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정치의 장치裝置

 

선거제도 개혁은 
먹고사는 문제다

 

 

글.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 교수

 

우리나라의 빈부격차 상황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최악에 속한다. 나라 전체에는 상당한 부가 쌓여 있지만 그것이 소수에 집중돼 있어 다수의 시민들은 상대적 빈곤 문제로 늘 불안하고 구차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양극화는 자본과 노동,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장년과 청년, 수도권과 지방 사이 등 온갖 주체들 간에 심화되고 있다. 뚜렷하게 관찰되는 청년 세대 내부의 ‘20:80’ 구조화 상황은 불행하게도 한국의 양극화 문제가 (그야말로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지속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소위 ‘87년 체제’의 성립으로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불성설이다. 절차와 제도 혹은 규칙은 실질을 채우기 위해 설계되는 것들이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에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절차 설계에 하자가 있다는 의미다. 빈부격차와 양극화 정도 등으로 가늠될 수 있는 한국의 실질적 민주주의 수준은 상기한 바와 같이 매우 낮은 상태에 줄곧 머물러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악화돼 가고 있다.) 87년 체제라고 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성숙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절차와 제도 마련해야
한국의 실질적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의 해소에 유능하고 ‘새로운’ 절차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 핵심은 주요 사회경제 집단들에게 모두 ‘정치적 대표성’을 두루 제공하여,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이 ‘누구나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절차와 제도를 마련하는 일이다. 소위 ‘포괄의 정치politics of inclusion’가 작동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자영업자, 그리고 중소상공인 집단들의 선호와 이익이 정치 혹은 정책결정 과정에 얼마나 잘 포함되고 반영되는지를 새삼 살펴보라. 한국 사회의 이 약자집단들은 그 규모만 클 뿐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포괄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핵심 소임 중 하나는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줌으로써, 그들이 강자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길항력을 갖추게 하는 데 있다. 노동이 자본과,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청년이 장년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과 적어도 정치의 장에서는 ‘동등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어야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자유와 평등을 수호할 수 있는 정책과 법, 제도 등이 제대로 공급될 수 있고, 그래야 실질적 민주주의가 진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이 정치적 대표성이란 결국 정당들이 보장하는 것이다. 노동자, 중소상공인, 청년, 서민 등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여러 유력정당들이 의회 및 정부에 상시적으로 포진해 있어야 한국의 실질적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당체계의 개편이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지금의 지역 기반 거대 양당제에서 탈피하여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구조화된 현대적 다당제를 발전시켜야 실질적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당체계의 형태를 결정하는 가장 중대한 변수는 선거제도다. ‘뒤베르제의 법칙’으로도 알려진 바와 같이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견인한다. 결국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 간의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포괄정치 작동의 전제 조건인 구조화된 다당제가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여사회 2015년 6월호

포용 사회를 위한 제도 ‘합의제 민주주의’
구조화된 다당제는 다시 연정형 권력구조의 제도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념과 정책기조가 서로 다른 셋 이상의 여러 유력정당들이 자웅을 겨루는 다당제에선 어느 한 정당이 홀로 과반 의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낮고, 따라서 안정적인 정부 구성을 위해선 복수의 정당들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일이 통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로, 다당제는 다시 연정형 권력구조로 이어지기 십상이라는 것인데, 사실 실질적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할 만한 국가들은 모두 (서로 맞물려 있는) 이 세 종류의 정치제도로 구성된 ‘합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의 8개국은 어느 기준에서 보더라도 세계 최고의 보편적 복지국가들인데, 이 8개국은 모두 예외 없이 비례대표제 국가이며, 다당제 국가이며, 연정형 권력구조를 가동하는 국가다.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비례민주주의 체제 혹은 합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포함한 주요 계층과 집단들 모두에게 정치적 대표성이 (의회 및 행정부 차원에서) 두루 보장되는 까닭에 포괄의 정치 혹은 포용의 정치가 작동하고, 따라서 ‘포용 경제’(경제의 민주화)와 ‘포용 사회’(복지국가)의 발전이 촉진된다. 

 

지금까지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한국의 실질적 민주주의 발전에 필요한 ‘새로운’ 절차적 민주주의란 결국 합의제 민주주의이며, 그러한 민주체제의 발전은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중앙선관위가 제안한 소위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크게 환영할 만한 개혁안임에 틀림없다. 각종 시뮬레이션 분석 결과를 보면 선관위 제안을 실제로 채택할 경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개혁효과가 발생한다. 

첫째,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크게 높아진다. 둘째, 유력정당이 여럿 부상함에 따라 어느 당도 국회의 단독 과반을 차지하기 어려워지는 다당제가 발전한다. 셋째, 영남 지역의 새누리당 독과점체제는 깨질 것이며, 호남의 새정치민주연합 독과점체제에도 균열이 생긴다. 넷째, 이념 및 정책 중심의 군소정당들이 유력정당으로 부상할 수 있다. 선관위 개혁안이 이 정도의 효과를 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종국에 합의제 민주체제의 발전과 실질적 민주주의의 성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당하다. 중장기적이긴 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정치적 해법임에 틀림없으리라는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어떻게 이 개혁안을 실제의 절차와 제도로 전환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역할에 다시금 기대가 모아지고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