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15 18주년 기념 예수살기 하늘뜻펴기

 

 

조헌정님 (예수살기 상임대표)

 

 

[겨자씨 한 알에 숨은 비의(秘意)]

17:22-24; 4:26-34

 

우리는 올해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남북간에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우리의 오래된 생각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재인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 간의 첫 번째 판문점 회담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북미간의 갈등 속에서 갑작스레 이루어진 두 번째 회담은 과거의 사고틀을 깨는 놀라운 만남이었습니다.

 

(이 원고는 북미정상회담 전에 쓰였기에 종전선언 혹은 평화협정 관련한 이야기는 사정에 따라 첨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마가복음 본문 바로 앞부분 3장에서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가 사탄의 두목인 바알세불에게 붙잡혀서 미친 일을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옵니다. 제자들이 말합니다.“당신의 가족들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지금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그러자 가족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잘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가족들이 직접 들었더라면 매우 실망하고 분노했을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바로 여기에 앉아 나의 얘기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는 혈육에 기초한 가족 관계를 깨는 혁명적인 말씀을 하시고 오늘의 4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4개의 연속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각기 다른 상황에서 전한 하느님 나라에 관한 4개의 비유를 한데 모은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더 많은 비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비유]

 

첫 번째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길바닥과 돌밭과 가시덤불 그리고 옥토라는 4종류의 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로서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밭은 사람들의 마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받아 행하는 사람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당시의 문자적 말씀 연구에만 몰두하는 율법교사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에 감쳐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은 없다.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라는 말씀인데, 여기서 비밀이 무엇인지는 비밀입니다. 하나의 진리 말씀인지 아니면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는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고 그러면 농부가 낫을 댄다는 얘기인데, 매우 평범한 말씀 같지만, 이를 인생에 비유하면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이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인생의 성공이란 곧 희생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비유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겨자씨의 비유로서 이 비유를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겨자씨 한 알 비유는 이렇게 설명됩니다.“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게 된다.”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말씀들입니다. 이 안에 무슨 어려운 철학적 담론이나 종교의 신비로움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자 마가는 그리 어렵지 않은 비유 말씀마아 매우 이상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준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듣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보고 알아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한마디로 말하면 비유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 기법인데, 오히려 예수는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를 말하고 더욱이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비유의 목적과 예수의 구원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하는 기본 상식을 뒤집어엎는 말씀입니다.

 

혹시 이거 마가가 뭔가 잘못 말한 것 아닌가 예수의 얘기를 잘못 옮긴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의문을 미연에 차단하기라도 하듯이 마가는 비유 말씀을 총 정리하는 34절에서 이를 다시 한 번 이렇게 반복합니다.“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그런데 우리가 읽어본 바로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어야 할 만큼 어려운 비유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약간 알쏭달쏭한 한 구절은 있습니다. 2425절 말씀입니다.“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달아 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고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이 얘기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오늘날 시장자본주의의 결함인 부익부 빈익빈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위해 오신 예수께서 이러한 잘못된 자본주의 방식을 옹호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라는 등불에 연관된 말씀으로 영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할 말씀입니다. 곧 예수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은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겠지만, 만일 이에 주저하고 과거에 매인다면 오히려 그 가진 깨달음마저 잃게 될 것이다는 뜻입니다.

 

하여간 이 말씀 또한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가는 그 뜻이 매우 분명해 보이는 4개의 비유 말씀을 전하면서 이 말씀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예수는 제자들에게 따로 설명을 하셨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겨자씨 비유의 함정]

 

오늘 네 번째 비유 말씀은 흔히 겨자씨 비유로 알려져 있는데, 흔히 이 비유는 가장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드는 곧 교회 성장의 측면에서 자주 인용되어 왔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성도들은 물론이요 모든 목사님들 특히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매우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욥기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함께 사랑받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는 예수님의 본래 뜻에 반대되는 해석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탄적인 해석입니다.

 

저자 마가는 우리가 그렇게 잘못 해석할까 염려하여 말미에예수는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하고 제자들에게는 그 숨은 설명을 따로 일일이 말하였다고 덧붙인 것입니다. 곧 초대교회를 박해했던 로마당국의 눈길로 인해 그 뜻을 여기에 밝혀놓지 못하니까 그 숨은 뜻을 잘 헤아려 새기라는 당부인 것입니다.

 

[겨자와 농부]

 

우선 우리는 이 겨자씨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예수께서 사셨던 그 당시의 농부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농부라면 겨자씨가 자라나서 어떤 푸성귀보다 더 크게 자란다고 하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겨자는 식용작물이 아닙니다. 독특한 맛을 내는 일종의 조미료로 소량만 있으면 됩니다. 겨자 농사 잘 지어서 돈 벌었다는 소리 들어보신 적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밭에 겨자씨가 크게 자라났다는 말은 불필요한 잡초가 무성해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게 들판에서 자란다면 잡초가 아니겠지만 농부가 재배하는 밭에서 자란다면 이는 불필요한 잡초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겨자씨 비유의 핵심은 이 불필요한 잡초가 어떻게 하느님 나라와 상관관계를 맺는 것인가를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핵심은 31절에 있습니다.“그것은 곧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더욱 작은 것이지만, 뿌려진 다음에는 어떤 초목보다도 더 크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진 가지에 깃들일 수 있을 만큼 무성하게 된다.”

 

지금 이 농부는 실수로 겨자씨 한 알을 뿌린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갖고 심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농부는 돈도 안 되고 필요한 작물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겨자씨를 심었을까요? 지금 우리는 왜 그랬을까? 의문을 품지만, 당시의 농부들은 이 얘기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끄덕 했습니다. 왜요?

