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온전히 민중 속으로 내려 놓은 사람, 허병섭

『어둠의 자식들』

전두환 신군부가 5.17쿠테타와 광주학살로 정권을 장악하고 난 살벌한 시기였던 1980년 7월 한권의 책이 대학가 서점에서 날개돋힌듯이 팔렸다. 황석영의 신작 소설 『어둠의 자식들』이었다. 현암사에서 낸 『어둠의 자식들』은 발간되자마자 수만 부가 팔려나가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70년대에 이미 『객지』, 『삼포 가는 길』 등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문명(文名)을 날리던 황석영에게도 흔하지 않은 대박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 책 황석영이 쓴 것 맞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황석영의 그 이전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았다. 구두닦이, 거지, 매춘부 등 밑바닥 인생들의 거친 생활이 날것으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거침없는 욕설과 은어들이 여과없이 구사되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은 군사독재 치하의 엄혹한 상황에서 숨죽이던 시절의 지식층 독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동철이 이철용이라는 실존인물이고, 이 책도 그가 쓴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속편으로 나온 『꼬방동네 사람들』에서는 작가 이름이 이철용으로 되어 있어, 독자들은 그것이 소문이 아닌 사실임을 알았다.

『어둠의 자식들』 끝 부분에 온갖 범죄로 감방을 드나들던 주인공 이동철이 개심하도록 영향을 준 공목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누구일까 궁금해 했다. 그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무렵에 나는 기똥찬 젊은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공목사라고 하는 그는 보통 목사들과는 달리 아무 폼도 잡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 못지 않게 초라해 보였다. 은성학원은 내방(형사)들이 설쳐대서 거의 작살난 상태에 있었는데 공목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게 놀려왔다. 그런가 하면 은성학원 아이들(이철용이 모아 놓은 구두닦이들)과 뒹굴며 같이 자고 친구처럼 대해주는 거였다. 나는 차츰 공목사가 좋아졌다. 그는 나를 만나면 설교와 예수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그저 친구처럼 지냈다. 나는 그게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중략)

사실 나는 공목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람대접을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조건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아껴야 한다는 걸 깨달아 갔다. 나는 간신히, 맹목적인 오까네(돈)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공목사는 대학원까지 나온 실력있는 사람이었지만 편하게 살려고 통밥이나 재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밑바닥까지 낮추면서 겸손하게 봉사하며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철용 『어둠의 자식들』, 새녘출판사, 2012)

이 공목사가 바로 월곡동 산동네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허병섭 목사라는 사실이 이내 알려졌다. 그리고 그가 빈민들 속에 사는 산 예수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은 얼마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허병섭 목사 이름을 사람들이 많이 알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던 이철용을 일약 스타 작가로 세상에 나오게 했고, 그 명성을 바탕으로 후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세상과 연결한 사람이 허병섭 목사였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그것은 당시 한 빈민선교운동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젊은 목사 허병섭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목사직을 던져버린 목사

허병섭 목사는 70-80년대 ‘민중운동의 시대’에 탁월한 빈민 조직운동가요 민중교육자였고, 90년대 이후에는 생명문화공동체 운동가로서 변신하여 일생을 마쳤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뛰어난 운동가로서보다는 그저 동네에서 마주치는 동네아저씨 같이 선하고 소탈한 사람으로 허병섭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 속에서 민중의 아픔을 진심으로 함께 나누고자했던 한 ‘선량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가난한 민중과 하나가 되기 위해 목사직까지도 던져버린 결단력 있는 ‘양심적인’ 목사였다. 허병섭 목사가 생전에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박형규 목사는 그를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민중 속으로 내려 놓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가 2012년 3월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3년 만에 돌아갔을 때 영결식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그의 생전의 어린아이 같이 순수했던 모습을 회고하며 슬퍼했다. 함께 빈민선교를 했던 이규상 목사는 추도사에서 그를 “진솔하고 성심 성의껏 인생을 살다가 죽은 친구”라고 표현하며 애도했다. 또 생전에 누구보다 허 목사를 따랐고, 장례 호상을 맡았던 이해학 목사는 그를 “포장하지 않은 인간, 있는 그대로를 보이는 그래서 누구보다 순수하고 정직하고 뜨거운 열정의 울림이 있는 인간”이라고 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신학의 꿈을 키우다

