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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냐?

할아버지는 새로 난 아이를 두고 말했다. 아이가 손녀라는 말에 할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들만 귀한 집이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핏덩이 딸을 안았다. '이제 이 아이는 내가 지켜야 한다', 할아버지가 떠난 자리에서 아버지는 읊조렸다.

김주희 씨(가명)는 부족함없이 배웠다. 딸이라 안된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김 씨를 감쌌다. 의대 공부를 마치고, 부촌의 좋은 목에 개인병원을 차렸다.

김주희 씨의 아버지는 늘 강했다. 학창 시절 레슬링 선수였고, 대학 시절엔 4.19 혁명의 투사였다. 사회에 나와선 금융과 교육에 투신해 가계를 책임졌고, 노년엔 4.19 유공자 모임, 웨이트 운동, 교회 새벽기도회 등으로 바쁘게 지냈다. 가족에겐 늘 흔들림없는 버팀목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김주희 씨의 품에 안겨 있다. 이따금 소리나는 곳에 눈을 맞출 뿐, 앙상한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다. 침상 곁에는 기저귀 더미와 미음 그릇이 놓였다. 사람이 붙어 시시각각 자세를 바꾸고 이부자리를 챙기지 않으면 안된다. 욕창과 저체온증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김 씨 자신도 암의 병마에서 벗어난지 오래지 않았다. 남들은 부친을 요양시설에 보내고 제 몸부터 챙기라고 권한다. 그때마다 김 씨는 억세게 고개를 젓는다. 이유를 물으면 자신이 태어났던 날의 일을 말한다.

2012년 치매 판정을 받은 뒤 기억은 잃었지만 활동량 만큼은 왕성했던 아버지였다. 지난해 9월 어느 날, 아버지는 균형을 못잡지 못하고 갈 지(之)자 걸음을 걸었다. 응급차로 실려간 중앙보훈병원에서 주치의는 뇌 경막 아래 피가 고였다고 말했다. 수술이 시급한 상태였다. 진단명은 외상성 경막하 출혈, 즉 넘어지며 받은 충격으로 뇌 혈관에 출혈이 생겼다는 설명이었다. 이전부터 간병인을 뿌리치다 넘어지거나 시선을 벗어난 찰나에 시퍼런 멍이 들어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전신불수의 몸이 됐다.

가족들은 치료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뇌졸중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뇌출혈 발병 이전에 치매 치료를 받으며 확인된 것이었지만, 정신이 성치 못했던 아버지는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아버지를 집에 들이고서야 김 씨는 아버지 명의로 계약된 2건의 삼성생명 보험이 생각났다. 매월 십수 만 원 돈이 나갔지만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보험금을 받은 일이 없었다. 보험 증권에는 재해로 인한 장해 판정을 받을 경우, 10년 간 매월 장해연금 225만 원을 지급하고(무배당퍼펙트교통상해보험), 뇌졸중 진단을 받을 시엔 진단급여금 및 연금을 5년간 총 500만 원 확정 지급(무배당파워라이프보험)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보험금은 단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왜곡과 누락...믿을 수 없는 보험사 자문의(醫) 소견서

보험사가 보험금을 부지급한 근거는 두 장짜리 의료자문 소견서가 전부였다. OO의료분석원 명의로 된 소견서에는 작성자가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외과 자문의'라고만 적혀 있을 뿐 의사의 이름은 없었다. 보훈병원 주치의가 내린 진단과 달리, 전신 기능 저하의 주 원인이 외상성 경막하 혈종이 아닌 고령과 치매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MRI 판독 결과, 경막 아래 있는 핏덩이가 모두 흡수된 상태이고 이로 인한 뇌손상 정도(기여도)는 20% 이하로 경미하다는 이유였다. 앞서 주치의가 판단했던 기여도는 50%였다.

뇌졸중에 대해서도 자문의의 판단은 주치의와 달랐다. 고대 안암병원 소속 익명의 자문의는 MRI 상 만성 미세혈관병증에 의한 출혈 흔적만 확인된다며 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닌 '상세 불명의 뇌혈관 질환'이라고 판단했다. 삼성생명 무배당파워라이프보험은 국제질병 분류번호상 I61~I66번을 받았을 때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자문의가 내린 진단의 분류번호는 I67, 증상은 뇌졸중과 유사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험금 지급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김주희 씨가 받은 삼성생명 보험금 부지급 안내서

김주희 씨는 20년 경력의 산부인과 전문의다. 한눈에 봐도 환자를 보지 않은 자문의가 내릴 수 없는 판단이었다. 보험사로부터 의료자문에 사용된 검사자료 일체를 받아냈다. 수개월 문서더미를 뒤져 알아낸 것은 이 소견서 자체가 엉터리였다는 것이었다고 김 씨는 말했다.

