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백년의 급진’이란 저서로 알려져 있는, 중국의 삼농三農문제 최고 전문가 원톄쥔溫鐵軍 (전)인민대학교 교수가 중국 인터넷 신문 포털 ‘오늘의 헤드라인今日頭條’에서 2월중순부터 매주 1회 세차례에 걸쳐 “팬데믹 영향하의 글로벌라이제션 위기”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강연을 행했다. 매 강연은 수백만명의 시민, 청년 대학생, 지식인들이 시청하는 등,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강연자의 동의하에 이를 녹취 번역해 ‘월간 공공정책 6월호’에 게재된 것을 ‘공공정책’지의 허락으로 ‘다른백년’에도 옮겨싣는다. 


중국은 전세계 산업가치사슬의 가장 많은 부분을 품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팬데믹이 중국의 산업생산을 멈추게 하면, 전세계 산업이 모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것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위기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금융위기는 언제라도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금융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일어난 이후에, 금융자본은 더 이상 실물경제에 동조해서 움직이지 않게 됐다. 스스로 독립된 자본 역량을 가지게 된 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전체 경제는 전체적으로 하락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주식시장은 10년내내 성장을 이어왔다. 이번 팬데믹 국면 초기에, 미국의 주식시장은 순식간에 엄청난 자본이 증발했고, 주가는 2008년 수준으로 하락했었다. 중국의 상황을 보자면, 과거 산업자본은 생산요소가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산업을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물류와 교통이 막히게 되면, 반드시 원재료 가격이 상승하게 된다. 인플레이션 발생 요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무차별적으로 찍어낸 화폐가 투자처를 찾지 못해, 객관적으로 어느정도 디플레이션 압력에 놓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전세계 모두 수요 격감이 일어나, 물건 가격이 상승할 수가 없다. 이렇게 지금은 디플레이션에서 다시 인플레이션으로 들어가게 되는 시점이다.  실물경제가 생산원가상승압력에 시달리는 이 시점에, 이제 오늘의 제3강을 통해, 다시 한번 여러분의 시야를 넓혀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20년대로 돌아가서 당시 경제 상황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신중국이 수립됐을 당시, 악성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는데, 사실 그 원인은 1920년대부터 누적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민국경제를 논하게 되면 1920~30년대의 황금시대를 이야기하곤 한다. 마침 ‘북벌’의 연전연승으로 각지의 군벌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국민당군이 장강 연안에 이르렀을 때, 즉 1921년 장개석 정부는 공산당 탄압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정치, 군사 제도가 전국적으로 통일됐지만, 실제로는 각 지역이 여전히 따로 놀고 있던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청조말기부터 꿈꿔왔던 공업화, 도시화에 신속하게 돌입하게 된다. 그래서 그 시점을 ‘황금시대’라 부르는 것은, 객관적인 과정이자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평균GDP 성장률이 무려 9%에 가까왔다. 중국 경제가 최근 20년 특히, 21세기 첫 10년간, 9.6%의 GDP 성장률을 기록한 것과 비교해 봐도, 얼마나 급속한 성장의 시기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자본이 집중됐다. 주로 도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자본이 집중된다는 의미는 동시에 리스크가 집중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자본운동의 객관적 법칙의 결과이다. 그럼 언제부터 위기가 실재화 됐는가? 민국시절에 중국은 이미 세계경제에 편입됐고, 실제로, 이 위기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840년, 1860년 1, 2차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의 연해뿐아니라 내륙의 대부분의 주요도시와 항구, 수운이 개방됐다. 서방 열강은 이미 중국을 손바닥위에 올려 놓은 상황이었다. 청말에서 민국 초기까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애국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갈수록 이들의 비판적 목소리는 사그라들게 된다. 당시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와서 분석해 보면, 아편전쟁의 발발 원인은 다음과 같다. 당시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무역수지 흑자국가였다. 그런데 이미 서방열강은 식민지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수행하고 있었고, 이러한 식민주의는 중상주의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가 심화되던 서방 열강, 그 중에서도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판매해서 무역적자를 줄이려 했다. 그럼 아편전쟁은 왜 두번이나 발발했는가 ? 1차 아편전쟁을 통해서, 중국의 상류계급이 아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비량이 부족했고, 2차 아편전쟁을 통해, 내륙 도시까지 수운을 통해 아편을 받아들이고, 평민들도 아편을 상용하게 됐다. 군대에서도 일반 병졸들까지 아편을 즐기고, 특히, 서남, 서북 지방에 아편 벨트가 형성되면서, 고이윤을 얻을 수 있는 아편재배가 성행하고, 경작지가 부족하게 된 식량 자급에 문제가 생긴다. 바로 이 지역에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각종 민란이 벌어진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아편 무역이 성행하면서 무역적자가 누적되고 1860~1870년대부터 정부의 재정적자가 심화됐다. 청나라는 여러번 개혁을 시도했지만, 재정적자의 누적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파산하게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은  따지고 보면, 이미 적재량을 초과한 낙타의 등에 볏짚 한오라기를 얹어 쓰러뜨린 격이다.


