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장에서는 유럽 여러 국가들 중에 상이한 역사적 경험과 경로를 형성해온 두 나라의 경험들, 민주주의의 본산이면서 산업혁명을 제일 먼저 일으켰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락을 되풀이하면서 급기야 스스로 유럽연합의 탈퇴를 결정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영국에서 18세기 말에 일어났던 사건과 러시아와 유럽대륙이라는 거대한 세력 사이에 위치하여 지리와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여러 번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복지체계와 산업구조에서 선진적 수준으로 발돋움한 스웨덴의 특별한 경험을 반추하여 본다.

구체적 사건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우 중요했던 세기적인 경험들, 영국의 ‘스핀햄랜드’와 스웨덴의 ‘노동자기금’의 전말을 요약하면서 사회세력간의 긴장과 변증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자본제적 시장의 도입기에 일어난 ‘스핀햄랜드’라는 선의적 패착은 삼백여 년이 흐른 현재에 탐욕과 증식으로 세계적 위기를 맞아 스스로 한계를 보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을 대체하거나 재구성해야 한다는 역사적 필요에 시의적절한 주제이며, 경제운용의 혁신정책에 따른 성과를 둘러싸고 사후적 배분을 넘어서 소유와 통제라는 금단의 영역을 다투었던 ‘노동자기금’의 전개와 소멸의 과정은 일개 가문들의 전횡에 갇힌 재벌체제를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한국경제 특히 구조적 변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앞둔 산업분야에 예비적 길라잡이가 될만하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는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연속이라는 측면을 지닌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첨단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금융기법이 고도화한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빈곤의 개념조차 정확히 규정짓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십 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 1-2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입에 의존해 생활하는 극빈상태에 처해 있다.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중세까지는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종교조직 등에 주변의 자발성에 의존하여 가난이라는 문제를 임의적이고 불안정한 상태로 해결하여 왔으나 16세기 영국의 튜더 왕조에 이르면서 비로소 과거의 규제와 처벌에서 적극적인 구제라는 성격으로 전환되어 비로소 국가단위의 체계적 빈민정책이 추진되었다.

장기간의 논의와 시행착오를 거쳐 엘리자베스 1세의 말년인 1598년 완성된 빈민법은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을 확립한다. 우선 구걸과 개인적인 자선 행위를 금하는 동시에 사회적 구제를 제도화하고, 이를 위한 빈민구제의 업무를 지방단위의 치안판사(justice of peace)와 교구단위로 조직된 상설 민생위원이 맡도록 했고, 빈민법 적용대상을 신체 무능력자와 노동능력이 있는 자로 구분하여 전자는 구빈세를 재원으로 구제하고 후자는 공공사업을 통하여 일자리를 제공하도록 하였으며 각 지방마다 교화소를 설치하여 빈민들의 강제노역을 의무화하였다.

튜더 빈민법이 도입된 배경에는 16세기를 가로질렀던 흉작과 물가폭등 산업적 불황 등에 대응하는 국가의 일반적 역할에 더하여 도시화와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과거 봉건 장원이라는 공동체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해왔던 수도원이 대부분 해체되자 이를 대신할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부랑자들에 의한 반란 등 사회적 불안과 범죄가 늘어나고 위생이 불량한 걸인들이 전염병의 원인이 되면서 이들을 격리해서 관리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시대를 주도한 지식인들이 지닌 휴머니즘과 공화주의적 사상의 흐름도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증기기관의 발명에 이어 면직공업과 철로망이 확산되면서 18세기 말부터 산업화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엄청난 산업생산력의 증대는 국내수요의 확대와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지난 1세기 간에 인구는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양적 확대뿐만 아니라 농촌과 농업중심이었던 산업과 인구구조가 도시와 제조업으로 집중되면서 18세기에는 전체의 절반이 넘었던 농업 인구가 19세기 중반에는 25% 이하로 축소되고 20세기 초에는 8-9%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 과정에서 16세기부터 시작되었던 인클로저 운동의 결과와 맞불려 태반의 영세농민들은 조악한 임노동자로 조락하게 된다. 당시의 노동시간은 12-15시간이 예사였고 방적공장 노동자 중 여성과 아동의 비중이 60%를 넘어섰다. 동시에 산업화의 역설로 인구의 1/7 정도가 빈민구제의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국가 예산의 20% 정도가 빈민법의 구제비용으로 할당된다.

