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20주년을 맞아 지난 20년간 시민행동과 인연을 맺었던 회원, 임원, 상근활동가를 만나는 '시민행동 20년 인물 열전'! 두번째는 장문경 전 미디어팀장의 시민행동 창립 당시의 경험과 최근의 근황들을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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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경

현 서울시 NPO 지원센터 공간매니저

전 시민행동 미디어팀장, 마이캔 편집장

  

오랜만에 소식을 듣는 회원들도 많을테니 우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말씀해주세요.

images.jpg 초창기 시민행동 창립부터 1년 좀 넘게 일하다가 그만두고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을 하다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10년 키우다가 다시 사회에 나왔습니다.

시민행동을 그만둔 이후로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신종철 국장님이 시의원 처음 출마하실 때 선거사무소 오라고 요청이 있었지만 정치에 대한 생각이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고 자신도 없어서 거절했었고요. 대신 벤처기업의 마케팅 팀장, 헤드헌터 등 다양한 일들을 하다가 잠깐 쉬었습니다. 그런 차에 하승창 처장님이 시사자키 리포터를 구한다고 해서 잠깐 했었고요.

그러다 신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병원에서 일을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집에서 가족만을 보면서 살았어요. 그러다 2009년쯤에 정선애 현 서울시 혁신기획관님이 인권재단에 계실 때 일을 도우면서 외부활동을 조금씩 시작하게 되었죠.  

그러다 남편 직장 때문에 잠깐 지방에 내려가게 살게 되어서 1년간 공백기가 있었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건강이 좀 안 좋아서 잠시 쉬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면서 서울시 NPO 지원센터에 놀러갔다가 단체 리스트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고, 지금은 NPO센터의 공간매니저로 전시 기획까지 맡으면서 5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시민행동에 오래 계시지는 않으셨네요.

images.jpg 시민행동 초창기에 막 전력을 다해 활동하다가 일상에서 답답한 부분이 생겼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좀 해볼까 생각이 들던 찰나에, 이건 처음 이야기하는 데 당시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나 하고 있었습니다. 영화감독이었던 선배가 의뢰를 받은 시나리오의 초기작업을 제가 하게 되었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보조작가가 되어서 글을 쓰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오게 되었다. 

 

시민행동이 만들어질 때 함께 하셨는데, 그 때 이야기를 좀 해주신다면요?

images.jpg 1995년에 경실련에 입사했다가 1999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민행동을 만들었습니다. 경실련을 박차고 나온 초기 시민행동 멤버들은 다른 뜻과 다른 방법으로 시민운동을 하고 싶어서 나온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경실련의 젊은 간사들이 내부 문제를 지적했다가 잘 해결이 안 되면서 그만두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나오게 된 김영홍, 김지영, 정성훈, 조양호 이 4인방은 하승창 처장님과 합숙을 해가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고, 저는 문광승, 백현석, 오관영, 정창수와 함께 경제정의연구소 소속이었는데 하처장님이 우리들에게 우르르 나와서 백수가 되지 말고 최대한 버텨봐라 하셨다. 경실련에서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할려면 준비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버텨보려 했지만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 때 우리를 지켜주신 분들이 이필상 당시 소장님과 김광한 사장님, 김윤환 교수님이었습니다. 당시 제대로 월급도 안나오고 하니까 이필상 교수님이 개인 수입으로 연구소 사람들에게 용돈을 주시면서 버티고 있었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위염 등의 증세가 생겨서 휴직 후 결국 그만뒀습니다.

그 때는 이미 4인방하고 처장님이 사무실을 얻고 집기를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만두고 나와서 바로 시민행동 사무실에 갔습니다. 말도 안하고 그냥 들어가서 빈 책상 하나에 가방을 올려놓고 “저 오늘부터 나와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처장님이 눈이 커지면서 “왜 벌써 왔니”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그렇게 시민행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장문경 회원에게 지난 20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시민행동과의 한 순간은 언제인지 들어봅니다. 

 

회의는 짧게 하고 쓸데 없는 회의는 안한다고 선언했지만 새롭게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회의도, 공부도 많았습니다. 김동노 교수님을 모셔서 시민사회의 역사부터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공정거래법을 전공했고 재벌파트를 담당하기 위해서 경실련에 공채로 들어갔던지라 시민운동의 기본부터 알고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공부가 필요했고, 초창기 멤버들은 그 공부를 같이 시작했습니다.

막 인터넷이 등장하던 시점이라 인터넷 시민운동을 하자고 해서 인터넷에 관해서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활동가들 모두가 당시 인터넷 환경과 프로그램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활동가들이 모두 각자의 파트를 맡고 있는 팀장이었기 때문에 팀별로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홈페이지 제작 시험도 봤습니다. 팀장급들은 모두 시험을 봤는데, 가장 먼저 합격한 게 정란아와 저였고 마지막까지 통과 못한 유일한 분은 정창수였죠. 