아편을 즐기는 상류층


평민들의 아편소비

민국시기에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민국공업화는 서구에서 수입한 물품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가운데 시장을 형성했다. 무슨 제품이든 양포洋布(직물), 양화洋火(성냥),양면洋面(밀가루) 이런 식으로, ‘양洋’이 접두사로 붙는 물건들의 소비가 급증했는데, 중국의 자체 생산능력이 부족했던 탓에 대량의 수입품이 시장을 점령했다. 도시의 일반 소비품목은 모두 서구의 수입품이 차지했고, 자연스럽게 자체생산과 민족공업의 발전이 요구됐다. 중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운수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가격 경쟁력을 가지게 됐다. 이렇게 1920~30년대 민족공업은 밀가루, 연료, 방직물, 식품산업 등의 생필품을 만드는 경공업으로부터 시작해서, 굴기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됐을까 ? 공업화는 항상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자본의 심화(capital deepening)를 요구한다. 자본심화는 자본축적이 필요한데, 이 자본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 당시의 상당수 상공업경영자들은 원래 농촌의 지주들이었다. 지주겸 상공업경영인들인데, 사실은 ‘부재지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지주는 원래 농촌마을에 함께 살고 있었으며, 마을과 다양한 사회적, 인간적 관계로 얽혀 있었다. 자연재해로 수확량이 줄면 지대도 줄여주고, 소작인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도움을 주기도 하고, 기근이 들면 마을 주민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는, 마을 의창義倉을 만들어 관리하기도 했다.  즉, 풍년이 들면 지주와 마을 엘리트들이 잉여 식량을 의창에 비축해서 흉년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이런 유무상자와 상호부조 기제에 의해, 마을내에서 계급간에 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지주들의 의창 – 항저우杭州 부의창富義倉, 수리하기전의 모습


부의창, 수리후의 모습

지주들이 도시로 이주해서 기업가가 되고부터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도시에서 자신의 재화를 이용해서 소비하고 거래를 하게 됐다. 그들이 가진 점포, 기업, 가공방법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기름을 만드는 곳, 직물을 직조하고, 염색을 하는 곳, 식품을 가공하는 곳, 모든 생산장소가 洋+물품을 생산하는 도시의 공장이 됐다. 그래서 이러한 소비와 기업운용을 위해 현금이 필요하게 됐다. 이전에는 농가에서 가을 수확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지대를 거뒀다. 실제 수확물을 가지고, 지주와 소작인이 분배를 정했다. 지주가 제공한 생산수단도 따로 셈했다. 말과 소 같은 가축, 농기구, 종자 등등. 땅만 빌렸다면, 당연히 지주의 몫은 상대적으로 적어졌다. 또, 현물로 지대를 냈기 때문에, 지주는 이렇게 모인 현물 즉 식량을 도시로 유통시키는 역할을 했다.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일방적 수탈자가 아니었다.  또, 마을의 생산 현물이 지주에게 집중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농촌에서의 거래(수매)원가가 낮아져, 이를 다시 도시로 유통시키는 비용도 낮아졌다. 그래서 도시에 자본이 축적되고, 이에 따른 공업화가 용이해졌다. 하지만, 지주들이 도시산업의 경영자가 되면서 사정이 급변했다. 그들은 기업운용을 위해서 현금이 필요하게 됐고, 한해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지대를 거둬야 했다. 농민들의 지대 선납부를 돕는 농촌 고리대금업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금융이 들어오게 되면, 착취의 구조가 형성된다. 당초의 지대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농민 생산자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또 농촌에서 도시에서 만든 공상품을 이용하게 되면서, 상공업자본이 농촌으로 진입하게 된다. 농촌에 금융자본과 상공업자본이 내려오면서, 농업 생산물뿐 아니라, 역시 수공업으로 생필품을 만들어 자급하고 팔던 소농의 가계 경제는 파산하고 향촌사회가 쇠락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과거 농촌에 거주하는 지주와 농민이 함께 운용하던 현물경제가, 부재지주와 농민, 금융업자가 사이에 낀 화폐경제로 전환된 것이다. 그래서 1920년대 30년대에 농민혁명이 시작된다. 마오쩌뚱이 고향인 후난성에서 농민운동을 했던 것도 같은 이유때문이다. 실은 농민들도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가서 장사를 해서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는 이들이 나타났다.


