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이슈로 뜨겁다. 동성애와 동성혼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 5월 동성애자 군인들은 군형법 추행죄로 대거 잡혀갔고, 이번 10월 제주퀴어문화축제와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지자체로부터 미풍양속이란 이유로 장소가 불허됐다. 성 정체성과 성적지향을 포함해 다양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차별금지법은 10년째 캐비닛 안에 잠겨있다. 성 소수자와 전혀 친근해 보이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성 소수자’로 살아남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한민국 최초의 트랜스젠더 변호사이자, 민변 6개월 차인 새내기 박한희 변호사를 민변 사무실에서 만났다. 당차게 대화를 이어가지만, 수줍은 웃음이 돋보이는 ‘트랜스젠더 여성’ 박한희 변호사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최은빈 : 국내에서는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로서, 혹시 남다른 고충이나 보람이 있으신가요.
박한희 :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하리수씨 같은 연예인이나, 유흥업, 예체능 등이 대표가 됐어요. 변호사라는 전문직 또는 사무직에서는 대표가 안 됐고요. 그런데 제 기사는 그게 화제가 됐던 것 같아요. 페북에 알려지면서 응원 메시지를 많이 받았어요. 한 친구는 기사를 보고 트랜스젠더도 변호사가 할 수 있다고 부모님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고 하더라고요. 퀴어문화축제에 갔을 때도 젊은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와서 기사를 보고 감동 받아서 주변에 얘기하고 다닌다고 하고요. 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한 선택이 어쨌든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사실 제가 한 선택도 나이가 많은 분들로부터 롤 모델을 받았던 거잖아요. “저도 하나의 롤 모델이 될 수 있겠구나”를 느끼면서 보람이 된 것 같아요.
고충은 사실 이게 최초이자 지금은 혼자잖아요. 그래서 “저로서 과잉대표 되지 않을까?” 그런 부담이 있는 거 같아요. 이거는 꼭 트랜스젠더 변호사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강의를 나가도 트랜스젠더를 실제를 본 사람이라고 질문을 하면 거의 손 드는 사람이 없어요. 한두 명 정도. 그 사람들은 살면서 제가 실제로 눈앞에 처음 보는 트랜스젠더인거에요.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지만, 나라는 존재 행동 하나하나가 트랜스젠더 전체의 문제로 해석되지 않겠냐는 조심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최새얀 : 성 소수자로서 사회에서 약자성을 깨닫고, 이것을 극복한 과정이 궁금해요.
박한희 : 저도 못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었고, 무기력한 것도 많았어요. 남들과 다르다고 정체화한 건 중학생 때 13~14살 때였는데, 저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한 28살부터였나 싶어요.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존재고, 이렇게밖에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게 길었어요. 그에 따라 고충도 많았죠. 회사도 다녔지만, 우울증을 겪기도 하고 중간에 다 그만두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바뀐 계기는 “더 이상 이렇게는 살기는 싫다”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제가 커밍아웃을 결심한 건 29~30살 넘어가는 로스쿨 겨울방학이었는데, “내가 과연 이렇게 살아서 의미가 있을까? 계속 숨기고, 감추고, 피해 다녀야 하나?”라는 억울함이 있었죠. 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내가 개인적으로 잘못한 건 사실상 없는데 왜 이래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렇게 되는 데는 나만의 결정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도움들이 있었어요. 두 명 정도가 있는데, 한 명은 저보다 6살 많은 트랜스젠더 언니에요. 그 언니는 남자로 회사에 입사해서, 회사에서 커밍아웃했어요. 휴직하고 수술을 받고 성별정정을 해서 여자로 복직했고요. 지금도 그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어요. 그 언니를 지금까지 안 건 벌써 10년 정도 되는데, 그분을 알면서 저도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 안에서 커밍아웃하는 것과 회사 안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건 난이도가 천지 차이거든요. 자기가 다니는 직장에서 해고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을 보면서 “나도 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해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하지 않겠구나”를 느꼈어요.
