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세 이후의 서학

감탄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감화되었습니다. 독창이 번뜩이고 독보가 휘황한 글입니다. 선생님의 잠재력이 화산처럼 폭발하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명문입니다. 감칠맛이 나고 감질 맛이 돌아 거듭하여 되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내 마음을 하늘같이, 내 기운을 하늘같이”는 인류세를 맞이하는 밀레니얼의 시대정신으로 삼아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캐치프레이즈 같습니다. 천아심(天我心)을 포스트휴먼의 구호로, 천아기(天我氣)를 트랜스휴먼의 모토로 온 누리에 전파해봄직 합니다. 무엇보다 천도교의 ‘천인공화’나 원불교의 ‘일원공화’의 ‘거대한 뿌리’로서 조선 시대의 ‘천인공공’을 제시해 준 것이 탁월합니다. “하늘과 하나 되는 한울사람”이 되어가는 ‘동방적 민주화’의 대서사를 써볼 수 있는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개벽사상사의 졸가리를 새로 세우는 대반전의 유레카라고 하겠습니다.

조선의 천인공공이 20세기의 천인공화로 진화한 것부터가 이미 동서회통의 전범이자, 고금합작의 정수였다 하겠습니다. 지난 백년의 탁월한 성취이자 다른 백년의 성성한 새싹이기도 합니다. 미래의 공화제, 창조적 공화제, 지구적 공화주의의 맹아입니다. Republic의 단순 번역과 수용과는 결과 급을 달리하는 ‘공화춘’(共和春), 천인 공화의 새봄을 예감합니다. 게다가 이 신공화주의는 자유, 평등, 우애 등 서방의 공화주의에 아로새겨진 인간중심주의를 훌쩍 돌파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입니다. 하늘과 하나 되는 한울사람은 경인(敬人), 경천(敬天), 경물(敬物)의 삼대사상으로 집약되는 바, 미물부터 폐물까지 모시고 섬기는 만물존엄의 우주학으로 도약하기 때문입니다. 가히 화엄적 경지의 민주주의라고 하겠습니다. 신도 죽이고 자연도 자원으로 동원한 서구적 민주주의의 편애함과 편협함을 가뿐하게 넘어설 뿐 아니라, 만인이 성인되는 유학적 민주화/민중화 또한 사뿐하게 극복하며, 만인과 만물이 더불어 하늘이 되는 사사천 물물천(事事天 物物天)의 동학적 민주화의 쾌거라고 하겠습니다.

천인공공에서 천인공화로의 회심이라는 파천황적 발상이 가능한 것은 지난 백년을 옥죄었던 세서동점의 끝물에 당도했다는 역사의 대반전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로소 19세기와 20세기를 우리의 눈으로 새로이 바라보고 새롭게 써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하노라면 이제 서구 콤플렉스를 떨쳐내고 무시하면 그만인가, 자문해보게 됩니다. 포스트-웨스트(Post-West), 서세 이후의 서학을 어찌할 것인가 새로운 과제를 궁리해 봅니다. 다시금 서학을 배타하는 척사파의 태도는 정도(正道)가 아닐 것입니다. 한층 유연한 자세로 서학을 정면으로 대면할 기회가 마침내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전히 지구본을 빙글빙글 돌리며 살피는 지구촌 소식의 절반은 영미권 매체에 의존합니다. 다양한 언어권의 킨들을 구비하고 있지만 역시 영어 킨들로 다운로드한 전자책의 비중이 다른 언어를 압도합니다. 심지어 생태문명, 생명문명을 탐구하고 실험하는 영역에서도 서쪽 하늘이 더욱 앞서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물질개벽의 병폐에 먼저 노출되었기에 정신개벽의 탐색에도 그만큼 사활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동과 서의 수평적인 대화를 재개해 볼 수 있는 황금시절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부터가 2017년 유럽을 견문하며 기독교 민주주의와 화해하고 가톨릭 계몽주의와 해후했습니다. 소년기 천주교 성당을 다니고 청년기 기독교 대학에서 공부했던 과거와도 뜨겁게 포옹했습니다. 개화를 떨쳐내고 개벽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라, 개화를 품어서 개벽으로 도약한 것입니다.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으로 동서간의 밸런스가 붕괴된 19세기 이전의 문명 교류를 탐구하는 글로벌 히스토리 또한 더욱 열심히 학습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구촌의 일각, 이 땅의 천년사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고려 시절부터 이미 남방의 바닷길을 통한 아랍과의 물류망이 가동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북방의 초원길을 통한 중앙아시아 및 유럽과의 문류망이 작동했습니다. 한글 창제부터 동학 창도라는 두 번의 문화적 빅뱅 또한 중원으로 수렴되지 않는 동북을 통한 유라시아 네트워크가 가동되었기에 가능했던 문명적 폭발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석굴암과 용담정이 지근거리에 있다는 점 또한 우연만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하여 지난 150년의 콤플렉스라고는 터럭만큼도 없이 서학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요청됩니다. 힘으로 쓴 서학사, 서세로 밀어붙인 서학사가 아니라 “뜻으로 본 서학사”를 다시 써야 하겠습니다. 저는 ‘천아심, 천아기’의 독창적 발상 또한 유불도로만 한정될 수 없는 누 백년 서학과의 창조적 교섭의 소산이라고 여깁니다. 천주와 천하의 대화 속에서 천도의 득의가 발로했노라 생각합니다.

