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주: 

역자가 중국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면서, 풀리지 않던 의문이 몇가지 있다. 그것은, 중국인들의 혼인관, 가족관, 그리고 사회생활에서의 친소관계에서 느끼는 위화감이었다. 겉보기에 생활방식도 그리 다르지 않고, 추구하는 이념도 비슷한 것 같은데, 왜 결정적인 순간에 큰 차이를 보게 되는 것일까? 역자는 2004년경부터 대륙 중국인들을 접하기 시작했는데, 전반부는 도시민들 뿐이었지만, 후반부는 도시민과 향촌의 농민들과 두루 교류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역자가 주의깊게 관찰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관계를 가진 이들은 여전히 도시의 엘리트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어떤 경험들이 있을까. 우선, 중국인들의 혼인관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많이 바뀌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04년경에 알던 중국인 청년 엘리트들은 거의 예외없이 대학 졸업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을 꾸렸는데, 2015년에 중국에 돌아와서 살펴보니, 그 비율이 현격히 낮아져 있었고 특히 85~86년생을 분기점으로 그 이후의 세대는 30대에 들어서도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건 당연히 부동산 가격 급등에 의한 신혼주택 구매 가능성 저하, 젊은이들의 커리어, 라이프 스타일 중시와 같은, 주로 경제구조와 환경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보여서, 이해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의외로 느꼈던 것은 오히려 더 젊은 90년대 세대의 결혼관, 가족관이었다. 해외 유학파를 포함해서, 이미 상당히 서구화의 세례를 받은 이들 젊은이들은 겉모습의 라이프 스타일만 보면 서울이나 다른 해외의 대도시 사람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당연히 사회나 문화 등 다양한 방면의 사고도 대단히 개방적이다. 그런데, 혼인관, 가족관을 보면, 여전히 대단히 보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결혼이나 출산, 육아라는 선택지를 매우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가족, 특히 대가족에 대한 심정적, 경제적 연관 혹은 의존도가 상당했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혼인관은 한국의 10~20년전, 가족관은 20~40년전 수준이라는 인상을 받게 됐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농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도시엘리트 층에 대한 관찰 결과이다. 이렇게 큰 ‘문화지체’ 현상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

 나는 중국의 향촌건설운동이나 그 흐름에 동조하고 협력하면서, 향토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접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심지어는 중국의 농촌에서 생활할 때조차, 여전히 생태문명, 생태운동과 같은 다분히 도시민, 그것도 향토성이 이미 해체되버린 한국 도시민의 정치구호적 관점으로 이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 실체를 체감하지 못하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당위적인 차원에서 이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페이샤오통 등이 기술한 향토성을 조금씩 점검해 나가면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내가 주위에서 항상 관찰하고 관계를 맺고 있는 도시의 엘리트 중국인들이 여전히 ‘향토성’에 기반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위에서는 혼인관, 가족관을 중심으로 기술했지만, 그외에도 같이 생활하고 일하는 협력관계 속에서, 직접적으로 내가 겪은 수많은 갈등과 실망은 내게 많은 의문을 남겼었는데, 이제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내가 이런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 것은, 물론 5대 이상 서울에 거주한 서울 토박이로서, 그래서 농촌과 농촌에 대한 원문화 체험이 극히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여하튼, 중국 도시민들의 향토성을 깨닫게 된 이후에, 나는 중국의 향토성이 겉보기와 달리 여전히 뿌리깊게 유지되고 있고, 그것은 호구 기준으로 절반 이상의 중국민들이 ‘향촌민’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됐다. 그리고 실은, 대부분의 도시민들도 그들의 고향이 향촌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중국은 여전히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서적으로는 ‘향촌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 미치면, 중국 공산당 정부가 왜 향촌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 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이 논문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지만, 내가 앞에서 기술한 중국인들의 생활관과 같은 것들을, 저자는 향토중국의 ‘소전통’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중앙집권적 정부와 향촌이 2천년간 공존해온 시스템을 ‘대전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결국 중국인들의 국가관이 여전히 향토성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국의 현국가 시스템은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CCP (Chinese Communist Party) dynasty, 즉 중국공산당 왕조라고 불릴 정도로 ‘보수적’이다. 특히, 정치적 리더를 국민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을 포함한 현대의 대부분의 근대 국가들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집정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황제와 과거를 통해 선출된 관료들이 강력한 중앙 집권 시스템을 운영했던 것처럼, 공산당과 관료 엘리트가 운영하는 국가가 일체가 되어 운영되고 있다. 청조가 멸망한 상태에서 공산당이 농민과 노동자의 응원과 지지속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으니, 어찌보면 역성혁명에 의해서 새로운 왕조가 등장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중국은 진한시대 이래, 2천년간 유지해온 정치 거버넌스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 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 중앙집권적 관료 시스템은 서구 사회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전에 오랜기간 유지해온 전제왕권이나 봉건군주제보다 훨씬 진보된 것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근현대 시스템을 전제나 봉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인정한다고해도 말이다. 결국, 중국인들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재 중국의 집정 시스템에 대해서 결정적인 변화의 의지를 불태우지 않는 이유는, 그간 중국 공산당의 여러 정책이 성공적이서, 인민들이 생활에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중국인들의 정치의식도 향토적 보수성을 벗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향촌의 파괴와 도를 넘는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공산당의 일당 독재 시스템을 흔들어 놓게 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지금의 거버넌스를 큰 틀에서 유지하고자 한다면, 향촌/농촌과 도시의 균형을 계속 가져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그것이 소전통이든, 대전통이든, 중국은 앞으로 향토성을 벗어나서 ‘서구적 근대화’를 달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여전히, 무조건 도시화, 서구적 근대화, 공업화는 역사의 필연이며, 기후재앙이야 닥치든 말든,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든 말든, 모든 문제는 과학기술과 인류의 진보가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직선적 역사 발전관을 가진 사람들과 다시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탈근대, 후기근대의 문제에 봉착한 서구적 발전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생태주의 문명의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 필요가 있다.  

