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0일 새로이 선출된 집권여당 원내대표와 청와대 정책실장 간의 사적인 대화가 기자가 설치해놓은 마이크를 통해서 가감없이 그대로 노출된 일이 있었다. 그 중에 한 귀절을 들여다 보면 ‘잠깐만 틈을 주면 엉뚱한 짓을 한다’, 내용인즉 늘공(언제나 공무원)이라고 불리는 직업관료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자세와 기회적인 속성을 탓하는 것이었다. 물론 집권세력의 실책과 무력함을 남탓으로 돌리는 측면도 함께 노출된 셈이다.

이를 재확인하듯이 사석에서 만난 전업적인 정치평론가의 이야기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에 의하면 2019년 현재 한국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크고 힘이 센 세력은 재벌 등 자본가 세력을 등에 업은 관료집단이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419혁명까지는 미군부와 함께 야합한 노회한 정략가 이승만이 한국사회를 끌고 왔다면, 419 이후 87년 민주항쟁까지는 군부세력의 독재가 결정적이었고, 이후 민주적 절차에서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집단과 군부독재의 압력에서 해방된 재벌집단간의 야합이 주요한 힘으로 작동하였다면, 어느 사이에 무능하고 자중지란에 빠진 정치세력을 조금씩 밀어내고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은 거대한 조직의 네트워크를 지닌 관료집단이 한국사회의 핵심적 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사진: 동학농민혁명

때마침 관련하여 SBS 드라마 ‘녹두꽃’에 묘사된 당시의 지방향리들 적폐의 모습에 대해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되는 ‘술탄오브더티브이’에서 이승환 작가가 언급한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민초들의 삶을 다룬 에스비에스(SBS) 새 금토 드라마 <녹두꽃>에는 특기할 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고부군수 조병갑만큼이나 고부 사람들을 쥐어짜는 데 앞장선 출세욕의 화신 이방 ‘백가’ 백만득이다. 나라에서 임명하는 군수야 왔다 가는 거라지만 이방은 대를 이어 종사하는 세습직이라, 백가는 어디 갈 일도 없이 오래 머무르며 성실하게 수탈한다. 조병갑과 합심한 백가는 쌀을 외부로 반출하지 못하게 틀어막아 농민들의 벌이를 막고, 자기 명의의 싸전에서 쌀을 독점해 헐값에 사들인 뒤, 보릿고개가 오면 그 쌀을 다시 비싸게 되파는 방식으로 고을을 철저히 털어먹는다. 수령 하나 부패한 것도 힘든데, 어느 집에 수저가 몇 벌 있는지 까지 알고 있는 실무자까지 부패한 사람이면 그 착취와 학정이 얼마나 치밀할까. 제 영달을 위해 군수 자리를 얻은 조병갑 같은 위인이 백가 같은 자와 쿵짝이 맞으니 이승이 저승과 다를 바가 없다.

자연스레 고부지방의 향리이방 백만득은 현재 한국 공직사회의 부패하고 노련한 행정관료들과 사법권력을 연상시킨다. 다만 당시의 향리들은 지방수령 밑에서 온갖 굳은 대민정책을 수행하면서도 정작 정부로부터 적정한 보수를 지급받지 못하면서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업무처리 과정에서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묵인한) 관비官匪라는 구조적 모순 속에 있었다 한다. 당시 조선시대의 수령과 아전들에 의해 저질러진 부패와 불의한 행위들은 일제를 거쳐 매판적인 성격을 더하면서 현재까지 청산되지 못한 채 한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부와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에 맞닿아 있는 셈이다. 한심하고 안타까운 것은 조선조의 향리들과 비교하여 넉넉한 연금제도를 비롯하여 적정한 보수도 받고 지위도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건만 현재 관료집단의 못된 관비근성은 봉건 왕조에서 민주적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도 청산되지 않은 채 지난 백여 년의 세월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현재에도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과 차이점이 있다면 형식논리상 합의된 법치와 위임된 행정이라는 세련된 언어와 절차적 형식을 갖춘 업무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한국사회 관료제의 역사적 뿌리는 중국의 한-당-송으로 연결되는 왕조들에 의해 확립된 통치지배 방식을 모방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때마침 필자는 지난 몇 달간 비슷한 주제의 내용을 담은 ‘양릉전’이라는 중국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는데,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명나라가 안정되어가던 중기의 10대 황제인 홍치제가 지병으로 정무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다가 급사하고, 어리고 자유분방한 주후조가 11대 황제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젊고 유능한 말단무관 출신의 ‘양릉’이 젊은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그간 황실의 재정을 몽땅 장악한 환관들의 모략 및 부정부패와 고관대작 관료들이 자신들만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광범하고 악랄하게 백성들을 수탈하던 관행을 제갈량처럼 지혜롭고 포청천처럼 주저함 없이 통쾌하게 일망타진하여 황권을 반석 위에 세우고 태평성대의 시대를 열어간다는 줄거리이다.