몽골제국 붕괴 이래 북방 유라시아 루트가 다시 열린 것은 명-청 교체 이후입니다. 만주에서 굴기하여 몽골과 서장과 신장을 두루 아우른 대청제국은 중화제국 너머 유라시아제국으로 웅비했기 때문입니다. 만주족과 백두산/장백산을 공유했던 조선인들에게도 직접적인 파장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7세기 이래의 반 천년, 서학사의 출발점입니다. 만주족의 서진과 함께, 서학이 조선에도 당도한 것입니다.

 

2. 서학과 북학


성호 이익(한국학 중앙연구원)

조선의 서학사는 특별합니다. 선교사의 전도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자각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과문한 탓인지 그런 경우를 쉬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점령한 것이 16세기(1557)입니다. 야소교 예수회는 남중국해를 지나서 베이징으로, 나가사키로 북진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사를 앞세운 임진왜란(1592)부터가 이미 동아시아의 지평을 훌쩍 넘어선 유라시아적 사태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조선만은 선교사의 발길이 미처 닿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서학을 접한 경로는 텍스트,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동이 서를 능가하던 시기였던지라 서학에 대한 열등감은 일말도 없이 선별적으로 학습하고 수용할 수 있는 지적인 여유가 넉넉했습니다. 성호 이익이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 세계를 일주한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에 전파된 서구의 지리서도 탐독하여 안남(베트남)이나 유구(오키나와) 너머의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에 대한 정보도 익숙했습니다. 무엇보다 천문의 관측, 기계의 제작, 수학의 기술 등 과학 분야에서는 서구가 중국을 앞서가고 있음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시간을 측량하는 자명종부터 공간을 측정하는 망원경에도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특히 푸른 하늘 은하수를 관찰하는 천리경을 극찬했던 바입니다. “옛 사람들이 하지 못한 바를 밝힌 것이니 세상에 크게 유익하다.”며 반겨해 마지않았습니다. “성인이 다시 온다 해도 반드시 이를 따를 것이니”, 문자 그대로 밝음을 밝히는 발명(發明)에 해당했던 것입니다. “이단의 글이라 하더라도 그 말이 옳으면 취할 뿐이다. 군자가 사람들과 함께 선을 행하는 데에 있어 어찌 피차의 구별을 두겠는가.” 동서와 피차를 나누지 않았으니 교조적인 화/이론도 돌파해내었던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서학은 여전히 방편이요 종지는 역시 유학이었습니다. 디에고 데 판토하(Diego de Pantoja)의 <칠극>(七克) 수용이 대표적입니다. 1614년 베이징에서 간행된 윤리서입니다. 기독교에서 모든 죄의 뿌리로 간주하는 교만, 질투, 탐욕, 분노, 식탐, 음욕, 나태를 극복하여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을 담은 수양서입니다. 유학의 극기복례에 합치한다 여겼습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했던 <논어> 안연 편의 각주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즉 서학은 유학자들의 자기 수양에 보탬이 되는 새로운 ‘발명’의 자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호는 <천주실의>를 집필한 마테오 리치 또한 유학에서 가장 위대한 인류의 사표로 섬기는 성인(聖人)으로 추키게 됩니다. 도학과 과학 양 방면에서, 즉 수양과 경세에서 유학의 목표에 부합하는 바가 있다면 어떠한 자원도 선택해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실용적 태도가 충만했던 것입니다. 성호 이익은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예수회 회원들의 진심을 헤아렸으니 서학과 유학은 동일한 목표를 가진 하나의 하늘 아래 지상의 두 길이었을 따름입니다. 흑묘백묘의 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담헌 홍대용