한국과 같은 나라는 사실 이런 의문이 제기될 필요가 없다. 싫든 좋든, 자의든 타의든 한국은 거의 완전한 도시화를 이뤘고, 이미 향토성은 거의 소멸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제기되는 공동체의 회복, 향토성, 생태적 농업과 농촌과 같은 고려는 사실, 완전히 해체된 향토성을, 농민이라기 보다는 시민들이 재농민화하면서 재건하려는 시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어차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향토와 향토성이 의식의 밑바닥에서 아직 해체되지 않은 중국은 그럼 어떤 진화적 선택을 할 수 있을까 ?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이 논문이 얘기하는 향토중국의 백년 논쟁과 이론을 한번 읽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다고, 우리가 그 답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의 미래는 중국인민들이 설계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경험을 진지하게 공유하고, 중국의 변화 과정에 대해서 일정한 평가와 조언을 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중국의 운명이 인접국인 우리와 전세계에 미칠 영향이 너무나 크니, 우리도 관심을 끈을 늦출 수는 없을 뿐이다.  



강남수향 江南水鄉 (바이뚜 검색)

 

개요

“향토중국” 이론은 중국전통과 그 문화의 뿌리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 대한 것이다. 본 논문은 20세기 이래 학계의 주요 논쟁점을 설명하고, 만일, 향토중국에 대한, 인식상의 ‘문화적 딜레머’ – 즉 향촌이 중국문명의 뿌리이자 희망인가 아니면 함정이자 진흙구덩이인가 판정하는 것, 바꿔말하면 농민생활이 “최선인지” 아니면 “최악인지”와 같은 이원론적 대치를 탈피하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정치문제 해결과 민생층위의 상호 조화는 원만히 실현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 해결없이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 급증하고 있는 쌍방향 유동이 오히려 사회와 가치의 혼란을 가중시킬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중국인들의 ‘세계진출’ 전망이 스스로의 뿌리를 찾지 못하거나, 스스로의 크고 작은 전통을 새롭게 통합하지 못해서 표류하게 될지 모른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1. 들어가기: 농민의 도시유입과 시민의 향촌열풍

2001년, 나는 꾸이저우贵州 류즐六枝 수오까梭嘎산촌마을 필드트립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곳에 중국 최초의 민족문화를 주제로 하는 에코뮤지엄을 건립했다. 우리는 당시 마을에서, 이 박물관을 통해서 교육하고, 그 뒤엔, 우리입장에서 관리운영자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묘족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을의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상상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의외로 그녀는 마을에 남고 싶지 않다는 답변을 줬다.

“……마을은 너무 재미가 없어요.”

“그럼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도시요”.

“왜요?”

“도시에 가야 희망이 있죠……”

시골은 도시만 못하고, 농민의 신분은 하찮다. 이런 생각은 바로 당대 중국에서 날로 보편화되어가는 일종의 사회적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 때문에 중국사회가 격렬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농민이 대규모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시로 유입되는 흐름이 그것이다. 그리고 향촌구조가 날로 와해되고 향토의 전통은 갈수록 소멸되고 있다.

지금 중국의 농촌에서, “농민의 도시유입”은 갈수록 점증하고 있고, 청년 노동력 유출로 이어지고 있다: 고원지대, 산악지대, 묘족이 사는 산마을, 국경지대…. 남녀를 불문하고, 청년들이 모두 노쇠하고 병약한 고향을 버리고있다. 이런 흐름을 “시대의 진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어쩔 수 없는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농촌에는 정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 현대화이래, 중국의 농업상황은 계속 호전되고 있고, 사회조건은 부단히 개선되고 있지 않나 ? 도대체 어떤 재앙이 농민의 생존을 위협하고, 조상에게 물려 받은 땅을 떠나,미래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는 “이등시민인 농민공” 신분이 기다리는, 도시로의 대열로 내모는가 ? 근본적인 원인은 가치관의 전도에 있다: 현대화가 무심하게, 전체 과거 향토의 전통을 훼멸하고 있고, “경제에서 문화와 이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치”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있다. 동시에 점점 “도시가 모든 현대성을 독점하고  농촌은 빈껍데기”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한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는 사실은, 중국에서 농민의 도시유입과 정반대방향의 흐름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행레저산업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도시민들이 여행자로서 향촌을 방문하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유인하는가 ? 답은 “향토의 매력”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향촌으로 향하는 시민들중 상당수가 특수한 신분의 전문가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계획을 세워 제안하고, 마을의 우매한 전통이라고 한동안 배척되던 많은 문화요소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도록 노력한다.

한편에선 농민이 도시로 유입되고 다른 한편에선 시민이 향촌을 찾는 것은, 모순적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내 생각으로는, 이런 종류의 상반된 흐름의 뒷쪽에 깊숙이 감춰져있는 “향토중국의 문화적 딜레머”가 있다. 만일 이러한 ‘딜레머’의 유래와 내외적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면, 백년넘게 이어져온 향토논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2. 향토중국: 문제제기

1913-1914년, 한 미국 정치학자가 중화민국정부의 특별 고문으로 위촉받아서 중국을 찾았다. 그는 귀국후, 자신의 관찰 경험을 다수의 강연에서 나눴는데, 대략 이런 판단이었다: 중국은 농업대국이고, 그 문명은 농경생산에 기초한다. 지금까지도, 중국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경제수준은 유럽에 비해 6백년은 뒤떨어져 있으며, 문명비교 관점에서 봐도, 중국의 부정적인 현황은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유럽은 공업이 중심이고, 중국은 농업이 중심이다. 유럽문명이 광물에 기초하고 있다면, 중국문명은 식물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 있다….. 차별점은:

중국인의 사회생활은 농업생산중심일뿐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배척하는 자급자족적 생활방식이다. 그들의 현재 생활방식은 과거 2천년간의 생활방식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필연적으로 시야가 매우 좁고, 생활도 매우 어렵다. 먹여 살려야 할 인구가 아주 많아서, 농업은 효율이 꽤 높아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자연조건의 혜택 속에서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시간 여유조차 없다.

