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 사회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정윤각 공인노무사(금융노조 NH농협지부 법규실장) 

   
▲ 정윤각 공인노무사(금융노조 NH농협지부 법규실장)

어느덧 또다시 추운 겨울이 돌아왔다. 지난해 이맘때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촛불이 타오르고 얼마 뒤에는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역사를 이뤘다. 집권 후 최고 지지율을 기반으로 기존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외침에 비해 우리의 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려로, 실망으로 변해 가고 있다. 정부 초기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바로 지지율 때문이다. 국민 대다수 지지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기에 그만큼 수월하게 새로운 개혁과제를 과감하게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대선보다 노동계 지지를 많이 받고 창출된 정부, 친노동 정부라고 일컫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주요 공약을 내세운 정부에 이 땅 대다수 국민인 노동자들이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것과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 특히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해소, 최저임금 인상 등 정부 정책에 힘을 실어 줬으나 노동시간단축 논의와 비정규직 차별해소에서 갈팡질팡하는 노동정책 탓에 설왕설래할 수밖에 없다.

청년들의 경우 절망세대로 불리며 취업문조차 두드리기 힘들고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다. 그마저도 없는 청년들은 저임금과 고용보장이 안 되는 알바나 계약직으로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제는 자본과 노동의 싸움이 아니라 노동자 간의 싸움이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자본은 그저 지켜볼 뿐이다. 출신·외모·학연 등 스펙이 가장 큰 능력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차별은 시작되고 열정과 노력은 무시되고 좌절을 낳는다.

알바나 계약직·실업자의 경우에도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가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노조가 얼마나 큰 힘이 돼 줄 수 있겠는가. 노조 본연의 역할인 사용자와의 교섭을 통한 노동조건 개선은 이들에게 먼 얘기다. 고용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용자에게 교섭을 요구해 봐야 노동조건이 개선되기 전에 계약만료를 통한 근로계약 종료가 남을 뿐이다.

정부는 ‘노동회의소’라는 기구를 제도적으로 만들어 미조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향상을 위한 창구로 만들어 노조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끔 하겠다고 한다. 노조 조직률이 저조한 우리나라에서 국제노동기구(ILO) 권고와 현실적으로 열악한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라는 순수한 의도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법체계 내에서 헌법상 노동 3권이 최대한 보장될 수 있는 방안을 먼저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조는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조직해 자주적으로 운영될 때 비로소 당당한 조직으로서 자본과 싸울 수 있다. 단순히 제도적으로 조직화를 강제하는 방식은 위험하며 스스로 자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현재의 헌법상 노동 3권이 진정으로 보장될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만들어 주고 관리·감독해야 한다. 그동안 자본은 노조를 만드는 것조차 막았으며 정부는 이를 방관해 단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기에 노조를 만들고 가입하는 자유를 막는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강력하게 제어해야 한다. 그리고 노조활동을 보장해 줘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적으로 용인된 노조는 자본의 압박을 방어하고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이지, 자본을 타도하고자 하는 조직이 아니다. 이제는 노조를 보는 국민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정부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저조한 노조 조직률을 높이려는 시도보다는 초등학교부터 노동인권 교육을 통해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지 모래성을 쌓듯이 임시방편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은 이제 제발 안 했으면 한다. 노동자라면 당연히 노조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을 익숙하게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외환위기 이후 파견·아웃소싱·용역 등 간접고용 악순환은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의 손에 칼자루를 쥐어 준 결과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소득 정규직 위주로 조직된 노조는 미조직 노동자와 계약직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에 대해서는 조합원을 위한다는 구실과 명분으로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고 외면해 온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성 노조가 적폐라는 소리를 듣는 이 시점에서 노조의 사회적 연대와 자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계는 정부의 친노동 정책에는 아낌없는 박수와 지원을 보내 줘야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견제와 감시를 통해 잃어버린 노동기본권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투쟁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경쟁을 통한 승자독식 자본의 논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서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한편으론 차별을 정당화하며 노동자 서로 간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돼 버린 지 오래이다. 새 정부에 그 역할을 맡겼지만 공공부문 외의 민간사업까지 전파되고 모두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이 나오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사업장의 현실과 분위기는 더 심각하고 차갑기만 하다. 우리 노동자들이 손잡지 않는다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는 노동자가 만들어 가야 한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을 외면하는데 어찌 존중받기를 바라는가.

정윤각  labor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