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3자회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1년만인 1990년 10월 3일, 동독이 독일연방에 가입함으로써 독일 통일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베를린 제국의회의사당에서 144명의 동독 의원을 포함하여 전독의회가 개최되어 역사적인 독일통일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한달 보름 후인 1990년 11월 19일, 독일 베를린 시청 192호실에서는 세계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한반도 통일을 위해 매우 의미있는 회담이 열렸다. 남·북한과 해외동포 대표들이 모여 범민족적인 통일운동체 결성을 논의하는 베를린 3자회담이 열린 것이다.

회담은 오전 10시(한국시간 오후 6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남한·북한·해외동포 3자 대표 9명이 회의실에 입장했다. 대표 면면을 보면 남한측 대표로 범민족대회 남측본부 공동대표인 조용술 목사를 비롯하여 이해학 목사, 조성우 등 3명, 북한측 대표는 전금철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그리고 해외동포대표로는 유럽본부 의장 정규명, 북미주본부 공동의장 이행우, 발기준비위 대표 김현환, 그리고 유럽본부 사무총장 임민식과 대변인 황석영(소설가) 등 5명이었다. 원래 북측에서도 여연구 북측본부 부위원장(여운형 선생 딸)과 백인준 문예총 의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여연구, 백인준은 회의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까지 왔었으나 독일정부로부터 비자를 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하고, 결국 전금철 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었다. 남측대표 참석도 순탄하지 않았다. 남한 정부가 이 회담 자체를 불허했기 때문에 남측대표들도 각각 제3국을 거쳐 들어와 회담 전날에야 겨우 베를린에서 합류할 수 있었다. 비공개회담은 아니었지만 집행부에서 보안에 신경을 쓰느라 언론기관으로는 유일하게 사전에 연락된 한겨레신문 이상기 특파원만이 참석해 이 회담 시작을 취재할 수 있었다.

회담에 들어가기 앞서 간단한 개회식이 있었다. 먼저 대표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용술 목사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등단하여 인사말을 했다. 조 목사는 자신이 스위스를 거쳐 독일에 오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어렵게 성사된 이 회담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덕담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어 해외대표 정규명 박사, 전금철 북측대표의 간단한 인사말이 있었다. 3자 대표로 남측의 조용술 목사와 북측의 전금철, 해외측의 정규명 3인이 회담장 앞에 나와서 손을 맞잡고 회담 성공을 기약하는 기념촬영을 했다.

이어 이들 3자 대표들의 간단한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회담에 돌입했다. 회의의 주제는 바로 그 해 8월 15일 판문점 북측지역에서 열렸던 범민족대회 결의사항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의 결성을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번 회담은 범민족대회에 이은 후속 실무회담인 셈이었다.

 

반쪽 범민족대회를 완성하라

처음 이 회담은 조성우가 1988년 5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발의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이 구상은 재야 민주진영의 논의 과정에서 남과 북, 해외동포 3자가 한데 모여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모색하는 ‘범민족대회’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1988년 8월 1일, 남쪽 각계 인사 1,014명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취지문’을 통해 범민족대회를 제안하고, 그해 12월 9일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허담)가 이 범민족대회 개최를 지지한다는 답신을 보내옴으로써 범민족대회 운동이 닻을 올리고 출범했다. 그러나 이후 ‘창구단일화’원인을 앞세운 남한 정부당국의 원천봉쇄라는 역풍을 맞아 범민족대회 운동은 일시 주춤하게 된다.

민간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것을 돌파하려는 일련의 방북시도가 이어졌다. 그 해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전격 방북하였고, 6월 30일에는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이 방북하면서 재야의 통일운동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정국은 통일문제를 놓고 들끓기 시작했다. 결국 89년의 뜨거운 통일운동은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문규현 신부의 구속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이 일련의 방북으로 달궈진 통일열기는 90년 범민족대회 개최 열기로 이어졌다.