이 교수의 이름은 굿나우(F.J. Goodnow)이고 그를 초대한 것은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귀국하여 존스홉킨스 대학 총장을 역임하기 전, 그의 이 여행이 중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이라는 문장을 집필하여, 위안스카이가 황제를 자칭하는 데에 서구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사건이다. 그의 이런 주장의 근거는 중국의 방대하고 낙후된 농촌위주의 경제조건, 수많은 농민인구를 다스리는데는 ‘전제정치’가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굿나우 교수와 홍헌제(洪憲帝,위안스카이)의 협력과 그 역사적 인과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잠시 접어두자. 오히려, 내가 토론하고 싶은 문제는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시절까지, 끊임없이 서방과 비교 대조되는 상황에서, 중국의 모습에 대한 방관과 자기인식에는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 보듯이 굿나우와 같은 수많은 사례처럼, 20세기 중국과 서양의 접촉 결과중의 하나는 공업화로 인해, 맹위를 떨친 서구의 영향이 중국의 정체성에 두가지 거대한 변화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첫째는 정치적으로 자기중심적이었던 ‘천하-왕조’라는 관념이 세계의 한구석에 존재하는 ‘민족국가’로 강등당하게 됐고, 두번째는, 문화적으로 비교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우월감에 넘치는 ‘예의의 국가’에서 “우매하고 가난하며 허약하고 이기적인, 우빈약사愚貧弱私’의 향토, 즉 ‘시골 중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인식상 (진화론이 기초가 된)으로 중국을 향토화시킨 것은 스스로 급속하게 전통을 와해시키는 근본원인이 된다.

청말기부터 민국초기까지, 전통중국은 농업국가이고 이를 이해의 기반으로 삼는 관점은, 중국내부의 지식인 사회에서 갈수록 보편화됐다. 이중에서 치엔무錢穆의 >은 중국이 어떻게 유일한 ‘대형농업국’의 드높은 위상을 4~5천년간 유지했는지 논술한다. 농업중국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 치엔씨는 다른 문명과의 비교를 진행하는데, 서방의 근대공업문명과 상하격차를 인식하는 동시에, 그밖의 유목, 상업유형의 다른 문명에 대한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의 이런 관점에 대한 의견은 여기서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특히, 당시 중국과 외국을 비교함에 있어, 돌출되는 ‘향토중국’의 특질적 논지가 어떻게 오랜 기간 지속됐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20세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국외학계에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농업국가’로 중국과 그 문화전승자를 규정하여 강조하고, 시간이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그범위가 갈수록 확대된다. 이를테면, 미국 국적의 역사학자 샤오공췐蕭公權은 19760년에 출간된 저술에서 직접적으로 중국을 향토중국 Rural China라고 호칭한다. 그 후 전문가들은 독자들에게 중화제국은 농업국가이고 농업인구인 향촌거주인구가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만일, 향촌사회 거주민의 생활태도와 행위모델을 연구하지 않으면, 중국 역사와 사회에 대한 심오한 토론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 나중에 다른 저명한 미국의 인류학자 윌리암 스키너 William Skinner도 이 책을 필독서로 권유했을뿐 아니라, 자신의 저술안에서도 똑같이 ‘향토’라는 한마디로 중국을 지칭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때 이후 중국 사회의 사상적 맥락안에, ‘향토중국’이라는 한마디는 그냥 단순한 비유가 아닌 현실태로 존재하게 됐다. 대부분의 현대화 예찬자에게 있어 ‘향鄉’과 ‘토土’의 의미는 같다. 이를테면 ‘향리鄉里의’. ‘아주 촌스러운’ 이런 말들은 모두 한가지 의미를 갖는데 ‘낙후’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지시어이든 아니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든 ‘향토중국‘의 또다른 의미는 ‘개화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원래, 이런 생각과 ‘도시와 농촌의 구분’, 그리고 ‘우아함과 속됨의 차이’는 전통과 상관이 있는 인식이고, 중국사회 역사속의 기억과 현실경험내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서구의 ‘발전관’, ‘진화론’과 결합하게 된 탓에, 다시 부강한 ‘공업문명’과 대조가 되면서, ‘낙후된 데다가 정신차리도록 두드려 맞아야 한다’는 이런 민족국가 층위의 생사의 관건이 되면서, 탑다운으로, 또 외부에서 내부로 격발한, 이 나라를 확 뒤집어서 새로 만들어야 하는 ‘향토중국’이라는 어젠다를 만들게 된다.  이때, 목표는 ‘농업국가’이고 ‘향토’라는 목표를 정조준하여 두가지를 관철해야 한다. 즉, 향촌을 개화하고, 중국을 개조한다.

 

3. 향토논쟁: 농경 근본의 분기에 대하여

청조말 이래, 주로 ‘공업서구사회’와 비교하며 중국을 ‘농업국가’로 보는 인사들 가운데, ‘향토’를 ‘낙후’로 간주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이렇게 향토와 낙후를 등호관계로 보는 이들은 자연히 중국이 낙후한 원인과 이를 벗어나기 위한 출구를 ‘향토’에 두었다. 향토는 낙후의 표상이고 낙후의 기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일 근본적으로 낙후한 상태를 바꾸고 싶다면, 반드시 우선 향토를 개조해야 한다. 이런 인식하에서, 대규모의 향촌재건 운동이 중국 각지에서 전개됐다. 중심인물중에서도 옌양추, 량슈밍등이 특히 돋보인다.