허병섭은 1941년 10월 10일 경남 진해의 가난한 집안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남에게 베푸는 일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좋게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절약과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고,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고 한다. 허병섭은 한 글에서 자신이 부모님의 그런 성품을 물려 받았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허병섭의 어린 시절 기억은 가난과 배고픔으로 가득 차 있다. 아버지가 일제 말기에 돈을 벌러 만주로 갔을 때 어머니가 어린 허병섭을 등에 업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먹을 게 없어 콩비지만 먹고 연명하다가 허병섭이 영양실조로 개구리처럼 배만 볼록하고 숨만 깔딱거리게 되자 어머니가 이제 죽는구나 싶어 볕에 눕혀놨는데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는 대구에 나가 살았는데, 언젠가는 배가 고파 밥 달라고 어머니를 조르다가 야단만 맞고, 길에 떨어진 풀빵을 주워 혼자 먹다가 동생들이 생각나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허병섭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 영지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주일학교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어린 허병섭은 천국을 느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교회 수련회에서 목사님이 “너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대구에 있는 한남신학교에 지원하려했으나 집안 경제 사정이 어려워 1960년 가족 전체가 서울로 이사오게 되었고, 허병섭은 신학교 진학의 꿈을 접어야했다.

서울로 온 허병섭은 우선 당장 집안 식구의 생존을 위해 닥치는대로 일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신학공부의 꿈을 접지 않았고, 밤마다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때 서부이촌동에서 목회를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만을 그리는 기독교미술 화가 이연호 목사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기도한 보람이 있었던지 일용직 일자리를 구해 찾아간 한신대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한편으로 대학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허병섭은 한신대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했고, 거기에서 문동환 박사로부터 해방신학과 같은 제3세계 신학의 새로운 조류와 파울로 프레이리의 민중교육학 등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당시 한신대 교수로 있던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 목사를 만나 평생의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이 당시 신학생으로서 허병섭은 기독교장로회 여신도들과 허정림 권사 등 마포공덕교회 여신도의 후원을 받았고, 그 고마움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허병섭은 이 당시 신학생으로서 공덕교회 교회학교 교사로 파견되었는데 거기서 이 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던 박형규 목사를 만난다. 당시 교회 여신도들이 허병섭에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후원해오던 터라 박형규 목사도 이 청년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고 한다. 박형규 목사는 이 때 ‘병약하고 가난해 보이는 이 청년에게서 어떤 특이한 인간적 향기, 진지한 구도자나 수행자에게서 풍기는 냄새’ 느끼곤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때의 만남을 계기로 하여 이 두 사람의 사제적(師弟的), 동지적(同志的) 만남은 일생을 이어가게 된다.

 

‘수도권’에 참여하여 빈민운동가로 성장하다

5.16 이후 관주도의 급격한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농촌에서 밀려나 수도권으로 밀려든 엄청난 수의 이주민들은 거처할 집조차 없어 도시 곳곳에 무허가 판자촌을 짓고 사는 빈민으로 전락했다. 정부당국은 이들에 대한 근본대책을 세우기는 커녕 무자비한 철거대책으로 일관했다. 결국 대책 없는 판자촌 철거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고, 갈 곳 없는 빈민들과 정부 당국의 정면 대결국면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한자, 소외된 자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각적인 기독교인들이 나서게 되었다.

1971년 1월 박형규 목사가 중심이 되어 빈민조직운동을 위해 신구교 연합운동협의체 안에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이하 ‘수도권’)를 조직했다. 권호경, 이규상, 손학규, 김혜경 등이 실무간사로 참여했다. 이들은 광주대단지에 실무자를 파견(71년 9월)하여 주민교회를 설립하고, 청계천 판자촌, 중랑천, 남대문 시장, 금화지역 시민아파트, 도봉동·신정동·인천 화수동 등의 주민조직운동을 시작하였다.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수도권’ 목회자들은 판자촌 지역을 선교의 현장으로 선택하고 선진적 조직이론에 따라 빈민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지향하는 주민조직운동을 정열적으로 실천했다. 이들은 주민운동과 더불어 주민조직가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판자촌 안에 훈련센터를 두고, 각 곳에서 지원하는 훈련생들을 판자촌에 살게 하면서 엄격한 규율 하에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했다.