삼성생명 측 자문의가 외상성 경막하 출혈의 기여도를 20%라고 판단한 근거는 2017년 11월 중앙보훈병원에서 촬영한 MRI의 판독결과지다. 김 씨가 확인한 MRI의 판독결과지에는 '경막하 혈종이 남아있고, 그 이외에는 특이한 변화가 없다'는 영상의학과 전문의 소견이 적혀있다. 혈종이 모두 흡수된 상태라는 보험사 자문의 소견과는 정반대다.

상세 불명의 뇌혈관 질환이라는 소견을 낸 2012년 7월 서울아산병원 MRI 판독결과지도 마찬가지다. 판독결과지에는 '미세 혈관 출혈이 있다'는 내용과 함께 '뇌경색 흔적이 있다'는 판독결과도 함께 적시돼 있다. 뇌경색의 분류번호는 I63로 보험금 지급 대상에 해당한다. 보험금 분쟁이 벌어진 이후에 찾아간 서울아산병원 의사도 분류번호 I63, 뇌경색 진단을 내렸다. 김 씨는 판독결과지에 있는 2가지 내용이 있는데 한쪽만 소견서에 반영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보험사에 유리하게 작성하겠다는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주희 씨 아버지에 대한 2012년 7월 서울아산병원 MRI 판독결과지

소견서 분석에만 수개월이 들어갔지만 보험금을 제대로 지급 받는 일은 또 다른 일이었다. 담당 삼성생명서비스 손해사정사는 더 이상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다시 보험금을 청구해 새 담당자를 배정받으라고 말했다.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검토하겠다는 답변만 반복할 뿐 4개월이 넘도록 무소식이다.

주치의의 정상적인 진단서가 있는데 다시 병을 입증하라는 보험사, 금융당국의 행태에 대해 김 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전문의료인인 자신조차 이렇게 어려운데, 일반인은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해결은 어렵고, 시간은 흐른다. 오늘 내일하는 아버지를 보내고 나면 이 모두가 부질없게 된다.

뉴스타파는 삼성생명 측에 의료자문 소견서에 대한 검증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또 자문의 소견서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소비자 피해를 개선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질의했다. 하지만 삼성생명 측은 일체의 답변을 거부했다. 답변을 거부한 사유를 재차 물었지만 끝내 답은 오지 않았다.

약관을 지켜도 '깜깜이' 소견서 한 장이면 끝

오병만 씨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지난 2016년 7월, 잦아들었던 심장 질환이 다시 도졌다. 출근을 앞두고 샤워를 하다 강한 흉통을 느꼈다. '차라리 죽여달라'는 호소가 나오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집에서 5분 거리인 군산의료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인근 원광대병원으로 후송됐다. 원광대병원 주치의가 내린 확정진단명은 급성 심근경색, 관동맥이 막혀 심장근육에 손상을 입히는 병으로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오 씨는 15년 전 삼성화재 무배당삼성슈퍼보험에 가입했다. 보험료가 매월 12만 원이 넘었지만 보장범위가 넓다는 말에 계약했다. 지인인 보험설계사의 성화에 급성 심근경색 특약도 가입했다. 이 특약에는 급성 심근경색 진단시 2,000만 원을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확정 진단 이후 오 씨는 보험금 청구했다. 삼성화재가 안내한 청구 절차는 까다로웠다. 대학병원 전문의의 소견서는 물론 초음파, 심근효소, 심장내 조영술, 심전도 등 검사결과지가 각각 필요했다. 오 씨는 서너 번 병원을 오가면서 서류를 꼼꼼히 챙겼다.

약관대로 서류만 잘 준비하면 보험금이 나올거라 믿었다. 하지만 삼성화재 자회사 소속 손해사정사의 말은 달랐다. 별도의 의료자문을 받을 테니 동의서에 서명해달라고 했다. 오 씨는 이미 대학병원의 확정 진단을 받았는데 또 다른 의사의 자문을 구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손해사정사는 위임 동의없이는 보험금 지급절차가 진행될 수 없다고 말했다. 어느 병원, 어느 의사에게 자문을 받게 되는지 물었지만 손해사정사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동의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화재는 오 씨에게 부지급을 통보했다. 또 다시 보험사의 자문의가 문제였다. 손해사정사는 부지급의 근거로 두 장짜리 익명의 의료자문 소견서를 내밀었다. 오 씨의 병이 심근경색이 아닌 협심증에 해당한다는 설명이 나와 있었다. '이대목동병원 심장내과 자문의'라는 직함만 있을 뿐 작성한 의사의 서명도, 병원의 직인도 없는 소견서였다. 손해사정사는 민원이나 소송을 제기해도 기존 판례와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 결정 상 보험금을 받는 것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소견서를 작성한 자문의가 오 씨의 병을 협심증으로 본 이유는 심근효소 수치였다. 심근경색 진단에 필요한 '트로포닌' 등 심근효소가 일부 증가하긴 했지만, 심근경색을 진단할만큼  증가하진 않았다는 이유였다. 취재진의 의뢰로 소견서를 검토한 정형준 원진녹색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위원장)은 심근경색과 협심증의 경계가 무 자르듯 나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주치의가 심근경색에 준해 치료를 했다면 심근경색으로 인정하는 것이 의료계의 상식이라고 말했다. 오 씨는 원광대학병원 주치의에게도 보험사의 소견서를 보여줬지만 급성 심근경색이라는 진단명은 그대로 유지됐다.