옌양추는 쓰촨 중부의 향촌에서 태어나, 홍콩으로 건너갔고, 미국에 유학도 갔다. 개인의 시대 경험을 통해서, 특히 서구열강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는 나라가 허약하고 국민이 가난한 비애를 절감했다. 이런 각성위에, 그는 구국의 의지를 굳건히 했다. 그 뜻을 펼치기 위한 제1보로 그는 신시대 배경하의 중국을 인식하고자했다. 옌양추는 “중국인은 반드시 중국을 알아야 하고, 그 후에야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다수의 우국지사들과 마찬가지로, 옌양추는 중국의 문제는 민족이 앓고 있는 병증이며, 이는 고질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민족의 쇠락이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선, 향토를 재건해야 한다. “우선 국가의 명줄을 부여잡고, 병증을 치료하고, 원기를 회복시켜야 한다.” 구체적인 조치로는: 향촌운동을 통해서,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 향촌운동으로 민족개조의 사명을 완성할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의 특징은, 농업입국이며,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이기 때문이다. 향토농촌은 중국인 85% 이상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향토중국의 특질이다. 비교적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정의이다. 하지만, 중국의 당시 상황에서, 옌씨의 결론은 당시의 가치판단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중국의 향토에서 거의 어떤 긍정적인 의미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었고, 반대로 4대 폐단인: 우매함, 빈곤함, 약함, 이기심 즉 우빈약사愚貧弱私로 충만하므로, 철저히 개조하고 재건해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보듯이, 모든 향토재건의 핵심은 농촌을 진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옌양추 등의 인사들은 정력적으로 사회선전 활동을 전개했고, 허베이河北성 띵定현등의 기층 향촌을 시범지역으로 선택해서, 구체적으로 효용을 입중할 실험을 진행했다.

여기에서 강조해야 하는 것은, 띵현 실험의 이러한 ‘향토지향’이 고대의 도연명陶淵明같이 주류 사회에서의 현실도피나 은거가 아니라 반대로 ‘민족개조’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대결의 장으로 나선 것이라는 점이다. 향토재건은 시대의 주류 흐름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교의 전통속에서 오래된 교훈을 찾았는데, 그것은 “백성이 나라의 뿌리이고, 뿌리가 나라의 안녕을 지탱한다 民為邦本,本固邦寧”라는 것이었다. 이런 신념하에, 옌양추는 5.4운동이래의 ‘신문화운동’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했을뿐 아니라, 명확하게 “소수 학자들의 책상물림 방식 운동에 대해, 다수평민들은 소 닭보듯 하니, 결과적으로 엘리트들이 아무리 현란하게 이상을 설파해도, 평민들의 삶은 변화가 없고, 좀체로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참여하는 향촌건설운동을 근대 중국의 제6차 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띵현 실험 한곳 뿐이 아니라, 1929년 이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지식인들이 이미 60여명이었고, 적지 않은 수가 박사학위소지자였으며, 교수뿐 아니라 두명의 대학총장도 가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창립했던 ‘평민교육회’이사중에는 3명의 내각 구성원이 포함돼 있었고, 당시 교육계, 산업계의 저명인사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옌양추 등의 인사들은 ‘향토중국’이 치유가 필요한 환자라고 보았을까 ?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슨 근거로 수천년 전통을 가진 문명국가를 환자취급한 것일까 ? 지금에 와서 옌양추 등의 발언과 실천을 회고, 분석하면, 그 답은 ‘중국과 서구의 비교대조’에 있다. 옌양추가 다시 강조한 관점에 의하면 서구와 비교할 때, 중국은 열등하며, 이런 각성하에, 위기의식을 가질 때만, 나라가 다시 강성해질 것으로 그들은 믿었다.

옌양추의 화법을 빌자면, 즉, 중국의 오늘날의 모든 문제는 완전히 외부 세력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만일 외부에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환경의 변화없이, 중국은 계속 깊은 잠에 빠져 있을 터였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향토중국’의 병은 일종의 비교에서 생겨난 것이고, 그 병은 향토에 있으며, 근원은 농민에게 있다고 봤다. 소위 ‘우매함, 가난함, 약함, 이기심’이 합쳐져서, 사실은 하나의 뜻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문화의 결핍’이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이고 문맹을 뜻하기도 한다. 두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세상을 내다 볼 수 없고, 위생적인 생활습관을 모르며, 사회의 변화에도 관심이 없고, 공업의 진보따위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국가의 대업은 먼나라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현대화를 이룬 ‘공업서방’과 비교할 때, 노쇠하고 낙후한 ‘향토중국’만이 보인다.

치료를 하기 전에 처방이 필요하다. 옌양추 등이 내놓은 처방은 “문맹을 없애고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와” 향토재건에 참여하게 했다. 문예교육으로 우매함을 치유하고, 생계교육으로 가난을 구제하고, 위생교육으로 약함을 보하고, 공민교육으로 이기심을 억제하게 한다. 향토민중의 지적 능력, 생산력, 건강과 단결정신을 높여서, 중국을 구원한다는 거대한 목표를 수립했다.

이를 향토중국의 ‘치농파治農派’로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치는 의학적 치료를 의미한다. 삼농은 병폐이고, 치유를 필요로 한다. 농촌, 농민, 농업 그 어느 것도 예외는 없다.

옌양추와 마찬가지로, 량슈밍은 향촌재건의 국가적 의의를 매우 중시했다. 그의 저서인 >에서 량슈밍은 지적한다.

“향촌건설은 단지 향촌건설이 아니라 전체 중국의 건설을 의미한다” 여기서 보면, 두사람은 표면적으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량슈밍은 중국의 뿌리가 향촌에 있다고 봤다. 그는 말한다: “중국사회는 향촌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향촌이 주체가 된다.” 여기서 향촌건설의 구호를 내세우는데 “새로운 길을 내고, 이 오래된 민족을 구원한다.”라고 하는 말에서 판단해 보면, 사실 두 사람의 생각이 갈라지는 부분이 있다. 량슈밍은 중국 모든 문화 대부분이 향촌에서 나온다고 봤다 — 법제, 예속, 공업과 상업 등 예외가 없다.

이는 ‘향토중국’내부에서 문화와 향촌의 연계를 분석하고, 그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 문화전통이 향촌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중국은 자신의 문화가 있고, 그 문화의 뿌리는 향토에 있는 것이다. 향토는 중국의 병이 아니라, 전통의 기반인 것이다. 근대이래, 중국향촌의 보편적 위기는 량슈밍도 동의하는 것처럼, 주 원인이 서방에 있다. 하지만, 그의 판단과 옌양추의 판단은 상반되는데, 서방의 작용은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된다고 본다. 향토중국 자신의 존재에도 해를 끼치고, 동시에 이 파괴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수많은 중국의 지식계층이 이를 거들고 있다.