허병섭은 대략 72년 무렵 ‘수도권’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도권’ 실무자였던 김혜경의 기억에 의하면 1972년 유신헌법 발표가 있기 직전에 ‘수도권’의 판자집 센터에 어느 날 허병섭이 갑자기 찾아와 “밥 좀 있습니까?” 하면서 들어왔다고 한다. 평생 민중의 배고픔을 자기 삶으로 살았던 허병섭의 첫 모습을 김혜경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74년부터 2년간 허병섭은 박형규 목사 밑에서 ‘수도권’의 훈련 담당 실무자 역할을 했다. 1975년에는 청계천에 이어 중랑천에 ‘수도권’ 사무실을 두고 주민운동을 계속했다. 허병섭은 이선근 가톨릭 수사, 신동욱 복음교회 전도사 등과 이곳에 살면서 활동에 전념했다. 이 무렵에 한신대 학생이던 오용식 목사(현재 무주 자활후견센터장)가 ‘수도권’ 훈련생으로 지원하여 허 목사의 지도를 받았다.

허병섭이 이철용을 만났던 것은 1974년 공군 군목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는 휴가 나올 때마다 아예 사복을 입고 판자촌에 살면서 빈민조직운동에 몰두하였다.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곧바로 ‘수도권’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이철용의 회고에 의하면 신설동 4번지에서 구두닦이 왕초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에 동네 목사 소개로 허 목사를 처음 만나 금새 친해져 형·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5년 1월에 이철용이 유신헌법 찬반투표 당시 무더기표를 폭로하였다가 박정희 정권의 괘씸죄에 걸려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러자 평소에는 예수 이야기는 꺼내지 않던 허병섭이 이철용에게 성경책을 넣어주었고, 책이라고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이철용이 이 책을 오기로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철용은 허병섭에게서 세례를 받고, 평생 제자이자 동지가 되었다.

 

구속

76년에 ‘수도권’에 큰 위기가 닥쳐 왔다. 박정희 정권은 그동안 눈에 가시로 여겨왔던 ‘수도권’을 용공으로 몰아 이른바 ‘자생적 공산당 사건’으로 조작하려한 것이다. 박 정권은 “수도권 선교조직이 사회의 약자들을 부추겨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하면서 박형규 위원장을 비롯한 전 실무자를 남산에 있는 시경 대공분실로 끌고가 한 달동안 엄청난 고문을 하면서 강압수사를 벌였다.

‘수도권’ 현장 실무자로 일하던 허병섭도 이 사건으로 남산에 연행되었다. 그런데 연행될 때 가지고 있던 수첩이 문제가 되었다. ‘수도권’ 실무자들은 처음 교육받을 때 연행에 대비하여 저들에게 꼬투리 잡힐 용어는 일체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허병섭은 자기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이 회의 때 오간 얘기를 적어두었던 것이다. 수사당국은 그 암호 같은 글을 다 읽어내면 용공으로 몰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허병섭을 집중 추궁했다. 허병섭은 계속 고문을 받아가면서 자기도 알아 보기 힘든 그 글씨를 ‘해독’해내야했다. 이 일은 허병섭이 두고두고 자신의 ‘먹물 근성’을 반성하는 소재가 됐다.

이 사건은 워낙 근거가 없는 조작사건인데다 기독교계가 조직적으로 대응할 조짐을 보이자 저들은 대부분의 실무자들을 조사 40여일만에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모두 풀어줬다. 박 목사와 이규상 목사만이 구치소로 넘어갔으나 이들도 이틀 후 기소유예로 석방했다. 그러나 저들의 집중적인 탄압으로 ‘수도권’의 활동은 사실상 더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 당국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모든 판자촌에 가구당 1인씩 감시자를 두고 반상회 등을 통해 감시체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감시와 탄압 일변도의 정부 정책은 결국 ‘수도권’ 조직원들이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교회의 원조 동월교회를 개척하다

‘수도권’ 조직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지자 허병섭은 주민조직운동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허 목사는 1976년 말 중랑천변에 있는 자신의 집을 팔고 성북구 하월곡 4동 산동네에 집을 사서 이철용과 함께 동월교회를 세웠다.