빈민구제의 책임이 지방으로 위임된 상태에서 담당교구는 감당하기 어려운 재정적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안과 법규를 고안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재정적 부담능력이나 보탬이 안되는 다른 지역의 사람을 배제하는 정주법(settlement act)이 도입되고, 빈민과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구호물자를 제공하는 구빈공장 즉 공공의 강제노역을 지키는 직업교화소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이를 독자적으로 운용할 능력이 없는 소규모의 교구들이 공동으로 함께하는 것을 허용하는 길버트법이 제정된다.

도시형 공장의 확산 등 자본주의 발전이 요구하는 필요 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정주법이 완화되는 무렵인 1795년 5월, 버크셔에 소재한 스핀햄랜드의 한 숙소에서 빈민구제를 담당하는 치안판사와 성직자들이 모여 빈민구제를 위한 임금문제를 논의하면서 최저임금을 설정하는 대신하여 교구가 노동소득을 보상해주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갔다.

내용인즉 “1갤런의 곡식으로 만든 빵의 가격이 1실링이라면 노동자의 소득이 3실링이 되도록 채워주고 가족이 있다면 상응하여 추가로 지원한다. 만약 빵의 가격이 1펜스 이상으로 오르면 노동자 몫은 3펜스, 가족 몫은 1명당 1펜스씩 올려 보충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매우 단순하고 어쩌면 너무나 인간적인 더구나 강제력을 가진 법령도 아니며 관습적 관행으로 결정한 내용이 이후 영국사회의 복지역사를 잔류적이고 낙인적인 내용으로 점철하면서 현재의 삼류국가로 퇴행하는 계기가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문제는 스핀햄랜드의 선의적이고 온정적인 결정을 역사적 전환기에 서있는 각 계급과 계층이 서로 자신들의 좁은 이해에 갇혀 악용하면서 사회전체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산업적 조건을 후퇴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스팬햄랜드라는 우산(雨傘)아래, 구지배 계급에 해당하는 지방의 지주와 교구의 성직자들은 농토에서 해방된 농노출신들을 해당 지역에 묶어두고 농번기와 수확기 등 자신들이 필요한 시기에 한하여 저렴한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신흥세력인 도시의 산업 자본가들은 도시로 몰려든 임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임금을 갖은 핑계를 동원하여 가능한 낮은 수준으로 묵어두려 하였고, 당자자인 노동자들 역시도 열심으로 일을 해야 할 하등의 이유를 찾지 못해 빈둥대면서 일상의 작업에 임하였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도덕적 해이와 모순(moral hazard & dilemma)이 중첩적으로 만연했던 것이다. 당시에 보상방식 대신에 최저임금제를 적용하자는 논의(휘트브레드 법안)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스핌햄랜드가 가지는 선의적 명분에 묻혀 버렸고 점차 사회적 영향력이 커져가는 산업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아예 봉쇄하여 버렸다. 최저임금제가 도입되고 노동단결권과 쟁의권이 허용되었다면 스팬햄랜드의 구빈적 관습과 결합하여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최악의 조건과 상황들이 결합되면서 서로가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스스로 자해를 가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부담은 해가 갈수록 커져만 갔고 최초에 정한 보상적 합의의 내용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열악해져 갔다.

결국 영국사회는 1795년에서 시작하여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산업적 혼란과 퇴행을 경험하면서 성과적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벤덤 등 공리주의자들과 인간을 단지 이기적 경제동물로 규정하는 정치경제학자들의 초기자유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1834년 새로운 빈민법을 제정하여 도입하게 이른다. 스핀햄랜드 관습법이 가져온 도덕적 타락과 딜레마가 낱낱이 폭로되고 비판되는 과정에서 태동한 신빈민법은 과거의 빈민법보다 훨씬 열악한 처우와 환경으로 빈민들을 몰아 넣게 된다. 빈민법 대상자들의 처우는 독립노동자들보다 열악한 조건을 유지해야 한다는 열등처우의 원칙이 논의되고, 무능력자 어린이 여성과 남성 등을 철저하게 차별하여 수용하고 강제노역을 부여한다는 분리의 원칙 등이 적용된다.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은 홍기빈 박사가 공을 들여 번역한 저서 ‘거대한 전환’을 읽어 보시길 권한다. 칼 폴라니는 스핀햄랜드의 배경 및 전개 과정과 결말에 대해서 80여 페이지에 걸쳐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후 빈곤을 사회적 현실과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웹 부부의 노력에 의한 예방과 치유를 위한 사회보호 정책이 제안되고, 제2차 대전 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베버리지의 종합적 복지정책 등이 도입되었으나, 기본적으로 영국이라는 국가는 ‘스핀햄랜드’라는 온정적 관행 제도의 실패 이후 가난과 빈곤이 개인적 귀책으로 돌려지면서 잔여와 선별 그리고 낙인효과가 부지부식 간에 복지정책의 밑바닥에 흐르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우선주의 그리고 공리주의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는 파편화되고 이기적 개인주의가 주류적 흐름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주요 현안은 현란한 공적 토론과는 무관하게 카펫트 밑으로 숨겨져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로 변질되어 간다, 지금의 한국 정치판과 공직 사회가 그러하듯이.