다른 하나는, 로스쿨에서 커밍아웃했을 때, 법조계라는 보수적인 공간에서 “과연 나 같은 성 소수자가 받아들여질까”라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때 상담을 했던 분이 희망법의 한가람 변호사님이었어요. 저는 희망법에 상담 메일을 보냈고, 한가람 변호사님이 저한테 사무실로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그때 변호사님은 자신도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주변 동성애자 친구들과 후배들도 많이 있지만, 다 커밍아웃할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있다고 얘기해줬어요. 오히려 운동하면서 바꿔나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해줬죠. 그때의 대화가 지금 제가 희망법에서 하는 일이기도 해요. 성 소수자를 위해 일을 하는 계기가 되었죠.
류태광 : 대한민국에서 MTF 트랜스젠더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여쭙고 싶어요.
박한희 :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게, MTF 트랜스젠더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운동적으로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말을 요즘 쓰고 있어요. MTF이라는 말 자체가 기정성별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 쓰는 게 좋겠다는 얘기도 많았어요.
그리고 사실 차별은 되게 개별적이에요. 똑같은 트랜스젠더라고 해도, 차별은 개개인에 따라 상황이 어떤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트랜지션(성별 이행)을 얼마나 했는지, 수술은 했는지, 성별정정을 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가 이런 차별을 겪는다’를 나를 기준으로 일반화할 수 없어요. 일단 제 기준으로는 저는 수술을 하지 않았고, 할 생각이 없는 비수술 트랜스젠더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 한국체계 내에서는 법성별을 바꿀 수 없는 상태고, 법적 성별은 남성이고 주민등록번호도 1번이에요. 지금으로서는 가장 크게 다가오는 건 신분증적 차별인 것 같아요. 신분증을 내세울 때, 내가 어디에 뭘 적어야 할 때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은행을 간다든지, 병원을 간다든지, 인터넷에 무엇을 가입할 때도 남성이라고 적어야 가입이 되니까요. 주민등록증은 항상 갖고 다녀야 뭘 할 수 있잖아요. 번호도 항상 입력해야 하고요.
그렇게 한다는 게 법적인 차별에서 큰 것 같고요. 특히 저는 다행히 하는 일 자체가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이게 취업이랑 연관이 되거든요. 취업할 때 주민등록번호와 성별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취업이 많이 안 돼요. 자기가 여성적으로 보이지만 법정 성별이 남성이니까 취업이 안 되는 거예요. 면접에서 떨어지고, “당신은 왜 주민등록번호가 이래요?” 라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정규직 이런 곳은 사실상 취업하기가 아주 어렵고요, 서류에서부터 떨어지거나 면접에서 떨어지거나 실제로 붙은 다음에 알게 되어서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대부분 사람이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으로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고용이 불안정해요. 또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판단하는 게 성별인 것 같아요. 가령 “남자야?, 여자야?”, “재 그거 아니야 그거?” 등. 제가 생각하기에 한 3~4개월에 한 번씩 겪는 것 같아요. 되게 비일비재한 것 같아요.
류태광 : 방금도 언급됐지만, ‘성 정체성’은 외관상 드러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박탈당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자연히 빈곤에 더욱 취약할 것 같고요. 트랜스젠더와 빈곤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한희 : 실제로 2014년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성 소수자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거든요, 전체적인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실제 트랜스젠더 집단의 평균소득이 가장 낮게 나왔어요. 일본에서도 성소수자 직장 환경 실태 조사를 하는데 항상 트랜스젠더 집단이 가장 수입이 낮고 이직률이 높고 근속기간이 짧은 것으로 나와요.