 

[겨자씨에 담긴 비의]

 

당시 갈릴리 농부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이었습니다. 땅주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건 우리나라도 몇 십년 전 농경사회였을 때에도 그러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소작농이 거의 없습니다. 왜요? 부자들이 농사에 투자를 해 보았자 도시의 아파트나 건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도시화가 되어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40%가 음식점, 마트 등을 운영합니다. 그런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해도 건물세. 은행이자 등등을 내고나면 남는게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장사가 잘 되면 주인이 내어 쫓고 자기들이 합니다.

 

이천년 전 갈릴리 지방의 농부들은 여러 가지 세금에 시달렸습니다. 우선은 예루살렘에 사는 지주가 가져가는 마름세가 있었고, 로마정부가 걷어가는 농지세가 있었고, 여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거둬가는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농부는 추수의 약 3,40%정도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는 몇 개월만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또 빚을 냅니다. 결국 농부들은 죽어라고 일하지만, 빚더미에 올라 않습니다. 빚더미에 앉은 이 농부가 빚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저녁 몇 개의 보따리를 들고 무작정 집을 떠나 떠돌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5천명 4천명을 먹이시는 급식기적 이야기의 사회적 배경입니다.

 

그런데 빚더미에 앉아 있는 어떤 농부가 달리 생각합니다. 내가 도망을 간다고 해서 살 길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이 국가폭력이 저지르는 세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떻게든 이 잘못된 세상 구조를 바꿔내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이미 나이가 들어 반로마 게릴라 독립운동에 참여할만한 힘도 없습니다. 이때 그가 저항의 수단으로 할 수 있는 건 겨자씨를 심어 밭을 잡초로 덮는 것입니다. 일종의 사보타지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로마 당국이나 예루살렘의 지주들이나 매우 곤란해집니다. 이게 한두 명이면 소작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되지만, 이게 만약 집단적으로 일어나면 결국 로마당국이나 지주들은 세금을 대폭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농부가 살아가야만 자신들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겨자나무에 공중의 새들이 머문다는 말은 곧 이런 저항을 통해 힘없는 약자들이 살아갈 공간을 확보한다는 말입니다. 겨자씨를 통한 농부의 저항 그리고 그 저항에 함께 하는 민중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는 방식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마가는 이를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만 따로 알려준 비밀이라고 하면서 당시 공동체 안에서만 나누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엊그제 우리는 615 18돌을 맞이하였습니다. 18년 전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의 평화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방해와 우리 내부의 분열로 말미암아 이 평화의 행진은 노무현정권 이후 이명박, 박근혜정권에 의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부패한 정권을 향해 한 겨울동안 내내 전국에서 천칠백 만 개의 민주민중의 평화 촛불은 타올랐습니다. 이 결과로 인해 세계 역사에서 그 유래가 찾아보기 힘든 무혈혁명을 통해 박근혜정권은 무너졌고, 새롭게 태어난 문재인촛불정권이 탄생한 것입니다.

 

[역사의 갈림길]

 

함석헌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4천년 한반도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역사는 두 가지로 남는다. 하나는 뒤에 남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속에 남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역사라 할 때는 뒤에 남는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으로 남거나 유물로 전하게 되는 그것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생명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마치 소화된 음식 같아 원형 그대로를 볼 수는 없으나, 산 생명으로 민족 안에 남아 있어 그 체격이 되고, 얼굴이 되고, 마음씨와 성격이 되고 풍속과 신앙이 되는 것이다. 천년 고난에 그만 눌려버린 한반도는 그 때문에 생명이 망가지고 말았다.”(444)

 

그러나 장차 올 날을 누가 아느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눈을 들어 보아라. 거칠고 쓸쓸한 들판이 끝나는 곳에 한 줄기 요단강이 가로누웠고, 거리를 건너면 새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 싸울 때는 칼이 소용없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었다. 거기서 이 수난의 비렁뱅이는 거지 나사로같이 과거의 모든 고통과 업신여김에서 벗어나 위로와 존경을 받을 것이다. 지난날 길가에 앉아 있던 갈보는 그 받은 고난으로 정화되어 여왕이 될 것이다.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나.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으로 더럽혀지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하는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486)

 

이제 우리는 이 고난을 뚫고 새 역사를 향해 발돋음할 것인가 아니면 이 치욕의 역사를 계속 이어갈 것인가 하는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분단이 우리 안에 만들어 놓은 미움과 저주는 이 민족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민족혼이 말살되었을 뿐더러 개개인의 영혼이 병들고 말았습니다. 외세의 꼭두각시 노릇으로 인해 우리는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세계는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지구는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진정 평화의 시대로 진입할 것인지 아니면 또 다시 전쟁으로 치달을 것인지.

 

오늘 에스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높은 나무는 쓰러뜨리고, 낮은 나무는 키워 주면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다시 푸르게 하는 이가 나 야훼임을 알게 하리라.”

 

지난 61일은 문익환목사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문익환목사님은 신학자요 성서번역가요 목회자요 시인이요 민주와 통일운동가로 한 시대를 불태우고 간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이셨습니다. 1989년 군사독재정권 시절 부활절을 맞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주석과 회담을 갖고 통일의 원칙을 합의하셨다. 이 일로 인해 옥고를 치루셨지만, 히브리 성서의 신앙으로 본다면 당시 장충체육관에서 선출된 거수기 대통령대신 200여개의 전국의 민간 조직을 대표하신 문목사님이야 말로 진정 남한 민중을 대표하는 민통령이셨던 것이고, 바로 이것이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었습니다.

 

문익환목사님의 유명한 시 꿈을 비는 마음일부를 읽겠습니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 놓고

진주 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 줍시사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오?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