오 씨는 민원을 넣었다. 금감원, 권익위, 청와대 민원실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로 넣어도 회신을 보낸 건 금감원이었다. 답변은 한결 같았다. 제3의 의료기관을 통해 자문을 받고 당사자 간 원만하게 합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소견서를 왜 공공기관에서 인정하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금감원 담당자는 '금감원은 문서 진위를 판단하는 수사기관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오 씨는 손해사정사를 선임해 삼성화재와의 협상했다. 어느 병원, 어느 의사로부터 자문을 받을 지가 관건이었다. 삼성화재는 서울아산병원을 제안해 왔다. 단, 오 씨가 직접 내방하는 것은 불가하고 검사결과지를 보내 자문을 구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응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또 다른 '깜깜이' 소견서를 받게 될 것이 뻔하다고 오 씨는 생각했다.

▲오병만 씨가 받은 제3의료기관 선정 관련 삼성화재의 답변서

오 씨는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다른 대학병원을 제안했다. 손해사정사와 동행해 공정한 의학적 판단을 받자는 취지였다. 심근경색이든 협심증이든 자신의 신체 상태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받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삼성화재는 거절했다. 사전 협의가 되지 않은 병원에 자문을 요청할 수 없다는 취지의 답변서를 보내왔다.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해 12월 '의료자문 소견서만으로 보험금을 부지급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의 금감원 금융소비자 권익제고 자문위원회 권고가 나왔다는 뉴스를 봤다. 오 씨는 다시 민원을 넣었다.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삼성화재 측은 이에 대해 전체 보험가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진단 사실을 객관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의료자문이 보험금 지급에 중요한 요소일 경우에는 의료자문에 동의하지 않는 가입자에 대해 보험금 지급을 지연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제3의 의료기관에 대한 보험가입자와의 협상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계약자로 하여금 병원을 선정하게끔 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험사는 왜 특정병원의 의료자문만 고집할까

보험사의 의료자문 수는 매년 늘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2014년 5만여 건이었던 의료자문 건수는 지난해 9만여 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이와 함께 의료자문 관련 분쟁과 민원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1월 소비자원 발표에 의하면, 소비자원에 접수된 보험금 지급 관련 사건 중 20% 이상은 의료자문 관련 분쟁인 것으로 나타났다.

금감원은 지난해 5월부터 보험사에 의료자문 소견서를 제공한 의료인의 소속 병원과 진료과, 자문 횟수를 홈페이지에 공시하고 있다. 뉴스타파가 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전체 보험사가 의료자문을 구한 병원의 수는 총 170개로 나타났다. 한 보험사가 의료자문을 받은 병원의 수는 평균 42개였다. 전국에 있는 종합병원의 수는 347개다.

김주희 씨 사건에서 삼성생명 측 자문의는 고대안암병원 신경외과 소속이다.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고대안암병원 신경과는 삼성생명이 신경과 관련 자문을 구할 때 가장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2017년 한해 신경과 관련 자문 280건 가운데 절반 이상(154회, 55%)이 이곳에 집중됐다.

오병만 씨 사건에서 삼성화재에 소견서를 써 준 의사는 이대목동병원 소속이다. 오 씨와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제안한 제3의 의료기관은 서울아산병원이다. 이 두 병원은 삼성화재가 지난해 내과 계통 질환의 의료자문을 받았던 6개 병원에 속해 있다. 오 씨가 제안한 전북대학병원에서는 한 차례도 의료자문을 받지 않았다.

의료자문 건당 비용은 30만 원에서 100만 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험사가 의료자문비로 지출한 금액은 155억 원에 이른다. 정형준 인의협 정책위원장은 보험사를 위해 일하고 ‘용돈벌이’를 하는 행태에 대해 의료계의 자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학적 다툼은 어떤 경우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분명한 질환이라도 2차, 3차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진단을 내려야 하는지 토론은 할 수 있지만 치료를 두고 논쟁은 할 수 없습니다. 의학적인 토론 거리를 가지고 주치의에 문제 제기해서 보험금을 부지급하는 것은 비열한 행태입니다. 의료인 역시 혜택을 받고 보험사가 약관을 가지고 이런 일을 저지르는 데 협조한다면 의료 윤리에 위배된 행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환자가 직접 오지도 않았는데 영리업체나 손해사정인을 통해서 온 자료만 가지고 소견 밝히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상당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정형준 원진녹색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위원장)

 

취재 : 오대양
촬영 : 신영철 최형석
편집 : 박서영
CG : 정동우
디자인 : 하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