이게 악순환인데 우리나라는 수술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돈을 벌려면 취업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했으니까 성별정정이 안돼요. 그래서 취업을 못 해요. 취업을 못 하니까 돈이 없어서 수술을 못 해요. 그러니까 취업을 못 해요. 이게 계속 악순환이 되는 거예요. 20대의 10년을 거의 돈 모으는 데에 쓰게 되죠. 비정규직이나 공장 일 하거나 알바하면서 모아야 하니까 5~6년, 길게는 10년, 이렇게 걸려서 그 일 하나만 하는 경우도 많고요.
트랜스젠더와 빈곤은 되게 복합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고용상 차별을 금지하는 것도 당연하고, 불필요하게 이력서에서 성별 표시를 안 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굳이 사람이 살면서 법적으로 성별이 요구되는 직장도 있겠지만 그게 꼭 필요하지 않은 직장도 있잖아요. 성별정정 요건을 완화하는 것도 필요하죠.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빈곤이나 취업, 노동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민경원 :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요건과 관련해 법률이든지 판례든지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지금 현재로선. 우리나라보다 더 엄격한 요건으로 허가되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그보다 엄격하면 허가를 안 해주는 나라고요. 대법원의 경우 성별정정은 위에서 허가해주는 거고, 허가해주기 위해서는 판단을 해야 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판단 기준을 굉장히 엄격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가장 큰 틀은 이게 권리라는 걸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법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권리, 거기서 도출되는 게 내가 나의 성별을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 다른 사람과 차이 없이 내가 원하는 성별을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요. 세계 인권 선언에서도 그렇고 우리 헌법에서도 반영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걸 권리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면 의문이 되는 거죠. “그러면 이게 내 권리인데, 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 이것도 수술하고, 저것도 수술하고, 이것도 고쳐야 해? 이게 정말 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 정당한 요건이야?“
결국, 프레임을 먼저 바꾸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애썼으니까 위에서 허가해주는 게 아니라, ‘너희 권리를 제한할 건데 이런 거로 제한하는 게 정당화될까‘라고 고민해야 하죠. 그래서 국제적인 추세는 최근에 아르헨티나 덴마크 몰타 등 6개 나라는 아무 조건이 없어요. 일종의 신고에요. 내가 ’성별을 바꿉니다‘라고 신고를 하면 ’바꿔줄게‘ 이런 식이에요. 가령 덴마크 같은 경우는 성별을 바꾼다고 하면 6개월 정도 숙련 기간을 둬요. 아일랜드는 이런 숙련 기간도 없어요. 아마 동성혼이 점차 늘어나는 것처럼 자기 결정권에 기반을 둔 성별정정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자기가 결정해서 하는 성별정정. 그쪽으로 방향이 바뀌지 않을까. 우리도 언젠가는 한번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민경원 : 외과 수술 자체가 되게 위험하고 평균 수명도 확 줄어든다고 들었는데, 그런 걸 이렇게 법이 요구하는 것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박한희 : 수술이 되게 위험하진 않아요. 수명이 확 떨어지지도 않고요. 트랜스젠더 오해 중의 하나가 ‘오래 못 산다’가 있는데, 모든 외과수술이 당연히 위험성이 있고 신체적 부담도 있지만 죽는 수술은 아니잖아요. 그것과 비슷하죠. 그렇지만 국가가 그런 수술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돼요. 우리 헌법은 신체의 자유와 운전성을 보장하는데 내 신체를 국가가 훼손하겠다는 거죠. 네가 너처럼 살기 위해서는 국가가 너한테 수술을 강제해서 너의 신체를 훼손하겠다는 거니까요. 사실상 국가가 외과수술을 강요하는 거예요. 이게 생식기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옛날에 우생학적 절차처럼 국가가 불임수술을 강제하는 것과 같죠. 실제로 작년에 스웨덴 판결에서 트랜스젠더 수술 여건을 없애는 동시에 그동안 수술을 받았던 트랜스젠더에게 국가 배상을 해줬어요.
