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형제 신부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많습니다. 그 수식어마다 굴곡진 우리 역사가 오롯하게 담겨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공권력 행사에 맞서면서 “깡패 신부”가 됐고, 통일을 말하며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넘어 귀환해 “빨갱이 신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에 희생당한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에게는 “인혁당 당수 신부”이기도 합니다.

▲ 형제 신부 문정현과 문규현, 그리고 두 형제의 어머니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문정현은 중학생 시절부터 사제를 꿈꿉니다. 그리고 27살이던 1966년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범한 사제였죠 그러니까 신학교에서 수련 받은 대로 그야말로 원칙대로 사제생활을 하려고 마음을 가졌는데 그때는 정치적인,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성당 내에 신자들에게 어려움이 있다던가 변고에 고생하는 이라던가 가난에 쪼들려 사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기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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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년 후인 1976년 동생 문규현도 사제의 길을 걷습니다. 사제 서품식이 끝난 다음 날 동생 문규현은 서울 구치소에 수감 중인 형을 면회했습니다. 당시 형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3.1 구국선언에 참여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수감 중이었습니다.

구치소 면회실에서 형은 동생에게 축복을 청하고 동생은 형에게 ‘첫 강복’을 하게 됩니다. 1976년 5월 3일, 이날 동생 문규현은 형님의 십자가에 동행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두 형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제가 사제이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 고비마다 외롭고 힘들어하는 형님의 모습을 지켜봤었죠. 그때마다 형님은 저에게 ‘이래도 같이 갈 거야?’ 하고 반문을 했죠. 서품을 받고 첫 사제로서, 동료 사제로서 또 후배로서 그 고통스러운 감옥에 찾아뵀을 때도 형님은 역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갈 거야?"

문규현 신부

그야말로 감격적인 면회였죠. 왜냐하면 동생이 서품을 받는데 같은 길에 들어서는 동생의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떻겠어요. 참 마음 아팠죠. 동생의 서품식은 내가 꼭 참석해야 하는데 내가 참석을 못 하는구나. 그런데 그 서품을 받고 다음 날 서울 구치소까지 면회를 왔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만나자마자 무릎을 꿇고 강복을 청했죠. 축복을 청한 거죠. 동생으로부터 감옥에서 첫 축복을 받았고.

문정현 신부

축복 후에 제가 드린 말씀이 ‘그게 고통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외로운 길일지언정 당신이 있고 내가 있으니 함께 갑니다.’

문규현 신부

이때 어머니는 사제가 된 두 아들에게 ‘김대건 신부’가 되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나의 면회를 오실 텐데, 어머니가 나를 보고 그냥 슬퍼하고 심하면 까무러지고 그런 것을 계속 ‘아이고 어머니가 오시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을 했는데 의외로 어머니가 그냥 내 허리를 감고 ‘우리 아들 김대건 신부님 돼야 해’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을 감옥에 갇혀 있는 아들과 첫 만남에 우리 아들은 김대건 신부님이 돼야 해 순교하라는 얘기죠. 순교하라는 얘기죠.

문정현 신부
▲문정현 문규현은 70년대부터 현재까지 길 위의 현장에 있다.

지금까지 두 형제는 어머니 말씀대로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향하고자 했습니다. 박정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부터 제주 강정마을까지 언제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두 형제에게 성당 밖 거리는 일터였고 삶터였습니다.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지난해부터 한국 사회의 주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인물 다큐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불쌈군 백기완’ 편을 방송한 데 이어, 이번에는 문정현, 문규현 형제 신부의 삶을 취재했습니다.

취재작가: 오승아
촬영: 정용운
글 구성: 정영미
연출: 박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