1990년 7월27일 남한정부가 태도를 변화하여 서울에서 개최하는 범민족대회 예비실무회담을 허가했다. 범민족대회 개최의 물꼬가 트이는듯 했다. 그러나 결국 북측대표의 입경과정에서 정부당국이 강경규제방침을 발표하여 회담은 좌초되고, 북측대표는 판문점에서 기다리다 돌아갔다. 그래서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던 해외동포와 남측대표만으로 회담이 열렸다. 예비회담은 실패했지만 1990년 8월15일 판문점에서 열기로 했던 범민족대회는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남한당국의 제지로 남측대표가 참석하지 못하고 판문점 북측지역에서 북측과 해외동포가 모여 반쪽짜리 대회로 개최되었다. 그런데 북측 집행부에서 89년 방북한 황석영 씨를 남측대표 자격으로 참석시켰다. 3자가 모두 참여한 범민족대회의 모양새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범민족대회 결의로 범민족적인 통일운동체인 범민련의 결성을 발표해 버렸다. 남측은 비록 판문점 범민족대회에 남측 대표가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결의를 수용하기로 하고 범민족 통일운동체 건설에 나설 것임을 밝혔다. 그렇지만 반쪽짜리 범민족대회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조직건설방침에 대해서는 3자가 만나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그 논의를 위해 베를린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범민련의 탄생

베를린 3자회담은 초반부터 쟁점사항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남측대표들이 현재 남과 북, 그리고 해외 통일운동역량으로 볼 때 높은 수준의 연합체를 결성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범민련이라는 명칭과 조직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했다. 그리고 현재의 통일운동 수준에 걸맞게 이번에 결성될 통일운동체는 협의체적 명칭과 조직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측대표 전금철은 선선히 남측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8.15 범민족대회 결의를 존중하여 명칭만은 범민련으로 가져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 토론 끝에 절충이 이루어졌다. 즉 ‘범민련’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가져가되 조직구조와 운영방식은 남측 주장을 대폭 반영하기로 했다.

베를린회담은 첫날 19일에 주요한 쟁점은 모두 해결이 됐지만 구체적인 세부사항 논의를 위해서 다음날까지 회의가 이어졌다. 회의를 마치고 20일 오후 6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이 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해외 3자가 동시에 참여하는 대중적 통일운동조직인 ‘범민련’이 탄생했다는 것이었다. 남·북·해외동포 3자는 ‘범민련’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고, 이를 통해 “범민련은 범민족대회를 통해 분출된 7천만 겨레의 자주적 평화통일운동을 집대성하고 대중화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남북한 당국에 대해 “분열과 대결을 청산하고 범민련에 참가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군비 축소, 유엔분리가입 반대, 불가침선언 채택 등의 통일문제와 관련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95년을 ‘통일원년’으로 설정하고, 빠른 시간 안에 민간차원의 단일 통일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아울러 91년 8월 15일 서울에서 2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하는 등 91년 사업계획도 발표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3자회담 대표들은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가서 ‘조국은 하나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플랭카드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한가운데 조용술 목사가 서고, 좌측에 전금철과 이해학 목사, 우측에 정규명 조성우가 서 있는 이 사진은 베를린 3자회담의 역사적 기념물로 남게 되었다.

이 회담은 한겨레신문 기자에 의해서 사진과 함께 비교적 상세히 보도되었지만 동아, 조선 등 주요 일간지에는 베를린 연합통신발로 간단한 1단기사로 취급되었다. 그와 함께 조용술 목사 등 남측 대표 3인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하다는 통일원 대변인의 논평도 보도되었다.

남측대표 세 사람은 일본 동경을 거쳐 11월 30일 오후 1시 3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대표단 가족들과 이창복 전민련 의장을 비롯한 재야인사 100여명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표단의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다. 대표단 탄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수사관 40여명이 트랩을 내리는 대표단을 연행, 청사 뒷문으로 빼돌렸기 때문이다. 수사관들은 대표단을 일단 용산경찰서로 데려가 구속집행절차를 마치고 곧바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향했다.