인터넷 시민운동이란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생소했지만 닉스 청바지 사건과 또 다른 인터넷 업체 관련 사건을 겪으며 가능하겠구나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두 곳 모두 소비자 대상으로 이벤트를 하면서 조작을 통해 내부 관계자에게 상품을 제공했는데요. 시민행동이 제보를 받아 인터넷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해당 업체가 인터넷을 통해 사과하고 북한 어린이들에게 컴퓨터를 보내는 등의 사회공헌을 하는 것으로결론이 났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피켓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여론을 모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모든 분야에 대해 문제가 생기면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프로야구 선수협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운동을 좋아하다보니 하겠다고 했고 조양호의 지원을 받아 진행했습니다. 프로야구 선수협 지지 홈페이지를 만들고 중요한 인물들의 전화 인터뷰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장충체육관에서 선수협 창립총회를 할 때도 박철순 선수 뒤에 앉아있었습니다. 한 번은 OB팬들이 강남에서 모임을 한다고 해서 가봤는데 그 분들은 외부 세력에 동조하지 않겠다며 시민단체들의 개입을 싫어해서 자체적으로 팬페이지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우리 홈페이지밖에 없었으나 나중에는 그 곳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커지면서 선수협 전체를 지지하는 곳으로 바뀌었죠. 처음에는 우리가 선수협을 지원하는 유일한 단체였는데 협업이 필요해서 여러 단체를 묶어 활동하기 시작하니까 선수협에서는 참여연대, 경실련만 상대하려고 했다. 다른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당시 대변인이던 강병규 선수가 그렇게 진행을 했습니다. 우리가 작은 단체의 서러움을 처음 겪었던 게 그 때였죠. 암튼 그 인연으로 시민행동 창립기념 축하영상을 만들 때 송진우선수가 응해줬고 대전까지 가서 촬영해서 창립기념식때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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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멤버들은 열심히 공부한 것에 대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인지 책을 들고 찍은 사진이 많습니다. 

 

 회원들과 특히 가까우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images.jpg 제가 시민단체 최초의 웹진이라고 할 수 있는 ‘메일진’이라는 것을 만들어 히트를 쳤습니다. 당시 하승창 처장님이 그것을 만들게 된 단초를 제공했는데, 제게 그 일을 맡기면서 엄청 거창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옛날 볼쉐비키 혁명이 있었을 때 그것을 전파하고 했던 것은 언론과 펜이 한 일이다. 너의 펜으로 할 수 있다. 이 안에서는 네가 가장 적임이다"라며 힘을 주셨죠. 인터넷 시대에 적합한 시민사회 언론으로 뭔가 해보고 싶으셔서 추천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경실련에서 경제 분야를 주로 맡아왔고 시민행동에서도 경제 분야를 하고 싶었는데, 대학 전공도 아니고 경실련에서 하던 일과도 전혀 달라 좀 고민되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하처장님이 제가 가진 다른 면을 보고 그 일을 해보라고 권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승락은 했지만 처음에 어떻게 할 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메일로 소식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소식지는 텍스트로 단순하게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장문경이예요. 오늘은 무슨 회의를 했고 내일은 무슨 행사가 있어요'라고 간단하게 보냈죠. 그러다가 인터넷을 돌아다니고 검색하면서 다양한 이미지와 이모티콘을 수집하고 내용에 맞게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면서 알록달록하게 편집해서 보내기도 하고요. 

그러다 정해진 포멧으로 보내자고 해서 마이캔이 만들어졌고 신문처럼 편집을 해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환경운동연합 같은 데서도 소식지를 보냈는 데 그런 소식지는 보통 정보만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이캔은 맨 앞에 마치 사적인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회원들과 소통하는 내용을 넣었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들도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첫사랑과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다는 분도 있었고, 그걸 읽으려고 꼭 열어본다는 분도 있었고, 처음 회원총회할 때 온 분들 중에 낯선 곳이지만장문경을 찾으면 나를 알 것 같고 쑥스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다는 분도 계셨죠. 그 메일진이 개인적 소통으로 느껴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도 일이 늘어났습니다. 메일을 받는 분들에 대해 알고 있어야 나중에 만났을 때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죠.

그런 과정에서 초창기 시민행동은 '나를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구나', '따뜻하게 서로 이야기하는 곳이구나'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고 그런 이미지가 시민행동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기자들한테서 '이거 쓴 사람 누구냐?'며 문의연락이 오기도 하고 기사화되기도 했었죠. 