광저우 농민강습소 유적

그래서 도시화와 공업화가 가속되는 동시에,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혼란을 없애기 위해 각지에 군대를 동원해야 했고, 재정을 군대의 유지에 쏟아부어야 했다. 초기에 각 지역 군벌 배후에는 해외의 제국주의 세력이 존재했다. 그래서, 대일통의 달성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직후, 여타 제국주의 세력이 몰락함과 동시에 미국이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아 장개석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은 비교적 안정된 체계를 갖추게 된다. 1920~30년대의 민국황금시대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여하튼 민국의 도시화, 공업화와 경제의 고속성장 와중에 소농경제와 농촌은 쇠락의 길을 걸으며 내부적 사회문제를 안게 된다. 외부에서 온 위기는 , 서구의  경제위기, 대공황과 관련이 있다. 서방사회는 생산과잉에 의한 경제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외부로 비용전가를 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은본위 화폐제도는 명나라에서 시작해서 민국 초기까지 이어졌는데, 중국은 은의 주요 생산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주요 5개 은생산국과 ‘백은협정’을 맺고 있었다. 이렇게 중국내의 은 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서구에 경제 위기가 발생한 이후, 미국의 은생산 지역들이 가격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미국에서 새로운 ‘백은법안’을 통과시켰다. 국제 시세가 상승했는데, 당시 중국은 화폐 제조를 위해 은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의 가격을 함부로 변동시킬 수 없었다.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해외의 은 가격이 높아지자, 중국내에서 은을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국은 해외 은가격 변동 영향을 받게 됐다.


청나라의 은표

그렇게 해서 중국은 1935년 화폐개혁을 통해, 은을 포기하고, 법정화폐로써 지폐를 발행하게 된다. 공업화와 글로벌시장 진입 후에, 중국은 국외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은 중국보다 먼저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였고, 중국에 비해서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는데,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내 군세 확장에 나섰다. 1931년에 중국 둥베이 지역을 침략했고, 1935년에 화베이 지역을 침탈했다. 1933년 대공황이 이 모든 출발점이었으니, 실은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서 시작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서구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누락돼 있을 뿐이다.

1937년 결국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에 나서게 되는데, 다시 정리하자면, 중국은 스스로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세계 경제위기가 초래한 은의 유출에 의한 경제적 위기를 겪었고, 한편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맞게 됐다. 내부적으로는 농민혁명에 직면했는데,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민국을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게 됐다. 중일전쟁 발발직전까지는 그래도, 민국 경제가 일정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인플레이션도 극심하지 않았는데, 전면적인 전쟁상태로 돌입하면서, 경제가 타격을 입고, 인플레이션이 격화됐다. 정부는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낼 수 밖에 없었는데, 군수품을 해외에서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당시 전쟁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실은 중일 양측에 많은 군수물자를 공급해서 재미를 봤다. 심지어는 당시 일본군의 군사장비 절반 가량이 미국 제품이었다고도 한다. 유명한 일화로, 교육운동가인 타오싱즐陶行知이 당시 미국 유학중이었는데, 동포를 살해하는데 쓰이는 불의한 전쟁에 군수물자를 대는 미국의 위선을 참다 못해 도중에 귀국했다고 한다.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

미국은 당시 생산과잉 문제를 군비 생산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도덕적 논쟁을 떠나서,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전쟁 규모가 커질수록, 경제 회복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중국도 군비를 수입해야 했는데, 1차 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에 눈을 돌려, 국민당 군대는 대량의 독일엔지니어를 초빙하고, 그들의 군수 설비를 수입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재정적자를 불러온다. 실물 금은이 있어야 수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매우기 위해 화폐를 찍어내는데,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그래서 1937년 전쟁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그러나 1941년에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영향으로, 서방은 중국에 전략물자를 원조하기 시작하고, 약간의 안정을 되찾기도 한다.