‘스핀햄랜드’라는 우연적 계기가 만든 역사적 실패의 상흔으로 인하여 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시작한 나라이면서 정치적인 파행과 무능이 지속되고 산업혁명을 일으킨 나라이면서 산업적 공동화를 면치 못하고 국가적 복지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이면서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나라로 조락하고 있는 것으로 필자의 눈에 비쳐진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국가책임 의료서비스 체계(NHS)가 그나마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제는 이야기를 북유럽으로 돌려본다. 사민주의의 상징으로 알려진 스웨덴의 복지국가 정책을 필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는 결을 달리하여 ‘인민의 집’이라는 국가공동체 주의와 이와 길항하는 ‘자유선택사회’라는 개인존중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두 개의 축이 이루는 변증적 과정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1920년 이래 스웨덴 근현대 역사를 줄곧 경제정책과 사회정책간의 긴장과 타협, 복지에 있어 기본적으로 보편주의를 추구하면서도 때로는 사안과 상황에 따라 선택적 성격을 수용하는 유연한 절차적 흐름 속에서 공정이냐 효율이냐 또는 시장이냐 정부이냐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 넘어 정치 또는 권력자원을 둘러싼 시민 구성원간의 긴장과 타협의 과정으로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920-30 년대 사민당 집권초기에 사상적 영향을 크게 끼친 인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한 칼레비는 ‘개인과 단위조직의 영향력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다양한 사회적 조정에 대한 참여를 통해 실현되며, 시장에서 소비자로서 선호의 표명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천명한다. 그는 또한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권을 거부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참여를 전면화하면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각종 사회정책과 입법은 노동자와 시민들의 자율성을 높여 자유시간을 확대하고 시장에서 구매력을 증대시켜서 개인의 영향력을 지원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칼레비의 입장과 궤를 같이하면서 비그포르스, 묄레르 그리고 뮈르달 부부 등 탁월한 인물들이 국가운용의 주요 직책을 맡아 사회경제운용의 기본적 방향과 정밀하게 준비된 정책공학의 밑그림을 현실적으로 추진해오면서 복지국가체제가 온전히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여기서 주의하여 볼 것은 이들이 추진해온 방식은 결코 과도한 이념이나 일개 정당의 권력적 과시가 아니라, ‘점진적 유토피아(지향적 좌표와 맥락적 개혁)’로 상징되듯이 추구하는 방향을 분명히 하면서도 마주한 상황과 고비마다 현실에 유연하게 응동하는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여 왔다는 것이다.

1932년 사민당 재집권에 성공한 이래, 한손 수상의 ‘인민의 집’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앞세워 뮐레르는 보편적 복지정책에 대한 수구세력의 저항을 무력화시켰으며, 비그포르스는 경제적 위기를 활용하여 오히려 산업전반의 구조를 변혁적으로 탈바꿈하면서 복지국가를 위한 물적 기반을 확립하였고, 뮈르달 부부는 당시에 직면했던 인구문제라는 위기를 미래로 향한 사회공학적 정책으로 유도하는 계기삼아 전화해가는 과정에서 보듯이, 고집스런 이념의 추구보다는 어려움에 봉착한 현실적 상황과 조건을 미래적 과제로 전환시킨 실천적 측면이 매우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전개의 과정에서도 집권 사민당은 필요하면 농민층과 연대하는 적록(노농)연맹도 마다하지 않고 이후 제3차 산업이 주도적 경향으로 나타나자 연대의 대상으로 농민층과 결별하고 공공부문의 노동자 및 화이트칼라의 사무직 종사자들을 대거 포용하는 방향으로 변신한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전(以前)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렌과 마이드너 등 신진 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인플레이션 등 새로운 경제적 상황에 직면하여 동일노동-동일임금이라는 연대임금을 기축으로 산업의 구조를 고도화하는 혁신적 기제를 추동하여 경쟁력을 상실한 산업과 기업을 퇴출시키고 이 영역에서 종사하던 노동자들을 적극적 노동시장과 학습체제를 도입하여 미래지향적 고부가가치의 산업으로 재배치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유선택사회’라는 원칙에 따라 시장기능을 왕성하게 작동시켜 왔으며 이런 연장에서 2018 년 현재 스웨덴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장사전적 지니계수가 0.43 수준을 넘어서면서 미국과 진배없는 양극화적 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지만, 또한 시장의 운용성과를 ‘공동체적 공유와 배분’을 축으로 삼아 공적 지출과 강력한 사회소득 이전의 정책으로 보완하면서 시장사후적 계수를 0.28 이하로 낮추어 가고 있다.