 

“알았네. 내가 필요하다면 가야지.”

베를린회담으로 일었던 통일운동의 파문 속에서 세인들의 관심은 남측대표 3인 중에서도 조용술 목사에게 쏠렸다. 우선 70세 노인의 몸으로 구속을 각오하고 형극의 통일운동에 나선 것이 특별해 보였다. 게다가 조 목사의 미소띤 온화한 인상이 험난한 통일투쟁과는 거리가 멀어보였고, 그래서 점잖은 백발의 노신사로 보이는 분이 어떻게 말년에 통일운동에 나설 수 있었을까 궁금해 했다.

사실 조 목사는 기독교계에서는 복음교단 총회장과 NCCK 총회장을 지낸 교계 원로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70년대부터 군사정권에 기탄없이 비판의 쓴 소리를 함으로써 한 때 옥고도 치른 민주인사였다. 그리고 전북지역에서는 강희남 목사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이끌어나간 존경받는 큰 어른이었다.

그런 그가 통일운동에 나선 것이 왜 특별해 보였을까? 무엇보다 살아온 궤적으로 볼 때 문익환, 강희남 목사가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 같은 재야인사였다면 사실 조 목사는 제도권 인사에 가까웠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용술 목사는 8.15 해방 직후에 군산에서 전도사가 되어 목회를 시작한 이후 40여년 동안 한번도 목사의 직분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1953년 장로교가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교 장로회가 분립할 때 조용술은 장로교를 떠나 복음교회를 선택했고, 복음교회 목사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1973년 복음교회 총무로 시작하여 1977-83년과 1987-90년 9년간을 복음교회 총회장을 지냈고, 1983년부터 9년간을 복음교회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복음교회가 비록 작은 교단이긴 하지만 교단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인 셈이다.

그런 그가 70의 나이에 목사 은퇴를 앞두고 홀연 베를린으로 떠나 감옥의 길로 간 것이다. 마치 인도 자이나교 승려들이 일생을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옷을 모두 벗고 출가하는 것처럼 그도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베를린 회담 대표로 가는 과정도 갑자기 이루어졌다. 회담이 있기 2달 전쯤 조성우가 조용술 목사를 찾아와 불문곡직 회담 대표가 돼 줄 것을 요청했다. 뜻밖의 제안을 받은 조용술 목사는 그러나 망설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았네. 내가 필요하다면 가야지.” 그리고 조용히 신변 정리를 시작했다. 복음교회 총회장도 사퇴했고, 시무하고 있던 군산복음교회 담임목사도 후배인 오충일 목사에게 인계했다. 베를린으로 출발하는 날 아침에도 부인 송정옥 여사에게 회의차 독일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이웃집에라도 가는 것처럼 명랑하게 얘기하고 집 문을 나섰다. 공항까지 담임목사 가방을 들고 따라 나온 교회 하규철 장로에게도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음성으로 “이번 여행이 길어질 것 같으니 교회 뒷일을 부탁하오.”하면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살아온 길은 언제나 바로 이런 일들을 향해 있었고, 그런 점에서 그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전쟁 속에서 인생의 길을 세우다