17세기를 산 성호가 여전히 조선에 유입된 중국의 서학서를 통하여 학습을 했다면, 18세기의 북학파들은 연행 길을 통하여 베이징을 방문하고 서구인들과 직접 조우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습니다. 첫 손에 꼽을 인물은 단연 담헌 홍대용입니다. 중원을 장악한 왕년의 북방 오랑캐, 만주족이 새로운 중화문명의 정수가 되었음을 일찍이 수긍했던 사람입니다. 만주어와 한문과 라틴어를 모두 구사했던 강희제는 당대 세계 최고의 학자군주였던 바, 북학파들에게 대청제국은 국가 경영을 위한 통치 모델이자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창구였던 것입니다. 홍대용은 베이징의 서점가 유리창에서 다종다양한 서학서를 구입하고 천주당을 방문하여 선교사들과 교류합니다. 당시 베이징에는 남당, 동당, 북당, 서당 등 네 개의 천주당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마테오 리치가 지은 남당입니다. 바티칸과 베이징을 잇는 장소였다고 하겠습니다. 서방의 교황과 동방의 황제를 연결하는 가교였습니다. 홍대용이 방문했던 곳도 바로 여기입니다. 나아가 회교 사원에서는 무슬림을 만나고, 시베리아의 강을 따라 동유럽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한 러시아인들과도 만나 견문을 활짝 넓혔습니다.

과연 북경(北京), 이라는 장소부터가 의미심장합니다. 남경(南京)처럼 강남에 자리한 중원 중심주의와 멀찍한 곳입니다. 북경은 애당초 대원제국을 일으킨 몽골인이 점지한 신행정수도인바, 북방 네트워크를 통하여 유라시아와 직통했던 곳입니다. 고로 중화의 중심보다는 유라시아의 허브 도시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북경 견문을 통하여 홍대용은 화이일야(華夷一也)를 천명했던 바입니다. 화(華)를 추수하는 수구적 척사파도 아니요, 이(夷)를 새로운 화로 섬기는 얄팍한 개화파도 아닙니다. 유학과 서학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을 망라하는 지구적 사상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과 미국, 즉 태평양으로의 전면 접촉을 기준으로 삼은 19세기의 ‘개화기’라는 용어의 적절성도 재고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륙으로 향하는 북쪽 길은 이미 활짝 열려서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

홍대용이 서방의 물질개벽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면 서구의 정신개벽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바로 정약용입니다. 홍대용은 남당에서 건축과 천문 등 과학에 솔깃했다면, 이곳에서 서교, 즉 천주교에 입문했던 최초의 조선인이 이승훈입니다. 그리고 집안 사람 이벽을 통하여 정약용에게까지 서교의 가르침이 전수됩니다. 역시나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선교사의 개입 없이 조선의 학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천주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철 다산이 서교에 경도되었던 근본적 까닭 또한 도덕적 인간의 완성에 있었던 바, 유학의 밖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유학의 핵심을 서학의 지평 속에서 새롭게 해석해 내었다고 하는 편이 온당할 것입니다. “기독유학”으로까지 불릴 수 있을 만큼 유교와 기독교 간의 문명 대화를 앞서 선보였던 선구자인 셈입니다. 고로 정약용을 두고 유학자인지 신학자인지 왈가왈부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인정투쟁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종교간 대화를 솔선수범하여 통교(通敎)적 모범을 보인 선각자였던 것입니다. 동과 서를 회통하여 일가를 이룬 대가였습니다. 하기에 주자의 반열에 올려도 크게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희는 남방의 불교를 흡수하여 ‘불교적 유학’ 신(新)유학을 창시했습니다. 다산은 서방의 기독교를 흡입하여 ‘기독교적 유학’ 개신(改新)유학의 가능성을 후세에 물려준 것입니다. 다산의 경학에 이미 중국(儒學)과 인도(心學)와 유럽(神學)이 통섭되었던 바, 20세기의 걸출한 ‘정치적 영성가’, ‘한국의 간디’이자 ‘인(仁)의 사도’라고 불리는 함석헌 선생의 전생(前生)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 싶습니다.