허 목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빠듯한 산동네 주민들을 위해 1980년 국내 최초의 탁아방 ‘똘배의 집’을 만들어 일 나가는 부모들의 짐을 덜어 주었고, 공부방, 야학 등을 운영하여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이철수 화백으로 하여금 교회 벽에 벽화를 그리게 하고, 예배시간에도 국악 찬송을 시도하는 등 민중들과 삶의 애환을 함께하는 민중 속의 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허 목사의 민중과 함께 하려는 지난한 노력은 목회를 하는 중에도 계속 되었다. 이철용과 함께 허 목사는 미아동과 삼양동 산동네에서 지역을 나누어 포장마차를 1년간 했고, 넝마주이들과 몇 달간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민중교육자 허병섭 – 민중교육연구소

한편 허병섭에게 민중교육의 문제는 평생의 화두였다.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이는 한신대 은사였던 문동환 박사였고, 브라질 파울로 프레이리(Faulo Freirie)의 민중교육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실천적으로는 ‘수도권’ 활동 중에 박형규 목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민중교육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실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1981년 민중교육연구소를 세웠다. 본부 사무실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두었다가 86년부터는 월곡동에 집을 사서 옮겼다. 그는 1985년까지 이 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민중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와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로 1987년 『스스로 말하게 하라』(학이시습, 1987)라는 일종의 현장활동가 지침서를 펴냈다. 이 책은 한국적 민중교육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이 책은 서문에서 박형규 목사가 말씀한대로 “1970년대 전후로 ‘가난한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요 주인이다’라는 깨달음 속에서 다양한 민중의 현장에서 ‘민중과 하나 되는 삶을 살고, 민중이 역사의 주인으로 나설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일했던 많은 지역 주민조직운동가들의 고뇌와 실천적 노력이 모두 담겨 있는 ‘민중운동 교육 방법론(Cdmmunity Organization: CO교육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허병섭의 개인 연구라기보다는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활동가들의 운동의 총결산인 셈이다.

이 책에는 허 목사를 비롯한 70년대 민중현장운동가들의 ‘민중’을 바라보는 관점과 ‘민중교육’에 대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허 목사는 ‘지식인이 민중의 민중성을 돕는 그 범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지식인은 오직 민중을 섬기는 존재여야 한다.’라는 지식인의 소명과 ‘지식인은 민중현장에서 민중으로부터 배우며 하나되는 삶을 통해 민중다운 지식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민중 현장에서의 ‘민중 언어’와 ‘민중사실’에 주목하고 이를 수집하여 민중을 이해하고 민중을 교육하는 기초자료로 삼았다. 지역 주민조직운동가는 지역 주민, 특히 가난한 민중의 삶을 깊히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민중과의 깊은 신뢰를 쌓아나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민중언어)와 그들의 삶의 구체적 현실(민중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허 목사는 누구보다도 ‘민중이 되어 민중과 함께 사는 것으로부터 민중교육은 시작된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허 목사 자신이 끊임없이 자신의 ‘먹물근성’을 버리기 위해 몸부림쳤고, 그래서 김밥장사, 포장마차 장사, 넝마주이를 하면서까지 민중과 ‘일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허 목사는 신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예수처럼 살기-예수되기’이고, 그것은 곧 ‘민중처럼 살기–민중되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민중되기, 미장공이 되어 일꾼두레를 설립하다

그의 ‘민중되기’ 실천은 그로 하여금 1988년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직을 반납하고 교회를 떠나 노가다 미장공으로 변신하도록 한다. 그에 대해 허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려고 지금까지 애써 왔어요. 그러나 제가 목사인 동안 완전히 하나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직을 버리고 노동자가 되었고 이제는 진짜 동네사람이지요. 사실 동네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한데 저 혼자 이름난 목사가 된 것이 양심의 가책이 됐고 이 썩어가는 세상을 살리는 길은 ‘자리 앉은 사람의 각성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죠.

1990년에는 그동안 노가다를 하면서 만난 건설일용노동자들과 노동공동체 “월곡동 건축일꾼 두레‘(이하 일꾼두레)를 만들고 일종의 생산협동공동체운동을 시작했다. 스스로 두레 장(長)을 맡았다.

일꾼두레는 처음에는 각종 매스컴의 찬사를 받고 건축주와 일꾼의 호응을 얻었다. 날삯 노동자가 고정적인 월급을 받고 하루 8시간 근무시간을 지키는 등 성공적인 협동조합 사례로 알려졌다. 두레 회원들도 절망과 체념의 타성에서 벗어나 희망과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했다. 허병섭은 건축 일꾼 두레가 만들어진 과정을 소상히 적어 1992년 『일판 사랑판』을 펴낸다.  거기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다짐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가난한 현장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있으면서,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과 함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난한 사람과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일꾼 두레는 한때 건축회사가 될 꿈까지 꾸었으나 결국 경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게 된다. 일꾼 두레는 월곡동에서 시작하여 봉천동으로 옮겨 나성건설과 합쳐 나레건설로 바뀌었다가 그마저도 얼마 후에 없어졌다. 그러나 이 일꾼두레의 실험은 후에 지역의 근로 능력은 있으나 자립하지 못하는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자활후견기관의 모태가 되었다. 이 자활후견기관은 민간의 요구로 정책입안자들이 연구해 1996년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5개 지역에 불과했으나 2000년 이후 국민기초생활법에 의해 전국적으로 각 시·군·구에 하나씩 만들어졌다.