역사는 복잡하고 잠재적인 조건들이 상황에 따라 상호적인 보합과 대립적 길항의 형태로 교대하며 나타나면서 계기적으로 진보적 전진의 흐름을 이어지다가 간간히 와류적인 수구의 저항이 지속되듯이, 렌-마이드너의 연대임금정책이 크게 성공을 이루면서 산업구조가 혁신적으로 개선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에 봉착한다.

경쟁력을 상실한 재래적인 중소기업이 혁신적인 신생산업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지닌 대규모의 기업 집단들에게 흡수 합병되면서 경제와 산업의 집적도가 급격히 높아지고 산업적 불균형과 부의 집중 역시 현저하게 강화된다. 예를 들어, 발렌베리라는 한 가문이 스웨덴 주요 기업들의 주식들을 과점 취득하면서 2015년 기준으로 GDP의 30%와 경제활동 인구의 5.0% 수준의 고용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 집단들은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할 여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연대 임금의 원칙에 따라 동종산업의 동일임금 수준으로 기업 수익성에 비해 임금을 상대적으로 적게 부담하면서 평균 이상의 과다이윤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1970년에 들어서면서 해당 기업과 직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러한 불만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조업 노동자들 중심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연맹LO는 총회의 결의를 통하여 ‘노동자기금’의 설립을 사민당 정부에게 요구하기에 이른다. 노동자기금의 주요 내용은 초과이윤을 실현하는 기업들에게 법적으로 이윤의 20% 정도를 노동자를 위한 기금으로 적립을 강제하고 이 기금으로 필요에 따라 해당 기업의 주식을 개별 노조 또는 노동조합연맹LO의 이름으로 취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물론 기금은 노동자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고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집단적 소유(또는 노동자 일반의 소유)라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기본적인 의도는 10년 내지 20년의 장기간에 걸쳐 주주중심의 소유구조를 혁파하고 노동자와 함께 집단으로 소유하고 집단으로 경영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이를 직선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만만치 않았으며 다양한 공간과 계층에 따라 매우 복잡한 이해의 갈등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선 서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3차 산업화가 상당하게 진행되면서 사무중심의 화이트칼라 노동자 인구가 확대되어 오히려 제조현장의 노동자 숫자를 넘어서게 되었고, 복지국가 체제가 진행되면서 공공분야의 종사자들 역시 급격하게 늘어난 상태이었다. 사민당은 재집권을 위해서는 단순히 기존의 노동조합연맹LO의 입장뿐만 아니라, 이들과 이해의 결을 달리하는 사무직과 공공분야의 종사자 그리고 광범한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민당은 8년여에 걸쳐 지루한 토론과 논쟁 끝에 노동자기금의 내용을 조정하여 공동의 소유와 경영이라는 본래의 취지와는 다분히 동떨어진 구조조정에 대한 지원 기금의 성격으로 변질시켰다. 문제는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지난 수 십 년간 복지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물적 기반을 제공함에 있어서 노조의 파트너로서 성실하고 협조적이었던 주주와 경영진들의 반격이 촉발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압도적 물적 기반과 자금력을 동원하여 중도보수 정당들을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민간 미디어와 학계 등을 포섭하여 중산층 유권자들을 향해 사만당을 반대하는 광범한 홍보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하여 1990년 서유럽을 덮친 불황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그리고 이민유입 문제까지 겹치면서 70여 년간 집권을 통하여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던 스웨덴 사민당이 급기야 중도적 정당에게 연합정권의 주도권을 내어 주기 시작하더니 현재 시점에서는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우파정당에게도 위협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스럽게 그 동안 스웨덴 사회가 구축해온 복지국가 체제라는 토대는 소위 구축효과(embedding effects)와 더불어 시민들의 광범한 합의와 연대 위에서 형성되어 왔기에 일부 소소한 조정과 축소를 겪기는 하였지만 기본적 골격을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다.