북경 천주교 남당

 

3. 기학(氣學)과 동학

19세기 중반 판이 바뀝니다. 아편전쟁이 상징하는 바 동서 간 힘의 역전이 뚜렷해집니다. 이른바 ‘대분기’입니다. 조선의 유학자들도 서학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직면한 서양은 더 이상 17세기의 텍스트도 아니요, 18세기 베이징에서 만났던 우호적인 선교사들도 아니었습니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천조국을 유린하고 조선에 ‘개항’의 압박을 가하는 외세, ‘서세’로 탈바꿈했습니다. 중화문명의 숨통을 옥죄며 조선에까지 진군하는 강력한 타자에 임하여 다수의 유림들이 위정척사를 부르짖었던 까닭입니다. 그들을 20세기의 역사의 승자, 개화파의 시각으로 일방으로 매도하고 나무라기도 힘들다고 여깁니다. 모름지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입니다. 내 탓 못지않게 남 탓 또한 컸다고 해야 온당할 것입니다. 서쪽이 동쪽을 괄시하고 겁박하는데 동쪽의 반응이 격하고 급해지는 것 또한 이해못할 바가 못됩니다. 실제로 척사파의 후예들 가운데 일군은 한 손으로는 단군과 접속하고 다른 손으로는 총칼을 들어 대종교로 진화하였으니, 만주와 연해주에서 전개되었던 그 치열한 무장투쟁의 근간에도 척사파의 꼿꼿하고 떳떳한 태도가 견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쳐 말해 서학과 서세를 분별할 필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서세는 응당 따져 물어야 합니다. 서학은 시시비비를 가려서 취해야 할 영역입니다. 즉 서학은 배움의 문제이고 서세는 싸움의 차원입니다. 양자를 세심하게 가려서 판단해야 개화-척사의 돌림노래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혜강 최한기

19세기 사상계에서 가장 돌출된 인물은 혜강 최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19세기의 난세에도 불구하고 18세기의 북학을 더더욱 확장하고 심화시킨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천년 전 최치원의 환생이라도 되는 양, 동과 서를 회통하려는 포부로 우렁찬 학자였습니다. 무엇보다 최한기의 기학이 소중한 까닭은 그 자신이 직접 서구의 학문을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언어와 개념으로 번안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지구학’, ‘격물학’, ‘정교(政敎)학’ 등 다양한 신조어들을 고안합니다. 무릇 언어의 재구성은 세계의 재구성이며 세계관의 재편성입니다. 전통적인 유학의 용어를 고수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중국 및 일본에서 만들어진 서학의 용어를 고스란히 답습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동시대의 동학이 ‘시천주’(侍天主)를 통하여 영성적 차원에서 동과 서를 회통하려는 자각적 시도였다면, 최한기의 기학은 학문적 지평에서 동과 서를 회통하는 독보적 탐구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영역 또한 천문우주론부터 정치학, 행정학, 교육학 등 사회과학(경세학)을 지나 형이상학과 윤리학까지 망라하였으니 일백년 후 미국의 에드워드 윌슨이 제창한 “통섭”(consilience)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시도였다고 추켜세워 기릴 만 합니다. 스폰지처럼 동/서의 학문을 흡수하고 자판기처럼 기학을 뽑아내었던 것입니다.