그는 말한다: 근세 백년에 제국주의의 침략이 과연 직간접적으로 향촌을 파괴했다. 즉, 중국인의 모든 작위, 일체의 유신혁명, 민족의 자구활동 등 그 어느것 하나, 향촌을 파괴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마디로, 량슈밍이 보기에 만일 정말 ‘향토중국’을 병의 근원이라고 해야 한다면, 그것은 중국인들이 “근대도시문명의 길로 매진하면서, 서양학문을 배워 향촌을 파괴한 행위가 바로 병이다.” 여기서 ‘파괴’라는 한마디 표현의 함의가 매우 깊다. 중국의 뿌리와 기반은 향토이고, 향토는 또 그 문화 창조의 원본이자 원천이다. 향토가 병들었는데, 원인은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이래 외부의 침략과 파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건데, 량슈밍이 주장하는 향촌건설은 최초의 동기로 볼 때 사실 ‘향촌구제救濟’에 기인한다. 정확하게는 >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농촌의 파괴가 그 출발점이었다. 중국인들은 구제를 해야했다. 그리고 향촌이 무한대로 파괴되면서, 부득불 자구에 나섰고, 다시 적극적으로 건설하겠다는 요구가 생겼다.

그런데 이면을 들여다 보면, 자구가 없다면 건설도 없고, 파괴가 없다면 원래 자구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전에, 파괴되지 않았던 향촌은 그 나름의 원칙안에서 반드시 원래 생존의 합법성이 있었을 것이고, 그 나름대로 자유롭게 스스로 일이 진행됐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문제는 첨예하게 제기된다. 분기점은: 향토의 전통을 문화의 부재로 볼 것인가이다. 농업입국은 합리적이지 않나 ? 두 사람의 상술한 견해로 보건데, 옌양추와 량슈밍은 각각 다른 두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후자는 향토중국의 ‘자치파自治派’로 부를 법한데, 여기서 자치의 치는 향촌에 뿌리를 둔, 거버넌스를 뜻한다. 만일 전술한 ‘치병론治病論 ’일파의 주장에 의거한다면, 문명진화단계에서, ‘향토중국’은 낙후를 대표하고, 원래 병을 가진 몸체이며, ‘우빈약사愚貧弱私’ 문맹의 중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외부의 조력에 의해서 근치를 해야한다. 그렇다면, 이 주장에 내포된 무서운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농민은 존재 자체로 범죄이고, 외부에서 이들을 개조하지 않으면, 영원히 개과천선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자치파의 견해에 의하면, 향토농촌은 자체적 문화를 가지고 있고, 이 문화는 반드시 자치를 통해 그 활력을 유지할 수있다. 민국초기에 ‘향촌자치’측면에서 전범이 된, 허베이 띵현의 미씨米氏향신등이 자이청翟城마을에서 이러한 일련의 실천을 수행했다. 농업입국이라는 신념하에 미지엔산米監三, 미디강米迪剛 부자와 그외의 현지 인사들은 학교를 설립하고, 마을 계획을 수립하고, 선거를 추진해서 마을 자치를 실행했다. 조례장정條文規章의 형식으로 지역의 자치를 제창했는데, “모든 마을주민들의 조직으로부터.”라고 강조한다. 중국의 모든 소위 ‘전근대사’를 회고해보면, 이와 같은 표현에서 향토를 드러내고 전통적인 방법을 긍정하는 것은, 단지 민국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일찌기 청조말기에 시작된 것이다. 청조말기의, 또다른 의미있는 큰 흐름을 거명하자면, ‘촌락주의’가 있다. 그 적극적인 창도자중 한명이 청조말기 장원급제를 했던 실업가 장지엔張謇이다. 장지엔의 주장은 바로 ‘농업입국’이었다. ‘입국의 근본은 상업이 아니라 공업과 농업에 있고 농업이 가장 우선한다.” 나중에 량치차오梁啟超가 가세하여 ‘촌락’과 ‘국가’를 일체화한다. 중국의 전통에 근거하면, 촌락이 바로 국가의 원형질이다. 량차차오는 말하기를, “국가는 촌락의 집합체이고, 그렇다면 전국민이 모두 ‘촌락주의’에 근거하여 함께 존재한다. 확대해서 보면 하나의 촌락국가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이 발전한 민국초기에, 이를 계승한 미씨 등의 띵현 실천이 있었고, 그래서 이 사례를 감히 이러한 촌락주의를 관철한 전범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4. 국가기반과 향토가치

청나라 말기이래 ‘향토중국’의  (그리고 이와 유사한 수많은)개념과 명칭은 이렇게 갈수록 폭넓게 사용되었고, 단지 소수만이 진정으로 깊이 있는 고찰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문제를 돌아봤는데, 그 학자들중, 특별히 가치 있는 관점은 사회인류학자 페이샤오통費孝通의 것이다.

1947년부터 각각의 사례조사보고로써 >, >와 >을 발표한 후에 페이샤오통은 중국사회에 대해 총체적으로 분석한 학술저서를 발표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이다. 이 책의 가치는 단지 ‘향토중국’이 그 문화에 대한 의문에 답하고 있는 것뿐 아니라, 비교적 전체적으로 이 문화의 특징과 구조, 심지어 기능등, 다양한 방면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당시 향토를 중국전통의 기반으로서 긍정하던 다른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페이샤오통은 >의 출발점을 지적한다: “중국사회의 바탕 성질이 향토성이다.” 지금 향촌의 전통을 깔보고, 그 풍모를 ‘토기土氣, 촌스러움’이라 말하는 것에 대해, 페이샤오통은 정면으로 답한다. ‘흙토土’라는 글자는 땅을 의미하고, 땅의 기운은 대지의 기운이다. 중국사회의 모든 것은 이러한 토기에서 생성되고 확장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페이샤오통은 학술관점에서 토土와 향鄉 양쪽 층위에서 중국사회와 문화를 논술한 것이다. >에 대해서, 그 영문명으로 그는 “From the soil”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는데 직역하자면 ‘토지로부터’이고 나중에 >을 “Earthbound China’라는 ‘땅에 속박된 중국’이라고 표현했다가 다시 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한다. 모두 이 두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페이샤오통이 지적하기를: “중국사회를 인식하려면, 중국인을 인식해야 하고, 농민생활을 모르면, 농촌경제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단순히 이렇게 말로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이해하는 것은, 꽤 어렵다. 페이샤오통이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집약적으로 오곡五穀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이 중국 절대다수의 인구를 점한다. 그들은 중국문화의 근원의 상류이며 깊고 넓은 기반이다.