 

귀농 – 생태농업으로 인생2막을 시작하다

일꾼두레 사업은 획기적인 실험이긴 했지만 경영적으로는 실패했고, 그를 지원한 여러 사람들에게 상당한 재정적 손실을 안겨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자립기반을 개척한다는 그의 꿈이 실현되기에는 현실사회의 벽이 높았던 것이다. 두레 채무자들도 허 목사의 인품과 성격을 잘 아는지라 결국 그냥 덮고 넘어가게 됐지만 그 과정에서 허 목사는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다.

이 때 해직교사 후원회, 참교육 시민모임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이정진 씨가 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이정진은 허 목사보다 6살 아래로 허 목사가 민중교육연구소장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는데 이런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져 1994년 이들은 드디어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허 목사에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다. 허 목사에게는 이혼한 첫 부인 사이에서 난 성장한 세 딸(소라, 미라, 시라)이 있었다.

이 결혼을 계기로 허 목사는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귀농하기로 결심한다. 1996년 4월이었다. 그 당시의 한계상황에 부딪혔던 심정을 허병섭은 이렇게 밝혔다.

나는 민중과의 동일화를 위해서 성직이라는 존재의 자리를 박차고 처절한 민중의 생존현장인 육체노동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러나 4년여의 체험을 통해서 육체노동이 피폐한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고, 이 노동력을 팔아서 잘 살아 보려는 시장경제의 논리는 경매자의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이 초라한 상품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략) 이런 사회구조를 바꾸어 나가는 일을 하기에는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다.(『허병섭 이정진의 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 함께 읽는 책, 2001)

귀농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허 목사는 부인 이정진과 상의하여 1997년 4월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에 정착하기로 했다. 그 해 11월에 논도 천 평을 매입했다.

난생 처음해보는 농사일이었지만 주민들에게 묻고 배워가며 논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처음 3년간은 부인 이정진과 함께 오로지 농사일에만 전념했다. 무공해 유기농법, 우렁이 농법, 태평농법 등 자연친화적인 생태농업을 실험하면서 자연 속의 노동의 즐거움과 자연이 주는 풍요한 결실을 누렸다. 1999년에는 자신의 새 땅에 집터를 닦고 흙벽돌을 쌓아 아담한 집을 손수 지었다. 아담한 안산이 앞에 보이고 개울이 휘돌아 나가는, 풀벌레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오는 ‘아름다움과 고요, 그리고 생명이 넘치는’ 집에서 허 목사 부부는 새로운 인생 2막을 시작한 것이다.

허 목사는 농사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귀농 3년차부터는 농사일과 함께 지역 일에도 적극 참여했다. 1998년 대안학교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95년부터 준비해오던 경남 함양의 녹색대학(지금은 온배움터라고 개명)에도 적극 참여하여 공동대표를 맡았다. 실상사 도법스님 중심으로 하는 생태생명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허 목사 부부가 귀농할 때 동월교회가 지원한 5000만원으로 산 무주의 집과 땅(19,000평)은 자연생태 보존을 위해 마을 공동재산으로 자연환경신탁에 기증했다.

 

알 수 없는 병 – 민중목사 영면하다

2009년 1월 초 부인 이정진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졌다. 말을 못하고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부인을 서울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시킨지 1주일여 만에 이번에는 간병하던 허 목사가 돌연히 사라졌다. 실종신고를 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경찰이 허 목사가 병원 인근 지하상가에서 혼수상태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나 허 목사 역시 부인과 똑같은 증세를 보였다. 혼수상태에서는 깨어났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무동함구증(無動緘口症)’에 ‘상세불명(詳細不明)의 뇌병변(腦病變)’이라고 할 뿐 끝내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허병섭 목사는 3년여 가족들과 지인들의 기도 속에서 투병하였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12년 3월 17일 오전 4시 30분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7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그는 3월 29일 9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갖고 벽제화장장에서 화장하였고, 유골은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평소 애송하던 성경 시편 23장의 찬송가가 그의 마지막을 전송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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