하지만, 1946년 국공내전이 본격화하면서, 민국정부의 재정적자는 더 심각해진다. 결국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수레 한가득 지폐를 싣고와야, 겨우 밀가루 한포대를 살 수 있었다. 당시 신장新疆지역에서 발행한 지폐중에는 액면가 60억위안짜리가 있을 정도였다. 민국정부는 1948년에 군안권軍安券이라는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는데, 60억위안은 1만군안권으로 바꿀 수 있었다. 악성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 아예 경제운용이 불가능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실물경제도 하이퍼인플레이션하에서 생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매크로경제위기가 발생하면, 산업과 실물경제 참여자들 모두 견뎌내지 못하게 된다. 당시 민국 정부는, 할 수 없이, 미국의 전문가를 초청하고, 민국 정부의 미국유학파 관료들이 함께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설계하게 된다. 당시 미국정부로부터 4800만달러의 차관을 들여왔는데, 1944년 브레튼우즈협약에 의해서 미달러와 금을 고정비율로 태환하게 됐으므로, 역시 이에 맞춰 군안권을 발행했다. 중국내 모든 미국 달러와 금의 민간시장거래를 불법화하고 국가가 관리하게 했다. 이렇게 몰수한 자산을 기초로 안정화를 꾀함으로써, 악성 인플레이션을 막으려했다. 이런 설계는 논리적이지만, 실제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개월이 지나면서 실패를 인정해야 했고, 인플레이션은 고삐풀린 야생마처럼 변했다. 이렇게 민국정부가 붕괴된다. 재정이 무너지고, 금융이 무너지고, 군대에 급여를 지급할 수 없으니, 군대가 와해됐다.


신장에서 발행된 60억위안의 지폐

그래서 1949년 신중국 수립후 중국 정부는 민국정부가 겪은 실패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신정권은 농촌과 농민의 혁명 지지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농민혁명은 사실 현대화와 상반된 노선을 걷게 돼있다. 공산당은 우선 농민에게 토지를 배분했다. 역대 중국의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균전면부均田免賦정책을 실시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1946년 이래 국공내전중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의 가장 큰 차이는, 지주계급이 핵심이 된, 국민당이 조세를 감면하거나 하다못해 부채에 대한 이자조차 줄여주지 못한 것에 반해, 공산당은 1946년 농민혁명의 시작부터 토지혁명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하면서 혁명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대의를 내세운 혁명은 모두 성공했다.

농민혁명이라는 조건하에서, 마오쩌뚱이 이야기한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이 성공했다. 왜냐면 농민이 공산당편에 섰을 때, 현대적인 재정과 금융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이하이淮海전투에서 천이陳毅 원수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화이하이전투의 승리는 농민이 손수레로 일궈낸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전방에서 전투를 벌이는 군인뿐 아니라, 후방의 보급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당시, 전선에 있는 한명의 군인을 후방의 38명 농민이 떠받치고 있는 셈이었다고 한다. 토지혁명이 대의가 되며, 참전하는 군인에게 월급으로 지급해야 하는 화폐가 필요없어진다. 손으로 쓴 영수증 한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되돌려 주겠다는 농민들에 대한 약속 한마디로 그만이다. 그러니, 재정적자가 생길 염려가 없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에게 지불된 급여는 모두 현물이었다. 간부들에겐 좁쌀이 지급됐다. 옌안延安시절 즉, 북방에서 해방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좁쌀이 가장 편리하게 계량 가능한 곡물이었다. 식량이 화폐를 대체하던 시절이다. 해방구에서 좁쌀이 화폐기준이 됐다. 신중국 건국후에도 상당기간 좁쌀화폐단위를 사용했는데, 마오쩌뚱은 국가주석으로서 연봉이 3만6천근의 좁쌀이었다. 주석의 거처인 중난하이中南海에 수레에 좁쌀을 싣고 가져다 주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화폐가치 기준인 등가개념으로 좁쌀을 사용했다는 이야기이다. 농민혁명, 토지혁명이 가져온 중국 특색의 경제현상이자 승리의 비결이었다. 민국정부는 현대 재정과 금융 제도를 도입했으나 군대에 급여를 지급하지 못해서 망했다. 그런데, 도시화, 공업화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 농민혁명 군대는 이런 식량기반의 실물화폐 경제를 이용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좁쌀식량을 보병들에게 배급하고 있다