김민주 : 비교법적으로, 비교사회학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가 성별정정과 관련해 특히 모자란 점이 어떤 지점이라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우리나라가 가장 특히 모자란 점은 이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요건인데, 우리나라는 미성년자가 성별정정을 못해요. 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해요. 사실 이건 법적으로도 말이 안 돼요. 성인의 법률 행위가 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행위죠. 심지어 법원에 따라서 이건 판사 재량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곳은 10년 전에 이혼한 아버지의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해요. 다행히 최근 몇몇 법원들은 사유서를 제출하면 대체는 해줘요. 사람에 따라서 수술을 위한 돈은 사실 모으면 돼요. 그러나 부모님의 설득은 자기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부모님이 종교적인 이유로 절대로 허가를 안 해주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오히려 처음부터 포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 요건 자체가 있는 건 정말 이상해요. 이건 정말 한국만 있거든요. 일본도 없는데 이게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최은빈 :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위해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하신건가요?
박한희 : 사실 변호사는 성 소수자 인권운동을 위해서 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법조인이 된 건 좀 두루뭉술해요. 들으면 이상할 수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회사 다니기가 싫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삼성엔지니어링 건설회사를 2년 다녔는데, 거기 규율이 되게 심하거든요. 항상 양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해요. 머리가 귀만 덮어도 선배가 지나가면서 “한희씨 머리 좀 잘라야겠는데? 미용실 좀 갔다 오지.” 이래요. 저는 그런 것들이 되게 싫었어요. 그래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로스쿨이나 의전을 생각했어요. 전문직을 가지면 좀 자유롭잖아요. 그러면서 나 같은 트랜스젠더, 성 소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 뭘까, 전문직이면서 동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은 뭘까를 고민하기도 했어요. 의사는 정신과 의사를 생각했고, 변호사는 법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의전과 로스쿨을 놓고 비교를 했는데, 의대를 다니는 친구가 의대는 규율이 빡세다 하더라고요. 의대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머리도 못 기르고, 슬리퍼도 금지하고, 반바지도 못 입게 하고요. 그래서 의대는 가면 안 되겠다, 회사랑 다를 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로스쿨을 가자고 선택했어요. 당시에는 운동적인 차원까지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단지 내가 변호사를 직업으로 가지면, 사무실을 차렸을 때 어떤 형태로든 성 소수자 의뢰인에게 뭔가를 할 수 있겠다 정도였죠. 제가 이렇게 직접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던 것 같아요.
류태광 : 6개월은 짧으면 짧은 기간인데 혹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소송을 수행하셨다면 소송이 있을까요?
박한희 : 제가 처음 희망법에 들어와서 했던 게 기지국 수사에 대한 위헌 소송이에요. ‘통신비밀 보호법 제13조’ 또 ‘기지국 수사’라고, 소위 말하는 검찰이나 경찰이 사건 현장 인근에 일어난 모든 전화번호를 수집하는 수사가 있어요. 이게 희망법에서 2013년 첫 헌법소송을 했던 건데, 사실상 헌재에서 계속 묶어두고 있다가 이번에 공개변론을 열었어요. 제가 들어온 7월에요. 주심은 한가람 변호사님이었는데, 변호사님이 이거같이 하자고 해서 들어 간지 일주일 됐는데, 헌법 소원 변론 요지서를 써오라고 했어요. 정말… 변시할때도 그런 건 안 쓰거든요. (일동웃음) 헌법재판소 변론 요지서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는데, 써오라고 해서 써와서, 첨삭 받고 고치고 고쳐서, 어떻게 했어요. 성 소수자 인권은 저도 알고 있고 활동하면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건 정보 인권적인 내용이니까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7월이면 대통령을 탄핵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인데, 말로만 듣던, 그 대법정에 공개변론을 하러 간 거예요, 제가. 저는 아직 수습이니까 방청석에 앉아 있었지만, 어쨌든 2개월 만에 거기 간 거니까, 엄청 떨렸죠. 그래서 가족들한테 전화하니까 너 벌써 거기 가냐고 하더라고요. (일동웃음) 왜냐하면 헌법 소송은 안 하면 정말 안하거든요. 본인이 의도하지 않으면 안 하게 되니까요.