1920년 이래 줄곧 집권에 성공해온 사민당이 현재 시점에서 야당으로 추락하거나 또는 연합정권을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겠지만, 70년 대 때마침 전개된 ‘노동자기금’이라는 운동이 계기적으로 작동한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현 시점에서 ‘노동자기금’ 운동을 섣불리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며, 인류적 재앙과 위기를 불러온 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착될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부담을 예상하면서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현대 스웨덴의 한 축을 형성하였던 ‘자유선택사회’라는 개인존중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조합조직 중심의 ‘노동자기금’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보완적 역할보다는 이질적이며 충돌적인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미래의 기업모습을 노동조합이라는 조직단위가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방식이 아닌 개별 종업원 중심의 지주회사 또는 개인참여적 공동소유인 협동조합의 형태로 바꾸어 나가면 (예건데 결정과 집행과 배분이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면)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다수의 참여를 통한 민주적 결정과정과 실효적인 성과(accountability)를 책임져야 하는 집행력 간에 상합적 시너지는 어떤 경로를 통해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자유와 선택의 책임, 공적 소유와 사적 재산권, 민주적 참여와 상보적 협력, 다기다원적 역동과 미래지향적 혁신, 공정한 배분과 지속적 순환 등 하나같이 답변이 싶지 않은 질문들이 기다린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현대 산업사회의 양상에 더하여 칼 폴라니가 이야기하는 복합사회의 전개 속에서, 계기적으로 돌출하여 현장 중심의 노동조합연맹LO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노동자기금의 내용은 제한된 현장 노동자의 경제적(재무적) 이해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별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항변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 상황을 감안하여 특정한 노동조직의 이해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입장과 전체적 조망을 포용해낼 수 있는 시민사회의 일반적 이해와 관점에서 재구성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국가 또는 시민사회의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일개의 가문소유나 특정 조합의 집단소유 모두 개별적 소유의 형태로 볼 수 있다. 핵심은 시장적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개별가문 또는 특정조직의 소유라는 틀을 뛰어넘는 공공(일반)적 소유형태로의 진입이다.

최근 고려대 노동대학원의 조규엽 교수가 어느 일간지에 기고한 내용처럼 ‘노동 일반의 공공성’이라는 개념적 확장이 흥미롭다. 이런 맥락에서 2017년 말 민주노총 김영환 위원장이 취임한 이래 잘나가는 재벌과 공공노조의 자폐적 한계를 뛰어 넘어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업의 저임 노동자들을 위해 함께 연대투쟁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행보이다.

과거, 노동자기금이 지향했던 사회적 소유와 경영이라는 취지와 연대를 필자의 주장인 시민경제론의 관점으로 보완하고 재해석하면, 세대를 넘어서면서 물적 기반의 사적 성취를 공공적 소유로 전환하는 ‘사회상속제도’의 도입과 동시에 단위 행위자들의 지속적인 역동성을 일반적으로 지원하는 시장혁신적인 ‘중앙투자기금’의 결합형태일 것이라고 재삼 확인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13장 ‘조세개혁과 사회상속’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아래로 결론부 이야기를 되풀이 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원칙적으로 사회적 상속으로 형성된 재원은 주로 기존의 물적 기반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하여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산업적 생산기반의 지속 혁신 확장이라는 영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활용되어야 하는 반면에, 전통적인 조세개혁을 통하여 확보한 재정은 국가 운용의 필요 경비와 사민주의적 관점에 기반한 사회안전망과 복지재원에 주로 사용해야 한다.

전통적 조세의 개혁을 통한 재정을 형성하든, 사회적 상속제를 통해 재원을 확보하든, 인류가 현단계까지 형성해온 물적 기반과 조건을, 신자유주의에 의해 반인륜적으로 작동하는 기득권적 구질서로부터 탈구시켜,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사회적 공동선과 자유 조건의 영역적 확대를 위하여 재구성하여야 하며 지속적인 확장을 위해 혁신 기제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