정권을 수립한 후에 마오쩌뚱은 중요한 글을 하나 발표하는데 그 제목은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이다. 1947년 중국 공산당 제7차전당 대회에서 발표됐다.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후, 둥베이東北지역이 매우 중요해졌다. 왜냐하면 둥베이로 진입해 일본 관동군이 남긴 군장비를 인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경이 인접한 소련 공산당의 동의가 필요했다. 중국 공산당이 소련 공산당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소련 공산당의 표준이론에 중국 공산 혁명의 담론을 맞춰야 했다. 당시 소련의 이념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혁파하고, 단계적 혁명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들의 분석에 의하면 중국은 당시 봉건 농민국가였고, 공산혁명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당과 협력해서 자산계급 혁명을 이룬 후, 공업화 생산양식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산계급의 혁명이 자본주의를 낳게 되면, 자연스럽게 노동자계급의 혁명이 가능할 터였다. 그래서 마오쩌뚱은 중국 공산당 정권 시스템을 소련의 입맞에 맞추기 위해서, 우선 민족자본주의를 형성하는 신민주주의론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건국후 중국이 신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이야기하자, 많은 혁명의 전우들이 마오쩌뚱에게 반문했다. 피땀흘려 일군 혁명의 성과를 어째서 다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전제로 삼는가 ? 쑨원의 자본주의와 공산당의 자본주의가 대체 무엇이 다른가 ? 마오쩌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체제안에 산다. 민국 시절 자본주의의 영도자가 국민당 간부였다면, 신중국 수립후에는 공산당 지도자가 자본주의 체제 건설을 이끈다. 중국의 5성홍기에서 가장 큰 별은 공산당인데, 그 주위의 네개의 작은 별 중 하나가 민족자본가를 상징한다. 나머지 셋은 노동자, 농민과 소자본가 계급이다. 이것이 신중국 건국 당시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구조였다.


마오쩌뚱과 주더朱德가 제7차 전당대회 주석의 좌석에서 숙의하고 있다

공산당 혁명군은 승리 이후에, 민국정부가 만든 대도시를 접수해야 했다. 둥베이東北에서 화베이華北의 톈진天津, 베이징北京을 거쳐, 화둥華東지역의 상하이上海, 난징南京에 이르기까지. 신정부는 민국의 도시 시스템도 그대로 이어받아야 했다. 정부, 경찰, 의료, 학교 등등. 하다 못해 거리 청소를 위해서도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어야 했고, 그러자면 재정이 필요했다. 농촌에서와 달리 도시에서는 화폐가 필요했다. 뿐만아니라, 당시 아직 남부는 해방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여전히 군비도 지출해야 했다. 그래서 재정적자가 70~80%에 이르게 됐고, 이것은 민국 정부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또 그때부터 전국적으로 통일된 인민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대규모로 화폐를 찍어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천윈陳雲은 재정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계속 경기부양책을 사용할 밖에 없었다. 이렇게 화폐를 찍어내어 재정적자를 메꿔나가는 방법은 결국, 인플레이션을 부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실물경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 국난에서 신중국을 구원했는가?