류태광 : 정치, 경제, 언론 등 산적한 적폐가 많기 때문에 성 소수자 인권은 ‘나중에’라는 주장도 일각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주장에 하시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박한희 : 성 소수자 인권이라는 게 마치 성 소수자만 챙기는 것 같지만, 어떤 인권이 하나의 인권으로 분리 돼서 떼놓고 단계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인권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차별도 사회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죠. 소수자 인권이 말하는 건 결국 차별이에요, 사회적인 차별. 사회적으로 누군가가 차별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 왜 나중이 있고 지금이 있죠? 오히려 그게 가장 큰 적폐가 아닌가. 권력적 차별이나 경제적 차별, 노동 차별 등이 다 복합해서 일어난 게 이전 정권의 문제였는데, 그 차별이라는 적폐를 무시한 상태에서 사회적 경제적인 개선을 이룰 수 있겠느냐 싶어요. 사실 그건 당연히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김민주 : 법조인으로서 성 소수자 인권 실현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박한희 : 성 소수자 운동 전체에서 얘기할 수 있는 건, 저번 제네바 UPR(Universal Periodic Review)에 가서 얘기한 건데, 일차적으로는 군형법 추행죄죠. 우리나라는 징집국가로써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고 그 군대 문화의 영향이 사회 전체에 미치고 있기 때문에 군형법 추행죄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징적인 사회적 조항이에요. 군형법이 지금은 처벌하고 있지만, 처벌을 안 한다고 해도 성 소수자는 언제든지 범죄자가 될 수 있고, 이등 시민이 될 수 있는 상징적인 조항이기 때문에 이거는 무조건 없애야 할 조항이에요.
두 번째로는 입법과제로써 얘기할 수 있는 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에요. 이건 벌써 10년째 얘기되고 있지만 아직도 제정이 안 되고 있어요. 성적 지향, 성 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은 기본 틀인 것 같아요. 누군가가 누군가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 약속받고, 동시에 누군가가 누군가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틀이 깔려야지, 그때부터 최소한 구체적인 제도적 보장으로 무엇이 필요할지를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평등이라는 틀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뽑자면, 과제로써 하고 싶은 건 교육. 교육부에서 만든 국가 수준의 성평등 성교육 표준안은 성 소수자 얘기가 전혀 없어요. 사실 우리는 교육부에서 만든 교육안에 대해 계속 폐지 운동을 하고 있어요. 표준안은 ‘동성애는 인권의 문제이므로 성교육에서 가르치지 않음’이라고 앞에 써놨어요. 동성애는 인권과 사회 이런 데서 가르치지 성교육에서 가르치지 않고 있죠. 교육현장에서 교육이 되어야지, 그 사람들이 나중에 더 자라서 어떤 의견을 실제로 낼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의견이 반영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김민주 :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십 년 째 공회전하고 있는데 이 제정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박한희 : 되게 복합적이겠죠. 사실 처음에 가로막은 건 재계와 교회의 반대였어요. 교회는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아니었죠. 오히려 재계의 반대가 최종적일 거라 생각해요. 비정규직 차별 금지나 학력 차별 금지 등 지금 나오는 블라인드 채용처럼 이런 걸 하면 저항감이 있으니까요.
정부랑 국회가 의지가 없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해요. 사실 필요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정부는 왜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차별이라는 게 지금 되게 복잡한 문제라서요. 사회적으로 우리가 평등이 아직 확산이 안 됐을 수도 있어요.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명제는 동의하지만, 어떤 게 정말 차별받지 않는지에 대한 의식도 필요한 거니까요. 사실 그걸 끌어올려야 하는 정부는 사회적 논란, 사회적 합의라는 이유만으로 방치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고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동력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여성 노동, 장애, 이주, 성 소수자, 거의 모든 분야의 114개 단체가 연대하고 있어요. 전방위적으로 캠페인과 서명운동 등 여러 가지를 하고 있어요. 대중인식 개선과 차별이 뭔지에 대한 간담회도 하고, 정부 대상으로 법안을 만드는 것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공회전하는 이유는 상당히 복합적인 것 같아요.