조용술 목사는 1920년 12월 1일 전북 익산군 함라면에서 임천 조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천 조씨 집안은 대대로 익산에서 대농으로 부유하게 살아왔다. 그러다 구한말 조용술 목사 조부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아버지 대에 와서는 완전히 빈농으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강직하고 성미가 불같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조용술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쯤 됐을 때 조용술은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사해서 살다가 10살 쯤 되어 늦은 나이에 미션스쿨인 영흥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뒤늦게 기독교에 입문하여 아들을 기독교학교에 보낸 것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영흥중학교에 입학해서 고등과를 2년만에 졸업했다. 미션스쿨 출신으로는 마땅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던 조용술은 1939년 목포를 떠나 가족과 함께 군산으로 돌아왔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대대적인 징병징용령을 내렸다. 조용술은 해군군속으로 뽑혀 군산지역 청년 80명과 함께 부산에서 훈련을 받고 사이판을 거쳐 웨이크라는 섬으로 보내졌다. 웨이크에서 2년간 비행장 토치카 작업을 하는 일을 했는데, 그동안 조용술은 미군의 계속되는 폭격 속에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극한상황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첫 번째 인생의 고비에서 조용술은 생각했다. “나는 죽지 않는다. 그러면 살아 고국에 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길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혹독한 작업 속에서도 틈틈이 책을 읽었는데, 특히 가가와 도에이고(河川豐原)의 기독교사회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귀국하면 사회운동에 참여해서 기독교사회주의 나라를 만드는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조용술은 무사히 군산으로 돌아왔다. 거리에는 거지와 가난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조용술은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군산지역 신앙동지들과 함께 시장 안에서 빈민들과 노무자들을 위한 급식소를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일하는 동지의 누이가 찾아와서 김제군 성동면 남포리에 빈 교회가 있으니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권했다. 그는 그 권유에 따라 그곳에 가서 한글계몽운동을 겸해 목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목회활동의 출발이 되었다.

 

복음교회 목회자가 되다

조용술은 그곳에서 목회를 하면서 군산노회에 전도사 시험을 쳐서 전도사가 되었고, 친척의 중매로 결혼도 했다. 1948년에는 옥구 어은리교회로 옮겨 목회를 했다. 이 해 9월부터는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 전신)에 입학하여 다녔으나 집안 형편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서 1년 만에 휴학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신학교가 부산으로 옮겼고, 조용술도 부산으로 피난 가서 1952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전쟁이 끝나고 당시 한신대를 설립했던 김재준 목사와 송창근 목사를 중심으로 기존의 보수적인 장로교단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결국 이들을 따르는 목사, 장로들이 1953년 기독교장로회로 분립해 나오게 된다. 이 때 조용술의 인생에 두 번째의 큰 고비를 맞게 된다. 그는 이 무렵 군산에 돌아와서 옛 신앙의 동지들을 모아 신우회(信友會)를 조직하고 막 활동을 시작한 참이었다. 이 당시 만난 신앙의 동지들과 조용술 목사는 일생동안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깊은 교분을 나누었는데, 이들이 바로 아(雅)자 호(號)를 같이 쓰는 사람들이다. 조용술 목사 호가 아성(雅星)이고, 그의 평생 친구 아지(雅知) 강희남 목사, 서울사대를 나와 미국에 건너가 『복음과 전령』이라는 선교지의 발행인으로 사역한 아류(雅流) 석진영, 서울대 교수를 하다 퇴직한 아공(雅空) 김석목 교수가 바로 그들이다.

조용술 목사가 어느 날 이 신우회 모임 자리에서 서울의 교파 분립을 얘기하면서 ‘싸움하지 않는 순수하고 신앙심 깊은 모임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모임에 참석했던 군산복음교회의 허현 장로라는 사람이 모임이 끝난 후 조용히 찾아왔다. 군산 시장까지 지낸 덕망 있는 분이었다. 그가 “그런 교회를 정말 하고 싶냐?”하고 물었다. 조용술이 “그렇다”고 하니 그가 이리에 있는 복음교회를 소개하면서 그 교회가 전쟁 중에 목사도 달아나고, 교인도 흩어져 있는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모아서 목회를 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그 교인들에게도 연통하여 조용술을 목회자로 받아들이도록 주선했다.

조용술 목사는 허현 장로의 말에 따라 이리로 가서 백용기라는 교인의 집에서 흩어진 교인들을 모으고 목회를 시작했다. 그것이 조용술 목사가 복음교단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이리복음교회에서 1972년까지 20년간 시무했다.

