/info/1082/5832.htm
‘민속연구’ 2016년 제6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