그것은 다시 농민들이었다. 우선 혁명을 통해서 토지를 분배했다. 소생산자인 농민은 자기 몫의 토지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면, 반드시 의식주를 절약하고, 저축한 재화로 토지를 구매하려든다. 생산수단인 토지는 일단 손에 넣으면, 남에게 약탈당할 염려가 없다. 하지만, 걔중엔 생산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다. 장애인이라든가, 병이 든 사람들이라든가, 이들은 필연적으로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에, 토지를 팔 수 밖에 없다. 신민주주의는 토지매매의 자유를 허하는 대신에, 오히려 토지의 임대를 금했다. 왜냐하면, 토지의 임대는 일종의 봉건지주와 소작농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소련에서 들여온 이념을 중국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앞서 설명한 과정을 통해서 발행된 인민폐를 가장 많이 흡수한 계층이 누구일까 ? 그것이 바로 농민들이었다. 당시 농민의 인구 점유율은 88%였고, 이들은 또 벌어들인 돈을 아껴서 저축했다. 이렇게 저축한 돈으로 다시 땅을 사서 늘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5억의 중국 인구중 4억이 농민이었고, 이들이,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발행된 화폐를 은행에 저축하면서 화폐가 흡수되고, 매크로경제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농민이 생산한 것은 당시 가장 값어치가 있는 생활필수품인 식량과 면화와 같은 농산품이었다. 당시 실물경제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견뎌낼 수 없었다. 경영자들은 기업의 운용과 확장이 아니라, 고금리와 이윤이 가능한 투기에 참여함으로써만 인플레이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하이의 양백일흑兩白一黑 혹은 삼백三白의 투기 전쟁은 이렇게 발발한 것이다. 당시 화폐기준이 됐던 실물, 즉 양백兩白, 쌀과 면포 (밀가루를 더해서 삼백三白으로 일컫기도 하는),  그리고 일흑一黑 – 석탄은 도시생활의 필수품이었고, 민족자본가들은 이를 비축해 투기 수단으로 삼았다. 공산당 정부는 이들을 설득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공산당은 전국의 양백일흑 자원을 상하이로 집중시켜, 가격을 안정시킴으로써, 결국 자본가들을 굴복시켰다. 이렇게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는데, 농민이 제공한 물자가 없었다면, 민생은 커녕, 신정권의 안정도 실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당시 시장은 어떻게 운용됐나? 국영기업이 직접 관리했다. 신정권은 폭력혁명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고, 여기서 사실 다른 설득과 협상의 논리는 필요 없었다. 새로운 자산의 형성도 무력을 동원했다. 제국주의 자본이 중국 대륙에 남긴 자산, 민국정부의 자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소련 등의 해외원조가 들어왔다. 모든 것을 국유화하고, 국가의 관리하에 신속하게 국가자본을 형성했다. 국가의 자본은 군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대는 농촌에서 생산된 모든 물품을 도시로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을 보장한다. 그리고 재정과 금융, 도시 노동자의 급여는 공급제 방식으로 지불되고, 실물이 기준이 됐다. 당시 농산품은 물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정하는 화폐기능뿐 아니라, 재화의 저장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즉, 매크로 경제의 조절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이렇게 서구 근대국가의 현대적 화폐 경제 시스템과는 다른 신중국 건국후의 자주 경제를 실현했고, 중앙의 관리와 조절을 통해, 일체의 투기행위를 근절했다.


삼반오반三反五反 정치운동

양백일흑兩白一黑을 포함해서 세번에 걸쳐, 도시의 투기세력과 정부의 대결이 있었으나, 정부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리고 몇달 후에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디플레이션과 함께 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주체인 민족자본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1950년 하반기에서 1951년초에 걸쳐서, 민족자본 운영이 지속되기 힘들다는 것이 증명됐다. 당시 정부는 정부조달과 구매를 통해서 이들의 생존을 보장해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농촌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있었고, 공산품이 농촌으로도 공급되기 시작했다. 국가 경제가 회복되고 있었고, 객관적 조건은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부패 현상이 나타났고, 이를 퇴치하기 위한 3반5반三反五反  (3반 –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 5반 – 뇌물, 탈세, 국가재산횡령, 생산재료 속임수 및 빼돌리기, 국가경제정보 부정이용) 정치운동도 벌어졌다.

동시에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대규모 수요가 발생했고, 이를 충족시킨 것은 국유기업들이었다. 소련은 북조선을 지원하려고 중국을 원조해서 대규모 군사장비의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게 했다. 이때 중국에 군비중공업 역량이 만들어지는데, 당연히 이는 사기업이 아니라 국영기업의 몫이 된다. 소련정부가 중국정부에 원조 형태로 제공한 자본은 상환이 급하지 않은, 일종의 장기부채였다. 1950년 10월에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소련이 중국 정부를 지원하는 156개의 대형 프로젝트가 만들어졌고, 중국내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600여개의 프로젝트가 생겨났다. 이로써 중국은 자본주의 소유제에서 사회주의 공유제로 전환하는 ‘과도시기 총노선過渡時期 總路線’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렇게 중국은 1949년 건국이래 파란만장한 위기를 극복해 나가며 국가와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불행중 다행으로, 농민혁명이 정권을 만들었고, 폭력혁명을 통해서, 앙시엥레짐이 만들어 놓은 자본체계를 타파했다. 국유기업은 당시의 악성 인플레이션을 순조롭게 잠재웠다. 1952년, 1953년에 시작된 농촌협동조합식생산(호조합작互助合作), 사회주의 과도시기 총로선 그리고 공상업사기업개조 등이 이어지며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제도의 변천은 하늘에서 뚝떨어지거나, 머리속 이념이 만든 이론에 따라 설계된 것이 아니라, 매번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불가불 취해진 조치들이다. ‘경로의존’ 방식으로 구상되고 실천된 제도와 정책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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