페이샤오통은 중국의 ‘향토성’ 특질에 명확함을 더하기 위해, 중요한 학술적 관점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오곡문화’이다. 오곡문화는 농경과 향토문화이고, 여기서 파생되는 사회적 특징이 꽤 많다. 이를테면 식량을 재배해서 생계를 잇고, 대대로 정주하고, 자급자족 및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구조 差序格局 (역자주: 페이샤오통은 중국인이 사회적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여, 그 범위와 친소관계를 확대해 가는 ‘동심원구조’로 해석했고, 서구인들이 정의하는 사회가 개인들이, 층층이 다발로 묶인 장작더미처럼 그룹의 나뉨과 소속이 분명하고 중복이 없는 구조인 것과 차이가 있다고 분석했다.)형의 관계망을 구축한다는 등이다.

아래에서 볼 수 있듯, 페이샤오통은 ‘향토논쟁’안에서도 특수한 의의를 갖는다.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결지을 때, > 저술은 직접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글을 읽어 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그 주지중 하나가 실은 ‘향촌건설운동’이 내포한 이론기반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옌양추 등에 대하여, 그가 이야기하는 향촌의 우빈약사愚貧弱私 라는 4대질병에 대해서 하나 하나 반박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문맹이 꼭 우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기심이 꼭 부도덕하다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농민들의 어떤 행위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향토중국의 밑바닥 구조부터 이해를 해야한다. 이렇게 인식하고 비교하면서, 도시민의 편견을 내려 놓고, 서구적 관점이 가져오는 편차도 벗어나야 한다. 페이샤오통은 향촌민은 “익숙한 사람들끼리의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고, 이는 “얼굴을 마주보는 커뮤니티”로 부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사실 문자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맹을 ‘우매함’과 등치시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이의 무지와 오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공평하게 비교를 하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마치 농촌아이들이 대학교수의 자식들보다 교실에서 공부가 좀 떨어질 수도 있지만, 교수의 아이들이 들에 나가서 같이 놀 때는, 시골 아이들처럼 메뚜기를 잘 잡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두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기반하는 것이지, 근원적 지적 능력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페이샤오통은 위트넘치게 비유해서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도시의 숙녀들이 시골에 놀러가 개짓는 소리에 놀라 겁에 질리는 것을 두고 ‘백치’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면, 시골 사람들이 좌측통행, 우측통행도 모른다고 비웃을일이 아니다. 그들은 정책이 조령모개하는 것을 바보같다고 생각할 터이니.”

반대로 물어볼 수도 있다: 문맹이라고 해서 왜 우매하다고 생각하는가 ? 페이샤오통은 중요한 관점 하나를 제시한다. 향토사회의 특징중 하나가 구전이다. 문자는 향토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도시문화에 속한다. 그리고 ‘사사로움’과 ‘공공’의 대립에 대해서, 페이샤오통의 설명에 의하면, 향토중국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윤리의식이, 중국은 ‘동심원구조’인 반면 서양은 ‘묶인 장작더미구조團體格局’라는 유형의 차이가 있을뿐이고, 이 두 유형은 각자 장단점이 있고, 형성의 배경이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에서 사용하는 완곡한 어법으로 보자면, 페이샤오통은 옌양추등과 공개 논쟁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는 “향촌작업을 하는 친구들에게 제안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페이샤오통은 실제로 이미 문제의 엄중함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으로 보건데, “근대화 과정에서 이미 우리는 향토사회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향촌건설자들이 보는 문제의 기점과 해결방법이 모두 정확하지도 유효하지도 않아서, 그들이 제시하는 전망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농촌의 문맹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반드시 문자와 언어의 기초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 아니면 그저 농촌 학교 몇개를 열고, 농민이 글자 몇개를 더 알게 할 수는 있어도, 농민을 정말 ‘ 똑똑하게’ 만들지는 못할 수 있다.

만일 페이샤오통의 ‘향토중국’사회 특징에 대한 평가가 상대주의적 대비와 긍정에 가깝다면, 치엔무가 가치의의에서 출발하여, 매크로하게 분석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수준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치엔무는, 인류 문화의 유형을 세가지로 분류하는데: 유목과, 상업과, 농경이다.

함축해서 보면, 유목과 상업은 하나로 볼 수 있다. 그 특징은 ‘부강동진富強動進’이다. 이와 달리, 농경의 특질은 ‘안족정정安足靜定’에 있다. 근대이래, 서양은 상업과 공업이 결합하여 날로 강대해졌고, 농경국가들에 도전했다. 하지만, 두 형태를 장기적으로 비교해보자면, 농경만이 인류에게 영구적 평화와 안정을 제공해왔다. 비교를 통해 ‘향토중국’의 세계사적 의의를 명확히 보이게 하기 위해, 치엔무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고금을 통해서, 전지구사회에는 적지 않은 농경국가가 있었고, 이를테면, 과거의 이집트와 바빌론 등 소국, 그리고 현대의 미소 양대 강국이 있다. 아쉽게도 소련은 이미 사라졌고, 미국은 농경본위 국가로 볼 수 없다. 수천년 역사를 통해, 중국만이 진정한 ‘대형농업국가’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공상문명의 격렬한 도전에 직면하여, 만일 농본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예전과 같이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대형농업국가로 남을 수 있다면, 중국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세계 평화를 지키는 리더국가가 될 것아니겠는가.

치엔무 저서의 초판은 1940년대에 출간되었고, 1987년 그의 나이 93세에 그는 여전히 강조하기를,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주장은 그 책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이를 중시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깊이 있게 보자면, 치엔무의 유목, 상업 그리고 농경문화 각각의 특질이 부강동진과 안족정정의 구분에 있다는 주장은 실증적 설명과 충분한 논증을 결여하고 있어서, 중국의 ‘대형농업국’ 문화가 어떻게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보면, 다른 주장으로 보충을 해야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에서 온 킹 박사이다.