류태광 : 얼마 전 지자체가 제주퀴어문화축제나 퀴어여성체육대회를 위한 장소를 불허한 사건이 있었는데, 성 소수자 차별은 아직도 가시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박한희 : 제주퀴어문화축제는 오늘이 집행정지기일이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그건 제가 직접 하지는 않았고요.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제가 기획단이에요. 제가 차별받은 당사자에요. (일동 웃음) 불허 통보를 받고 실제로 면담도 갔어요. 이건 지금 인권위 진정을 써서 내서 인권위 진정에 들어가 있는 상태고요. 얼마 전에 궐기대회도 했었는데, 그것도 항의하는 것이었죠.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퀴어여성체육대회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살면서 너무나 편하게 가는 체육대회가 성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불허를 당한 것은 일상에서 차별을 잘 보여줬던 것 같아요. 체육대회는 학교 운동회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 열리거든요. 이런 것들을 좀 더 의미를 살리고 얘기하면 우리가 지금 어떤 권리를 빼앗기고 있는 건지 얘기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일을 당하니까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이 없어서 내가 무슨 차별을 받는지 확 깨닫게 되었다는 거예요. 넓은 권리에서 ‘건강권을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주거권을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잘 와 닿지 않는데, ‘내가 공을 차고 싶은데 못 차게 한다.’라고 하면 피부로 느껴지니까, 좀 더 얘기할 수 있고 의미화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도 있는 것 같고요.
최새얀 : 로스쿨에서도 LGBTQ를 삶으로 사는 법조인들도 많을 텐데, 미리 경험한 입장에서 예비 퀴어 법조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한희 : 할 말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로스쿨이 생기면서, 로스쿨이 LGBT퀴어들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주변에서 실제로 많이 가거든요. 일종의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는 거죠. 전문직이라는 직업적 안정성, 사무직을 가졌을 때 비해서 전문직을 가졌을 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에 로스쿨을 많이 오는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도 이 법조에서 끝날 것으로 생각했어요. 로스쿨을 들어왔지만 들어와서 커밍아웃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안 했었거든요. 로스쿨 들어온 이유는 그냥 커밍아웃 안 하고, 남자 변호사로 살면서 성 소수자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들어왔어요. 실제로 저 주변에 그냥 법조인이 아닌 커뮤니티의 트랜스젠더분들도 “너 커밍아웃하면 끝난다, 너 법조계에서 대체 어떻게 커밍아웃할 것이냐, 말이 되냐“라고 했는데, 끝나진 않더라고요. 당연히 그게 항상 좋은 결과로 나온다고 볼 순 없지만, 그냥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게이 같은 경우에는 게이 법조회라고 있어요. 퍽퍽한 법조계 현실에서 게이다움을 잃지 말기 위한 게이 법조회가 있거든요. 한 오십 몇 명 있어요. 혹시 게이분이면, 거기를 가입해도 좋고. LGBT 법조회도 만들고 싶은데 아직 못 만들고 있지만, 아마 점점 만들어질 거예요. 현재 로스쿨생이나 현직 법조인을 대상으로 여름마다 ‘LGBTI 법률가대회’도 있어요. LGBTI 법률가들도 법조회의 형태로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고요. 어쨌든 본인이 항상 모든 걸 드러내고 살 순 없지만, 어떻게든 숨을 틀 수 있고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 그런 것들이 점점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최은빈 :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따로 있으셨나요? 질문지에 없어서 아쉬웠던 점, 말하고 싶었던 게 있으신가요?
박한희 : 저희 희망법은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고, (일동 웃음) 민변 회원분들 많이 후원해주세요.