 

재혼

이리에서 복음교회를 새로 시작할 당시에는 교인들이 목사에게 제대로 사례비도 줄 형편이 되지 않아 조용술은 늘 가난했다. 그래서 조용술 목사는 군산집에서 이리 교회까지 자전거로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몇시간을 달려 통근했다. 점심을 거르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그랬으니 살림을 하는 부인의 고통이야 오죽했으랴. 그래서 조용술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집안 생계를 위해 독학으로 배운 영어 실력으로 군산여고에 나가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54년 생활고에 시달리던 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 첫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역시도 그 해 어머니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이 당시가 조 목사 일생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던 것 같다.

이 무렵에 조용술 목사는 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그의 평생 반려가 된 송정옥 여사다. 당시 송정옥은 서울음대를 다니다 휴학하고 내려와 군산 세관장으로 있는 미군장교의 비서 겸 피아노 선생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어 실력이 딸려 개인교습을 시켜줄 사람을 소개 받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군산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조용술 목사였다. 송정옥은 조용술 목사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조 목사의 인품에 매료되었다. 그러다 조 목사의 부인과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고통 속에 있는 조 목사를 위로하면서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래서 송정옥은 조 목사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 사실을 부모님께 고했다. 5남 1녀의 집안에 귀한 외동딸이 12살이나 많은 홀아비 목사와 결혼한다 하니 송정옥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부모님과 온 집안이 나서서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송정옥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1955년 결국 조용술과 송정옥 두 사람은 신랑 친구들과 교인들, 그리고 신부 쪽에서 친가 할머니와 가족 몇 사람만이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서울복음교회 백 장로 집에서 올렸는데, 그래도 신랑 쪽에서 군산교도소 목사가 축사를 하고, 신부 쪽에서 군산여고 사감 선생이 축사를 해주었다. 신랑 조 목사는 신부에게 성경책을, 신부 송정옥은 신랑에게 구두를 선물했다. 송정옥 여사는 그 때 사감선생이 읽은 장문의 축사 두루마리를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결혼한 이듬해인 1956년 송정옥은 첫아들 성범을 낳았는데, 신부 부모님들은 이때서야 겨우 그 결혼을 인정했다고 한다.

조용술 목사는 재혼하고나서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조 목사는 천성이 돈을 모르는 깨끗한 선비여서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도 최소한으로만 받았으며, 그것도 거의 교회 일에 썼다. 그래서 살림은 항상 부인 송정옥의 몫이라 조 목사가 목회를 하는 동안 부인 송정옥 여사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직장과 일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들들은 밤늦게 일터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조 목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성범, 준호 두 아들은 가곡을 즐겨 부르고 아이들과 산책하며 사색에 잠겨 있는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때로 어머니가 피아노로 반주하고 아버지가 ‘아, 목동아’ 같은 가곡을 부르는 모습을 어린 시절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조 목사는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언제나 존중하며 다정하게 대했다. 아이들은 부모님들이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자랐다. 아버지 조 목사는 그처럼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지만 가정교육에는 엄격했다. 한번은 큰 아들 성범이 교회를 빼먹고 만화방에 갔다가 들켜 크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의 총회장이 되다

조용술 목사는 결혼 후 자신의 교회 뿐만 아니라 이리, 군산, 전주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목회를 했다. 1963년에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여 학사학위를 받았고, 1965년에는 뒤늦게 복음교회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해에 한신대학원을 졸업, 석사학위도 받았다.