병약한 황제를 뒤로 하여 환관과 관료들이 쌓아 올린 권세는 하늘을 찌르고 수탈과 부패의 양상은 썩을 만큼 썩어서, 축재를 향한 온갖 모략을 넘어서 수재를 당한 강남 백성들의 폐해를 부풀려 보고하고는 구휼로 내려온 식량과 구호품을 착복하는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고리를 붙여 장사를 하고, 나라의 커다란 근심이었던 왜구들이 바치는 뇌물에 눈이 멀어 이들과 손을 잡고 이중적으로 백성들을 수탈하고 괴롭힌 시대가 역사적 배경이었다. 스토리의 전개가 엉성하고 장면의 세트들이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양릉’의 활약은 시청하는 이들의 마음을 속시원 하게 풀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솔직히 촛불혁명 이후 모든 것이 지지부지하고 전략도 안보이고 방향도 상실한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에 답답해 하던 차에, 제 목숨을 걸고 적폐청산과 개혁작업을 추진하는 ‘양릉’이라는 젊은 인물의 과감하고 단호한 추진력이 한없이 부러웠다. 사회안전망이 여전히 부실한 가운데 인간다운 존엄을 위한 필수조건으로서 최저임금 인상과 혁신과 변화를 위한 주당 노동시간 등 노동조건의 개선을 둘러 싸고 벌어지는 작금의 한심스런 우리 모습을 빗대어 조롱하는 듯도 하였다.

상향식 빨대의 수탈구조가 고착된 한국사회에서, 촛불시민의 정신을 운위하던 문재인 정부에서조차 서민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하던 개혁작업은 좌초를 당하고,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듯 기업상속공제의 한도액 상향과 완화를 언급하면서 0.1%의 부자들 가문의 이해를 보호하고, 이에 더하여 인터넷은행법과 규제프리존법 등 재벌들이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동안 잔뜩 눈독을 들여왔던 제도들을 순순히 알아서 법제화하는 현실이 전개되고, 양승태와 김학의 등 사건처리에서 보듯이 사회적 요구와 역사적 순리에 따라 명백히 밝혀지고 처단해야 할 사안들이 해괴한 법논리를 앞세워 방어되고 처벌받아야 할 인사들이 법망의 헛점을 악용하여 줄줄이 면죄부를 받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사리사욕과 출세에 눈이 멀어 영혼을 팔아먹은 행정 및 사법의 고위직 관료들의 반개혁적 행태와 이들에 놀아나는 무능한 한국 정치권에 대해 실망감만 누적되어 온다.

촛불시민혁명 이후 한국사회의 과제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일이고, 이는 여전히 잘못된 관성과 이해와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수치놀음에 불과한 양적인 성장을 외칠 일이 아니라, 적폐를 일으킨 인적 청산을 넘어서 보편적인 관점에서 삶의 가치와 인간적인 존엄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이 정치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제도적 개혁을 실시하고 한국사회의 질적 도약을 위해 미래의 청사진을 담아 내고 다수가 참여하는 혁신적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미래적 과제를 논하기 전에 근현대적 역사의 맥락에서 뒤돌아보면, 봉건적 반민중적 관료제의 관비적 성격을 청산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가 서세동점의 국란시기였던 구한말에 이루어지지 못하여 망국의 치욕을 치르고 매국적 성격을 더한 가운데 해방공간에서도 점령자 미군과 이승만 연합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악화되었으며,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노태우 정부까지의 관료사회는 군사문화에 찌들고 권력에 종속된 하수인으로 철저하게 기회주의적 조직으로 타락하는 과정이었고, 87년 민주화 대투쟁을 통하여 민간적 정부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무능과 야합적 성격으로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민주권적 통제가 실현되지 못한 채 여전히 주요한 역사적 청산의 과제상황으로 남아 있다.