19세기에 출생한 킹 박사 (F.H. King)는 농업과학자로서 ‘토양의 지속가능한 사용을 위한 시비施肥법과 관개灌溉법’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의 토지에 대한 태도와 이용을 비교했다. 1909년 킹은 태평양을 건너, 극동 지구를 조사했는데, 9개월의 필드트립의 결과로 유명한 >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1960년대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에 의해서 중국 농업의 고전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앨버트 라벤홀트 (Albert Ravenholt)는 이 책을 두고, 극동문명의 기초를 이해하는 최고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킹박사가 만리길을 넘어 한중일 삼국을 고찰하게 된 주요한 동기는 동방의 오래된 이 농업국가들이 어떻게 수천년간이나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해왔는지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결과적으로 그가 대면한 것은, 거의 4천년간의 문화유산을 간직해온 농경민의 집단이었다. 이 집단의 인구는 거의 5억에 이르고, 평화롭고 근면하며, 지혜롭고, 기계 사용 능력도 뛰어나고, 일찌감치 그 사용법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와 유사한 원리의 과학기술이 서방열강에서는 한참후에나 개발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에 도착한 후에, 산둥과 장강연안에서, 킹박사는 농촌 깊숙이 들어가 농민들과 대면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수많은 가정의 케이스를 조사했다. 마을 주민들의 농업기술을 공부했고, 직접 동아시아의 농경과 향토의 전통을 체험해 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를 놀라게 한 발견은, 이러한 전통에 한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자원과 생명의 순환이라는 것이었다. 생산의 경운과 수확이 토양에서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다시 토양으로 돌아가서 끝을 맺는다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 세대를 건너 계승되고, 평형 상태로 안정되게 이어지며, 적은 에너지 투입으로도 엄청나게 밀집해서 사는 대규모 인구를 먹여살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페이샤오통은 킹의 책을 읽고 큰 영향을 받게 된다. 1982년, 페이샤오통은, 킹의 저작에서 받은 충격을 거울 삼아, 농촌조사에 대해서 새롭게 강연을 하는데, 결론은 ‘향토중국’연구와  킹박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상당히 자세하게 킹박사의 관점을 소개하게 된다. 페이샤오통은 킹의 “토지에 기초한 중국문화 묘사”와 “순환시스템론”의 특징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중국인은 전체 생태평형 고리의 일부였다. 이 고리는 사람과 땅의 순환관계를 말한다.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음식을 취하고, 배설물을 땅으로 돌려 보내고, 생이 끝났을 때,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관계를 말한다. 대대손손 이를 반복한다. 이런 자연순환에 의지해서, 인류는 이 땅에서 5천년을 생활해 왔다. 사람은 이 순환고리의 일부가 됐다. 그들의 농업은 땅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관계를 가진 것이었다. 아시아의 이 토지위에서 오랜 기간 적지 않은 식량을 생산하고, 또 적지 않은 사람을 길러왔다. 누구도, 이땅에서 언제까지 이 순환이 지속될지 알 수 없다. 그는 중국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생존을 잘 이해하는 민족이라고 칭송했다.

이어서, 페이샤오통은 자신도 농촌 조사를 통해서 같은 생각을 갖게 됐다고 인정한다. >이라는 책은, 바로 킹이 말한 순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사람과 땅이 결합하여, 나고 죽는 것. 토지의 생산이 사계절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순환’이고, “향토사회에 속한 사람의 특징을 만들어 낸다”라고 설명한다.

이 논문의 전반부로 돌아가보자. 킹의 연구는 위안스카이가 중국으로 초빙했던 굿나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서인 >에서 한 챕터의 제목이 바로 “중국인: 사천년의 농민”이다. 하지만, 킹이 이야기한 중국농민의 “매우 과학적인 작물윤작”등의 일련의 문화적 수월성을 인정하고, 심지어 “서구사회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일”이라고 언급하면서도, 굿나우는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중국이 유럽에 비하여 “200~300년은 낙후”돼 있다고 결론 짓는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도 중국은 전제정치가 더 적합하다고 건의한다.

명확히 볼 수 있듯이, 양자의 관점은 차이가 크다. 만일 이런 차이에 대해서 토론하고자 한다면, 하층계급과 향토문화만을 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상층과 하층을 고루 살펴야 하며, 정치 경제와의 연관성도 돌아봐야 한다.

 

5. 토론: ‘작은 전통’과 ‘큰 전통’의 대조

지금까지의 논의는 백여년간 학계에 존재해온 ‘향토중국’에 대한 논쟁이다.

나는 이 논쟁을 ‘치병治病’과 ‘자치自治’라는 두가지 주장으로 나눠 불렀는데, ‘향토중국’을 둘러싼 두가지 상반된 관점은 앞으로의 사회 변천으로 볼 때도, 계속 오랜기간 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전체구조 층위로 논의를 확대하게 되면, ‘향토중국’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양쪽 모두, 공통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의식을 했든, 하지 않았든간에 한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천년에 걸쳐, 중국사회는, 향토를 뿌리가 되는 기층으로 삼고,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관료제 정권에 의해서 다스려왔다. 이러한 정치권력은 마치 전통 건축물의 ‘거대한 지붕’과 같은 것이다.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상층부 뿐아니라, 기층을 통치하며, 상하가 분명한 하나의 통제구조를 형성한다. 여기서, 지붕과 기층간의 관계는 쌍방향이다. 조세와 노역은 밑에서 위로 향하고, 왕권과 황제의 위엄은 위에서 아래로 작용한다. “하늘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위의 모든 존재중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아무리 황당하고 조령모개하는 수준이라도, 왕권에서 나온 상층의 명령은 지방의 모든 ‘풀뿌리사회’가 일심동체가 되어 복종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멸절의 재양이 닥칠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20세기이래, 학자들이 ‘향토중국’이라는 이론에 대하여 실은 그 뿌리 혹은 부속품으로써 주목하고 존재해온 ‘작은 전통’이다. ‘작은 전통’외에 ‘큰 전통’이 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관료중국’이다. 진과 한나라 이래, ‘관료중국’은 ‘향토중국’을 다스려왔는데, 이를 간과하면 문제의 전체와 본질을 볼 수 없게 된다.