1972년 군산복음교회에서 조용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군산교회로 오면서 조용술 목사의 대외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1973년에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무에 선출되었고, 총무 임기를 마친 1977년에는 복음교단을 대표하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유신을 선포하고 불법적인 과정을 통해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종신집권을 꾀했다.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해 나가던 조용술 목사는 어디 가서든지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데 거침이 없었다. 이런 조용술 목사가 유신정권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1977년 조용술 목사가 서울총회에서 복음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되고 난 후 그의 발언은 더욱 활발해졌고, 기독교장로회 인권위원회가 주최하는 행사에 자주 초청받아 시국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 해 7월 충남 부여에서 열린 기독교장로회 충남노회 주최 ‘나라와 선교자유를 위한 기도회’에 초청받아 갔다. 조 목사는 이 기도회에서 박정희의 일본군 전력과 여순반란 때 좌익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후 동료를 팔아먹은 이야기를 했다. 결국 이 설교가 문제가 되어 조 목사는 설교를 마치고 나오다가 부여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강경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그런데 구속 직후에 강경구치소에서 오랫동안 앓아오던 십이지장궤양이 터졌다. 긴급히 전북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고 위기를 넘긴 조 목사는 NCCK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구속 40여일만인 9월 2일 구속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같은 복음교회 교단의 오충일 목사가 8월 28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연합기도회에서 조 목사 구속 사실을 알리다가 역시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한달여 징역살이를 했다.(11월 12일 석방)

조용술 목사는 광주항쟁에 있었던 1980년부터 2년간 강원룡 목사가 총회장으로 있는 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부회장을 했고, 1982년부터는 강원룡 목사를 이어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총회장 시절 과거 강원룡 총회장 시절의 권위적인 조직 문화를 많이 민주화시켜 각 위원회와 산하 조직의 목소리가 활발하게 개진될 수 있도록 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그 뒤에도 NCCK 인권위원장(1984-88), 기독교농민회 이사장(1988)을 지냈고, 6월항쟁이 있던 1987년에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1987-1990)을 한번 더 지냈다. 그리고 그 임기가 끝난 1990년, 조 목사는 인생의 세 번째 고비를 맞게 된다. 그것이 바로 1990년 11월 베를린회담이었다.

 

고통을 통해 얻은 행복

베를린 3자회담으로 구속된 3인 대표단에 대한 재판은 해를 넘겨 199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재판과정에서도 조 목사는 차분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통일운동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단에서 설교하듯이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재판정 분위기가 엄숙하면서도 편안했다. 때로 촌철같은 말로 방청객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같이 재판을 받았던 조성우는 재판 중 조 목사가 “악마가 얘기해도 진실은 진실이고, 천사가 얘기해도 거짓은 거짓이다.”라고 했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70 노령의 감옥살이가 조 목사에게 힘들지 않았을 리 없지만 조 목사의 표정은 한결같이 평온했다. 베를린회담 1년 전 췌장 담석 수술을 받았고, 10여년 전에 위 삼분의일과 십이지장을 떼내는 대수술을 받았던지라 가족들은 그 후유증을 걱정했지만 조 목사는 언제나 태평했다. 면회 온 가족들에게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했다. 원래 느긋한 성품이기도 했지만 시련을 대하는 조 목사의 태도가 그러했다. 감옥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속에 그런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1991년 4월 22일 서울구치소에서 보낸 편지)

우리가 민족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거창한 이야기를 한쪽에 접어 두고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도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무엇 하나 이루어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고통을 겪지 않고 얻는 행복보다 피눈물 나는 고통을 통해서 얻는 행복이 말할 수 없이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공들이지 않고 쉽게 쌓은 탑은 쉽게 무너지지만 고통을 겪으면서 공들여 쌓은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지요. 당신의 공든 탑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 삶의 확신 속에서 기뻐하기 바라오.

 

대쪽과 버드나무 – 강희남과 조용술의 우정

그리고 조용술 목사는 문익환 목사, 강희남 목사 같은 벗들이 감옥살이를 할 때 마다 교회와 교단의 직분 때문에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늘 안타까워했다. 어쩌면 이번 징역살이가 미뤄놓은 숙제를 하는 홀가분함이 그에게 있었던 것 같다. 조 목사의 평생 지기지우(知己之友)인 강희남 목사가 조용술 목사 설교집 서문에 이런 글을 썼다.(조용술 설교집 『분단의 아픔 속에서』에 쓴 강희남 목사의 글 ⌜나의 벗 조용술⌟ 중에서)