관료의 부패 유형을 분류해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역사문화적 배경에 더하여, 1) 공직자가 갖는 제도와 지위적 권한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경우, 2) 시장 기제의 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우, 3) 공익과 공공질서를 앞세우면서 특수한 이익을 공공의 이익에 우선하는 경우, 4) 관료사회의 자기 보호와 권한의 확대를 시도하면서 발생하는 경우 등 열거할 수 있다. 이를 제도와 지위 그리고 조직망을 악용한 ‘관료적 지대추구 행위’라 부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행정사법의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부패하고 비도덕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점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서 현존 기존질서와 결탁하여 제도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거부한 사례들을 언급해 보고자 한다.

10.26 박정희 시해 사건은 단순히 사감에 의한 김재규 장군의 총격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8년 군사독재 하에서 이루어진 일방적 특혜적 개발독재의 결과 중화학 사업의 과잉중복투자와 정경유착의 부패비리가 심대하여 국가사회의 지속 조건을 유지하기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자, 이를 물리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 일어난 것이며 연이어 터진 광주학살 역시 같은 관점에서 당시 봉착한 사회경제적 한계상황을 광주시민의 항쟁을 구실삼아 군사적 물리력으로 해결하려는 기득권의 음모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군부와 기득권적 행정 사법 세력 그리고 재벌들 간에 암묵적 결탁이 가능했으리라 추측한다.

이후 실권을 장악한 군사정치 권력과 행정사법 세력들은 특혜와 3저 호황으로 비대해진 재벌 등의 금력에 매수를 당하여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삼성그룹의 자동차산업의 진입(당시 이미 기아차의 부실 등 중복투자가 문제였다)을 승인하고, 한보같은 쓰레기 집단에 놀아나 각종 비리와 부패의 종합판인 수서 사건 등을 연출하며, 금융감독기구 역시 인맥과 부패의 고리에 포위되어 예건데 부실한 한라그룹 등에게 천문학적 은행대출을 허용하면서, 급기야 625동란 이후 남한 민족의 최대 수난인 IMF 위기를 초래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재벌에 놀아나면서 정치판과 사법행정의 거대한 인맥의 조직적 비리와 부패라는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들어난다.

국란의 위기 속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며 DJP연합정권 하에서 JP계열이 경제정책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IMF 위기상황을 구실로 국민경제의 심장인 금융산업을 거의 통째로 신자유주의의 상징이자 악마적 수탈집단인 월가의 자본에 팔아 넘긴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관치와 비리의 온상이었던 금융산업을 선진화하고 경쟁체제를 도입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1-2 개 정도의 민간 상업은행을 외국자본에 넘겨 메기효과를 노리는 수준에 머물렀어야 했고 당연히 공적 기관인 대부분의 은행들은 정부 또는 시민자본의 통제하에 두었어야 옳았다. 이는 당시 파이낸샬타임즈(FT)의 특파원으로 서울에 머물던 영국인 기자가 필자와 개인적인 토론을 통해서 피력한 메시지의 내용이다..