이점에 있어, 샤오공췐이 청나라 말기 황제의 중국향촌에 대한 통치의 실제 상황에 대해서 행한 연구를 보면, 자세한 설명을 찾아 볼 수 있다. 삼년간 천여종 가까운, 중국과 서양의 책을 읽어 본 후, 샤오공췐이 보고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향토’는 중국의 뿌리이며, 이 뿌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형태를 띄고 있다. 실은 완전히 민중 자치의 사회이며, 바꿔말하면, “하늘은 높고, 황제는 저 멀리 있어, 왕권의 간섭이 미칠 수 없다”는 뜻이고, 하지만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부락들이 다양한 형태로, 황제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보일뿐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향토중국’안에 실제 존재하는 두가지 중첩된 기층이 있어서, 하나는 농민이 생활하는 향촌이고, 또 하나는 제국이 통치하는 향촌인 것이다. 이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향토중국의 특질을 간과하는 것이 되고, 향촌의 변혁과 왕조의 흥망성쇠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게 된다.

1980-90년대에 이르러, 두잔치杜贊奇의 연구가 다시 진일보하여 상부의 왕권과 기층 농민사이의 정치를 관리하는 존재를 발굴해 내는데 그것은 이속吏屬(吏役)과 현장縣長(知縣) 그리고 지역경찰地保이다. 이들은 향촌을 착취하는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아서, 왕권의 기층에 대한 실제적 작용을 책임지게 된다. 그래서 이들의 전제적 권력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관찰된다. 프리드만과 몇명의 미국학자들은 이러한 국가와 향촌의 권력거래관계를 ‘시혜’와 ‘비위맞추기’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향토전통을 지킬 것인가 와해시킬 것인가하는 논쟁가운데, 사실은 ‘관치’와 ‘민치’의 차이가 숨겨져 있다. 전자가 향토사회를 “국가에 귀속시키면서” ‘공민교육’을 강조하고, 국가대사에 무지한 농민들의 ‘우매함’을 치유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는다”고 주장한다면, 사실 중점은 국가에 있지, 백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민치’의 이론이 주장하는 것은 ‘향토화와 ‘지방화’인데, 한걸음 더 나아가 ‘민본화’의 주장으로 새길 수도 있다. 향토와 민간의 문화자산을 제대로 보고 아낀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가가 근본이 아니라 민이 근본이 되는 것이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다스리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향토전통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향토중국’의 가치와 운명에 관한, 논쟁은 과거와 현재의 중국과 서양의 관계, 그리고 상하층과 내외부의 연계를 빼놓고는 이야기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식론상의 정합성을 위해서, 연구자들은 향촌뿐 아니라 도시도 고찰해야 한다. 동시에, 상층관료정치와 기층향촌생활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끝으로, 가치논의상, 각자의 입장과 출발점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농본, 그리고 민치의 입장에서 보자면, ‘향토중국’의 인지는 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농업에 대하여, 농촌과 농민이 대표하는 문화전통에 대하여 경의를 표할 수도 있다. 심지어 쉬줘윈徐倬云선생이 >의 신판 서문에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 동의할 수도 있다: “수천년에 걸쳐, 중국은 세상 어떤 곳에도 비길 바 없는 뛰어난 농업을 발전시켜왔다.” 그는 동시에 중국 농민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이렇게 세대를 거치면서, 땅위에서 노동을 해온 무명의 영웅들이, 인류역사상 가장 복잡한 농업체계중 하나를 창조했다. 참조할만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를테면, 서방 당대의 농학자가 전세계 각지의 문명의 변쳔과 흥망성쇠의 역사를 비교한 후에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농업경작의 종사자가 한편으로는 토양에 영양분을 가져다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수확한다.” 그러므로 농업경작자와 토지 사이에 진정한 상호작용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비교해 보자면, 현대의 도시와 공업문명은 이렇지 않다. 후자의 출현과 ‘발전’은 지금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를 파괴하고 위협을 가하고 있다.”

 

6. 나오기

마지막으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본고가 주목하는 ‘향토전통’의 백년논쟁은, 단지 학계에 그 관심이 머물고 있지만, 실제 의미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여년간, ‘향토중국’의 개조와 영향은 실제 사회생활속에서 국가와 정당주도하의 정치운영 측면을 넘어서지 않았다. 20세기 초기의 ‘농민운동’이든 중기의 ‘인민공사’이든 아니면 후기의 ‘토지승포土地承包제’이든 모두 충분히 학계의 연구 결과로 나타났지만 각 사안에 대해 ‘향토전통’은 부속적으로만 다루어졌고, 사상토론의 논외에 해당됐다. 의의가 매우 크지만, 결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량슈밍과 마오저뚱이 친교를 나누고, 절교하게 될때까지의 과정이 이를 잘 대변한다.

현재의 문제는, 만일 향토중국에 대한, 근본적 인식상의 “문화적 딜레머” – 즉 향촌이 중국문명의 뿌리이자 희망인가 아니면 함정이자 진흙구덩이인가 판정하는 것, 바꿔말하면 농민생활이 “최선인지” 아니면 “최악인지”와 같은 이원론적 대치 – 를 탈피하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정치문제 해결과 민생층위의 상호 조화는 원만히 실현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 해결없이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 급증하고 있는 쌍방향 유동이 오히려 사회와 가치의 혼란을 가중시킬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중국인이 세계로 나아가면서 곧 맞닥뜨릴 상황이 스스로의 뿌리를 찾지 못하거나, 스스로의 크고 작은 전통을 새롭게 정리하지 못해서 표류하게 될지 모른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중문 본문 및 참고 문헌 – 이 논문은 2005년 제4회 인류학고등논단에서 발표됐고, 이후 2006년 제4기 >에 게재됐다.

http://www.sohu.com/a/312816469_270899

 

쉬신지엔 徐新建

문학박사, 사천대학교수, 박사과정 지도교수, 문학및 인류학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