다만 국운이 비색한 우리 민족사에서 10여년 전 내가 1차 투옥으로 대전에 있어 앞길이 막막할 때 그가 특별면회로 찾아와 형가와 같은 장부가 못되어서 비겁하게 눈물짓는 나를 든든한 말씀으로 위로하는 그는 현대판 고점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옛날 시칠리섬 시라쿠사의 폭군 디오니소스 당시, 사형수로 갇혀 있는 피디아스의 목숨을 자기 목숨으로 담보했던 따몬이 있었다는데 내가 그 안에 있을 때 조 목사가 내게 보낸 편지에서 할 수만 있다면 병약한 나를 대신하고 싶다고 한 그 말은 범연한 우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평생을 전북에 함께 살면서 같은 길을 걸어온 동갑내기 친구의 두터운 우정을 엿볼 수 있다. 강희남 목사가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히지 않는다’는 타협을 모르는 대쪽 같은 투사라고 한다면 조 목사는 언제나 부드럽고 유연하기가 버드나무 같았다. 그러나 진실과 원칙을 목숨처럼 지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의 차이가 없었다.

조용술 목사는 통상적인 민주투사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언제나 미소 띤 얼굴에 부드러운 음성, 그리고 언제나 깔끔하고 세련됐고 항상 친절했다. 심지어 자신을 감시하는 기관원에게조차도 그는 친절하게 대했다. 그리고 그는 천성적으로 경직된 것을 싫어했다. 항상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처리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래서 아무리 딱딱한 자리도 그가 참석하면 이내 화기(和氣)가 흘렀다. 베를린회담에서 어찌 보면 어색하고 경직될 수도 있는 자리를 부드럽게 이끌어 결론을 맺어갈 수 있도록 한 데는 조용술 목사의 공이 컸다.

 

통일운동의 길을 가다

1991년 5월 13일 조용술 목사는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석방됐다. 같이 재판을 받았던 이해학 목사, 조성우는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받았다. 아무래도 조 목사가 고령인 점을 참작한 판결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조 목사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만 석방되는 것을 못내 미안해 했다.

석방 후에도 조용술 목사의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주요 이력을 보면 1992년 범민련남측본부 고문, 1994-2004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고문, 1998-2004 민족화해협력범국민회의 상임고문, 2004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상임고문 등을 들 수 있다.

문익환 목사, 조용술 목사, 이창복 전민련 의장, 이해학 목사, 조성우 등 베를린 3자회담을 주도했던 통일인사들은 범민련이 남한정부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되면서 더 이상 통일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을 추진했다. 이것이 1994년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창립으로 구체화되었다. 한편 범민족대회와 베를린 3자회담의 결의를 지켜서 범민련 조직을 고수해야 한다는 일군의 통일인사들은 1995년 2월 범민련 남측본부를 결성하고 강희남 목사를 의장으로 추대했다. 이 때부터 민간 통일운동 진영은 둘로 갈라져 지금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조용술 목사와 강희남 목사의 수십년 우정도 이 때 끝이나 버렸다. 조용술 목사는 말년에 무엇보다 그 사실을 마음 아파했다.

 

고난의 길, 영광의 길

조용술 목사는 2000년대 들어 췌장에 담석이 생겨 담도를 막아 담석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했다. 그리고 수술하고 나서 내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폐와 간에 합병증이 발생하여 2004년 11월 15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조용술 목사의 장례는 그가 평생 몸담아 왔던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가 합동으로 ‘통일선구자 고 조용술 목사 민주사회장’으로 엄숙히 치러졌다. 2004년 11월 17일 오전 9시 서울복음교회당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유해는 경기도 마석모란공원 묘지로 옮겨져 평소 조 목사를 존경하고 따랐던 복음교회 전병호 목사의 집례로 하관예배를 드린 후 안장되었다. 그 자리에서 조용술 목사가 1990년 겨울 차디찬 감옥에서 애송했던 성경 구절이 낭송되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17-18)

 

공동선, 2018년 9-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