이후 오늘까지 한국의 자본시장과 금융산업은 외국자본의 탐욕과 의도에 종속되어 국민경제의 중장기적 관점보다는 자본의 단기적 수익에 매달려야 하는 멍에 속에 갇혀버렸다. 개혁을 열망하던 국민들의 환희와 기대 속에 출범한 참여정부 역시 재벌들의 이해와 실적을 국민경제의 일반적 내용으로 동일시하는 패착을 두면서 삼성그룹(경제연구소)이 제시한 밑그림의 초안을 곧이 곧대로 사회경제적 정책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자유주의의 고착과 양극화의 심화라는 초라한 성적을 결과하여 기어코 이명박이라는 사기꾼에게 정권을 넘겨주며 마감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관료사회는 안으로는 정치권력에 기회적 처신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기득권과 손을 잡으면서 김&장으로 상징되는 대형 법무 및 회계 법인들을 매개고리로 구조적이고 악질적인 관료적 지대추구 행위를 급속히 확대시켜 왔다. 이명박 정권이 정부조직을 마치 개인소유의 사기업처럼 악용하고 무리한 4대강 사업의 강행과 해외자원 개발투자 등 광란의 행진을 마구 벌리는데도 어느 부처 어느 사법기관 어느 공기업 하나 손을 들어 이를 저지하지 못한 배경에는 이렇듯 광범한 인적 조직적 구조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공동정범 내지는 방조범 역할을 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뒤 이은 박근혜아바타 정권의 어처구니 없는 실정에 대한 내용은 여기서 생략하고, 현하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만 아래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 이후 세계경제는 미래적 전망과 좌표를 상실한 채 탐욕과 자본증식의 논리에 물든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세계화라는 구호 속에 이루어져 왔던 무역개방과 상호호혜라는 그간의 세계경제의 기본적 원칙을 폐기하고 지역주의 또는 자국이기주의 및 패권적 경향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라마다 가능한 양적완화라는 화폐금융정책 등을 통하여 타국의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선진경제권에 보편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당연히 한국정부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재정과 통화 정책에 유연성을 가지고 위축되는 수출시장을 보상하기 위하여 OECD 절반수준에도 못 미치는 사회안전망을 대폭적으로 강화하면서 내수시장을 확장하는 수요유발적 정책을 취했어야 했다. 이토록 사안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문재인 정부는 지난 2년 여간 ‘증세 절대불가론’을 고수하면서 긴축재정으로 일관하여 왔고 당연한 귀결로써 취약한 영역인 자영업과 중소기업은 생존의 한계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현재 경제가 어렵고 자영업 등이 위기를 맞이한 것은 수구언론이 나발 불어대는 것처럼 불과 10조 수준의 최저임금 인상 부담이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주당 52 노동시간 도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무역 환경의 급속한 악화에 더하여 문정부의 사회철학적 부재 및 행정관리적 미숙과 증세거부에 따른 사회안전망의 부실화 그리고 긴축재정에 따른 내수시장의 위축이라는 정책적 패착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시나 기득권세력과 결탁했거나 미리 이들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작동하는 관료사회의 기회적 속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렇듯 정언적인 시대요구를 진행하는데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동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행정과 사법 조직으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공인이어야 할 이들이 보여주는 노회하고 비도덕적이며 기회주의적인 근성과 이들이 형성해 놓은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 그것이다. 세계사적 지각변동을 눈앞에 두고 반드시 겪고 넘어야 할 수많은 변혁적 과제를 지닌 한국사회의 진로를 가로막는 현존의 관료사회는 행정과 사법적 연속성이라는 구실을 방패삼아 여하히 기득권적 지위를 방어하고자 하는 보수적 속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핑계는 레코드 판을 돌리는 듯 항상 반복되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다 ‘법에도 규정에도 없습니다. 사례가 없는 것은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관료들에게 새로움과 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적 행위일 뿐이다.

관료들의 개인적이고 사안적인 부패와 비리는 싱가포르와 홍콩의 경우처럼 이를 성공적으로 방지하고 시행한 사례를 거울삼아 현재의 감사원을 행정부에서 분리시켜 독자적인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책임과 권한을 동시적으로 엄중하게 관리하는 제도를 도입한다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바람직한 시행과 실천이 가능한 사안으로 보인다.

문제는 위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했듯이, 한국사회에 광범하게 펴져나가 암적 존재가 되어버린 사법과 행정 관료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조직적이고 정책적이며 합법성을 가장한 패악질, 즉 위에 언급했듯이 지위를 악용하는 관료적 지대추구행위를 여하히 근절하느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공수처의 도입, 개방직 공무원제의 전면확대와 장차관의 정책 및 인사에 관한 권한의 강화,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등의 선거인단에 의한 직접 선거제 도입 등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과 해법을 제시할 능력이 필자에겐 없다. 다만 관료적 지대추구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능하고 자폐적인 정치권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행정과 사법의 모든 영역에, 120여 년 전에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불끈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의 ‘제폭구민 除暴救民’의 정신과 ‘집강소’의 실험에 기초하여, 집단지성이 작동하도록 주권자로서 일반 시민의 참여 평가 통제의 순환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직접민주주의의 도입이 필수적이다. 관료사회가 적폐집단으로 변질된 현실에서 오로지 깨어있는 시민들이 희망이고 저항하고 행동하는 시민조직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