시민행동을 그만두고 나서도 마이캔 맨 앞의 글은 한 동안 제가 썼습니다. 제가 그만두고 나서 처음 담당자는 김영홍이었는데 제가 다른 일로 바빠서 글이 늦어지면 연락해서 졸라댔어요. 그러다 담당자가 조양호로 바뀌었는데, 계속 제가 제 때 글을 못 보내면자 그 섹션을 없애버리더라고요. (웃음)

그만두고 난 후에, 하처장님이 외부 회원세력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굿시티즌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굿시티즌의 모티브가 되었던 것은 호주올림픽의 자원봉사자 사례였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주민들이 아니라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자원봉사 활동이 소개되었습니다. 외국의 부유한 사람들이 받는 기부 컨설팅 기사도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자리잡은 사람들을 조직해서 자원봉사나 기부가 원활하게 형성되고 선도적 활동이 되도록 하는 곳을 목표로 굿시티즌을 만들었습니다. 

초기에 잘 모이고 의기투합이 잘되어야 해서, 조직화는 제가 하고 아우르는 것은 신종철 국장님이 맡기로 했습니다. 신종철 국장님, 김광한 사장님, 이준성 상무, 허광봉 사장님 등이 각각 한 명을 데리고 오고 내가 고교선배를 데리고 오고 하면서 조직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이고 회비를 걷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할 타이밍이 되었는데, 갑자기 한 두 분이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고 하필 그 때 제가 임신하면서 그대로 주저앉게 되었죠. 조직화를 하려면 실무를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모인 분들이 다 각자 자기 일을 하는 분들이라 바빠서 더 이상 진행은 어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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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본인이 촬영 담당이었기에 희귀 아이템이 되어버린 시민행동 초기 장문경 회원의 사진 중 하나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순간이 있다면요? 

images.jpg 첫 번째는 회원총회를 당시 숭실대 사회복지관에서 자면서 준비하는데, 그 때 지영이가 남대문에서 족발을 공수해왔었습니다. 경실련 정동 시절에 술에 취하면 남대문에 가서 족발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인지, 정말 맛있게 먹으면서 준비를 했던 시간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김지영의 노고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아까 이야기했던 처음 시민행동에 발을 내딛었던 그 날입니다. 아직도 하처장님의 그 표정은 잊을 수 없네요.

마지막은 창립총회 날 총회 행사 전체 지휘를 제가 했는데 식순 중에 영상을 트는 게 있었습니다. 그걸 제가 만들어야 했는데 그 때만 해도 제가 영상 편집을 못해서 속성으로 YTN 카메라 기자한테 영상과 사진찍는 것을 속성으로 배워서 만들었습니다. 창립 영상답게 해가 떠오르는 배경에 창립에 걸맞는 황지우 시인의 시가 나오고 인터뷰가 이어진 후 마지막 장면은 나무숲 사이로 햇빛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찍었냐면 일출은 그 때 도와주었던 친구가 경실련 청년회에 있었던 노숙인단체 활동가였는데 가지고 있는 영상이 있다고 해서 그걸 받아서 썼고, 시 나레이션도 들어가야 해서 제가 직접 했습니다. 경기도에 편집이 가능하다는 사진관을 알게 되어 거기까지 가서 편집하고 그 사진관 건물 뒤편에서 나레이션도 녹음하면서 며칠에 걸려 완성했습니다. 숲에 햇빛이 들어오는 영상을 보는 데 너무 뭉클했고 오늘 창립총회가 무사히 끝날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초창기 사진을 보면 제가 별로 없는데, 그 때 사진기록은 제가 다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년간 시민행동을 지켜보시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images.jpg 시민행동 초창기에는 마이캔을 비롯해 회원들과 소통이 활발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업에 매몰되어 있고 소통하는 부분이 약해지지 않았다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시민단체가 회원들과의 소통이 긴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에 경실련을 처음 시작할 때도 지금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들어주고 싶은 사람 중 하나이고 마이캔에 그런 감정을 담았었습니다. 소통은 시민단체가 존재하는 한 기본적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민행동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인터넷 시민운동을 표방했던 그 정신은, 단순히 인터넷이란 도구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현재의 놓치고 있는 것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붐이 일어나서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한 발 앞서서 볼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거창한 것만이 아니라 놓친 한 부분을 우리가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계속 그런 식의 발걸음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한 걸음 먼저 나가지 못하고 모두가 열광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민행동과의 인연이 장문경 회원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들어봅니다. 

 

마지막으로 시민행동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인해 인생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다면요?

images.jpg 늘 살던 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민행동 이전에는 전공했던 경제법 관련된 것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시민행동에 오면서 변화를 두려워하던 성격이 변하게 된 시초가 된 것 같고, 그래서 그 이후 많은 다양한 일들을 해보면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