과연 본인 또한 야심이 만만했습니다. 그가 입론한 기학을 겨우 조선에 한정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활용할 공공 자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온 천하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하여 귀와 눈으로 삼고, 온 천하 사람들이 경험하고 시험한 것을 통괄하여 법도로 삼아서, 온 천하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얻고 온 천하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온 천하 사람들이 함께 배우는 것이지 혼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가히 19세기의 조선반도를 살았던 이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사이즈와 스케일의 사유를 선보였던 것입니다. 하여 기학을 ‘천하공학’(天下共學)이라고 자임하는 바, 그가 동서고금을 달통하여 세웠던 것은 동도(東道)도 아니요 서도(西道)도 아닌 하나의 하늘의 이치, 천도(天道)였던 것입니다. 그 득의의 기학의 엑기스를 단 네 글자로 집약한 말이 바로 ‘천인운화’(天人運化)였던 바, 저로서는 조선왕조실록의 “천인공공”과 20세기 천도교의 “천인공화” 사이에 최한기의 “천인운화”를 새겨 넣어도 어색함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동학과는 다른 길을 내고 있던 최한기 또한 ‘개벽’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적도 있습니다. 지리의 발견, ‘천지개벽’에 해당하는 지구촌 시대를 예감하며 언급했던 것입니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바닷길을 통하여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들뜬 희망을 품었습니다. 돌고 도는 지구를 사람들이 돌고 돌아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고 돌아올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천지개벽이 아니겠느냐 탄복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중화세계를 훌쩍 넘어 고대륙 아프리카와 구대륙 유라시아와 신대륙 아메리카를 아울러 ‘천하일가’를 사유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하늘 아래 물산이 이동하고 사람이 이동하면서 풍속도 바뀌고 예교도 바뀌는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의 신세기와 신세계를 예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혁되고 개방된 세계에 조선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 세계화의 물결에의 동참은 후발주자로서 선진국을 뒤쫓는 추격의 과정도 아니었습니다. 일본과 구미를 추종하는 개화파의 발전국가 모델이 아니었습니다. 동도에도 한계가 있고 서도에도 제한이 있는 법, 중국이건 서양이건 자기 것만 고집하면 막히고 치우치게 될 뿐이라 역설했습니다.

한마디로 최한기는 조선의 마지막 천하대장부였습니다. “천하의 가장 넓은 곳에 살며, 천하의 가장 바른 지위에 서서, 천하의 가장 큰 도를 행한다.”는 말만큼 그의 기상과 포부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스케일과 스타일은 20세기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급전직하로 꺽이고 맙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그 기운과 기세만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던바 학문의 전당 대학은 온통 서학이 석권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화에서 개화로, 또 한 번의 사상적 식민지로 추락한 셈입니다. 98학번, 세기말에 새내기가 된 저는 그 서학천하의 끝물을 경험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화파 학생에서 개벽파 선생으로 꼬박 20년의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2019년의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서학에 대한 애감이 유독 남다른 까닭입니다.

 

4. 동학을 재점화시킨 서학

역사의 간지는 동학의 환생을 촉발시키는 데에도 서학의 일파가 일조했다는 점입니다. 1980년대 서울의 대학가는 온통 NL과 PD의 논쟁으로 뜨거웠습니다. 민족해방을 으뜸으로 북조선을 모범으로 삼는 NL이 20세기의 척사파였다면, 민중해방을 제일로 여기는 PD는 북방의 신중화 소련을 추앙하는 개화(좌)파의 속성을 속 깊이 품었습니다. NL은 정신개벽이 아닌 정신주의로 기울었고, PD는 물질개벽이 아닌 과학주의에 빠졌습니다. 이들이 일본을 따르고 미국을 섬기는 개화우파 정권과 사생결단의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문명적 차원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등장했으니 바로 선생님의 표현을 따르면 ‘원주학파’, 한살림운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독재타도’로 한정되지 않는 문명의 대전환을 앞서 탐구했습니다. 동서 간에도 힘의 역전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뜻의 합류를 모색했습니다. 천주교와 천도교의 창조적 회통을 통하여 일국적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우주적 민주주의를 숙고했던 것입니다. 민족이니 민중이니 시민이 아닌 “하늘과 하나 되는 한울사람”으로의 승화에 천주교가 먼저 자리하여 천도교를 재발굴하고 재결합시켜가는 신문명운동으로 도약했던 것입니다. 서학의 회심으로 말미암아 동학을 회생시키는 이 대반전의 계기가 온전히 해명되어야 ‘뜻으로 본 서학사’도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학순 주교를 비롯하여 김지하 등 천주교 신자로 말미암아 동학이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기특하고 영특한 역설을 탐색하고 사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20세기의 후반기로 진입합니다. 개벽파의 관점에서 본 ‘다른 민주화 운동사’를 써보고 싶습니다. 19세기 횃불과 21세기의 촛불을 잇는 기사회생의 스파크가 튀어 오른 원주로 향합니다. 17세기 북경의 천주교 남당부터 20세기 원주의 대성학교를 일이관지하는 동서교류사의 빛나는 대각(大覺)의 일단락을 채워 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